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8~2022 일상수행법문

2022년 붓다의 날_「붓다의 권위」 (20220514)

담마마-마까 2022. 7. 10. 20:00

https://youtu.be/dYIOPmi0jQU

* 2022년 붓다의 날_「붓다의 권위」 (20220514)

 

··· 붓다의 날입니다. 프린트물에 「붓다의 권위」라고 되어있죠.

그래서 오늘은 수행 얘기보다는 부처님의 권위가 어떤 건지를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또 부처님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가지는 것들을 목표로 했습니다.

의사 선생님 손들어봐요? 의사면허증 있어야 진료를 할 수 있죠? 의사면허증은 곧 그 의사가 의료행위를 할 수 있는 권위를 부여해주는 것들입니다. 그것 없이도 진료를 잘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그게 없으면 신뢰를 안 합니다. 실력은 오히려 면허증이 있는 사람보다도 훨씬 뛰어날 수도 있는데도 신뢰를 안 하는 게 사회적인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그게 불교에도 그런 것이 없었으면 참 좋겠는데 종교에도 엄연하게 그게 존재를 합니다.

 

종교에서는 뭐가 권위를 세워주는 것이 될까? 특히 불교 같은 경우에는 뭘까요?

담마(dhamma )와 위나야(vinaya )!

담마와 위나야가 의사증명서와 같은 것이고 권위를 부여받은 겁니다. 부처님으로부터. 그래서 진리의 가르침을 듣고 그것 따라서 실천해나가고, 그리고 일반적으로 선하고 안정되고 바르게 살아가는 생활들을 위나야가 담당을 하고. 그래서 꼭 부처님이 안 계신다고 하더라도 이 담마와 위나야가 여러분들을 좀 더 좋은 방향으로 인도해주는 것이고, 또 부처님을 대신해서 위임장을 받은 것이 바로 담마와 위나야 입니다.

 

그래서 '내가 뭔가 확인하고 싶다, 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다'고 할 때는 비교해봐야 되는 게 담마와 위나야입니다.

계율에 어긋나지 않게끔 잘 지키며 살고 있는지, 또 부처님 가르침에서 "이것은 하지 말고 이것은 하라" 하는 것들은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지, 그걸 자꾸 판단을 해야 됩니다. 그게 여러분들에게 꼭 필요한 그런 부분입니다.

 

불교에서는 오직 유일하게 권위를 인정받는 게 상가 스님들도 아니고, 부처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부처님이 어떻게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바로 담마와 위나야 입니다.

항상 선원에 올 수도 없고 항상 스님한테 질의문답을 할 수도 없을 때는 이 두 가지를 항상 지침 삼아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부처님 태어나시고 성도하시고 또 반열반에 드신 날이죠? 그래서 오늘은 과연 부처님의 권위가 어떤 건지 하는 것들을 알아보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부처님의 권위라고 하면 뭔가 위에서 아랫사람을 누르듯이 눌러준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런 권위를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 「권위」에 대해서 써있는 것들은, 여기 "웨사랏자(vesārajja)" 라고 돼있습니다. 그걸 보통 한국에서는 "무외(無畏)"라고 풀이를 합니다. "두려움이 없도록 하는 것들" 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왜 무외라고 했을까? 하는 것들을 스님이 의문을 좀 많이 품는 편입니다.

 

웨사랏자(vesārajja) 라고 하는 의미는 어떤 거냐 하면 그것 외에 달리 의지할 것이 없는 상태가 된 것들을 얘기합니다. "이거 외에는 어떤 것도 내 의지처가 되지 못하고 의지할 것이 없다" 하는 마음의 상태가 된 것을 웨사랏자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그 웨사랏자라고 하는 것은 그냥 두려움이 없는 상태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지혜가 생긴 상태를 얘기합니다.

 

지혜가 있어야만이 웨사랏자가 가능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것에도 자신감이 생기는 거라. 내가 해나가는 방향에 대해서, 또 수행하는 방향에 대해서, 살아가는 방향에 대해서 자신감이 생겨나는 거라.

당연히 그렇게 하니까 어떤 것도 두렵지 않게끔 되는 거라. 그렇게 봤을 때는 두려움이라는 의미가 약간은 있긴 있는데, 그것보다는 조금 더 뭐랄까 "변하지 않는 확신을 가지는 이런 상태에 가까운 것"이 웨사랏자라고 하는 단어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스님은 그것을 「부처님의 네 가지 권위」라고 해서 "권위"라고 이렇게 해놓았습니다. 4가지가 뭡니까?

 

첫 번째가 올바르게 깨달은 자라는 거죠! 그 누구도 부처님보다도 더 올바르게 깨닫고, 부처님보다도 더 뛰어난 경지에 도달한 분은 없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은 깨달은 그 자체로도 완전하게 깨달은 자로서의 권위를 이미 부여를 받고 있습니다.

 

두 번째가 부처님은 번뇌를 부순 자죠! 더 이상 번뇌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윤회를 하지 않게 됩니다. 경전 어디를 보더라도 남을 비방하기 위해서, 아니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법을 설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음속에서 번뇌가 없기 때문에. 오로지 법을 설한 것은 여러분들이 그 법을 따라서 부처님과 같은 경지에 도달을 하게끔 하기 위한 겁니다. 그래서 역사 어디를 보더라도 그마만큼 번뇌를 부수고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른 분은 없다는 겁니다.

 

세 번째가 장애가 되는 법들이 분명히 있다는 거라. 하지마라는 건 하지 말고, 하라는 건 하라는 거라. "이런 거는 여러분들 생활에 도움이 되니까 이렇게 이렇게 하시오" 하면 여러분들은 지체없이 따라야 됩니다. "이런 거는 하지 마시오" 할 것 같으면 하지 말아야 된다는 거라.

특히 오늘 같은 경우에는 여러분은 팔계를 받았죠? 불재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날이고. 그럼 불재일날은 부처님이 팔계를 지니시오 했으면 여러분들은 반드시 그걸 지녀야 됩니다.

 

출가한 스님들은 "4가지 바라이죄는 저지르지 말아라." "13가지 승잔죄는 범하지 말하라." 할 것 같으면 그걸 하지 말아야 됩니다.

왜 그럴까? 그것들이 깨달음을 이루는데 장애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계 안 지키면서 수행은 할 수 있어." 가능하지 않다는 거라. 이건 장애가 되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건 안 된다는 거라. 그런 것들을 낱낱이 설명하고 낱낱이 밝혀놓은 분 중에 부처님만한 사람이 없다는 얘깁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오늘 여러분들한테 프린트물로 나간 것입니다.

가르침을 따라 실천을 해보니까 반드시 그 결과는 있다는 거라. '아무리 부정을 해도, 아무리 노력해봐야 나는 해탈할 수 없어. 나는 아무리 노력해봐야 몸과 마음의 평안에 이르지 안 해. 스트레스를 벗어날 수 없어.' 이렇게 부정할려고 하더라도, 그 어떤 논리를 갖다 붙이더라도 실제 그것들을 실천한 사람들의 경험을 벗어날 수가 없다는 거라. 가르침을 실천해보면 반드시 그 결과가 나타난다는 거라.

 

이 4가지를 부처님한테만 있는 4무외라고 한국에서는 표현을 합니다.

그것들에 대해서 어떤 거리낌도 없고 어떤 두려움도 없다 해서 4무외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것보다는 부처님이 설한 4가지가 부처님 외에 다른 어떤 것에서도 이것을 뛰어넘을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은 부처님의 특권이고, 부처님한테 주는 권위라는 거라.

 

그 권위에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 따라서 수행하면 반드시 그 결과가 있게 되는 거라 그리고 존경할만한 분이고, 그 이상 가는 분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에게 항상 존경의 마음 품고 존경의 게송을 올리고, 조금 전에 여러분들이 붓다의 날 게송을 하듯이 게송을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수행을 해보니까 조금 조금씩 번뇌가 없어지고 엷어지고 하니까 '아, 이게 맞다' 하고 확신이 들게 되는 거고. 하다가 보면 여러 가지 장애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부처님이 장애로써 하지마라고 한 것이지, 이것은 더욱더 하라고 한 것이지' 하는 것들을 분명히 구분해서 그 말씀 따라서 살아가게 되는 거라.

그걸 권위라고 얘기합니다.

 

단순히 두려움을 없애게 할려면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죽음을 맞기 전에는 두려움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왜 그럴까? 생존욕구가 있기 때문에!

생존욕구가 있는 상황에서는 어떠한 경우든지 두려움들은 있습니다. 시끄럽고 도심을 벗어나고 싶어서 이런 데로 오죠. 조용하죠? 한 달 동안 아무하고도 말을 안 하면 정신이 약간 좀 이상해집니다. 왜 그럴까?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게 그렇게 좋은데도 그게 두려움으로 착각을 하는 거라. 살고자 하는 마음은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완전히 근절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두려움을 없애게 여러분들이 해줄려고 할 거 같으면 맨 마지막에 가서 가능합니다.

 

그래서 단순히 그냥 두려움을 없앨려고 하지 말고 하나씩 하나씩!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점차적으로 깨달음에 이를 수가 있는 것이지 한번에 확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단계에 이르고 나면 그 단계에 대해서 실증이 일어나고 그다음 단계로 올라가는 거고, 또 그 단계로 올라가서는 다음 단계로 올라가는 게 힘겨워보이면 '아, 내가 뭐가 부족하고 뭘 잘못하고 있나' 하는 것들을 잘 살펴가지고 장애가 되는 것들은 금지하고 더욱더 발전시켜야 되는 것은 발전시켜야 되는 거고, 그래서 그걸 보충하고 나면 또 다음 단계로 뛰어넘어가게 되고, 점점 자기 자신이 변해가게 되고 자기 자신이 점점 더 부처님이 깨달은 법으로써 나아간다는 것을 몸소 알아야 됩니다.

 

지금 법문을 통해서 아니면 여러 가지 경전을 통해서 부처님 법을 알았다, 그게 여러분들 겁니까? 착각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부처님 겁니다. 여러분들 거는 그것을 몸소 체험했을 때 여러분들 것이 되는 겁니다. 아직 그것을 경험하고 제 것이 되지 못했으면 그것은 여러분들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남의 소(牛)고 부처님의 법이지 여러분들 법이 아니라는 겁니다.

 

또 수행할 때 자기 자신을 체크할 때도 부처님 가르침과 계율에 대한 걸 잘 살펴야 되듯이 법을 설할 때도 그것에 따라서 자신이 법을 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법을 설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출 때 그러한 권위를 부여해주는 겁니다.

“너는 이제 법을 설해도 돼” 하면서 칭호를 주는 겁니다.

우리가 괜히 부처님한테 "이띠삐소 바가와 아라항 삼마삼붓도 윗짜짜라나삼빤노" 하면서 열 가지 명호를 외우는 게 아닙니다. 그 칭호는 그 칭호에 도달했을 때 그 칭호를 부여해주는 겁니다.

 

여러분들에게는 각자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래서 각자의 역할이 있습니다. 어머니면 어머니의 역할, 아내면 아내의 역할, 이름을 부여받았을 때는 그 역할을 완벽하게 완수해야만이 그 이름에 맞는 값어치를 할 수가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테라와다 불자다, 아니면 수행자다, 수행자답게 살고 있고, 테라와다 불자 같이 진심을 다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못하면 그 이름은 내려놓아야 됩니다.

반납해야 되지 왜 그 권위를 그대로 가져갈려고 하느냐는 거라.

 

오늘은 자꾸 뭐라 싸면 안 되겠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쭉 읽어보면 알 수 있는 부분들입니다.

중요한 건 뭐냐 하면 부처님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라는 겁니다.

살아온 사람들이, 그리고 과거의 선배들이 그리고 과거의 스님들이 경험해 왔던 것들이 결코 헛되지는 않습니다. 그분들이 확신을 가지고 그 길을 따라갔듯이 나도 확신을 가지고 따라가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5페이지 한번 보십시오. 아까 부처님의 4가지 권위에 대해서 얘기를 했죠? 그중에 4번째에 해당하는 빨리어 구절입니다.

'얏사코 빠나떼' 하는 것 있죠? 그 부분입니다.

 

얏사 코- 빠나 떼- 앗타-야 담모- -시또-.

Yassa kho pana te atthāya dhammo desito,

목적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설법을 하였다면

 

부처님은 뭘 목표로 두고 목적을 두고 설법을 하였습니까? (수행자 : 열반을 목표로)

열반을 향해서! 해탈을 향해서 나아가라고 법을 설하신 겁니다. 아무리 차제설법(次第說法)이라고 해서 보시부터 해가지고, 계를 지키고 천상에 태어나는 것을 얘기한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그치는 법이 없습니다.

차제설법을 잘못 이해하면 근기가 안되는 낮은 사람한테 그냥 요 부분만 설명을 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차제설법을 했을 때는 그런 설법을 했을 때 깨달음에 이르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까? 부처님 당시에? 없었습니다. 경전 어디를 보더라도 다들 수다원 이상에 도달했습니다.

보시 많이 해라, 아니면 천상에 태어나라, 이것만 법을 설했는데 어떻게 수다원에 도달을 하겠어? 그렇게 될 수 있는 법은 없습니다.

 

차제설법次第說法) 이라는 것은 점진적으로 법을 설해서 마음을 열도록 만들어서 깨달음에 이르는 법을 설하게 되는 것이고, 그걸 차제설법이라고 하는 겁니다.

우선 배가 고프면 밥을 먼저 먹여야 되는 거고, 밥을 먹고 배가 부르고 나면 이제 법을 들을 수 있는 상태가 되기 때문에 그때사 법을 얘기를 하는 거고, 그걸 차제설법이라고 하는 겁니다.

부처님 법 어디에도 해탈이라는 목적에서 벗어난 부분은 아무것도 없다는 거라. 경전을 아무리 읽어도 그것이 나의 해탈을 향해서 나아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으면 그것은 버려버려야 됩니다. 그것은 그냥 죽은 글자를 읽고 있는 것이지, 부처님의 살아있는 법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가끔씩 그런 분들도 있습니다. 막 대조를 해봅니다. 많이 알고는 있는데 실제 생활에서는 전혀 소용이 없습니다. 부처님 법이. 어디에다 쓸 거라? 뭔가 부처님 법을 들었고 배웠으면 조금 더 내가 해탈을 향해서 나아가는 방향으로 마음이 선한 마음이 되든지, 그런 마음이 더 많이 일어나든지, 아니면 남에 대해서 조금 더 포용적이고 관용적인 사람이 돼나가든지, 조금 더 거짓말 안 하고 바른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나가든지 해서, 점진적으로 나아가져야 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거라.

 

왜 나아가야 될까? 이생에서 그냥 잘 살아가지고 천상세계에 태어나면 끝이라서 그런 걸까? 그게 끝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라.

가장 두려운 게 뭔지 아세요? 죽고 나서 내가 어디에 태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운 거라. 윤회를 믿는 사람들은 그게 가장 두려운 부분입니다.

윤회를 안 믿는 사람들은 죽는 것이 두려운 거라. 언제 죽을지 모르고 어떻게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그게 두려운 거라.

 

죽음과 죽음 이후가 두렵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그 두려움을 자꾸 없애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됩니다. 지금 언제 죽어도 좋을 만큼 내가 부처님 법 따라서 잘 살아간다고 할 것 같으면 죽음이 그렇게 두렵진 않습니다.

또 지금 내가 수행해서 도와 과에 이르렀다, 아니면 도와 과에 이르지 않아도 이 길 외에는 다른 것은 없다는 확신이 들 정도가 될 것 같으면 죽음 이후가 두렵지는 않습니다. 아직 끝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래도 나쁜데 태어나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게 되는 거라.

그게 부처님이 목적에 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법을 하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세상 어디에 선구자들도 그런 법을 설한 사람은 없습니다. 어디에도 오직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법을 설한 사람이 없다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가

- 나 니이야-띠 딱까랏사 삼마 둑칵카야--.

So na niyyāti takkarassa sammā dukkhakkhayāyā'ti.

가르침대로 올바르게 실천하여 보아도 완전하게 괴로움을 극복한다고 하는 목적에 이르지 않는다면

 

가르침을 실천해보면 그 목표에 이르릅니다. 조금 실천하면 조금 이르는 거고, 많이 실천하면 많이 이르는 거고, 자기가 행한 만큼 자기가 거두어들이는 겁니다.

 

그래서 그 밑에 보면,

따뜨라 와따 망 사마노- - 브라-흐마노- - -- - -- - 브라흐마- - -찌 와- -까스밍 사하담메-나 빠띠꼬-뎃사띠-띠 니밋따메-,

-리뿟따, 나 사마누빳사-.

Tatra vata maṁ samaṇo vā brāhmaṇo vā devo vā māro vā brahmā vā

koci vā lokasmiṁ sahadhammena paṭicodessatīti nimittametaṁ,

sāriputta, na samanupassāmi.

"그래서 사리뿟따야, 사문, 브라만, 신들, 마라, 범천, 그 밖의 생명 어느 누구도 나에게 합법적으로 이론(異論)을 세울만한 기척조차 없는 것이다."

 

법을 설하는 목적이 뚜렷하고 그 법을 따라 실천한 사람들은 실천한만큼 바뀌기 때문에 그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누가 다른 이론을 제시한다고 하더라도 제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라.

 

그게 부처님의 권위입니다. 오직 부처님만이 가능한 것이었고, 그분의 가르침 따라서 나아가면 우리도 그와 같이 해탈에 이른다는 확신이 들어야 됩니다.

붓다의 날은 부처님을 회상하는 날입니다.

 

섣불리 그냥 하지 마십시오. '아, 이거 해서 될까? 저거 해서 될까?' 하지 말고, 100% 확신이 들었을 때 길을 따라오는 것이지, 확신이 들지 않는 길은 어떤 경우든지 따라가서는 안됩니다.

"너 죽고 나서 천상에 태어나도록 해줄게."

그걸 어떻게 믿을 거라? 그런 것들은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거라.

"죽고 나서 49재 지내주면 극락세계로 인도해줄게"

죽은 사람이 어떻게 알아? 사람들은 어리석게 그런 것들을 따라갑니다.

100% 확신을 가지고 그 길을 가면 간 만큼의 결과가 나타나는 다른 길이 있는데도 그걸 마다하는 거라. 힘들기 때문에. 따라 할려니까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는 거라. 그래서 그냥 쉬운 길을 택하는 거라. 남들이 다 마련해주는 길.

 

불교는 그런 법은 없습니다. 떠먹여 줄 수 있는 방법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어떤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그걸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먹는 거는 자신이 해야 됩니다. 갈 수 있는 길을 바르게 걸어갈 때 우리는 부처님 제자다 하고 얘기를 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확신을 가지고 부처님의 권위에 맞는 것들 권위에서 나온 것들을 따라서 실천하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7페이지에 보면,

합법적으로 이론(異論)을 세울 수 있다는 기척조차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는 안온의 경지에 이르렀다. (불안하게 되어버리는 원인은 일절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에 불안하게 될 가능성조차 없다.) 무외(無畏)의 경지에 이르렀다. (부처에게는 "위험하다"는 생각이 생길 곳이 없다. 마음속에 "위험하다"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 따라서 실천하는 것에 있어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권위는 그런 데서 나오는 겁니다. 실천할 때 그 권위가 발휘되는 것이지, 실천하지 않을 때는 의미가 없어지게 됩니다.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