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8~2022 일상수행법문

정견에 대한 바른 이해 (20210501)

담마마-마까 2022. 6. 11. 09:00

https://youtu.be/WRM09k-wa6o

* 정견에 대한 바른 이해 (20210501)

 

"체험을 통해서 그것을 분명하게 이해했을 때 바른 견해는 성립된다"

"바른 견해라는 것은 생존욕구를 제거해나가는 과정이다"

 

정견이 뭐라? (수행자 대답 : 삼마 딧티)

삼마 딧티라고 합니다. 어떤 걸 정견이라고 해요?

(바른 이해)

어떤 게 바른 이해라? 뭘 바르다고 그러는 거라?

(연기라든가 삼법인, 연기, 팔정도)

(사성제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

음. 사성제를 바르게 이해한다. 그럼 고에 대해서 무상한 걸 체험을 해야 되겠네?

(무상·고·무아를...)

무상·고·무아 삼법인을 체험을 해야 사성제를 이해할 거 아니라? 그럼 사성제를 체험한 사람들은 견해가 있을까? 없을까? 견해를 가지고 있을까? 없을까?

(견해를 가지고 있지 예)

가지고 있어요?

(아라한이 될 때까지는 견해가 안 있겠습니까?)

 

음. 그런데 없어야 맞잖아. 사성제 무상한 것을 아는데, 다른 사람들이 만약에 다른 의견을 말한다. 그것도 무상한 성품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도 자기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반론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어떻게 생각해요? (바른 견해라고 하니까예 바른견해는 있지 예)

어떤 게 바른 견해라?

(사성제에 대해서 바른 이해니까, 거기 팔정도에 보면은 바른 견해란 무엇이냐? 팔정도에 대해서 정확하게 아는 것이 바른 견해다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그러니까 두리뭉실하게 그렇게 얘기하지 말고, 예를 들어봅시다.

수행을 할 때 경행을 한다. 그러면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한단 말입니다. 왼발을 들 때는 오른발은 없죠? 견해로 치면은 의견은 없어. 단지 발을 들어올리면 들어올린다는 것만 알고 내려놓을 때는 내려놓는다는 것만 알고, 발이라는 개념이 없죠?

자신이라는 견해는 없습니다. 그 어디에도. 그냥 들어올리면 들어올림만 있고, 내려놓으면 내려놓음이라는 것만 있고, 단지 자신이 아는 것뿐이라.

 

더 나아가면은 발을 들어올릴 때 물질적인 현상인 들어올려지는 것이 있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이라는 것이 있다. 그래서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들을 구분해볼 수가 있는 거고, 그래서 더 나아가면은 정신적인 현상인 의도라는 것이 앞서가지고 발이 들어올려진다는 행위가 있고, 이렇게 계속적으로 수행은 발전을 해나갑니다.

그런데 그 어디에도 견해라는 것은 없습니다.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이나 뭐 견해라는 것들이 거기에 있어요? 굳이 아라한이 되지 않아도 바른 견해는 생길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바른 견해라는 것은 뭐라는 거라?

경전에서 말하는 거 말고, 경전에는 보면 삿된 견해의 반대가 바른 견해다. 삿된 견해는 열 가지로 쭉 적어놓은 것들도 있어요. 보시하는 거 의미 없다. 자기가 베풂을 받아도 그것에 대해서 고마워할 줄도 모르고, 성자들에 대해서 존경하는 마음도 없고 출가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업의 법칙에 대한 것도 원인을 지었으면 결과를 받는다 이런 것들도 별 필요없고 의미없는 것들이다. 이런 열 가지를 쭉 해놓은 것이 있어요. 그것에 반대되는 것들이 바른 견해다 하고 경전에는 나와 있습니다.

 

어떤 경전에는 보면 그것도 이야기 했지만 '팔정도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하고 아는 것, 그것이 바른 견해다' 경전에는 그렇게 나와 있는데 그걸 실제 여러분들이 수행 체험해서 그것을 아느냐는 거라.

(그럼 견해가 없는 것이 바른 견해이겠는데요.)

그렇지! 견해가 없는 것이 바른 견해다. 왜 그럴까요? 왜 견해가 없는 것이 바른 견해가 될까?

 

정견을 경전에는 두 가지로 나눴습니다. 세간적인 정견과 그다음에 출세간적인 정견으로 나눠놓았습니다.

 

세간적인 정견은 어떤 것들이라요?

탐진치가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해가지고 탐진치가 일어난 것을 분명히 알아서 그것을 하지 않는 겁니다. 그게 세간적인 바른 견해입니다. 쉽게 말하면 마음으로 악한 생각을 일으켰다. '으응? 내가 악한 생각 지을라고 그러네. 그러면 안 되지' 하고 놓아버리고, 말을 할 때 험한 말이나 나쁜 말이 나오려고 할 때 '어, 아니지, 그건 아니지' 하면서 바르고 자애로운 말을 하게 되는 거고, 행동할 때도 '아, 이건 나쁜 행위다' 할 것 같으면 벌레 하나를 죽이려다가도 '어? 이러면 안돼' 하면서 그만두게 되는 거고.

 

왜 그럴까? 왜 그걸 세간적인 바른 견해라고 할까? 무엇이 두려워서 그럴까?

(나한테 과보가...)

그렇지! 속된 말로 얘기해가지고 이걸 해서 나한테 나쁜 영향을 미치면 어떻게 할 거라? 경전에는 죽고 나서 사악처에 떨어지는 두려움이 있다든가 하지만은, 뭐 그냥 쉽게 얘기해가지고 지가 나쁘게 뭘 했으면 뭔가 나쁘게 돌아올 거 아니라? 그게 두려운 거라. 그게 두려워서 안 하게 되는 거라. 그걸 세간적인 바른 견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그거는 세간적인 바른 견해는 어떻게 해가지고 만들 수 있을까? 아까도 얘기했지만 확인하는 길밖엔 없습니다. 말을 할 때든 행동할 때든 생각을 할 때든 '어, 내가 뭐 하고 있지?' 하면서 분명히 확인을 해야됩니다. 확인하지 않으면 그걸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바로 탁 튀어나와 버리니까.

 

예를 들어볼게요. 이 집은 지금 지붕에 비가 새지 않습니다. 지붕이 잘 이어졌어요. 그런데 지붕이 잘 안 이어졌으면 비가 샙니다. 비가 샐 때 어떻게 해요? 비가 어디 새는지를 알아야 그 비 새는 부분을 보완을 해가지고 비가 안 새게끔 할 수 있어요. 탐진치라고 하는 것은 비가 새는 거하고 꼭 마찬가집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비가 새는 것을 먼저 확인을 해야 되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그럼 확인하고 나면 어떻게 해야 돼요? 막아야 됩니다. 뭐로 가지고 막을까? 뭐로 가지고 막아야 돼요? 비 새는 거 막는 거는? 확인만 하면 끝나요? 확인하고 놔둬 버릴 것 같으면 그것은 비가 새게 돼있습니다. 그렇다고 비가 새는데 “아, 왜 이렇게 비가 자꾸 많이와” 하면서 비를 한탄한다든지 아니면 비 새는 걸 쿵쿵거린다 해가지고 이 비 새는 게 안 새는 것은 아니잖아.

 

그럼 비 새는 걸 확인을 하고 나면 반드시 본인은 탐진치는 억제를 할려고 해야 됩니다. 억제를 해야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탐진치라고 하는 것은 비가 새는 것들이라. 탐진치가 안 일어나도록 본인이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행동으로.

그래서 억지로라도 본인이 탐진치가 나온다 할 거 같으면 그거 그만두어야 됩니다. 행동하는 것도 그만두어야 되는 거고, 말하는 것도 그만두어야 되는 거고, 생각하는 것도 딱 그만두어 버려야 되는 거고. 확인하고 그만두고 확인하고 그만두고 하는 것을 계속적으로 반복을 해야만이 세간적으로 말하는 바른 견해를 확립을 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팔정도를 따르는 거라. 팔정도를 따라가는 거고.

 

그러면 출세간적인 바른 견해는 뭘까?

출세간적인 것은?

(움직이지 말아야 안 일어나는 것 아닙니까?)

당연히 안 일어나야 되겠지. 경전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 출세간적인 바른 견해는 하나 둘 셋 넷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깜맛사까따 삼마딧티(Kammassakatā Sammā-diṭṭhi)뭡니까? 업의 법칙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들이죠.

 

두 번째가 나마루빠 빠릭가하 삼마딧티(Nāma-Rūpa Pariggaha Sammā-diṭṭhi) 특성에 대해서 정신적인 특성과 물질적인 특성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

 

그다음 세 번째가 헤뚜빳자야 빠릭가하 삼마딧티(Hetu paccaya Pariggaha Sammā-diṭṭhi) 라고 그럽니다.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현상들에 대해서, 원인과 조건에 대해서 분명하게 아는 것. 그냥 저절로 생겨나는 것은 없습니다. 원인이 있고, 어떤 조건이 갖춰져가지고 나타나는가 분명히 이해하는것.

 

그다음 네 번째가 위빳사나냐나 삼마딧티(vipassanā-ñāṇa Sammā-diṭṭhi) 쉽게 말하면 아까 송천님이 얘기했듯이 사성제를 분명히 이해해서 무상·고·무아에 대한 성품들을 분명히 아는 것.

 

그다음에 다섯 번째가 로꿋따라 막가팔라 삼마딧티(Lokuttara Magga-Phala Sammā-diṭṭhi) 라고 합니다. 도와 과에 이르는 것, 도와 과를 성취해서 일어나는 바른 견해.

이렇게 다섯 가지로 보통 얘기해놓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 다섯 가지는 어떤 것들입니까? 조금 전까지는 출세간적인 것이 아니고, 세간적인 것은 그걸 확인하고 그걸 분명히 이해해가지고 안 하는 방어하는 역할들을 했습니다.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거라.

어떤 겁니까?

(체험해야 됩니다.)

본인이 스스로 체험해가지고 원인결과에 대해서 체험을 하고, 도와 과에 이르르든지, 그렇지 않으면 정신적인 현상과 물질적인 현상을 구분할 줄 알고, 그건 다 체험을 통해서 가능한 것들입니다. 체험을 통하지 않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출세간적인 바른 견해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아까 처음에 얘기했듯이, 걸을 때 분명히 지나간 것들은 그것에 대한 집착은 없습니다. 그것들은 없습니다. 거기에 어떤 것에도 '나'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없어요. 그러면서 걷는 것에 정신적인 현상과 물질적인 현상도 구분해지고, 나중엔 정신적인 현상이 앞선다는 것도 알게 되는 거고, 그리고 그 현상 자체 정신적인 현상이든 물질적인 현상이든 그 현상 자체가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거라. 동일하지 않다는 거라.

 

그냥 들어올림 이것만 아는 것이 아니고, 들어올려지는데 각각의 단계들이 따로 존재한다는 거라. 한 현상이 되는 게 아니고, 여러 현상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데 그 각각의 현상이 다르게 되는 거라.

잠이 오게 될 때도 잠이 오는 현상들이 각각의 현상들이 다르거든. 쑤심이 있고, 무거움이 있고, 짓누르는 것들이 있고, 각각이 다 다르다는 거라. 그걸 아는 거라. 그런 식으로 계속적으로 발전을 해나가는 거라.

 

"체험을 통해서 그것을 분명하게 이해했을 때 바른 견해는 성립된다" 하는 거라.

그래서 적어도 수다원에 이르게 됐을 때 바른 견해는 생겨난다는 거라.

그전에는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견해, 뭐 사상, 의견 이런 모든 것들은 바른 견해의 영역에는 속하지 못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럼 왜 수다원이 가장 밑바탕의 바른 견해의 조건이 될까?

전에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수행의 과위 네 가지에서 차이가 딱 하나로써 구분이 된다. 생존욕구가 많고 적고, 없고의 차이다"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수다원이 되도 생존욕구는 있습니다. 그래서 떨어지는 번뇌들은 세 가지 밖에는 없다고 얘기를 했습니다. 아라한이 되면 완전히 생존 욕구는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쉽게 얘기하면 "바른 견해라는 것은 생존욕구를 제거해나가는 과정"이라는 거라.

다음에 한번 그 얘기를 할 겁니다. 생존욕구, 갈애 부분이 해당이 되겠죠? 그래서 비생존욕구와의 차이점과, 구분하는 것들을 한 번 얘기를 할 건데 어쨌든 생존욕구의 차이 때문에 성인의 단계들이 구분이 되어져 나갑니다.

 

그럼 왜 바른 견해를 구분하는, 바른 견해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생존욕구로서 이해되게 될까?

(생존욕구 자체가 탐진치의 근본 원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렇기는 하죠. 그러면은 여러분은 바른 견해를 가지기 위해서는, 바른 견해를 가져야만이 다른 것들이 풀려나갑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살고자 하는 마음을 없애면 되는 거라? 생존욕구는 살고자 하는 마음만 있는 것은 아니죠? 뭘까? 아까 선등님이 답을 얘기했습니다. 견해를 가지지 않는 것!

 

견해를 가지지 않는 것이 정견을 세우는 첫 단추라.

어떠한 경우든지 견해를 가진다는 것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내세우는 것들입니다.

견해를 가지지 않으면 가장 두드러지게 차이 나는 것의 특징이 뭘까?

다툼이 없어집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름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견해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견해가 애매모호 하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애매모호 하다는 것은 견해를 모르는 거지 견해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누군가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본인이 수용하고 그것들을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 될 때 본인은 견해를 가지지 않는 것이 됩니다. 견해가 없게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여러분들은 테라와다를 하고 있습니다. 테라와다가 최고 좋죠? (예)

그게 바른 견해를 가지지 않는 겁니다. 본인은 그것으로 인해서 충분히 이게 최고 좋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가 보니까 '아, 이게 바른길이다'라는 확신도 들고 또 거기에 대한 체험들도 분명히 얻었습니다.

 

그러면 그거 안 한 사람들은? 그럼 저 사람들은 부처님 제자도 아니고, 저 사람들은 불교도도 아니고, 아니면 바른 견해가 없는 사람들인가? 그건 아니라는 거라.

그 길을 못 들어섰다고 하는 것뿐 인 것이지 내가 바른 견해를 가졌고, 저 사람들은 바른 견해가 아니고 잘못된 견해 삿된 견해들을 따르는 무리들이다 라고 얘기를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라.

 

바른 견해라고 하는 것은, 견해가 없다고 하는 것은 그러한 것들도 이해를 하고, 또 본인이 그것들이 좋은 줄 알 거 같으면 그 사람들한테 이것을 따라올 수 있도록 인도해주는 거라. 견해를 내세우지 않아도 충분히 인도가 가능한 건데, 괜히 견해를 내세워가지고 다툼만 일어나게 된다는 거라.

여러분들이 사는 모습이 잘 살고, 좋은 모습이 보여지면 다른 사람들이 그럽니다. 아, 저 사람 뭘 그렇게 공부하고 뭘 따르기에 저렇게 잘살까? 그럼 그 사람들이 따르게 됩니다. 바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그와 같은 역할들을 해나가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조금 전에 테라와다란 것들도 또 하나의 다른 견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집에서 쓰레기 많이 나오죠? 부처님은 여러 종류의 쓰레기들을 뭐라고 했을까? 그냥 쓰레기는 쓰레기일 뿐입니다. 좋은 쓰레기, 나쁜 쓰레기가 아닙니다. 단지 우리는 그걸 분리수거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분리수거를 하더라도 어쨌든 나한테서 떠나가야 되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은 그것이 어떠한 견해이든 "모든 견해는 모두 쓰레기다" 했습니다. 어떤 건 내가 가져와야 되는 거고, 어떤 것은 버려야 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라.

왜 그럴까? 모든 견해들이나 모든 사상들이나 지식욕이나 이런 것들은 무엇 때문에 생겨나는 거라? 존재욕구 때문에 생겨나는 거라.

 

존재욕구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존재욕구를 버리기 위해서 지금 수행을 하고 부처님이 가신 길을 우리가 따라가고 있는데, 어떤 거는 받아들이고 어떤 거는 버릴 거라? 그건 아니라는 거라.

버려지는데 순서가 있는 것뿐 인 것이지, 그 어떤 것이든 모든 것들은 쓰레기이기 때문에 다 버려버려야 되는 것들이라. 그래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견해라고 하는 것들도 궁극적으로는 다 버려버려야 되는 것들이라. 견해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라.

 

그래서 엄밀하게 얘기하면은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올바른 견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라! 단지 이게 올바른 견해다 하고 이해를 하고 출발점이 되는 것은 수다원에서 사실은 가능해지는 거라.

 

그렇다고 해가지고 여러분들이 수다원이 되기 전에 올바른 견해를 따르지 않는 것은 아니거든. 그래서 세간적인 바른 견해가 필요하다는 거라. 그것을 확인하고 그것들에 대해서 방어를 하게 되는 거고. 탐진치를 방어를 해가지고 말이든 행동이든 마음이든 나쁜 것들이 일어나지 않게끔 억제를 자꾸 해야 되는 거라.

 

가끔씩 여러분들이 '아, 이것이 옳다' 하고 부르짖게 될 때 본인은 조심을 해야 됩니다. 수행에서도 조심을 해야되고, 일상생활에 대해서도 항상 조심을 해야 됩니다. 존재욕을 버려버리고, 그리고 탐진치를 극복해버리고 나면은, 완전하게 바른 견해를 가지게끔 됩니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이해를 하면 됩니다.

"바른 견해는 견해가 없는 것, 그것이 바른 견해다" 하고 이해하고, 세간적인 것이든 출세간적인 것이든 그걸 통해서 바르게 이해하고 그걸 또 체험할 수 있도록 해나가는 것이 여러분들 몫이다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문답>

수행자 질문 : 스님. 그럼 견해가 없다는 것은 견해가 생기지만 그것을 취하지 않는다는 그러한 의미로 해야 되겠지요?

스님 답변 : 아닙니다. 그걸 마음속에 담아두질 않는 겁니다. 견해가 생기고 안 생기고 하는 것은 자기의 진행상황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그리할 것 같으면 그 견해가 생겼으면 그것이 계속 유지가 되어야 되는데 바뀌거든. 수행에서도 수행의 단계가 바뀌듯이 견해도 바뀌게 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내가 취하고 있어야 될 것이 아니라는 거라.

(수행자 : 취하지 않는 것)

예. 견해를 가지지 않아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