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상을 충동질하는 상카라 [수행문답] (20200704)
요즘은 관공서에서 자꾸 찾아와 싸. 조금 번지는 기세가 있는지 좀 안 하면 안 되느냐고, 자꾸 와가지고 사람이 안 모였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되도록 조심하는 게 안 낫겠나 싶었습니다.
저번 달 숙제 내줬는데 숙제 해왔어요?
어떤 게 우두머리고 어떤 게 먼저에요? 어떤 것이 항상 있는 거에요?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지금 선원에 꽃이 많이 피고 있죠? 꽃이 피는 거는 물론 햇볕도 받고 물도 적당하고 바람도 있어야 되고 여러 가지 조건들이 있을 겁니다.
그리해도 그보다 더 중요한 게 뭐라? 지가 피고자 하는 의지일 거라. 피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은, 그런 감각이 없으면 안 피어나게 되겠죠.
피고자 하는 것, 이는 어떻게 보면 에너지 같은 거라. 에너지! 태양도 어떤 면에서는 에너지일 거고, 우리가 지금 끊임없이 살아있는 것도 뭔가 살고자 하는 에너지가 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거죠.
오온(五蘊)도 그런 에너지 역할을 하는 것이 이 상카라(saṅkhāra, 行) 라고 하는 것들이라. 끊임없이 상카라가 충동질하고, 상카라가 끄잡아다 줍니다. 다른 것들을.
수행할 때 망상 많이 하죠? 망상할 때 탁 관찰하기가 쉽습니다. 이 상카라(saṅkhāra, 行)를! 이게 충동질하는 것이 일시에 보여진다는 거라. 망상할려고 하는 것들이!
경전 상으로는 물론 망상할 때는 육근(六根)이라는 것이 있고, 외부적인 대상이 있어 가지고, 그것을 순간적으로 인식할려고 하는 것이 합해져가지고, 삼상이 합해져가지고 접촉이 일어나지고, 그 접촉으로 인해가지고 느낌들이 탁 일어나지고, 그 느낌들로 인해가지고 안다는, 그냥 안다는 것이 아니고, 일반적으로 안다는 거하고는 다릅니다.
순간적인 인식하는 것이 산자나(sañjānā, 想) 라고 하는 것이 탁 일어납니다.
그 산자나(sañjānā)라는 것이 일어남과 동시에 순간적으로 인제는 지 스스로 의(意)기능이 작동하는 거라. 순간적으로 탁 생각을 하게 되는 거라. 그걸 이제 위딱까(vitakka, 尋)라고 그럽니다.
순간적으로 생각을 하게 되면 그다음에 일어나지게 되는 것이 빠빤짜(papañca, 분별망상)라 해서 망상으로 넘어가지게 됩니다.
그런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경전을 읽어봐서 그 구조들은 대부분 여러분들이 이해를 하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 하면 망상할 때는 망상할려는 에너지가 틀림없이 있게 되는 거라. 망상은 한 번으로 안 그치죠?
망상이 일어나기 전에 여러 단계를 거치고 왔죠?
접촉부터 해가지고 팟사(phassa, 觸)로 해서 웨다나(vedanā, 受)로 해서, 웨다나에서 다시 산자나(sañjānā, 想)로 넘어갔다가, 산자나로 해서 다시 위딱까(vitakka, 尋)로 넘어갔다가, 다시 빠빤짜(papañca, 망상)로 넘어가고.
누가 이걸, 에너지를 계속 공급을 해주는 거라?
뭐가 공급을 해주기 때문에 망상이 일어나는 것이 또 다른 망상으로 바뀌어나가서 계속적으로 일으켜주는 거라?
수행에서 장애가 일어났을 때 이 오온의 구조를 이해하기가 참 수월합니다.
아마 다음 달에 여러분들이 안거 들어가지죠? 스님들은 내일 들어가지게 되는데, 올해는 윤년이 돼가지고 그렇습니다. 우리하고는 다르게 우리는 윤달이 사월달에 있는데 테라와다국가 남방국가에서는 윤달이 유월달에 있습니다. 윤유월에.
그래서 앞에 달을 기준으로 아살라하 달을 기준으로 하면 내일부터 하는 것이 맞고, 그다음에 윤달을 기준으로 안 하고 해제하는 것을 기준으로 할 거 같으면 윤유월 달에 합니다. 그래서 칠월? 팔월이죠! 팔월 3일인가가 안거 날짜가 되는 겁니다.
어떤 것을 기준으로 할 것인가? 안거가 시작되는 아살라하 달을 기준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안거 마치는 날을 기준으로 할 것인지의 기준에 따라서 나라마다 안거달이 다릅니다. 올해는! 그 차이일 뿐이지 안거가 바뀌는 것은 없습니다.
망상 얘기가 나왔으니까 망상 얘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아까 상카라가 끊임없이 일어나면서 망상이 계속 증폭한다고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상카라를 제대로 확인을 했으면 망상이 안 일어날까? 어떻게 될까요?
(수행자 : 그래도 일어나집니다.)
상카라를 분명하게 확인을 하고 아, 이게 상카라인 줄을 알았는데도 망상이 일어난다? 그럼 그건 상카라를 잘못 알은 거라. 왜 그러냐면 망상은 자아가 개입돼야만이 망상이 일어나집니다. 내가 망상을 하는 것이지 어느 누가 나에게 망상을 시켜주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가 있지만은 이것이 망상을 일으키지는 않는다는 거라. 안이비설신의로 인해서 일어나는 내 마음이 망상을 일으키는 것이지 다른 것이 망상을 일으켜주지 않는다는 거라.
수상행식(受想行識)을 분명하게 보면 그건 마음의 작용들이라. 마음의 작용을 분명하게 이해를 하면은 망상하는 것이 없어져 버립니다. 그 대신에 망상하지는 않고 사고는 하겠죠!
그래서 부처님도 이렇게 얘기를 하다가 여러분들 같이 이해를 못한다, 그러면 쉽게 얘기합니다. “옛날 옛날에 내가 이랬는데...” 하면서 얘기를 합니다. 그거는 사고의 기능이죠. 망상하는 기능이 아닙니다.
망상하는 거는 여러분들이 막 생각을 굴려가지고 계속적으로 증폭하는 겁니다.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망상을 하는 거죠. 좋아하지 않으면 망상은 끊어져버리는데 끊임없이 좋아하기 때문에 계속 망상을 하게 되는 구조를 지니게 됩니다.
"자아(自我)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착각하면서 망상이 될 토대가 마련된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오온을 좀 더 뿌리 깊게 자꾸 볼려고 하는 것들을 하다가 보면은 수행에서 여러 가지 장애들이 일어나는 거라. 그 장애들이 따로따로 떨어져서 나타나는 것은 사실은 아닙니다. 다 붙어서 일어나는 겁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뭔가 느낌이 있습니다. 좋아하는 것이 있죠?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집착을 하게 됩니다. 그럼 그게 또 하나의 장애가 되는 거라. 그게 감각적인 것이면 감각적인 욕망을 일으킬 것이고, 그 집착하는 것이 뭔가 재산이면 재산에 얽매여버리게 될 거고, 자식이면 자식에게 얽매이게 될 거고, 감각에 대해서 집착이 생기는 것도 망상으로 발전을 하게 됩니다. 벌면 더 벌려고 하겠죠. 집착하면 자기 생각을, 그게 자기만의 것이란 생각을 안 하고, 망상이라 생각을 안 하고, 자꾸 더 즐길려고 하는 거라.
그래서 감각에서 집착이 생긴다는 사실을 알기만 해도 망상은 떨어져 나간다는 거라. 직접적으로 망상이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뭔가 느낌이 있을 때 그게 좋고 싫음의 느낌이 탁 있을 때 그걸 떨어트려 보는 훈련들을 해보라는 거라. 좋고 싫음이 일어났을 때 그것이 딱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은 수행할 때 망상하는 것은 많이 줄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런 집착하는 것을 대부분 나(我)라고 착각을 합니다. '내가 느꼈다'고 그러지, '내가 안다'고 그러지 '나'를 배제하고 '느꼈다, 안다'고 하지 않는다는 거라.
그래서 경전에도 '웨다나'로 인해서 일어나는 '산자나' 라는 안다는 기능은 너의 것일 뿐이라는 거라. 너의 느낌인 것이고, 너의 느낌으로 인해서 너가 안 것일 뿐이지 다른 것이 될 수가 없는 거라.
창살이 있습니다. 이건 누구든지 보면 창살이죠. 순간적으로 안다는 기능이 있었지만은 이것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그다음으로 다 발전합니다. 뭐로 발전해? '어, 좀 튼튼해 보이지 않네. 내가 다시 좀 튼튼한 것으로 바꿔줄까?' '어, 이게 좋아 보이네. 나도 집에서 이렇게 할까?' 사람마다 생각은 다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거라.
개별적인 것이지 공통적인 것은 아니라는 뜻이라.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창살이라는 것은 다른 생명체가 알았을 때는 창살이 되지 않습니다. 자기들이 느끼는 것은 창살이 아닙니다.
망상은 이렇게 착각을 하면서 그 착각이 자꾸 쌓이면은 망상은 더욱더 일어나게 되는 거라. 착각이 연속해서 일어나면은 망상은 집약된다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대부분 이런 과정들이 지속되다 보니까 수행에서 망상을 관찰을 하지도 못하고 일상생활에서도 망상은 끊임없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면 진짜 해야 될 것은 놔두고 다른 것들을 하게 돼버리는 거라.
뭘 하게 됩니까? 자기 자신을 지키려고 하게 됩니다. 여기 자기 자신이라는 것들은 자기와 관계된 것들이라. 내 가족을 무조건 지켜야 되고, 내 재산을 무조건 지켜야 되고. 진짜 해야 될 것들이 그게 사실은 아닌데, 가족은 내가 열심히 하다 보면 스스로 지켜지게 되는 거고 열심히 일하다 보면 재산은 모이게 되는 건데, 그걸 먼저 지키는 것이 우선이 돼버린다는 거라. 살아가는 목적이 분명히 있는데 그 목적은 놔둬버리고 자기 자신을 지키는데 무장을 하는 거라.
며칠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누가 편지를 보냈어요. 그 편지 내용에 이혼을 하셨는데 옛날에 남편이 많이 괴롭히고 밖으로 떠돌고 이렇게 해서 그래가 결국은 이혼을 하게 됐는데 지금도 그게 자기를 괴롭힌다는 거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거라. 이게 바뀌어 버린 거라.
지금 해야 되는 것은 그 남편이 옆에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괴롭히는 것도 아닌데 자기가 해야 되는 것은 놔두고 거기 빠져있는 거라.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해야 되는 것이 있는데도 거기에 빠져버리는 거라. 싫어하는 것도 거기에 빠져버리는 거라.
지금 해야 할 일들을 자꾸 제쳐두고 자신을 지킬려고 한다는 거라. 좋아하고 싫어하고 하는 것들로 해서 일어나는 망상들을, 그걸 자꾸 지킬려고 하는 거라. 싫어하는 것들 떨쳐버리고 싶죠? 진짜 싫어하면 떨쳐져 버립니다. 그런데 지가 좋아하는 거라. 끊임없이 그걸 만들어내는 거라.
그래서 이런 구조도 자기가 계속적으로 흘러가지면 안 되는 거라. 지금 해야 될 일이 뭔가 하는 것을 분명하게 자기가 판단들을 해야 된다는 거라.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 영향을 지금 미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되는 거라.
옛날에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망상인지 아닌지를 체크하는 기준점이란 것을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지금 일어나는 망상이든 생각이든 이것이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
만약에 도움이 안 된다면 그건 놓아버려야 되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 하고 있는 것이 결론이 있는 건지 아닌지?
망상은 대부분 결론이 없이 계속적으로 회전을 하게 됩니다. 계획을 세우고 하는 것은 분명하게 결론이 있습니다. 결론이 지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은 버려버려야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지금 생각하고 망상하는 것이 지금 내가 생활하는데 방해를 하는지?
방해를 하고 있다고 할 거 같으면 그것은 아니라는 거라.
네 번째가, 지금 일어나는 생각이나 망상들이 내 감정을 휘젓는 것인지, 아니면 내 감정들을 제압해가지고 다른 어떤 행동을 일으키게 하는 것인지?
감정을 휘저어버리면은 스스로 괴로웁게 되는 거고, 제압당해버릴 것 같으면 다른 행동으로 표출되고, 다른 말이나 다른 생각으로 표출되는 거고.
그래서 이 네 가지가 기준점이다 하는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네 가지에 해당이 된다면 그건 버려버려야 되는 것들이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 망상들을.
(수행자 : 버려버려야 되지요. 무조건 버려야 됩니다.)
어떻게 버릴거라? 그래서 사띠하라는 거라!
언제 망상이 일어나는지, 망상이 일어나는 에너지가 되는 것들이 증폭시켜 주는 것이 뭔지를 분명하게 알아라는 거라.
아까 상카라가 충동질하는 에너지다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끊임없이 뭔가를 일으키게 하고, 끊임없이 다른 심소들을 일어나게끔 만들어주고, 우두머리 역할들을 한다는 얘기했습니다.
망상이 탁 끊어질 때 어떤 것이 끊어지겠냐는 거라?
사띠해서 분명하게 그것을 알아차릴려고 하지 않으면 수행에서도 망상이 끊임없이 일어나지고, 일상생활에서도 사실은 의미 없는 생각들이나 망상들이 끊임없이 반복하게끔 됩니다. 적어도 수행한다고 할 거 같으면 그 부분을 분명하게 인식을 하라는 거라.
기준점을 얘기를 하겠습니다.
세상에 있는 다양한 견해, 의견들 그리고 무얼 믿든지 그런 믿음이라고 하는 것들, 그런 것들에 끄달려 들어가지 마라라는 거라.
‘누가 이렇다’ 그건 그 사람 생각일 뿐이고 그 사람 의견일 뿐이라. 그것이 설혹 나와 다르다 해서 그것으로 다툴 이유는 없습니다. 끄달려 들어가면 다투게 됩니다. 왜? 망상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다음에 어떠한 경우든지 수행을 하면서 확신감이 들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오직 유일한 길이다' 하는 확신감이 들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어영부영 따라올려고 하지 말고 자기 스스로 그런 확신감이 딱 들도록 '아, 이거 외에는 없구나' 하는 것들이 딱 확립이 되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그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 수행법문을 끊임없이 듣든지 책을 읽든지, 아니면 도반들과 토론을 하든지 뭘 하든지 진리에 대한 것들을 끊임없이 자꾸 탐구를 해나가야 되는 거고, 그에 맞춰서 수행하는 것!
수행하는 마음이 없으면은 아무리 탐구를 해도 그것은 개인적인 것일 뿐입니다. 오히려 나(我)라고 하는 것만 더욱더 견고하게 만들 뿐입니다. "어떤 경우든지 수행이다 "하는 생각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법문을 들을 때도 수행인 거고 일상생활할 때도 수행인 거고, 서로 주제에 대해서 얘기할 때도 수행인 것이지, 수행 아닌 것이 없다는 거라.
그 수행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탐진치(貪瞋癡)가 없어야 된다는 거라. 성이 일어나고, 자기 것 자꾸 고집할려고 하고, 수행 안 하고 있다는 거라. 사는 것이 그냥 얼렁뚱땅 대충 살려고 하고, 수행 안 하고 있는 거라. 그래서 확신이 들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그 확신은 다른 것들 법문이나 이런 것들로 인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진 몰라도, 수행은 여러분 스스로 해야 됩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생각하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 어려울 거 같죠? 가능해집니다. 생각하는 것이 없어져 버립니다.
전에도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두 갈래 길이 있으면은 생각하지 말고, 어떤 것이 옳은가 생각하지 말고, '먼저 보이는 길로 그냥 가라.' 그게 큰 길이든 작은 길이든 가는 길이 올바르고, 올바르게 가면은 그것이 바른길이 되는 거라.
생각하면서 시간을 다 버려버리는 거라. 자기도 가보지 않은 길인데도! 자기 자신이 가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조언이 아무리 뛰어나고 아무리 그것이 맞다고 하더라도 본인이 그 길을 가지 않고 그 길에서 게으름 부리면 끝까지 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생각하는 습관들을 되도록 가지지 말라는 거라. 실행하는 습관, 행하는 습관을 자꾸 가지도록 자기 자신이 만들어야 됩니다.
망상은 자기 자신을 자꾸 관찰하는 것으로 인해서 없애나갈 수가 있습니다.
왜 오온을 자꾸 분해해서 볼려고 노력을 하고, 또 망상을 끊임없이 관찰하라고 할까?
(수행자 : 사띠로 인해서 잘라낼 수가 있게끔 되니까요.)
물론 그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띠로 해서 잘라내서 뭐 할 건데? 여러분들 일상에서 무슨 도움이 되는데?
(수행자 : 그러므로 해서 확신감도 들고요.)
(수행자 : 무상을 알려고...)
그 무상을 안다는 것도 하나의 답입니다.
(수행자 : 세상의 견해에 대해서도 끄달려 들어가지 않게 되고, 확실하게 떨어져 나가게 되고)
윤회는 인정합니까?
(수행자 : 예!)
그냥 말로만 인정하지. '죽고 나서 태어난다' 그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끊임없이 변하는 게 윤회입니다. 원인·결과 원인·결과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아는 것이 윤회입니다. 원인·결과 원인·결과로써 이어지는 것이지, 고정된 것은 없이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이 일상에서 굳어져야 된다는 거라. 그래야 어떤 것에도 집착하는 것이 없어지게 됩니다.
아, 이것이 상카라구나 하고 그 상카라를 딱 집착하고 있으면 그게 상카랍니까? 아, 이게 망상이구나 하고 망상하는 걸 집착하고 있으면 그게 망상입니까? 아니라는 거라. 집착하고 머물게 되면은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은 본연의 것들이 아니고, 다른 것으로 이미 바뀌어버린 상태라는 거라.
윤회를 받아들이고 인정한다는 것은 원인·결과를 분명하게 봐서 그것들로 인해서 흘러간 것들은 내 것이 아닌 줄을 분명하게 알아야 되는 거라. 과거의 시간은 여러분이 돌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죠? 과거의 젊음을 여러분은 돌릴 수 없는 줄 알죠? 다가올 죽음은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말로는 받아들입니다. 가족 중에 누군가 나를 떠난다? 죽음으로 떠나든 뭘로 해서 떠나든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나의 재산이 전부 다 없어진다?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거라.
윤회를 인정한다는 것은 지나간 것들에 대해서는 집착하는 것이 없어진 상태라는 거라. 왜 그럴까? 끊임없이 변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들이!
나의 재산도 나의 가족도 나의 젊음도 나의 생각도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하고 있고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그런데 망상이라는 것은 처음에 뭐라고 그랬어요? 나를 전제로 해야 망상이 일어나집니다. 나는 윤회하고 있고 원인·결과로써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데, 본인에게 망상이 끊임없이 일어난다는 것은 윤회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거라.
복잡하게 얽혀져 있습니다. 나라고 하는 것들로 인해서 집착과 애착이 일어나서 망상이 일어나는데, 그런 집착과 애착은 복잡한 구조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만 물려가지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망상의 속성을 들여다보면은 그 속에는 감각적인 욕망도 있고 게으름도 있고 의심하는 것도 있고 여러 가지들이 복잡하게 되어있습니다.
장애는 어떤 것이든 오온에 대해서 분명하게 관찰하게 될 때 다섯 가지 장애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립니다. 연결된 구조들이기 때문에!
그 대신에 그런 망상이나 욕망이나 의심하는 것들이 사라져도 살아가게 됩니다. 살아가는 사람은 그런 망상이나 이런 거는 하지 않지만, 사고들은 합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부처님도 과거 자따까의 얘기나 여러 가지 경전에서 과거 인연담을 얘기하면서 잘 이끌어주는 것은 사고의 작용들입니다. 과연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이 뭔지, 자기 자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이 뭔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망상은 여러분들이 실제 오온을 사띠하면서 끊을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를 해야 됩니다.
이번 안거 때는 한번 자세히 보십시오. 내가 가지고 있는 수상행식이라고 하는 마음의 작용들이 어떤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고 이것이 어떤 장애들을 일으키게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도록 자꾸 노력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 수행문답 >
수행자 질문 : 스님 오늘 법문 중에 두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까 오온 중에 중심이 되는 것들,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들, 행온 - 상카라인데 이 상카라를 보면 감정적인 충동과 의도가 혼재되어 함께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스님 답변 : 감정적인 충동은 상카라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오온에서 '나'라고 하는 것이 개입되고 나서 일어나는 현상일 뿐입니다. 상카라는 그 훨씬 전입니다. 그 훨씬 전에 이미 일어나서 그것들을 증폭시키는 과정들이 있습니다.
아까 얘기했죠? 삼상이 화합함과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 상카랍니다. 그 상카라가 일어나고 또 다른 것들의 작용들이, 접촉하는 것이 일어나지게 되는 겁니다. 접촉도 상카라가 없으면 접촉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수행자 : 촉에 의해서 형성된 것을 상카라라고..
스님 : 촉이 일어나는 것도 그 상카라로 인해서 일어나집니다. 모든 것에 개입을 합니다. 상카라가!
수행자 : 그럼 상카라가 수상행식 할 때 행(行)이 산냐(saññā) 다음에..
스님 : 아, 그걸 실제적으로는 오온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집니다. 그런데 그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데 여러분이 생각하듯이 상(想, saññā)이 일어나고, 행(行, saṅkhāra)이 일어나고, 수(受, vedanā)가 일어나고, 뭐 이런 식으로 진행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라. 하나만 일어나는 법이 없습니다.
그걸 여러분들이 자꾸 도식화시키면은 오온의 수상행식(受想行識)은 한 번만 찰나생으로 일어나고 그게 끝나고 나면은 다음 것이 일어나는 것처럼 착각을 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일어나려면, 수가 일어나려면 뭐가 일으켜주는 건데?
수가 반복해서 느낌이 일어나는 것은 뭐가 그 작용들을 해주는 거라?
똑같은 수가 작용들을 해주는 거라? 원인이 되는 거라?
아니면 의도가 일어날 때 의도는 뭐가 일으켜주는 거라?
의도는 끊임없이 일어나집니다. 같은 의도가 아니고 다른 의도들입니다.
그것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해주는 것이 뭐라는 거라?
수행자 : 그러면 촉 하기 전에 벌써 상카라가 일어났다면 아직 인식도 되기 전이네요?
스님 : 그마만큼 상카라는, 충동질이라는 것은 에너지라는 거라.
아까 예를 들어서 얘기했었죠. 햇빛이라는 거는 내가 원하는 원하지 않든 비치게 됩니다. 상카라는 쉽게 말하면 생존욕구와 마찬가집니다.
갈애는 내가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는 항상 일어나게 됩니다.
그 갈애는 왜, 어떻게 해서 일어나느냐는 거라. 나는 안 일으키고 싶은데, 일으키는 원인이 있으니까 일어날 거 아니라. 윤회를 만드는 원인이 있을 거 아니라.
그게 오온에 답이 있다는 거라. 이해가 됐습니까?
수행자 : 스님 저도 질문을 드리겠는데요. 아까 전에 확신감이 들도록 해야 된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살면서 느껴지는 게 자꾸 단순해져요. 생각도 안 들고 과연 살면서 이렇게 단순해져도 되는지 이런 의문점을 많이 가지고 있어요.
스님 : 생각이 단순해지는 거라? 생활이 단순해지는 거라?
수행자 : 생각과 생활이 다 단순해져 버려요. 그래서 딸하고 생활하면서 자꾸 태클이 걸리는 거에요. “엄마가 왜 그렇게 사느냐고?” 자꾸 단순해져요. 생각도 없어지고 그래서 이렇게 해도 과연 잘 사는 건가, 바른가 이런 의문을 가져요.
스님 : 그거는 지금 하는 주제와는 관계가 없는 '게으름'입니다.
하기 싫어하고, 본인은 자꾸 그걸 합리화시키는 거라. 생각도 단순하고 뭐 생활 패턴도 단순하고 하는 것들이 좋은 것처럼 자꾸 받아들이는데 그건 어떤 면에서는 본인이 자꾸 게을러지고 있는 겁니다.
사띠를 더욱더 안 하기 때문에 단순해지는 것이고 사띠를 하면 할수록 굉장히 복잡해집니다. 복잡해지고 알아차리는 것들도 많아지는 거고. 생활이 단순해지는 것과 사띠 할 부분이 많아지는 것은 다릅니다. 그래서 그 부분은 구분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수행자 : 그럼 스님 쩨따나(cetanā, 의도)하고, 마나시까라는 작의(作意) 아닙니까?
스님 : 마나시까라(manasikāra, 주의력)는 작의가 아니고, 대상에 대해서 올바르게 다가가는지 안 다가가는지 하는 그런 마음의 작용일 뿐입니다. 그건 작의 하고는 관계가 없습니다.
수행자 : 번역을 작의(作意)라 해놔서, 의도를 만드는 건가 싶어서...
스님 : 마나시까라 부분은 전에 언제 한번 해준 걸로 기억이 되는데.
심소 부분은 무엇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이지 그걸 작의라고, 아까도 얘기했지만 상카라도 작의가 아닙니다. 상카라도 작의라고 스님이 얘기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웨다나도 마찬가지고 쩨따나도 마찬가지고 심소 부분일 뿐입니다.
심소는 다른 것들입니다.
스님이 오온을 자꾸 보라고 하는 이유는 오온에 그것들의 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걸 구분할 수 없으면은 이걸 뭉뚱그려버리게 됩니다. 세속적으로 얘기해서 '아직도 나는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 하고 그냥 얼버무리는 것하고 똑 마찬가집니다. 없는데 아직도 그러고 있다는 거라. 뭔가가 있는 것처럼 자꾸 착각을 하게 되는 거라. 명확하게 보지 못하니까 자꾸 그렇게 되는 거라. 영혼도 망상의 산물입니다. 망상하지 않으면 영혼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자!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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