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_G1QsHf-Q0g?si=fnIAwBoxxf3mgcCT
* 아사와(āsava), 아라한에게 까마 아사와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20250315)
오늘은 상가라자 스님이신 뿐냐산또 도성 큰스님에 대한 얘기와 누가 질문한 게 있어가지고 그걸 중심으로 해서 얘기를 하겠습니다. 감독의 시선으로 관찰하면 아주 간단한 건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얘기를 하겠습니다.
누가 질문을 하는 게 뭐냐면 '재가자인데 아라한이라고 칭하는 분이 있다' 하는 얘기를 하면서 그분이 '그 성생활도 가능하다' 하는 얘기를 한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한 얘기를 먼저 하겠습니다.
'까마 아사와(kāma-āsava)'라고 하는 부분입니다. 불교에는 생각의 정리부터 먼저 해야 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에는 그냥 범람을 해버립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자기 스스로 제어가 가능해야 됩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그런 게 경전에 있습니다. 어느 출가한 스님이 부처님한테 그렇게 애기합니다. 부처님 말씀에 뭐가 있냐면 생각을 할 때는 "까마사와(kāmāsava) 바와사와(bhavāsava) 아윗자사와(avijjāsava)가 증폭되지 않도록 사띠하고 주의하라"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감각적인 욕망에 휩싸이면 안 되고, 죽지 않고 살려고 생존욕구를 가지고 계속 살면 안 되고, 그리고 수행하지 않고 흐리멍텅하게 있으면서 진리가 뭔지를 모르고 살면 안 된다' 하는 그런 겁니다.
근데 이제 그 출가한 스님이 그렇게 얘기합니다. 부처님이 이걸 왜 증폭되지 않도록 사띠하고 주의하라고 했겠어요. 그렇게 사띠하지 않으면 마음이 오염돼버린다는 거죠. 그러면은 결국 감각적인 욕망에 빠져버리고 하는 여러 가지 현상들로 이어진다는 거죠. 그래서 이 스님은 “나는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오염되지 않기 때문에 그걸 행해도 괜찮습니다.” 하는 얘기를 합니다.
아라한이 되면 오염이 되지 않겠죠. 그러면 행해도 괜찮습니까?
경전에 있는 내용과 똑같습니다. “나는 행해도 괜찮다.” 근데 경전에 분명하게 쓰여져 있습니다. “성욕이 없이 성행위가 가능하냐?” 하고 부처님이 결론을 내립니다. 성적인 욕망이 없이 어떻게 성적인 행위가 가능하느냐는 거라. 여러분들이 마음을 내서 손을 뻗치려는 마음이 없는데 손을 뻗을 수 있습니까? 그런 성적인 욕망이 없이 어떻게 성행위가 가능하다고 하느냐는 거라.
아라한은 어떠한 경우든지 까마 아사와(kāma-āsava)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수다원 지나고 나서부터는 엷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일래과 불환과를 지나고 나면 완전히 없어지긴 하는데. 어쨌든 드러나지 않는 것이 돼버립니다. 근데 아라한이 되기 훨씬 전부터 있을 수가 없는 일인데 이 경전에 이 스님은 나는 가능하다고 하니까 부처님이 그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성적인 욕망이 없이 어떻게 성행위가 가능하냐?”
의도를 내지 않고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하는 거라.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아라한이라고 하면 물론 '재가 생활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차후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런 아사와(āsava)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까마뿐 아니라 맨 처음에 딧티(diṭṭhi)가 먼저 떨어지고 그다음에 까마(kāma)와 바와(bhava)가 떨어지고 그다음에 아라한이 되면 아윗자(avijjā)가 떨어지고 하는 식으로 떨어지는데, 어떠한 경우든지 아사와가 없기 때문에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건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런 데에 현혹되면 안 됩니다. 친구가 여기에 푹 빠져가지고, 그것 때문에 아무리 얘기를 해도 말을 듣지 않는다고 본인이 힘들어 죽겠대요. 아파 죽겠대요. 괴롭다고.
한번 그 문제는 생각해 봅시다.
스님 소리가 여러분들한테 들립니까? 왜 들립니까?
스님 말이 여러분들 귀에 가서 탁 붙어서 들리는 겁니까? 아니면 스님 마음이 여러분들 귀에 탁 붙었습니까? 그냥 귀에서 진동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 소리가 들리는 것뿐입니다. 근데 그때 잠깐 딴 생각하면은 그 진동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 진동을 알아차리는 건 뭐가 알아차려요? 지 마음이 알아차려야 되는 거라. 이 소리라고 하는 거 하고는, 그리고 스님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겁니다. 본인의 마음이 그 진동을 알아차리는 것뿐입니다. 상대의 마음이 탁 가서 닿은 것도 아니고 그냥 공기의 진동을 내가 마음으로 알아차리는 것뿐입니다. 그것뿐입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간단한 겁니다. 아무리 남이 싫은 소리를 하든 칭찬을 하든 그냥 그 진동만 알아차리고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있으면 그것이 나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거라. 그것을 이해하든 아니면 그냥 끊어짐으로써 그냥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으로서 알아차리든 그것은 그 사람의 역량인 것이고.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오염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일으킨 다른 마음이라는 거라.
근데 이걸 자꾸 사람들이 착각을 해버리는 거라. '저 사람이 나에게 싫은 말을 했다.' '저 사람이 나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 사람이 괴롭습니까? 근데 괴로운 건 지란 말이라.
괴로움을 일으키는 것은 본인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려서는 안 됩니다. 오물을 받아들이게 되면 필요 없는 것들이 나에게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면 오염이 돼버립니다. 번뇌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 번뇌는 그냥 그 번뇌만 있을 것 같으면 괜찮은데 번뇌라는 놈이 나와 딱 결합을 해버립니다. '내가 그렇다'는 거라. '내가 마음이 아프다. 내가 괴롭다.' 그럼 나와 딱 결합이 되니까 이게 인제 증폭이 되는 거라. 그래서 폭발을 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대응을 나쁜 말로 대응하든 어떤 식으로든 대응을 하게 되고, 그걸 하질 못하니까 마음이 괴로움으로 계속 휩싸여버리게 되는 거라. 그 말을 한 거는 어제였는데 오늘도 나는 그걸 떠올리면서 괴로워하고 있다는 거라. 오늘 내가 해야 되는 건 지금 현재 일어나는 현상들을 사띠하는 건데 거기에 사띠를 하는 거라.
명목상으로 사띠인 것뿐이지 단지 그것은 본인이 회상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띠를 하고 있으면 과거의 일이나 미래의 일은 나하고는 관계없는 것들이 돼버립니다. 그래서 「나」라고 하는 것이 번뇌하고 결합이 되니까, 나에게는 뭔가 변하지 않는 영혼이라는 것이 존재를 해버리는 상태가 돼버리는 거라. 계속 이렇게 증폭이 돼버리는 거라.
어제 그제 큰 스님을 뵙고 왔어요. 인제 사실 날이 며칠 남질 않았습니다.
이미 곡기를 못 드시는 지가 며칠 됐기 때문에 남아 있는 생명만 꺼지기를 기다리는 중인데, 물론 여러분들이 지금 면회가 안 될 겁니다. 큰 스님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보통 돌아가시기 전에 무슨 현상이라고 그러죠? 섬명인가? 섬망, 섬망 증상이 일어난다고 그러죠.
큰 스님은 6.25 때 인민군으로 참전하신 분이거든요. 그랬다가 53년도에 포로 석방할 때 석방이 되면서 출가를 하신 스님인데, 6.25 때 그 모습들이 자꾸 섬망 영상으로 나타난다는 거라. 그래서 “거기 있으면 안 돼. 빨리 나와. 비켜” 하는 소리를 이렇게 자꾸 하신다고 그러더라고. 사실은 큰 스님이 그런 섬망 증상이 나타나면 안 되죠. 그런 섬망 증상은 뭐 수행 안 한 분들이면 그게 가능한데, 다른 것은 안 나타나는데 꼭 그게 그렇게 나타나서 괴롭힌다고 그러시더라고.
그래서 “지금 현재 스님 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까?”하고 여쭤봤어요.
그전에는 스님이 다른 사람들을 못 알아봤거든. 근데 저는 알아보거든. 전에도 사람을 못 알아볼 때도 가면 저는 알아보더라고. 이번에도 눈을 거의 못 떠요. 가서 “스님 저 왔습니다.” 하니깐 그 소리에 반응을 하시는 거라. 눈을 번쩍 뜨시면서 “진용스님 왔네” 이러시는 거라. 그러면서 이제 몇 마디 말을 나누는데, 말을 거의 못했는데도 제가 갔을 때는 조금 하시더라고. “더 살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까?” 하니까 없대요.
“오늘 죽을까? 내일 죽을까?” 이렇게 물어보시는 거라. “스님 지금 돌아가시면 되죠.” 그랬거든. “뭘 내일까지 사시려고 그러십니까?” 아직 살고 싶은 마음이 있는지, 아니면 아직 못 본 사람이 있는 건지.
그래서 스님한테 그랬습니다. “스님 알아차림은 하고 계시지요?” 그러니까 아무 말씀 없이 씨익 웃으시는 거라. “스님, 그러면 그냥 이제는 살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으십시오.” 그렇게 했거든. 나는 그냥 하고 싶은 얘기를 그냥 하는 것뿐인데 옆에 있는 간호하는 분들은 왜 스님한테 그런 얘기를 하느냐고.
여러분은 살고 싶습니까? 죽음에 임박하면 생존 욕구가 드러나집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게 생존 욕구인지도 모르고 그냥 조금 전에 얘기했던 섬망 증상이나 아니면 의식 없이 돌아가시는 것이 대부분이긴 합니다.
그래도 큰 스님은 오래도록 수행을 하셨기 때문에 가끔씩 섬망 증상이 나타나는 것뿐이지 사띠를 놓치지 않고 있다는 거라. 음식물이 못 들어가면은 몸에 있는 기운이 다 빠져나가면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스님이 느낀 게 참 ‘한국에 테라보다 불교가 정착하려면 참 멀었다’ 하는 그런 생각을 갖습니다. 그래도 상가라자 스님인데 마음대로 가서 병문안도 할 수 없지, 열반하시고 나서 테라와다 식으로 장례를 치를 수도 없지. 그래서 거기서 더 강하게 드는 게 그래 나는 죽을 때 태국 가기로 했습니다. 그게 바른 도리겠구나 하는 생각을 더 강하게 가집니다.
수행력의 깊고 낮음 하고 관계없이 그 테라와다 스님이 돌아가실 때는 테라와다 방식으로 돌아가셔야 되고 테라와다 방식으로 장례가 치러지는 것이 합당하다는 거라. 살아온 것이 대승불교식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고 테라와다 방식으로 살아왔으면 그렇게 해줘야 되는 것이 맞습니다. 아마 며칠 안 가서 상가라자 스님은 열반에 드실 겁니다.
그리해도 여러분들은 마음속으로라도 자애의 마음을 자꾸 보낼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자애의 마음보다 더 중요한 거는 지금 현재 여러분들이 사띠하는 거. 자애의 마음이 전해지려고 할 것 같으면 내 마음만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니고 받아야 될 사람이 탐진치가 없는 마음이 되어 있어야 가능한 거거든. 근데 그걸 여러분들이 알 수가 없잖아. 그럼 가장 좋은 거는 지금 현재 내가 사띠를 하면서 사띠하는 공덕들을 갖다가 자꾸 나누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 그것이 자기의 것이 되는 겁니다.
하루 이틀 남았는데 왜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길까? 왜 죽기 싫을까?
이 아사와(āsava)라는 기능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사와라는 것이, 그 혹시 엑기스를 압니까? 만약에 사과를 가지고 엑기스를 만든다면 사과가 이만큼 있어야 엑기스 요만큼 만들어집니다. 아사와라는 뜻이 그 엑기스라는 뜻입니다. 과거생부터 계속적으로 쌓아온 습관들이 나를 지금 이러한 습관들을 가지게끔 만들어 왔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어느 정도의 습관들이 형성돼 있을까? 아마 모르긴 해도 참 많은 생 동안에 습관들을 가지게 된 것이 지금 생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고, 또 그것으로 인해서 다음 생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겁니다.
아사와(āsava)라는 것이 그런 뜻입니다. 사과를 꽉 움켜 쥐어가지고 즙을 짜내는 거와 같이 뭔가를 내가 꽉 움켜 잡는 것,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즙이 습관이 돼버리는 것, 뭔가와 연결시키는 작용을 하는 것.
아까도 감각적인 욕망이 나와 탁 연결이 돼버리게 되고, 그 연결만 없으면은, 따로따로 있으면 크게 영향을 안 미칩니다. 그냥 감각적인 욕망은 감각적인 욕망으로서 끝나버리게 되고, 나라고 하는 것들도 결국은 보면 일어난 자리에서 사라지는 것이 보이게끔 됩니다.
이 연결되는 이 아사와가 있기 때문에, 요게 딱 붙어버리니까 문제가 커져 버리는 거라. 그래서 그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이 아사와라는 거라.
습관되어진 것을 지금 현재 뭔가 행위를 하도록 연결시켜주는 것들, 그것이 감각적인 욕망과 연결되기도 하고 존재하려는 욕구와 연결되기도 하고, 게으름 피우려고 하는 것으로 연결시켜 주는 거고, 잘못된 견해를 가지는 것에도 연결시켜 줍니다.
단지 그게 드러나 있느냐, 드러나 있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드러나 있지 않는 것은 오히려 관찰하기가 수월합니다. 왜? 드러날 때 탁 그것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수행력만 조금만 깊어도 '아누사야(anusaya)'라고 하는 드러나 있는 잠재적인 번뇌들이 탁 일어날 때 그것들을 알아차려집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성냄이라고 하는 것들은 크게 문제가 되질 않아요. 수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단지 욕심부리는 것들이 관찰하기가 좀 힘이 듭니다. 왜? 그것들이 잘 드러나질 않기 때문에. 그래서 수행자들은 번뇌를 두 가지밖에 없다 하고 얘기합니다. "수행 안 하려고 하는 마음하고 욕심부리는 거하고 이 두 가지밖에 없다" 하고 얘기합니다. 왜? 나머지는 드러나는 족족 내가 알아차려서 잡아내기 때문에. 어쨌든 드러나지 않는 것들은 점차적으로 그렇게 잡아내면서 그것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을 합니다.
한번 여러분들 해볼까요? 수행 대상을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배가 불러오면 불러온다고 알아차리고, 꺼지면 꺼진다고 알아차립니다. 불러올 때는 배가 불러오는 거죠? 그게 내 마음하고 관계있습니까? 관계 있듯이 없듯이 그렇습니다.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내 마음이고, 배가 불러온다고 분명히 알고 있으니까 아는 것도 내 마음이고. 근데 실제로 불러오는 배는 마음하고 또 딱 별개의 것입니다. 만약에 별개의 것이 아니라고 할 것 같으면 배가 꺼지고 있는데도 마음으로는 불러온다고 알아차릴 수도 있다는 거라.
수행을 조금만 하다 보면 정신적인 현상과 물질적인 현상을 구분할 수 있게 됩니다. 조금 전에도 얘기했지만, 배가 불러올 때 불러온다고 알아차려야 되는데 배가 꺼지는데도 불러온다고 알아차리고 있는 것은 잘못 대상을 알아차리고 있는 거죠. 그럼 퍼뜩 다시 또 돌아옵니다. 그래서 불러올 때 불러온다고 알아차리는데 마음이 딴 데로 탁 가버리면 배는 불러와지고 있는데, 마음은 다른 것을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배가 불러오는 거는 전혀 모릅니다. 마음이 먼저 앞서야만이 물질적인 현상을 갖다가 분명하게 알아차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원인·결과를 알게 됩니다.
그렇게 원인 결과를 알고 오래도록 수행하다 보면 대상이 빨리 변합니다. 불러오는데도 금방 불룩불룩 불룩불룩해지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계속적으로 반복돼 나가집니다. 근데 가만히 한번 보십시오. 대상은 어디서 일어나서 어디로 사라졌습니까? 그놈은 일어난 자리에서 그대로 유지가 되다가 사라져버립니다. 그 자리지 다른 자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걸 잘못 알면 불러오는 게 여기도 불룩하고 여기도 불룩하다고 알게 됩니다. 그건 다른 종류입니다.
여기 불러온 것은 이미 불러온 자리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리고 다른 데서 불러와가지고 불러와진 것을 안 것뿐입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대상은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자리에 사라져버립니다. 그게 짧고 길고의 차이가 수행력의 차이에 따라서 다를 뿐이지 다른 곳에서 사라지는 법은 없습니다. 그걸 알면은 ‘아, 이게 참 무상하구나’ 하는 걸 압니다. 무상·고·무아를 알게 되면 그 뒤부터는 흔들림이 없습니다 수행하는데.
그러면은 이 아사와(āsava)라고 하는 것이 적어도 견해에 대해서는 침범할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내가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아니면 '다른 것은 내가 살아가는데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바로 탁 알고, '중요한 것은 무상·고·무아라고 하는 성품이다' 하는 사실을 갖다가 바꿀 수 있는 포인트가 안 생겨버린다는 거라.
왜? 끊임없이 사띠하기 바쁜데 언제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어요? ‘이것도 조금 해볼까, 저것도 해볼까’ 그럴 여유가 안 생깁니다. 적어도 견해만 바르게 세워지고 나면은 내가 갈 길과 가지 말아야 될 길에 대해서 분명하게 구분을 하게 됩니다.
옛날에 스님이 수행할 때 그런 것들을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분명히 오늘 내가 가야 되는데 거기를. 오늘 수행이 너무 잘 되는 거라. 그래서 결국은 안 가. 그러고 나서 그다음날 거기를 가거든. 그분한테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약속을 못 지켜서 하루 늦게 왔습니다.” 근데 그분이 뭐라 하느냐면 “아이고 스님, 어제 안 오길 잘했습니다. 어제 거기에 오는 차가 굴러가지고 사람이 다쳤습니다.”
그런 것들을 여러 번 경험을 하다 보면, 내가 가는 길과 가지 말아야 되는 길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기고 나면 그 뒤부터는 법이 나를 보호해주는 거라. 법 따라 가게끔 이렇게 햇빛을 비춰주듯이 그렇게 비춰주고 있구나 하는 것들을 강하게 느끼게 됩니다. 다른 길로 빠질 수 있는 조건을 안 만들어 준다는 겁니다.
그러면 게으름 부릴 틈을 주지도 않고 감각적인 욕망에 빠질 수 있는 틈도 주지 않는 상황이 돼버립니다. 그래서 아사와라고 하는 것이 점점 힘을 잃어가게 되는 상황이 돼버리게 됩니다.
여러분은 딧티(diṭṭhi), 까마(kāma), 바와(bhava), 아윗자(avijjā) 어디까지 몰아냈습니까?
이생에서 마지막 삶을 살고 싶으면 이것들을 빨리 몰아내야 됩니다. 그런데 현혹돼가지고 자기가 해야 될 것들을 하지 못하고, 또 그런 것들로 인해서 마음에 괴로움이 일어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그 사람 책임이 아니고 자기 책임입니다.
수행은 어떠한 경우든지 본인 스스로 노력해서 한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사두 사두 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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