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25 일상수행법문

「방일하지 않는 사람은 순간을 안다.」 (20250323. 담마와나선원)

담마마-마까 2025. 3. 28. 05:40

https://youtu.be/SEtA7QwQoN8?si=ZtOuu1UKU9HtJ-Vl

 

* 「방일하지 않는 사람은 순간을 안다.」 (20250323. 담마와나선원)

 

편하게 앉고 좌선 자세를 좀 취해보십시오. 오늘 법문을 하기 전에 공지사항 하나 얘기를 해드리겠습니다. 우리 교단의 상가라자이신 뿐냐산또 도성 큰스님께서 오늘 새벽 5시 조금 넘어서 입멸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스님께서 행복하시기를’ 하는 마음을 지니고 잠시 명상에 들도록 하시기바랍니다.

자, 편하게 앉으십시오. 왜? 상가라자 스님 입멸해서 슬퍼? 슬픈 마음을 일으키면 안 되는 거 알죠? 여러분들이 만약에 슬픈 마음을 일으키면은 수행 안 한 사람들하고 똑같이 되어버립니다. 제가 한국에 와서 이틀 뒤인가 가서 찾아뵀었거든. 찾아뵈면서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아이고 스님 오래 참고 계셨네. 이제 그만 살고자 하는 마음 내려놓고 편안하게 가십시오.” 이러니까 사람들이 막 화를 냅니다. 스님이 돌아가시라 한다고. 그런데 그러고 나서 뒤에 “스님 저는 스님 상좌가 되어서 행복하고 좋았습니다. 스님께서도 저를 상좌로 둬서 행복했습니까?” 하고 하니까 “그래 그래” 하시더라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때는 막 또 울어. 조금 전에는 화내던 사람들이. 사람 마음이 그렇게 조건에 따라 자꾸 바뀌면은 공부 안 합니다. 공부 못하게 됩니다. 그런 마음들을 가지지 않도록 해야 되고,

 

오늘 법문할 주제는 제목이 뭐죠?

(수행자 일동 : 순간과 진리)

「방일하지 않는 사람은 순간을 안다.」 하는 겁니다.

이 법문은 아예 수행 안 하는 사람들한테는 해당이 안 되고 어느 정도 이제 공부를 잘하고 있는데, 잘한다는 말이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어떨 때는 대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분명하게 보이고, 어떨 때는 또 빠르게 변하는 것들이 보이기도 하고, 어떨 때는 사라지는 것이 보이기도 하고, 그러는데 이상하게 그 이상은 진척이 또 없고, 그리고 또 대상을 보는데 대상이 뭉뚱그려서 보여지거든. 뭉뚱그려져서 보여진다는 것은 예를 들어서 호흡도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일어남 사라짐은 분명히 하고 있는데, 이게 뭉뚱그려서 보여지는 거라.

 

‘일어남’은 실재하는 거예요 아닌 거예요? 개념이죠. ‘사라짐’도 개념인 거고, 그래서 일어날 때 여러 가지 현상들을 보고 사라질 때 여러 가지 현상들을 봐야 되는데, 현상이 안 보이고 그냥 뭉뚱그려서 보여지는 거라. 배도 마찬가지고 코끝의 호흡도 들이쉬고 내쉬고 이렇게, 이렇게 계속 보여지면 어떻게 되겠어요? 마음이 대상에 달라붙어 있지 못하고 붕 뜬 느낌이 듭니다. 그러면 결국에는 튕겨져 나가버립니다. 튕겨져 나가면 어디 가겠어요? 마음은 한시라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쉬질 못하는데, 그럼 다른 대상으로 갑니다.

 

‘어, 여기 아프네, 통증이 있네, 뭔가 망상이 일어났네’ 근데 또 망상이나 통증을 관찰하면 또 이게 스르르 또 사라지긴 해. 힘은 아직은 있어 가지고. 근데 이것도 또 개념적으로 받아들여요. 통증도 개념이거든. 실제로는 통증이 아니라 여러 가지 현상들이 있습니다. 망상에도 그냥 망상이 아니고 탐심의 망상인지 진심의 망상인지 뭔가 다른 어떤 형태들인데 똑같은 망상으로 판단을 하고, 뭉뚱그려져버리는 거라. 관찰돼서 그게 삭 사라지긴 하는데 금방 있으면 금방 일어나 다시 또 나타나지고. 그런데 통증이 있든, 망상이 있든,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 자리에서 사라진다는 사실은 또 몰라.

이렇게 되고 있는 사람들한테 좀 해당이 될 수 있는 그런 얘기들입니다.

 

또 한 부류는 어떤 거냐면 ‘그래 한번 내가 수행해 볼 거야’ 하고 이렇게 탁 마음을 먹고 수행을 할려고 하는데 ‘그래 스님께서 그냥 잔잔한 거 일어나는 거 그냥 신경 쓰지 말고 배만 관찰하라 했어’ 그래서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이것만 관찰해야지’ 하면서 하고 있는데, 이걸 그렇게 관찰을 하고 있더라도, 다른 것들이 나타나면 기분이 안 좋은 거야. 쉽게 말하면 통증이 일어나든 뭐 아니면 망상이 일어나든 뭐가 일어나면 ‘아, 저거 빨리 없어져야 되는데’ 하는 마음이 자꾸 드는 거야. 그래서 그걸 무시하고 배로 돌아오고 해도 그건 또 계속 일어나거든. 쉽게 말하면 대상 자체를 제거해버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두 부류들은 거의 비슷한 패턴을 지니고 있는데, 이런 두 부류들에게 조금 도움이 될 수 있는 거다 하고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근데 뭐 그렇지 않은 부류라고 하더라도 수행의 기본적인 것들이기 때문에 새겨들으면 될 겁니다.

 

수행하고 있는데, 한시라도 안 놓치고 수행하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안 놓치는 사람 있어요? 잘 없죠! 대부분 하다 보면 멍청하게 있기도 할 거고, 어떨 때는 대상을 지가 붙잡고 있는지 어떤지도 모르고 그냥 그 대상을 붙잡고 있는 경우도 있을 거고, 그럴 겁니다. 근데 본인은 수행하고 있다고 그럽니다.

‘내가 의식도 없이 고요한 상태에 있었어.’ 그렇지 않으면 대상을 붙잡고 있으면서 ‘어, 사띠가 계속 일어나고 있었어’ ‘대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게 보였어.’ 이렇게 착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될까? 첫 마디가 뭐였다고 했어요. "수행을 하는 것이 불방일의 삶이다." 하고 얘기를 했습니다. 근데 사실은 답은 간단합니다.

 

경전에 부처님이 뭐라고 했냐면 내 것이 아닌 것은 뭘 하라고? 버려버려라!

"내 것이 아닌 것은 버려버려라." 그랬습니다. 내 것이 아닌 걸 왜 가지고 있어? 그냥 버려버리면 됩니다. 내 것이 아닌 건. 근데 수행에서 자기 것이 있습니까? 호흡이 지 것입니까? 아니면 어떤 통증이라고 하는 대상이 자기 것입니까? 자기 것 아닙니다. 자기 것도 아닐 뿐 아니라 실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지금 실재하는 걸 사띠를 해야 되는데, 내 것도 아니고 실재하는 것도 아닌데도 그걸 붙잡고 있는 거라. 호흡을 붙잡고 있든, 통증을 붙잡고 있든, 망상을 붙잡고 있든, 그걸 붙잡고 있는 거라. 그냥 버려버리면 됩니다.

아주 간단한 방법인데 버리는 게 생각만큼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호흡을 해서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고 있다. 그럼 불러오고 꺼지고 할 때 불러오면 불러온다고 알아차리고 꺼지면 꺼진다고 알아차리는데,

어디를 보고 있습니까?

배 전체가 보입니까?

대부분 배 전체가 보입니다. 배 전체가 불러오고 배 전체가 꺼집니다.

이것은 대상을 붙잡고 있는 거라.

그러면 억지로라도 한 점에 자꾸 마음을 두어야 됩니다.

 

수행을 대상을 떨어뜨리라고 하니까 ‘멀찍이 떨어뜨려서 그냥 전체를 다 뭉뚱그려서 보면 되지’ 하고 생각을 해버립니다. 그건 천만의 말씀입니다.

떨어뜨리라는 것은 그냥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라는 얘기지, 그냥 뭉뚱그려서 전체를 보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하나의 포인트로 자꾸 들어가야 됩니다.

배면 배의 어느 딱 한 부분, 느낌이 일어나는 곳 그것만 딱 관찰을 해야 됩니다.

거기에서 접촉하면서 일어나는 느낌들을 볼려고 해야 됩니다.

다른 거 그냥 놓쳐도 괜찮습니다.

 

그럼 배의 어떤 부분에서 따가움이 탁 일어난다, 그러면 그것 보라는 거라. 근데 그걸 보는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고 딱 한 점에서 따가움이 일어났다가 금방 톡 사라지는 게 보입니다. 그 자리에서 사라지거든. 다른 자리에서 배의 다른 자리에서 사라지는 게 아니고, 그 자리에서 사라집니다.

그렇게만 해나가면은 사실은 조금 전에 문제가 있었던 것들은 탁 해결이 돼버려요. 근데 그렇게 마음을 기울이는 게 쉽지가 않거든.

 

그래서 게송에서 "방일하지 말고 열심히 노력하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불방일하라" 라는 뜻입니다. 불방일하라는 것은 무조건 그냥 노력하라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맨 처음에 뭐가 있어야 되죠? 불방일 할려면? 뭐가 있어야 돼요? 사띠 없이 불방일 할 수 있어요? 없습니다.

 

내가 대상을 알아차리는데 사띠하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부터 먼저 알아차리라는 거라. 그냥 대상을 뭉뚱그려서 아는 건지, 아니면 개념으로 알고 있는 건지, 아니면 실재하는 것들을 알고 있는지를 가지고 판별을 하라는 거라. 실재하는 것이 아니면 그건 전부 사띠 안 하고 있는 겁니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실재하는 대상을 알아차리고 있을 때 사띠(sati)가 그 속에 있습니다. 그러면 그 대상은 실재하는 거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든지 가만히 있는 법은 없습니다. 변합니다. 움직이게끔 돼 있습니다. 내가 사라지는 걸 관찰을 했든 안 했든 간에 그놈이 그 자리에 한 자리에 가만히 있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변해 나가려고 하는 것들이 틀림없이 있게 됩니다.

 

그러면 대부분 사람들이 그게 변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이렇게 보인다 할 것 같으면 마음이 안정이 안 됩니다.
마음이 파동을 친다는 얘깁니다.

파도가 내 앞에서 이렇게 넘실넘실넘실 온다고 한번 가정을 해보십시오. 그러면 이 파도가 나를 덮친다는 생각이 들 것 같으면 가만히 그거 그냥 파도 바라볼 수 있겠어요? 대상은 파도 치듯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 이렇게 물결치듯이 오고 있는데, 아니 다가오고 있는데.

그럼 마음이 요동을 치게끔 돼 있습니다.

 

그러면은 압빠마다(appamāda)라고 하는 불방일을 할려면 요동치는 마음이 요동치지 못하게끔 딱 잡아야 됩니다. 아무리 사띠가 있다 하더라도 요동을 쳐버리면 사띠는 달아나 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대상이 파도치듯이 다가오는 것이 실재하는 거지만 그것으로 여러분 죽습니까? 안 죽습니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데, 나는 마음이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죽을 것 같이 느껴집니다. 새로운 현상을 보면 지레, 그냥 어린아이들은 도망가 버립니다. 그와 같습니다. 아직은 수행이 무르익지 않아서 어린아이와 같이 마음이 그것으로부터 피해버리려고 하는 거라.

피하지 말고 그냥 그대로 그냥 파도치면 파도치는 대로 설혹 나를 덮치더라도 덮치는 대로 놔주고 그냥, 그냥 그대로 두 눈 딱 뜨고 보라는 거라.

 

대상으로 인해서 마음이 요동칠 때 마음을 그것으로부터 방어해서 그냥 고요한 상태에서 그냥 그대로 관찰하는 게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일상생활을 할 때 자꾸 밖에 있는 대상으로부터, 자극으로부터 멀리하라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런 자극이 있더라도 즐겁고 괴롭고 하는 폭들을 자꾸 줄이라고 하는 이유가 그래서 그런 겁니다.

그 폭을 최대한 자꾸 줄이면은 실제로는 파동이 있다고 하더라도 마음에 그렇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거라. 그냥 파동을 그대로 그냥 보게 되는 거라.

 

그걸 우뻭카(upekkhā)라고 그럽니다. 수행에서.

대상으로 인해서 마음이 요동치지 않고 고요한 상태에서 그것을 그대로 관찰할 수 있는 힘! 사띠와 더불어 이 우뻭카의 힘까지 가지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더욱 큰 힘을 가지게끔 됩니다.

근데 그렇게 해도 마음은 평온하게 그것을 관찰하고 있는데도, 관찰이 완전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대상들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보이기는 합니다.


근데 문제는 그게 뒤를 끈다는 거라. 통증이 사라졌죠? 사라진 걸 분명히 봤으면 이 자리에선 다시 사라지는 게 없어야 되는 게 맞는데, 보면 사라짐의 강도만 약해진 거지 고통은 일정 부분 약간 있어. 그러면서 그 자리에서 다시 또 일어나든지 아니면 또 다른 데서 비슷한 형태로서 또 나타나게 됩니다. 질질 끈다고 그러죠? 여운이 남아서 이렇게 쭉 끌어버리는 상태가 되는 거라.

 

그럼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돼? 분명 사라진 걸 봤는데, 여운은 남아있는데, 그걸 관찰하고 있을 수는 없잖아.

다른 대상이 나타났는데, 다른 대상을 관찰하면서도 그 여운은 보이거든.

 

이게 대상을 관찰을 할 때 마음이 청정한 상태에 있지 못하면 나타나는 보통적인 현상입니다.

 

대상과 대상을 사띠하는 마음만 딱 있어가지고 그 사띠하고 있다는 것들을 분명하게 내가 알아차리고 있으면 그런 여운이 없는데, 대상이 있어서 대상을 알아차리고는 있는데, 이것을 사띠하고 있는 마음이 안 일어나는 상태가 되는 거라.

그러니까 이 사이 동안에 대상이 그림자를 따르듯이 여운을 남기게끔 되는 거라.

 

호흡을 관찰하고 있다. 몸이 있으면 호흡이 있죠? 여러분은 호흡을 관찰하든 안 하든 호흡은 저절로 왔다갔다 하게 돼있습니다. 몸이 있으면. 그래서 이거는 쌍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이. 호흡을 알아차리고 있죠? 그럼 알아차리고 있는 거는 누가 알아차리고 있습니까? 그걸 알아차리는 마음이 있을 거 아니라. 이것도 쌍으로 나타나는 거라. 쌍으로 쌍으로 나타나는데 자꾸 나는 한 번만 하고 그냥 끝나는 거라.

 

그것을 알아차리고 있는 마음이 있다는 걸 분명하게 알면은 이미 대상 그 대상은 끝났어요. 근데 그러질 못하니까 여운이 있게 되고, 마음은 청정한 상태를 계속 유지를 하는 것이 힘들어져 버리는 거라. 1번은 청정하게 됐을지는 몰라도 그것이 연속해서 청정하게 되는 것들이 힘들게 돼 버립니다.

 

파동이 있는 것을 잠재웠다 해가지고 그 대상을 알아차렸다고 해도 그 파동은 항상 있게끔 돼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대상을 알아차릴 때 온 마음을 기울여가지고 그 대상을 알아차리면 어떠한 경우든지 마음에는 떨림이 있게끔 됩니다.

사띠하고 있는 사람들은 항상 마음이 떨립니다. 미세하게 떨립니다.

그 떨리는 마음들을 냉정하게 가라앉혀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어떤 경우든지 꼭 그 뭐라고 해야 되나, 스님들 그 수행 대상 중에서 죽음에 대해서 회상하면서 아눗사띠(anussati) 하는 게 있습니다. 예. 마라나눗사띠(maraṇānussati). 그거 할 때 죽은 사람 형태들 여러 가지들을 이렇게 박제해 놓은 것들이 있습니다.
금방 막 죽은 사람, 피부가 거무튀튀하게 된 사람, 그 속에서 막 진물이 나오는 사람, 또 그 속에서도 막 구더기들이 나오는 사람, 그러면서 썩어가면서 냄새나고, 그러면서 살들은 없어지고 나중에 뼈만 남는 것들, 이런 것들을 차례차례로 봅니다.

근데 마음이 냉정해져있지 않으면은 요거는 봤을지 몰라도 그다음 거를 볼려고 하질 않는 거라. 마음이. 어쩔 수 없이 강제로 끌려가기는 해. 스님이 강제로라도 보여주니까 보기는 보는데, 그냥 빨리 보고 마음을 닫아버리는 거라.

 

대상을 관찰을 할 때는 어떠한 경우든지 그 모든 것들을 그냥 있는 그대로 자꾸 볼려는 마음들을 가져야 됩니다. 그래야 마음이 착 가라앉아서 대상에 착 달라붙어 버립니다.

그게 마음이 가라앉고 식어버리고 냉정해지는 상태라. 그걸 위숫디(visuddhi)라고 그럽니다.

 

대상에 착 달라붙어 있지 않으면 언제든지 마음은 다시 또 튕겨버립니다. 통증이 일어나고 또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보이기는 하는데 빨리 변하는 빨리 현상들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자꾸 시간이 걸리게 됩니다. 그리고 대상들이 점점 많아집니다. 많아진다는 거는 마음이 그마만큼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는 거죠.

 

대상에 탁 밀착하고 있으면은 그것만 계속 보이는데, 그래서 실제로 수행을 하면 좌선 한 30분 한 것 같은데, 2시간이 훌쩍 넘어가 버리거든. 그렇게 돼야 되는데, 30분 했는데 일어나 보니까 10분밖에 안 됐다. 대상은 알아차리고 있었지만 그렇게 되어버립니다.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 버려야 됩니다.

 

여러분이 법을 통찰할 수 있는 시기가 바로 그때입니다.

법을 통찰할 수 있을 때는 그때의 순간뿐입니다.

빠르게 변해서 그 빠르게 변하고 있는 것들을 내가 잡아내지 못하면은 법을 볼 방법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호흡을 예를 들어봅시다. 코끝이다. 들이쉬고 내쉬고 이게 보통 몇 초 정도 걸릴 것 같아요? 한 3.4초?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한 번 하는데.

그럼 여러분들은 사띠를 몇 번 하고 있는 거라?

들이쉼 한 번, 내쉼 한 번, 두 번 했어요? 뭘 법을 볼 거라 그렇게 해가지고. 거의 2초에 한 번 사띠를 하고 있는 상태에서 무슨 법을 보겠다는 거라? 그렇게 해가지고 30분 한다, 1시간 한다, 뭔 의미를 가지느냐는 거라.

 

찰나 찰나에 변하는 것이 들이쉬는 것에서 변하는 것들이 적어도 한 10번은 봐야 수행자다 하는 생각이 들 거 아니라. 내쉬는 것도 한 10번을 봐야만이 수행자다 라는 거라.

수행을 그냥 흐리멍텅하게 할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법을 볼려고 할 것 같으면 법을 볼 수 있는 순간을 놓치면 안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법은 실재하는 모습들을 보지 않으면은 법을 통찰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강력한 의지가 사실은 필요합니다.

 

예를 한번 들어볼게요. 옛날에는 이 화살 만드는 사람이 경전에 많이 등장을 합니다. 화살 만들 때 화살의 앞에 촉 있는 부분과 중간 부분과 그 뒤에 깃털 달리는 부분하고 무게가 똑같을까? 나무의 성질이 다 틀릴 건데? 그러면 화살 만드는 사람들은 이걸 어떻게 만들었을까?

 

적당한 굵기로 적당한 강도를 지니도록 만들고, 그리고 잘 날아가도록 만들려고 할 것 같으면, 어느 쪽에 무게중심이 쏠려버리면 잘 못 날아갑니다. 그럼 이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 나무에 대해서 연구했을 거 아니라. 어느 나무가 좋은지, 이 나무는 성질이 요렇게 잘랐을 때 나이테가 있는 부분에서 어느 부분이 강도가 세지고 어느 부분이 무거워지고 하는 것들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거라. 그럼 거기에 따라서 굵기도 조정하고 해가지고 길이도 조정하고 해가지고 잘 날아갈 수 있는 화살들을 만들어 냈을 겁니다.

수행하는 여러분들은 그렇게 화살을 잘 날려 보내듯이 그런 나무에 대한 이해들이 있어요? 수행에 대한 이해들을 하고 있느냐는 거라.

 

무상··무아가 여러분들 수행자에게는 이해하는 부분입니다. 무상을 알고, 고를 알고, 무아를 알고 있어야만이 정확하게 그것들을 이해를 하게 된다는 거라. 분명한 이해를 가지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아까 얘기했죠.

내 거 아니니까 어떻게 해야 돼요? 버려버려야 되는 거라. 무상한 성품이기 때문에 어떻게 돼요? 무상하기 때문에 그냥 변하는 것들입니다. 그거 집착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분명하게 이해를 하고 나서는, 내가 대상을 알아차리고 있는데, 그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데 포인트가 맞춰지는 지를 판단을 해야 됩니다.

코끝이면 코끝에서 들이쉴 때 들이쉬는 명칭을 가지고 지금 붙잡아가지고, 들이쉼하고 알아차리고 있는지, 들이쉴 때 그 호흡에서 느껴지는 느낌들을 관찰하고 있는지, 그걸 판단해야 될 거 아니라.

 

이해와 판단력이 있고 나서, 거기에 딱 한 포인트를 딱 잡고, 거기에 온 힘을 기울여야 됩니다. 노력하는 힘을 딱 기울일 때, 그래서 이해와 판단력과 노력이 기울어졌을 때, 그게 잘 된 수행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이런 사람들을 "메다와띠, 현명한 자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수행은 단순하게 그냥 생각해서 내 몸을 편하게 또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려면 꼭 부처님 가르침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명상하는 데 가서 편안하게 하면 됩니다.

근데 여러분들은 지금 이 생에서 윤회로부터 뛰어넘기 위해서, 열반을 경험하기 위해서, 도와 과를 이루기 위해서 수행들을 합니다. 그냥 단순하게 천상에 태어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그럼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해야 됩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수행자답게 수행하는 것답게 수행을 해야 되는 것이지, 그냥 그 순간순간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식지 않은 것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냥 수행할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진실은, 그리고 그 부처님의 가르침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딱 이 순간입니다. 이 순간을 자꾸 놓치지 않도록 자꾸 노력들을 해야만이 부처님 제자답게 살아간다는 걸 잊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