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00년 일상수행법문

처음 수행하는 자들은 반드시 이 6가지를 지켜나가야 된다. (2002 1019)

담마마-마까 2024. 9. 11. 16:51

https://youtu.be/Sodd2AKQZk8?si=gVqISQQVuLghxb9d

 

* 처음 수행하는 자들은 반드시 이 6가지를 지켜나가야 된다. (2002 1019)

"사념처에 마음집중하는 것이 육근을 수호하는 것이다"

 

오늘 그 서울 쪽에서는 홍원사라고 하는 절이 있는데, 홍원사에서 사단법인을 만들어가지고 오늘 큰 법회를 하고 있습니다. 이틀 정도 한다고 그럽디다. 버마의 우 빤디따 스님하고 스리랑카 소비따 스님하고 두 분 스님 초청해서 법문 듣고 또 버마 수행법이나 고엔까 수행법에 대한 얘기들도 하고 토론도 하고 그렇게 한다고 합디다. 연락이 와가지고 올라갈려고 했는데 법회도 걸리고 내일 또 절 일도 있고 해서 우리 스님만 올라가셨습니다.

 

사단법인 만든 게 「근본불교수행도량 홍원사」 이렇게 사단법인으로 등록을 했어요.

인제 그전에 물론 연락이 왔더라고요. 그렇게 명칭을 해도 되겠느냐고. 뭐 먼저 등록하는 사람이 장땡이니까, "근본불교 수행도량" 이라고 하더라도 관계는 없다고 이렇게 얘기를 했는데, 인제는 많이 그런 용어들을 써요.

전에는 그냥 "대한불교 조계종 무슨사" 이렇게만 쓰는데, 요즘은 특색있게 각 절의 성격에 맞게끔 그렇게 명칭들을 다 많이 붙입니다. 그래서 물론 어떤 데는 "자비도량" 어떤 데는 "근본도량" 어떤 데는 "수행도량" 이렇게들 인제 이름을 붙이고 하는 걸 많이 봅니다. 그마만큼 인제 한국불교도 뭐랄까 각 사찰의 성격에 맞게끔 변모가 조금 조금씩 되어 나간다 하는 그런 얘기입니다.

자, 그건 그렇고 오늘은 「통나무의 비유」 계속해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번 시간까지 「오온」에 대한 얘기 그리고 「몸과 마음의 관계」에 대한 얘기들을 쭉 해드렸습니다.

오늘은 이 몸이라고 하는 통나무가 열반에 이를 때까지 가는 동안에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사항들, 수행을 시작하면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고초들, 또 여러 가지 경계들, 그런 것들이 이제는 드러나지게 되는 시간들입니다.

맨 처음 부처님이 통나무가 나갈 때 부딪치는 게 이쪽 언덕과 저쪽 언덕이라고 그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이쪽 언덕과 저쪽 언덕을 뭔 비유를 한다고 그랬어요? 장봉갑씨! 정신이 번쩍 들어? 정신하고 육체라? 그건 뭔 소리 하는 거라 지금.
법문해 준 거 한번씩들 되새겨 보나? 어 이 맹꽁이 수행자들아! 그게 벌써 지금 몇 번째인데 이쪽 언덕과 저쪽 언덕에 대한 것도 모르나? 그마만큼 공부할 생각들이 없다는 얘기라. 뭐로 가지고 법문을 해줄고? 공부할려는 마음들을 좀 일으키도록 하십시오 이.

 

그전에 스님이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앉아서 하도 공부가 안 되고 하기에 "내 몸을 묶어라" 해가지고 1주일 동안을 묶여가지고 한번 지내본 적이 있다고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여러분 그래 볼 자신 있습니까? 한번 해볼래요 오늘부터? 밧줄들 여기 많은데.

그런 마음들이 없으면 공부하기 힘듭니다.

 

아무것도 스님은 거기서 얻은 것은 없습니다.

그리해도 잠은 오고 망상은 떠오르고 합디다. 다리 아픈 거야 뭐 지금 묶여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아팠다가 사그라들었다가 강도가 더 했다가 덜했다가 그렇긴 하지만, 별로 그리 얻은 건 없습니다.

그렇지만은 그런 건 얻었거든.
‘이렇게 일주일간 움직이지 못하고 가만히 있어도 죽진 않는구나’

‘이렇게 해가지고 수행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결코 죽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각은 일으키긴 하더라고. 이 몸에 대한 집착이 어느 정도 많이 떨어져 나갔었습니다.

그리 해도 이 몸에 대해 집착하고 하는 것은 남아 있거든.

 

한번은 그런 적이 있었어요 태국에서.

아침에 거긴 이제 새벽 예불을 하기 전에 2시간 동안 수행을 합니다. 새벽 3시 정도 돼서 인제 법당에 들어가야 된단 말이라. 들어갈라고 문 밖을 딱 나섰는데 죽은 고양이가 있었는 거라. 눈 앞에. 고양이 그 죽은 눈 한번 본 적 있어요? 굉장히 무섭습니다. 발을 한 발을 탁 디딜려고 하는데 그게 눈에 비쳐. 거기서 내가 얼마나 두려움을 느꼈는지, 여러분들도 아마 그런 두려움을 느낀 그런 게 있을지 몰라요.


스님이 머리카락은 없는데 온몸의 머리털이고 이 몸에 있는 털이고 하늘에서 다 잡아당기는 것 같애. 일일이 다. 발에는 발대로 전부 다 잡아당기는 거 같애. 아래 위에서 이렇게 잡아당기면 움직이질 못합니다. 꼼짝을 못 해요. 실제로 그렇게 잡아당기는 게 아닌데도 그렇게 느껴요. 두려움이 아주 강하게 일어나면. 그 상태에서 30분 정도를 있게 된 거라. 그마만큼 이 몸에 대해 집착을 하고 있더라고.
‘내가 일주일 동안 용맹 정진을 한다고 앉아 있었던 건 순 도루묵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 또 일으키게 된 거라.

 

그러고 나서는 그런 두려움을 한번 겪고 나서는 잔잔하게 오는 무서움이나 두려움 같은 거는 이거는 뭐 아무것도 아닌 거라. 웬만해서는 내가 잘 놀래고 하는 게 없어. 일상적으로 다가오는 것들은 그냥 치부해 버리게 되는 거라. 여러분들도 그럴 거라. 살아가다 보면 이런데 와서 수행한다고 이렇게 있을 것 같으면, 아는 사람 우리 도반들이 이렇게 올 것 같으면 ‘음, 도반이 오는 갑다’ 하고 치부를 하고 내 할 일을 한단 말이라. 근데 모르는 사람이 온다, 그러면 어떻게 해요? 일일이 쳐다본다는 거라. 누구지? 뭐 하러 왔지? 무슨 옷을 입었지? 뭐 하고 있는가? 하는 것까지 일일이 세심하게 본다는 거라.

 

관찰 대상도 꼭 그와 마찬가지라. 수행에서 두려움이라든지 하는 것도 관찰 대상이라.

큰 관찰의 대상을 갖다가 이해를 하고 날 것 같으면 잔잔하게 오는 것은 영향을 못 미쳐.

여러분들이 도반이 올 거 같으면 도반이 오는 갑다 하고 냅둬버리는 거하고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공부가 안 되니까 어떻게 돼? 일일이 그런 데 신경이 쓰이게끔 되는 거라. 모르는 사람 오는 거하고 꼭 마찬가지라.
좌선수행 하다가도 꼭 마찬가지라. 조그만한 경계 들어오면 신경 되게 쓴다. 앉아가지고 ‘혹시 내가 죽을까?’ ‘아, 이거 이러다가 잘못될 게 아닌가?’

한번 넘어서 보라고! 넘어서 보면 ‘아이고, 그거 별 거 아니구나’ ‘거기에 신경 쓸 여유가 없구나’ 하는 생각들을 가지게끔 되는 거라.

보통 이제 태국에 있는 큰스님들은 스님들의 수행상태를 점검을 참 잘해 줍니다. 그러니까 대충 얘기 듣고 ‘음, 요놈이 요때구나’ 해가지고 보통 판단을 한단 말이라.

한번은 그런 적이 있었어요. 수행을 이렇게 하다가 여러 가지 물론 경계들이 많이 닥쳐옵니다.

그런데 거의 한 3일 정도를 아무 것도 관찰을 할 수가 없는 거라.

분명히 내가 눈을 뜨고 있고 호흡에 집중을 하고 있는데 호흡조차도 없고 사라져버리고 있는 상태라. 주변의 소리고 뭐고 이런 것도 아무것도 없어져 버려.

 

그냥 아무것도 없는 상태 진공상태에 빠져버린 거라.

그러면서 뭐가 되느냐 하면 ‘음, 저놈이 지금 뭔 생각을 하고 있나’ 아는 거라. 누가 저쪽에서 온다, 그럼 ‘누가 무엇 때문에 여기 오고 있고 언제 도착할 것이다’ 훤히 알고 있는 거라. 그냥 눈을 뜨고 있는데도, 물론 그 앞에 보이진 않지. 막혀져 있는 데니까. 그런데도 다 아는 거라.

 

옆에 있는 도반들이 저놈이 지금 벌써 몇 시간째 계속 저래 있으니까 이상하다 해가지고 인제 큰스님을 부르러 가요. 그 스님이 와서 부르러 가고 오고 하는 것도 이미 나는 알고 있는 거라. 큰 스님이 올 것이다 하는 것도, 와서 어떻게 할 것이다 하는 것도 다 알고 있는 거라. 와서 직접 와서 큰스님이 내 상태를 점검하고 “음, 얘는 아직 멸진정은 아니니까 이미 내 온 거 알 거다. 그만 냅둬 버려라” 하고 가 버리는 거라. 그렇게 겪고 나니까

그 앞에 문제들은 문제가 안 되는 거라.

부처님이 보인다든지, 아니면 무슨 조그만 소리들, 태국 같은 데는 밖에서 수행들 하고 할 것 같으면 이 나뭇잎이 햇빛을 차단하는 소리들이 있습니다. 그런 소리가 들린다든지 아니면 정맥이 뛰는 소리라든지, 맨 처음에는 뭐 정맥 뛰는 것부터 먼저들 알겠지. 이런 소리들은 소리로서 들어가지도 않게 되는 거라.

근데 여러분들 그런 소리라도 들어봤어요?

그마만큼 공부할 마음들이 없다는 거라.

 

그러면서 뭐 하러 여기 와가지고 스님 법문 듣고 그렇게들 하는 거라?

“스님! 법회 자꾸, 법문 자꾸 해주십시오.” 하지 말고 한번 한 법문이라도 다시 새겨가지고 자기 것들을 만들도록 그렇게 하십시오 이. 다음 시간에 또 물어볼 거다 이.

 

그래서 "이쪽 언덕과 저쪽 언덕에 부딪치지 말고 통나무가 흘러가도록 하라."

이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오온 - 나라고 하는 거죠.
일반적으로 '나'라고 하는 것, 이거는 살아가면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그리 안 할 수 있습니까? 아마 여러분들에게 수행센터에서처럼 원숭이가 눈 가리고 코 가리고 귀 가리고 이렇게 하고 살아라 할 것 같으면 아마 돌아버릴 거라. 직접 여러분들이 봉사가 되고 귀머거리가 되고 그랬다고 생각을 한번 해 보십시오. 굉장히 힘든 생활들을 해나갈 거라고.

근데 수행센터에 가면 어떻게 해요? 탁 들어서자마자 그 그림부터 먼저 있어. 내 마음에는 꼭 원숭이가 날뛰듯이 그렇게 날뛴단 말이라.

 

“이 날뛰는 마음을 갖다가 듣지도 말고 보지도 말고 냄새 맡지도 말고 육근을 잘 조절해서 여섯 가지 경계에 부딪치지 않게끔 하라” 하고 그렇게 한단 말이라.

일상적으로 살아가면 그 문제가 제일 먼저 부딪치는 거라. 꼭 수행이 아니더라도.

그래서 예쁜 여자 보면 ‘아이고, 예쁘다’ 하고 생각을 하게 되고, 예쁜 꽃을 보면 그 꽃이 무슨 색인지 또 더 나아가지고 이게 무슨 향기가 나는지 그걸 알려고 하고, 그걸 취하고, 그러는 게 기본적인 사람들 삶이란 말이라. 이런 걸 얘기하는 거라.

그래서 이쪽 언덕과 저쪽 언덕에도 부딪치지 마라라고 하는 것은 그런 "6가지 대상, 6가지 뿌리 이런 것에 휘말려 들어가지 마라"라는 뜻입니다.

얼마 전에도 얘기했지만, "무명을 어리석음을 타파하고 나면 완전한 깨달음에 이른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어리석음을 타파하고 나면 6근(六根)이 소멸된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부처님은 육근이 소멸됐습니까? 열반에 들기 전에? 육근이 뭡니까? 눈 귀 코 하는 이런 감각 기관을 얘기하는 거라. 부처님도 똑같이 눈 귀 코가 다 있었다고. 우리들도 마찬가지지만.

그럼 뭐 틀린 거 아닌가? 무명이 사라지면 육근이 사라진다고 하는 것은?

12연기가 그런 거 아니야? 무명, 행, 식, 다음에 뭐라? 명색이라. 명색이 뭐라? 몸과 마음이라.

이 몸은 뭐로 이루어졌어요? 눈 귀 코 이런 거로 이루어진 거라. 뭐로 이루어졌기는.

이제 여기서 우리는 이제 우리가 알고 있는 육근이라고 하는 것을 잘못 알고 있다 하는 겁니다.

눈으로 인해서 보는 대상, 책이라고 하는 것이 내가 접촉을 함으로 해서 안식이 생긴다, 그렇게 보통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육근(六根)과 육경(六境)과 육식(六識)을 갖다가 18계(界)다 그렇게 얘기하기도 하고.

 

근데 조금 전에도 얘기했지만, 우리는 분명히 육근을 가지고 있단 말이라요. 물질적인 눈 귀 코 이런 것들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다 가지고 있는데, 왜 그러면 그게 사라진다고 얘기를 했을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육근은 잘못 알고 있는 것 아닌가?

여러분들이 생각하고 있는 육근의 의미는 틀림없이 잘못돼 있다는 거라.
물질적인 눈 귀 코 입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의식 활동으로서의 눈 귀 코 입을 얘기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눈 귀 코 입이라고 하는 물질적인 부분은 반드시 수정돼야 된다 하는 그런 얘기입니다.

 

부처님이, 아함경에 보면 상적유경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중아함이죠. 「상적유경」하고 또 하나 경전이 「상수 목건련경」 이 두 경전에서 처음 수행하는 자들에게 당부한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인제 강물에 띄워진 통나무와 꼭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수행하는 자들이라는 거라.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 처음 수행하는 자들과 꼭 마찬가지라.

그런 자들에게 부처님이 이렇게 하여라 하고 한 얘기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십선계(十善戒) 잘 지켜서 신구의 삼업(三業)이 청정한 생활을 하여라.

두 번째가 자신의 사념처 -신수심법입니다 - 사념처를 여실하게 관찰하여라

세 번째가 자신의 사념처를 여실하게 관찰하고 욕망을 일으키지 말아라.

 

아마 이 3가지는 여러분들 다 보통 이해를 할 겁니다. 음, 착한 일하고 나쁜 일을 하지 마라. 그래서 몸과 말과 생각을 깨끗하게 하면서 살아가라 하는 얘기를 여러분들 다 알 겁니다. 그리고 수행을 할려고 할 것 같으면 사념처를 바탕으로 해서 수행해 나가야 된다 하는 것도 여러분들 알 겁니다.
그래서 그 사념처를 갖다가 관찰하면서 바르게 수행해 나가야지 욕망을 일으켜 가면서 수행하라 하지 마라 하는 것들도 여러분들이 잘 알겁니다. 그래서 이 3가지는 누누이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아는데,

 

네 번째가 부처님 뭐라고 했냐 하면 육근(六根), 여섯 인드리야, 그 근을 인드리야(indriya)라고 합니다.

육근을 수호하여 항상 막아라.

네 번째 그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여기에서 인제 처음 ‘육근’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육근을 수호하라, 육근을 보호하라, 보호할 육근이 뭐가 있느냐는 거라.
눈, 물론 우리는 눈을 깨끗하게 하고 가끔씩 씻어주고 하기 때문에 보호한다 하고 할 수 있겠지. 눈이 나빠지면 안경을 쓰기도 하고 하니까. 부처님이 그걸 가지고 보호한다곤 얘기를 안 했을 거란 말이라. 자, 그 부분은 조금 이따 설명하고,

 

다섯 번째가 뭐냐면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몸가짐을 잘 살펴라.

들고 날 때 호흡이 들어오고 나가고 할 때 내 몸을 대상으로 해서 잘 관찰하고, 일상생활 할 때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거기에 마음 집중해서 살아라 하는 얘깁니다.

그다음 여섯 번째, 쓸데없는데 휘말리지 말고 내 안으로 머물러라.

내 안으로 머물러서 선정을 닦아서 사선을 성취하도록 하라.

쓸데없는 세상사나 쓸데없는 일들 남의 일들이나 그런 주변적인 일들에 휘말리지 말고, 내 스스로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수행을 해나가서,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유유자적할 수 있도록 하라 하고 그렇게 얘기를 했단 말이라.

이 다섯 번째 여섯 번째들도 여러분들이 보통 이해를 하는 부분들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네 번째라.

그래서 육근을 수호한다고 하는 것은 통상적으로 이제 경에서는 그렇게 얘기합니다.

"사념처에 마음 집중하는 것이 육근을 수호하는 것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사념처에 마음을 집중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 대상에 인해서 마음에서는 동요가 일어나질 않습니다. 마음이 안정된다는 겁니다.
동요가 일어나지 않으니까 어떻게 돼? 정념의 상태! 바른 사띠가 계속 유지돼 나간다 하는 거라. 이걸 갖다가 '육근을 수호한다'라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자, 그렇게 볼 것 같으면 이 육근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눈과 귀와 코, 입과 몸과 뜻이라고 하는 6가지 감각기관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하는 겁니다. 눈 어디에도 사념처에 마음을 집중해서 정념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부처님이 뭐라고 그럽니까?

육체적인 눈은 그냥 눈일 따름이다. 그 육체적인 눈은 지 혼자서는 절대 존재를 못한다는 거라. 근데 육체적인 손가락이 지 혼자 존재를 합니까? 몸에 붙어 있으니깐 손가락같이 보이지. 근데 이건 손가락이 아니다 하는 거라. 이게 진정한 손가락이 되려고 할 것 같으면 누구든지 이걸 보고 손가락이라고 불러야 된다는 거라. 이건 명칭일 뿐이라는 거라.

 

하나의 예를 들까요? 스님 앞에 있는 게 마이크입니다. 미국 사람에게 물어보든 한국 사람에게 물어보든 이게 뭡니까? 하고 물어보면 다 '마이크'라고 그럽니다. 아프리카 부시맨을 데려와서 이게 뭡니까? 하고 물어봐. 이거 뭐라고 그러겠어? 응? 이걸 절대 마이크라고 안 한다는 거라.

명칭이라는 것은 꼭 이와 마찬가지라는 거라. 내 가치관 내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판단하고 가치 기준을 정할 때야만이 명칭이 되는 것이지, 통상적으로 누구든지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손가락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거라. 사물의 실재는 이게 손가락이라 하든 발가락이라 하든 똑 마찬가지라는 거라.

근데 우리는 어떻게 돼? 이 손가락에 집착한다는 거라. ‘에이, 이놈이 나쁜 짓을 했으니까 손가락을 잘라버려’ 우리네 스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에이, 욕망의 뿌리가 꽃 지한테 있으니까 꽃을 잘라버려’ ‘내 이 몸은 참으로 하잘 것 없는 것이니까 하잘 것 없는 걸 내 증명을 해보기 위해서 내 손을 연비를 한다. 손가락을’

많이 그렇게들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게 이 육근에 대한 인식을 잘못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들이라는 거라.

손가락을 잘랐다고 하더라도 이 손가락이 단순히 물질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거 같으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거라. 눈이라고 하는 물질적인 것은 그냥 눈일 뿐이지 그 무엇도 아니라. 눈이 있다고 하더라도 대상이 없을 것 같으면 나는 볼 수가 없는 거라.

대상이 여기 있다 - 대상으로 눈이 향해야만이 대상에서 방출하는 에너지로 인해서 이 눈이 그곳을 빨려 들어가요. 그래서 내가 인식하는 거라, 대상을. 그런 역할밖에 못 하는 거라 눈은. 그 어떤 것도 없어. 여기에 벽을 쌓아놓고 있다고 하더라도 눈이 무슨 역할을 해? 아무 것도 못하는 거라. 그런 하잘 것 없는 게 이 감각 기관들이라.

 

그래서 우리는 이런 감각 기관을 대할 때 항상 생각해야 되는 것이 '나라고 하는 것, 나의 것'이라고 하는 집착에서 벗어나야만이 바른 수행을 해나가는 첫 번째 길이다 하는 거라.

그런 의미에서 부처님이 이쪽 언덕과 저쪽 언덕을 맨 처음으로 제시를 해두었습니다. 냄새 맡는 것에 대해서 그 냄새를 가지고 아 향긋한 냄새기 때문에 내가 취하려고 하고 또는 나쁜 냄새로 인해서 배척하려고 하는 것, 이런 것들을 차단을 시켜줘야만이 이쪽 언덕에도 닿지 않고 저쪽 언덕에도 닿지 않게 된다는 거라.

 

수행을 해나갈 때도 꼭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앉아서 좌선한다고 이렇게 앉아 있을 것 같으면 굉장히 경계들이 많이 부딪칩니다.

수행이 잘될 때도 있고 또 잘못될 때도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요?

잘될 것 같으면 ‘한번 더, 한번 더!’ 내 그 경계들을 갖다가 확인하고 거기에 머물려고 한다는 거라.
수행이 안 될 때는 어떻게 해? ‘에이, 오늘은 안 된다’ 벌떡 일어나버려. 경행해버리고. 쉽게 우리가 이렇게 바꾸는 것이 이쪽 언덕과 저쪽 언덕에 닿는 거와 틀린 것이 하나도 없다는 거라.

 

살아가면서도 그런 육근을 잘 호지를 해야만이 우리는 일반적으로 잘 살아간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하는 일에 열심히 하다 보면 그 일에 대해서 내 스스로도 만족해하고, 또 하는 일이 잘 되다 보면 어떻게 돼요? 마음도 고요해지고, 그러니까 더욱더 그 일을 하게끔 되고. 세속에서도 그렇게 수행을 안 하고 있는 사람들도 그렇게 육근을 수호해 가면서 살아간다는 거라.

그런데 하물며 수행자들이 육근을 수호를 못해가지고 되겠느냐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처음 수행하는 자들은 반드시 이 6가지를 지켜나가야 된다" 하고 얘기를 해놓은 부분입니다.

부처님이 통나무 비유를 하면서도 맨 처음 경계에 부딪히는 것이 바로 이쪽 언덕과 저쪽 언덕이라 하면서 거기에 대한 비유를 육근과 육경, 육근이라고들 안 하고 육입처(六入處)라고 그럽니다. 그런 대상들이라는 거라.

거기에 대해서 마음을 조절할 수 없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거라. 우리가 육근이라고 하는 것 자체 그것도 그냥 물질적인 눈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눈의 감각적인 활동을 얘기한다 하는 것, 정신적인 활동을 얘기한다고 하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정신적인 부분들은 어떻게 돼? 대상에 얽매이질 않습니다.

물질적인 것은 대상이 있습니다. 정신적인 것은 대상에 얽매일 수가 없습니다.

항상 정신적인 것은 이동을 하게끔 돼있다는 거라. 매이지 않는다는 거라. 실질적인 눈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렇게 눈을 봐야 된다는 거라.

그게 수행자가 해야 될 일이다 하는 거라. 반드시 이쪽 언덕과 저쪽 언덕에 닿지 않게끔 하면서 수행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수행을 할 때 바깥 경계에 부딪치든 안으로의 경계에 부딪히든 그 경계는 항상 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법이 없습니다. 변해 나가는 것이구나 하는 사실을 스스로 알아차려야 되겠지만은, 그렇지 못할 경우에도 터부시해도 관계는 없습니다. 더 큰 경계와 부딪쳤을 때 그것은 영향을 못 미칩니다.

그러니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말고 수행을 해나가라 하는 겁니다. 오롯이 내가 해나가는 수행 대상 - 사념처에 마음을 집중해서 나아가도록 해야 된다 하는 겁니다.

일상생활을 할 때도 꼭 마찬가지로 몸에서 일어나는 활동들에 마음을 밀착하려고만 해야지, 주변적인 것에 신경을 쓰지 말아라는 거라. 항상 몸과 마음이 어떤 상황에서든 지금 현재에 밀착되도록 자꾸 노력들을 해나가면 수행은 무르익어 가진다 하는 얘깁니다.

그것이 바로 이쪽 언덕과 저쪽 언덕이라고 하는 경계 대상을 얘기하는 겁니다.

 

잊어버리면 안 되는 것! 수행의 대상을 반드시 알아차리고 나아가도록 해야 됩니다.

대상을 잃어버리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대상이 없는 상태에서는 집중도 일어나지 않고 노력도 배가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수행의 초기에서는 반드시 대상을 따라가야 됩니다.

길을 모르는 사람은 누구 길잡이 따라서 처음에 가듯이, 여러분들도 반드시 부처님이 제시해 놓은 4가지 대상 그 대상은 항상 어느 때든지 잊어버리지 말고 붙잡고 가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우리라고 하는 이 통나무가 처음 수행을 해나가는데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을 겁니다.

오늘은 여기서 마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