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8~2022 일상수행법문

티나·밋다(thīna-middha) (20220604)

담마마-마까 2022. 8. 6. 16:53

https://youtu.be/F6DDgH5U_eg

* 티나·밋다(thīna-middha) (20220604)

(4:30 이후부터 녹취하였습니다.)

 

이제 많이 더워졌죠? 수행은 잘 되고 있어요?

더워지면 잘 빠지는 게 게을러지는 것! 뭔가 조금 할려고 그러면 금방 졸음이 몰려오고, 그래서 오늘 시간에는 수행에 장애가 되는 티나-밋다, 나태와 게으름 이런 부분에 대한 얘기를 조금 하겠습니다.

 

티나(thīna)하고 밋다(middha) 하고는 다른 거죠?

 

티나(thīna)는 어떤 거에요?

쉽게 말하면 '하기 싫은 것'. 내가 뭔가 할 일이 있는데도 그걸 하기 싫고, 움직이기 싫고, 다 귀찮고, 이런 것들이라고 생각하면 될 겁니다. 쉽게 말하면 마음이 뭔가를 할려고 활동적으로 움직이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위축되는 상태.

 

밋다(middha)는 뭘까?

밋다는 다른 말로 하면 하기 싫은 것이 아니고, 그냥 아예 '푹 빠져버리는 상태'라고 보면 됩니다. 아주 마음이 둔해져서 그것으로부터 수렁으로 빠져버려가지고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보통 졸음이나 이런 것들이 해당이 됩니다.

 

얼핏 보면 티나는 정신적인 상태인 것 같이 보이고, 티나는 그것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육체적인 현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게 불교역사에서도 해탈도론 이라고 하는 것을 쓴 부파가 있습니다. 스리랑카의 무외산사파가 보통 거기에 해당이 되죠. 거기 불교에 대한 해탈도론에도 보면 "티나는 정신적인 현상이고 밋다는 육체적인 현상이다" 하고 분류를 해놓기도 했는데,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절대 그렇게 보지를 않습니다.

 

둘 다 정신적인 현상입니다.

티나에 빠졌든 밋다에 빠졌든 그것은 정신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그걸 반드시 극복을 해내야 됩니다.

 

특히 여름철이 다가오고 이러면 많이 졸려집니다.

경전에도 바라문이 부처님한테 여쭤봅니다. 부처님도 공양 잡숫고 나서 오후에 (낮잠) 잔 적이 있느냐 하고 물어봅니다. 부처님도 잔 적이 있을까? 부처님도 잔 적이 있습니다. 부처님도 정직하게 얘기합니다. “나도 잔 적이 있다.”

그때 잔 적이 있다고 얘기하는 거는 육체적으로 굉장히 많이 피곤하고 할 것 같으면 몸에서 오는 반응이 옵니다. 몸이 쉬어라 하고 반응을 보이면 그때는 사실은 쉬어줘야 됩니다. 그런데 쉬어주지 않고 계속적으로 뭔가를 활발하게 할려고 그러면 몸이 항상 탈이 나게 됩니다.

 

스님도 여기 잔디 깍고 정원 가꾸고 이러다 보면 그런 신호가 올 때가 있습니다. , 이거는 쉬어줘야 되는데 아직 할 게 남았어. 그럼 보통 어떻게 해요? 그냥 다하고 쉴려고 그럽니다. 그런데 그건 어리석은 것들이라. 그러고 나면 항상 허리든지 어디든지 탈이 납니다. 그래서 인제는 그리 안 합니다. 하다가 딱 신호가 오면 아, 이거는 쉬어줘야 되는 거니까 딱 중단을 하고 좀 쉬다가 다시 또 그일을 마무리 짓고 이렇게 합니다.

육체적으로 피곤해가지고 몸이 녹초가 된 상태가 될 같으면 그거는 정신적으로도 쉬어줘야 되고, 육체적으로도 쉬어줘야 됩니다.

그런 경우가 아닌 것들이 이 티나-밋다에 해당이 된다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냥 자버리고 하는 것 이거는 티나 밋다에 해당이 안 됩니다. 그거는 그냥 잠입니다.

 

티나·밋다를 나눌 때 맨 첫 번째가 졸음이 오는 상태들을 얘기합니다.

만약에 육체적으로 많이 피곤해서 녹초가 되는 상태가 아니라고 할 것 같으면, 요즘엔 그런 경우가 참 드물죠? 그냥 단지 많이 더워서, 뭔가 하기 싫어서, 이런 것 때문에 존다든지 아니면 습관적으로 돼가지고 어떤 사람은 차만 타면 자. 어떤 사람은 책만 펴놓으면 자고, 이런 경우들 그거는 아예 정신적으로 둔해져가지고 습관적으로 바뀌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빨리 그것으로부터 탈출을 해야 됩니다.

또는 어떤 사람들은 집에 있는 것이 훨씬 좋으니까 누가 뭔 일이 있고 할 때도 그걸 자꾸 뒤로 미룹니다. 뒤로 미루면 그게 해집니까? 절대 안 해집니다. 아니면 나가야 될 일이 있는데도 안 나가고 그냥 집에 있게 된다든지.

그거는 습관적인 것들입니다. 그거는 빨리 바꾸어야 됩니다.

 

보통 경전에서는 티나-밋다에 해당이 된다고 판단이 되면은 "몸을 자꾸 움직여라." "친구들하고 자꾸 말을 해라." 아니면 "광명상이라고 해서 빛을 자꾸 쐬도록 해라." 그리고 부처님 같은 경우는 "사띠를 자꾸 하라" 그럽니다. 자꾸 수행을 해서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려고 노력을 하라는 거라.

그런 것들이 보통 부처님이나 경전, 주석서에서 말하는 티나-밋다를 해결하는 방법들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음에서 '수행하고 싶지 않다' 하는 마음이 들면 일단은 '장애가 왔다' 하고 판단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장애는 언제 올까? 수행 못할 때는 장애가 안 옵니다. 막 머리 굴리고 생각하기 바빠가지고 잠이 잘 안 옵니다. 망상하기 바쁘지.

수행이 어느 정도 잘 되면은 잠이 온다는 생각을 항상 가져야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수행하는 재미가 없을 때입니다.

대상이 항상 단조롭다든지 10분전이나 20분전이나 알아차리는 것이 똑같은 상태가 되고 이러면은, 사실은 변화가 있는데도 본인이 명확하게 그것을 사띠하지 못해가지고 변하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뿐인데, 단조로우니까 지루하니까 졸음이 오는 상태가 돼버리는 거라.

 

그런데 실제로는 대상은 항상 다이나믹하게 바뀌죠? 그래서 그걸 보면은 수행이 재미가 있습니다. 그러면 졸음이 오는 것들이 물러나지게 되는데, 보통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뭐냐면 나쁜 쪽에 있는 장애들, 좋은 쪽에 있는 장애들도 있습니다.

졸음이 온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냐면 하나의 대상에 좋은 것에 딱 붙잡혀있는 상태라. 붙잡혀있어가지고 거기서부터 벗어날려고 안 합니다. 수행할 때 너무 좋거든 기분이. 자기 기분에 그냥 붙잡혀있는 거라.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고. 자기 기분에 붙잡혀가지고 ', 나 너무 좋아' 거기에 딱 매여 있으니까, 그걸 주석서에서는 뭐라고 그러느냐면 "감옥에 갇힌 자와 같다" 밖으로 벗어나지를 못하는 거라.

그런 것도 졸음의 일종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잠이 오는 거와 마찬가지로.

 

스님이 누누히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졸음이 올 때는 느낌을 관찰을 해봐라."

졸음이 올 때는 틀림없이 느낌들이 있습니다. 가장 관찰하기 쉬운 건 어디서 오는 느낌이 될까? 눈꺼풀. 눈꺼풀에서 오는 느낌들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무겁든지 딱딱하든지 아니면 쑤시든지 어떤 느낌들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 느낌들을 관찰할려고 해보십시요. 그냥 단순히 '잠이옴' '잠이옴' '잠이옴' 하면 더 잠이 옵니다.

? 개념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뭐냐면 수행은 개념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개념으로 한다는 것은 항상 '나'라고 하는 것이 개입되기 때문에 내가 의도하는 방향대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것은 수행이 아니라는 거라.

 

빠라맛타(paramaṭṭha, 실재) 빤냣띠(paññatti, 개념) 구분할 줄 알죠?

그래서 개념으로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은 직접적으로 잠이 오는 것은 '잠이옴'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접촉하는 데서 일어나는 느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건 실재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실재하는 것들을 알아차리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눈꺼풀 같은 데서 일어나는 느낌들을 지속적으로 계속 관찰하면 그 느낌들이 다른 느낌으로 바뀌어버립니다. 또는 그 느낌들이 변하는 것들이 보여지게 됩니다. 그러면은 마음이 활성화가 됩니다.

그래서 졸음이 올 때는 스스로 어느 정도 방어할 수 있는 능력들이 자꾸 생겨나야 됩니다. 그게 졸음이 올 때 여러분들이 잘 관찰할 수 있도록 하는 것들입니다.

 

관찰을 못하면 졸음에 빠졌다, 그럼 그냥 티나-밋다에 빠진 상태에서 그냥 잠으로 빠집니다. 그래서 그거는 여러분들이 구분을 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티나·밋다와 잠은 다른 것들이라는 얘깁니다.

 

그다음에 특히 밥을 먹고 나면 식곤증이라고 보통 그러죠? 나른한 상태가 됩니다.

피곤하면은 졸리는 상태가 돼서 나른한 상태가 오기도 합니다. 또는 스님 같은 경우에는 스님이 안 좋은 습관 중에 하나가 뭐냐면 물을 잘 안 먹습니다. 왜 그러냐면 탁발을 하다 보면 항상 비벼먹으니까 물이 있는 음식들이 없거든. 국을 따로 놔놓고 먹는 것도 아니고, 여러분들이 아무리 국을 차려주고 해도 스님은 국에 건더기만 건져서 밥에다 넣고 반찬들도 밥에다 넣고 비벼서 먹지, 그게 습관이 돼버리니까 물을 안 먹어.

물을 안 먹을 때 생기는 것이 이 나른함입니다. 노곤노곤해지는 거라. 그래서 몸에서 수분이 부족할 때도 틀림없이 나른함이 온다고 스님은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올 때도 마찬가집니다. 어찌 해야 될까?

예를 들어볼게요. 조금 있으면 점심공양 할 거죠? 배에서 배고프다 하는 느낌이 있어서 밥 먹어요? 요즘은 아마 거의 그런 사람들이 없을 겁니다. 습관적으로 점심 때가 되면 밥먹고 저녁 때 되면 밥 먹고, 그런데 스님은 지금 딱 상태가 되면 어제 낮 12시 이후부터 먹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배가 되게 고픕니다. 진짜 배가 고프다는 느낌이 있어요. 그럴 때 사실은 밥을 먹어야 되는데, 대부분은 그렇게 하질 않는다는 거라.

 

그러면은 만약에 어차피 세 끼로 먹어야 된다, 그러면 양을 줄여라는 거라. 양을 줄여가지고 되도록이면 식사 때가 되면 되기 직전부터 진짜 배고프다는 느낌이 딱 일어났을 때 그때 탁 먹으면 참 맛이 있고, 또 그걸 먹다 보면 자기 스스로 ', 여기서 그만' 하고 탁 숟가락을 놓게 되는 거라. 자기가 먹을 양에서 보통 3분의 1을 뺀 양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배부르다는 느낌은 절대 일으키지 않도록 해야 만이 그게 습관이 자꾸 돼야만이 이 나른한 것들이 고쳐나갈 수가 있습니다. 먹는 걸 조절할 줄 모르면 안 됩니다. 나른한 게 자꾸 습관이 되면 자꾸 귀찮아집니다. 몸이라는 게.

 

그리고 뭐든지 습관적으로 자꾸 뭔가를 하게 됩니다.

사띠도 습관적으로 합니다. 그냥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그렇게 절대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나른함이라고 하는 것이 오지 않도록 자꾸 방어해야 됩니다.

그게 인제 나른한 것을 방어할 수 있는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는 뭘까? 여러분들이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감각기관을 통해서 뭔가를 보고 듣고 냄새맡고 하면서 알게 됩니다. 그런데 감각기관을 잘 방어하지 못할 거 같으면 항상 그거 따라서 휩쓸리게 됩니다. 봄이다, 누가 꽃구경 가자 할 거 같으면 그냥 마음이 금방 들떠버립니다. 또는 뭔가 향기로운 냄새가 난다, 그러면 거기에 호기심이 끌려서 금방 마음이 그쪽으로 향해져버립니다. 나른함이라고 하는 것이 그냥 축 쳐지는 것만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까 졸음하고 꼭 마찬가집니다.

감각기관을 수호하지 못해가지고 감각기관을 따라서 마음이 자꾸 요동을 치게 될 때 그것으로 인해서도 수행에서는 나른함이라고 그럽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두 경우 다 사띠를 놓치는 겁니다.

 

왜 감각기관을 따라서 여러분들이 움직여야 돼요? 그렇게 움직여 봐봐야 여러분들에게 얼마만큼 행복을 주는데?

사띠 한번 했을 때의 행복보다도 훨씬 못합니다.

찰나 간에 사띠를 할 것 같으면 올스톱이 돼버립니다.

탐 진 치라고 하는 것이 일어나는 것이 탁 스톱이 돼버립니다. 여기서도 마이크가 보이지만 전기 스위치를 탁 내려버리면 이게 일순 간에 탁 꺼져버립니다. 사띠는 그와 같습니다. ··치라고 하는 것을 스위치를 탁 내려놓는 거와 같습니다. 그러면 그때 오는 사띠는 진짜 마음이 청정해지는 것이, 대상이 있는 그대로 탁 드러나는 것이 보여집니다.

찰나 간에 사띠하면 그런 청정함을 맛볼 수 있는데 뭐하러 그렇게 감각기관을 쫓아다니면서 그걸 또 습관으로 만들고 있느냐는 거라. 그렇게 하지 말아라는 거라. 이것도 나른함에 해당이 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다음에 하품하는 것, 이것도 티나-밋다의 종류에 해당이 됩니다.

산소가 부족하다든지 아니면 몸 안에서 이산화탄소가 많이 생겨가지고 그걸 배출해야 될 때도 하품을 늘 하기는 합니다. 이거는 몸에서 일어나는 자연적인 현상이기도 합니다. 또는 뭔가 많이 과식을 했을 때 그럴 때 트림 같은 거나 하품 같은 것들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런 것들을 제외하고 일어나는 하품들, 습관적으로 하는 것들, 그런 것들은 수행에서 지루하기 때문에, 대상을 따라가지를 못하기 때문에, 그런 하품을 하게 됩니다. 그 순간에 마음은 정지한 상태가 됩니다.

 

가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수행이 잘 안 되고 하면 어떤 사람들은 눈을 질끈 감습니다. 그리하면 마음이 활성화가 될 줄 알고.

그런데 그거는 하품하는 것과 꼭 마찬가집니다. 그 순간에 정지해버린다는 겁니다.

차라리 그것보다는 빨리 자세를 바꾸어서 경행을 좀 빨리 한다든지, 아니면 앉아서 좌선을 하더라도 '일어남 사라짐'을 관찰하는 것보다는 '일어남 사라짐 않음 닿음1' '일어남 사라짐 않음 닿음2' 하면서 닿음 포인트를 계속 늘려서 마음을 자꾸 활성화시켜줘야 됩니다. 그래야 수행을 하면서 육체적으로 하품하듯이 마음이 탁 정지한 상태에서 그대로 그냥 가만히 있을려고 하는 것들을 몰아낼 수가 있습니다.

 

사띠가 이어지면 참 좋겠지만 사띠가 끊어지는 순간, 마음은 하품을 하게 됩니다. 마음도 게을러지고 탁 정지할려고 합니다. 그러한 것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대상을 많이 만들어서 마음에서 하품하는 일들이 없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그다음에 지루하다는 것, 이것도 티나-밋다에 해당이 됩니다.

수행 재미있는 사람 손 한번 들어봐요. 재미없어요 다? 그럼 다 지루하네.

수행에서 기쁨이 자꾸 일어나고 그러면 참 좋은데, 그런 것들이 참 잘 안 되죠? 그러면 그렇게라도 한번 마음을 먹어 보십시요.

대구에서 첫째 주에 오죠? 그래도 첫째 주라도 오고 나면 기분이 좋습니다. 뭔가 할 일을 해냈다는 생각에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충실감입니다.

뭔가 스님한테 공양도 올리고 수행도 하는 둥 마는 둥 했지만, 그러고 나서 가면 ', 참 잘했다' 하는 생각이 잠시라도 있게 됩니다. 매사에 충실감이 들도록 자꾸 만들어보라는 거라. 뭔가를 했다, 그럼 ', 내가 참 잘했네' 이런 마음들이 자꾸 길러지면은 지루한 것들에서 벗어나집니다.

 

수행에서도 마찬가집니다. 한번 마음을 먹으면 한시간 좌선하고 한시간은 경행하고, 하기 싫고 지루하지 왜, 한시간 다 못 채울 때도 많고 그냥 경행은 또 짧게 하고 싶기도 하고, 그런데 그걸 채우라는 거라. 채우다 보면 그래도 그걸 해냈다는 마음이 든다는 거라.

진리로 인해가지고 기쁨이나 행복감들이 일어나면 참 좋겠지만 그것같이 좋은 것은 없겠지만 안 돼도 다른 거라도 해가지고 기쁨이나 충실감들은 일어나도록 만들어야만이 마음에 지루함의 습성들을 습관들을 들지 않도록 만들 수가 있습니다.

 

계속 지루해진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본인의 습관들, 화를 굉장히 많이 내고 분노하는 사람들. ? 지루하다는 것은 부정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스님이 말을 하고 법문을 한다, 지루할 거 같으면 어떻게 되요? '빨리 끝냈으면' 합니다. 자기 마음에 안 든다는 거라. 부정적인 성향으로 인해서 마음에서 분노가 일어난다는 거라.

그럼 반대로 해보라는 거라 반대로! 뭐든지 사고를 긍정적으로 자꾸 할려고 그러고, 뭐든지 하더라도 그것을 자애롭게 자꾸 볼려고 해보라는 거라. 그러면 지루한 패턴들은 벗어나지게 됩니다.

 

그다음에 밥 먹고 나서 졸리는 것, 나른한 느낌들을 얘기합니다.

나른한 느낌들, 이런 것들도 티나-밋다에 해당이 됩니다.

밥 먹는데 얼마 정도 걸려요? 한 15분에서 20분 걸리죠? 그거 소화하는 데는 얼마 정도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의학적으로는 보통 2시간, 3시간, 4시간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몸을 한번 자세하게 보십시요. 그거 소화하는데 거의 8시간 걸립니다. 그건 스님이 압니다. 그걸 소화하는데 8시간이 걸립니다. 그마만큼 소화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식사 후에 나른한 느낌이 든다고 하는 것은 미쳐 소화를 안 한 상태에서 뭔가를 또 먹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나른한 상태로 아직 마음이 활성화가 안 됐다는 거라. 소화하는데 에너지를 쏟고 있기 때문에.

 

왜 그 패턴들을 계속적으로 가져갈려고 그러느냐는 거라. 아까도 얘기했듯이 배고프다는 느낌이 일어났을 때 먹는 습관들을 가지십시요.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는 것도 건강을 지키는 데는 굉장히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납니다. 그럼 그렇게 할려면 적게 먹어라는 거라. 그것도 아주 많이 적게. 한 끼를 먹어도 생활하는 데는 큰 불편이 없습니다. 물론 스님 같은 경우는 여러분들보다는 활동량이 아마 적을 겁니다. 여러분들 같이 사회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활동량이 적겠지만, 그렇다고 해가지고 스님의 활동량이 현저하게 여러분들 보다 적지는 않을 거라. 여기 이걸 관리하고 그다음에 스님 나름대로 움직이고 하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데 분명한 것은 한 끼를 먹고 나서 소화하는데 여덟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이라. 여러분들도 그걸 잊지 말고.

 

수행에서 티나-밋다라고 하는 악마가 쳐들어올 틈을 줘서는 안 됩니다.

그냥 단순하게 대상을 놓친다 해가지고 그 상태를 지속해버릴 것 같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나태해지고 졸음이 와지고 게을러지고 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대상을 놓치지 않는 것들입니다. 그 대상은 수행이 잘 될 때는 좋은 대상도 있고 나쁜 대상들도 있습니다. 탐·진·치라고 하는 것도 대상이 되기도 하고, 또는 수행에서의 대상들도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건 수행이 잘 될 때 해야 됩니다.

그런데 수행이 안 될 때는 어떠한 경우든지 나쁜 대상은 버려야 됩니다. 그것들이 수행대상이 되어버리면 그것들에 함몰되어서 그것으로부터 오히려 빠져나오질 못하게 됩니다.

 

왜 그럴까? 관념적으로 하기 때문에. ''라고 하는 것이 개입되기 때문에.

'저 사람 말하는 것이 싫다' 그럴 것 같으면 그냥 '싫다'고 알아차리면 되는데, 그게 안 되는 거라. 왜 수행이 안 무르익었을 때는 그 사람의 과거나 미래까지도 다 생각을 하는 거라. '나'라고 하는 것이 개입되기 때문에. 그러면 그 대상은 아예 사띠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거라.

수행이 안 될 때와 잘 될 때는 분명히 구분을 해서 여러분들이 해야 됩니다.

 

마찬가지로 조그만한 티나-밋다가 일어난다 할 것 같으면 수행이 안 무르익었을 때는 아예 그걸 대상으로 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냥 무시해버리고 '아이고, 내가 졸음이 올려고 하네' 할 것 같으면 벌떡 일어나서 그냥 경행하라는 거라. 아니면 눈을 씻으라는 거라.

그런데 수행이 잘 될 때는 그것들이 오는 길들을 분명히 느낌으로써 알아차리면 되는 거라.

자기한테 적절하게 수행을 할 수 있도록 해서 그 악마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자꾸 노력을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문답>

수행자 질문 : 스님, 조금 전에 수행을 하면 있는 그대로 대상을 관찰한다 아닙니까? 있는 그대로 관찰을 하는데 보통 보면 우리가 명칭을 ‘일어남’ ‘사라짐’으로 이렇게 명칭을 붙이면서 대상을 관찰하는데, 우리가 대부분 보면 ‘일어남’은 보는데 ‘사라짐’은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남’의 연속은 ‘있다’ 존재하는 것이 유(有)로 되기 때문에,

스님 답변 : 그게 무슨 말이라?

수행자 : 그게 현상이 사라지지 않고 그냥 계속 유지되는 ‘있다’가 되고,

스님 : 스님은 그게 이해가 안 되는데. 일어남은 알아차려지는데,

수행자 : 일어남만 보면 사라짐은 못보기 때문에 일어남과 사라짐을 동시에 봐야 되는데, 사라짐은 보지 않고 일어남만 보니까 하나의 현상이 고정되어서 ‘있다’는 그러한,

스님 : 항상한다?

수행자 : 예. 항상하는 걸로 자꾸 보이니까 수행이 재미가 없어지고 단순해지는 것이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스님 : 그렇게도 하는데 그거는 관념적으로 하기 때문이지.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명칭을 붙이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실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자 : 그렇지요. 실제로 그런 명칭을 붙이면서도 사실을 있는 그대로 봐야 되는데 볼 때 보면은 대게 일어나는 것은 들어올림이라는 것은 아는데 들어올림에 사라짐은 모른다 아닙니까? 그러니까 자꾸 ‘있다’에 빠지는 것이,

스님 : 들어올리면 사라짐이 없다는 것은,

수행자 : 들어올리는 게 사라지지 않으면 들어올림이 계속 유지 될 수가 없다 아닙니까?

스님 : ‘멈춤’이 있는 거지 왜 ‘사라짐’이 있어? 들어올려져 있는 상태인데,

수행자 : 들어올림 들어올림 들어올림 하면서 계속 변화가 일어나야 될 거 아닙니까? 하나가 사라져야 그다음에 새로운 들어올림이 일어나지요.

스님 : 계속 들어올려질 때는 사라짐이 있는 것이 아니고 멈추는게 보여야 돼. 사라짐이 보여지는게 아니고. 들어올려지는데 들어올려지는 것이 멈추고 멈추고 멈추고 하는 것이 보여져야 만이 그게 들어올려지는 것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것들이 보여지는 거라.

수행자 : 그거는 움직임이고요. 들어올릴 때 일어나는 감각들은 사라지고 새로운 감각들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

 

스님 : 그거는 들어올려진다고 할 때 명칭을 붙이지 않을 때 느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이 지속적으로 보여야 되는 거고, 그런 일어났을 때 멈추고 사라지는 것이 보여지는 거고, 사라지는 것이 멈추고 일어나는 것이 보여지는 거고 그거는 느낌이 그렇게 되는 것들이고, 그렇게 될 때는 이미 명칭을 붙이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그런데 지금 명칭을 붙인다고 할 경우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명칭에서 들어올리고 내려놓고 하는 것들이 명칭이 같이 붙여져야 됩니다.

수행자 : 명칭을 따라가면 개념이 돼버리는데요?

스님 : 지금은 대상에 마음을 갖다 붙이기 위해서는 명칭을 어쩔 수 없이 사용을 하는 거라. 실제적으로 그것은 위빳사나 수행하고는 관계가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런데 어떡할 것이라. 마음이 자꾸 밖으로 빠져나가니까 그걸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쓰는 거라.

수행자 : 제가 말씀 드린 것은 실재를 본다고 할 때,

 

스님 : 실재를 볼 때도 마찬가집니다. 일어나는 것이 보여지고 사라지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실제 수행에서는. 오히려 일어나는 것이 보여지는 것이 아니고 수행이 진척이 되면 사라지는 것들만 계속 지속적으로 보입니다.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사라지는 것들만 보이지, 일어나는 것들만 보이고 사라지는 것이 안 보이는 상태는 없습니다. 어떤 경우든지.

그래서 그거는 뭔가 수행에서 잘못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느낌을 보고 할 때는 명칭이 없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때는 마음이 고요하고 가벼운 상태가 돼야만이 그것들이 보여집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어떻게 하느냐면 그것이 안 됐는데도 일부러 그렇게 볼려고 합니다. 실제로는 마음을 갖다 붙이는 명칭 먼저 해가지고 마음을 거기다 갖다 붙여야만이 대상이 알아차려지는 것들이 점점 되고 나면 마음이 가벼워지는데, 그러고 나면 느낌들이 보여지게 되는데, 사람들은 그 과정을 그냥 무시해버리고 그냥 느낌만 먼저 볼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법은 없다는 거라.

그렇게 하면 안 돼.

그래서 자기가 명칭 없이 있는 그대로를 보는 상태가 되는 상태가 될 때까지는 그걸 먼저 할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남들하고 똑같이 따라할려고, 만약에 걷는 것도 (여기서 저기까지) 이것을 한 10분 한다 그러면 똑같이 십분 이렇게 왔다갔다 합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자기한테 맞는 방식대로 수행은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꾸 왜곡하게 됩니다.

수행자 : 그럼 사라짐이 보일 때는 사라짐만 계속 접목을 하면 되네요?

스님 : 그럼요. 느낌으로 사라지는 것만 보이면 사라짐만 계속 하면 됩니다.

자! 여기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