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8~2022 일상수행법문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정진의 원동력이다. (20210605)

담마마-마까 2022. 6. 11. 09:10

https://youtu.be/7YfZVTRlPAM

*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정진의 원동력이다. (20210605)

(12:58부터 녹취하였습니다.)

 

오늘은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정진의 원동력이다」 하는 제목으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요 밑에 산에 더덕이 많대요. 그 더덕은 한뿌리만 이렇게 나오는 것이 아니고 한뿌리가 발견되면 여러 뿌리가 같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캐는 분은 많이 캔다고 그래요. 여기 살고 있다고 하면 그 소리를 들으면 여러분은 어떻게 할까? 더덕 캐러 가겠지. 스님도 그랬어요. 더덕 캔다는 생각이 없었는데, 어디 쯤에 더덕이 있더라 하는 얘기를 들어놔놓으니까 내가 그 길로 가고 있더라고. 가면서 퍼뜩 생각을 했어요.

 

당나귀한테 길을 잘 가게 하기 위해서 당나귀 앞에 요렇게 당근을 매달아두는 거 알아요? 짐은 등짝에다가 잔뜩 실고 무거워 죽겠는데 그 당근을 보면 당근 먹을려고 하면서 앞으로 자꾸 간대요. 뭔가를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 그런 거와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여러분도 계획을 세우고 있죠? 뭔가 오늘은 뭐할 것이고 또 내일은 뭐할 것이고 또 어느 정도 뭘 모아야 되고 하는 계획들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물론 걸어가면서는 ‘왼발’ ‘오른발’ 하면서 알아차리고 가고는 있지만 그게 뇌리에 남아가지고 그걸 쫓아가고 있는 거라. 더덕을 쫓아서.

 

물론 스님도 살아가면서 계획을 세울 때가 있습니다. 어느 정도 지나고 나면 태국으로 가야지 하는 계획이라든지, 또 언제가 되면 이사장직도 내려놔야지 하는 그런 계획을 따라서 움직이고 있기도 하고 그럽니다.

죽음은 계획하고 있을까? 앞날에 대해서는 인생의 계획을 잘 세우고 있지만 사실은 앞날은 누구도 알 수 없는 거고 죽음은 확실한 건데 확실한 계획을 세우는 것이 안 나을까?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특히 이번에 코로나 백신을 스님도 맞았습니다. 나이든 사람들 우선 접종한다고 그래서. 그걸 맞으면서도 드는 생각이 ‘나도 인제 죽음을 향해서 나아가는 게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가까이에 있구나’ 하는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좀 더 위험한 사람군에 속해있고 좀 더 병들고 죽음이 더 가까이 다가와져있다는 거죠. 그래서 그걸 맞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그냥 여기 <붓다의 길따라>라고 하는 선원에 이렇게 계속 있어도 되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렇다고 뭐 당장 뭘 한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물론 살아가면서 안 아플 수 없고 안 늙을 수 없고 또 죽음을 연장할 수도 없고 그런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수행하는데 원동력이 돼야 되는데 원동력이 되지 못하면 그건 앞날의 계획을 불확실한 계획을 세우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어져 버리게 된다는 거라.

 

하나 여쭤볼게요.

죽음에 이르렀을 때 여러분들 마음은 어떨까? 어떤 마음일까? 어떤 마음이 들 것 같아요?

(수행자 대답 : 조그만한 뭐라도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매달릴 것 같습니다...)

보통 그렇죠. 더 살려고 하고. 조금 전에 얘기했지만 그런 방법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의학도 마찬가지고 계획을 세우는 것도 마찬가지고 그런 것들이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 다들 하고 있지만 아직도 인류가 그걸 해결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조금 더 살려고 해가지고 조금 더 살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조금 있으면 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거라.

 

차라리 그냥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 순간에 좀 편안하고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어쨌든 죽음에 이르렀을 때 일으키는 생각이 다음생을 좌우하는 것은 둘째치고라도 내가 일단은 편안하게 고통스럽지 않고 죽음을 맞을 수가 있으니까.

물론 살아오면서 여러 가지 공덕들을 많이 쌓아온 사람들은 그래도 내가 이런 이런 여러 가지 좋은 일들을 참 많이 했으니까 죽고 나서 다음생에는 나쁜 곳으로는 태어나지 않겠지 하고 위로는 삼을 수 있을지 몰라도 죽음 앞에 이른 사람들에게 그건 업의 법칙이 작용하는 것뿐인 것이지 그 사람에게는 실제적으로는 크게 의미가 없어져 버립니다.

 

어느 천신이 그런 얘기를 했어요. 부처님한테

“생명은 죽음으로 인도됩니다. 수명은 짧습니다. 죽음에 이끌려 간 자들에게는 구원이 없다. 죽음에 대한 이 두려움을 주시하고 안락을 가져오는 선행을 하여라.” 하고 얘기합니다.

죽음을 피할 수는 없으니까 죽는 것은 두렵기는 하지만 어쨌든 지금 살아가면서 행복하고 평온하고 안락하고 또 다음 생에도 그러한 것들을 누릴려고 할 것 같으면 선행을 자꾸 하라 하는 그런 뜻입니다.

 

저번 시간에 선행을 할 때 두 가지 조건에 대한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선행을 행할 때 기쁜 마음을 일으키면서 선행하라.

두 번째가, 선행을 행할 때 악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지를 분명히 확인하라.

본인의 탐욕이든지 아니면 뭔가 바라는 마음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있어가지고 그걸 하는 건지, 하는 것들을 잘 살피라는 뜻입니다.

그 두 가지가 선행을 행할 때 조건이다 하는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선행을 해도 죽음을 피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목숨은 얼마나 짧을까? 몸이 살아있으니까 그래서 숨을 쉬고 있으니까 이 시간 법문 듣는 동안엔 살아있을 것 같죠? 그런데 마음은 언제 바뀔지 모릅니다. 찰나 간에 마음이 떠나버리면 그 육체는 죽은 육체가 돼버립니다. 또 다른 말로 할 것 같으면 내가 뭔가 생각이 탁 바뀌어버리는 것도 죽음에 해당되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보통 그런 얘기들을 합니다. 자기들이 지키는 신념, 신념들을 버리는 사람들을 그 사회에서는 죽었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생각이 바뀐 것들을 얘기하는 거죠.

 

여러분들 마음이 언제 그렇게 바뀔지 모른다는 거라. 죽음을 꼭 육체적인 죽음에만 한정을 해놓진 않았습니다. 부처님은. 마음이 바뀌는 것도 죽음에 해당이 됩니다. 그렇게 치면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찰나 간에 마음은 끊임없이 바뀌어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생사는 찰나 간에 있다 하고 얘기를 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살고 죽고 하는 것들은 찰나 간에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들이라는 거라. 내가 지금 죽는 것은 두려워가지고 조금 더 살려고 발버둥을 치면서 생사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것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거라.

 

그래서 오늘 제목으로 얘기한 것이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정진의 원동력이 된다" 하는 얘기를 해놓았습니다.

끊임없이 뭔가를 노력하는 원동력이 될려면 그 죽음이라는 것이 찰나 간에 있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일으켜나가야 된다는 겁니다.

 

“안락을 누리려면 선행을 행하라.” 하고 얘기를 했습니다.

여러분은 그걸 지금 하고 있을까? 두 가지를 한번 지금 안락한 것이 어떤 건지 한번 판단해보십시오.

자애를 지니고 있습니까? 자애를 지닌 동안에는 여러분이 안락합니다. 행복하고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그 자애를 지닌다는 것은 말하고 행동하고 또 생각하고 하는 모든 것이 포함이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애를 지니지 않고는 어떤 것도 행하지 말아라 하고 얘기합니다. 왜? 안락하지 않기 때문에! 그럼 자애를 지니고 있든지.

 

그다음에 두 번째는 내가 선행을 행하면서 내 욕심없이 기쁨을 누리면서 선행을 행하고 있든지. 둘 중에 하나는 해야만이 안락할 거 아니라.

설혹 자애를 지니고 있다고 하든 아니면 선행을 행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여러분들을 열반에 이끌어주지는 못합니다. 맞습니까?

좋은 행위를 지어서 좋은 결과를 받아도 윤회 안에 들게 되고, 자애를 지닌 채 살다가 죽음을 맞아도 윤회 안에 있습니다.

 

윤회를 벗어날려면 어떻게 할까?

그래서 부처님이 천신이 그와 같은 게송을 한 것에 대해서 모순이 있다 하고 얘기하면서 얘기를 한 것이 있습니다.

생명은 죽음으로 인도된다.

수명은 짧다.

늙음에 이끌려 간 자에게는 구원이 없다.

죽음에 대한 이 두려움을 주시하고

세간의 이욕(離欲)을 버리고 고요함을 찾아라.

 

세간의 이욕을 버리라는 것은, 스님이 조금 전에 맨 처음에 서두에 얘기했듯이 뭔가 집착하는 대상이 있을 때, 더덕이란 것에 집착을 했으니까 땅을 보면서 더덕이 있는지 없는지를 보는 거라. 그걸 버려버렸으면 고요하게 걸어가면서 알아차림을 유지할 수 있는데, 더덕을 찾으려는 마음 때문에 그것들로 인해가지고 고요함이 깨져버리는 거라.

사실은 별 필요가 없는 욕심입니다. 솔직히 얘기하면 스님은 더덕잎이 어떻게 생겼는지 더덕 줄기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누군가가 더덕이 많더라 하는 얘기에 마음이 가서 땅을 보면서 더덕을 찾고 있는 거라. 더덕이 뭔지도 모르면서.

 

틀림없이 여러분들도 살아가면서 그런 우를 많이 범할 겁니다.

본인이 알지도 못하는 것들을 찾아 헤맨다든지 그것에 대한 확신이 들지도 않는데도 그것들을 행하고 나가고 있는 것, 그런 것들이 다 욕심에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그냥 행하면 되는데 오히려 확실한 것은 죽음이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내가 더욱더 열심히 살아야 되겠다는 마음을 지니고 한발한발 그냥 행해나가면 되는데 그러지를 않고 자꾸 계획을 세운다든지 또 아니면 뭔가 원하는 것들에 따라서 움직인다든지 이렇게 살아가지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이욕을 버리고 고요함을 찾아라 하고 얘기하게 됩니다.

욕심을 버려버리면 고요해지는데 대부분은 참 하기 힘듭니다.

 

가끔은 본인이 스스로 돌아보아야 됩니다.

내가 지금 마음이 고요한가?

마음이 가벼운가?

탐진치에 끄달려 들어가면 항상 마음은 무거워지게 됩니다. 그리고 뭔가를 원하려고 하고 밀쳐낼려고 하게 됩니다. 고요해지지 않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도 힘들 뿐아니라 고요해지지 않으면 마음은 항상 악한 쪽으로 움직이게 돼있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은 선행을 행하는 것도 필요한 부분이고, 그것이 이생을 행복하고 안락하게 해주는 데는 필수적인 것이고, 좀 더 좋은 생을 보장을 받는 길이지만 그것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 하는 것입니다.

아마 찰나 간에 죽음이 있다는 생각을 일으켰으면 스님은 더덕을 찾아서 그 길을 가지 않았을 겁니다. 더덕이 뭔지도 모르고 설혹 더덕을 캐왔다고 하더라도 그걸 어떻게 조리하는지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거 의미없는 것들이라는 거라. 스님이 잘하듯이 누구한테 더덕을 줄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건 내 먹는 거하고는 관계없는 것이 돼버리는 거라.

 

이렇게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내가 소유하고 즐기는 것들이 죽음으로부터 자신을 도와줄 수 없다.

그 어떤 것들도 자신이 죽는 것에 대해서 그것을 막아주거나 그것을 변경하도록 도와주는 법은 없다는 거라.

또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가족들이나, 친지들이 자신의 죽음에서 자신을 도와줄 수 없다.

여러분들의 몸조차도 여러분의 죽음으로부터 도와줄 수가 없다.

다 변하는 성품입니다. 여러분 몸들도 무상한 성품이고 여러분 가족도 여러분이 소유하고 있는 것들도 다 무상한 성품들입니다.

죽음도 무상한 성품입니다. 무상한 성품으로 무상한 성품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거라.

 

지금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것은 끊임없이 안·이·비·설·신·의를 통해서 접해지는 색·성·향·미·촉·법이라고 하는 것들 그것들에 의존하고 애착하고 집착하는 것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이는 것들은 그냥 보인다고 알아차려야 되는 것이고, 맛보는 것들도 맛본다고 알아차려야 되는 것이지, 그 대상을 좋고 싫음으로 자꾸 연결돼서 애착하고 그것들에 집착하는 패턴들로 해가지고는 절대 여러분들 마음은 고요해지지 않는다는 거라.

이욕(離欲)을 버림으로 인해서 고요해질 때,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수가 있고 여러분들이 죽음 앞에 이르렀을 때 내가 호흡을 알아차리면 호흡을 알아차리면서 죽음을 맞을 수가 있는 거고, 뭔가를 보고 있으면 보고 있으면서 죽음을 맞을 수가 있습니다.

고요해지지 않으면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스님은 출가해서 인제 벌써 35년 넘어 지났습니다. 그런데 참 많은 죽음을 봤습니다. 특히 테라와다 불교국가에서는 사람이 죽음에 임박하면 스님들을 반드시 초청합니다. 그래서 스님이 있는 자리에서 그 사람이 죽음을 맞도록 해주는 것이 그 사람들이 보통 하는 일들입니다. 우리는 죽고 나면 스님을 초청하지만 그 사람들은 죽음에 이르게 됐을 때 그때 스님들을 초청을 합니다. 그러면 참 여러 사람들을 봅니다.

 

그런데 “애착하지 말고 호흡을 알아차리세요” 하면

그걸 따라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걸 따라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얘기해줘도 그것들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뭔 차이 때문에 그럴까?

버리는 연습들을 못 해서 그런 거라.

그냥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습관들을 가지지 못하고 집착하는 것들만 계속해오다 보면, 마지막 순간에는 아무리 덕높은 스님이 가더라도 그걸 하지 못하는 거라.

적어도 여러분들은 죽음에 이르게 됐을 때는,

죽는 순간에 뭘 알아차리면서 죽을 지는 할 줄 알아야만이

이 부처님 가르침을 배운 덕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애착을 많이 가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평소에 행해오던 것들이 선행보다 악행이 많을 경우에 그 사람이 죽음에 이르게 됐을 때는 온갖 번뇌 망상에 휩싸여가지고 스님 소리들이 안 들립니다. 자기 생각에 그냥 묻혀 있어가지고, 뭐가 나타났다, 뭐가 어쨌다 하면서 계속 그 얘기들만 합니다. 남의 얘기를 들을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항상 선한 쪽으로 움직이도록 자꾸 길들여나가야 됩니다.

마음은 항상 그냥 방치해두고 놔두면 어떠한 경우든지 그냥 악한 쪽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래서 자꾸 자신의 마음이 뭘 하고 있는지, 자신의 마음에서 탐진치가 일어나고 있는지, 자꾸 확인을 하고 마음을 자꾸 되돌리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항상 어떤 때든지 자애를 지니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확인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마음에 자애가 있다면 마음은 선한 쪽에 기울어져 있는 겁니다.

 

그런 경우들을 보면서 평소에 선행을 행하는 것들도 참 중요하고, 자애를 지니고 있는 것들도 참 중요하고, 또 평소에 집착하지 않는 버릇을 가지는 것도 참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앞에 죽음이 놓여 있습니다.

살아가는데 내가 조금 더 열심히 살아야 되고, 조금 더 선하게 살아야 된다는 원동력이 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고 죽음이 가까이 있다고 생각해서 자꾸 내 계획대로 내 스케줄대로 살아가다 보면 마지막 순간에는 후회하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적어도 그런 데에 빠지지는 않도록 죽음이 여러분들의 삶의 원동력이 될 수 있도록 자꾸 노력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