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2~2013 담마스쿨

「삼귀의 삼창」, 절 수행법_빤냐와로 스님법문_담마스쿨(130329-1)

담마마-마까 2024. 11. 21. 22:42

https://youtu.be/PFwaOvQjHDQ?si=GA7P_O_CC0ePzAv6

 

* 「삼귀의 삼창」, 절 수행법_빤냐와로 스님법문_담마스쿨(130329-1)

 

오늘은 스님이 서울 나들이를 할 때 KTX를 안 타고 승용차를 몰고 왔어요. 얼마 전에 승용차를 바꿨거든요. 한 십칠년 너머 다니다가 차가 인제 퍼져가지고 폐차를 했어. 폐차를 하고 우리 선원 식구들한테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물어보더라고요.

“스님, 차 어쨌습니까?”

수명이 다 돼서 보내드렸다, 그러니까 자기들끼리 수군수근수근 하더니 또 차를 한 대 이번에 새로, 저번보다도 훨씬 등급이 높은 거 SM5. SM5 새 거 살 형편은 못 되고 중고 깨끗한 걸로 해가지고 하나 장만해 주더라구. 그래서 당분간 또 한 15년 넘어는 별 탈 없이 또 탈 것 같애. 그 차를 몰고 오면서 사고 나는 모습들을 많이 봤어요.

그걸 보면서 언뜻 생각나는 게 스님뿐 아니라 여러분들도 수행하면서 사고 나본 적 있어요? 스님은 그걸 자주 봤거든요. 가끔씩은 스님들이 정신이 약간 나가 가지고 큰 대로변에서 막 노상 방가를 한다든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다든지 또는 정신을 잃어버린 경우도 있고,

뭘 덜덜덜덜 떨어 싸? 물 한 잔 주는 게 이렇게 부담돼가지고 어쩌노? (수행자 : 제가 심장이 좀 약합니다. 스님)

 

또 일반 재가인들도 수행을 하면서 보통 때는 잘하다가도 가끔씩 이게 수행자인가 하는 생각이 일어날 정도로 갑자기 돌변하는 경우들을 보기도 합니다.

차도 마찬가지죠. 운전 잘하다가 앗차 하는 잠깐의 순간에 사고가 납니다. 깜빡 졸았던지 아니면 정신 차려서 운전하는 걸 100% 운전하지 않고 엉뚱한 짓 하면서 왔다갔다 했던지 이렇게 했을 때 사고가 나게 되는 거라. 근데 사고가 나버리면 이때까지 운전한 게 별 쓸모가 없어져 버리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수행을 어디서 얼마만큼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과연 24시간 사띠할려고 노력들을 하고 있나? (수행자 : 노력하는데 잘 안됩니다.)

잘 안되면 만날 사고 나고 있다는 얘기지 뭐.

 

수행을 할 때는 그런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깜빡 잠깐의 순간에 알아차리지 못하면 사고가 나버립니다. 여러분들 삶도 꼭 마찬가집니다. 조금 더 그런 일 없이 순조롭게 잘 나아가려고 할 것 같으면, 그 잠깐의 순간도 놓치지 않을려고 해야 됩니다. 그 잠깐의 순간을 놓쳐버리면 확 갑자기 성을 낸다든지 갑자기 욕심을 부린다든지, 이렇게 바뀌어버리게 됩니다. 물론 수행 열심히 한 사람들은 그럴 때는 더 올라오기 전에 적절하게 통제를 해가지고 그 상황을 모면을 하듯이 운전하는 분들도 자기가 실수했지만은 실수한 것을 인정을 하고 빨리 그걸 수습을 했을 경우에는 크게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수행하는데 수행이 순조롭게 잘 안돼 나갈 때, 대부분 이렇게 문답들을 해보면 이해하는 게 좀 부족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들이 조금 부족합니다.

얼마 전에도 우리 선원에서 수행 열심히 하는 분의 친척 중 가족 중에 한 분이 돌아가셨어요. 우리 선원에서는 제사 같은 걸 안 지냅니다. 기도도 안 하고 전혀 안 합니다. 수행하고 법문하고 문답하고 이거 외에는 안 하거든요. 그래도 돌아가셨으면 스님이 가봅니다. 가서 인사라도 하고 간단하게 “아닛짜 와따 상카라 웁빠다 와야 담미노” 하는 게송 몇 가지 해주고 그냥 돌아오고, 그게 다입니다. 그 이상은 뭐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대부분 살아있는 사람들은 마음이 좀 허하거든. 그럼 이제 스님 몰래 다른 절에 가서 인제 49재를 지내. 그렇게 해서 와요.

 

돌아가시고 나서 그분에게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칠까? 만날 법문 들어가지고 아귀계에 태어난 것이 아니면 그 영향을 받을 수 없다는 걸 분명히 아는 데도 마음이 안 그런 거라. 거기에 대한 확신이 없거든. 확신이 없으니까 그렇게 될 수밖엔 없는 거라. 그렇다고 스님한테 얘기할 수도 없고.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아는데도 그걸 인정하려고 받아들일려고 하질 않습니다.

또 여러분들이 항상 즐겁고 행복할 것 같아도 그렇게 되지 못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됐을 경우에 그걸 자꾸 부정하려고 한다는 거라.

 

기본적인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가 확립이 안 돼 있으니까 수행해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수행해도 자꾸 '내가' 알아차리려고 하고 '내가' 마음을 관찰하려고 하지, 그냥 알아차릴 대상이 일어나서 알아차려지는 것이 아니고, '내가' 알아차리는 거라. 그러니까 배를 관찰할 때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도, '내가' 그냥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으로 관찰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거라.

 

기본적인 것들을 분명하게 좀 확립을 자꾸 시키려고 해야 됩니다.

삼법인과 사성제 팔정도 이런 것들을 교리상으로 이렇게 알려고 하지 말고 실제, 실제하는 여러분들 생활에서 그것들을 갖다가 자꾸 확립을 시켜 나갈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 2가지가 되고 나면 계속 수행을 하더라도 조바심 내지 않고, 수행을 해도 또 그래도 차분하게 끈기 있게 해나가게 됩니다. 대부분 보면 못하는게 이 2가지들이 부족해. 할 때는 열심히 하는데 어느 순간에 탁 놓쳐버린다는 거라. 실제로 그때 착 다음 단계로 넘어갈 찰나인데 딱 놓쳐버려.

 

그다음에 하나는 기본적인 것들에 대한 것들을 글로써만 알려고 하지 말고 체험해서, 그리고 여러분들이 그걸 깊이 있게 자꾸 이해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걸 그 이해한다는 건 그걸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겁니다. 받아들이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이 2가지들은 해나가면 그래도 수행해나갈 때 많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저번에 이어 가지고 해야 될 부분이 「삼귀의 삼창」 부분입니다.

하나 물어봅시다. 우리 나라에서는 "귀의불양족존, 두 번째로 귀의불양족존, 세 번째로 귀의불양족존" 이렇게 하지는 않죠? "귀의불양족존(歸依佛兩足尊), 귀의법이욕존(歸依法離欲尊), 귀의승중중존(歸依僧衆中尊)"’그렇게 하고 끝나버립니다.

삼귀의만 하지 삼귀의를 3번 하진 않죠? 대승불교 어떤 경전을 봐도 3번 하는 것은 없습니다. 스님이 본 적이 없습니다. 근데 왜 테라와다 불교 특히 빨리어 불교하고, 초기 대승불교는 있습니다 . 간다르 유부 같은 경우 그다음에 카시미르 유부 같은 그런 데에는 삼귀의 삼창 부분이 있습니다. 그걸 제외하고는 없는데,

 

유독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어디에 가더라도 삼귀의를 3번 합니다. 왜 3번 할까?

복잡하게 그걸 3번을? 경전도 보면 요즘 번역된 경전들 혹시 읽어봅니까? 읽어보면 꼭 3번 반복돼서 나옵니다. 처음 스님도 아이 그냥 저 1번만 하지 분량 많아지게 지금 뭐하러 3번 저리 할까? 이렇게 얘기했거든. 왜 3번 할까? 누구 얘기해 봐요.

(수행자 : 잘은 모르겠는데요. 제 생각으로는 경각심을 좀 더 높이기 위한 수단이 아닌가 싶습니다.) 경각심을 높일라면 3번 아니라 그러면 한 9번 하면 되겠네. 그것도 일리는 있습니다. 근데 다 맞다고는 얘기하기 힘들고.

 

부처님의 가르침 자체가 그렇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강제적으로 따르게 하는 법은 없습니다. 삼귀의 하는 것도 여러분들이 자발적으로 삼귀의를 하게 되는 것이지. 강제적으로 삼귀의를 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도 자발적으로 하게끔 하는 것이지, 강제적으로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엔 강제성은 없습니다. 그러면은 부처님은 먼저 제시를 해줍니다. 이것이 종이다. 우리 같으면 여러분들 같은 경우에는 이게 종이인 걸 갖다가 알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해야 돼요? 이게 종이인지 아닌지를 갖다 확인해야 되겠죠. 확인해 보니까 틀림없이 종이네 하고 확신이 서는 거라. 그게 3번입니다. 던져주는 것 1번, 그다음에 여러분들이 확인하는 것 1번, 그리고 확인한 것으로 인해서 확신이 들어서 딱 그것에 대해서 정립이 되는 거 1번, 그러니까 3번이 되는 거라.

 

쉽게 말하면 어떤 경우든지 여러분들 것이 되지 않으면 그것은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는 거라. 경전을 아무리 읽어도 경구에 매달려가지고 여러분들 것이 되지 못하면 기억에 안 남습니다. 그럼 여러분들 경전을 읽을 때나 삼귀의 삼창할 때도 꼭 마찬가지라는 얘기라. 그런 3번 과정들을 반드시 겪어야 됩니다.

수행이 진척돼나가다 보면 수행이 어느 정도 무르익으면 반드시 스스로 자기 자신이 확인하는 과정들이 있습니다. 확인하는 과정이 지나고 나면 그것에 대해서 완전하게 이해하는 과정이 그다음에 뒤따라 와지게 되는 거라. 체험한 것들은 확인을 하고 확인한 것들은 내 것으로 만드는 것. 그래서 반드시 삼귀의를 삼창하게끔 돼 있습니다. 그게 인제 "삼귀의 삼창"이라는 건데,

 

이 프린트물은 삼귀의를 하게 된 유래에 대한 걸 쭉 적어놓은 겁니다.

여러분 대부분 알죠? 버마에 가면 가장 큰 사원이 무슨 사원입니까? 예. 쉐다곤 파고다. 쉐다곤 파고다는 어째서 그게 만들어지게 됐어요? 부처님 머리카락, 땁뿟사와 발리카라는 2명의 상인이 가져온 부처님 머리카락을 거기다가 안치해두고, 과거 부처님의 사리를 모셔두고 이렇게 했다고 자기들 기록에 있습니다.

태국에도 그런 곳이 있고, 말레이시아도 그런 곳이 있고, 인도네시아도 그런 곳이 있고, 저 멀리 떨어져있는 수마트라 섬에도 그런 곳이 있습니다. 스완나부미로 가는 2명의 상인이기 때문에, 그리고 방글라데시에 가도 치(?) 사원 같은 경우에는 그런 의미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쨌든 2명의 상인이 부처님에게 머리카락을 얻은 이유가 뭘까? 부처님이 뭘 해줬기에? 2명의 상인은 아직 상가가 형성되기 전이니까. "붓당 사라낭 갓차-미. 담망 사라낭 갓차-미." 2귀의만 한 거죠. 부처님 담마 사라낭 갓차-미라고 한 걸 보니까 부처님이 법을 설해줬다는 얘기거든. 그렇죠.

 

뭔 법을 어떻게 설해줬기에 나는 이제부터 당신을 나의 스승으로서 모시고 당신이 가르쳐준 가르침 따라 살아가겠습니다. 하고 맹세를 하게 됐을까?

또 삼귀의를 하게 된 야사의 아버지, 야사의 아버지는 야사가 출가를 하게 됨으로 인해가지고 상가가 형성되었으니까 출가한 스님이 존재를 하게 됐으니까, 3귀의를 왜 하게 됐을까? 왜 그래요? 부처님이 무엇을 설해줬기에 그럴까? (수행자 : 삼법인에 대한 걸 깨우쳐 주셨나 해가지고...)

음 부처님께서 뭔가 법을 설해주면 그것이 일상적인 얘기든 뭐 아니면 거기에 적절한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는 것이든 그러면 그 가르침을 듣고 ‘아 이것이 진리’다 하고 확신이 들어야 될 거 아니라. 그래야 변함이 없게 될 거 아니라.

 

여러분들은 과연 부처님 가르침을 듣고 얼마 만한 확신들이 들까?

또는 여기에 부처님의 상호를 모셔놨습니다. 부처님을 보고 얼마만큼 부처님에 대해서 진짜 스승으로서 받들어 모실 마음이 들까?

또는 여기 스님들이 있습니다. 과연 여러분들에게 성스러운 성자로서 여러분들에게 법을 설해주고 법을 또 인도해 주는 출가한 비구 스님으로서 여러분들에게 그런 존재로서 여러분들이 예경을 드릴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있는 사람 한번 손 한번 들어봐. 법은 좋다, 승가는 좋다 치자. 진짜 부처님에 대해서라도 확신할 수 있는 사람? 없어요?

이게 대부분 2가지 패턴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뭐냐면 그런 거 전혀 필요 없습니다. 그냥 내가 좋아가지고 부처님 가르침 좀 배우고 또 수행하고, 그리고 오계 일부러 받을 필요도 없고 그냥 와가지고, 내가 마음속에 죄 안 짓고 바르게 살면 되지 하고 생각하고 쭉 수행을 해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한 사람은 수행 개뿔도 안 합니다. 그 부처님 가르침 와서 법문 들어도 귀에 안 들어옵니다. 그런데도 마음에 삼보에 대해서 믿음은 확실하게 가지고 있는 거라. 맹목적이다시피.

 

자! 이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이 2부류의 사람들은 어떤 차이가 나게 될까?

끝까지 불교라는 언저리에 남아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들일까? 두 번째 부류입니다.

그건 통계가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첫 번째 부류들은 물론 다시 불교도가 되기도 하고 뭐 그렇게 하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는 그렇게 되진 못합니다. 또 자유롭게 또 다른 종교 믿고 또 다른 가르침 듣고 또 다른 스승 찾아가고 이렇게 자유롭게 바뀌고.

끝까지 부처님의 자리에 부처님의 종자로서 남아있는 자를 떠나서라도,

두 사람들이 수행이 나중에 쭉 흘러갔을 때 어떤 차이가 날까? 두 번째 부류가 훨씬 뛰어났습니다.

 

대체적으로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어떠한 경우든지 시작을 할 때 이걸 먼저 딱 시작을 하고, 다른 법문을 하든지 뭘 하든지 합니다. 그게 그마만한 이유가 틀림없이 있다는 거라.

 

자 그러면은 한번 봅시다.

세 가지 의지할 대상! 그게 붓다·담마·상가(Buddha Dhamma Saṅgha)죠!

그 3가지를 의지할 대상을 왜 의지해야 될까? 왜 의지할 거라? 불교 외에 다른 종교에서는 그것 말고 다른 데서 의지합니다. 하느님을 의지하든지 아니면 토착적인 것은 산신령을 의지하든지 아니면 뒷산에 있는 호랑이를 의지하든지 의지할 대상으로 삼습니다. 근데 왜 우리는 하필 그런 것들이 아니고 붓다 담마 상가일까? 왜 그런 거라? 왜 그래요?

 

의지할 대상이라고 할 것 같으면 기본적으로 갖춰져야 되는 것들이 딱 있습니다.

그리고 의지할 대상으로 인해서 내가 그것을 의지할 거 같으면 내가 바뀌어져 나가는 부분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지금 이 생에서 조금 더 성장을 하게끔 됩니다. 정신적인 성장 그다음에 정신적인 행복, 정신적인 고요함 이런 것들이 점차적으로 더 와야 되는 것이고, 이 생에서.

그리도 다음 생에서도 당연히 의지할 대상을 의지한 것으로 인해가지고 다음 세상에서도 좀 더 좋은 조건으로 태어나게끔 되고.

그다음에 이 생에서라도 이 생에서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뭡니까? 이 생뿐 아니라 다음 생 과거생 윤회라고 하는 것! 윤회를 뛰어넘을 근거가, 고리가 있어야 될 게 아니라.

이걸 만들어 줄 수 있느냐는 거라. 다른 것에서.

 

그럼 여러분들은 적어도 "붓당 사라낭 갓차-미, 담망 사라낭 갓차-미, 상강 사라낭 갓차-미" 할 것 같으면 그 이 3가지 조건들을 갖다 충족시켜 주기 때문에 할 거 아니라.

근데 이걸 안 하는 사람들은 지금 현재는 여러 가지 공덕들을 쌓기도 합니다. 그래서 조금 더 나은 생활들을 하기도 하고, 좋은 공덕의 과보를 받기도 합니다. 근데 대부분 이 생에서 다 쓰여져 버려요. 다음 생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생에서 라고 하더라도 이생 다음에 다음 생에서 좋은 조건을 받는다는 보장을 할 수가 없다는 거라. 이미 좋은 조건들 만든 거는 이 생에서 다 써버렸거든.

 

그런데 붓다 담마 상가에 대한 믿음을 확실히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 믿음의 힘으로 인해서 다음 생에 영향을 받는다는 거라. 그리고 그 믿음들은 틀림없이 내가 언젠가 될지는 몰라도 이 윤회로부터 둑카라고 하는 것들로부터 탈피한다는 의미들을 가지게 되는 거라.

그래서 '사라나(saraṇa)' 라고 하는 것은 그 의미 자체에는 '끊어내 버린다'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과거의 것들을 이걸 사라나 함으로 인해서 귀의함으로 인해 가지고 과거의 것들을 끊어내 버린다는 거라. 과거에 나쁜 일들을 한 거, 과거에 습관 지어진 것들, 그것들을 단번에 착 끊어내 버리고 새롭게 만든다는 거라.

 

과연 여러분들 그렇게 될까? 붓다 담마 상가 하면서?

그런 것이 붓다 담마 상가인데, 붓다 담마 상가를 의지할 대상으로 해서 나아가는데,

의지할 대상으로서의 의미와 그리고 의지함으로 인해서 내가 바뀌어지는 것들이 뭐가 있을까?
한번 물어봅시다. 테라와다 불교 알면서 바뀌진 부분 뭐가 있어요?

(수행자 : 마음과 몸의 오염이 훨씬 줄었습니다.) 몸과 마음의 더러움이 점차적으로 줄어들었다. 또 다른 사람?

아니면 한국 절에 다녀도 괜찮습니다. 불교를 믿음으로 인해서 바뀌어진 게 뭐가 있어요?

(수행자 : 현실에서의 인식의 전환) 어떤 인식의 전환?

(수행자 : 예. 해야 될 일과 안 해야 될 일을 구별해서 하고 착한 일과 나쁜 일들을 알아차림 하고) 음. 선한 일들 자꾸 할려고 하고 나쁜 일 안 할려고 하고, 완전하지는 않아도 어쨌든 그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또?

(수행자 : 사성제에 대해서 확실하게 이해가 되었습니다.)

진리, 사성제를 안다고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깨달음에 나아가는 길들을 갖다가 분명하게 인식해서 그 길을 밟아나간다는 얘기거든. 어쨌든 내가 목표는 정해져가지고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그 목표대로 따라갈려고 하는 마음은 생겨난다.

또 뭐가 달라진 게 있어요? 별로 안 달라진 건가? 없어요?

(수행자 : 책을 많이 놔버립니다.) 예. 집착하는 것, 집착하는 거 놓아 버린다. 예 그것도 많이 달라지는 것들입니다.

 

아윗짜, 아빗쪼 라고 합니다. 그걸 보통 소욕(所欲)이라고 그러는데 원래는 소욕지족이 아니고 무욕(無欲)을 뜻합니다. (appiccha)

욕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원래 빨리어 어구에는 많습니다. 그래서 욕심을 적게 가지는 것에 만족을 해버리면 안 됩니다. 욕심 자체를 갖다가 가지지 않아야 되도록 해야 됩니다. 어쨌든 욕심을 가지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욕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집착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어떤 것이든 어떤 상황으로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거기에 맞게끔 행하는 것뿐입니다. 음 그걸 인제 무욕이라고 그러는 거라. 무욕해서 만족하고 해서 살아간다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그것도 좋은 방향입니다.

또 어떤 것이 있을까?

(수행자 : 너무 많습니다. 감각적인 쾌락을 하지 않고 혐오하게 되구요)

각자마다 여러 가지의 의미들이 있을 거라고 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그것 말고 간과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담마는 내가 체험할 수 있는 겁니까? 체험할 수 있는 거죠! 부처님의 가르침은 내가 경험할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상가라고 하는 성스러운 스님들, 통칭해서 그렇게 얘기합시다. 보통 이제 사리불이나 목련존자라고 하죠. 사리불과 목련존자와 같은 분이 내가 그렇게 되지 못하라는 법은 없죠? 나도 그렇게 나아갈 수 있어야 된다는 것.

또 부처님이 깨달으신 깨달음 이라고 하는 경지, 그것도 내가 도달할 수 있다는 것.

이게 인제 기본적인 전제 조건입니다.

 

삼보를 삼창을 하면서 가져야 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은 이 2가지 입니다.

 

붓다·담마·상가(Buddha Dhamma Saṅgha)라고 하는 것은 내가 직접 그것을 체험할 수 있고 그 상태에 이르를 수 있다고 하는 확신을 가지는 것!

그리고 붓다 담마 상가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윤회를 뛰어넘어버리고 위험으로부터 초월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 부처님도 윤회를 뛰어넘어버렸고 담마따라 가면 윤회로부터 뛰어넘어버리게 되는 거고, 성자들도 윤회로부터 뛰어넘은 자들입니다.

그런 분이 있다는, 3가지 대상이 있다는 거라. 그 얼마나 행복한 거라?

그러한 것이 있다는 걸 먼저 인식을 해야 되는 거고, 또 그러한 상태에 내가 이르를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보통 보면 "붓당 사라낭 갓차-미" 할 때 이 앞에 있는 부처님 상호를 떠올리면서 부처님을 의지해서 나아가겠습니다. 이렇게 하라고 얘기합니다.

어떤 마음으로 떠올려야 될까?

'아 부처님 완전하게 고로부터 탈출해서 윤회로부터 탈출해서 닙바나에 이르신 분' 내가 그런 확신이 들지 않으면 쭉 앞에 있는 불상을 보고 절하더라도 감흥이 안 일어납니다. 근데 그 성자가 앞에 딱 있다고 생각할 것 같으면 그 절을 할 때는 굉장한 환희심이 일어납니다.

그다음에 내가 마음을 더욱 두어가지고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다. 내가 그렇게 된다고 생각해 봐요. 얼마나 희망적이야? 그럼 절을 할 때는 굉장한 의미들이 있게 됩니다.

담마를 할 때는 이런 경전이든지 아니면 법륜 마크든지 이런 것들을 떠올리면서 해라.

상가를 할 때는 사리불이나 목련존자를 떠올리면서 이렇게 해라.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붓다, 담마, 상가 사라낭 갓차-미" 할 때 이것들을 생각하지 못할 것 같으면 그것은 염송하는 의미가 크게 없어져 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이거는 반드시 여러분들이 명심을 해야 됩니다.

 

경전에는 그러기 위해서 10가지를 쭉 나열을 해 놔놨습니다.

내가 그렇게 할 것 같으면 가장 먼저 바뀌는 게 마음이 아주 견고해진다.

다시 어떤 것들을 대상으로 해가지고 그걸 의지해서 나아가려고 하질 않는 거라. 뭐 부적으로 의지하든지 아니면 점 보는 걸 의지하든지 이런 거 할 필요성이 없는 그런 거라. 붓다 담마 상가만 있으면 그것만 있으면 내가 나아가는 데 전혀 문제가 없기 때문에, 그리고 헤쳐나가고 그 노력하는 힘들을 갖다 배가시켜 나가는데 전혀 문제가 없기 때문에, 그걸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는 거라.

자기 자신이 견고해지는 거라. 왜 그럴까? 이미 붓다 담마 상가는 그렇게 견고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 어느 것으로도 바꿀 수가 없는 거라. 부처님 진리가 뭐 여기 이것 따라서 또 저것 따라서 헤까닥 헤까닥 바뀝니까? 그런 거 없습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로, 경전에서 제시를 한 게 청정함 입니다.

가끔씩 스님이 이용하는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수행을 하다가 힘이 많이 떨어지고 또는 수행을 해나가는데 의욕이 좀 이렇게 떨어지고 할 때는 청정함을 되새깁니다. 부처님의 청정함, 담마의 맑고 깨끗함, 그리고 성자들의 그 청정한 마음, 세속에 물들지 않고 오로지 부처님의 법을 위해서 살아가는 그 청정함들, 그거 딱 1번 떠올리면 그냥 게으름 부리려는 생각이 확 달아납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청정함이 있어야만이 수행을 지속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마음을 맑고 고요하고 깨끗하고 가볍게 하라" 하고 얘기들을 하는 거라.

그렇게 마음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대상을 맨날 붙잡을라고 그러고, 안 그러면 일어나는 대상들에 대해서 싫어하는 마음들을 일으키게 되고, 지가 대상을 만들려고 자꾸 합니다. 그냥 가만히 놔두면 대상이 저절로 일어나지는데, 그냥 그거 알아차리면 되는데, 알아차리더라도 분명하게 3가지 특성으로써 알아차릴 수가 있는데도 그렇게 못 하는 거라.

청정해있지 못하기 때문에! 가벼워져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수행에서 힘이 떨어지면 그 청정함을 떠올리면 나도 이렇게 바뀌는 거라. 그러면은 내가 일부러 대상을 인제 ‘청정해져 있으니까 이제 배를 알아차려야지’, 이래 안 해도 저절로 이게 강하면 이게 그냥 그냥 그대로 알아차려져.

 

그다음에 세 번째 혹시 그런 적이 있습니까? 도반들 간에 즐거움을 줘 본 적 있습니까?

도반들 간에, 여러분들은 여기 법을 들으러 오고 법을 나누는 도반들입니다. 스님이 즐겨 쓰는 용어가 도반입니다. '법우'가 아니고, 또 '불자'도 아니고, 뭐 하여튼 용어들이 많이 있습니다. '선우' 이런 것들도 있고, 그런데 스님이 즐겨 쓰는 건 도반입니다. 여러분과 나도 도반 간이고 여러분과 여러분과는 도반입니다. "도를 깨달음을 향해서 나아가는 동반자"라는 뜻입니다.

도반들을 보면 그렇게 즐겁습니다. 특히 우리 선원 식구들 오래된 사람들은 일주일 못 보면 보고 싶어서 미쳐요. 전화해갖고 뭐 어쩌고 저짜고 일상생활이지만, 그런데도 그게 좋은 걸 어떡할 거라. 그러면서 점점 도를 나누고 법을 탐구하고 수행을 해나가는데 방해되는 무리들은 점점 더 떨어져 나가게 되는 거라. 왜 그럴까? 도반 보면 즐거우니까! 그 즐겁다고 하는 것은 나에게 이익을 주고 행복을 주고 깨달음을 향해서 나아가도록 그런 역할들을 해준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도반이 여러분들에겐 100%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거라.

 

부처님의 가르침, 또 성스러운 성자들, 부처님 여러분들에게 얼마만한 즐거움을 줘요? 한국에서는 좀 그게 경우가 드문데 특히 이제 스님이 태국에 오래도록 있었기 때문에, 스님들 간에 만나면 너무 재미있습니다. 저 나이 드신 80 넘은 그 어른 스님들하고 얘기할 때도 “야! 자!” 합니다. 야자. 그런데도 그게 전혀 부담이 되지 않고 즐겁다는 거라.

왜? 같은 길을 가고 있다는 걸 그런 확신이 들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라. 여러분들이 삼보를 따라서 나아갈 것 같으면 그 삼보가 여러분들에게 그런 즐거움을 주게 되는 거라.
그래도 여기 온 사람들은 그래도 그런 법이라도 들을 수 있으니깐 다행인 거죠. 세상에는 이 좋은 법 접하지 못하고 돌아가시는 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의미에서는 참 행복한 겁니다.

 

그다음에 경전에는 위신력을 가져다 준다. 이렇게 나오는데, 자꾸 사람들이 그걸 갖다가 주석서를 안 보면, 위신력을 무슨 보물 떨어지듯 똑딱 내가 무슨 원하기만 하면 똑딱 떨어져 주는 걸 갖다 얘기를 합니다. 그걸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위신력이라고 하는 것은 지혜와 자비를 얘기합니다. 지혜와 자비에서는 이 삼보를 능가할 대상이 없습니다. 당연히 나도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삼보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을 것 같으면 조금 더 지혜롭게 살아가지게 되는 거고, 조금 더 자비로워지고 있다는 거라. 조금 더 지혜로워질지는 몰라도 자비로워지지 않는다 할 것 같으면 잘못하고 있는 거라.

지혜와 자비는 양 바퀴입니다. 똑같이 가지게 됩니다. 똑같이. 그래서 자비롭지 못한 사람들은 지혜롭지도 못합니다. 지혜가 있는 사람들은 그 속에는 그 지혜를 갖다가 드러내게 하기 위해서는 자비롭지 않으면 드러나지질 않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지혜와 자비가 항상 따라오게 됩니다.

 

다음에 또 경전에는 "소원을 이룬다"라고 그렇게 나오는데,

소원은 주석서에서는 뭐라고 이렇게 얘기를 해놨냐면 자기완성!

이 생에서 이 몸 받고 태어나 가지고 해야 될 일들을 분명하게 다 하는 것! 그게 하나입니다. 또 하나는 스님들 같은 경우라고 보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법에 이르르게 하기 위해서 그걸 인도해 주는 역할!

이 2가지를 갖다 소원이라고 그럽니다.

 

이 2가지를 끊임없이 한다는 거라. 자기 자신의 이 생에서 또는 윤회하면서 해야 될 일들, 그 목표를 분명하게 이루도록 나아가게 되는 거고, 그러면서 조금이라도 좋다 할 것 같으면 다른 사람들을 이 법에 이르도록 자꾸 인도해 주는 거라. 이것도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 같죠? 근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요것도 똑같이 나아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법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은 사람은 그 법으로 사람들을 인도하질 못합니다. 아무리 중생 교화, 중생 구제가 좋다 해서 막 밥 만들어서 퍼주는 거 한다고 하더라도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의 해야 될 일들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 일을 할 것 같으면 오래 가질 못하게 됩니다. 그걸 지속적으로 계속해 나가는 사람은 그마만큼 자기자신도 부처님 법에 따라서 그마만큼 발현이 돼나가고 있는 거라. 그걸 갖다 소원을 이룬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다음에 장엄한다. 그렇게 나오는데, 아름답게 장엄한다는 거죠. 안으로 아름답게 장엄한다. 가끔 이렇게 사람들을 보면서 그런 느낌을 받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 참 저 사람은 그래도 부처님 법대로 따라 잘 따라가고 있구나. 삼보에 대한 확신들을 가지고 나아가고 있구나. 그렇지 못하고 그냥 저 사람은 오로지 지 할 일만 하고 있구나. 그게 수행이든 아니면 뭐 법문을 듣는 것이든 뭐든 간에 지 할 일만 하고 있구나 하는 게 딱 드러나집니다. 장엄된 자와 장엄되지 않는 자의 차이가 그렇게 나타나지는 거라. 부처님도 개금을 하고 여러 가지로 장엄을 해 놨기 때문에 저렇게 웅장해집니다. 겉모습으로 그렇게 드러나진다는 거라.

 

그다음에 뛰어나고 불변하고 하는 그런 것들, 그 불변한다는 것은 흔들림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내가 지금 이익이 있든 손해를 보든 조금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든 아니면 재산을 잃든지 이런 8가지 들에 대해서 변함이 없게 되는 거라. 똑같은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 이런 상태. 삼보는 그런 의미를 가지게 되는 거고, 삼보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것은 그러한 것들을 여러분들이 획득한다라는 의미들을 가지게 됩니다. 얼마나 큰 의미라?

그냥 붓당 사라낭 갓차-미, 담망 사라낭 갓차-미, 상강 사라낭 갓차-미, 이거 하는 것이 굉장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다음에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그냥 "붓당 사라낭 갓차-미" 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귀의불(歸依佛)이라는 뜻입니다. 근데 우리나라에서는 "귀의불양족존, 귀의법이욕존, 귀의승중중존" 그렇게 하죠. 테라와다에서는 "귀의불 귀의법 귀의승" 이렇게 말합니다.

왜 이렇게 할까? 왜 차이가 날까? 두 군데에서. 이 테라와다 어려운 것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귀의불이라고 할 것 같으면 ‘불(佛)’이란 의미들을 갖다가 분명하게 가지지 않으면 그냥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해도 전혀 의미들을 못 가져 버립니다.

그런데 귀의불양족존 했다 그러면, 두 발 가진 자들 중에서 부처님이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그 부처님을 의지해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할 것 같으면 의미 내용이 조금 더 풍부해져 버리게 됩니다. 욕심을 떠난 것 중에는 법이 최고이기 때문에 그 법에 의지한다. 화합되고 여러 무리 중에서 그래도 상가라고 하는 것이 내가 의지할 대상이다. 이렇게 풍부하게 대승불교에서는 했는데, 테라와다에서는 그렇게 안 한다는 거라.

 

그럼 여러분들은 뭘 해야 돼요? 사실은 귀의불이라고 하는 건 부처님은 양족의 의미만 있는 건 아니죠. 부처님의 10가지 명호가 있습니다. 10가지 명호 중에 양족은 그중에 하나밖에 안 되는 거죠? 가장 대표적인 것 하나를 들면,

 

'귀의불 양족존' 안 하고 '귀의불 무상사존' 해도 되는 거고, '귀의불 응공존' 해도 되는 거고, 그런 겁니다. 근데 굳이 그걸 하나를 들먹인 것은 부처님을 떠올리는 데 사람들은 한계들을 지니고 있다는 거라. 탁 떠올리면 그 부처님에 대한 10가지 의미가 확 와닿아야 되는데, 안 와닿거든. 그러니까 뒤 후대로 가면서 이걸 첨가가 되는 거라. 조금 더 상세하게.

 

부처님이 가르침이 변해가는 시점이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테라와다에서는 아예 그런 부분을 경계를 해버립니다. 딱 잘라 버립니다.

그렇게 해버릴 것 같으면 그게 나중에 정착이 되면 부처님의 의미가 그것으로 그냥 바뀌어 버립니다. 정착이 돼버립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러면 귀의불 귀의법 귀의승 이렇게 얘기합니다. 부처님에게 귀의합니다. 법에 귀의합니다. 그다음에 상가에 귀의합니다. 그럼 불·법·승에 대한 의미를 파악을 분명하게 해야 된다는 거라. 그걸 하지 못하면 차라리 대승불교식으로 하는 것이 오히려 속편해 버린다는 거라. 그마만큼 그 의미들을 전달받기는 좀 힘이 듭니다.

그래서 그걸 염송하는 방법들을 보통 염불 · 염법 · 염승 그렇게 얘기하죠.

염불할 때 어떻게 얘기합니까?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이렇게 마음속에서 이렇게 되뇌여야 되는 거라. 염불의 빨리어 용어가 붓다 마나시까-라(Buddha manasikāra) 그렇게 얘기합니다. 담마 마나시까라, 상가 마나시까라. 그냥 염(念)자 생각 염(念)자 써가지고 붓다 아눗사띠(Buddha ānussati)가 아닙니다. 붓다 마나시까-라(Buddha manasikāra) 라고 이렇게 용어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은 여러분들이 부처님의 명호를 외울 때 그냥 부처님이라고 그냥, 쉽게 말하면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이걸 갖다가 그 글자를 쭉 외워가지고는 마나시까-라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어떻게 해야 돼요? 그것을 낱낱이 구분해가지고 ‘아 번뇌로부터 떠나신 분’ 저 훌륭하신 분을 갖다가 떠올려야 되는 거고, 그다음에 '짜라나 삼빤노' 할 것 같으면 그런 여러 가지 행과 내가 하기 힘든 것들을 갖다가 그리고 그런 여러 가지 조건들을 갖춘 것들을 떠올려야 되는 거고, 이런 것들 계속 떠올리면서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해야 된다는 얘기라. 그게 염불이라.

 

그래서 대부분 "삼귀의 삼창을 할 때 예경을 하면서 하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절을 일배를 탁 하고 나서 멈춰 선 상태에서 부처님 명호를 되뇌이면서 염불을 하는 겁니다. 마나시까라를 하면서, 부처님의 의미들을 회상을 하면서 염불을 한다.

그러고 나서 다시 또 절을 1번 하고 담마에 대한 것들을 염불을 한다.

또 절을 1번 하고 상가에 대해서 염불을 한다.

이럴 거 같으면 절을 100번 한 것보다도 훨씬 더 큰 효과를 가지게 된다는 거라. 그렇게 하지 못하고 예를 들어서 염불을 할 때 입으로는 석가모니불 하면서 절은 절 대로 같이 하고 또 뭐 염주까지도 돌리고 이렇게 한다. 그럴 거 같으면 그게 염불이 되겠어요? 그럼 염불이 안 되는 거라. 그냥 기계적으로 하는 것뿐인 것이지.

그래서 염불을 할 경우에는 반드시 염불을 하도록 하라.

 

조금 전에 여러분들 맨 처음 시작할 때 삼보 예찬 부분을 했을 겁니다. 그렇죠.

그게 붓다 담마 상가에 대한 걸 다 회상하면서 절을 1번 한 겁니다.

가끔씩 스님을 찾아오는 분 중에 낯선 분들이 와가지고 젊은 스님 한 분이 있으니까 1배만 한다 하면서 1배만 툭 하고 맙니다. 여러분도 거기에 물들어있는 사람들도 있어요. 근데 왜 하는지 모르겠어. 절을 예경을 하는 것은 스님한테 예경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 거라. 그러니까 내가 저 사람 앞에 가서 무릎 꿇고 엎드린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으니깐, 나이 든 사람이 아니니깐 1번만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라. 그런 겁니까?

절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절을 할 때에는 예경의 의미들을 갖추고 있습니다. 붓다 담마 상가에 예경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절을 1번 했을 것 같으면 나한테 한 것이 아니고 부처님한테 예경한 겁니다. 절을 2번 했을 경우에는 붓다와 담마에 예경을 한 겁니다. 3번 했을 경우에는 붓다와 담마 상가에 예경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느 스님 앞에 가더라도 테라와다에서는 갓 하루가 더 먼저 지난 스님이라고 하더라도 그 스님한테 같은 스님들끼리라도 삼배를 합니다. 이제 막 출가한 내 아들이라고 하더라도 그 아들이 출가했으면 아들한테 삼배를 하게끔 됩니다. 그 스님한테 하는 것이 아니고 삼보에 대한 예경을 하는 겁니다. 삼보에 대한 예경. 그런 의미들이 이 절이라고 하는 것들이라.

그런데 아까 그런 얘기를 했죠. 삼보에 대한 예경은 스스로 그것을 내가 확인하고 내 것이 되지 않으면 그건 삼보예경이 안 됩니다. 그러면 간단한 절이지만은 그 절에서는 내 것이 되도록 만들어야 되는 거라. 여러분 것이 될려고 할 거 같으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절할 때 어떻게 해야 돼? 수행이 되도록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 것이 됩니다.

절을 할 때 부처님에 대해서 분명하게 염하는 마음들을 일으켜가지고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 환희심을 일으키면서 절을 천천히 내가 하고 있을 동안에는 잡념이 생기질 않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는 분명하게 대상에 대해서 알아차리는 마음이 함께 하게 됩니다.

담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상가에 대해서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절이라고 하는 것은 삼보에 대한 예경의 의미를 나타냄과 동시에 수행이라는 거라. 수행의 도구가 바로 절입니다. 버마 방식이 있고 스리랑카 방식이 있고 태국 방식이 있습니다. 다 틀립니다. 그 틀린 이유는 빨리어 경구 하나 때문에 그렇게 절하는 방식이 틀립니다.

어쨌든 기본적으로 절하는 법을 얘기하겠습니다.

대부분 절 한번 해보십시오. 절 어떻게 해요?
(수행자 : 합장하고, 근데 손이...) 다리, 다리?

(수행자 : 다리 위치는, 근데 손을 저기 쥐는 건 모르겠는데요. 손 위치를 가슴 쪽에다 둬야 되는 건지) 예. 그렇게 한번 해봅시다. 자 지금 다리가 저렇게 돼 있습니다.

저렇게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엉덩이 뒤에 다리 어느 쪽 다리 뭐라고 해야 돼? 저기 딱 붙어가지고 앉는 게 기본입니다. 그렇게 앉기도 하고, 뒷다리를 갖다 여기 세우기도 합니다. 그거는 이제 각 나라마다 틀립니다. 그리고 또 옆으로 이렇게 앉기도 합니다.

옆으로 한번 비스듬하게 한번 앉아보십시오. (수행자 : 요렇게 미얀마 분이)

예 그렇게 앉기도 합니다. 그래서 각 나라별로 3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근데 그거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가장 편한 방식으로 하면 됩니다.

 

그래서 기본적인 게 그 방식이고, 그 방식으로 해볼게요.

한번 같이 스님 따라서 해보십시오.

그렇게 했을 때는 합장하고 있으면 합장해 있다고 알고, 올림,올림,올림 하면서 손을 올린다고 알아차려 주십시요.

그리고 이마에 엄지손가락이 닿으면서 닿음,닿음,닿음 하고 알아차려 보십시오.

다시 가슴 쪽으로 내리면서 내림,내림,내림

그리고 다시 가슴에 엄지가 닿도록 닿음,닿음,닿음

이렇게 하고 나서 다시 몸을 구부립니다. 그래서 구부림,구부림,구부림 하면서 내려가고,

손은 그대로입니다. 이 가슴에 붙인 상태입니다. 구부림,구부림,구부림.

다 벌써 지금 손이 내려가는 거라? 손은 붙은 상태 그대로 해가지고 구부리고,

 

스님 한번 보십시오.

그다음에는 오른손을 그대로 일직선으로, 내림,내림,내림 그리고 바닥에 닿음,닿음,닿음 그리고 덮음,덮음,덮음

왼손 내림,내림,내림 닿음,닿음,닿음 덮음,덮음,덮음

몸은 구부려져 있는 반 구부러져 있는 상태 그대로입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몸을 숙여야 됩니다. 그래서 수구림,수구림,수구림 하는데,

양손이 양손의 손바닥이 땅에 닿아져 있는 상태에서 그사이에 머리가 땅바닥에 닿을 수 있도록 사이가 벌어져 있어야 됩니다.

이게 손을 그대로 이렇게 내려가면 대부분 그렇게 됩니다.

대부분 보면 요렇게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요렇게 되기도 하고, 이렇게 많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동작을 두 가지를 동시에 안 하면 그대로 이렇게 내려가 버리면 이 사이가 어느 정도 딱 벌어집니다. 그래서 머리가 딱 그 사이에 들어갈 정도라.

그래서 수그림,수그림,수그림 하고 나서,

머리가 그 사이에서 닿으면서 닿음,닿음,닿음 하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워야 됩니다.

그래서 손은 그대로 있는 상태에서 일으킴,일으킴,일으킴 몸을 반쯤 세우고,

다시 오른손을 돌림,돌림,돌림 올림,올림,올림 닿음,닿음,닿음 하면서 가슴에 닿으면서

다시, 왼손 돌림,돌림,돌림 올림,올림,올림 닿음,닿음,닿음 하면서 해야 됩니다.

이게 절 일배 입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올림,올림,올림 닿음,닿음,닿음 내림,내림,내림 닿음,닿음,닿음 그리고 구부림,구부림,구부림 그다음에 오른손 내림,내림,내림 닿음,닿음,닿음 덮음,덮음,덮음 이런 식으로 마지막에는 그렇게 3번 하고 나서는 다시 올림,올림,올림 닿음,닿음,닿음 내림,내림,내림 닿음,닿음,닿음 하고 나서,

예를 끝냈다는 의미로서 약간 몸을 굽혀 줬다가 펴주면 됩니다.

그래서 구부림,구부림,구부림, 세움,세움,세움 이게 인제 절 3번 하는 겁니다.

 

왜 이렇게 할까? 하고 많은 절 방식 중에서 왜 이렇게 할까? 티벳 방식은 몸을 쭉 뻗었다가 바로 하고, 한국에서는 일어났다가 구부리고 합니다.

그럼 테레와다는 왜 구부려가지고 이렇게 할까?

동작이 많으면 그마만큼 알아차려야 될 것들이 많습니다. 절을 하는 이유가 뭐라고 그랬어요? 첫 번째 삼보에 대한 예경의 의미입니다. 두 번째 수행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겁니다.

 

왜 절을 수행에 이용을 하느냐 하면 시간이 없는 사람들은 절을 함으로 인해서 절에 마음을 두면 마음이 고요하게 가라앉습니다. 그럼 바로 좌선수행해도 크게 무리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경행 먼저 하고 좌선을 해야 되는 거라. 시간이 많으면 그렇게 하면 되지. 근데 그렇게 안 될 경우에는 나는 이 시간밖에 안 된다 할 것 같으면 좌선을 바로 할 것 같으면, 좌선부터 먼저 해버릴 것 같으면, 마음이 안 가라앉아 있을 것 같으면 30분 아니면 40분 1시간 한다? 1~20분을 그냥 헛되게 보내버리는 거라.

그래서 절로 인해서 대상을 알아차리는 훈련,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히는 훈련, 이런 것들이 돼버리는 거라. 그 짧은 순간에. 어차피 우리는 수행을 시작할 때 삼보에 대한 예경을 하고 해야 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삼보에 대한 예경 없이 그냥 바로 앉습니다. 되도록이면 삼보에 대한 예경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낱낱이 구분하면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절 동작이 커버릴 것 같으면 호흡도 가빠질 뿐 아니라 알아차릴 대상도 그마만큼 많아집니다. 그러면 수행하기가 힘들어집니다. 바로 안정시키기가. 그래서 일어났다가 앉는 방식이든지, 몸을 쭉 누이는 방식은 수행과 연결시키기에는 부적합합니다. 가장 좋은 방식은 꿇어앉은 상태에서 그대로 하는 것이 가장 용이합니다.

그렇게 이해를 하면 됩니다.

 

이게 이거는 테라와다 방식이고 요거는 티벳 방식이라 해서, 한국에서 여기 테라와다 스님이 있으니깐 오면 절을 그 방식대로만 시키려고 그럽니다. 안 해본 사람을 그렇게 시키면 그게 됩니까? 안 되지. 그럼 스님이 “그래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해요.” 옆에서는 신도들이 “꿇어앉아야요, 꿇어앉아요” 이럽니다. 그런 의미를 자꾸 두면 안 됩니다.

왜 절을 해야 되는가 하는 걸 갖다 분명히 파악을 안 하는 거라. 그래서 그 의미에 맞게끔 하도록 하고, 인제는 배웠으니까 여러분들은 그 방식대로 하면 됩니다.

그런데 어떤 방식으로 하는가?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선택하면 됩니다. 그래서 그 방식이 여러분들의 수행에 용이하다, 또 예경드리기에도 좋다 할 것 같으면 그 방식대로 하면 됩니다.

자 그렇게 하는 것이 절하는 방법입니다. 절을 그렇게 하면 되고,

 

그 대신에 절을 하는 것도 수행의 예비 단계입니다.

수행을 바로 시작할 때 절을 하지 않을 경우에는, 앉아서 맨 먼저 해야 되는 것이

붓다눗사띠, 부처님에 대해서 깊이 있게 관찰을 해서 부처님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

또는 멧따바와나, 내가 마음이 고요하고 자비로워지도록 자비의 마음을 가지는 것.

또는 마라나눗사띠, 아 나도 언젠가는 죽음에 이르는구나. 모든 것들은 형성된 것은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갖다가 되뇌어서 내가 죽음이 오기 전에 하루빨리 수행하고 좀 더 나은 조건을 만들어야 되겠다 하고 경각심을 일으켜 주는 것.

또 하나가 뭐지? 아수바바와나 이 몸은 참 나약한 것이고, 이 몸은 더러운 것들이고 이 몸은 부정한 것들이라는 걸 갖다가 자꾸 되뇌어서 이 몸에 대한 집착을 여의는 것.

그리고 절하는 것.

이런 것들이 다 그래서 뭐라고 그럽니까?

수행의 예비 단계라고 그럽니다. 수행을 시작하기 전에 이렇게 해가지고 분발심을 일으키고 또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내가 하루 빨리 수행해야 되겠다. 그리고 대상을 갖다 금방금방 알아차릴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 이렇게 하고 나서 바로 수행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단 1분! 절하는데 1분도 안 걸리죠? 한 30초면 될 겁니다. 그렇게 하면 됩니다.

 

자! 구분 동작으로 그렇게 절하는 법을 배웠으면, 대부분은

일반적으로 스님 앞에서 절할 때는 그렇게 못 하죠. 그럼 어떻게 합니까?

'합장 · 공경 · 예배' 3가지 방식만 합니다.

'합장' 손을 머리 위에 올리고 내리고, '공경' 하면 쭉 내려가면 됩니다. 쭉내려가고 손을 디디고, '예배'하면서 올라오면서 합장하는 것.

합장.공경.예배, 합장.공경.예배 할 수 있겠죠? 그렇게 3배를 하면 됩니다.

그럴 때는 손을 양손이 같이 나아가지게 되겠죠. 빨리 해야 될 때는.

물론 여기도 내려갈 때 여기에서 내려가는 사람도 있고 여기에서 내려가는 사람도 있고 여기에서 내려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건 자기가 알아서 선택하면 됩니다.

여기에서 이렇게 내려간다 해가지고 그게 존경심이 더 있고, 여기에서 내려갔는데 존경심이 더 없고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건 방식의 차이이기 때문에, 본인에 맞게끔 하면 됩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스님도 이렇게 해서 내려갈 때도 있고, 어떨 때는 여기에 대놔 놓고 그대로 이렇게 이렇게 내려갑니다. 어떨 때는 그렇게 할 때도 있습니다. 그거는 본인이 선택하면 됩니다.

그래서 합장 공경 예배라고 하는 방식을 택해서 절을 하도록 하면 됩니다. 테라와다 절하는 방식 알겠죠?

삼보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이제 1달이 지났죠. 1달이 지났으니까 지금까지 배운 걸 가지고 5분 동안 시험을 칠 겁니다. 여러분들 법문 들은 것하고 교재 나간 프린트물 나간 것만 기억을 하고 있으면 시험 치는 데는 크게 무리는 없을 겁니다.

그래서 시험을 5분 동안 치고 나서 그다음에 다음 단계로 넘어가겠습니다.

 

저번에 그런 얘기 했죠. 테라와다 신도가 되는 조건,

삼귀의 삼창과 오계 합해지는 게 있고, 오계는 빼버리고 삼귀의 삼창만 되는 것이 있고,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오계」 부분에 대한 얘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집에 가서 이 교재를 읽어보고 지금까지는 "나모-땃사 부터 붓당 담망 상강 사라낭 갓차-미, 두띠얌삐" 까지를 배웠습니다. 한번 독송을 해보십시오. 독송을 해봐서 그 의미들이 분명하게 여러분들 것이 되도록 그렇게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스님이 하나 적어봤습니다. 「헛되게 시간을 보내지 않기 위한 조건」 여기에다가 이 13가지 딱 적어놓으십시오. 그리고 매일 요것 읽어보고 하시길 바랍니다.

 

「헛되게 시간을 보내지 않기 위한 조건」

 

첫 번째, 내가 살아가는 방법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가?

내가 지금 행하고 있는 것들이 나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가, 도움이 되고 있는가?

두 번째, 마음이 더러움에 물들지 않도록 살아가고 있는가?

세 번째, 날마다 공덕을 쌓는 삶을 살고 있는가?

공덕은 저번 시간에도 누누이 얘기했습니다. 수행의 단계를 높일 때, 또 수행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공덕의 힘이 있을 것 같으면 다음 생까지도 연결이 된다. 그래서 공덕을 쌓는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겁니다.

네 번째, 오늘은 선한 일을 얼마나 했는가?

선한 마음을 냈든 선한 말을 했든 선한 행위를 했든 선한 일들을 얼마나 했는가?

다섯 번째, 사소한 일이라도 무책임하지 않고 진지하게 하고 있는가?

아주 조그마한 거라도 또 습관되어진 거라고 하더라도 대충대충하고 살고 있지 않는가? 그걸 얘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무책임하지 않고 진지하게 하고 있는가?

여섯 번째, 날마다 진리를 배우거나 수행으로 경험을 얻고 있는가?

날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있고 또 수행을 해서 그걸 체험을 하고 있는가 하는 거라. 배우는 것도 없고 체험하는 것도 없고 그렇게 하지 말아라는 거라.

일곱 번째, 욕망 허세 아만심 질투 우울 성냄의 감정에 지고 있진 않는가?

져버리면 그거는 여러분들은 먹이가 돼 버리는 겁니다. 번뇌가 많으면 많을수록 올가미가 많은 겁니다. 올가미가 많아서 갇혀져 있으면 잡아먹히기 딱 좋습니다. 왜 여러분들은 올가미를 스스로 만드느냐는 거라. 그래서 이런 것들을 갖다가, 이 감정들을 내가 이겼는가 지는가 하는 걸 분명히 파악을 하라는 거라.

여덟 번째, 자극적인 쾌락이 아니라 일상생활로부터 충실감을 얻고 있는가?

살아가는 것 자체에서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즐거움을 얻고 기쁨을 얻고 쾌락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충실하게 살아가서 거기서 얻어지는 행복들이 있느냐는 거라.

아홉 번째, 물질과 시간의 사용을 최소한으로 하는 노력을 하고 있는가?

물질적인 거 사용하는 것 이런 것들은 최소한으로 해야 됩니다. 먹는 것도 최소한으로 먹어야 되는 거고, 여러 가지 기구들을 쓰는 것도 최소한으로 해야 됩니다. 필요로 인해서 쓰는 것뿐입니다. 도구일 뿐입니다.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헛되게 그렇게 보내는 시간들을 최소한으로 하라는 거라.

열 번째, 게으름 피우지 않고 활발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시시때때로 자꾸 돌아봐야 됩니다. 마음은 항상 게을러지려고 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 게을러지는 습성으로 인해서 분노와 성냄이라고 하는 것들이 일어나집니다.

열한 번째, 모든 생명에 대해서 자애로써 대하고 있는가?

어떠한 경우든지 모든 생명에 대해서 풀이든 사람이든 동물이든 모든 생명에 자애를 가지고 대하고 있는가? 자애롭게 마음을 가지고 말을 하고 행위를 하고 있는가?

열두 번째, 지금 이 시간이 마지막이고,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가?

여러분들에게는 먼 미래도 아니고 내일도 아니고 그리고 어제도 아닙니다. 지금 이 시간이 딱 마지막입니다. 매일 마지막을 살아가고 있는 거라.

열세 번째, 긴장 상태보다 침착한 마음이 나와 주위를 더욱 행복하게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는가?

내가 긴장하고 내가 조금 더 집착하고 있는 것들이 나와 가족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고요하고 침착한 마음 평온한 마음이 나와 가족 주위들을 행복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이 13가지를 매일 같이 돌아보면서 읽어야 됩니다. 읽으면 조금이라도 반성할 거 아니라.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