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8~2022 일상수행법문

2020년 우안거입재_수행하는 마음을 일으킬려면 (20200801)

담마마-마까 2022. 5. 30. 09:00

https://youtu.be/pnVxzBWTqgY

* 2020년 우안거입재_수행하는 마음을 일으킬려면 (20200801)

 

「나는 죽고 싶지 않다는 것이 속박이다.」 라고 적어놓았습니다.

죽고 싶지 않죠? 죽고 싶은 사람 있어요? 그런데 이게 속박이라는데 어떻게 하나? 다른 사람 죽는 거 보면 '누구든지 태어났으면 죽게 돼있지' 하고 편하게 생각할 수 있는데, 자기 가족이나 더 나아가서 자기 자신이 지금 죽는다면 안 죽고 싶어 합니다. 이게 속박인데 어떻게 하나? 이게 있으면 깨달음에 이를 수가 없다는데...

언제쯤 이걸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언제 받아들일 수 있을 거 같습니까?

(수행자 대답 : 유신견이 떨어질 때)

유신견이 떨어진다 해가지고 이게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유신견은 한번 떨어지고 나면 완전히 다 떨어져버리면 좋은데, 예류과에 이르기 전에는 유신견이 완전히 떨어지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예류과에 이르기 훨씬 전이라도 「태어났으면 죽는다」는 사실은 받아들이는 상태에는 이릅니다.

 

수행해보면 어쩔 수 없이 일어났으면 사라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상태가 될 때가 있습니다. 그게 언제입니까?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을 계속 관찰하다 보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으로 분리 돼있다는 걸 분명하게 압니다. 그리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도 원인·결과로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압니다. 모든 것들이 원인과 결과로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래서 원인 없이 일어나는 것이 없고, 일어난 것이 결과 없이 없어지는 법이 없다는 걸 압니다.

 

그런 상태가 되고 명확하게 알 정도가 되면 수행에서 참 많은 고통도 당해보고, 참 많은 환각이나 환청들도 들렸을 거고, 또 자기 몸이 분리되는 경험도 해봤을 거고, 여러 가지들을 경험들을 해보게 됩니다.

사실은 이까지는 참 힘든 싸움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아주 간단한 건데, 몸과 마음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지만 동일하지 않다는 걸 분명하게 아는 것만 해나가면, 참 수월하게 어쨌든 어렵더라도 수월하게 넘어갈 수가 있는데, 이까지를 보통 사람들이 못견디기도 합니다.

 

그런 호흡도 내가 통제할 수 없고 아주 빠른 속도로 바뀌어나가고, 사물 일상적인 대상들도 아주 빠른 속도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이 보여집니다.

참 많은 훈련들과 수행과 숙련들을 거쳐야 이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면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생겨난 것은 반드시 사라진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면 자기 자신도 몸과 마음이 분리가 돼있는 상태인 걸 알기 때문에 마음은 이미 그걸 받아들입니다. 내가 태어났으면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걸.

 

그걸 「생멸지(生滅智)」라고 그럽니다. 태어났으면 죽음에 이른다는 것.

생멸지를 알려고 할 거 같으면 콘트롤 가능한 상태에까지 이르러야 됩니다. 모든 현상들이 아주 빠르게 변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보고, 그게 콘트롤이 가능한 상태에 이르러야 생멸지에 이르르지 그걸 볼 수 없는 상태면 생멸지에는 절대 이르를 수가 없습니다. 사실은 생멸지에만 딱 이르르면 "나는 죽고 싶지 않다"는 속박에서는 벗어나버립니다.

 

"죽는데 죽고 싶지 않다" 참 모순이 있습니다.

'좋고 싫음'은 여기서 출발합니다.

'내가 살아야 된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하는 것으로 인해서 좋고 싫음들이 바로 일어나게 됩니다. 실제로는 이 종이 몇장, 여섯 장 써놓은 거 이거 아무 필요없어요. 그냥 생멸지에 이르기만 하면 끝납니다. 좋고 싫음으로부터는 떠날 수가 있는데 참 안 되죠 잘. 그래도 우짜겠노? 열심히 지금 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런데 가장 나쁜 게 뭐냐면 수행을 하다보면 '수행하기 싫다'는 생각입니다.

'수행하기 싫다'는 생각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자기 견해와 다르면 뭔가 자꾸 밀어낼려고 하는 것들, 내 마음하고 탁 다르면 뭔가 자꾸 싫은 마음들이 일어나는 거라. 이런 상태가 되면 안 됩니다.

그대로 살아도 괜찮아요? 자기 자신에게 한번 반문해보십시요.

 

이대로 내가 살아도 괜찮은가?

이대로 생을 마친다면 나는 어떻게 되지?

죽을 때 편하게 죽음을 맞을 수 있을까?

 

안 두려워요? 사실은 「괴멸지(壞滅智)」라고 하는 것은 생멸지 다음에 오는 괴멸지라는 것은 사라지는 것만 보면 괴멸지가 일어납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괴멸지가 아니더라도 '내가 생의 마지막을 보장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만 강하게 일어나면 급해지게 됩니다. '어, 이대로 살아선 안되지' 뭔가 더 열심히 살아야 되고, 더 열심히 뭔가 수행해야 되고, 하는 마음들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자꾸 돌아봐야 됩니다. 사띠를 자꾸 놓친다든지 아니면 게을러진다든지 수행하기 싫다든지 할 거 같으면 '나 이대로 괜찮아?' 하고 돌아보도록 해야 됩니다.

 

쉽게 말하면 지금 감정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다는 거라. 좋고 싫은 것들이 일어나는 것은 감정의 노예로서 살아가고 있는 거라. '감정의 노예로 살아도 돼?' 하고 물어보라는 거라.

 

그래서 마음에서는 자꾸 지금보다는 더 나은 상태로 만들려고 자꾸 노력들을 해야 됩니다. 그냥 지금 일상에 바쁘다고 그냥 거기에 묻혀가지고 그 파도에 묻혀가지고 살아가면은 도리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경각심을 자꾸 일깨워줘야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이 선원에 자주 오지는 못하겠지만 집에 있더라도 이번 안거기간 동안에는 항상 그런 마음들을 가져야 됩니다. 항상 경각심을 가져야 됩니다.

 

수행할려는 마음을 어떻게 생기게 할 수 있을까?

열 가지를 얘기해드릴테니까 잘 들어보십시요.

 

첫 번째 압삣차(appiccha) 라고 하는 걸 여러분들은 잘 들어보았을 겁니다.

잇차(iccha)는 욕심이죠? 원하는 것들이 있는데 더 많이 가질려고 하는 것, 압삣차는 그런 것들이 적다는 뜻입니다.

원하는 걸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탐진치는 강해집니다. 나중에는 본인이 그것을 콘트롤을 못하는 상태에까지 이르르게 됩니다. 그러면은 이때까지 저질러놓은 것은 조그마한 거지만 콘트롤을 못하기 때문에 아주 문제가 커져버리게 됩니다.

뭔가 원하는 것이 생길 때 자꾸 눌러야 됩니다. '아, 그만!' '여기서 됐어!' 그리고 그 나머지 시간들을 수행하는 시간으로 자꾸 늘려가야 됩니다. 원하는 것들이 적어야만이 수행할려는 마음이 열리게 됩니다.

 

두 번째 산뚯티(santuṭṭhi), 만족한다는 뜻입니다.

산뚯티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보통 세 가지로 얘기를 하는데 주어진 대로 그냥 만족하는 것, 그다음에 뭐든지 그냥 만족스럽게 사는 것, 없더라도 그것에 연연해하지 않는 것, 이런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만족할 수 없는 경우는 수행에서 사띠가 없는 것입니다.

사띠를 하고 있으면 만족을 하게 됩니다. 대상을 놓쳐버리면 만족하는 법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 우리는 반대로 행할려고 하게 됩니다. 태어났으면 죽어야 되는데 안 죽을려고 합니다. 일어났으면 사라져야 되는데 그걸 안 뺏길라 그럽니다. 가졌으면 없어지게 되는데 더 가질려고 합니다. 살아가는 삶은 그렇게 살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만족하지 못하게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걸 감당을 못하게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빠위웨까(paviveka).

위웨까(viveka)라고 하는 것은 조용한 것, 고요한 겁니다.

몸이 먼저 조용하고 고요해집니다.(kaya-viveka). 특히 말하는 것.

말할 때 몸이 항상 들뜨게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말을 하더라도 들뜸이 없도록 해야 됩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말을 할 때 그 속에서 탐진치가 섞여서 말을 하면 안 됩니다. 몸이 먼저 그렇게 되지 못하면 그다음 마음으로 넘어갈 방법이 없습니다. 헐떡거리며 와가지고 앉아서 수행한다? 안되게 됩니다. 헐떡거림을 먼저 진정시키고 나야만이 수행에서 대상을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수 있는 상태가 되지 못하는데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러면 그것은 조작을 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대상을 붙잡고 밀쳐내고 하면은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듯이,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몸이 고요해져야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말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크게 몸을 써가지고 몸이 많이 헐떡거릴 정도가 되는 경우는 거의 대부분 없습니다. 대부분은 말로 인해서 몸이 들뜨게 됩니다. 말하는 것들을 항상 조심하고 조용히 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는 마음이 고요해져야 됩니다. 찟따 위웨까(citta-viveka) 입니다.

마음은 어떠한 경우든지 대상에 집중하면 고요해집니다. 대상을 알아차릴 때 집중할 수가 있습니다. 마음이 과거로 간다든지 미래로 간다든지 할 거 같으면 지금 있는 대상에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있는 대상에 집중할려고 자꾸 노력을 하십시요. 일하고 있으면 일하고 있는 데다 집중해야 되는 거고, 수행하고 호흡을 알아차리면 호흡에다 집중을 해야 되는 것이지 다른 데 가면 안 됩니다. 그래야 마음이 고요해집니다.

 

지금 일어난 대상에 집중을 하라.

말을 하고 있으면 말하는데 집중을 해야 되는 거고, 지금 여러분들이 듣고 있으면 듣고 있는데 집중을 해야 되는 거고, 생각을 하고 보는데 집중할 거 같으면 듣는 것은 제대로 못 듣게 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얘기를 하면, 스님이 법문을 뭔가를 얘기를 하면 듣는 사람은 그냥 그걸 집중해서 들어야 되는데 그것을 있는 그대로 듣지 못하면 자기가 원하는 것들만 취하고 있다는 겁니다.

집중은 그런 게 아닙니다. 원하고 원하지 않는 걸 떠나버려야 됩니다. 이미 몸이 고요한 상태에 이르고 나면 마음은 집중을 잘할 수가 있게 됩니다. 몸이 고요해지지 못하니까 마음이 집중을 못하게 되는 겁니다. 지금 있는 대상에.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법문을 했으면 법문을 있는 그대로 다 받아들여야 되는데, 대부분 우리는 자기들의 경험이나 축적된 것들로 인해가지고 그것을 취사선택 한다든지 아니면 변형을 시켜버리게 되는 겁니다.

부처님 가르침이나 그 부처님 가르침을 전해주는 스님들의 법문이든 이런 것들은 그냥 집중해서 자꾸 들으려고 해야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럽니다. 처음 들었을 때 하고 두 번째 들었을 때 하고 많이 다르다고 그럽니다. 자기가 받아들이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다를 수밖에 없는 거라. 그렇게 계속 바뀌어서는 안 되는 거라.

 

있는 그대로 자꾸 받아들여라.

현재에 집중하고 있으면, 지금 현재 집중하고 있을 거 같으면 설혹 그것이 아직은 사띠가 약해서 모든 걸 다 흡수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걸 변형시키지는 않는다는 거라. 집중력이 커지고 사띠하는 힘이 커지면 전부 다를 받아들일 수가 있는데, 지금은 설혹 그것이 작다고 하더라도 일부만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변형을 시키지는 말아야 된다는 겁니다.

듣는 것뿐 아니라 말할 때, 볼 때, 생각할 때든 뭐든 다 있는 그대로 지금 현재에 자꾸 집중하는 훈련들을 하면 몸은 고요해지게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우빠디 위웨까(upadhi-viveka) 입니다. 정신적인 현상과 물질적인 현상이 모두 다 고요해지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아까 언제가 그런 상태가 된다고 했죠?

적어도 생멸지에 이르르면 그 단계를 체험을 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 상카루뻭카냐나(行舍智)에 이르르면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이 완전히 고요해지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하게 됩니다.

사실은 이 두 가지는 연결돼 있습니다.

그 중간에 있는 것들은 나타나기도 하고 안 나타나기도 하고 속도도 각각마다 다 차이가 나는데, 흐름에 들었으면 그걸 쭉 타고 가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수행을 하더라도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이 고요한 상태를 자꾸 만들려고 해야 됩니다. 수행하다가 그게 깨지면 다시 점검을 해야 됩니다.

', 몸이 고요하고 편안한가?' '긴장돼있는 것이 없는가?' 하고 다시 체크를 하고, 마음이 또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수 있는 상태가 돼 있는지, 가볍고 그리고 고요한 상태가 돼있는지를 체크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게 발란스가 맞아질 때 딱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이 고요한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 자꾸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게 세 번째 부분입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는 아상삭가(asaṁsagga)라고 하는 겁니다.

빨리어 그대로 얘기할 거 같으면 섞이는 걸 얘기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섞이고, 이 물질과 저 물질이 섞이고 하는 것들을 얘기하는데, 섞이면 어떻게 될까?

시멘트하고 모래하고 자갈하고 물하고 섞이면 어떻게 돼요? 딱 붙어버리죠? 섞이면 접착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빨리어 아상사까를 의역을 하면 '집착하는 대상'이라는 뜻이 됩니다. 집착하는 대상이 자꾸 없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자기를 속박하는 대상이 없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아마 참 많을 겁니다. 그런데 자꾸 그것들을 떨어뜨릴려고 해야 됩니다. 수행하는 마음을 일으킬려면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것들을 떨어뜨려야만이 수행할려는 마음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다섯 번째 위리야람바(vīriyārambha)입니다.

자꾸 노력할려고 하는 이야기들, 뭔가 수행에서 도움되는 얘기들을 자꾸 할려고 하고, 뭔가 내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려고 자꾸 마음을 북돋아줘야 되는 거지, 그냥 현재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 자꾸 알아차릴려고 할 것 같으면 게을러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안 하게 되고 싫어하게 됩니다.

 

그다음에 여섯 번째가 실라(sīla), 계율을 지키는 것.

계가 밑바탕이 되지 않으면 마음은 고요함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오늘은 여러분들이 팔계를 지닌 날입니다. 팔계를 지켜야 됩니다.

평상시 때는 오계를 받아지닌다? 오계는 여러분들이 반드시 지켜야 되는 것들입니다. 계를 어기고 그걸 대충 넘길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다음에 일곱 번째가 사마디(samādhi) 집중.

삼매를 개발하지 않고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찰나 삼매도 삼매에 해당이 됩니다. 삼매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사띠도 강하게 되지도 않고 또 그 삼매로 인해서 일어나는 이익들도 알지를 못합니다.

순수한 위빳사나를 한다? 그리해도 삼매는 이해를 하고 분명히 경험들을 해보는 것이 참 좋습니다. 실제적으로는 사마타와 위빳사나는 분리할 수 없는 겁니다.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집중하는 것, 삼매에 들려고 자꾸 노력을 해봐야 됩니다.

 

그다음에 여덟 번째가 지혜(paññā)

수행에서 지혜가 자꾸 일어나면 더더구나 좋고 그렇지 않더라도 일상생활에서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는지 안 맞는지를 자꾸 체크를 해봐야 됩니다. 그래서 아닐 경우에는 그것은 하지 말아야 됩니다. 또 지금 해야 될 것이 아닐 거 같으면 급히 지금 그걸 해야 될 이유가 없습니다. 본인에게 이익되지도 않는데 그걸 꼭 할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 탐·진·치를 일으키게 하는 건데 그걸 할 이유가 없다는 거라.

지혜는 수행에서도 일어나지고 그것이 일상생활에서도 접목이 되어 나가지는 겁니다. 그래서 지혜에 대해서 자꾸 생각을 하고 돌아볼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아홉 번째가 위무띠(vimutti), 벗어나는 상태.

속박에서도 벗어나고, 갈애에서도 벗어나고, 수행에서 자꾸 벗어나는 상태를 경험을 해봐야 됩니다. 아까 선등님이 유신견을 얘기했죠? 유신견으로부터 내가 완전히 벗어났다는 것을 경험을 해봐야 되는 거라. 감각적인 욕망, 이것으로부터 내가 벗어났다는 것을 경험을 해봐야 됩니다.

위무띠가 한 번에 탁 다 일어나면 참 좋겠지만 그렇게 되는 법은 없습니다. 단지 하나를 벗어나보면 다른 것들을 보면 다른 것들은 엷어져 있습니다. 거의 영향을 못 미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가장 가까운 장애들 하나를 줄기차게 한번 벗어날려고 노력을 해보십시요 여러분들이 안 되는 것 중에. 그러면 그것들을 벗어난 경험을 해보면 '아, 이게 이렇게 자유롭고 편안한 것인데 왜 안 할려고 했을까' 하는 것들을 알게 됩니다.

 

그다음에 열 번째가 위빠사나 수행에 대해서 자꾸 돌아보고 그 지혜가 일어나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내가 지금 어디까지 와있는지 한번 보십시요. 여러분들이 이론적으로는 대부분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1단계 밖에 못 이르렀다, 언제 16단계까지 다 넘어갈 거라? 본인이 자꾸 돌아보고 그것들로부터 벗어나서 다음 단계로 넘어갈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이 열 가지들이 보통 마음을 수행에 기울여주는 그런 상태를 만들어줍니다.

자주자주 이 열 가지를 자꾸 돌아보면서 회상을 하도록 그렇게 하면 됩니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는 속박」 반드시 벗어나야 됩니다.

이걸 벗어나지 못하면, 저 밑에 써놓았는데, 흐름을 바꿀 수도 없고, '좋고 싫음'이라고 하는 '라띠(rati) 아라띠(arati)'로부터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좋고 싫은 것들을 벗어나지 못하면 수행에 진척은 없다는 뜻입니다.

정 안되면 사수념(死隨念)이라도 자꾸 해보십시요.

'나의 목숨은 찰나 간에 달려있다. 나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자꾸 해야 됩니다. 그래서 '죽고 싶지 않다, 죽음에 대한 속박'으로부터 빨리 벗어나도록 그렇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안거기간 동안은 적어도 그런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서 좋고 싫은 것들로부터 떠나도록 자꾸 노력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