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8~2022 일상수행법문

탐·진·치로 연결되는 스트레스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살아라. (20211204)

담마마-마까 2022. 6. 16. 09:00

https://youtu.be/AwI20BPhg6g

* 탐·진·치로 연결되는 스트레스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살아라. (20211204)

 

여러분은 언제 기쁨을 느낍니까? 언제 기뻐요?

수행할 때든 일상생활을 할 때든 언제 기뻐요?

(수행자 대답 : 내 자신이 스스로 만족하면 기쁨이 오지 예.)

만족하면 기쁨이 온다, 그러면 그 기쁨은 다음에 똑같은 걸 회상했을 때 그 기쁨이 다시 또 들어와요?

(똑같이 나올 수는 없지 예)

그러면 그 만족은 완전히 만족을 못 했겠네?

(완전히 만족하는 게 있겠습니까?)

 

오늘 얘기하고 싶은 거는, 기쁘다고 하는 것도 어찌 보면 스트레스가 됩니다.

뭔가 욕심을 부려가지고 그게 채워졌을 때 기쁨이 오는 것들도 있는 거고, 조금 전 같이 수행이 잘 돼가지고 내가 수행 잘했다 하는 생각 때문에 기쁨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기도 하고, 사실은 그런 것들도 탐심의 일종들인데, 탐·진·치가 다 같이 스트레스를 낳는다 하고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수행하고 싶다는 것들도 욕심이죠? 그런데 그런 거는 일으켜야 되잖아?

수행하고 싶다는 마음이 안 일어나면은 아예 더 좋은 것들도 얻을 수가 없으니까 일으켜야 되는데, 그래서 좋은 영향을 미치는 탐·진·치, 어찌 보면 스트레스죠! 그런 스트레스도 있고 그렇지 못한 스트레스들도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구분을 해야 할까?

(저 같은 경우는 만족하면서도 거기에 대한 사띠가 있느냐 없느냐 그것 가지고...)
사띠가 있으면 선한 마음이 일어나니까 당연히 나쁜 방향으로 흐르지는 않겠죠. 그런데 사띠가 계속 이어지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거지. 잠깐이라도 사띠가 끊어지면은 거기에는 욕심이 딱 들어오게끔 돼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주의해야 될 게, 아비담마에서는 '소마낫사 사하가따(somanassa-sahagata)'라고 하는 게 있었습니다. 기쁨을 구하는 종류들에 대한 얘기를 했을 때,

욕심을 부려서 오는 기쁨 그러니까 욕심을 채웠을 때 오는 기쁨이 있고,

또 선한 마음을 일으켰을 때 일어나는 기쁨들이 있습니다.

그걸 여러분들이 잘 구분을 해야 됩니다.

 

어떤 것이 좀 오래갈까?

만약에 예를 들면 수행을 잘했을 때 보통 삼매에 드는 사람들도 있고, 아니면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아주 수월해가지고 그 대상을 알아차려지는 것이 욕심이 나가지고 계속적으로 알아차리는 사람들도 있고, 그래서 그렇게 일어나는 기쁨들이 오래 가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오래가는 기쁨'들이 먼저 전제조건이 돼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 뭔가를 딱 채웠을 때, 예를 들어서 배가 고파가지고 밥을 탁 먹었다, 되게 기쁘죠? 그런데 조금 있으면 그 기쁨이 사라져버립니다. 그리고 다른 대상을 찾게 됩니다. 자고 싶다든지 눕고 싶다든지 아니면 다른 어떤 것들을 자꾸 찾게끔 됩니다.

마음이 선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고 기쁨을 느끼는 것들은 그래서 주의를 좀 해야 됩니다. 그래서 전제조건이 그 기쁨이 좀 더 오래 갈 수 있는 것들이 돼야됩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스님이 태국에 간다고 마지막으로 얼굴이라도 뵙고 보시라도 하고 싶어서 온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기쁜 마음으로 왔는데 항상 그 기쁜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죠? 오니까 불편하고 다른 사람들하고 붙어있으니까 혹시 코로나 걸릴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들기도 하고 그럴 겁니다.

그런데 애초에 가졌던 기쁨은 어쨌든 가지고 있습니다.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다음에라도 스님을 생각할 때 그 비슷한 마음들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아, 그래도 스님 뵙고 와서 기쁘다' 하는 마음들이 일어납니다.

 

두 번째 조건이라는 것이 뭐냐면 그걸 다음에 또 회상하게 됐을 때 적어도 나쁜 마음은 일어나지 않아야 됩니다. 선한 마음들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어야 됩니다.

수행도 잘하게 되면은 나중에 그 수행상황을 딱 떠올릴 것 같으면 즉각적으로 그 상태에 도달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돼야 수행이 무르익은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고 다시 또 용을 써야 된다고 할 것 같으면 아직은 수행이 좀 덜 무르익었다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그다음에 그 기쁨이 여러분들에게 얼마만큼의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과연 그 기쁨을 느꼈을 때 주변 사람들하고 얘기하게 되면 좋은 말들 선한 말들을 지속적으로 하게 됩니까? 그러면 그건 여러분들한테 도움을 준겁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 욕심부렸을 때 일어나는 기쁨들, 이것을 얻었을 때 일어나는 기쁨들이 있으면 또 다른 것들이 있을 거 같으면 그것에 대해서 욕심이 일어나지지 기쁨이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거라.

 

그래서 적어도 기쁨이 있을 거 같으면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어야 됩니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어야만이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됩니다.

수행하고 있다고 하면서 집에 와서는 수행자 답지않게 성내쌌고 할 것 같으면 자신에게도 도움이 안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안됩니다. 수행한 것만큼 다른 사람들에게도 수행한 자의 모습이 드러나져야 됩니다.

 

왜? 내가 수행하니까 기쁘기 때문에 기쁨이 마음속에 있을 거 같으면 좋은 말을 하게 되고 좋은 행동들을 하게 되는 거라. 당연히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줍니다.

그래서 차라리 수행할 때와 일상적인 모습들이 자꾸 괴리감이 생긴다고 할 것 같으면 자신의 수행을 돌아보아야 됩니다. 선한 마음으로 일어나는 수행이 아니고 오히려 욕심부리면서 자기 욕심채울려고 수행을 하는 경우들이 있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 그러한 기쁨들은 적어도 괴로움으로 바뀌어서는 안된다 하는 겁니다.

가끔씩 수행하는 사람들을 보면 수행을 어느 정도 조금 하는 것 같은데, 나중에 수행이 잘 안 될 때는 낙담해가지고 힘들어합니다. 그렇게 힘들어하고 낙담할려고 수행하는 것은 아닌데 본인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이것인데 거기에 못 올라가니까 힘들어하고 낙담을 하는 거라. 그럴려고 수행하는 것은 아니잖아?

 

왜 그렇게 될까? (수행자 대답 : 욕심이 앞서서...)

그게 정답입니다. 욕심이 어디에 딱 붙은 거라? (수행자 : 마음에요)

「나」라고 하는 것에!

예를 들어보면 누가 커피를 스님한테 선물을 했어요. 그러면 스님은 물을 넣어가지고 커피를 내립니다. 그러면 커피라고 하는 그 잔에 있는 것에 커피 성분이 과연 몇프로나 될까? 아마 모르긴해도 2프로도 안될 거라? 나머지는 전부 구십 몇프로는 물이겠죠? 그럼 그건 물이라고 불러야 돼? 아니면 커피라고 불러야 돼?

(그래도 커피라고 부릅니다.)

맞습니다. 그게 정답입니다. 거기다가 어떤 사람들은 먹는 방식에 따라서 프리마를 넣어도 커피가 되는 거고, 설탕을 넣어도 커피가 되는 거고, 각각의 커피는 다 다릅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그걸 똑같이 커피라고 받아들입니다.

 

왜 그럴까? 욕심이 일어나는 것은 알기 쉽고, 집착하는 것도 알기가 쉽고, 화내는 것도 알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뭐 때문에 일어나느냐는 거라.

남보다는 나를 더 생각하고 나를 드러내려고 하는 것 때문에 그게 일어나는 것은 생각 안 하고, 나는 아예 빼버리고, '어, 욕심이 일어났네', '내가 화가 일어났네' 하고 안다는 거라.

사실은 커피는 어떤 식이든 사실은 물입니다. 정확하게 보면.

그런데 물이라고 얘기하지 않듯이 일반 수행자들도 그 속에 나가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거라. 기쁨이 오래가야 되고, 기쁨이 다시 회상해도 다시 기쁨이 일어나야 되는 거고, 그런데 그 기쁨이 고통으로 바뀐다고 하는 것은 「나」라고 하는 것이 딱 개입이 돼버리면 고통으로 바뀌어버립니다.

 

여러분들이 주의해야 될 것이 기쁨이 고통으로 바뀌도록 놔두지 말아라는 겁니다.

어떤 스트레스가 오고 어떤 탐··치가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 속에는 라고 하는 것이 딱 개입이 됐다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나를 되도록이면 드러내지 말아라는 거라. 남하고 싸울 때 나를 드러내지 않을 거 같으면 싸울 일이 없어집니다. 괴로울 일이 없어집니다. 그와 같다고 딱 생각을 하면 됩니다.

 

살아가면서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는 스트레스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적어도 출가자들은 그 스트레스를 좋은 스트레스로 돌려놓을 줄은 압니다.

여러분들은 수행자죠? 수행자는 출가자와 마찬가집니다. 그러면 나쁜 스트레스 보다는 좋은 스트레스로 돌려놓도록 자꾸 연습해야 됩니다.

가장 좋은 게 뭘까? 아까 스트레스는 탐·진·치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 탐·진·치라고 했습니다.

 

탐·진·치 없이 일상적으로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할려고 할 것 같으면 뭘 하는 것이 가장 좋아요?

(사띠하면 됩니다.)

사띠하는 것이 좋긴한데 그 사띠가 자동적으로 되면 얼마나 좋겠어? 그게 안 되니까 문제 아니라.

 

가장 좋은 것은 자애입니다.

적어도 자애가 있으면 적어도 그 스트레스가 나쁜 스트레스로 바뀌지는 않아요. 내가 자애를 열심히 하고 있다, 뭘 해도 예쁘게 보여. 지가 행복하지 않은 걸 안 할려고 하거든. 지가 괴로워지는 것들은 안 할려고 합니다. 당연히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그렇게 대할려고 합니다. 가장 좋은 게 자애를 지니는 것이 가장 좋은 겁니다.

 

그게 뭉뚱그려가지고 그런 건데 세분화해서 얘기할 것 같으면,

그런데 여러분들은 자꾸 목표를 세울 거잖아. 그 목표가 달성돼야만이 기쁘고 좋아. 그런 패턴들은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라. 갈 때 힘드는데 그것들 스트레스는 다 어떻게 할 건데?

그런 것보다는 사띠 해봤죠? 알아차려 보면 어때요?

하나 하나 알아차릴 때마다 기쁩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사띠가 계속 이어지면은 계속적으로 선한 마음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일상생활에서도 꼭 마찬가집니다. 나쁜 스트레스로 바뀌지 않을려고 할 거 같으면 잘게 세분화해서 하나 하나에 기쁨을 자꾸 느껴야 됩니다. 조그만 거 하나라도.

 

내 마음에서 조그만 거 하나 하나라도 기쁨을 느끼도록 자꾸 훈련이 되도록 해야 됩니다.

여러분들 숨 쉬는 거 기쁩니까? 보통은 별 생각 없이 덤덤하게 그냥 숨을 쉽니다. 그런데 이 숨을 쉴려고 할거 같으면 얼마만한 노력이 필요하겠어? 몸에서는 끊임없이 나를 위해서, 살려고 뭔가 계속 변화하고 있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자동적으로 숨을 쉬는 것 같지만 그런 노력에 의해서 숨을 쉬고 있는 겁니다.

매초 매찰나마다 자신에게 감사할 줄 알아야 됩니다.

 

요즘은 바이러스가 창궐들을 하고 하니까 그것들에 대해서 되게 조심을 해야 됩니다.

어제도 누가 전화와가지고 “스님, 외국에 안 나가시면 안 됩니까?”

“왜?” 그러니까 없으면 불안하다는 거라. “뭐가 불안한데?” 그러니까 뭐 수행에 대해서 물어볼 데도 없고, 또 스님이 외국가서 혹시 코로나 걸려가지고 뭐 잘못되면 우짤까 하는 불안감도 있고, 왜 남의 일을 자꾸 생각을 생각을 하느냐는 거라. 자기 것도 잘 못챙기면서.

 

스님은 그래도 스님이 이 옷을 입고 이 모습을 유지하고 살아가는 것이, 물론 출가는 한국에서 먼저 했지만, 태국에 가서 담마의 맛을 봤고 그것들을 쭉 지키고 실천해왔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고마움들을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항상 그런 얘기를 합니다.

“나이가 들고 일정한 세월이 되면 나는 태국에 갈 것이다. 태국에 가서 마지막은 거기서 보낼 것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태국에 가는 것은 순수하게 보면 법에 대한 고마움도 있고, 태국에서 스님이 해야 될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들하고 똑같이 거기 가서 법문도 해야 되고, 또 수행지도도 해야 되고, 제자들도 보살펴봐야 되는 거고, 도움이 필요하면 도움도 줘야 되는 거고, 할 일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있으면 어쩔 수 없이 저지르게 되는 계율에 대한 위반들도 참회도 해야 되는 거고, 그래서 가야 돼요.

바이러스가 있든 없든 간에, 물론 위험하기도 하고 하겠지. 그런데 그건 내 일이고 내가 조심하면 되는 것이지 그것으로 인해서 상대가 불안해 할 이유는 전혀 없다는 거라.

 

법에 대해 소중함을 알고 법을 알고 있다고 할 거 같으면 그것들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매순간에 고맙고 기쁘고 하는 마음들이 자꾸 일어나야 됩니다. 두려워하고 염려되는 마음들이 일어나야 되는 것이 아니고, 그래도 '스님 나가시고 하니까 얼마나 고맙노' 그런 마음들을 가져야 되는 거라.

'이 법을 알게 해줬으니까 이 법이 또 얼마나 소중하냐' 하는 생각이 들어야 되는 거라. 나쁜 스트레스로 바뀌지 않을려고 할 거 같으면 적어도 첫 번째 해야 되는 것이 매순간 하나 하나에 기쁨을 자꾸 누리도록 하라는 거라.

가정에서도 꼭 마찬가집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조건에 의해서 견해를 바꾸어버리면 즐거워진다 하는 뜻입니다.

아까 조금 전에도 견해를 바꾸었죠? 스님이 잘못되면 어떡하냐, 아니면 내가 수행문답 할 곳이 없어서 어떡하나, 하는 그런 것들에서 감사함으로 바뀌어버렸습니다.

조건을 바꾸는 것!

어차피 여러분들은 나라고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견해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견해가 자꾸 드러나지않게끔 해야 되는 거고, 그리고 그 견해가 드러날려고 할 것 같으면 조건을 바꾸어버리면 됩니다.

가끔 그런 사람들 있죠? 싸우면 그냥 피해버립니다. 조건을 바꾸어버리는 거라. 싸우면 자신의 견해가 자꾸 드러나기 때문에. 앉아있으면 고통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일어나버리면 그 고통은 쏙 사라집니다. 조건이 바뀌어버린다는 거라.

 

일상적으로도 그런데 만약에 여러분들이 도와 과에 이르는 조건들로 탁 바뀌어버리면 그 즐거움은 어떨까?

여러분들이 상상하지 못할 만큼 그 즐거움들은 지속됩니다. 그래서 어떤 조건들이 오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막 요동치지는 않습니다. 좋은 것이 오든 싫은 것이 오든 그것들에 대해서 항상 평온한 마음들을 그대로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가장 좋은 것은 도와 과에 이르는 조건들로 탁 만들어주는 것이 가장 좋고,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지금 있는 조건들을 그것으로 인해서 만약에 스트레스를 받고 나쁜 탐·진·치가 일어난다 할 것 같으면 조건을 바꾸어버리라는 겁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어떤 일을 하든지 즐겁고 기뻐하는 것들을 몸에 자꾸 지니는 능력들을 키워줘야 됩니다.

많이 춥죠? 오늘 같은 날. 요즘은 많이 춥습니다. 그런데 추우면 어떻게 해요? 스님 같이 목을 따뜻하게 하는 걸 한다든지 아니면 옷을 더 껴입는다든지 합니다. 그럼 추위가 싹 사라져버립니다. 그럼 즐겁습니다. 조그만 거 하나지만 자신이 그거는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옷을 입는 것은 자신의 능력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여러분들 능력에서 어떤 것들을 해야 만이 즐거움이나 기쁨들이 일어나겠습니까? 자신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그 능력들을 스스로 자꾸 키워야 됩니다. 나 이거 못해, 아니면 하기 싫고 이래버리면 그 능력들은 여러분들 것이 되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그다음에 사띠하는 생활, 살아가는 것들이 만족하고 기쁨을 누릴려고 할 것 같으면 사띠하는 습관들을 계속 가져야 됩니다.

사띠를 놓쳤을 때는 '아, 또 1분간 나는 수명이 단축됐다' 하고 생각해야 됩니다. '죽은 상태다' 하고 자꾸 마음을 먹어야 되지, 사띠가 없는 상태에서 그냥 일상적으로 살아가려고 하지 말아라는 거라. 적어도 사띠하고 있는 동안에는 여러분들이 좋은 스트레스를 가지게 되고 좋은 영향을 미치게끔 되는 것이지, 그리고 자기의 생활을 좀 더 기쁘고 좀 더 만족하고 살 수 있게 되는 것이지, 사띠가 없는 상태에서는 그 반대가 되는 거라.

그래서 사띠하면서 만족할 줄 아는 삶들을 자꾸 살려고 하라는 겁니다.

 

맨 마지막으로 가장 좋은 것은 ", 인제 내가 할 일을 다 마쳤다" 하는 기쁨들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자식들 다 보내고 나면 “아, 이제 내 할 일 다했다” 하죠? 여러분들이 할 일을 다 했다는 거는 여러분들이 해탈로부터 해탈에 이르러서 윤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거라. 빨리 이생에서 노력을 해야 되는 것이지, 다음 생을 바란다든지 아니면 그냥 지금의 생활에 만족할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계를 잘 지키든 수다원에 이르렀든 아직은 끝이 아니다고 할 것 같으면 더욱더 노력을 하라는 거라. 탁 목표에 도달해서 그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기쁨들을 맛보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오늘은 「탐·진·치로 연결되는 스트레스가 되지 않도록 자꾸 노력하면서 살아라」 하는 의미로써 얘기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