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8~2022 일상수행법문

2022년 안거입재_수행의 균형·중립(tatramajjhattatā) (20220716.담마와나선원)

담마마-마까 2022. 9. 3. 21:32

https://youtu.be/oT7B2Ylcf74

* 2022년 안거입재_수행의 균형·중립(tatramajjhattatā) (20220716.담마와나선원)

[삼매_사마디와 위리야와 우뻭카의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 오력의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따뜨라맛잣따따 입니다.

칸띠가 이 따뜨라맛잣따따를 키워주는 역할을 합니다.]

(13:38 이후부터 녹취하였습니다.)

 

저번 시간에 「칸띠, 인내가 열반으로 이끌어준다」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시간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깐띠하고 띠띡카의 차이는 얘기했죠?

칸띠(khanti)는 보통 인내라고 번역을 하고, 띠띡카(titikkhā)는 '욕됨을 참는다'고 하는 감인이라고 그렇게 많이 번역을 합니다.

 

그 차이는 뭐지? 고통스러운 거나 탐·진·치가 일어난 상태에서 그것들을 원활하게 잘 극복해냈을 때와, 그게 아예 안 일어나게 일어날 것을 방어를 해가지고 잘 극복하는 그 차이가 있습니다.

다리가 고통스럽다, 고통스러운 게 있으면 이걸 잘 관찰해가지고 무상한 성품을 봐서 도와 과에 이르렀다, 그러면 감인이 조건이 돼서 그러니까 띠띡카가 조건이 돼서 도와 과에 이르른 상태가 되는 거고, 그런데 고통스러운 느낌은 일어나지 않았는데 고통스러운 느낌이 일어날 걸 아예 대비해가지고 다리를 조금 더 편안하게 해가지고 마음을 선한 상태로 만든 상태에서 도와 과에 이르렀다 그럼 이것은 칸띠가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렇게 구분을 하면 쉽습니다.

 

그래서 ··치가 일어나는 것을 어떤 식으로든 극복을 잘했으면 띠띡카가 되는 거고, 탐·진·치가 일어나기 전에 '이것은 무서운거야. 이런 건 일으키면 안돼' 하고 마음을 먹고 ··치가 일어나기 전에 잘 마음을 조절해가지고 균형을 잘 잡아가지고 해탈에 이르렀으면 칸띠가 열반으로 인도하는 상태가 됩니다.

 

자! 그러면 어쨌든 탐진치가 일어났든 아직 일어나기 전이든 간에 뭔가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 있을 거 아니라? 마음을 균형을 잘 잡아주는 것이, 그게 뭘까?

칸띠는 인제 어느 정도 이해는 됐을 거고, 그래서 칸띠를 위해서 내가 어떤 노력을 해가지고 칸띠를 일으켜야 되는지 하는 것들은 저번 시간에 다 얘기를 했습니다. 그렇게 일어났다고 보고,

 

그러면 그 균형을 잡아주는 걸 빨리어 단어로 따뜨라맛잣따따(tatramajjhattatā)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뭐죠? (수행자 : 중립)

네. 중립이라고도 얘기하고, 균형이라고도 얘길 합니다.

 

“너, 엄마하고 시소를 탈 때, 만약에 엄마가 무거우면 너가 시소를 앞으로 나가 앉겠지. 그래야 균형이 맞아서 시소를 잘 탈 수 있지. 그걸 네가 알면 그렇게 균형을 맞출려고 조금 앞으로 나갈거란 말이야.”

그렇게 하는 것을 따뜨라맛잣따따라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오늘 보시를 여러분들이 한다, 그런데 좋아하는 스님이 있고, '나 저 스님은 보기 싫어' 이런 스님이 있었다, 그러면 좋아하는 스님들한테는 보시를 하고 싫어하는 스님들한테는 보시를 안했다, 그러면 그거는 비난받을 일이 되죠? 그건 균형이 안 맞는 거라. 쉽게 말하면.

그런 마음이 들면 물론 '어, 아니야. 상가스님들은 평등해' 생각해서 다른 스님들하고 같이 전부 동일하게 보시를 했다, 그러면 여러분들 마음에는 이 따뜨라맛잣따따라고 하는 것이 생긴 상태가 돼버리는 경우가 됩니다. 자! 그러면 이 따뜨라맛잣따따라고 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됐을 거라.

 

그런데 빨리어 용어 중에서 그거하고 비슷한 단어가 하나 있죠? (수행자 : 우뻭카)

우뻭카라고 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우빽카(upekkhā)하고 따뜨라맛잣따따 하고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렇게 보면 됩니다. 우뻭카는 수행에서 어느 정도 상당히 높은 경지에 도달을 해야돼죠? 따뜨라맛잣따따도 수행에서는 어느 정도 상당히 높은 상태에 도달을 한 상태가 됩니다.

우뻭카의 상태에 도달을 할 때는 어떤 상태가 돼야 돼요? 마음이 밖에서 어떤 자극이 오더라도 항상 평온한 상태 평정한 상태가 돼있어야만이 가능한 겁니다. 누가 나를 비난하든 나를 칭찬하든 그거에 관계없이 마음은 평온한 상태가 돼있어야 됩니다. 스님들도 꼭 마찬가지죠? 법납의 횟수가 적든 법납의 횟수가 많든 그거하고 관계없이 내가 법문해야 될 것이 있으면 그거 그냥 하면 됩니다.

 

그걸 쉽게 말하면 좋아하고 싫어하고 하는 것들을 떠난 상태라고 보면 됩니다.

우뻭카의 상태는 그런 상태입니다. 밖에서의 자극이든 아니면 안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상태든 그거하고는 관계없이 마음은 항상 평온한 호수와 같이 잔잔한 상태가 돼있는 그런 걸 얘기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들에 대해서 반응하는 것들이 없죠? 마음은.

그래서 이 두 가지가 우뻭카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따뜨라맛잣따따라는 것은 어찌 보면 좀 무덤덤한 겁니다.

자칫 잘못 생각을 하면 느낌으로 인식할 수가 있습니다. 좋은 느낌과 싫은 느낌 말고 뭔 느낌이 있죠? (수행자 : 무덤덤한 느낌) 무덤덤한 느낌입니다. 쉽게 말하면 무덤덤한 느낌은 대부분 어떤 경우들에 일어납니까? 무관심할 때 일어납니다. 내가 관심을 안 가지고 멀리 떠나버렸을 때 그런 무덤덤한 느낌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모르는 사람이 죽었다 했을 때는 마음이 동요하지 않고 그럴 때 무덤덤한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친한 사람이 죽으면 마음이 동요를 하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그렇게 인식하기 쉬운데, 여기 아비담마 배우죠?

따뜨라맛잣따따는 어디에 속하는 거라요? (수행자 : 선심소, 아름다운 마음)

 

따뜨라맛잣따따는 아름다운 마음에 속하는 겁니다.

마음은 쩨따시카지 웨다나라는 느낌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착각을 해버리면 안된다는 얘깁니다. 무덤덤한 느낌은, 아니면 무관심은 따뜨라맛잣따따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겁니다.

그럼 따뜨라맛잣따따는 뭘까?

수행을 잘하면 좋은데, 잘 안돼나가면 스님이 만날 "균형을 맞춰라" 그럽니다.

노력하는 힘들이 과하다, 그런 사람들은 "좀 더 집중하는 힘들을 자꾸 키워줘라" 그럽니다. 너무 집중하다 보니까 막 꾸물대고 게으름부리고 할 거 같으면 집중하는 힘이 너무 강하니까 "자꾸 움직이도록 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오력이라고 하는 거 알죠? 오력의 균형을 잡아주는 것들이 뭘까?

그게 바로 이 따뜨라맛잣따따 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따뜨라맛잣따따는 쩨따시카라고 하는 심소가 일어나는 것들을 적재적소에 잘 일어나게끔 하고, 그것들을 해탈로 인도하는데 균형을 딱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이 따뜨라맛잣따따 입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수행하는 사람들은 이걸 번역할 때는 균형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이해하기가 좀 편합니다.

 

사띠의 힘이 아무리 강하다고 하더라도 신심과 지혜의 균형을 맞춰주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사띠가 강하면 신심도 강해질 수가 있고 지혜도 강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일정하게 균형을 맞춰주는 게 이 따뜨라맛잣따따가 어느 정도의 수행력이 뒷받침이 돼야 일어날 수 있는 심소이기 때문에, 이게 지혜 부분에서 브레이크를 탁 걸어주게 됩니다.

그래서 신심하고 지혜하고 균형을 딱 맞춰주고 하는 거고, 지금 몸의 상태로 봤을 때 아, 이 사람은 좀 더 깊이있게 삼매로 쭉 들어가면 좋은데, 또 삼매는 분명히 개발돼가지고 선정을 일선정부터 해서 삼선정까지 자유롭게 왔다갔다 하고는 있는데 만날 그거만 하고 있거든. 그러면 이 사람은 거기서 끝내가지고는 해탈로 이끌어주지는 못하겠다 싶으면 노력의 힘을 탁 배가시켜 주게 하는 거고,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이 따뜨라맛잣따따 입니다.

 

그런데 아까 저번 시간에 그런 얘기했죠. 칸띠라고 하는 것은 그냥 무조건 참는 것이 아니고, 어떤 거라고? 대상에 대해서 항상 평온하고 고요한 상태에서, 불선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리는 것을 얘기합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은 사띠가 잘 발달됐을 때 칸띠와 비슷한 그런 역할들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칸띠가 따뜨라맛잣따따를 자꾸 키워주는 역할들을 합니다.

그게 이번 시간에 얘기할려고 하는 그런 것입니다.

 

어떻게 키워줄까?

칸띠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평온한 상태를 만들어주도록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뭐가 일어날까? 마음에서?

쉽게 얘기할게요. 대상이 있다, 그럼 대상을 잘 알아차리고 있죠? 알아차리는 것은 사띠가 하는 겁니다. 그럼 사띠가 있습니다. 칸띠가 있으면 어떤 경우든지 사띠는 있습니다. 칸띠가 강해지면은 사띠 힘도 더불어 커집니다. 더 강해집니다.

그러면 첫 번째 사띠가 반드시 있어야 됩니다. 있게 됩니다.

 

그다음에 대상을 관찰하고 있을 거 같으면 어떻게 돼요?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이 있다, 그럼 일어나는 것이 육체적인 현상이고 그것을 관찰하는 것은 정신적인 현상이다 하고 구분이 가능하죠. 구분할 수 있는 것들이 생겨납니다.

법에 대한 조사들은 반드시 그 뒤에 생겨납니다.

 

그럼 어떻게 돼요? 더욱 더 수행하고 싶어하죠? 더 공부를 할려고 합니다.

그럼 노력의 힘들이 커지게 됩니다.

 

요 세 가지가 반드시 있게 됩니다.

요 세 가지만 일어나면은 따뜨라맛잣따따라고 하는 것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선한 마음에 일어나게 돼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가 강해지면은 따뜨라맛잣따따도 더불어서 강해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강해지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겠죠? 좋아하는 것만 자꾸 빠져들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좌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꼬맹이가 있어가지고, 내가 어렵게 하면 애는 못 알아들으니까...

 

좌선을 하고 있다, 그러면 좌선하는 게 좋으면 좌선만 할려고 그러지 경행을 안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알아차리는 걸 많이 가지라고 스님이 얘기하니까 그냥 가볍게만 다 알아차릴려고 그럽니다.

사띠 힘을 키울 생각을 안 하고!

좌선해가지고 뭔가 사띠의 힘을 키우든지 아니면 삼매를 개발해가지고 사띠의 힘을 키워줘야 되는데, 그건 안 하고 계속 그냥 알아차릴려고만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잘못 오해를 합니다. 불선한 마음이 일어나는데도 사띠하고 있다고 그럽니다. '나는 알아차리고 있어', '나는 사띠하고 있다'고 착각을 합니다.

사띠의 힘이 크면은 불선한 마음이 안 일어나야 되는 건데, 불선한 마음이 많이 일어나는데도 '나는 사띠하고 있다'고 착각을 합니다.

수행은 그렇게 해가지고는 안됩니다.

 

따뜨라맛잣따따가 탁 일어났을 때는 세 가지 조건이 어느 정도 일어나고 성숙돼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면은 내가 어느 정도 수행에서 오력의 균형을 조금만 맞춰가고 있다 하고 생각이 들면은, 그다음에 본인이 먼저 항상 염두에 둬야하는 것이 '아, 이게 지금 뭐가 과하고 뭐가 부족한가' 하는 것들을 반드시 측정을 해야 됩니다.

사띠가 돼면 어떻게 되요? 그다음에는 법에 대한 조사가 분명히 이루어지죠!

따뜨라맛잣따따가 일어났으면 초기 단계에는 모릅니다. '어느 정도 내가 오력의 균형이 맞아가고 있어' 하고 알고는 있는데, 뭐가 부족하고 뭐가 과한지를 모른다는 거라. 그런데 계속하다 보면 그게 보인다는 거라.

 

세 가지가 균형이 맞아야만이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됩니다.

 

첫 번째 삼매(samādhi), 삼매는 어느 정도 개발을 하고 있는 건지, 그리고 삼매가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지 하는 것들을 분명히 관찰을 할 줄 알아야 됩니다.

왜 삼매에 들죠? 왜 삼매에 드는 거라? 집중력을 키워가지고 사띠의 힘이 강해지기 위한 겁니다! 그게 뭐 해탈에 이르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그거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띠의 힘이 강해진 상태가 되도록 만들어가지고 어떤 것을 보든지 그것이 무상·고·무아의 성품으로 보이도록 만들어야 된다는 거라.

그러면 내가 무상 고 무아의 성품으로 안 보인다, 또 집중하는 힘이 약하다, 그렇다면 삼매를 더 개발을 해야 되는 거고, 그거는 어느 정도 돼나가고 있다고 할 거 같으면 '아, 삼매는 요 정도에서 그치고 다른 거를 개발해야 되겠다' 하는 마음으로 넘어가야 됩니다.

그래서 첫 번째가 삼매의 균형을 바로 잡아라.

 

그다음에 두 번째가 노력하는 힘, 위리야(vīriya)라고 합니다.

사띠 지금 자동으로 되고 있습니까? 되고 있어요? 안 되고 있어요? 안 되고 있으면 더 노력해야 되는 거라. 위리야가 부족한 거 같으면. 대상을 분명하게 사띠하고 알아차리고 있는데도 지금 자동으로 되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뭐하러 지금 수행들을 하고 있는 거라? 만날 의도적으로 해가지고는 그 대상이 왜곡된 거는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자동으로 안된다고 그러면 그건 지가 게으름 부려가지고 노력하는 힘이 부족하니까 사띠가 자동으로 안 되는 거라.

뭔가 삼매의 힘을 체험해가지고 삼매에서 위빳사나로 전환했을 때 그 힘들을 그대로 가져왔을 거 같으면 사띠가 분명히 강해져가지고 자동적으로 대상을 알아차리게 되는 거라.

 

사띠(sati)의 힘이 강한지 안 강한지는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자동으로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것으로 구별하면 됩니다.

자동으로 돼나가고 있다, 그러면 노력의 힘은 더이상 기울이지 않아도 돼.

그리고 잠잘 때와 잠에서 깨어날 때 어떤 호흡으로 깨어나고 어떤 마음이 일어나는지를 알 거 같으면 노력의 힘은 더 안 기울여도 돼. 그런데 그렇지 못하다고 할 거 같으면 노력이 부족한 거라.

 

대부분은 지금 수행에서 진척이 없는 것은 삼매의 힘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노력의 힘들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죽을 만큼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얘기라.

우선순위가 수행이 아니고 다른 것들이라는 거라.

그 다른 것들이 수행대상인데도 수행대상이라는 생각을 안 해버린다는 거라.

노력도 잘 균형을 맞춰야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어떤 대상을 보든지 그 대상에 대해서 마음이 고요한 상태를 만들고 있느냐는 거라.

쉽게 얘기를 할게요. 소리가 들리죠? 소리 들린다고 알아차리고 있습니까? 적어도 소리 들릴 때는 소리만 들려야지 스님이 보인다든지 아니면 다른 어떤 느낌이 일어난다든지 이래서는 안된다는 거라. 그 얘기는 뭐냐면 고요하고 평온한 것들이 아직은 부족하다는 거라. 소리를 듣고 있을 때는 소리 듣는데 완전하게 집중해서 마음이 고요한 상태에서 그 소리만 그대로 들으십시요.

 

「평정」이라고 하는 우뻭카(upekkhā), 우뻭카에 이르러라는 얘기가 아니고,

그 대상에 대해서 우뻭카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 아직 부족한 경우는 그 대상에 하나만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이 보이지 않고 주변 것들이 자꾸 일어나집니다. 수행할 때 배를 관찰하고 있으면 배만 계속적으로 보였으면 좋겠는데 계속 다른 것들이 막 생겨납니다. 마음이 외부에 끄달려들어가가지고 안에서도 부글부글 끓고 있다는 얘기라. 그럼 마음을 먼저 고요하고 평온한 걸 먼저 만들어라는 거라. 그 대상을 자꾸 알아차릴려고 하지 말고.

 

그래서 이 세 가지 삼매_사마디와 위리야와 우뻭카의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들을 하는 것이 바로 이 따뜨라맛잣따따 입니다.

 

저번에 그런 얘기를 했죠? 우뻭카는 위리야와 가깝다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이게 따뜨라맛잣따따라고 하는 것이 균형을 맞춰주기 때문에 이 세 가지가 한 톱니바퀴처럼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같은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톱니바퀴와 마찬가집니다.

사띠가 일어났으면 위리야도 일어나게 되는 거고, 위리야가 일어났으면 우뻭카도 일어나게 됩니다.

 

자! 그게 따뜨라맛잣따따라고 하는 것이고,

따뜨라맛잣따따가 일으켜야 되는 것이 뭐고,

그것이 따뜨라 맛잣따따가 일어나게 됐을 때 개발되어지는 것들이 세 가지가 있다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어느 정도 수행이 잘 돼나가고 있다고 보겠습니다.

잘 돼나가고 있을 때, 가장 쉽게 밖으로 드러나는 게 뭐가 있을까?

 

그런데 여러분들 같은 경우에는 여덟 가지 세속의 일이라고 하는 것들이 있죠?

칭찬받고 비난받고, 그다음 돈이 많이 생기고 돈 잃어버리고, 행복해지기도 하고 불행해지기도 하고, 그다음에 높은 관직에 올라서 명예가 높아지기도 하고 그렇지 않고 떨어지기도 하고, 이런 것에 따라서 마음이 많이 바뀌어지게 됩니다.

 

가장 쉽게 얘기하면 이런 것들에 대해서 무덤덤하게 돼나갑니다.

그렇디고 해서 그것들을 향해서 나아가지 않는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착각을 하면 안됩니다. 따뜨라맛잣따따가 있다고 해가지고 명예가 안 들어오고 부자가 안 되고 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리고 비난을 안 받는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딱 이렇게 예를 들면 됩니다. 차가 가고 있는데 내 차선으로 가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내 차선으로 차를 확 뛰어들어왔다, 그래서 나는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탁 밟았다. 그러면 그 차는 여기로 들어왔기 때문에 앞에 차선으로 갈거라고. 그럼 거기서 여러분들 반응은 어때요? 따뜨라맛잣따따가 돼있는 사람들은 뭔가 탁 들어올 때는 두려움의 공포가 탁 일어납니다. 어! 하면서 놀랩니다. 놀래니까 어떻게 돼요? 빨리 브레이크를 밟을 수가 있는 거라. 그런데 브레이크를 밟아가지고 그 차가 들어왔다, 앞으로 그 차는 내 앞에서 가고 있는데도 별로 마음이 반응을 안 합니다. 그냥 따라갑니다.

 

쉽게 말하면 세속적인 여덟 가지 일이 나에게 안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내가 그걸 멀리 한다는 얘기가 아니라는 뜻이라. 필요할 경우에는 돈을 모은다는 거라. 직급이 높아지도록 노력을 한다는 거라. 그런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내가 어깨가 으쓱해진다든지 아니면 그것들이 좀 뒤집어진다고 해가지고 내 마음이 안 좋은 방향으로 흐른다든지 이런 것들은 없어져버린다는 거라. 그게 첫 번째 부분입니다.

 

그다음에 두번째 부분은 여러분들이 수행을 하고 있으니까 탐진치가 일어날까? 일어나집니다.

탐·진·치는 일어나집니다. 여러분들이 아라한이 된 것도 아니고 겨우 따뜨라맛잣따따가 개발되어지는 상태고, 아직은 상카루뻭카냐나에 가지도 않은 상태인데, 그게 안 일어날 방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게 일어나더라도 그것들에 대해서 동요하지는 않는다는 거라. 마음이 크게 그것들로 인해가지고 휩쓸려들어가지 않는다는 거라.

 

좌선하고 있는데 게으름이 일어납니다. 게으름이 일어나는데 '어, 내가 게으름이 일어났네' 하고 마음을 먹고 노력의 힘을 더 키우는 거라. 아까 세 가지가 개발된다고 했죠? 그 반대적인 것들을 분명히 아는 거라. 게으름이 일어났을 때는 뭘 해가지고 이걸 균형을 맞춰주는지를 아는 거라.

뭔가 잠이 온다, 그러면 지금 내가 관찰해야 되는 것이 뭐라? 실재적인 느낌입니다. 졸음이 오면 그냥 관념적으로 '잠이온다' '잠이온다' 이렇게 관찰해가지고 집중하는 힘을 자꾸 키울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실재하는 느낌을 관찰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럼 잠이 확 달아나게 됩니다.

보통 수행에서 오는 장애들, 그 장애들은 와집니다. 그 장애들은 와지는데 그것들을 조금 더 빨리 벗어나게끔 해주는 것이 이 따뜨라맛잣따따입니다.

수행은 어느 정도 여러분들이 계속적으로 해나가면서 그것들을 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반대적인 것들을 얘기하겠습니다.

나태함, 들뜸, 흥분, 집중만 할려고 하는 것, 이런 것들은 삼매와 노력과 평온함·평정이라고 하는 것들이 어느 정도 대처를 해주기 때문에 수행을 해나가는데 크게 무리가 없어지는 상태가 됩니다.

 

부처님도 당연히 이 따뜨라맛잣따따가 개발이 됐겠죠? 그러니까 탁발이 안 돼서 배고픈데도 마라(māra)가 유혹을 하더라도 그 유혹으로부터 전혀 마음이 흔들림이 없는 상태가 됩니다.

여러분이 수행을 한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 마음과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한 겁니다.

출가한 스님들은 부처님을 대신해서 법을 설하는 거와 꼭 마찬가집니다.

내 마음이 자꾸 방일한 쪽으로 아니면은 악한 쪽으로 자꾸 물든다고 할 것 같으면 빨리 자기 자신이 스톱을 하고 선한 쪽으로 돌려야 되는 거고, 그리고 균형을 잘 잡아서 뭐가 부족한지를 잘 판단을 해가지고 그것들을 메꾸는 연습들을 계속적으로 해나가야 됩니다.

 

그래서 이 따뜨라맛잣따따가 개발되는데도 칸띠라고 하는 것이 작용을 했듯이, 따뜨라맛잣따따가 더욱더 발전하고 더 확장시키고 하는 역할을 해주는데도 칸띠라고 하는 것이 작용을 해줍니다.

 

지금 여기 스님 법문 듣는 거 두 번 다시 있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스님 여기에서 가고 나면 똑같은 법문을 어디에서도 안 해줍니다. 또 다른데 가면 또 다른 법문들을 합니다. 그럼 이 법문은 여러분들 생에서는 딱 이번밖에 없습니다.

그럼 지금 뭘 해야 될까?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에서 그냥 들어야 됩니다. 그냥 이 법문을 들어야 됩니다. 물론 그러는 사람이 있습니다. 스님 법문은 인터넷에서 또 들으면 되지요. 그런데 그거는 다릅니다. 왜? 지금의 마음과 그때의 마음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르게 들릴 수밖에 없다는 거라.

 

부처님 당시 때 부처님 말씀을 듣고 그 자리에서 깨달음에 이른 사람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부처님 말씀을 똑같은 부처님 말씀인데도 그걸 외우고 해가지고 깨달음에 이르렀던 사람들이 훨씬 많았던 것이 아니고, 그 자리에서 깨달음에 이르렀던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마음이 다르기 때문에. 똑같은 법문이라도 내 마음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칸띠는 그와 같은 작용들을 해줍니다.

"지금 이 순간만이 내가 지금 살아있는 시간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는 것을 일으키게끔 해줍니다.

그래서 칸띠가 강해지면은 마음이 항상 균형을 맞춥니다. 더 법문 듣는데 노력을 해야 되는 건지, 아니면 그 법문 듣다가 내가 집중이 너무 잘 돼가지고 법문 듣는 소리가 무상한 성품으로 계속 사라지는 것으로 성품으로 들린다고 할 것 같으면 집중해야 됩니다. 삼매에 들어야 되는 겁니다. 그럼 삼매에 들도록 인도해 주는 것이 그 칸띠라. 균형을 맞추도록 하는 것이 칸띠가 가능하도록 해주는 거라. 이걸 가능하게 해준다는 거라.

 

부처님 당시 때 수다원에 이른 것들은 법문으로 인해서 수다원에 이른 것이 아니고, 법문을 듣다가 마음의 성품들을 관찰하면서 수다원에 이르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지금을, 이 순간을 사는 삶들을 자꾸 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 순간에는 어떠한 것에도 불선한 마음도 없고 선한 마음도 없습니다.

선한 마음과 불선한 마음으로부터 벗어나게 될 때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지게 됩니다.

사무량심이라고 있죠? 멧따, 까루나, 무디따, 우뻭카 입니다! 앞에 세 개는 선한 마음입니까? 선한 마음이죠!

 

우뻭카는 무슨 마음입니까? 선한 거하고는 관계가 없습니다! 이걸 버려버려야만이 우뻭카가 일어나집니다.

따뜨라맛잣따따는 우뻭카와 닮았다고 얘기를 했죠? 그러면 선한 마음이나 불선한 마음을 버려버려야만이 가능해지는 겁니다.

그런데 순간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으로부터 초월해버립니다.

그냥 대상이 있고 대상을 알아차리는 그것밖에 없습니다.

업을 쌓지 않게 되고, 좀 더 바르게 부처님 같이 살아가는 삶이 되는 상태가 돼나가야 됩니다.

 

그런 상태를 경험해본 분이 혹시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대상을 관찰하고 있는데 대상이 너무나 빨리 변해가지고 싫어하는 마음들이 일어나지게 되고, 그 싫어하는 마음들이 지나고 나니까 '아, 나 살기 싫어' 하는 마음이 일어나가지고 그냥 탁 놓아버렸을 때, 탁 놓아버리고 나니까 대상이 그냥 오롯하게 그냥 보여지는 상태가 됩니다. 그 대상이 변하면 변하는 대로 그냥 놔둬버리고 마음이 어디에 몰입되면 몰입되는 대로 그냥 놔둬버리고 그냥 흘러가는 대로 그냥 되게끔 놔두는 상태가 있습니다.

그런 경험들을 해봤죠? 그게 바로 지금의 상태를 얘기합니다.

선한 상태와 악한 상태로부터 떠나서 순간순간을 사띠하면서 살아가게 될 때, 그때 따뜨라맛잣따따가 완전히 무르익어서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칸띠가 그것들을 좀 더 성숙시켜주게끔 하고, 그리고 선과 악의 상태로부터 떠난 우뻭카의 상태에서, 우뻭카의 상태도 놓아버리게 됐을 때, 그다음에 일어나는 것이 대상이 오롯하게 그냥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이 그대로 보여지게 됩니다.

내가 경험하고 있는 육근을 통해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그냥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일 뿐이다 하고, 그것을 취하고 버리고 하는 것조차도 완전히 떠나버리게 될 때, 그때가 바로 상카루뻭카냐나(saṅkhārupekkhā ñāṇa)에 탁 전환되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상카루뻭카냐나에서도 꼭 마찬가지로 칸띠가 작용을 하게 됩니다.

어쨌든 그 상태에까지 이르러야만이 여러분들이 흔들림이 없는 상태가 됩니다.

마음을 관찰하고 있는 사람들은 마음을 분명하게 관찰할려고 해야 되는 거고, 호흡을 관찰하고 있는 사람들은 호흡을 분명하게 관찰해야 되는 거고.

그런데 그 관찰하는 것에 항상 먼저 앞서야 되는 것이,

내가 대상을 쫓아갈려고 하지 말아라. 대상이 나한테 와서 알아지도록 만들어라는 거라. 그럴려면 마음을 자꾸 편하고 고요하고 가볍게 자꾸 만들어주라는 거라.

그러면은 대상은 드러나지게 됩니다.

 

수행을 좀 더 바르게 하고, 특히나 이제 여러분들은 안거기간 입니다.

안거기간에는 좀 더 열심히 수행을 하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에 스님이 상카루뻭카냐냐와 칸띠에 대한 설명을 할 때는, 여러분들이 그것들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 단계가 되도록 그렇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