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25 일상수행법문

알아차리면, 사띠가 있으면 가벼워져야 됩니다. (20250517)

담마마-마까 2025. 5. 18. 14:16

https://youtu.be/yw1BoP7-3fc?si=Bz17Y3AsGppOqhYs

 

* 알아차리면, 사띠가 있으면 가벼워져야 됩니다. (20250517)

 

수행하는 부분에 대해서 조금 안 되는 부분들, 우리 선원 식구 중에서 안 되는 부분들에 대한 얘기를 잠깐 좀 하겠습니다. 전에 누가 와서 경행을 하는데 알아차림은 있는 것 같은데, '되게 무겁다'는 얘기를 많이 해요.

 

알아차리면, 사띠가 있으면 가벼워져야 됩니다. 명료해져야 되고. 그 대상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래서 마음은 더욱더 활동적으로 돼야 되는데, '무겁고 둔하다'는 것은 사띠가 약하고 집중하는 힘이 강하든지, 또는 사띠가 약하고 생각이 많아지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생각이 많은 거 하고 집중하는 것은 비슷한 성향을 지닙니다. 무거울 수밖에 없고, 하나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그래서 둔해지고, 그리고 선택을 자꾸 하려고 합니다. 발이 나아가면 발만 볼려고 하지 다른 것들은 신경을 안 씁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있는데, 한번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스톱 모션'이라고 혹시 들어봤어요? 발을 들어 올리고 멈춰야만이 나아가지죠. 나아가지는 것도 멈춰야만이 내려놓아 집니다.

멈추는 걸 알아차리면 어떻게 될까? 뭘 알 수가 있을까?

 

나아가려고 뭔가 행하려고 하는 에너지들이 되게 강한 걸 느낍니다. 나아가는 걸 가다가 탁 멈추면 빨리 내려놓고 싶어서 죽겠어. 그래서 그 에너지들이 있다는 걸 분명하게 느낄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들어 올리고 멈추고 나아갈 때도, 멈출 때도 마찬가집니다. 뭔가 움직이려고 하는 에너지 이것들을 강하게 느낍니다.

왜 움직이려고 하죠? 왜 움직이려고 그래요?

 

분명히 움직이려고 하는 그런 의도는 알아차리죠? 멈췄을 때.

근데 그 의도는 어디서 일어나는 거라? 왜 움직임이 일어나는 거라? 가만히 있으면 괴롭기 때문에 그런 거라. 가만히 있으면 괴로움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나라고 하는 것이 있어가지고 나아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멈춰 있으면 괴롭기 때문에' 나아가려고 한다는 거라.

 

그런데 멈추는 훈련들을 해도 사띠가 되게 강해집니다.

그래서 발을 떼서 나아가고 내려놓고 할 때 되게 무거워진다 할 것 같으면 일단 딱 멈춰보라고. 멈추고 나서 뭐가 일어나는지를 한번 보라고.

마음에 뭔가 하려는 의도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게 보입니다.
그냥 그거 사띠해! 가볍게라도! 그렇게 움직일려고 하고 하는 것들이 일어나는 것들을 알아차리는 것이 설혹 그게 괴로움으로 인해서 원인이 돼서 이렇게 움직이려고 한다는 걸 모른다 하더라도 마음이 끊임없이 뭔가를 갖다가 하려고 하는 것들이 보이면은 그거 그냥 가볍게 알아차리고 ‘응, 마음이 알아차리고 있구나’

 

하나 더, 괴롭기 때문에 움직이려고 하는데, 만약에 마음이 선한 마음이 지속적으로 일어나 있다. 그래서 자애의 마음이 일어나든지 집착하는 것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그 마음은 어떨까? 똑같이 생각이나 망상이나 아니면 집중하는 힘이 강했을 때처럼 그렇게 무거울까? 절대 안 그렇습니다!

자애수행을 하면 되게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또는 ‘아이, 이거 뭐 집착할 거 별로 없는데’ 하는 마음이 들고, 또 화를 내는 마음들이 싹 사라지는 것들이 보이면은 마음은 되게 가볍습니다.

 

근데 그렇지 못하고 무겁다 할 것 같으면 반대인 거죠.

뭔가를 하려고 하고 있다는 거라.

발을 들어 올리고 나아가고 내려오고 할 때 자꾸 하려고 하는 마음이 앞선다는 거라.

'걸을려고 하는 마음'이 딱 앞서버리면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마음도 무거울 뿐 아니라 몸도 무거워집니다.
그래서 호흡하는 것도 느려지고 아니면 호흡이 아주 그냥 멈추는 경우도 되고.

 

그렇게 무겁다고 할 때 탁 멈춰서가지고 호흡을 보면 호흡이 굉장히 부자연스러운 걸 느낍니다.

왜 걸어갈 때 왜 그렇게 하려고 그래?

집중하는 힘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띠에서 가장 경계해야 되는 것이 생각이 들어가서 뭔가를 하려고 하는 마음- 탐·진·치가 들어가는 것이 가장 경계해야 되는 건데, 탐진치로 인해서 자꾸 수행을 하려는 마음이 강해지는 거라.

 

그럴 때는 반드시 '서서 호흡을 관찰하라'고.

그래서 그때의 호흡이 느려져 있다든지 아니면 호흡이 부자연스럽게 맥박이 많이 뛴다든지 할 것 같으면 인위적으로 뭔가를 하려는 마음이 강해 있던 거라. 거기서. 그럼 다시 호흡을 가지런히 하고 편안하게 하고 나서, 다시 멈춰 있는 상태를 보고, 그리고 나서 할려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들을 보고, 발을 떼어 놓도록 자꾸 연습을 해보라고.

 

그다음에 스님이 항상 얘기하는 게 '천천히 하라' '슬로우 모션'

조금 전에 탁발공양 올릴 때 한번 봤거든요. 공양 올리면서 사띠를 면밀하게 하면서 공양 올리고 뭐 삼배 드릴 분은 삼배 드리고 갈 때 분명히 알아차리면서 간 사람 있어요?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스님이 여기 실눈을 뜨고 있어도 다 보거든요. 물론 마음속으로 '행복이 가득하기를' '이러한 공덕으로 인해서 빨리 깨달음에 이르기를' 하는 그런 마음을 내지만 여러분들의 행동을 보면 이게 일상화되어 있는 게 보입니다.

 

천천히 하는 것, 가장 하기 좋은 게 '좌선을 했다가 일어날 때' 일어나는 거 제발 면밀하게 알아차리면서 일어나요. 천천히 하면서 슬로우 모션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 가장 좋은 게 좌선했다가 일어나서 경행하기 전에 그 짧은 순간, 경행했다가 다시 돌아가서 좌선하는 그 짧은 순간, 얼마나 좋은 대상이라. 천천히 하면서 알아차릴 수 있는.

그런데 그걸 자꾸 사람들이 놓쳐버립니다. 좌선할 땐 열심히 하죠. 경행할 땐 열심히 하죠. 그런데 그 사이가 깨져 버리면 일상하고 자꾸 분리되어 버리는 거라.

 

좌선해가지고 여러분 깨달을 것 같아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야구 선수들이 본 경기에 들어가기 전에 해야 되는 게 타자면 스윙 연습, 투수면 공 던지는 연습들을 합니다. 여러분 좌선·경행은 그와 같습니다. 본 경기에 들어가기 전에 몸을 푸는 거 하고 같습니다. 어떻게 내가 공을 던지고 어떻게 볼을 칠 것인지를 갖다가 탐구하는 겁니다. 실제 경기는 아직 이루어지지도 않았어요. 실제 경기에 들어가면 변수들이 참 많이 일어나집니다.

 

거기에 맞게끔 대처들을 해야 되는데, 그 본 경기는 여러분 일상생활입니다.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요?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끊임없이 일어나지는데, 거기에 대해서 대처하는 것들은 어떻게 다 할 건데? 천천히 하는 훈련들을 하지 않으면 일상생활에서 그것들을 다 대처 못합니다.

 

조금 전에도 꽃을 가져왔는데 물이 있어서 물이 탁 쏟아졌어요. 물을 맞은 것은 스님인데 놀라는 거는 왜 여러분들이 놀라요? 스님이 ‘아야 아야 하고 왜 이리 물이 흘러’ 이렇게 해야 되는 거 아니라? 내가 맞았는데. 근데 스님은 아무 소리 안 하고 그냥 보고 있는데, 여러분들이 왜 놀라느냐는 거라. 외부적인 요인에도 그렇게 놀라는데, 자기한테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에 어떻게 대처할려고 그러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제발 천천히 하라!

 

경행을 천천히 하고, 좌선을 할 때 호흡을 천천히 하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좌선과 경행의 사이에 앉고 일어나고 할 때 그 부분을 면밀하게 알아차리라는 게 '천천히 하라'는 겁니다.
모든 동작을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알아차리도록 자꾸 하라는 겁니다.

 

이렇게 하는 데는 일상생활에서 수행하고 연결시키기 위한 것들이 첫 번째인 거고, 두 번째는 일상생활 할 때 각각 여러 가지 장애들이 일어나듯이 수행에도 참 많은 장애들이 일어납니다. 졸음이 오든지, 게으름을 부리려고 하든지, 화가 일어나든지, 통증으로 인해서 못 견디든지, 각각의 현상들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게 일어나 있는 상황에서는 수행이 안 됩니다. 그걸 극복을 해야만이 수행이 시작이 되는 겁니다.

 

혹시 여러분들 일상생활 하면서 팔을 이렇게 뻗을 때 아주 깨끗하게 선명하게 팔을 착 뻗는 걸 본 적이 있어요? 가끔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생활할 때 사띠를 놓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실제 그게 지금 수행하고 있는 겁니다. 그럼 아주 기분도 상쾌해지고, 있는 그대로 그냥 알아차립니다.
'내 팔'이라는 생각도 전혀 일어나지도 않고, 그냥 팔이 뻗어지면 뻗어진다고만 분명히 알아차립니다. 들리면 들린다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그게 싫은 소리인지 좋은 소리인지 그거 전혀 신경 쓰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상생활에서는 감각기관에 대한 것들을 알아차리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모든 감각기관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그냥 그대로 알아차리는 때가 있습니다. 그럼 아주 시원하고 있는 그대로 보여집니다. 마음도 깨끗해지고.

장애가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게 가능한 겁니다.

 

일상 수행할 때도 좌선하고 할 때 장애가 없으면 꼭 그와 같은 마음이 일어납니다.

마음에 부드럽고 선한 것들이 쫙 퍼지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대상을 대상이 있는 그대로 그냥 알아차릴 수가 있게끔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수행에서 일어나는 장애들을 극복해야만이 마음이 선한 마음을 지속해 나갈 수 있고 수행을 올바르게 해나갈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 마음이 지속되면은 뭘 하더라도 마음에서 미운 마음보다는 자애로운 마음이 먼저 일어나게 되고, 뭘 하나를 대상을 보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욕심보다는 그냥 무덤덤하게 그냥 욕심 없이 그냥 보게끔 됩니다.

이게 마음이 탁 변화된 것들이 일어나는 때가 있습니다. '이때가 이제는 본격적으로 수행이 시작이 되는 때다' 하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수행에서 물론 대상을 끊임없이 알아차리는데 집중하는 힘이 없으면 안 되기 때문에 집중력을 키우는 것도 좋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꾸 집중하다 보니까 대상이 너무 많아질 때가 있습니다.

 

분명히 사띠를 해서 호흡을 관찰하고 있는데, 호흡 대상이 너무 많아.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집중하는 힘을 낮춰야 됩니다.

그냥 사띠를 오히려 그대로 유지하고 집중하는 힘을 탁 낮추면은, 대상은 분명하게 많은 거는 틀림없는데 그게 부담스럽지가 않는 거라. 대상 자체가.

그냥 흘러가는 대로 보게 됩니다. 설혹 사라지는 것만 보여도 별 신경 안 써. 또는 일어났다가 언제 사라지는지도 모르게 그냥 사라지더라도 그냥 그대로 그냥 보게 되는 거라. 집중하는 힘과 사띠가 딱 균형이 맞아지면 그렇게 돼버립니다.

 

지금 현재 나의 사띠의 힘에 인해서 그렇게밖에 안 보이는데 그걸 '어, 스님이 일어났으면 사라지는 걸 갖다 끝까지 보라 했다' 한 곳에서 일어났는데 한 곳에서 사라지니까 그것만 이렇게 탁 쳐다보고 있습니다. 대상은 분명히 많아지는데 뒤죽박죽이 돼버립니다.

사띠도 있고 대상도 많아지고 집중하는 힘들도 있는데, 마음은 오히려 고요하고 가벼워지지 않고 그냥 무거워지는 거라. 계속 대상이 안 변하고 또 있게 되고. 이게 빨리 변해서 사라져야만 다음 대상을 볼 수 있는데 안 변하는 거라.
지가 그걸 붙잡고 있으니까 안 변하는 거지.

 

그래서 수행을 하다가 대상이 많아지고 할 것 같으면은, 사띠는 그대로 유지를 하더라도 집중하는 것들을 약하게 조금 해보십시오.

그러면 대상들을 지금 현재 사띠의 힘으로 인해서 보게 됩니다.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봐야 되는 것이지, 인위적으로 붙잡아서 그걸 보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나'가 보는 것이지 대상이 보여지는 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마한나와하고 스님하고 거리가 이 정도 떨어져 있다.

'나'라고 하는 것이 개입돼 있으면 요렇게 떨어져 있는 것을 압니다. 근데 나라고 하는 것이 개입되지 않으면은 그냥 내 마음의 저기 마한나와에 가 있습니다. 내 마음에는 생각도 일어나지 않고 그냥 마한나와를 본다는 거라. 그냥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 거라. 근데 개념화시키고 너와 나라는 것들이 자꾸 개입이 되면 요만큼 떨어져 있다 하는 걸 알게 되는 거고, 대상의 형태를 자꾸 보게 되는 거고.


수행을 너무 대상을 ‘이건 내가 분명히 사띠하겠다’는 생각을 자꾸 가지고 하려고 하지 말고, 조금 더 편안하게 한번 해보십시오.

대상은 내가 사띠를 하고 있든 안 하고 있든 자연적인 법칙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게 돼있습니다. 그냥 여러분들이 그 사실을 ‘아, 그렇구나’ 하고 알면 됩니다. 여러분들이 모른다 해가지고 자연적인 성품들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 멈추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자기들은 자기들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내가 그냥 그것들을 알아간다고 생각을 하고 대상들을 관찰할려고 해야 되고, 수행은 어떠한 경우든지 수행이 무르익을려면은 좌선하고 경행하는 것에만 마음을 두고 일상생활을 놓쳐서는 절대 안 됩니다.

 

일상생활 한 곳이라도 그 부분은 반드시 사띠를 지닌 채 행할 수 있도록 자꾸 해야만이 장애 없이 대상들을 있는 그대로 보게끔 됩니다.

 

'무상·고·무아라고 하는 성품들은 장애가 사라졌을 때 보여진다'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