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8~2022 일상수행법문

2022년 안거입재_깔레나 담마사와낭 (20220709)

담마마-마까 2022. 8. 22. 19:41

https://youtu.be/gQ6AfxTy4IM

* 2022년 안거입재_깔레나 담마사와낭 (20220709)

 

오늘이 안거 날이죠? 일 년에 딱 한 차례 있는 날입니다! 도를 얻을 때도 딱 한 차례 있죠? 오늘은 그래서 "깔레나 담마사와낭(Kālena dhammasavanaṁ)" 이라고 하는 얘기로 하겠습니다. "적절한 때에 법을 들어야 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적절한 때가 언제 적절한 때일까? 스님 일정을 한번 봅시다. 보통 보면 우안거 안거 때가 되면 스님이 코로나가 없을 때 태국에 안거 법문 겸해가지고 법문을 설하러 2~3일 갔다가 옵니다. 또 안거 시작되고 나서 안거가 세 달 끝나고 나면 한달 이내에 또 까티나 가사 받는 때를 하죠? 날짜를 정해가지고 가사를 받습니다. 그러고 나면 다시 만행을 떠나야 하는 그런 시기가 됩니다. 그럼 그 기간 중에서 스님이 적절한 때를 타가지고 태국으로 갑니다.

 

태국에 가면 물론 법을 설하는 것도 있고, 또 일 년에 한 차례씩, 스님이 벌써 88년에 태국에서 계를 받았으니까 몇년됐지? 지금 한 35년 너머 됐습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분들도 많이 있고, 그중에는 장로스님이 돼서 뒷방에 있는 스님들도 있고 그래요. 그래서 그냥 가서 법에 대한 얘기들을 하고 그런 시간들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런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뭐냐하면 참회하기 딱 좋습니다. 압바나(Abbhāna) 마낫따(mānatta) 라고 해가지고.

한국에 있으면 어쩔 수 없이 소소한 계를 어기게 됩니다. 대표적인 거 한번 얘기를 해볼까요? 어떠한 계를 어기게 될까?

적절한 때가 아니면 밖에 나가서 식사를 못합니다. 적절한 때라는 거는 내가 많이 아플 때 그럴 때는 어쩔 수 없이 누가 공양청을 하면 몸보신하기 위해서 누가 청할 때는 나가서 먹습니다. 그럴 때는 적절한 때입니다. 또는 안거가 지나고 나서 유행기간에 들었을 때 그럴 때는 밖에서 공양을 해도 관계없습니다.

 

그런데 안거 기간 동안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밖에 나가서 공양을 못해요. 그렇다고 해가지고 사원 안에서 스님이 뭐를 해먹지도 못해요. 그럼 어떻게 해야 돼? 밥을 어디서 먹어야 돼? 물론 여러분들이 매일 올 수는 없으니까 공양을 올리는 날은 와가지고 공양 올리고 그다음 날은 냉장고에 넣어놓은 것들을 스님이 꺼내가지고 조리는 하지는 않고 그냥 밥이나 국 같은 거를 데워가지고 먹습니다. 그러면 계율에 어긋나지는 않는데, 그렇게 해도 밥이 없는 때가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 어쩔 수 없이 나가서 사먹어야 되는 거라. 그럼 계율을 어기게 되는 거라.

 

안거기간 동안에는 밖에 나가서 공양을 못하게 돼있으니까. 어기는 줄 알면서도 나가서 사먹어야 되는 거라. 그래서 사먹는 데가 딱 정해져 있습니다. 비구스님들은 자기가 먹는 음식을 선택을 할 수가 없습니다. 메뉴가 아무리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요거 먹고 싶다고 해서 '요거 주세요' 하지 못해요. 그럼 아예 그집에 가면 비빔밥만 주는 거라. “아, 스님 오셨습니까?” 하고는 비빔밥을 내줍니다. 그리 하더라도 어쨌든 밖에 나가서 공양을 하게 되는 거라.

 

그런 적절한 때가 아닌데도 밖에 나가서 공양을 해야 되는 때는 어쩔 수 없이 그걸 빨리어로 '빠찟띠야(Pācittiya)' 라고 그럽니다. '소소한 계율'이다 하는 겁니다. 그 소소한 계율은 반드시 다른 스님한테 참회를 해야 그게 그 죄가 없어집니다. 경전에 무서운 얘기가 나옵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소소한 계율을 어겼는데 참회를 하지 않았을 때는 어떻게 된다고? 지옥에 떨어진다는 거라. 여러분들한테는 그런 얘기가 없는데 출가한 비구스님들한테는 그렇게 합니다. 부처님이. 그마만큼 소소한 것도 어길려고 하지 말아라 하는 그런 뜻이 담겨있다고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이유로 해서 한국에서 참 힘들게 이 가사를 입고 있지만, 그래도 일 년에 한차례씩이라도 들어가가지고 그런 여러 가지들을 보름에서 한 달 정도씩은 참회하는 기간을 가집니다.

그러한 것들을 "적절하다고 하고 또 적절하지 못하다" 하고 얘기합니다.

 

담마를 듣기 위한 적절한 때는 어떤 때가 적절한 때일까?

또는 적절하지 못한 때는 어떤 때일까?

예를 들어서 법을 들을려고 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거는 적절하지 못한 때에 해당이 됩니다. 또는 내가 성질이 되게 나있다, 그럴 때는 담마가 아니라 누가 말하는 것들도 귀에 안 들어옵니다.

적절한 때는 어떨 때 적절할까? 법을 많이 들을 때가 언제 정도에 많이 들어요? 보통 이런 법회 있을 때죠! 쉽게 말하면 불재일 같은 때 또는 여러 가지 큰 행사 있을 때, 이런 큰 행사라든지 붓다의 날이라든지, 까티나 가사 날이라든지 이런 큰 날이 있을 때 그럴 때는 적절한 날에는 해당이 됩니다.

 

그런데 법을 듣는 거는 얼마나 자주 들어야 될까? 얼마나 자주 들어야 돼요?

매일 듣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듣도록 하는 것이 좋은데, 그 이유는 뭐냐면 여러분들 기억이 그렇게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 듣고 나서 내일 다시 그걸 기억을 해낸다 할 거 같으면 참 용한데 그렇게 되지를 못하니까, 오늘 조금이라도 듣고 기억을 해놓았다가 '내가 좀 바른 마음을 가져야지, 내가 수행해야지' 하는 마음을 단 몇분이라도 더 낼 수가 있다는 거라.

그러면은 법문으로 인해서 여러분들을 깨달음에 이르게 하지는 못하지만은 그렇게 '수행하고자 한다, 선한 마음을 내서 선한 공덕을 많이 짓도록 하겠다' 하는 마음을 내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수행해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거라.

 

위리야(vīriya)라고 하는 것은 다른 데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굳은 결의를 탁 다질 때 위리야는 증장이 돼나갑니다.

또 하나는 바라밀들이 충족됐을 때 위리야들은 커져나갑니다.

똑같은 담마를 설했는데 어떤 사람은 완전하게 그걸 이해를 하고, 어떤 사람은 편협되게 이해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전혀 그 의미를 파악을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게 뭔 차이냐면 바로 이런 바라밀의 차이, 그다음에 결정심의 차이 이런 것들 때문에 그것들을 못 받아들입니다.

 

여러분이 사리뿟따만큼 바라밀이 성숙되지는 않았죠? 아마 그럴 겁니다. 또는 지혜가 성숙되지는 않았죠? 앗사지 존자한테 사리뿟따가 가서 법을 청했을 때 앗사지 존자가 뭐라고 그랬어요? 우리 스승님은 이렇게 원인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을 우리 스승은 설했다. 원인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것들이 있다는 거라.

원인들로 인해서 생겨나는 법들, 뭐가 있을까? 이해가 안 되죠? 그런데 사리뿟따 존자는 그걸 이해 합니다. 다리가 굽혀져 있으면 아프죠? 고통이 있으면 고통이 있다는 걸 아는 거라. 그런데 이거는 뭐가 원인이라서 고통스러운 거라? 다리가 굽혀져 있어서 고통이 오는 거라. 다리가 굽혀진 게 원인이 돼서 고통스러운 것이 있다는 거라.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다리를 펴면 그 고통은 사라지게 돼있다는 거라. 그래서 사라졌다는 걸 분명하게 알게 되는 거라.

 

사성제의 진리를 이 하나의 가장 간단한 것 가지고 사리뿟따 존자는 이해를 하는 거라. 그런데 일반적인 사람들은 원인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것들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못 알아듣는 거라.

그 차이가 나는 것이 뭐냐면 바라밀의 차이와 지혜의 차이와 결정심의 차이라.

여러분들은 그게 안 되면 그것들로 인해서 수다원과에 탁 이르지 못하게 된다고 할 것 같으면 더 노력해야 되는 거라. 더 노력해가지고 법을 자주 들어야 되는 거고, 더 노력해가지고 수행을 더 열심히 해야 되는 것이지, 옛날 사리뿟따 존자가 부처님 법을 매일 같이 듣다시피 하고 있을 때보다도 더 법을 들을려고 하지 않으면 그거는 깨달음 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방향으로 자꾸 나아가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깔레나 담마사와낭" 이라고 하는 거라. 담마를 들을 수 있는 때가 성숙되기를 기다리지 말고 담마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경우든지 자주자주 듣도록 해야 됩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씩은 반드시 담마를 듣도록 해야 됩니다.

 

그런데 꼭 담마를 들어야 할 때가 또 있습니다. 언제 담마를 들어야 될까?

우리 붓다의 길따라 선원 처음에 여기 만들었을 때 사람들이 오다가 어느 길로 가야될지를 몰랐어요. 그래서 만날 전화가 와요. “어디로 가야 됩니까?” 그런데 스님도 여기가 어딘지 생소한데 참 답해주기가 힘들어요. 내비 켜고 오다가 보면 엉뚱한 방향으로 가기도 하고, 처음에 스님도 그랬어요. 이리 안 오고 밑으로 이상한 방향으로 가고 그랬어요.

 

여러분은 지금 가고 있는 길이 바른 길입니까?

살아가고 있는 방향이 바른 길로 가고 있는 거라요?

그 길로 정확하게 가고 있느냐는 거라.

해탈의 길로 가고 있느냐는 거라.

선한 마음이 움직이는 쪽으로 가고 있느냐는 거라.

그렇게 되지 못했을 때는 법을 들어야 되는 거라.

바른 길로 가지 못하고 있을 때는 반드시 법을 들어야 됩니다.

 

그래서 '아, 이 길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아야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관습적으로 아니면 그냥 자기가 다른 사람이 시키는 거 그냥 그대로 따라할려고 하게 됩니다. 그게 맞는 길인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그냥 막 따라하게 될 때는 반드시 법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 법은 부처님이 설한 담마와 위나야가 돼야 되는 것이지, 다른 것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법을 설하는 스님들도 담마와 위나야 외에는 법을 설하지 못하게끔 돼있는 거고, 또 심지어 다른 사람들하고 얘기할 때도 담마와 위나야 외에는 아예 말을 못하게끔 합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이 와서 “스님, 우리 애가 손주를 낳았어요” 그러면 스님이 뭐라고 해주꼬? '아이고, 기쁘시겠네요' 그리해줄까요? 답을 할 수가 없는 거라.

왜? 그거는 담마와 위나야 하고는 관계가 없는 세속적인 일이라는 거라.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겨가지고 “스님 많이 힘듭니다” 그럴 것 같으면 그건 담마와 위나야에 맞춰가지고 “이런 식으로 하면 됩니다” 하고 조언은 해줄 수가 있는데, 그 외에 벗어나는 것들은 답을 해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와가지고 별로 의미없는 얘기들을 할려고 그럽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스님도 여기 있으면 사람들 오는 게 피곤해. 자기가 하고 있는 것들을 그냥 그대로 맞는 방향으로 쭉 나아가면 되는 거고, 기쁜 일이 있으면 그냥 세속사람들이니까 잠시 기뻐했다가 평정심을 유지하고 자기 할 일을 쭉 해나가면 되는데, 기쁘면 또 너무 기뻐했다가 슬프면 또 너무 슬퍼했다가 그렇게 하는 거라.

왜 그러는 거라? 마음이 고요하게 안정돼있지 못하고? 그거는 변하고 있는 것들의 속성을 지니고 있는 건데, 변한다는 생각을 못하니까 막 그냥 감정에 끄달려서 들어가지는 거라.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바른 법을 들어야 할 때는

자기 자신이 바른길을 들어섰다고 확신이 안 들 때는 반드시 법을 들어야 됩니다.

마음이 요동치거나 안정돼있지 못할 때 그럴 때는 또 바른 법을 들어야 됩니다.

 

또 하나는 얼마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는데 많이 고통스러울 때, 고통스러워서 스님한테 전화가 와서는 “스님, 내가 힘들어 죽겠습니다.” 그러면서 막 웁니다. 그걸 어떻게 해줄까? 법을 듣고 그 고통스러운 느낌을 관찰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그 고통스러운 것에서부터 마음이 벗어나야 됩니다. 그래야 그 고통을 있는 그대로 관찰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사실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런데 본인이 거기에 빠져가지고 그냥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거라. 그럴 때는 스님도 답이 없습니다. 뭐 어떻게 해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본인이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강하게 일어날 때는, 그럴 때는 반드시 법을 듣도록 해보십시요. 그러면 마음은 고요하게 안정되고 그리고 있는 그대로를 보게끔 됩니다. 지금 내가 이 상황에서 해야 될 게 뭔가 하는 것이 드러나지게 됩니다.

 

그다음에 또 반드시 법을 들어야 될 때가 있습니다. 닙바나가 가장 큰 행복이죠?

해탈을 바라고 행복을 바란다고 할 거 같으면 법을 들어야 됩니다.

 

'내가 이생에서 그냥 좋은 일만 하겠다.' 하고 마음을 먹었다, 또는 '이생에서 나는 좋은 사람으로서 그냥 살기만 하겠다' 그럴 것 같으면 담마를 자주 안 들어도 관계 없습니다. 그냥 세속에서 말하는 좋은 것들 착한 것들 자꾸 하고 마음이 자꾸 나쁜 쪽으로 가지 않도록만 만들어주고 그렇게 해도 됩니다.

 

그런데 억울하다 싶으면, 이 몸을 받고 태어나가지고 그것만 하고 또 윤회해가지고 살 것이 억울하다 싶으면, 그래서 내가 좀 더 수행해가지고 해탈·열반을 체험하고 오겠다 하는 마음이 든다 할 것 같으면 법을 들어야 됩니다.

 

법을 듣는 것을 하지 않으면 지혜가 일어나는 것이 더딥니다.

지혜가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어디에 해당이 되는지를 견주어보기가 또 힘들게 됩니다.

스승님이 항상 옆에 있을 거 같으면 몰라도 그러지 못할 경우에는 가고 있는 방향이 바른길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가 힘이 든다는 겁니다.

그래서 법은 여러분들에게 굉장히 소중한 것들입니다.

 

이럴 때는 반드시 법을 자꾸 듣도록 해야 됩니다. 요즘 법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많죠? 누군가는 모르지만 인터넷에 막 올려줍니다. 그럼 그거 그냥 들으면 됩니다. 옛날 같이 힘들게 부처님 찾아가고 스승 찾아가가지고 거기 가서 한자라도 들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지금은 아주 수월하게 듣습니다. 그마만큼 더 자주 들을 수 있는 조건은 돼있는데 그 조건을 충족해줄려고 하지 않는 마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법은 듣고 싶은데 법을 들어서는 안 되는 조건들도 있습니다.

 

그거는 일반적인 거니까 여러분들이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겁니다.

많이 피곤할 때, 정신적으로나 아니면 육체적으로 많이 피곤하고 할 때는 법을 들을려고 하지 말고 쉬어줘야 됩니다. 육체적으로 피곤하면 육체를 좀 쉬어줘야 되는 거고, 정신적으로 피곤할 거 같으면 그 정신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그러고 나서 법을 들어야 되는 것이지, 그게 되지 않은 상태에서 '법을 들으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게 되면 그 법은 그냥 지식이 돼버립니다. 실천하기 위한 도구가 되지 않고 그냥 알음알이만 자꾸 쌓이는 형태가 돼버립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뭐냐면 좀 여유가 있어야 됩니다.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있어야 되고 정신적으로도 조금 여유가 있어야 됩니다. 그런 여유가 없을 때는 법을 들을려고 하지 말고 그럴 때는 차라리 그 시간에 정신적으로 여유가 생기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오히려 더 효율적이라는 거라.

 

그다음에 세 번째가 법은 귀가 열려야만이 들을 수가 있듯이, 법은 여러분의 마음이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을 준비를 해야만이 법을 듣기가 수월합니다.

그 얘기는 뭐냐면 법을 설하는 것이 각각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스승과 저 스승과 또 다른 스승들이 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이 열려있지 못하면 취사선택을 합니다. 그리고 그게 부처님 법에서 어긋나지 않는데도 틀렸다고 얘길하게 되는 거라.

 

담마와 위나야에서 벗어나지 않는 거고, 부처님 말씀과 배치되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어떤 법이라도 그것이 대승 스님이 얘기한 것이든, 아니면 심념처 스님이 얘기한 것이든, 그렇지 않으면 일반 재가인들이 얘기한 것이든 가려서 들을려고 하면 안 됩니다.

마음을 그것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만들어줘야만이 법이 여러분들에게 들어가서 그것들을 실천합니다. 그럴 때는 잘 가려서 지금 법을 들어야 할지 법을 듣지 말아야 할지를 잘 선택을 하시면 됩니다.

 

이제 안거를 시작을 했습니다.

법은 왜 들어야 할까? 왜 듣습니까?

살아가면서 여러분들은 어떤 식으로든 죽음이 오기 전에 살아가야 됩니다. 살아가면서 참 많은 일들을 합니다. 몸과 말과 마음으로 하는 것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에서 좀 더 선한 방향으로 그 몸과 말과 마음으로 하는 것들을 할 수 있게끔 하기 위한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수행에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법을 듣습니다.

 

이 두 가지 조건이 해당이 되지 않으면 법을 들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단순히 새로운 것들이라서 또는 단순히 나의 지식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할 것 같으면 그거는 악한 마음들이 더 강하게 만드는 역할들을 해준다는 것을 잊지 않고, 선한 것들을 더욱더 많이 하기 위해서,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 법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법을 들어야 할 때가 도달을 했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깔레나 담마사와낭. 적절한 때에 법을 들어라" 하는 것으로서 법을 설했습니다.

 

<문답>

수행자 질문 : 스님, 아까 말씀 중에서 결정심에 대한 것이 잘 이해가 안되는데, 그걸 좀 보충설명을 해주십시요.

스님 답변 : 결정심은 종류가 참 많이 있습니다. 결정심은 빨리어로 아딧타나(adhiṭṭhāna) 라고 그러는데, 예를 들어볼게요.

사띠를 한다, 사띠를 할 것 같으면 대상이 있어야 될 겁니다. 대상을 알아차릴 때도 그 대상이 있다는 것을 결정심으로서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결정심이 없으면 대상 자체를 어렴풋하게 알아차리게 되고, 그 대상을 정확하게 그 위치에 있는 것을 알지를 못합니다. 그럴 때도 결정심이 드러나지게 됩니다.

 

또는 마음을 내가지고 뭔가를 해야 된다 할 것 같으면 그래 '내가 이거 해야지!' 하고 마음을 탁 다잡을 때도 결정심이 작용을 합니다. 쉽게 말하면 대상이 있으면 그 대상을 분명하게 탁 인식하게 될 때 결정심은 성장한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게 결정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들을 - 바른 것들이 돼야 됩니다. 바른 것들을 하는 모든 것들에는 결정심이 크든 작든 조금씩은 들어가 있습니다. 들어가 있는데 들어가 있는 것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그것을 인식하고 그것들을 더 증장시킬려고 하고 또 계속 이어지도록 할려고 할 것 같으면 결정심이 강해져야 됩니다.

 

강해지지 않으면 노력하더라도 한두 번 하다가 금방 끝나버린다는 거라. 결정심이 있는 거하고 없는 것하고는 그런 차이도 있지만, 결정심이 있더라도 힘이 강하면 그것들이 오래 지속돼진다는 거라. 그런 차이점이 있습니다.

아딧타나는 전에 언제 한번 법문을 한 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번 참고로 하시기 바랍니다.

자! 여기서 오늘은 마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