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8~2022 일상수행법문

따타가따(Tathāgata 如來)의 4가지 정의_담마와나선원 붓다의날 (20190519)

담마마-마까 2024. 9. 4. 10:09

https://youtu.be/zrbyi-OkSbc?si=3Pv1rMszulNeNPXo

 

* 따타가따(Tathāgata 如來)의 4가지 정의_담마와나선원 붓다의날 (20190519)


자, 편하게 앉으십시오. 오늘 붓다의 날이죠. 여기에 맨 처음 식순할 때 "요소 따타가또 아라항 삼마 삼붓도" 그렇게 적혀져 있습니다. 이 문장은 틀렸습니다. 여기서는 ‘따타가따(Tathāgata)’라고 쓸 수가 없습니다. 바가와(Bhagava) 라고 써야 됩니다.

따타가따(Tathāgata)는 뭔 뜻입니까? 부처님이 자기 자신을 지칭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경전에서 "나 여래(如來)는 이러 이런 분이다"하고 얘기할 때 쓰는 거고,

여기는 '요소'라고 이미 1인칭으로 단수 복수로 쓰여지는 단어이기 때문에 여기에 부처님이 부처님 자신을 나는 이런 분이다 하는 게 아니고, 우리가 예경할 때는 부처님의 9가지 공덕을 회상하는 게송입니다.

 

그러면은 10가지 여래 십호 중에 따타가따라는 부분은 빠져버리고, 그 대신에 그 속에 들어있던 바가와가 앞으로 들어가서 부처님의 9가지 공덕이 돼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부분은 경전에는 그냥 바로 "따타가따 아라항 삼마 삼붓도" 하고 쭉 나와 있는데, 그걸 그대로 채용해 가서 우리가 부처님 공덕을 찬탄한다든지 아니면 그 붓다눗사띠 할 때 게송으로 쓴다든지 이럴 경우에는 문제가 생겨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부분을 조심해서 쓰도록 해야 됩니다.

 

오늘 법문 할 거를 2가지 버전을 준비해 왔거든요.
그중에 하나가 「따타가따」에 대한 얘기입니다.

또 하나는 「보시의 3가지 수승하게 될 수 있는 조건」에 대한 것, 두 가지를 해왔는데, 오늘 와서 이걸 보면서 따타가따에 대해서 법문하라는 모양이다 하고 지금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따타가따(tathāgata)의 밑에 한글 번역을 뭐라고 돼있어요?

"진리에 이르신 분" 그렇게 적어놨죠.

사실은 우리 교단에서 이 법요집을 만들려고 거의 2년 동안 진행을 해왔습니다. 한글화시키는 걸 어떻게 하면 그 원전의 뜻을 벗어나지 않고 좀 더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느냐 하는 용어 선택 때문에 굉장히 씨름을 많이 했는데, 그중의 하나가 이 따타가따라는 용어입니다.

따타가따를 '진리에 이르신 분'이라고 얘기를 해 놓은 것이 잘 없습니다. 그냥 다른 식으로 설명들을 해놨고, 아라한도 마찬가지지만. 이걸 하면서 조금 더 이 의미에 가깝게 하는 것이 맞다고 해서 '진리에 이르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오늘은 부처님을 회상하고 부처님을 찬탄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인 거죠.

근데 스님 같은 경우에는 스님이 스스로를 부를 때는 '나, 저' 이렇게 부릅니다. 1인칭으로 부르죠? 그런데 따타가따라는 것은 3인칭입니다. 그냥 진리에 이르신 분 모든 분을 통칭해서 쓰는 말이라.

 

부처님은 왜 1인칭을 안 쓰고 3인칭을 썼을까?

다른 사람들이 부처님을 부를 때와 같이 부처님도 부처님 자신을 지칭할 때 왜 삼인칭을 썼을까? 의문 품어 본 사람 있어요? 왜 그랬을까? '나는 선언한다' 이렇게 하지 않고 "여래는 선언한다" 그러니까 경전 곳곳에 그렇게 나옵니다.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본다'고 하는 게 없고, "여래를 본다. 여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이렇게 하지,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이렇게 얘기한 적이 없거든.

가끔씩 사람들이 법과 율에 대해서 와서 “스님 이거는 어떻게 됩니까?” 하고 물어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진용스님' 부르기 편한 게 '빤냐와로' 발음이 어려우니까 그냥 "진용스님" 그렇게 부릅니다. "예. 진용스님 뭐 하나 여쭤볼게요" 하면서 이렇게 물어봅니다. 그럼 내가 이러 이렇다 하고 얘기해주고. 또 어떤 사람들은 가끔씩 “스님, 법과 율에 대해서 의문이 나는데 이걸 상가 스님들한테 여쭤봐주십시오” 하고 얘기합니다.
근데 뭐 붓다의길따라 선원에 있는 상가 스님은 꼴라당 여기 빤냐와로 스님 한 분뿐인데 누가 또 대답을 해? 그럼 똑같은 걸 또 빤냐와로스님 진용스님이 또 대답을 해야 됩니다. 개인에게 물어본 것과 상가에 물어본 것은 1인칭과 3인칭입니다. 어떤 게 공신력이 있을까? 1인칭보다는 3인칭이 공신력이 있습니다.

 

물론 그런 이유도 있고, 또 여래(如來)라고 부처님이 썼던 건 왜 그랬을까? 하고 회상을 해보면 또 이유가 있습니다.

왜 여기에 한글 번역할 때 '진리에 이르신 분'이라고 고집을 해서 한국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했을까?
부처님이 이 말을 썼을 때의 경전들 여러 곳을 다 뒤져보면 누구든지 진리에 이르른 분이 되도록 해야 되고, 진리에 이르게 되면은 이러한 공덕들이 생겨나는 거라. 또 내 자신도 그중에 한 사람, 진리에 이르신 분이다 하는 뜻으로서 썼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 입장에서는 자기 자신을 지칭해서 얘기할 때 1인칭을 안 쓰고 3인칭으로 했습니다. 얼마만큼 본인을 드러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을 진리에 이끌도록 만들고 진리를 맛보게끔 할려는 마음이 강했을까?

부처님은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습니까? 다시는 못 옵니다. 다시는 이 세상에 못 옵니다. 이 법이 완전히 소멸되고 나서는 또 다른 부처님 석가모니 부처님이 아니라 다른 부처님이 오실지는 몰라도 뭐 바로 올 수는 없겠지만은 그것도 시간이 한참 지나야 가능할 겁니다.

근데 이 세상이 존재하는 한은 언제까지든 부처님 한 분밖에 이 세상에 올 재간이 없습니다. 그 부처님을 우리는 회상하고 찬탄하기 위해서 이런 「붓다의 날」을 가지게 됩니다.

왜 테라와다는 좋은 거 다 안 하고 모두어 갖고 「붓다의 날」에 3개를 탁 모두어 갖고 한 번에 팍 치러버릴까?

좀 여러 번 치르면 스님들한테 공덕 쌓기도 여러 번 할 수 있고, 또 사람들하고 잡담하면서 끼득거리고 좀 실컷 놀다가도 올 수 있고 재미날 건데 왜 그랬을까? 경전 빨리어 경전을 다 뒤져봐도 '부처님이 4월 보름에 태어났다, 성도를 4월 보름에 했다, 열반을 4월 보름에 했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그 후대의 주석서에 나와 있는 것이지, 빨리어 경전 자체에는 없습니다 그게. 왜 그랬을까?

왜 이 세 날을 갖다가 뿔뿔이 흩어지게 해갖고 「성도의 날」 「탄생의 날」 그다음에 뭐지 「열반일」 요렇게 좀 나눠 놓으면 참 좋을 건데, 그러면 이런 담마와나 선원도 사람들 왔다 갔다 하고 나면 스님 공양할 거리들도 풍족해지고, 스님도 좋고 여러분도 좋고 할 건데. 근데 스님은 이런 행사가 귀찮습니다.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되도록이면 사람들이 안 왔으면 좋겠어. 조용하게 내 수행하고 내가 공부하고 싶은 거 공부하고 그랬으면 참 좋겠어. 내가 이런데 아라한들은 오죽했을까?

하긴 해야 되겠는데, 경전에는 언제 탄생하고 성도했고 열반했고 하는 건 없고, ‘에이, 그냥 하나로 모두자’ 왜 모두어도 괜찮을까? 뭘 의미하기 때문에? 탄생은 뭘 의미합니까? 마지막 탄생입니다. 마지막 탄생이라는 것은 성도해가지고 다시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열반한다는 것은 그나마 지니고 있던 이 몸조차도 버려버리고 다시는 이 세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성도했다는 것은 인제 완전하게 깨달음을 이루었기 때문에 다시는 윤회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탄생도 마지막이고 성도도 그게 마지막이고 열반도 마지막 딱 한번입니다. 똑같은 의미라는 거라. 아라한들이 봤을 때는. 꼭 아라한이 아니라도 어느 정도 과위에만 도달하더라도 이건 의미가 없는 것들이라. 뭐 하러 거추장스럽게 행사를 자꾸 해가면서 기념할 이유가 뭐가 있겠느냐는 거라. 한번 하더라도 여러분들이 제대로 의미를 파악을 하고 설혹 그게 또 분리되면 또 어떻고 또 날짜가 다르면 어때? 그게 중요한 부분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왜 이런 자리를 마련하는지를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자, 그러면은 따타가따(tathāgata)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수행자들이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있습니까? 왜 모르는데? 수행을 하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거 아니라. 배가 불러오면 배가 불러온다고 알 거고, 마음에 화가 났으면 화가 일어난다고 알 거고, 그게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거잖아. 초보 단계에서는 그게 있는 그대로 아는 겁니다.

여래 따타가따의 첫 번째 뜻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아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왜 그럴까? 부처님은 뭘 있는 그대로 알고 있을까? 오늘 부처님 오신 날에는 보통 스님들이 덕담을 해줍니다.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으로 인해서 고민이나 괴로움 없이 행복하소서” 이렇게 해줍니다.

오늘 같은 좋은 날에 고민이나 괴로움이 있어야 될 이유가 없죠. 근데 존재를 한다는 거라. 오늘 비가 오니깐 여기에 붓다의날 행사에 참석할까 말까 고민하는 사람도 있어. 고민도 한다는 거라. 크든 작든 그런 것들을 항상 지니고 산다는 거라. 그럼 본인이 고민이 있으면 고민이 있다고 알고, 괴로움이 있으면 괴로움이 있다고 알고.

어떻게 해야 고민이나 괴로움이 없어질까? ‘에이, 고민 일어났네, 내가 고민할 게 뭐 있어? 그냥 가서 스님 법문 듣고 공양 올리면 되지’ 그냥 탁 가버리면 되는 거라. 그럼 가서 스님한테 공양 올리고 스님들 뵙고 법문 듣고 하니까 기쁘거든. ‘오! 잘했네’ 하고 생각하는 거라.

 

고민이나 괴로움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일어났으면 일어났다고 분명히 알고, 또 내가 왜 이렇게 고민이나 괴로움이 일어나지? 마음의 갈등이 생겨서 그렇구나, 내가 법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구나 하는 여러 가지 원인들이 있구나 하는 걸 알고 가서 실제로 해보니까 고민이나 괴로움이 자꾸 사라져 버리거든.
가서 내가 탁발 올릴 때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서 공양 올리고, 법문 들을 때도 그대로 사띠를 하면서 듣는 것 이게 바로 정답이구나. 그럼 그 시간만큼은 적어도 행복하구나 하고 알게 된다는 거라.

 

"있는 그대로 안다"는 것은 수행할 때만 그 대상이 있으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을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들에서 있는 그대로를 아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자신이 여래(如來)라는 정의를 내릴 때 그렇게 분명히 얘기합니다.

"나는 알 거는 다 알고 배워야 할 건 다 배웠고, 괴로움이 있는 걸 알고 괴로움이 소멸되는 걸 알고 그 길을 걸어갔다. 그리고 그걸 닦았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그걸 해라. 실천해라는 뜻입니다. 이 좋은 걸 왜 안 하느냐는 거라.

 

가장 쉽습니다. 있는 그대로 사실을 안다는 것은. 대상을 붙잡거나 밀치거나 조작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보면 됩니다. 그것이 수행과 일상생활을 분리하지 말고 모든 것들에서 그렇게 볼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어떤 대상이든지 무상·고·무아의 개념을 벗어나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여래를 지칭할 때 첫 번째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아시는 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알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대상은 대상일 뿐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자꾸 바라보려고 할 때, 그러한 자의 마음속에는 항상 선한 마음들 그리고 사띠가 무르익는 마음들이 일어납니다.

또 다른 예를 한번 들어볼까요?

 

오늘 공양 올릴 때 어떤 소원을 가지고 공양 올렸을까?
내가 이 공양 올림으로 인해가지고 '내가 행복해지기를' 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 "이당 메 다낭 수키 혼뚜" 스님도 가끔씩 신도들한테 그렇게 얘기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올리는 이 공양 공덕이 모든 사람들이 다 '모든 사람들에게 회향되기를' "이당 메 뿐야바강 삽베삿따 수키 혼뚜" 그렇게 얘기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공양을 올릴 때 '내가 이와 같이 공양 올리는 공덕으로 닙바나에 이르기를, 닙바나에 이를 조건이 되기를', "이당 메 다낭 닙바낫사 빳자요 혼뚜" 이렇게 얘기합니다.

어떤 게 정답일까? 한 사람은 '행복해지기를' 하고, 한 사람은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지기를', 또 한 사람은 '내가 좀 더 빨리 이거 공양 올리는 것으로 인해서 빨리 깨달음에 이를 조건이 되길 바란다' 하고 하는데 어떤 게 좀 더 수승한 것일까? 숙제로 남겨줄게요.

 

여러분들이 수행을 해보면 수행의 힘만으로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바라밀이 승부처입니다. 바라밀이 쌓여야만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는 걸 분명하게 경험합니다. 그것도 그런 것이 자꾸 앞을 가로막고 있으면 어떤 바라밀이지? 보시바라밀인가 지계바라밀인가 아니면 인욕바라밀인가 결정심바라밀인가 뭔가 바라밀이 뭐가 부족한지를 압니다.

부처님의 탄생이 마지막 탄생인 이유는 그 10가지 바라밀을 완전하게 성취를 했기 때문에 더 이상 쌓을 바라밀이 없어. 수행할 때 걸림이 될 만한 것들이 전혀 없다는 얘깁니다. 자신의 힘만으로 수행만 하면 깨달음에 이르는 상태라. 그래서 마지막 탄생이라. 여러분들은 몇 번 더 탄생해야 될까? 모르죠? (수행자 : 짧게요)

짧게 했으면 좋겠죠?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수행만 하면 돼요? 보시만 하면 돼요? 이러니 안 된다는 거라. 이게 그러니까 마지막 탄생이 못되는 거라. 두 개를 같이 해나가야 됩니다.

수행은 일상과 수행이 분리될 수가 없는 것이고, 수행을 하면은 어떠한 경우든지 바라밀을 더 많이 쌓게끔 됩니다. 바라밀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그것이 바라밀을 쌓는 것이고 수행이다' 하는 생각을 해야 되지, 그걸 자꾸 분리해버리면 안됩니다.

부처님은 본인이 스스로 압니다. “음, 나 다 했네. 마지막 탄생이네”

여러분은 모르잖아. 모르면서 왜 자꾸 그걸 분리할라고 그래? 공덕만 쌓고, 지 자신만 행복해지고, 기분 좋으면 끝나는 거라? 아니면 뭐 ‘나는 수행하기도 바쁜데 뭔 공덕을 쌓아? 이거 안 해. 나는 수행만 할래’ 이래야 되는 거라? 아니라는 거라.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있는 그대로 자꾸 보도록 하십시오. 지금의 자신의 상태는 본인 자신이 더 잘합니다. 그래서 좀 더 나은 조건이 되도록 자꾸 만들려고 해야 되는 것이고, 나중에 지나고 보니깐 ‘아 이것이 내가 부족한 것이고, 아 이것은 충족한 것이고, 이것이 나의 진짜 마지막 탄생이 되겠구나’ 하는 걸 갖다 스스로 느끼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스님도, 특히 출가한 스님들이 되겠습니다.
많이 넘어져서 걸리는 부분이 바라밀입니다. 계율에 대한 거, 보시에 대한 거, 자기 마음대로 해석을 하고, 또 인색합니다. 나중에 가서 수행이 자꾸 걸리니까 자꾸 분심만 일어나는 거라. 지가 뭐가 부족한지를 모르고.

여러분은 여기 있는 스님같이 그런데 자꾸 걸리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빨리 캐치를 해서 걸림이 없이 쭉 넘어갈 수 있도록, 여러분을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관찰하고,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여야 됩니다. 못난이 보고 못났다고 그러는데 성질 낼 이유는 없잖아. 아직은 부족하다 하면 부족한 걸 분명하게 인식을 하고, 스스로 그것을 자인을 하고 나서 채우려고 노력들을 해야 된다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 시계 놔놔.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여래(如來)라고 한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진리가 바뀔 수 있습니까? 없죠!

그래서 부처님도 분명하게 얘기했습니다. "여래는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주장하고 이렇게 계율을 세우고 이렇게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설한다. 이것은 변함없는 것이다." 부처님이 열반을 했든 하지 않았든 세상이 100년이 갔든 200년이 갔든 그것은 변함이 없다는 거라.

진리는 그런 겁니다. 진리는 어떠한 경우든지 변경하고 훼손할 수가 없는 부분들입니다. 여러분 자의적으로 해석을 하지 마십시요 진리를. 체험을 통해서 스스로 알도록 해야 되는 것이지, 여러분 자의적으로 자꾸 해석을 하면 자꾸 변형을 합니다.

 

부처님 진리의 소중함 압니까? 눈물 좀 흘려봤어요? 뭐 눈물 하나도 못 흘렸는데, 진리는 여러분을 기쁘게 만듭니다. 여러분을 진짜 행복하게 만들어줍니다. 그것이 증명되는 순간에 여러분들은 그냥 눈물 흘리게 됩니다. 게송 하나라도 헛되이 생각하지 말고 그것을 진짜 가슴 깊이 되새기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제가 여러분의 스승은 아니죠? 여기 있는 선원장 스님이 여러분들 스승은 아니죠? 누가 스승입니까?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이 여러분들의 스승입니다! 기준점은 부처님이지 여기 있는 스님들이 여러분들의 기준점이 될 수는 없습니다!

왜? 진리는 누가 설했기 때문에? 부처님이 설했다는 거라. 단지 우리는 그거 그냥 시자 역할을 할 뿐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 시자로서 부처님 말씀을 온전하게 왜곡됨이 없이 전해주려고 하느냐는 것만 신경을 쓰는 것뿐이지, 그것도 자신의 경험이 없으면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부처님이 여러분들의 스승이다 하는 생각이 가득 들도록 자꾸 한번 만들어 보십시오.

부처님을 스승으로 한다는 것은 부처님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게 돼서 그 어떤 것에도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죽음에 이를 때까지. 죽고 나서는 부처님 놔도 된다고 허락을 할 게요. 그땐 죽고 나선 여러분들이 아니니까.

 

부처님은 많은 것들을 알고 계십니다. 근데 그것이 어떤 것이든 진리에 이르는 것이 아니면은 함구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가끔씩 개차법을 얘기합니다. 부처님이 보시바라밀을 설해서, 보시바라밀을 설하고 나서 땡 한 것은 아닙니다. 왜 그럴까? 보시바라밀만으로는 진리를 체험할 수가 없고, 진리에 이르지를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보시바라밀로서 진리에 이르도록 만들어야 된다는 겁니다. 경전을 다 뒤져보십시오. 개차법이라 해서 요것만 딱 해가지고 설하고 종을 땡 친 경우가 있는지?

배고픈 사람이 오면 밥을 먹여줍니다. 먹여주고 나서는 뭐합니까?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해지니깐 진리를 설해서 깨달음에 이르게 진리를 체험하게끔 만들어주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부처님 법은 그 진리를 순간적이라도 체험하게끔 하고, 아니면 완전하게 체험하게끔 만들어주는 게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거라.

 

함부로 여러분들이 부처님의 교리를 알고 있다 해가지고 법을 설할 수 있는 자격을 그래서 주질 않습니다. 테라와다 전통에서는.

진리를 설할 수 있는 자격을 스스로 자꾸 갖추도록 하고, 그 진리는 어떠한 경우든지 해탈·열반으로 이끈다 하는 사실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세 번째, 시험해보고 나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 때문에 여래(如來)라고 한다.

어떠한 경우든지 여러분들이 남들하고의 관계를 가질 때 자신의 생각이나 자신의 주장만이 옳다고 부르짖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확인됐다는 것은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는지 지금 해야 되는 것인지 이익을 가져오는 것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렇게 확인된 것들만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를 하라는 거라. 다툼을 가져올 수 있는 조건들은 만들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옆에서 자꾸 눈치 주어싸서 안 되겠습니다.

 

네 번째, 가장 뛰어난 생명이기 때문에 여래(如來)라고 한다.

부처님같이 뛰어난 분은 없습니다 실제로. 실제로 부처님보다도 뛰어난 분이 있으면 스님은 그분 따르겠습니다. 없습니다. 이 세상이 완전히 없어지기 전까지는 부처님보다 뛰어난 사람을 구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분은 딱 정확하게 여러분들에겐 한 분뿐입니다. 앞에 계신 석가모니 부처님밖에 없습니다.

그 뛰어나고 훌륭한 분을 여러분은 오늘 기념하고 그 공덕을 찬탄하고 따르기 위해서, 적어도 그런 부처님을 정확하고 바르게 되새기는 것만 하더라도 여러분들의 경우에는 큰 이익이 될 것으로 압니다. 여기까지 할게요.

 

법문은 짧았지만은 여래에 대한 걸 분명하게 알고 여러분들도 법을 체험해서 여러분 자신이 여래가 될 수 있도록 그렇게 하면 적어도 ‘아, 여래라는 것을 부처님은 왜 썼는가’ 하는 걸 이해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수행자 질문 : 스님, 세 번째 없습니까? 세 번째만 없는데요. )

 뭐 세 번째요?

(수행자 : 두 번째까지 했잖아요.)

 세 번째 네 번째 다 했는데요. 네 번째까지 했습니다.

원래 경전에는 8가지가 나와 있거든요. 여덟 가지가 나왔는데 뒤에 부분은 스님 개인적으로는 부처님이 직접 설한 것이 아니고 뒤에 후대 아라한들이 첨가한 부분일 것이다 하고 추측하기 때문에, 대부분 여래에 대한 정의는 스님뿐 아니라 대부분의 대덕 스님들은 이 4가지를 예로 듭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