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25 일상수행법문

졸음을 몰아내는 방법 (20250405)

담마마-마까 2025. 4. 5. 17:43

https://youtu.be/qO_2vTw1fho?si=wtJHGcV3A7H9u-tJ

 

* 졸음을 몰아내는 방법 (20250405)

 

이제 봄이 왔는데 놀러들 좀 많이 다녔어요? 꽃구경들 가잖아. 스님은 추운 겨울도 그렇지만 봄도 이 꽃가루들 하고 미세먼지들이 많아가지고, 몸에는 좀 안 좋은 것 같아요.

 

날이 따뜻해지면 빠지기 쉬운 게 이제 들뜨는 거, 그다음에 또 졸음에 빠지는 거, 이런 게 수행자들한테는 큰 적으로서 나타납니다.

오늘은 수행 법문을 좀 너무 어려운 거만 하지 말고 쉬운 거 해달라 해가지고 쉬운 거로 하나 하겠습니다. 졸음에 대한 거를 조금 얘기하겠습니다.

 

졸음은 어떻게 생각해요? 수행하는데 졸린다, 그러면 어떻게 극복을 해나가는 거라? 그냥 졸아?

(수행자 대답 : 졸 만큼 졸아야 나중에 이제 분명한 마음이 일어나는데, 초보 때는 졸만큼 졸아야 되겠던데요.)
졸고 나니까 좀 개운해요?

(수행자 대답 : 어느 정도 뭐 좀 졸고 수행하고 하다 보면은 졸음에 이제 기준도 자꾸 줄어지고 그러면 마음이 선명해지겠지요.)

그래. 뭐 졸리면 자야지 뭐. 근데 육체적으로 계속 피곤하고 할 경우에는 졸림이 옵니다. 그럴 때는 자고 일어나면 좀 효과가 있죠.

 

부처님은 졸음에 대한 거는 분명하게 기준을 잡아놨습니다.
정신적인 부분과 육체적인 부분으로 구분을 해놨습니다.

 

정신적인 부분에서는 어떠한 경우든지 졸음을 가져오는 상태를 만들면 안 되는 거고, 육체적인 것에서는 견딜 수 있을 때는 한번 견뎌봐라. 못 견디면 도저히 안 될 것 같으면 자라. 그대신 자고 일어나면 이익이 있어야 된다. 그게 조건입니다.

몸과 마음이 밸런스가 맞아진다든지 다시 생기가 돈다든지 이럴 경우에는 자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수행 중에 졸림이 온다, 그러면 그냥 이렇게 그걸 극복하려고 안 하고 졸아버리는 사람들은 그거는 육체적으로 피곤한 것보다는 정신적으로 졸음이 온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조부는 게 좋다는 뜻입니다. 좋아서 그냥 그렇게 조는 겁니다.

그래서 그 기준은 "싸울 때까지 싸워봐라." 힘들여가지고 막 ‘졸음아 물러가라, 물러가라’ 이렇게는 안 하지만은 ‘졸음’ ‘졸음이 온다, 졸음이 온다’ 하고 줄기차게 관찰을 하면서, 어쨌든 깨어 있으라는 거라.

그럼 조불고 있을 때보다는 이익이라는 거라. 조불 때는 아예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되니까.

그리고 마음의 활기는 졸음하고 싸우려고 할 것 같으면 활기는 있게끔 된다는 거라. 뭐 완전하지 않으니까 결국에는 지는 경우들이 대부분인데, 그렇지 않으면은 어쨌든 아직은 깨어 있다는 얘기라.

물론 그렇게 해가지고 ‘졸음아 물러가라’ 하고 마음을 먹으면서 졸음하고 싸우는 거는 불선한 마음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사실은 졸음한테 진 겁니다. 진 건데, 그래도 지더라도 싸울 때까지는 싸워왔다는 거라. 그래서 그거는 부처님이 칭찬을 해요.

 

근데 이제 그렇지 않고 그냥 나약하게 물러나가지고 졸음에 져버려서 꼬박꼬박 존다 할 것 같으면 그건 부처님이 되게 뭐라 하는 부분입니다. 그거는 여러분들이 항상 명심을 해라.

불선한 마음을 일으켜서, 쉽게 말하면 졸음을 물리치려고 한다든지 졸음하고 싸우려고 한다든지 이렇게 마음을 먹지 말고, 졸음하고는 싸워라 하는 거라.

그게 이제 부처님이 처방한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쉽게 말하면 졸음이 오면 좀 더 노력하라는 거라. 좀 더 노력의 힘들을 배가시켜야만이 졸음하고 싸우고 또 그것을 물리치고 하게 된다는 거라.
왜 그렇게 부처님이 얘기했을까? 그냥 조금 자도록 놔주고 나서 다시 좀 개운해지고 나면 수행하면 더 잘 되기도 하는데, 왜 굳이 졸음하고 막 부딪혀보라고, 하나의 대상으로 삼으라고 그럴까?

 

보통 수행할 때 빠지기 쉬운 게 졸음이 있고 또 통증이 있고 또 뭐가 있습니까? 망상 피우는 것도 있고, 이런 것들이 대부분 대표적인 것들이죠.

그래서 망상 피울 때는 졸지 않죠? 통증이 있을 때도 졸지는 않죠? 그런데 그거는 왜 졸지 않게 될까? 망상 피울 때나 통증이 있을 때는 마음이 바삐 움직이고 있다는 거라. 마음이 활기가 있어서 조불 시간이 없다는 거라.

 

그러면 졸음이 올 때는 뭐 때문에 그러면 졸음이 와?

마음이 활기가 없어서 대상 자체가 없는 거라. 대상 자체가 없기 때문에 그냥 졸음이 밀려오게 되는 거라.

그렇게 판단을 하면 됩니다.
불선한 마음들이 일어나는 것이든 선한 마음들이 일어나는 것이든 지속적으로 마음이 활기가 있게끔 생각을 하고 뭔가를 사띠를 하려고 할 것 같으면 졸음은 안 온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도 처방을 내리는 게 첫 번째가 뭐냐면 졸음이 올 것 같으면 먼저 사고하라는 거라. 사고하라는 거라.

뭔가 대상을 찾아 가지고 자꾸 대상을 옮겨주든지 수행자들은, 그렇지 않으면은 뭐 호흡을 할 때 일어남 사라짐 하는 것이 너무 잘 안 보이고 할 것 같으면 그 일어남 사라짐을 갖다가 사마타 방법으로도 하라는 거라.

들이쉬고 내쉬고 하면 하나 그다음에 둘 해가지고 다섯까지 세고, 그다음에 다시 또 하나부터 여섯까지 세고, 하나부터 일곱까지 세고, 이런 식으로 자꾸 마음을 활기차게 만들어라는 거라. 사고를 하라는 거라.

부처님 처방 내리는 첫 번째가 이렇게 사고하라는 겁니다. 마음에 활기를 불어넣어주지 않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졸음을 이길 방법이 없다는 얘기라.

"노력의 힘을 강하게 자꾸 하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사고를 하는 거는, 사고를 하면은 그거는 실재적인 거에요, 아니에요? 실재 대상은 아니죠! 사고하는 건 실재 대상은 아닙니다.
'실재 대상'은 배에서 일어나는 느낌들이나 뭐 움직임이든 이런 것들인데, 그게 아니고 지금 뭔가를 인위적으로 만들어가지고 사고를 하고 있거든. 그렇게 하다가도 안 되면은 또 잠에 빠져버리는 거라.

 

그래서 사고를 하더라도 좀 더 깊이 있게 하라는 거라.

쉽게 말하면 정해가지고 붓다눗사띠면 붓다눗사띠, 멧따바와나면 멧따바와나 이런 걸 지속적으로 하라는 거라. 부처님을 생각하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마음에서 기쁨이 일어나는 거라. 멧따바와나를 할 것 같으면 마음에 행복감이 꽉 들어차는 거라. 마음이 선한 마음을, 사고라도 선한 사고를 하면서 그것들이 지속되도록 자꾸 만들어 나가라 하는 이게 부처님이 얘기한 두 번째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뭐냐면 여러분들도 많이 하는 겁니다. 경을 외우는 거.

미얀마나 태국 가면 강원에 가면 경 읽는 소리가 그냥 쟁쟁쟁쟁 쟁쟁합니다. 그것도 작게 소리를 내서 하는 게 아니고 큰 소리로 내가지고 계속 독송합니다. 쉽게 말하면 5분을 하든 10분을 하든 경을 계속 큰소리를 내가지고 읽을 것 같으면 마음이 거기에 오롯하게 붙잡혀 있게 되는 거라.

기쁨이 일어나고 하는 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것보다도 대상을 지속적으로 사띠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라는 거라. 그래서 자기가 좋아하는 구절이나 이런 것들 마음에 딱 와닿는 것들을 가지고 계속적으로 독송을 하는 거라. 큰소리로.

거기까지는 부처님이 칭찬하신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그리해도 안 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럴 때는 이제 물리적으로 들어가야 됩니다.

귀를 잡아당기든지 서가지고 관찰을 하든지, 아니면 경행을 하든지, 그것조차도 안 되면 어떻게 해요? 눈을 비비든지 세수를 하든지 해야 되는 거라.

 

어쨌든 잠을 몰아내라는 거라.

잠은 어떠한 경우든지 수행의 도구이고 대상이고 여러분을 한 단계 성장시켜주는 도구이지마는, 잠을 자버리면 그거는 그냥 죽은 시간이 돼버리기 때문에 그러는 거라.

 

그리해도 안 되면은 그다음에는 할 게 '이미지화'시키라고 그럽니다.

붓다눗사띠 - 아라항 삼마삼붓도- 이렇게 쭉 그냥 계속 독송하는 것이 아니고 그걸 이미지화 시키라는 거라. 직접 부처님이 앞에 탁 나타나고 환하게 밝게 비추면서 나를 이렇게 보고 있듯이, 붓다눗사띠를 하더라도 그렇게 하고, 자애 수행을 하더라도 자애가 쫙 퍼져나가는 그런 느낌들을 상상을 하라는 거라.

 

그렇게 해도 안 되면 어떡할까?

그다음에는 앉아 있으면 안 되는 거라. 이제 일어나서 경행을 하는데, 아주 빠르게 경행을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아주 천천히 발을 들어 올리고 천천히 나아가고 천천히 내리고 하면서 몸의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을 하게 되고, 이런 식으로 경행을 하는데 속도를 달리해서 하라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거꾸로-뒤로 발을 들어 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고 하는 걸 하든지, 그렇게 하라는 거라.

 

만약에 그렇게 해도 안 되면 어떻게 해?

그때 이제 부처님은 ‘잠시 30분만 누워 있다가 일어나야지하고 마음을 먹고 누워 자라는 거라.

 

부처님이 쭉 얘기한 것들은 보면 그냥 잠을 자려고 하지 말고 어떤 수를 쓰든지 그것들을 자꾸 이기려고 노력을 하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얼마큼 졸음이라는 것이 수행에서 중요하기 때문에 그럴까?

호흡을 관찰해서 무상을 관찰하는 게 쉽겠어요? 졸음을 관찰해서 무상을 관찰하는 게 쉽겠어요? 졸음이 훨씬 빠릅니다!

졸음이 오는 것들을 관찰하면 그게 변하는 게 보여요. 하나 예를 들어 볼까요.

 

실재적인 걸 관찰한다 할 것 같으면 졸음이 오면 어떡해요?

눈꺼풀이 따갑습니다. 그러면 ‘따갑네’ 하면서 그 따가운 거 한 포인트만 잡고 ‘아, 따가움, 따가움, 따가움’ 하고 관찰을 해버리면 그게 싹 사라지는 게 보입니다. 그럼 눈이 탁 번쩍 뜨이는 거라. 싹 사라지는 게 안 보이더라도 따가움이라고 하는 실재적인 현상들은 관찰하기가 쉽거든.

그럼 지속적으로 하다 보면 이게 또 다른 부분에서 이제 송곳을 가지고 쑤시는 것처럼 푹푹 쑤시는 것들이 일어나거든. 그럼 ‘쑤심, 쑤심’ 하고 관찰하라는 거라. 그러면 그 쑤심들은 금방 마음을 일으켜 세워줍니다. 그럼 쑤심이 확 사라지는 게 보이면 그냥 머리에서 바람이 확 통하듯이 정신이 번쩍 드는 게 느껴집니다. 내가 그 따가움이나 쑤심이나 이런 것으로 인해서 무상한 성품을 분명하게 관찰을 했다는 증거거든.

조금만 사띠의 힘이 있어도 그렇게 하면 무상한 성품을 금방 알아차립니다. ‘아, 이게 무상한 것이구나’ 말로만 하고 지식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고 실제 체험으로써 할 수가 있습니다.

근데 배를 관찰하는 것, 무상한 것, 웬만큼 수행이 사띠의 힘이 강하지 않으면 배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부분의 한 포인트에서 그 지점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보는 것이 힘이 듭니다.

 

그만큼 수행에서 일어나는 장애들 망상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장애들을, 특히 이 졸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상을 여러분들한테 선물로써 갖다주는 대상입니다.

얼마나 좋아? 진짜 기뻐해야 될 일입니다. 잠자는 걸 기뻐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이 대상이 나에게 나타났다고 하는 것은 나는 굉장히 기뻐해야 됩니다.

 

근데 잠은 수행 초기부터 오는 건 아니죠? 수행이 어느 정도 좀 진행이 되다 보면 잠이 옵니다. 처음에는 대상을 사띠하기도 바쁩니다. 그래서 따라가기도 힘들어요.

대상에 자연스럽게 따라가지고 나면 그때는 마음이 둔해지면서 졸음이 오게 되는 거라. 쉽게 얘기하면 수행에서 어느 정도 대상을 지속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힘이 생겼을 때 그때 졸음들이 온다는 거라.

사띠는 대상을 지속적으로 따라하는 시간이 얼마만큼 기느냐에 따라서 사띠의 힘이 강하고 약하고가 구분되어집니다.

배도 마음이 자꾸 달아나면 잡아넣고 잡아넣고 해가지고, 지속적으로 그냥 한 5분이라도 배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걸 관찰할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사띠가 되지,

달아나면 달아나는 대로 또 이거 봤다가 저거 봤다가 이렇게 할 것 같으면은, 그게 그렇게 강한 것도 아닌데도 방해하는 것들이 자꾸자꾸 나타나기 때문에 그런 것들로 자꾸 마음이 쏠린다는 거라. 그럼 사띠는 길게 안 됩니다.

졸음이 오더라도 졸음을 지속적으로 그걸 한 5분 이상 관찰할 수 있도록 자꾸 노력을 기울여야만이 졸음을 몰아낼 수 있지, 졸음이 오는데 그냥 쉽게 포기해 버리고, 그냥 다리 털어버리고, 경행해 버리고, 졸음을 관찰하는 게 아니고 ‘아니 아니지’ 그래 하면서 또 호흡으로 돌아오고 이렇게 해버리면은 졸음은 영원히 관찰이 안 될 뿐 아니라 수행의 진척은 없어지는 거라.

 

지금부터 스님이 하는 것들을 잘 명심을 하십시오.


첫 번째, 졸음이 온다. 그럼 주 대상은 뭡니까? 호흡입니까? 졸음입니까? 졸음입니다.

졸음이 주 대상이 돼야 되는 거지,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이게 대상이 돼서는 안 된다 하는 거라. 이거는 없는 것으로 쳐버리고 놔버려라는 거라. 그럼 졸음이 오는 걸 갖다가 주 대상으로 잡으라는 거라.

그 대신에 ‘아, 내가 수행 한 단계 뛰어넘을 수 있는 좋은 대상 만났네’ 하고 마음을 먹고, 마음을 어떻게 기울이냐면 요 졸음이 오는 거 딱 한 포인트에서 졸음이 오는 것부터 시작해가지고 졸음이 끝나는 것까지 내가 딱 한번 본다 하고 마음을 먹고 그 졸음을 보라는 거라.

대상은 시작점과 진행되는 것과 끝나는 부분을 분명히 보면 졸음은 여러분들한테 영향을 안 미칩니다. 한 번만 딱 그래버리면 돼요. 한 번만!

그러면 그다음에 또 졸음이 오더라도 다시 보면은 그전에는 1~2분 걸렸는데 이번에는 한 30초도 안 걸려요 졸음이 끝나는 게. 그다음부터는 졸음이 나타나면 탁 알아차리면 그대로 사라져. 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이제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첫 번째, 졸음이 올 때는 졸음이 대상이 돼야 되고, 졸음의 시작과 끝나는 걸 분명하게 보려고 노력을 하라. 그게 가장 기본적인 부분입니다. 그게 첫 번째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힘이 있어야 졸음이 시작되고 끝나는 걸 보는데, 힘이 없다고. 그럼 어떻게 해야 될까? 그때는 졸음을 보면 졸음한테 져. 쉽게 말하면 그냥 조불게 돼 있다는 거라. 졸음하고 싸우려고 할 때까지는 하는데, 하다가 배가 팍 접혀버린다든지 꾸벅한다든지 이러면 이미 진거거든.

그럴 때는 그게 대상이 되면 안 되는 거라. 졸음이 대상이 되면 안 되는 거라. 싸우려고 할 때까지는 졸음이 대상이 되는데, 싸운다는 건 그거하고 내가 탐욕을 일으켜 가지고 그걸 갖다가 몰아내려고 한다든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걸 있는 그대로 자꾸 관찰하려고 하는 걸 "싸운다"고 표현하는 겁니다이.

근데 그렇게 해도 안 된다 싶을 때는 졸음은 놔줘 버려야 돼.

 

두 번째, 졸음은 놔줘버리고 배로 다시 돌아가야 돼.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만 알아차리는 게 아니고, 불러오고 꺼지고 뿐 아니라 앉아 있으면 앉아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닿아 있으면 닿아 있는 걸 알아차리고,

일어남, 사라짐, 앉음, 닿음

 

닿음 첫째, 닿아 있는 게 어디라? 입술이 닿아있다, 입술이 닿아 있는 느낌을 알아차리라는 거라. 그다음에 다시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할 때 ‘일어남, 사라짐’ 하고, 앉아 있으면 앉아있는 전체적인 모습을 관찰하고,

그다음에 닿음 두 번째 포인트, 어디가 닿아 있어요? 손이 닿아 있다, 그러면 손이 닿아있는 느낌을 관찰하라는 거라. 그러면서 '닿음 포인트'를 늘려나가라는 거라.

엉덩이가 닿아있다 하면 엉덩이를 포인트로, 그래서 닿음 포인트를 점점 늘려나가면서 ‘일어남, 사라짐, 앉음, 닿음’ 해서, 닿음 1, 닿음 2, 닿음 3을 계속 늘려나가라는 거라.

 

포인트를 자꾸 늘려나가면 마음은 활기가 있게 됩니다.

일단 먼저 잠을 몰아내라는 뜻입니다.

관찰하다 관찰이 안 되니까 자꾸 졸으니까, 그렇게 졸지는 말도록 대상 포인트를 늘려주라는 거라.

 

그런데 여기서 문제, 이렇게 대상 포인트를 자꾸 늘려주는 것들은 실재하는 걸 보기가 어렵습니다. 이게 마음이 거기에 가 있는 것뿐이라.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도 면밀하게 관찰이 안 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일어남 사라짐도 그냥 관념적으로 하게 돼 있고, 앉아있는 전체적인 모습을 관찰하는 것도 관념적으로 하게 돼 있고, 닿아있는 것도 그냥 닿아있다는 느낌 만 아는 거지, 닿아 있다는 것만 알고 있는 거지, 거기서 일어나는 실질적인 느낌을 모릅니다. 그리하더라도 그걸 하라는 거라.

 

단지 이 두 번째 방법으로 하는 거는 마음을 깨우기 위한 방법이지, 여기서 무상을 발견하기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무상 고 무아를 발견하려고 여기서 할 것 같으면 이미 포인트가 잘못돼버립니다.

'잠을 안 자기 위해서 마음을 활기 있게 만들기 위한 방법이다' 하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집중력을 좀 더 키워주고 사띠하는 대상들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한 것이다' 하고 마음을 먹으면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두 번째 방법으로 해도 그래도 졸음이 온다, 그럴 것 같으면 어떻게 해야 돼?

그럴 때는 다시 호흡으로 돌아가야 돼! 그때는 코끝을 보라는 거라.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 그 뭐고 성냥개비 있으면 우리는 옛날에 성냥개비 같은 걸 가지고 했는데,

 

들이쉬고 내쉬고 하면 성냥개비 하나 툭 떨어뜨리고, 또 들이쉬고 내쉬고 하면 하나 툭 떨어뜨리고, 요렇게 계속 하는 거라.

그럼 나중에 끝나고 나서 그걸 성냥개비를 한번 보면 만약에 5분을 했다. 5분 동안 성냥개비가 몇 개나 떨어지는 걸 보는 거라. 대부분 1분 동안 할 것 같으면 성냥개비 보통 16개 그 정도 이렇게 떨어뜨립니다. 들이쉬고 내쉬고를 한 번으로 했을 때.

그럼 이게 비슷하게 맞아야 되는데, 내가 그 잠깐 시간 동안 망상을 피웠다든지 아니면 졸음에 빠졌다든지 할 것 같으면 성냥개비 수가 적어.

 

자기가 알지 못했다는 것뿐이지, 그 시간 동안에는 이미 죽은 시간으로 지나가는 거라. 그러면 끝나고 나서 내가 참 그래도 망상 많이 하고, 많이 조는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각성을 해라는 거라. 그렇게 해가지고 성냥개비로 하는 방법이 있고.

 

또 호흡에서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 들이쉬고 내쉬고 하면은 수식관 같이 그걸 수로 세는 거라.
1 하나, 그다음에 들이쉬고 내쉬고 하면 둘, 그래서 1부터 5까지 갔다가 다시 넷 셋 둘 하나, 그다음에 하나부터 다시 또 올라가면서 이제는 조금 더 늘려가지고 만약에 6번까지 한다고 그러면 6, 그다음에 다시 5, 4 이런 식으로, 사마타적인 방법입니다.

 

그런데 이 방법으로 할 것 같으면 아까 앉아 좌선할 때 '앉음, 닿음'을 해서 '닿음 포인트'를 늘려줄 때하고는 틀리게 집중하는 힘이 굉장히 강해집니다. 순수하게 사마타적인 방법입니다.

집중하는 힘이 사띠할 때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사띠하는 대상에서 떨어지지 않게끔 만들어주기 때문에 사띠하는 시간을 늘려주게 됩니다.

그래서 그 방법으로 하다 보면 나중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니밋따(nimitta)가 일어나기도 하고 아니면 삼매에 들기도 하고 그렇게 되어갑니다. 잠이 문제가 아니고 잠으로 인해서 집중하는 힘을 키웠기 때문에 가능한 거라. 이제 잠하고는 이제 관계 없어져 버리게 되는 거라.

이게 이제 세 번째 방법입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 졸음이 오면 어떻게 돼요? 몸이 굽습니다.

내가 삼매에 빠졌는지, 아니면 대상을 놓치고 잠에 빠졌는지, 아니면 대상을 안 놓치고 그냥 멍한 상태로 있었는지 하는 걸 구분하는 포인트가 자기 몸의 자세에서 허리가 구부렸느냐, 아니냐? 하는 거라.

 

허리가 구부러졌다, 조분 거라.

차 운전할 때 시동은 켜져 있는데, N에 놓으면 어떻게 돼요? 차가 안 나가죠? 차가 시동이 꺼진 건 아닙니다. 근데 차는 안 나가. 그걸 공회전 상태라고 그럽니다. 대상은 분명하지 않고 잠은 안 잔 것 같은데, 허리가 구부러져 있다. 그럼 공회전 상태에 있었다고 보면 됩니다. 본인이. 그럼 어떻게 해야 돼?

 

허리를 다시 편다하고 인식하면서 허리를 지금 천천히 다시 펴야 되는 거라. 그러고 나서 다시 배의 호흡이 자연스러운지를 갖다 관찰하고 다시 배를 관찰해야 되는 거라.

그 단순한 행동 하나만 하더라도 잠은 싹 달아납니다. 차는 나아가야 되는데 나아가지 못하고 공회전 상태로 있는 걸 본인이 알 것 같으면, 이 졸음이라는 게 얼만큼 나의 수행에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거라.

 

그런 허리를 펴려고 하는 노력으로 인해가지고 잠은 싹 달아납니다. 아주 단순한 것 같지만 그 하나를 하더라도 졸음을 몰아내는 데는 크게 효과가 있다 하는 것을 갖다가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다음에 다섯 번째, 가장 좋은 방법은 졸음이 오면 실재하는 느낌을 관찰하라는 거라. 따갑고 쑤시고 무겁고 갖가지 느낌들이 일어납니다. 그거 보라는 거라. 그거.

무상을 보여주는 선물이라고 그랬죠? 졸음이!

그걸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실재하는 느낌을 보는 겁니다.
그 대신에 실재하는 느낌이라 하더라도 하나의 포인트에 맞춰라.

 

포인트를 여러 개 하면 안 돼요. 딱 한 점에다가 마음이 거기에다가 딱 머물도록 하고, 그 느낌이 변하는 것만 볼려고 하면 되는 거라. 그러면 그 느낌이 변하는 게 보입니다.

설혹 사라지는 걸 갖다가 캐치를 못했다 하더라도, 느낌이 변하는 것만 보이더라도 재미가 있게 됩니다. 그다음에 또 다른데 다른 느낌이 있으면 그 느낌을 본다는 거라. 호흡이나 다리의 통증이나 이런 것들을 전혀 신경 쓰지 말고, 눈꺼풀에서 일어나는 느낌들 눈꺼풀 어느 딱 한 포인트에서 일어나는 느낌 하나만 딱 보라는 거라.

거기서 일어나는 느낌이 뭔지를 갖다가 딱 보고, 그 길을 갖다가 지키고 있다고, 지키고 있는 문지기라고 생각을 딱 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 문을 통해서 어떤 느낌들이 틀림없이 들어왔다가 나갔다 합니다.

다른 문으로는 절대 들어오고 나가지를 않습니다. 왜? 내 마음이 여기 딱 있기 때문에. 그럼 거기서 들어오고 나가고 하는 것만 보이면은 무상한 성품들이 탁 보인다는 거라.

 

그게 졸음을 몰아내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졸음은 여러분들한테는 수행에서는 장애이기도 하겠지만, 수행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는 도구라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하나 딱 기억해야 될 것, 졸음은 어떠한 경우든지 불선(不善)한 마음입니다.

왜 그럴까? 졸음이 오면 졸음을 좋아해가지고 붙잡아갖고 뒹굴든지, 아니면 미워갖고 밀어내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나든지, 그렇지 않으면 어리석어 가지고 그냥 헤벌레 하고 졸음인 줄도 모르고 지내든지, 이 세 가지 밖에 없거든.

 

졸음이 일어날 때 무슨 마음이 일어났느냐를 보라는 거야.
졸음이 있으면 ‘아, 내가 졸음을 좋아하나? 좋아하는 마음이 일어나나? 아니면 이걸 갖다가 몰아내려고 하는 마음이 있는지, 아니면 그냥 무덤덤하게 졸음을 명확하게 관찰하려고 하지 않는가? 탐심과 진심이 있어가지고 그것으로 인해서 졸음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면은 적어도 졸음의 30% 이상 몰아 나가집니다.

거짓말 같죠? 진짜입니다.

 

실제 졸음은 탐심과 진심, 치심이 개별적으로 따로 와가지고 그 졸음이 오게 돼있다는 거라. 근데 내가 이게 어리석은 것으로 인해서 졸음이 있다는 걸 딱 알 것 같으면 눈은 번쩍 떠집니다. 그게 지혜라!

 

졸음이 올 때 아, 내가 이걸 분명하게 관찰하려고 하는 마음이 없이 그냥 흐리멍텅하게 지금 대상을 관찰하고 있다는 것만 탁 알아차리더라도 사띠하는 힘이 확 커져버리는 거라.

지혜는 이렇게 대상을 만났을 때 그 즉시에 그게 탁 일어나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래서 졸음이라고 하는 것은 지혜와 탐·진·치라고 하는 것의 싸움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탐진치에 지는 건지 아니면 지혜가 일어나도록 만들건지 하는 건 여러분들이 결정하는 겁니다. 반드시 그거는 명심을 해야 됩니다.

졸음은 습관화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졸음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졸음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탐·진·치가 문제가 된다는 걸 생각하고, 그것들을 잘 관찰하도록 그렇게 노력을 해야 됩니다.

 

봄인데 조불지 말고 좀 수행 열심히 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