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dUQBgfwiej8?si=i-Mtizm5B-WIco5m
<26:45초부터 법문이 시작됩니다.>
오늘은 붓다의 날, 웨사카 뿌자(Vesākha-Pūjā) 입니다.
부처님이 태어나고, 성도하고, 열반하시면서 우리한테 바란 게 뭘까? 뭐 바랬어요?
(수행자 대답 :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음,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윤회로부터 벗어나기를, 그러면 빨리 가서 공부해! 여기 이럴 시간이 없어. 그렇잖아.
그건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오늘 같은 날 공양물을 올리고 등을 달고 하는 것도 좋지만, 그런 모든 것의 의미는 부처님을 존경한다는 의미인데 가장 큰 존경은, 여러분들이 수행을 빨리 성취해내는 것이 가장 큰 존경이라는 것입니다. 그걸 잊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수행에서 집중하는 힘이 굉장히 중요하죠.
집중하는 힘이 없으면 사띠(sati)는 금방 흩어져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걸 기르기 위해서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계를 잘 청정하게 지키도록 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계가 어느 정도 지켜지고 나면은 마음에 그래도 꺼려지는 부분이 잘 없습니다. 선한 마음들이 자꾸 일어날 수도 있고 하기 때문에.
계를 지키고 나면 그다음에는 이제 '몸과 마음에 대한 관찰'들이 일어납니다.
지금이라도 한번 해볼까?
코끝 아니면 배로 '들이쉬고 내쉬고' '불러오고 꺼지고' 딱 5초만 해봐봐요. 마음이 거기 붙어 있는가?
···
됐습니다. 5초 동안 그대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걸 관찰했어요?
대부분은 보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관찰이 안 되고 망상 피우게 됩니다. 생각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기(코끝)에 마음이 가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게 보입니다. 통증이 보인다든지, 아니면 어디 다른 것들이 보여지든지, 대상이 인식 이동을 해버리는 상태가 돼버립니다.
5초가 안 가면 그건 아주 집중력이 많이 떨어져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빨리 집중력을 키우는 훈련들을 해야 됩니다.
어느 정도 5초 정도가 된다 할 것 같으면 그래도 이제 사띠를 지속해 나갈 수가 있게 됩니다.
숨을 두 번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걸 갖다가 그대로 그냥 따라갔다는 얘깁니다.
그러면 적어도 그렇게 두 번 왕복 숨을 관찰할 동안에는 들이쉬는 거는 '들이쉬었다'고 분명히 알고, 내쉬는 건 '내쉬었다'고 분명히 알게 됩니다. 그래서 들이쉬는 것과 내쉬는 것은 틀리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들이쉴 때는 '들이쉰다고 분명히 내가 알아차리고 있다'고 분명히 알게 되고, 내쉴 때는 '내쉬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있다'고 알게 됩니다.
이렇게만 해도 수행은 그래도 꾸준하게 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적어도 그렇게만 지속해 나갈 수가 있다면.
그러면 그 집중력은 어느 정도까지는 위빳사나 수행하는 데는 기본적인 토대가 마련돼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게 안 되는 분들은 집중하는 힘들을 더 키워야 됩니다.
어떻게 해야 돼요? 키우기 위해서 각각의 선원에서는 나름대로의 방법을 씁니다. 대표적인 예로 「마하시」 같은 경우에는 들이쉴 때 '들이쉰다고 명칭을 붙여라', 내쉴 때 '내쉰다고 명칭을 붙여라', 발을 들어 올리면 '발을 들어 올린다고 명칭을 붙여라.'
명칭을 붙이는 것은 그 대상에 마음을 묶어두고 집중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쉽게 말하면 개념적인 것이지, 실재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어쨌든 그렇게라도 해가지고 집중하는 힘들을 키우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쉽게 말하면 어느 수행처에 가서 수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냥 순수하게 그냥 '마음이 흐르는 대로 그냥 따라가면서 그걸 알아차리겠다' 그거는 힘드는 겁니다. 강제로라도 마음을 끌어다가 처음에는 갖다가 붙이도록 만드는 훈련들을 해야만이 마음이 거기에 조금이라도 붙어 있지, 그렇지 않으면은 마음은 흩어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반드시 해야 되겠다고 생각이 되면은 강제로라도 여러분들이 행위 자체를 그걸 하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어떤 일을 완성해내는 힘들이 생겨나갑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행도 마찬가지고 일상생활도 마찬가지고 대부분 중도에 포기를 해버립니다.
집중이 잘된다고 가정을 했을 때, 그래도 5초, 10초 정도를 꾸준하게 할 수 있다, 그럴 것 같으면 마음에서는 어떤 것들이 일어날까?
짧은 그 순간이지만 마음에는 '기쁨'이 일어납니다. 틀림없이 일어납니다. 그걸 대상에 5초, 10초 딱 집중해가지고 그것들을 관찰했는데도 마음에서는 되게 행복하고 하는 마음들이 일어나고.
또 마음은 마음이 행복하고 기쁘면은 거기에 몸은 반응을 하게끔 됩니다.
호흡을 관찰하고 있으면 호흡에 대한 것들이 비슷하게 뭔가 뭉게구름 같은 것들이 나타나기도 하고, 배를 관찰하고 있을 것 같으면 수행이 잘 되고 있으면 기쁜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에 빛이 팍 보이기도 하고, 또 몸이 거기에 반응을 해서 몸이 좀 이렇게 떨리는 것들이 일어나기도 하고, 그런 여러 가지 현상들이 틀림없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면 마음은 더욱더 그 대상에 달라붙으려고 하게 됩니다. 일치하려고 하게 됩니다.
‘어, 재밌네’ 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이 여기서 그냥 대부분 거기에서만 계속적으로 놀게 됩니다. 기쁨이 일어나면 기쁨이 일어나는 대로, 행복하면 행복한 대로, 마음이 떨리고 하면 떨리는 대로, 발을 디디는데 땅이 푹 꺼지듯이 몸이 푹 꺼지는 느낌을 받는다든지 하면 그냥 그거 좋아가지고 그것만 하고 있습니다.
스톱 돼버린다는 겁니다 수행이. 마음이 이미 게으름을 부리기 시작을 한 겁니다.
실제 일어난 것은 기쁨의 현상이 있고 그걸 느낌으로 알았는데, 근데 그건 실재하는 것인데, 그걸 다시 자신이 생각으로 ‘어, 기쁘네’ 개념화 시켜버린다는 거라.
개념화시켜 버리니까 실재하는 기쁨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이미 '기쁘다'는 개념에 딱 싸여버립니다.
그럼 기쁨이 증장되든지 뭐 변하든지는 하겠지만, 그거는 자기가 만든 겁니다.
그러면서 본인은 그 기쁨의 현상에 그냥 그대로 있습니다. 그때부터는 호흡은 없습니다.
그러면서 본인은 '수행해서 사띠를 놓치지 않고 기쁨을 계속 관찰하고 있다'고 착각을 하게 됩니다. '잘 수행했다'고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실제로는 마음은 게으름 부리고 있다는 겁니다.
개념을 붙여야 될 때는 명칭을 사용해가지고 그 대상을 분명하게 붙잡아두고 집중하기 위해서 명칭이 필요한 것이지,
실재하는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을 때는 거기에 명칭을 붙여서 붙잡고 있어야 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 대상들도 무상·고·무아의 현상일 뿐입니다.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변하는 것들을 그냥 따라가면 됩니다. 근데 그냥 그대로 붙잡고 있는 거라.
마음은 본인이 초선정에 들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놔놓고, 게으름을 부리면서 초선정에 들지 못하고, 그냥 그대로 그냥 '수행 잘했다'는 생각에 얽매여 버리게 됩니다.
삼매에 들고 선정에 빠지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게 아닙니다.
실제로는 아주 간단한 것들입니다. 마음이 조그만한 집중만 있어도 금방 5가지 선정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은 여러분이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아까 5초간 해라고 했죠?
대상이 있는 걸 분명히 알아차렸죠! 대상에서 떨어지지 않았죠! 그럼 위딱가(vitakka)는 존재를 하는 겁니다.
그 다섯 가지가 그대로 그냥 들이쉬면 들이쉰다고 알아차리고, 내쉬면 내쉰다고 알아차리고, 그게 다르다는 걸 알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은 그건 위짜라(vicāra)가 그냥 있는 겁니다.
그 두 개만 5초만 해버리고 나면 반드시 일어나는 것이 삐띠(pīti) 현상들입니다.
사마타로 빠져서 그 느낌을 관찰하는 것이 아닐 것 같으면은 그냥 들이쉬고 내쉬고만 알아차린다고 하면 당연히 니밋따(nimitta)는 또 일어나집니다.
삐띠가 일어나지면 마음은 기쁨을 받아들이면 행복해집니다.(sukha)
그럼 그 대상에 오롯하게 마음이 가 있습니다. 5초 동안에는.
그럼 마음은 그냥 평안합니다. 빳삿디(passaddhi)가 그냥 그대로 일어나게 됩니다.
초선정에서 일어나는 건 이겁니다. 그냥 단순합니다.
그 간단한 걸 왜 그렇게 어렵게 자꾸 생각들을 하느냐는 거라.
단지 내가 집중하는 힘이 강하다고 할 것 같으면 그 힘들로 인해서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 들이쉬는 게 한 번에 들이쉬는 것이 아니고 몇 번 걸쳐서 들이쉬는 게 보여지는 거고, 내쉬는 게 몇 번에 걸쳐서 내쉬는 게 보여지는 거 뿐이고, 집중하는 힘이 아직 약하다 할 것 같으면 한 번 들이쉬더라도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아차리면 집중하고 있는 겁니다 대상에.
그래서 머릿속에 개념이 많이 생기고 생각하는 것들이 많이 생기면 초선정에서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현상들입니다.
위빳나수행에서는 삼마사나냐나(sammasana ñāṇa)라고 그럽니다.
‘어, 내가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있네’ 하고 머릿속으로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지혜가 일어난다는 거라. ‘어, 대상에서 5초 동안 관찰하고 사띠하니까 이리 기쁘네’ 하는 마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게 '삼마사나냐나'입니다.
여러분이 수행에서 충분히 경험했던 것들인데 그걸 자꾸 놓칩니다.
5초 했으면 그다음에 10초 할라고 하고 그다음에 15초 할라고 하면 됩니다. 수행은 그렇게 점진적으로 조금씩 시간이 늘어나는 것이지. 한 번에 쭉 늘어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단지 여기서 조금 더 수행을 더 나은 지혜로 나아가려고 할 것 같으면 '집중하는 힘'을 키워야 됩니다. 숙련되면은 집중하는 힘은 점점 커집니다. 5초에서 10초로 바뀌고 20초로 바뀌면 집중하는 힘은 그마만큼 커져 있습니다.
그럼 자연스럽게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 호흡이 빠르게 변하는 것이 보입니다.
변하는 것이 보이면은 그냥 그대로 따라가면 됩니다.
변하는 것이 보이는 것에 따라서 또 여러 가지 현상들이 일어나지만, 그냥 그것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뿐입니다. 그럼 그거 관찰하면 그거 그냥 사라집니다.
그럼 다시 또 호흡으로 돌아오면 돼.
대상이 많아지는 것뿐이지, 집중하는 힘이 흐트러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근데 대상이 바뀌면은 대부분은 보면 집중하는 힘이 급격하게 탁 줄어드는 것들을 많이 봅니다. 특히 새로운 대상들을 봤을 때, 새로운 현상들이 일어났을 때 마음이 놀래거나 아니면 마음이 그것을 피하려고 하는 두려워하는 마음들이 일어나는 수가 있습니다.
근데 그것도 '수행상에서 반드시 일어나는 현상들일 뿐'입니다.
단지 두려움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두려움이 일어났네' 하고만 알아차리고, 두려움이 사라지는 걸 보면 됩니다.
근데 두려움이 일어났으면 두려움이 사라지는 걸 볼려고 안 하고 두려움에 그냥 휩싸여 버리게 됩니다. 무섭다는 생각이 딱 들어와 버리면 그게 이제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개념화시켜서 그게 '공포'로 바뀌어 버리게 되고, 그러면 두려운 걸 관찰하지도 못하고 호흡을 관찰하지도 못하고 대상 자체를 놓쳐버리고, 그냥 그 공포에 갇혀 있다가, 그냥 화들짝 놀랍니다.
이미 개념화돼 버리면 수행은 거기서 스톱이 돼버린다 하는 겁니다.
어떠한 현상이 일어나든지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습관들을 자꾸 가지도록 하시면 됩니다.
수행은 얼마만큼 사띠하는 시간을 늘리느냐의 차이지, 사띠를 못할 수 있는 상황은 여러분들에게는 없다는 거라. 어렵게 수행을 자꾸 생각을 하지 말고 '지금 바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다' 하고 마음을 먹으면 됩니다.
짧은 찰나라도 좋으니까 자꾸 하는 훈련들을 하도록 하고.
그리고 하나 또 명심해야 되는 것은
수행의 시작은 장애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망상이 일어나든 통증이 일어나든 이런 여러 가지 장애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거 그냥 사라지지 않아도 관계가 없어요. 눌러버리고 호흡을 관찰할 수 있는 힘이 생기면 이미 그 사람은 수행을 열심히 잘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근데 이런 것이 많아지면은 마음은 산란해지고, 바빠질 수는 있어도 수행을 못하는 상태는 또 아닙니다. 그냥 그거 그대로 그냥 관찰을 하면 됩니다.
사라지지 않더라도 편안하게 그냥 '지가 때 되면 사라지겠지' 하고 마음 먹으면 언젠가는 또 사라집니다. 그럼 다시 호흡으로 돌아오면 됩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그런데 이런 장애들이 게름 부리는 마음이 일어나든, 뭘 하든, 잠이 오는 마음이 일어나든, 어쨌든 그것을 대상으로서만 생각하면 됩니다.
호흡과 마찬가지로. 호흡도 대상이고 그것도 대상이라고 생각하고, 그것들은 수행에서는 반드시 일어나는 것들이다 생각하고, 그냥 관찰을 하면 됩니다.
그래서 그게 또 일어나겠지만, 나한테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상태가 됐다고 하면, 이미 그 사람은 선정수행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쭉 그냥 계속 수행을 해나가면 됩니다.
근데 그게 강해서 조금만 수행할 것 같으면 잠에 폭 떨어진다든지, 망상을 부린다든지, 몸이 괴로워서 못 견디겠다 할 것 같으면 그거는 위빳사나 수행을 바로 하면 안 됩니다.
그런 분들은 집중하는 힘들을 자꾸 키우는 수행을 하는 게 좋습니다.
그래서 그런 거는 「파욱」 같은 방법을 써가지고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만 관찰해서 니밋따가 일어나서, 그것으로 인해 가지고 다섯 가지 장애들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만들어야 됩니다.
단지 선정에 들었다고 하더라도 '선정에서 깨어날 때는 반드시 몸과 마음이 관찰 대상이다' 하는 것들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그 부분만 유념할 것 같으면 어떤 수행을 하든지 수행은 금방 향상될 수 있다는 것들을 잊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시간적인 여유 때문에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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