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행을 통해서 오력(五力) 중 하나인 노력을 배가시켜라 (20090514)
※ 오력(五力, pañca balāni) 부분은 14:25초 이후부터 시작됩니다.
테라와다 불교권 장례문화(의식)에 대한 부분은 일상법문에 묶어놓았습니다.
오늘은 기초교양강과 부분에 들어가겠습니다.
저번 시간에 이어가지고, 노력(viriya)에 대한 것들입니다.
노력은 첫 번째 시간에서는 "계율로서 노력의 힘들을 배가시켜라." 하는 얘기들을 했습니다. 이번에는 "선정 그리고 알아차림으로 인해서 노력의 힘을 배가시켜라" 하는 부분입니다.
프린트물에 나와있듯이 마하 자나까로 태어났을 때의 일화를 쭉 적어놓았습니다. 그걸 한번 보십시요. 저번에도 프린트물이 나갔었기 때문에 읽어봤을 거라고 봅니다. 그래서 거기에 대한 설명을 상세하게 하진 않고,
어쨌든 배가 난파됐을 때를 대비해가지고 살아남기 위해서 노력하는 부분들, 그리고 그 망망대해에서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내가 그 바다에서 죽지 않고 살 것이라는 그걸 확신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노력을 해야 된다 하는 부분에 대한 것을 자따까(Jātaka)에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간다는 자체 아직 죽기 전에는 어찌보면 그런 노력들의 일환이라는 거라. 끊임없이 내가 움직여나가고 끊임없이 숨을 쉬어야 되고 끊임없이 생각을 해야 되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이 노력하고 결부돼있다는 거라. 그러니까 그 노력을 되도록이면 바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수단이라고 보면 됩니다.
경전에는 「노력」이라는 것을 대부분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얘기를 합니다.
'아람바다뚜 위리야(ārambha-dhātu viriya)'라고 해가지고 '처음 시작하는 조건을 위한 노력'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처음에 이 테라와다 법을 듣고 나서 그 법을 향해서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걸 얘기합니다. '아, 참 이게 진짜 부처님 말씀이구나. 아, 내가 이걸 따라가야지' 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하는 것들, 그리고 여러분들이 오늘 오후되면 수행을 원래 하는 날입니다. 그러면 수행을 할려면 어떻게 합니까? 집에 일상적인 일들을 일단 접어두고 노력을 기울여서 이 선원에 와야된다는 겁니다. 선원에 오더라도 내가 일어나는 대상들을 끊임없이 알아차릴려고 노력을 하게 되고, 그리고 그 대상들을 조금 더 세밀하게 사띠할려고 하는 그런 노력들을 기울이게 됩니다.
이런 것들을 '아람바다뚜 위리야'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어떻게 보면 '초발심을 일으킨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다음에는 어떤 노력들이 있느냐면,
'닉까마다뚜 위리야(nikkama-dhātu viriy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강화된 조건의 노력, 그리고 더욱더 힘을 쓰는 그런 노력' 입니다.
왜 그러냐면 수행을 하다가 보면 여러 가지 조건들을 만납니다. 장애들이 생기는 거죠. 게으름도 일어나기도 하고, 나태해지기도 하고, 또 마음이 불안하기도 하고, 또 지루한 것들도 느끼고, 또 간혹은 앉아있으면 여러 가지 통증들도 일어난다는 거라. 그걸 극복하기 위해서는 더욱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됩니다.
또 일상생활에서는 '아, 이거는 부처님 말씀에는 어긋나는 건데, 이걸 하지 말아야지' 할 것 같으면 그걸 물리치기 위해서 더욱더 노력을 해야 된다는 거라.
그래서 거기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해악들을 떠올려가지고 거기에 대한 두려운 마음들을 일으키고, '아, 그래서 이건 하면 안된다' 하고 마음만 먹어서는 안 되고, 이미 한 발을 담그고 있기 때문에 그걸 빼내기 위해서 더욱 더 노력하고 더욱 더 힘써야 된다는 거라.
그런 장애들을 조금 더 강화된 노력으로서 바르게 알아차려 나가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수행에서 그렇게 알아차려 나갈 때는 어떻게 합니까?
그 나타난 대상, 게으름이면 게으름이라는 것을 하나의 대상으로 해서 그걸 줄기차게 알아차려 나갈려고 하죠! 그리고 통증이 있으면 통증을 대상으로 해서 그걸 줄기차게 알아차려나갈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면 거기에서 무상·고·무아라고 하는 삼법인의 특성이 드러나집니다.
그러니까 이 아람바다뚜 위리야 처음 시작하는 조건지워진 노력에 비해서,
닉까마다뚜 위리야는 뭐냐면 삼법인의 특성이 드러나지는 그런 결과들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 이게 부처님의 법이구나' 하는 확신들을 가지게 됩니다. 처음에는 분발하는 초발심을 냈지만, 이제는 이 길로 꼭 가야되겠다는 마음을 확고하게 세울 수 있는 그런 노력의 힘들이 키워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세 번째는, '빠락까마다뚜 위리야(parakkama-dhātu viriya)' 라고 그럽니다. '끈기를 필요로 하는 조건의 노력'이라는 뜻입니다.
이 법을 만나고 이 수행을 했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확신을 가지면, 또는 완전한 확신은 아니더라도 그래도 '아, 이것이 바른 것이다' 하는 것을 어느 정도 이해를 하고 있을 것 같으면 대부분은 보면 닙바나에 도달할 때까지, 완전하게 깨달음에 도달할 때까지 끊임없이 노력들을 해야 되는 거라. 그래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단계.
그러다 보면 매 단계들이 나타납니다. 이런 단계 저런 단계, 지혜에도 보면 1단계부터 16가지단계까지 각각의 단계들이 나타납니다.
그리하더라도 거기에서 중단해버리면 끝나버리는 거라.
그 매 단계마다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여 나가는 것, 경계들이 나타나면 경계들이 나타나는 것마다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이는 것, 그거는 뭐냐면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는 거라. 온 힘을 다해서 수행을 지속해나가는 노력을 '빠락까마다뚜 위리야' 라고 그럽니다. 그러면 자기의 상태를 분명하게 알게끔 되고 그래서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게끔 됩니다.
이런 세 가지 노력이 겸비가 되어야만이 바르게 집중할 수도 있고, 바르게 사띠할 수도 있어서, 지혜가 드러나지게끔 됩니다.
나타난 대상을 면밀하고 일관되고 지속적인 노력과 함께 적절하게 알아차릴 때, 집중도 개발되어지고 강화되어지는 것이고, 그래서 그 강화된 집중력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사띠·알아차림도 더 강해져서 번뇌가 일어나는 것들을 막을 수가 있게끔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런 노력들, 세 가지 노력들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는 얘깁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이 일화를 들먹여가지고 바다를 헤엄쳐 건너는 것도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물에 빠져 죽는다는 거라.
그런데 우리는 이 낄레사(killesa)라고 하는 번뇌의 바다를 헤쳐나가는 수행자들, 요기(yogi)라는 거라. 그 요기들은 끊임없이 그렇게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라.
그게 뭐냐면 오력(五力)에 포함되는 노력(viriya)이라는 뜻입니다.
"수행으로써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진정한 노력이 아니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우리 몸은 보통 보면 일어나는 대상이라는 것은 육근을 통해서 대상들이 일어나집니다. 그래서 육근(六根)을 대상으로 수행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조금 경우가 틀리는데, 태국이나 버마나 스리랑카나 이런 동남아시아에서는 우기철이 되면 일정하게 남서풍이 붑니다. 딱 정해져 있습니다. 처음에 스님이 갔을 때는 갑작스럽게 비가 스콜 같이 탁 내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비가 우두두둑 떨어지고 나서 방에 창문 닫는다고 막 합니다. 그런데 급작스럽게 보통 내리기 때문에 그렇게 닫아도 일정부분은 방안으로 비가 새어들어와있어요. 처음에는 그랬거든.
그런데 조금 지나고 나니까 요게 보이는 거라.
저정도 올 정도가 되면 요게 인제 비가 떨어지겠다 하는 게 보여요.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닫고 나면 그다음에 비가 떨어져요. 그러다가 조금 더 시간이 지나니까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것만 봐도 이게 비가 떨어질 바람인지 아닌지를 분별하게 되는 거라.
그러다가 조금 더 지나면 바람이 안 불 때라도 하늘만 보더라도 구름의 색깔만 보더라도 요게 지금 비가 언제 정도에 비가 내릴 것이다 하는 걸 예측을 하게끔 됩니다. 오래 살다가 보면 그런 것들을 압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그걸 몰랐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하늘이 가만히 바람도 안 부는데 창문을 탁 닫으면, '더워 죽겠는데 와 저리 창문을 닫노?' 이랬거든. 그런데 그게 안 그런 거라.
육근(六根)의 문을 닫는다고 하는 것은 그와 마찬가집니다.
경계가 탁 나타났을 때 육근의 문을 닫아버릴 것 같으면, 이미 대상과 맞닥뜨려졌을 때는 일정 부분 이미 화도 일으키고 있고 또 내가 욕심도 부리고 있는 상태라는 거라. 그거는 내가 다시 또 닦아야 될 부분인 거라.
그런데 육근의 문을 미리부터 방어를 할 거 같으면 들어오기 전에 이미 못 들어오게 만들어 놔버린다는 거라.
그게 뭐냐면 이 세 가지 노력이 지속될 때 가능해지게끔 됩니다.
사원에 가보면, 우리 여기 선원에도 보면 여기 딱 들어오자마자 맨 처음 이 원숭이 세 마리를 먼저 보게 됩니다. 그러죠! 어떻게 돼있습니까?
눈 가리고, 귀 막고, 입 막고 이렇게 돼있다는 거라.
선원에 오면 되도록이면 말하지 말아라. 그리고 또 선원에 오면 되도록이면 보지 말아라. 또 되도록이면 귀로도 소리 듣지 말아라. 이 세 가지를 해놓은 거라.
그걸 보고 다른 사람들은 뭐 시집살이 3년 비유해놓은 거냐 이렇게 물어보기도 하는데, 그거는 아니고 수행에서 그렇게 하라는 거라. 그 얘기는 뭐냐면 우리가 대상을 이렇게 봅니다. 눈으로 본다고. 봤을 때 내가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저 대상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저 대상에 끌려가버릴 것 같으면 여기서 일어나는 마음을 내가 알지를 못한다는 거라.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돼요?
대상에 끌려들어가지 말아라 해가지고 이 일어나는 마음을 관찰하라는 뜻에서 보지 말아라는 거라. 듣지 말고, 말하지 말고.
말하는 것도 말하는 것을 면밀하게 알아차릴 것 같으면 처음에는 입술이 달싹달싹 하는 것을 가지고 알아차리게 되고, 그러다가 조금 더 세밀하게 될 것 같으면 말 할려는 의도를 알아차리고, 입술이 달싹거리는 것들도 알아차리고 말을 할 때 의의를 사용하고 억양부분에 대한 것들도 알아차리고 이렇게 세밀하게 구분을 하게끔 되는데, 대부분 그렇게 못한단 말이라. 그러니까 어떻게 해? 강제적으로라도 입 닫아라, 말하지 말아라,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아라는 거라.
그런 뜻으로써 이 원숭이들 각각에다가 어떤 거는 눈을 막고 어떤 거는 뭐를 막고 이렇게들 해놓은 겁니다.
미리 육근의 문을 방어를 할 것 같으면 비가 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적어도 집안으로 비가 떨어지는 일은 없다는 거라. 또 거기서 일어나는 수고로움을 덜어나갈 수가 있다는 거라.
그걸 지혜롭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그런 스님들은 지혜롭기 때문에 미리 방어를 해서 문을 닫아버리니까 비 새는 일도 비가 들이치는 일도 없습니다.
번뇌라고 하는 것들도 이런 악한 행위를 지을 수 있는 번뇌들, 이런 나쁜 행위를 할 수 있는 것들, 아꾸살라(akusala)들을 완전하게 버릴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걸 방어를 해나갈 수가 있다는 거라.
그게 뭐로 가지고 가능합니까? 하늘이든 바람이든 그걸 끊임없이 자꾸 보고 알고 했기 때문에 그 상태를 보고 판단을 하는 거라.
사띠 할려는 노력, 그걸 아는 노력으로 인해서 마음에 강하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탁 방어를 해나갑니다.
예를 들어가지고 어떨 때 가끔씩 스님이 "여러분들끼리 수행하십시요" 할 것 같으면 조금 나태해집니다. 탁 앞에 스님이 앉아가지고 같이 수행을 해나가면 조금 그래도 마음을 더 잡는다는 거라. 선생님들도 마찬가집니다. 애들보고 자습하라고 할 것 같으면 자습 효과가 많이 안 나타납니다. 그래도 선생님이 자습을 시켜놓고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으면 애들은 그게 겁나서라도 하게 된다는 거라.
이와 같이 노력의 힘이 있는 거하고 없는 거하고는 그 마음은 판이하게 다르다는 거라. 왜? 노력하는 것들이 한 번으로 끝날 거 같으면, 한번 불뚝 일으키고 나서 안 일으킬 수가 있을 거 같으면 괜찮은데 그건 아니거든.
끊임없이 순간순간마다 해줘야 되는 것이 이 이 노력이라는 거라.
수행자는, 적어도 부처님 법을 공부하고 또 그 법을 따라서 나아갈려고 하는 자는 끊임없이 언제나 노력을 해야 됩니다. 왜? 우리 주변에는 항상 이런 번뇌들, 탐진치라고 하는 것이 일상생활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이 노력만이 모든 번뇌를 대항하는 효과적인 방어책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거기에도 기록을 해놓았지만,
"노력의 특징을 조사해서 노력의 이익을 바르게 알아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 노력으로 인해서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방어를 해나가면 자연스럽게 마음의 안정이라는 이익이 찾아옵니다. 그런 마음의 안정과 더불어서 청정함(침착함)이 있으면 더욱더 내가 수행으로서 더욱더 노력하게 되고, 지속적인 노력도 해나가게 되고, 사띠도 하게 되고, 사마디도 생겨나고, 이런 것들도 가져다 주는 이익이 생긴다는 거라.
권투를 할 때 상대방의 주먹을 피하기만 해가지고는 결코 못 이깁니다. 아무리 잘해봐야 무승부입니다. 번뇌가 치고 들어올 때 그 번뇌의 길을 피하기만 해가지고는 절대 그 번뇌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 번뇌를 쳐버려야만이 번뇌를 이길 수가 있는 겁니다.
번뇌도 하나의 대상입니다. 그 대상이 일어났으면 그 대상 자체를 그대로 알아차리도록 자꾸 해야 되는 거라. 그 번뇌를 피할려고 해서는 결코 그 번뇌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대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것을 공격하는 힘은 뭐로 가지고 합니까?
노력(viriya)! 그리고 사띠(sati)! 그리고 사마디(samādhi)!
그리고 조금 더 세밀하게 하면 바른 겨냥(vitakka)!
이것으로 인해서 그 번뇌를, 권투선수가 상대방을 때려눕혀 이기듯이 이겨나가야 됩니다. 하나의 대상으로서!
이런 것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노력입니다! 노력이 없으면 사띠도 없고, 사마디도 없다는 거라. 겨냥도 바르게 할 수 없고. 그런 것들이 '사띠사마디'들이 약해지면 당연히 마음은 둔해집니다. 둔해지고 느려지고 어리석게 되니까 탐진치가 그냥 그대로 밀려들어와버리게 된다는 거라.
알아차림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정신적인 강한 노력을 해야만 한다는 것들을 반드시 명심을 해야 되고, 그리고 단 한번의 노력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노력이라는 것은 단지 알아차림을 끊이지 않게 대상을 향해서 순간순간 노력하는 마음이어야 됩니다.
부처님이 마지막 남긴 말씀이 '압빠마다(appamāda)'입니다.
여러번 여러분들에게 얘기를 했기 때문에 그 단어가 낯설지는 않을 겁니다. 불방일(不放逸)이라는 겁니다. 정확하게 압빠마다 라는 의미는 '확실히 정확하게 사물을 알고 있는 상태, 사띠가 있는 상태'를 압빠마다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즉, 부처님의 마지막 유훈인 빨리어 '압빠마다'를 직역하면 '사띠를 가지고 노력하라'는 얘깁니다. 알아차리면서 끊임없이 노력하라. 자신을 알아차리는 일에 일생 노력해서 목적한 바를 이루어라 하는 말이 부처님 마지막 말씀이라는 겁니다.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 하는 거라. 그래서 이 압빠마다는 사띠라는 것만 여러분들이 기억을 해줘야 됩니다.
그러면 사띠, 노력이 있을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네 가지 자세, 행주좌와 4가지 자세 중에 하나를 어떤 것이든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으로써 방일한 것을 극복해나가야 됩니다. 4가지 자세가 일어나지 않는 법은 없다는 거라. 살아있을 경우에.
그 4가지 자세를 그중에 하나는 반드시 순간순간에 알아차려나가야 됩니다.
그것이 노력이라는 근본적인 의미입니다.
노력을 열심히 하면 마음의 안정과 침착함을 가져오게끔 됩니다.
당연히 사띠를 하게끔 되는 거라.
이 노력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용기입니다. 용기!
앉아서 통증이 있더라도 통증 자체를 대상으로 해서 그 자세를 바꾸지 않고 불편함을 극복할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 그런 것들이 이 위리야(viriya)-노력의 특징으로서 맨 먼저 나타납니다.
그것이 수행을 한다든지 아니면 선업을, 보시를 한다든지 계를 지킨다든지 이런 꾸살라(kusala) 일 때 그것이 힘을 얻어서 '인드리야(indriya) 상태를 얻는 것'을 '위리인드리야' 라고 그럽니다. 위리야-인드리야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게 수행에서 확신(saddhā)을 가지고 사띠(sati)가 있고 사마디(samādhi)가 있고 지혜(paññā)가 일어나는 그런 상태, 그것과 함께 위리야(vīriya)가 일어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거는 '삼마와야마(sammā-vāyāma)' 라고 '바른 노력' 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지금 일어나는 대상이 어떤 대상인지를, 그것이 나마(nāma)의 대상인지 루빠(rūpa)의 대상인지를 특징을 아는 힘을 가지는 것을 '위리야-발라(viriya-bala)'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그걸 보통 그렇게 구분하죠!
오력(五力, pañca balāni), 오근(五根, pañca indriya), 팔정도(八正道) 그렇게 얘기합니다. 거기에 다 그런 위리야가 들어갑니다.
그래서 어떤 상태인지에 따라서 경우가 틀려집니다.
어쨌든 위리야-노력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꾸살라(kusala)인지 아꾸살라(akusala)인지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알아차리고. 그래서 나쁜 것일 것 같으면 버려버려야 되는 거고, 좋은 것일 거 같으면 더욱더 행하도록 해야 되는 거고, 그것이 노력이라는 의미입니다.
그걸 부처님이 비유를 해놓기를 도둑의 도시와 행복의 도시로 비유를 했습니다. 수행해서 열심히 노력해서 닙바나에 도달하는 것을 행복의 도시라고 할 거 같으면, 그냥 자기 자신이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나쁜 행동을 하고 하는 것을 도둑의 도시라고 하는 거라.
도둑의 도시에 있어가지고는 절대 내가 마음이 청정하게 될 수가 없고, 내가 원하는 바 부처님이 가는 길을 따라갈 수 없다는 거라. 빨리 그 도둑의 도시에서 탈출하고 벗어나고 도둑의 도시를 없애버릴려고 노력을 해야 된다는 거라.
쉽게 말하면 화가 일어났다, 그건 도둑의 도시에 있는 겁니다. 화에 인해서 내가 지배당했다는 거라. 그러면 화가 아꾸살라라는 걸 알아야 되는 거라.
그것은 어떻게 아느냐? 노력의 힘으로써 알게 됩니다!
그래서 아꾸살라 담마를 버려버릴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되는 거고, 도둑의 도시를 탈출할려고 노력을 해야 된다는 거라. 그리해야만이 자기가 그 도둑의 도시를 버려버리고 파괴해버릴 수가 있는 거라. 그럴려면 끊임없이 용기를 내서 한번 벗어나고 또 나타나면 또 벗어나려고 하는 끊임없는 노력, 인내가 있어야 된다는 거라.
그래서 위리야의 두 번째 특징은 용기와 더불어 인내가 반드시 있어야 됩니다. 끊임없이 노력을 해야 되는 거라.
그것이 보통 경전에서는 뭐라고 얘기하느냐면 이 집도 대들보라고 하는 이것으로 인해서 지탱이 됩니다. 이게 흔들려버린다든지 이게 무너져버리면 집은 무너져버린다는 거라.
지탱하는 힘이라는 거라 노력은!
바른 것들을 따라갈려고 끊임없이 지탱하는 힘! 나쁜 것들은 버려버릴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지탱하는 힘! 이것이 인내로써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게 노력의 특징들로써 나타납니다.
이렇게 해도 여러분들이 수행에 대해서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스님이 대책이 없습니다.
그런데 보통 노력을 일으키기 위한 여덟 가지 방법들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출가를 어떻게 했습니까? 출가할려고 하는 마음을 낸 건, 그런 노력을 낸 건 어떻게 해서 냈습니까? 생로병사를 봤기 때문입니다.
내 지금 생을 관조를 해보고, 늙음을 관조를 해보고, 병든 걸 관조를 해보고, 죽음에 대해서 관조를 해보고 이러면서 끊임없이 노력할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겁니다.
'아, 나도 이렇게 늙는구나. 늙음을 붙잡을 수 있는 방법은 그 어디에도 없구나. 내가 더 늙기 전에 빨리 내가 노력해가지고 공부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일으킵니다. 그런 식으로 생로병사에 대해서 생각하고 관조함으로 인해서 노력을 끌어내는 방법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뭐냐면, 사악도의 고통입니다.
사악도를 다 예를 들지 않더라도 뭐 그냥 여러분들은 아프리카에 있는 맹수들이 행복해보일지는 몰라도 그 맹수들은 끊임없이 두려움을 가지고 있고, 끊임없이 걱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먹기 위한 걱정, 붙잡혀서 죽지 않으려고 하는 그런데서 오는 두려움들, 그런 것으로 가득 차 있는 고통들이라는 거라. 사악도의 고통은 그와 같다는 겁니다.
사악도의 고통, 그런 것들을 떠올리라는 거라. 내가 언제 죽을지, 그 사악도(사악처)에 떨어질지 어떻게 아느냐는 거라. 하루 빨리 노력들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는 뭐냐면 윤회의 고통! 과거의 윤회의 고통, 현재의 윤회의 고통, 미래의 윤회의 고통. 과거에도 끊임없이 내가 윤회를 했고, 지금 현재도 들이쉬고 내쉬고 하면서 끊임없이 내가 지금 윤회를 하고 있는 거라. 얼마나 생사를 되풀이 하고 있는가. 그리고 내가 깨닫지 못하고 부처님 법 따라 따라가지 못하면 미래에도 그렇게 끊임없이 윤회를 해야 된다는 거라. 그 고통이 얼마나 크겠느냐는 거라.
그렇게 해가지고 8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 과거 현재 미래의 윤회의 고통을 떠돌려가지고 노력을 끌어내라는 것은 '정신적인 긴박감'을 두라는 겁니다. '상웨가(saṁvega)'라고 그럽니다. 급박하다는 거라. 지금 당장 내가 불에 대어가지고 당장 이 불을 끄지 않으면, 급박함을 가지라는 거라.
비구니 스님인데 지금은 정확하게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데 깃따라고 그럽니다. gittha인지 githa 인지 모르지만 기타가 되든지 아니면 ttha이면 깃타가 될 건데, 지금 그걸 정확하게 기억을 못하겠는데 아마 깃따 일거 같애요. tta일 거 같애요.
깃따 같은 경우가 그런 긴박감으로 인해서 깨달음을 이루었던 것들입니다.
여러분들도 간혹 그런 사람들이 있을 거라. ‘아, 나는 몸이 아파갖고, 몸이 약하기 때문에’ 내 후배 스님도 그런 경우가 만날 수행한다고 하면서 몸이 약해가지고 도저히 안 되겠다고 하면서 조금만 하다가 그냥 시리리 빠져나가버립니다. 만날 그래봐야 만날 그 자리라. 그러면서 아는 거는 많아. 어디 뭐 소음인에는 이게 좋고 이게 나쁘고 뭐 태양인은 이게 좋고 이게 나쁘고, 알기는 잘 아는데 지는 만날 병을 가지고 있어요. 그게 뭐냐면 그런 긴박감, 상웨가가 조금 엷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들입니다.
부처님 법에 대해서 많이 들어가지고 신심은 있는데 몸이 약하다는 거라. 그러니까 수행이 안 되는 거라. 만날 몸 핑계대고. 하루는 도저히 안 되겠다 해가지고 지팡이를 짚고 아직 젊은데도 지팡이를 짚을 정도로.
산에 올라갔어요. 결심을 합니다.
'내가 죽든지 번뇌가 죽든지 오직 두 가지 중에 하나만 일어날거다.' 하고 결심을 합니다. 번뇌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여기서 죽는 거고, 번뇌를 죽일 거 같으면 내가 살아나서 부처님 법을 깨달을 거고, 그러니까 두 가지 중에 하나가 일어난다는 거라.
내가 죽든지, 번뇌가 죽든지 둘 중에 하나라고 작정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그 고통을 극복해내고 예류과에 이르르게 됩니다. 그러니까 병도 낫게 되고 몸이 부실한 것들도 병이 나아지니까 당연히 회복돼나가게 되고, 그래서 지팡이를 떨쳐버리고 내려옵니다.
노력의 힘이 떨어질 때는 이 8가지 방법들을 동원해가지고 자꾸 노력할려는 마음들을 일으켜야 됩니다.
첫째는 계율을 지킴으로 인해서 노력의 힘들을 배가를 시켜나가야 되고,
두 번째는 수행을 통해서 수행하는 것이 노력의 힘을 더욱더 증대시키는 것이다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번 시간에는 "수행을 통해서 오력 중에 하나인 노력을 배가시켜라" 하는 부분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오력 중에 세 번째 사띠 부분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아래는 교재 ◈ 오력(五力, pañca balāni 빤짜 발라-니) 부분의 일부 내용입니다.
【 1. 오력의 균형
우리가 수행을 할 때 함께 일어나는 마음의 상태나 정신적 요인이 있습니다.
이 정신적 요인에는 다른 기능이 있습니다.
그들이 그들의 기능을 잘 수행하는 한 우리의 수행은 즐겁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조화롭게 작용하지 않거나 어느 요인이 지나치게 뛰어나면 수행은 균형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이 요인들이 조화롭게 작용하게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각각의 요인들이 너무 많아도 너무 적어도 안 되게끔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수행을 할 때 많은 정신적 요인으로 마음의 상태가 복잡하게 되겠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5가지 제어하고 있는 요인입니다.
이 다섯 요인(pañca indriya)은 믿음(삿다-), 노력(위리야), 알아차림(사띠), 마음집중(사마- 디), 지혜(빤냐)입니다.
우리가 수행이 잘될 때 이 5가지 제어하고 있는 요인은 조화롭게 일어나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수행을 처음 시작하는 수행자는 보통 불안정한 행동과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금방 지루해하고, 안절부절못하며, 건성으로 관념적인 알아차림을 하고, 빛이나 색깔 같은 것에 집착하며, 고요함에 안주하려 하고, 쉽게 법을 의심하고, 통증 등 불쾌한 감각을 싫어하여 두려워하고, 막상 담마가 드러나려는 순간이 올 때는 알아차리는 마음을 풀어버리고, 결국 해이해져 수행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수행자’란 생각으로 자만에 빠지기도 합니다.
수행은 진실하고 객관적으로 자신을 판단하여 현재의 위치에서 주의를 기울려 정진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균형 잡힌 힘으로 수행을 강화시켜야 합니다.
그것은 수행을 도와주는 37가지 요인들 중 가장 기본이 되는 다섯 가지 원리, 힘이라는 발라-니(balāni)입니다.
인드리야는 정신적 요인이라는 능력(五根)이고, 그 능력을 실제로 알아차리며 힘(五力)을 갖추는 것을 발라-니라고 합니다.
즉 정반대의 것을 제어하거나, 길들이는 능력을 인드리야라고 합니다.
믿음은 신뢰(또는 의심)의 부족을 통제하고,
노력은 나태를 통제하고,
알아차림은 부주의를 통제하고,
마음집중은 마음이 산란해지는 것을 통제하고,
지혜는 어리석음을 통제합니다.
이런 능력이 실제로 강화될 때 제어하는 능력은 정반대의 것을 정말로 제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관심, 행복과 하나의 대상에 대한 날카로운 집중이라는 3가지 요인의 존재에 의해 강화될 때 믿음은 단지 제어하는 능력의 기능을 다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집중, 북받쳐주는 집중과 날카로운 집중에 의해 강화될 때 지혜는 효과적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5가지 제어하는 능력(五根) 내에서 서로 균형을 잡는 요인이 있습니다.
믿음과 지혜는 서로 한 쌍입니다.
만약 지혜가 약하여 믿음의 지배를 받으면 비판적인 능력과 분석, 조사하는 지적인 힘이 약해지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리고 만일 지혜가 믿음을 지배하면 이것은 불확실성으로 수행하려는 마음이 부족하여 자신감이 줄어듭니다.
똑같이, 노력이 마음집중을 지배하면 이것은 불안함과 뒤흔들기를 가져오게 합니다. 그리고 만일 마음집중이 노력을 지배하면 나태와 마비 상태를 가져오게 됩니다.
믿음, 노력, 마음집중과 지혜는 높여져야만 하고, 균형 잡힌 상태에서 지탱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은 사띠(알아차림)입니다.
알아차림은 나머지 4가지가 적당하게 상호 균형잡힌 관계를 확실하게 하는 파수꾼입니다.
수행으로 이 5가지 능력이 튼튼하고 굳으며 강력하게 되기 때문에 이 5가지 요인을 힘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은 5가지 제어하는 능력과 5가지 힘은 같은 물건의 2가지 외형이라고 하셨습니다. 강의 중앙에서 보는 동쪽과 서쪽 측면인 것입니다. 즉 5가지 제어하는 능력과 5가지 힘은 동일합니다.
5가지 능력은 제어되고 강화되어야만 하는 잠재성이고, 5가지 힘은 그 5가지 요인들의 조합을 통하여 발달합니다. 5가지 요인들의 능력이 굳게 안정되게 될 때 그를 5가지 힘이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류과에 이른 사람은 의심의 족쇄가 제거되었기 때문에 믿음은 꿈쩍도 않는 힘이 됩니다.
그 다섯 가지 힘은,
❶ 믿음의 힘(saddhā-balāni : 삿다- 발라-니)
❷ 노력의 힘(viriya-balāni : 위리야 발라-니)
❸ 알아차림의 힘(sati-balāni : 사띠 발라-니)
❹ 마음집중의 힘(samādhi-balāni : 사마-디 발라-니)
❺ 지혜의 힘(paññā-balāni : 빤냐- 발라-니) 입니다.
❶ 믿음의 힘(saddhā-balāni : 삿다- 발라-니)
삿다-는 다섯 가지 힘 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삿다-는 ‘어떤 것’을 믿어 그것에 대해서 흔들림 없는 확신이 서는 것을 말합니다. 첫 번째로 그 ‘어떤 것’은 삼보인 붓다, 담마, 상가와 업(kamma : 깜마), 그리고 업의 결과(vipāka : 위빠-까)에 대한 믿음입니다. 두 번째로 그 ‘어떤 것’을 믿음으로 인해 마음이 분명해지고 평온한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붓다는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시어 모든 탐․진․치의 번뇌에서 벗어난 분입니다. 그리고 그런 깨달음을 우리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 그분께 예경 드리면 우리의 마음도 분명하고 평온해집니다.
담마는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누구든지 조사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 담마를 실천하여 분명하고 평온한 마음의 상태에 도달함을 체험하고 담마에 대한 확신이 섭니다.
상가는 부처님의 뒤를 이어 담마를 깨친 성스러운 제자들이며 그분들의 공덕을 믿는 것입니다. 그 상가 역시 도와 과에 들은 성자들이라 합장 공경할 대상임을 알고 그 상가가 부처님의 담마를 설하시는 것에 따라 수행하여 분명하고 평온한 마음의 상태를 체험해 상가에 대한 확신이 섭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연히 생겨났다 우연히 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원인 따라 짓고(업), 그 지은 조건 따라 결과를 낳는다(업보)는 사실을 받아들여 그 연기의 법칙을 체험해서 확신하게 될 때 우리는 업과 업의 결과에 대한 믿음이 생겨납니다.
균형 잡힌 위빳사나 수행을 위한 원리 중에서 이런 믿음의 힘이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이 믿음은 경전공부와 보시, 지계 등으로 공덕행을 닦는 것과 수행이 진전됨에 따라 더욱 향상되어 갈 것입니다.
❷ 노력의 힘(viriya-balāni : 위리야 발라-니)
노력이란 수행을 행하는 에너지이며 수행을 밀고 나가는 힘입니다.
믿음의 힘이 기초되어 노력의 힘이 강하게 일어납니다.
우리는 대상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에 마음집중하여 그것의 참 성품을 관찰함으로써 들끓는 마음이 평온하게 가라앉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어떠한 대상을 만나더라도 항상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에 있을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언젠가는 도와 과를 증득할 것이라는 서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확신과 서원을 가지고 있으므로 노력의 힘은 강화됩니다.
❸ 알아차림의 힘(sati-balāni : 사띠 발라-니)
알아차림의 힘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의 진행과정을 방심하지 않고 주의를 기울여서 알아차리는 힘입니다. 노력의 힘이 강하면 알아차림의 힘이 향상될 것이고 알아차림의 힘이 좋아지면 대상이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 그것을 알아차려서 그것에 마음을 챙기게 됩니다.
❹ 마음집중의 힘(samādhi-balāni : 사마-디 발라-니)
일어나는 현상에 마음이 집중되어 일념삼매가 되는 힘을 말합니다.
알아차림의 힘이 강하게 되면 이 마음집중의 힘이 향상됩니다. 수행자가 대상이 일어나는 순간을 알아차릴 때, 그는 감각대상을 알아차리는 순간을 인식하고 그 순간에 감각대상을 알아차립니다. 이와 같이 알아차리는 감각대상의 현상과 알아차리는 마음의 작용은 동시에 일어납니다. 그것을 찰라 삼매(khaṇika samādhi : 카니까 사마-디)라고 합니다.
이런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삼매는 곧 마음집중의 힘이 향상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빈틈없이 면밀히 이어져 진행되면 항상 마음집중의 상태에서 현상을 관찰하게 되어 마침내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현상의 참 성품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❺ 지혜의 힘(paññā-balāni : 빤냐- 발라-니)
존재의 참 성품, 즉 무상․고․무아․연기 등의 담마를 확연하게 보아 이해하는 것을 지혜의 힘이라고 합니다. 마음집중의 힘이 향상되면 담마를 보게 되어 지혜의 힘이 성숙되는 것입니다.
이런 다섯 가지 힘은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① 먼저 믿음의 힘과 지혜의 힘이 서로 균형을 이루어 향상되어야 합니다.
믿음만 성숙되고 지혜가 빈약하면 맹목적인 삿된 수행자가 됩니다. 형식적인 것에 매달리며 의식에만 의미를 부여하게 되어 잘못된 길로 이끄는 교리나 이론에 빠져버리는 수행자가 되어 버릴 것입니다. 이러한 경향이 나타나는 경우를 우리는 신의 존재를 믿는 신앙에서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불교 안에서도 부처님을 신격화시켜놓고 신앙만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행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또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지혜를 목적으로 지식만을 이해하는 쪽으로 기울어지면 필경 오만과 자만, 그리고 편견이 슬그머니 자리 잡게 될 것이고, 수행의 과정에서 겪은 자신의 경험을 분석하려고 할 것입니다. 자신의 경험을 분석하려고 하면 그 분석적인 알음알이로 인해 마음집중이 방해받게 되어 알아차림도 약화되어 깨어지게 됩니다. 또한 믿음의 힘도 줄어들게 됩니다. 오직 깨달음을 체험하고 난 후라야 자신의 경험을 분석할 수 있습니다.
다시 살펴보면 믿음만 강하고 지혜가 적으면 어떤 것도 바르다고 간주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수행에 관한 바른 정보를 얻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틀린 수행을 계속할런지도 모릅니다.
또한 수행을 할 때 믿음의 과잉으로 수행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수행자의 마음이 산란하게 될 때 집중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대상을 분명하게 볼 수 없어 수행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려서 결국 대상이 자취를 감추어 버립니다.
이럴 때 단지 마음의 속도를 늦추며 느긋하게 하고 '믿음' '믿음' '믿음' 또는 '자신감' '자신감' '자신감'하며 주의깊게 알아차리십시오.
잠시 후에 마음은 다시 안정되게 됩니다. 그리고 집중을 얻을 것입니다.
② 또한 노력의 힘과 마음집중의 힘은 서로 균형을 이루어 향상되어야 합니다.
노력의 힘만 강하고 마음집중의 힘이 약하면 수행의 대상에 마음을 집중할 수 없어 항상 들뜸(uddhacca : 웃닷짜)이 있습니다. 처음 수행을 시작할 때는 너무 열성적이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데 반해 집중력이 약하여 마음을 따라잡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마음은 산만해지고 들뜨는 것입니다. 그래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편안히 가지고 힘들이지 말고 일어나는 현상을 주의 깊게 알아차리면서 노력을 조금 줄입니다. 즉 한가지씩만 하겠다고 마음먹으십시오. 그렇게 하면 점차로 마음집중이 쉬워지고 노력도 안정되고 확고해져 강하지도 느슨하지도 않음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마음집중의 힘만 강하고 노력의 힘이 약하면 활력이 떨어져 나태와 게으름(kosajja : 꼬-삿자)에 떨어질 것입니다. 수행을 오래도록하면 마음집중이 아주 강해져서 알아차리는 마음이, 별 노력도 없이 대상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이럴 때 충분한 노력을 가하지 않으면 알아차리는 마음이 점차 둔해지고 무거워지다가 혼침이나 졸음에 떨어지게 됩니다. 더구나 허리가 펴져있질 않고 힘없이 좌선할 경우에 많이 일어납니다. 이럴 때는 마음집중과 노력 사이에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경행수행을 더 오랫동안 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주 소수의 수행자만이 노력을 능가하는 마음집중을 경험하므로 노력과 마음집중을 균형 있게 성장시켜야 합니다.
노력의 힘을 받쳐주는 수행은 경행이며, 마음집중의 힘을 받쳐주는 수행은 좌선입니다. 따라서 별도의 수행지도가 있기 전까지는 좌선과 경행에 같은 시간을 분배하여 공부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③ 그러나 알아차림의 힘은 강하면 강할수록 좋습니다. 알아차림은 믿음․노력․지혜의 힘이 강하여 들뜸에 빠지는 것을 지켜주고, 마음집중의 힘이 강하여 게으름에 빠지는 것 또한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알아차림은 모든 경우에 요구됩니다. 마음은 알아차림에 의지해 있고, 알아차림은 감각기관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나며, 알아차림이 없으면 마음이 노력하는 것도 조절하는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순간순간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행위에 알아차림하는 것이 최상입니다.
그리하여 알아차림이 끊어짐 없이 지속적으로 순일하게 이어지게 되면 깊은 마음집중이 생겨나게 됩니다. 마음집중이 깊어질 때 꿰뚫어보는 지혜가 자연스럽게 펼쳐지며 몸과 마음의 과정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위빳사나의 바탕이고 삼매의 전제라고 합니다. 항상 알아차림의 힘은 지속적이고, 강하고, 한결같고 끊어짐이 없어야 합니다.
다섯 가지 마음의 기능들이 강하지만 균형 잡혀있지 않으면, 수행자가 꿰뚫어 보는 지혜를 얻을 수 없어, 번뇌의 소멸이라는 깨달음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이런 다섯 가지 마음의 기능을 예리하게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몸이나 건강에 관심을 가지지 말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인내심 있게 수행해야 합니다.
특히 오력의 균형을 위해서는 좌선과 경행의 비율이 같게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알아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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