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8~2022 일상수행법문

고(苦)가 만드는 락(樂)이라는 환상 (20210619)

담마마-마까 2022. 6. 12. 09:10

https://youtu.be/j7WKXgL0bC8

* 고(苦)가 만드는 락(樂)이라는 환상 (20210619)

(13:50 이후부터 녹취하였습니다.)

 

스님 손이 조금 부었죠? 벌한테 쏘였어.

그동안 말은 안 해서 그렇지 허리가 좀 많이 고생을 했거든. 사실은 걷는 게 조금 힘이 들었는데 그러려니 하고 생활을 하다가, 계속 치료받다가 이번에는 조금 다른 치료를 했어요. 어쨌든 조금 효과 있는지 좀 괜찮아져요. 전에는 허리를 굽히는 게 좀 힘이 들었거든. 인제는 허리를 굽히는 것도 괜찮고 해서 며칠 전부터 포행을 나가기 시작했어요.

여기는 숲이기 때문에 숲 속으로 포행을 갑니다. 가다가 아마 풀숲에 말벌들이 있었나 봐. 나는 해칠 생각이 없었는데, 그놈들이 생각하기에 팔이 휘적거리니까 자신들한테 위협적이라 생각이 들었는지 한 마리가 와서 탁 물더라고. 며칠 좀 부어있드만 인제는 거의 다 가라앉았어.

 

오늘은 왜 이 얘길 꺼내느냐면, "고(苦)가 만드는 락(樂)이라는 환상"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어서 했습니다.

부처님 말씀에 삶은 고(苦)라고 얘기하죠? 왜 고라고 할까?

왜 고라고 얘기해요? 즐거움도 있을 건데. 아무리 즐거움이 있어도 그것은 고를 바탕에 두고 있는 겁니다. 조금 전에도 편안하다고 하면은 불편함이 있었기 때문에 편안한 것을 아는 겁니다. 그 바탕에는 불편함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편안하다고 좋다고 포행을 하다가 벌한테 쏘이니까 또 괴로움이 일어나고. 편안하다고 하는 것 자체가 변하지 않는다고 할 거 같으면 우리 삶이 고라고 부처님이 얘길 안 했겠죠. 그런데 즐겁고 행복하다고 해서 그것이 항상 지속되는 것은 아니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염두에 두어야 될 것은 변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항상 나에게는 괴로움이 닥칠 수 있다는 생각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아무리 지금 상황이 좋다고 하더라도 괴로운 일들은 생겨나게 돼있다는 거라.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면 바뀌는 것들을 인정하지 못하니까 그것으로 인해서 괴로움은 더욱 배가되어 버리는 거라. 한 번 받으면 될 걸 두 번 받아버리는 거라.

 

스님은 이때가 되면은 배가 약간 고픕니다. 왜냐하면 평상시 때 법문이 없을 때는 열시반되면 공양을 채려주거든. 그러니 이때가 되면 배가 고파요. 그런데 좀 있으면 배가 부릅니다. 그럼 행복해지는 거라. 충만감이 생겨나니까. 그런데 그것도 오래 못가요. 오후 늦게 되면 배고픔이 또 찾아오게 되는 거라. 그렇다고 오후불식하는 스님으로서 먹을 수가 없으니까 그냥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는 거라. 아침까지.

배고픔이라는 고통이 없으면은 배부르다는 충만감들은 일어나지지를 않습니다. 또 배부른 충만감이라고 하는 것은 또 새로운 배고픔이라는 것들을 낳게 돼있다는 거라. 그래서 그 사실을 잊어버리면 안된다는 겁니다. 오랜 시간 앉아있는 것도 힘들고, 구부리는 것도 힘들고, 그래서 그것이 좀 낫고 나니까 산책하는 것이 참 즐겁거든. 그런데 그 산책도 또 다른 괴로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벌에 쏘이면서 스님이 생각한 게 "고가 만드는 락의 환상에 빠지지 마라."

 

보통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즐거운 일만 자꾸 찾을려고 합니다. 애들 노는 거 한번 보십시오. 뭐든지 즐거운 것들만 계속 찾습니다. 어른이 되어도 그 마음은 안 바뀝니다. 자기 스스로 즐거움을 찾고, 심지어 남을 해쳐가면서까지 남에게 피해를 입혀가면서까지 즐거움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그 즐거움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본인이 더 잘 압니다. 그래서 그걸 감추기 위해서 또 계속 즐거움을 찾습니다.

 

왜 그렇게 될까? 틀림없이 괴로움이 있다는 사실을, 변하기 때문에 괴로운 속성들이 언제든지 나한테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본인은 그걸 없는 것처럼 착각하는 이유가 뭘까?

여러분들에게 만약에 계속 사는 것이 아니고, 예를 들면 오늘 하루만 여러분들에게 삶이 주어진다고 할 거 같으면 여러분은 과연 즐거움을 찾아서 오늘 하루를 보내게 될까?

 

경전에도 그런 게 있습니다.

사형수들에게는 반드시 사형 집행하기 전에 사형수에게 물어봅니다.

“뭐 먹고 싶으냐?” 그게 천상에 있는 거라 하더라도 어쨌든 만들어줘요. 그 사형수에게. 그 먹고 싶은 것을 앞에 놔놔놓고 그 사형수는 이걸 먹고 나면 자기가 죽는 줄 아는데 그걸 먹을까? 먹을 거 같애요? 먹습니다! 조금 뒤에 나는 죽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는데도 지금 현재 먹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에 즐거움을 찾아서 그걸 먹게 됩니다.

 

그래서 하루를 여러분들에게 주더라도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죽습니다. 즐거움을 찾아서 살기 때문에.

왜 그렇게 되느냐면 애착하기 때문에! 애착이 있기 때문에!

사형수는 자기가 먹고 싶은 것에 대한 애착이 있습니다. 조금 뒤에 죽는다는 사실은 그 애착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거라. “하루 뒤에 당신은 죽습니다” 하더라도 나는 애착이 있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게 되는 거라.

 

그런 설문조사가 있다고 합니다. 젊은 사람 중에서 아이가 급작스럽게 죽음을 맞았어요. 엄마 입장에서는 굉장히 슬픔을 느낍니다. 그런 사람에게 어느 누가 가서 무슨 말을 해도 그 사람에게는 귀에 들어오질 않는다는 거라. 그런데 딱 하나가 귀에 들어온다는 거라. 그게 뭐냐면 “아직 당신은 젊으니까 하나 더 낳아 길러라.”

조금 전에 애착했던 아들이 죽어서 슬픔을 느꼈는데도, 또 다른 애착할 대상을 찾는다는 거라. 그 사람은 마음의 평화를 가지는 게 그 애착할 대상이 있기 때문에 마음의 평화를 가진다는 거라. 그게 일반적인 사람들이라.

 

여러분은 안 그럴거 같애요? 똑같다는 거라. 뭔가 애착할 대상이 있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즐거움을 찾습니다. 그런데 그 대상은 조금 전에 애엄마 같이 변하게 돼있습니다. 그럼 또 다른 애착할 대상을 또 찾게 된다는 거라. 그것이 가족이든 아니면 재산이든 명예든 뭐든 애착할 대상만 계속적으로 찾게 되는 거라. 그러면서 가지는 것이 그 애착할 대상이 자기에게서 멀어지지 않고 그것이 변하지 않고 나에게 계속적으로 즐거움을 주길 바랄려고 한다는 거라.

 

여러분들은 안 그렇겠지만 일반적인 불자들 잘하는 거 있죠? 기도하는 거! 뭐 때문에 기도합니까? 애착할 대상이 잘 되고, 또 내가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짐으로 인해서 내 애착이 계속 지속되길 바라게끔 되는 거라. 새해가 되면 점을 본다든지 여러 가지를 자꾸 희망하면서 그것들이 계속되길 바란다는 거라. 어찌 보면 불교가 애착할 대상을 계속 견고하게 만들어주고 있는 거라.

그게 불교만 꼭 그렇게 만들어주겠습니까? 여러분 자신도 그런 대상들을 계속해서 찾고 또 대상을 바꾸어가면서 나아갑니다. 사는 것이 변하기 때문에 괴롭다는 사실을 자꾸 망각을 하려고 합니다. 엄연한 진리이고 엄연한 사실인데, 본인은 계속 변하지 않는 것처럼 괴롭지 않는 것처럼 자꾸 애착할 대상을 찾는 거라. 그 애착할 대상에 딱 속박돼버리는 거라.

 

경전에는 그렇게 비유를 해놓았습니다. "노예와 같다."

노예는 어떤 식으로든 그 주인에게 묶여있습니다. 주인이 이거 해라 하면 이거 해야 되고, 저거 해라 하면 저거 해야 됩니다. 그 노예가 좋든 싫든 주인의 명령에 따라서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거라. 애착할 대상에 딱 속박되고 나면 여러분들 마음도 꼭 그와 마찬가집니다. 속박대상에 따라서, 속박대상이 시키는 것에 따라서 자꾸 움직여나간다는 거라.

 

천신이 와서 부처님한테 물어봅니다. 계속 애착할 대상들이 있으니까 그것으로 인해서 계속 애착할 대상을 바꾸다보니까 그게 윤회라는 거라. 이생에서도 윤회하는 거고, 다음생에서도 또 윤회하는 거고, 천신도 윤회의 대상에 속해있습니다.

부처님한테 와서 물어봅니다. 내가 윤회하지 않고 하는 게 너무 힘들기 때문에 윤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얼마나 끊어야 되느냐? 애착할 대상을 얼마를 끊어야 되느냐? 또 얼마를 버려야 되느냐? 그러기 위해서 얼마를 닦아야 하느냐? 하고 물어봅니다.

윤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이 속박을 끊어버리기 위해서는 내가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갖추면 되느냐? 하고 물어봅니다.

 

수행자들은 수행을 하다 보면 갖가지 것에 속박됩니다.

수행이 잘되면 잘된다고 애착해서 속박되고, 그게 속박됐다는 생각도 없이 그냥 거기에 머물러 있습니다.

수행이 안 되면 그것을 밀어낼려고 하는데 속박이 돼서 수행을 합니다.

어떤 신비한 현상이 일어나면 신비한 현상에 딱 속박돼서 수행의 진척이 또 안됩니다.

아니면은 공덕을 쌓는 사람들은 공덕을 쌓는 것에 대해서 딱 속박돼가지고 '아! 내가 이런 공덕 쌓았다 하는데 묶여져 있습니다.'

그걸 버려버려야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데 대부분 그렇게 대부분 잘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수행이 잘되면 잘되는데 거기에 머물러있습니다.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 끊임없이 잘 관찰되고 있는데, 그냥 일어나고 사라지고 있는 것뿐인데, 마음도 그냥 일어나고 사라지는데도, 몸과 마음을 분리하지도 않고, '아! 일어나고 사라지고 편안하고 좋네' 좋은 것에 속박돼서 그냥 한 시간을 보내버린다는 거라.

 

수행이 안되면 그거하고 막 싸웁니다. 한 시간 동안 고통이 있으면 고통하고 싸우고, 생각이 일어나면 생각하고 싸우고, 그러다가 한 시간 훌쩍 지나가버린다는 거라.

새로운 신비한 현상들이 일어나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속박을 끊기 위해서 수행하면서도 계속 똑같은 패턴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거라.

 

부처님이 다섯 개를 먼저 끊어라 하고 얘기합니다.

 

첫 번째가 보통 여러분들이 삭까야딧티(sakkāyadiṭṭhi)라고 하는 유신견(有身見)입니다.

여러분들 몸이든 여러분들 마음이든 실체로써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실체로써 변하지 않는 자신이 있다고 오해해버리는 거라. 그래서 그 자신에게 집착을 해버리는 거라.

 

수행이 잘될 때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 어디에도 자신이라는 것은 없는데, 거기에 속박되어버리니까 그냥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자신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있다고 착각을 해버리는 거라.

대상을, 고통스러운 느낌이든 망상이든 일어나면 그걸 떨쳐내는데, 그 대상만 보면 되는데 그 대상을 볼 생각은 안 하고, '이게 싫다' 자신이 '이게 싫다'는데 먼저 매여버리기 때문에 이걸 벗어나지 못하는 거라.

 

변하지 않는 실체는 없다는 거라. 자기 자신은 어떤 것이든 몸과 마음이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는데도 그것을 받아들이질 않고 '수행이 잘되고 있다' '수행이 못되고 있다'

누가? 내가 수행이 잘되고 있다, 수행이 못되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 오해를 해버립니다.

 

자신이 있다는 오해만 하지 않으면은, 수행이 잘될 때는 아! 이것이 몸의 현상이고 이것이 마음의 현상이고, 마음의 현상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뿐이고 몸의 현상도 그것들이 느낌이면 느낌 아니면 들림이면 들림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뿐이구나 하는 것들을 분명히 안다는 거라.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어떤 것에도 속박되지 않는다는 거라. 망상이나 고통도 꼭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본인이 수행이 잘될 때든 못될 때든 가장 먼저 체크해야 되는 것이 삭까-야딧티 유신견(有身見)입니다.

 

'나가 있다'고 '내가 이것을 알아차린다'고 혹시 잘못 오해하고 있지 않나 하는 걸 자꾸 체크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대상이 변하지 않는다고 할 거 같으면 일단은 내 지금 상태에서는 이것을 관찰할 상태가 못 되는 거라.

수행이 잘될 때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만 계속 있고 변하는 것이 안 보이면 일단은 멈춰야 돼.

호흡을 알아차리고 있는데 계속 망상이 일어나고 할 거 같으면 망상이 지속되면 일단은 멈춰야 돼.

멈추고 다시 몸과 마음이 고요해지는 것들을 먼저 관찰을 하고, 몸과 마음이 고요해지면 다시 그 대상으로 가야 되는 것이지, 그것으로 해가지고 한 시간 동안 잘되고 못되고 하는 것으로서 한 시간을 보내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맨 처음 얘기한 게 이 부분입니다.

"실체로써 변하지 않는 자신이 있다고 오해하지 마라." 그래서 "그것에 집착하지 말아라." 자신이라고 하는 실체가 없으면 수행이 잘되고 못되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한테 해당사항이 없는 겁니다. 단지 나는 대상을 알아차릴 뿐입니다.

 

수행이 안되니까 대부분은 그렇게 판단합니다.

'일어났다가 그냥 사라지는 것뿐이지 않느냐?'

'살아가는 것이 뭐 이런 것이지' 하고 생각들을 해버립니다.

'그냥 좋은 일이 있든 아니면 나쁜 일이 있든 그것도 변하겠지'

본인은 마음이 평온한 것처럼 착각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들여다보면은 본인은 진리하고는 관계없이 살아갑니다.

 

인연에 인해서 생겼다가 인연에 인해서 사라지는 것은 진리입니다. 그래서 이 괴로움도 사라지는 것은 틀림없는 거고, 이 즐거움도 사라지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것들을 수행에서 확인을 해야된다는 겁니다.

들이쉬는 숨이 있으면 내쉬는 숨이 있고, 들이쉬는 숨이 있으면 내쉬는 숨을 알아차리는 것이 있고, 내쉬는 숨을 알아차리는 것하고 숨을 들이쉬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하고는 다른 존재입니다. 다른 개체입니다. 그 어떤 것도 동일선상에 놓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조건에 의해서 사라진다는 사실을 내가 수행에서 분명히 알 거 같으면 부처님이 말한 인과법에 대해서 의심하는 것들이 사라져버립니다. 그걸 위찌낏차-(vicikicchā, )라고 그럽니다. 수행이 고요해지고 평온해지고 '나'라고 하는 착각을 하지 않게 되면은 대상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뿐이다 하는 것을 분명히 받아들이게 됩니다. 진리로써! 연결고리와 꼭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이 상태로써 계속 수행하면 된다 하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누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거기에 현혹돼진 않습니다.

누가 저기에 수행지도 잘해준다 할 거 같으면 거기에 갔다가, 누가 저기에 또 좋은 수행법 있다하면 거기에 또 홀짝 갔다가, 이렇게 마음이 바뀌질 않는다는 거라.

그 얘기는 바꾸어 얘기하면은 뭔가 새로운 것들을 찾아서 다니는 것과 꼭 마찬가집니다. 이 절에 기도 잘한다 그러면 이 절에 갔다가, 저 절에 기도 잘한다 그러면 저 절에 갔다가, 옛날 바라문들이 스승을 찾아서 이러한 단식, 이러한 고행들 각각의 수행방법들을 찾아다니는 거와 꼭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거기서 만들어지는 관습들이나 습관들을 그대로 따라하게 됩니다. 본인이 본인이 만든, 본인이 알고 있는 수행법대로 하는 것이 부처님의 수행법인데도 그것을 망각해버리고 자꾸 형식적인 것만 따라간다는 거라.

그게 계금취(戒禁取)라고 하는 실-랍바따빠라--(sīlabbataparāmāsa) 라고 하는 것입니다. 딱 형식에 자꾸 매여버리는 것.

 

수행이 잘될 때는 한 시간도 좋고 두 시간도 좋고 지속적으로 해나가야 됩니다.

그런데 한 시간 뒤에 나는 뭐해야 된다 하는 것으로 매여버리면 수행이 잘되지도 않을 뿐아니라 그냥 끝내버리고 또 그걸 해버린다는 거라. 지금 중요한 것이 뭔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수행을 해나가면은 적어도 '흔들림이 없는 자'가 됩니다.

이 세 가지가 됐을 때 본인은 아, 인제는 정확하게 내가 가야 될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편안하게 수행을 하게 됩니다. 편안하게 수행을 해나가기 때문에 어떤 대상을 만나더라도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거라.

 

그것이 설혹 탐심이 일어나든 아니면 진심이 일어나더라도 그것들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거라.

그래서 까마라가(kāma-rāga)라고 하는 탐욕 부분과, 빠띠가(paṭigha)라고 하는 진심·분노 부분은 세 개가 완전히 끊어지고 나야만이 가능해지는 부분입니다.

그것도 점차적으로 끊어지게 됩니다. 탐심이 급격하게 끊어지는 것이 아니고, 세 가지가 끊어지고 나서야 점차적으로 서서히 엷어지고 끊어지고 하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여러 번을 애착을 가지고 속박된 이 다섯 가지를 끊어라 하고 얘기합니다.

 

수행은 즐거운 것도 아니고 괴로운 것도 아닙니다. 단지 수행은 내가 그 대상들을 알아차리는 것뿐입니다. 알아차리는 대상에서 어떤 것에도 속박되지 않고 애착되지 않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상태를 그냥 확인하는 것뿐입니다.

지금은 그것들을 확인을 합니다. 아! 이게 뭐구나, 이게 뭐구나 하는 것들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수행이 진척되면 그것조차도 필요 없어져버립니다. 확인하는 것도 필요 없이 그냥 그 대상만 아는 것뿐입니다.

 

가끔씩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스님 이게 생멸지입니까? 이게 평등지입니까? 하고 얘기를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내가 예류과에 들었습니까?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하나 분명한 것은 수행이 잘되나갈 때는, '이것은 뭐다'하고 분석하고 관찰하는 것들은 점점점 엷어져야 됩니다.

수행이 완성단계에 들어가면은 그것들을 분별하고 판단하는 것들이 아예 없어져버립니다.

단지 지금 내가 행하는 것뿐입니다. 지금 내가 그것들을 알아차리는 것뿐입니다.

 

그거 알아차리면은 어떤 애착도 없고 어떤 속박도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점진적으로 대상들을 알아차려나갈 때 여러분들이 그 힘든 윤회로부터 벗어난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고(苦)가 만드는 락이라는 환상에 빠져있지 말아라는 거라. 지금 현재 즐겁고, 지금 현재 수행이 잘된다 해서 그 환상에 빠져있어서는 수행은 진척이 안된다는 거라. 또 괴롭고 힘들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빠져있어서는 또 수행이 안됩니다.

대상을 잘 알아차릴 때도 조심해야 되고, 대상을 알아차리기 힘들 때도 조심해야 됩니다. 지금 내가 해야 되는 것은 그 두 개를 다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서 단지 지금 현재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뿐이다 하는 거를 자꾸 명심해야 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문답>

Q 수행자 질문 : 스님 진심과 탐심 두 개 중에 우리가 수행을 해나가면서 다 엷어지는데, 제 경험으로 봐서는 진심보다는 탐심이 더 빨리 떨어지는 것 같은데...

스님 답변 : 그거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쌓아온 습성 따라서 그래서 보통 일반적으로 조금 행동이 느린 사람 또는 뭔가 탐구하는 것보다는 뭔가 몸으로 부딪치는 걸 좋아하고 하는 사람들은 탐심부분이 빨리 떨어지고, 그렇지 않고 뭔가 생각하는 것들이 많고 또 뭔가 빨리빨리 행동하고 하는 사람들은 진심 부분이 빨리 떨어지고 그럽니다. 그래서 어떤 것이 먼저 떨어지느냐 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그거는 획일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대신에 진심이 완전히 떨어지고 탐심이 완전히 떨어지고 하는 것은 예류과 이상 돼야 가능하기 때문에, 본인은 지금 그걸 신경 쓸 단계는 아니라. 단지 진심과 탐심이 일어났을 때 그 대상에 끄달려 들어가지 않도록 자꾸 조심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수행자 질문 : 일상생활에서 보면 탐심보다는 진심에 자꾸 끄달려들어가고, 탐심은 그전보다는 많이 옅어지는 것 같습니다.

스님 답변 : 나이가 들었으니까 별로 욕심부릴 게 없잖아. 그래서 그렇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숨어있는 거지 그게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봐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