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칠각지, 칠청정 법문

열반에 이르는 7청정(七淸淨)의 로드맵(1부)-계청정(2025.03.22) 아짠 빤냐와로 - 21세기불교포럼 법문

담마마-마까 2025. 5. 23. 16:38

https://youtu.be/ixdnrumAVgM?si=roD7_omn9FUIttsw

 

* 열반에 이르는 7청정(七淸淨)의 로드맵(1부)-계청정(2025.03.22) 아짠 빤냐와로

 

오랜만이죠. 올해 법문할 내용은 칠청정에 대한 건데 전에 한번 했죠? 칠청정. 그래서 프린트물은 제가 손 볼 게 없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그냥 나갈 겁니다. 그 대신에 법문하는 형식은 조금 다르게 해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재가자죠? 불자들이죠? (예)

불자들은 뭘 해야 될까?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까.

(수행자 대답 : 바른 생계)

바른 생계? 뭐 바른 생계는 불자가 아니라도 바르게 살아가야 되지.

(수행자 대답 : 오계를 잘 지키는 것이...)

오계를 잘 지키는 것, 칠청정 맨 처음이 계청정이라니까 그 얘기만 나오네.

근데 경전들은 공부들을 했을 거니까 쉽게 좀 얘기를 할게요.

 

일단 재가 불자일 것 같으면 기본적으로 해야 되는 거는 '삼보에 대한 믿음'들을 가지도록 해야 되는 것은 기본입니다.

그게 밑바탕이 되지 않으면 뭐 계청정이 어떻고, 뭐 보시가 어떻고, 뭐 이런 것들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사실은 삼보에 대한 믿음들은 자꾸 확고하게 다지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뭐로 가지고 삼보에 대한 믿음들이 확립이 될까?

부처님 외에는 따라갈 사람 없다는 거 확신해요? (예) 모르지 그거야. 언제 바뀔지 어떻게 아나? 그리고 법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고, 부처님을 따르는 제자들인 상가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제자들을 볼 때 부처님같이 볼 수가 있어야 되는데, 어떤 면에서는 스님들이 부처님과 같은 모습들은 보여주지 못하는 것들이 있어서 그게 여러분들한테는 죄스러울 뿐입니다. 그래도 다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짬지게 부처님같이 살아가는 스님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삼보에 믿음들을 어느 정도 가지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가장 좋은 거는 자기 스스로 '확신'이 들어야 됩니다. 뭐로 가지고 가능할까요?
확신이 들려면 경전 많이 공부하면 될까? 아니면 계를 잘 지키면 될까? 보시 많이 하면 될까? 아니면 경전에 부처님이 잘 살아갈 것 같으면 천상에 태어난다고 하니까 그래서 부처님을 믿을 수 있을까? 그건 아니죠?

부처님이 깨달은 법을 내가 이해를 하고, 그것이 ‘아, 내가 따라가야 될 길이구나’ 하는 확신이 들고 나면 다른 길들을 보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아, 부처님이 이렇게 위대하신 분이구나’ 하는 걸 이해를 하게끔 되면 '확신'이 드는 거죠. 그래서 그때는 누가 뭐라 하더라도 구애하지 않고 그냥 쭉 자기 길을 가게 됩니다.

 

그래서 삼보에 대한 믿음들이 확립이 된다 할 것 같으면, 사실은 그 부분은 삼보의 확립에서 가장 많이 치중하고 있는 게 '보시와 지계' 부분입니다. 이거는 양날개와 같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계를 잘 지키는 사람들은 남에게 베푸는 것도 잘하게 되고, 또 남에게 베푸는 것을 잘 못하는 사람은 계를 지키는 것도 잘 못하게 되는 경우들이 허다합니다. 그래서 양날개와 같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삼보에 대한 확신들이 점점 들면 들수록 이것들은 순차적으로 따라오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경에서는 "수다원에 이르기 위해서 네 가지가 필요하다", 어떤 경에서는 "수다원에 이르기 위해서 세 가지가 필요하다" 하고 얘기합니다.

근데 사실은 똑같은 얘기입니다. 세 가지라고 하는 '불법승 삼보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게 되면 될수록 '계'를 지키고 하는 것은 자동적으로 따라오게끔 되는 거지, 계를 지키지 않으면서 삼보에 대한 확립이 될 수는 없는 거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삼보에 대한 확신이 들면 들수록 이제 그분은 나쁜 짓 안 하겠지 뭐. 잘 살아가겠지.

그러다 보니까 ‘아, 그래도 내가 이 생에서 참 잘 살았구나’ 하는 마음이 들게 되고, 또 만약에 윤회가 있다면 윤회하더라도 ‘나는 적어도 나쁜 곳에는 안 태어나겠구나’ 하는 그런 마음들이 들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또 다른 경전에서는 "재가자들이 실천해야 되는 것이 적어도 이 세 가지는 실천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보시, 지계, 선정' 그러죠. '수행'입니다. 수행. 이 세 가지를 같이 할 수가 있어야만 적어도 '재가 불자'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등한시 자꾸 해서는 안 됩니다.

이 세 가지는 기본적으로 여러분들이 갖춰나가야 되는 부분들입니다.

 

근데 스님이 이번에 법문할 내용은 그 칠청정이 무엇에 필요한 겁니까? 청정에 필요하다고? 아까 열반에 이르기 위한 것,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 필요한 게 일곱 가지 계단이다"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면 재가자라 하더라도 열반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잖아.

 

그래서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것 말고 뭐가 더 필요할까? 그러면.

한번 머릿속에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그 경전 상식들을 한번 잘 생각해 봐요. 뭐가 평상시에도 좀 더 필요하겠어요? 보시와 지계와 그다음에 마음을 청정해야 하는 것들은 어느 정도 조금 돼 나간다고 칩시다. 그럼 뭐가 더 필요할까?

마음이 청정해지고 나면 뭐가 될까? 남에게 마음을 내는 것이든 자기 자신에게 마음을 내는 것이든 자비의 마음을 항상 지니게끔, 그래서 더욱더 자비를 갈고 닦아야 되는 거죠. 그래서 그다음에 필요한 것이 '자비'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근데 아직은 여러분들이 삼보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게 된 상태는 아닙니다. 예류과에 이르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면 이걸 조금 더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는 뭐가 더 필요할까? 그래서 '불수념'이라 해서 쉽게 말하면 여러분들 염불하는 것! 부처님 명호를 외우면서 부처님에 대해서 떠올리고 부처님에 대해서 더욱더 믿음이 강하게 되도록 만드는 것, 그걸 이제 '불수념(佛隨念)'이라고 그럽니다. 물론 이 테라와다 불교에서 하는 불수념하고 여러분들이 하는 불수념하고 틀리기는 합니다. 그래도 뭐 근본적인 취지는 같습니다. 그런 부처님의 명호를 자꾸 외우면서 나쁜 마음에 물들지 않게끔 자꾸 방호를 해나가는 형태들을 띠게 됩니다.

 

그래서 자비 수행도 하고 불수념도 하고 있는 상태가 된다 그러면, 이분은 일단은 수행을 하고 있는 상태가 되는 거죠.

수행은 갈고 닦고 습관 지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얼마나 많이 하느냐에 따라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틀려집니다. 그래서 쉽게 외부적인 탐·진·치에 물드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그것을 방어를 해나갑니다. 그래서 그 물들지 않게끔 스스로 조절하는 능력이 생겨나가게 되는 거죠.

 

그러고 나면 뭘 또 해야 될까? 그 정도는 여러분들이 충분히 할 수 있는 건데, 그다음에 하기 어려운 게 뭐가 있을까?
사실은 불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무상··무아'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무상·고·무아를 왜 알아야 될까? 물론 해탈열반에 이르기 위한 겁니다. 무상·고·무아를 안다 해가지고 해탈열반에 바로 이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문에는 일단 들어서게끔은 됩니다. 그 얘기는 뭐냐면 일단은 본인이 뭘 집착하고 있고, 어떤 번뇌들이 많이 일어난다 하는 걸 갖다가 알고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단편적인 예를 들면 만약에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그러면 욕심이 일어나는 것들을 이렇게 보면 욕심이 일어난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싹 사라지는 게 보이거든요. ‘어, 신기하다’ 하게 됩니다. 그냥 일어난 자리에서 그대로 일어났다가 그것을 계속 보고 있으니까 그 욕심이 사르르 사라지는 게 보여요. 그러면 그다음에는 똑같은 욕심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에 크게 구애받지를 않습니다. ‘저것도 일어났다 사라지겠지’ 하고 마음을 먹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그 부분에 대한 욕심은 어느 정도는 내가 잠재울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하는 뜻입니다.

무상·고·무아를 본다고 하는 것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선하지 않은 것들이 뭐가 있고, 그리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 것들이 뭐가 있느냐'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안다는 뜻입니다.

 

출가한 스님들은 단편적인 예로 성적인 관계를 만약에 가지게 된다, 그러면 그 사람은 비구의 자격을 박탈당해버리게 됩니다. 근데 이제 가끔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성적인 관계를 가졌지만 집착하지 않았다. 또 성적인 관계를 가졌지만은 그것으로 인해 가지고 내 수행이 망가지진 않았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거 맞는 말일까요? (수행자 대답 : 아니죠) 그렇죠.

그래서 비구 계율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네 가지 바라이죄를 지을 것 같으면 바로 출송시켜버리지, 그걸 다시 또 거둬들이고 하는 법은 없습니다. 욕구, 성적인 욕망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에서 성적인 행위가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성적인 욕망이 없이 어찌 행위가 일어날 수 있느냐는 거예요.

 

여러분이 가고자 하는 마음이 없이 걸어갈 수 있습니까? 못 걸어갑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내가 걸어갈 수 있는 겁니다. 아무리 맛있는 걸 주더라도 먹기 싫으면은, 먹고 싶은 마음이 안 일어나면 안 먹습니다. 그런데 그런 욕구가 탁 떨어진 것을 봤다. 그러면 '다시는 나는 이것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래서 무상·고·무아를 보라고 하는 거는 뭐냐면 그것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들을 분명하게 보고, 그리고 일어나고서 사라질 때까지 그 현상들이 너무나 고통스럽다 하고, 그리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데 지가 스스로 일어나서 스스로 사라지는 게 아니고 원인에 의해서 일어났다가 원인에 의해서 사라지는 것이 보이는 것이지 내가 그걸 사라지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되면은 그냥 그 부분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이 딱 떨어집니다. 간단한 예를 들면.

 

적어도 그렇게만 해나가면은 그래도 이생에 재가자로 살아가면서 그래도 부처님 말씀대로 잘 살아가는구나 하고 얘기를 들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더욱더 노력하면은 부처님의 성스러운 제자들이 걸어갔던 길들을 나도 걸어가는 것들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성스러운 제자들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은 부처님이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 그 길이 맞다고 판단하고 또 그 길을 실천하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그러한 사실을 알면 알수록 점점 더 나는 삼보에 대한 믿음들이 더욱더 확고해집니다. 본인이 실천하면 할수록 삼보에 대한 믿음들은 더욱더 확고해지고, 그리고 내가 행해야 될 것과 행하지 말아야 되는 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구분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행해야 될 것은 계속 행해나가서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도와 과에 이르도록 만들게 되는 거고, 행하지 말아야 되는 것은 다시 일어나지 않게끔 그 뿌리를 봐서 그 번뇌라고 하는 것들이 끊어지는 현상을 보기 때문에, 행하지 말아야 되는 건 다시 안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게끔 된다는 겁니다.

 

스님이 어디든 법문을 청하면 가서 법문을 하고 오는데 일찍 가는 법도 없습니다. 그리고 마치고 나서도 그냥 스님이 스님 갈 길 그냥 가버립니다.
내가 해야 되는 거는 일찍 가서 잡담하고 떠들고 노는 것이 아니고, 마치고 나서 사람들과 어울려가지고 기분 좋게 여러분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일이 아니라는 거라. 그냥 스님 할 일은 부처님 법을 전하기 위해 왔으면 부처님 법을 전하면 되는 거라.

 

여러분은 여러분들이 하지 말아야 되는 거 안 하고 있습니까?

사회를 살다 보면 그게 참 힘들죠? 어쩔 수 없이 끄달려 들어가고, 그런데 본인이 스스로 그것은 알아야 됩니다. 이것은 '내가 행해야 되는 것과 행하지 말아야 되는 것들을 분명하게 구분'을 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러려고 할 것 같으면 적어도 수행을 어느 정도 좀 하고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것들도 공부를 좀 많이 해가지고 분명하게 구분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휩쓸려 들어가 버립니다.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 안 해봤죠?

(수행자 대답 : 해봤죠.) 해봤습니까?

 

그런데 시간이 아깝다고 알 것 같으면 적어도 지금 현재 일어나는 현상들을 놓치려고는 하지를 않습니다.

지금 여러분들한테 스님 목소리가 들리죠? 어느 정도의 찰나에 스님 목소리를 알아듣게 됩니까? 1초간에 그 소리가 들립니까? 아니면 아주 찰나 순간에 들립니까? 사람마다 차이가 날 겁니다.

1시간이 다 지나도 스님 말씀을 이해할려고 하는 것이 안 된다 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 또 찰나찰나에 들리는 것이 그냥 그 들리는 것이 그냥 파장으로 파동으로만 들려서 그것이 귀에 와서 부딪치는 파동으로써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그것이 부딪쳤다가 사라지고 부딪쳤다 사라지고 하는 것이 찰나찰나에 1초에 수십 번 그렇게 부딪치는 것들로 들리는 사람들도 있을 거고, 각각 다 틀릴 겁니다.

 

그런데 이게 해야 될 것과 하지 말아야 될 것들을 구분을 할 수 있게 되면 적어도 그 시간이 줄어듭니다. 왜? 아깝거든 시간이. 내가 지금 집중하고 있는 이 시간 이 순간이 그냥 헛되이 보내기에는 아까운 시간이 되는 거라. 하지 말아야 될 것은 안 하게 되니까, 당연히 해야 되는 건 해야 되는데 뭘 하느냐는 거라.

이미 마음속에는 자애의 마음이나, 그리고 부처님에 대한 것들도 확고하게 어느 정도 자리 잡고, 선한 마음들도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고, 그런 상태이기 때문에 마음은 어떠한 경우든지 그 찰나찰나의 무상·고·무아에 집중을 하게끔 된다는 거라.

그렇게 되면 무상·고·무아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를 하게 됩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납니다. 너무 기분이 좋기 때문에 마음이 행복하고 기쁘고 하는 현상들도 일어날 수가 있을 거고, 대상을 알아차리고 있는 게 너무나 좋기 때문에 그 속에 빠져서 선정에 든 것처럼 그렇게 느껴지기도 할 거고, 부처님이 확 나타나 가지고 빛을 이렇게 비추는 경우도 있을 거고.

그런데 하지 말아야 되는 것들이거든. 그런 것들이. 그 하지 말아야 되는 것들을 분명하게 구분을 못하면 거기에 그냥 휩쓸려버리는 거라.

그러면 순간순간에 알아차려지는 것이 아니라 그때부터는 그냥 1초에 한 번씩 알아차리게 됩니다. 1초 알아차리고, 1초 알아차리고, 1초 알아차리고. 그러면 어떻게 돼요?

 

대상은 일어나고 사라지고는 하는데 변하지 않는 상태, 마음은 깨끗한 것처럼 보이는데 그냥 그 대상이 변하는 것이 안 보여. 빠르게 사라지는 것들이 보이긴 하는데, 마음은 그냥 그 빠르게 사라지는 것으로 인해서 기쁨이 일어나는 게 아니고, 무덤덤한 상태가 돼버리는 거라. 하지 말아야 되는 것들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라.

여러 가지 현상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하지 말아야 될 것들이라는 거라. 그걸 분명히 구분을 하게 되는 거라.

 

"지금 내가 해야 되는 거는 순간 순간에 사띠하는 것뿐이다" 하는 것들이 분명해지면 그 현상 자체가 빠르게 사라지는 게 보여버립니다. 그리고 다시는 안 나타납니다.

마음은 더욱더 노력하는 힘들이 커지게 되고, 그래서 게으름 부리려고 하는 마음이 안 일어납니다. 그냥 대충 대상을 보고 대충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미친 듯이 살아가게 됩니다. 그 시간이 아깝기 때문에.

 

그래서 그럴 경우에는 그 사람은 이제 도와 과에 가까이 가게끔 됩니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에 대상이 싹 사라집니다.
너무나 깨끗한 상태가 딱 되거든. 인식하는 대상 자체가 사라져버리는 상태가 탁 되면 도와 과의 최종문에 탁 도달하게 되는 거라.

 

사실은 칠청정이라고 하는 것은 수행을 위한 도구이지, 다른 것들을, 알음알이를 위한 도구가 되지는 않습니다. 경전에는 칠청정, 구청정 이런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공통적으로 얘기하는 것이 이 청정에 이르렀으면 다음 청정으로 넘어가지게 되고, 그다음 청정에서 또 다음 청정으로 넘어가지게 되는 것이지, 이 청정에서 건너뛰고 요 청정으로 될 수는 없다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계청정이 안 된 상태에서 심청정이 될 수가 없고, 계청정은 된다 하더라도 심청정을 빼버리고 견청정으로 넘어갈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경전에는 가끔 그런 부분이 나옵니다.

산따띠 장관 같은 경우에는 사랑하는 무희가 죽음을 맞는 걸 보게 되는데 그 일주일 동안 열심히 술 먹고 놉니다. 부처님이 먹지마라 했는데. 그런데 탁 그 무희가 죽음을 맞는 걸 보고 번쩍 정신이 듭니다. 그러고 나서는 다시는 술 먹는 일들을 안 하게 됩니다. 왜?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서 이해를 했거든.

누구든지 생겨났으면 사라지게 돼 있듯이, 태어났으면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저 무희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듯이 나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그런 두려움이 생기는 거라. 이미 그런 두려움이 생기는데 언제 술 먹고 있을 시간이 있어? 술 먹는 버릇이 싹 사라져버리는 거라. 그러면서 지금 현재 일어나는 마음들을 관찰하게 됩니다. 물론 그분이 도와 과에 이르렀지만 계는 참 많이 안 지켰거든. 그분뿐 아니라 다른 분들도 많이 경전에는 보입니다.

 

어떤 분도 평상시 때 계를 굉장히 안 지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계를 안 지켰는데도 깨달음에 이르르게 됩니다. 왜 그게 가능할까?

여러분들한테 희망적인 소리일 수도 있겠는데, 계를 안 지켜도 마음의 청정을 얻고 그다음에 견해를 바로잡을 수가 있다는 뜻이거든. 물론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근데 그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현재 마음이 어떤 마음이냐"는 거라.

지금 내가 의도하고, 지금 내는 마음이 어떤 마음이냐에 따라서 계청정은 자동스럽게 그 순간에는 지켜지게 되고, 그리고 마음은 청정한 상태가 되고, 견해가 확립되는 상태로서 넘어가지게 되는 거라.

 

그전에 안 지킨 것은 어떻게 되겠어요? 그거는 지가 받는 거라.

그건 자기가 받아야 되는 과보이지, 그것을 내가 깨달음에 이르렀다, 도와 과에 이르렀다 해서 이걸 안 받고 없어져 버리는 건 아닙니다. 소멸돼버리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 대신에 도와 과에 이르르면 어떻게 돼요? 끊임없이 사띠를 하기 때문에 선한 마음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면은 그것들이 나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조건들이 사실은 잘 안 만들어져 버린다는 거라. 그런 것이지 그게 없어진다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계를 안 지킨 것은 여러분들은 언제든지 그 과보를 받게 됩니다.

단, 지금 현재 조금 더 나은 생활을 하려고 할 것 같으면 계를 지키는데 어떤 마음을 내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단적인 예로 계를 지키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은 계에 딱 얽매여버립니다. 오계 지키는 거 - ‘잡담하지 마라 했지’ - 다른 사람하고 선한 마음으로 얘기를 할 수 있는데도 그게 잡담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에 아예 말을 안 해버립니다. 본인은 계를 지킬지 몰라도 다른 사람은 답답해 죽겠는 거라.

오계를 지키는 것은 계금취에 빠져서도 안 되지만 계를 함부로 여겨가지고 그것을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파괴하는 것들로 이어져서도 안 되는 겁니다.

 

중요한 부분은 계를 지키려고 했을 때의 마음, '어떤 마음으로 어떤 의도를 가지고 계를 지키느냐' 하는 겁니다.

아까 처음에 그렇게 얘기했죠. "새의 양날개와 같이 보시와 지계는 쌍으로 해야 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계를 잘 지키고 있으면서도 내가 그 선한 마음을 일으켰는데 남의 안 좋은 모습들이 보이면 내가 그 사람한테 선한 마음을 내서 내가 그 사람을 이끌어 줄 생각이 안 일어날 것 같아요? 반드시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보시와 지계는 쌍으로 일어난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안 되면 강제로라도 한번 해보십시오.

 

(수행자 질문 : 스님!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인데요, 재가불자들에게요. 다시 말하면 방금 하신 말씀에서 전에 계를 안 지키고 했다 하더라도 그러니까 지금 내가 있는 이 순간 청정하고 맑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계는 그 안 지킨 것은 무효가 되는 거죠? 그 업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고 업은 그대로 있되, 그것이 나에게 불선업을 가져오게 하지는 못하죠. 내가 청정한 의식 상태에 있다면.)

 

그렇죠. 그런데 청정한 의식이 항상 가지고 있어야 되는데 안 가지고 있으니까 문제가 되는 거라. 그때는 청정했는데 조금 지나면 그런 청정한 마음들이나 아니면 사띠하는 마음들이 사라져 버리면, 내가 지은 잘못된 것들이 영향을 미치게끔 되는 거라.

 

(수행자 질문 : 또 역으로 어저께 아무리 잘못했고 또 잘해도 청정한 계를 지키고 남이 부러워하는 그런 부처님의 제자로서의 손색이 없었는데, 오늘 이 순간 타락을 해가지고 예를 들어 계를 안 지키고 불선업의 삶을 산다면 지난번에 선업을 했던 그건 무효죠?)

 

무효라는 것은 아니고, 그 행위는 그대로 남아가지고 지가 받아야 되는 결과로써 있는 겁니다. 있는 거고, 지금 현재 불선업을 행한 것들은 또 그게 결과로서 나타나게끔 되는 거죠.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 과거에 지은 것들은 그게 선한 것이든 불선한 것이든 그것이 나에게 영향을 안 미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지금은 없다. 그거는 죽을 때까지 나를 따라 다니는 거다. 단지 그것이 영향을 안 미치게 하려고 할 것 같으면 "죽을 때까지 사띠하라." 죽을 때까지 알아차림을 유지해 나간 상태일 것 같으면 영향을 안 미치게끔 할 수는 있다는 거라.

 

그리하더라도 과거의 업이 워낙 중하고 할 것 같으면 사띠하고 있더라도 이게 영향을 미쳐집니다. 그래서 경전에는 아라한들도 돌에 맞아 죽기도 하고 하는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들은, 그리하더라도 돌에 맞는다고 하더라도 이 아라한이 일으키는 마음이 사띠가 없는 마음이라든지, 아니면 남을 원망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게 성숙돼가지고 나에게 영향을 미친 것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말씀하신 경전에도 이놈을 빨리 저세상으로 데려가야 되는데, 쉽게 말하면 죽여버려야 되는데 어디 있는지를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일까?

(수행자 대답 : 사띠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죠)

그렇죠. 사띠하고 있는 사람들. 저놈이 나쁜 짓을 많이 해서 빨리 데려가 버렸으면 좋겠는데 못 데려가겠는 거라. 사띠하고 있는 동안에는 이걸 데려가지 못하는 거라. 그런 것이지 과거에 지은 행위들이 물거품이 되고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 얘기는 뭐냐 하면 여러분들한테 희망을 주기 위해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계를 지키는 것은 상식적인 것이고, 그것은 반드시 해야 되는 것들이다" 하는 뜻입니다.

출가한 스님들은 4가지라 해가지고 아주 엄격하게 구분을 합니다. 빠띠목카부터 해 가지고 생활의 계, 그다음에 오온 육근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들을 갖다가 알아차리는 것, 이런 것 전부 다 계에 다 해당이 되는데, 재가자들은 안 그렇잖아요. 5계밖에 없잖아요. 간단하죠?
음 뭐 잘 안 지켜져요?

(수행자 대답 : '살도음망주'에서 재가불자들이 가장 지키기 어려운 것이 세 번째 음이라 그랬습니다. 공통적으로 다.)

음요? (예. 음, 남자 여자의 관계) (저는 거짓말)

음. 사람마다 틀리겠지. 근데 나이 드신 분들은 음욕이 안 일어나니까 그 사람들을 지키기가 좋을 기고, 어린애들은 뭐 거짓말을 하는 걸 지키기가 힘들 거고, 뭐 그럴 겁니다.

 

그런데 이 다섯 가지는 어떻게 해야 돼요? 공통적으로 무조건 지켜야 되는 겁니다. 어떤 것이 비중이 크고 적고가 없습니다.

그래서 경전에도 수행 중에 안거 3개월 동안 스님들이 나는 이번에는 거짓말 안 하는 계를 지키겠다, 어떤 사람은 뭘 지키겠다, 이렇게 해가지고 각각 지켰어요. 근데 본인들이 최고 어려운 걸 했다고 다들 생각을 하는 거라. 근데 부처님한테 가서 물어보니까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어떤 것이 어렵고 쉽고가 없다. 이것은 다 지켜야 되는 것이다. 어느 것 하나를 뺄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하는 얘기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아까 음욕을 지키기 힘들다고 그랬는데 마음속에서 이렇게 마음을 먹어보십시오.

의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다른 사람을 의지하고 있는 존재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내가 성적인 관계를 가질 사람이 아니다 하고 판단을 하게 됩니다. 결혼한 사람들은 누굴 의지합니까? 남편이든 신랑을 의지하고 있는 것이지 나를 의지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나이 든 사람들은 누구를 의지합니까? 자식을 의지합니다. 어린아이들은 부모를 의지하게 됩니다. 그렇게 딱 마음을 먹어버리면은 간단해 버립니다. 왜 지 혼자서 살기 힘들어 가지고 남을 의지해서 사는 사람들을 갖다가 그걸 지 것인 마냥 이렇게 취할려고 하느냐는 거라.
간단한 이치이기 때문에 그렇게 마음을 먹으면은 그 부분은 간단하게 해결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은 계청정 부분이죠.

계를 아눗사띠(anussati) 하는 것이 있는 거는 아십니까?

실라눗사띠(sīlānussati), 실라아눗사띠, 수념(隨念)이라는 뜻입니다. 계를 수념한다.

오늘 하루 지나고 나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내가 계 어긴 거 있나’ 한번 머릿속에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요. ‘내가 거짓말을 했나’, ‘쓸데없는데 그냥 끼어들어 가지고 남하고 남을 비방하는 말을 했나’, 아니면 ‘내가 말하는 것이 법에 맞게끔 했고 상황에 맞는 얘기들을 했나’, ‘남들 보고 질투하고 저것이 내 것이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진 적이 있나’, 돌아보는 것들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씩 한번 돌아보십시오. 5계 중에서. 만약에 돌아봤을 때 ‘어, 난 그런 적이 없다’ 할 것 같으면 어떻게 될까 마음이? 깨끗해집니다. ‘아, 내가 참 잘 살았어. 오늘’

그게 실라눗사띠라고 하는 겁니다. 계수념이라고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계는 계를 지킬 때의 마음을 어떻게 가지느냐에 따라서 중요성이 틀려질 뿐 아니라 계를 지키고 나서 그리고 나서 뒤에 회상하는 부분에서 그것들에 대해서 때 묻은 것이 없는지, 구멍 난 것이 없는, 건지 또 잘못한 것들이 없는 것인지에 대해서 돌아보게 될 때,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청정하게 되고 깨끗하게 되도록 만들어주는 역할들을 하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마만큼 계라고 하는 것은 뭘 위한 단계죠? 마음을 청정하게 하기 위한 단계입니다. 거꾸로 얘기하면 마음의 청정은 계를 지키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다는 뜻입니다.

나쁜 짓 해놔 놓고 마음이 좋을 사람이 어디 있어? 그거는 없다는 거라. 그래서 내가 좀 기분 좋게 행복하게 마음을 좀 편안하게 살고 싶다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계를 지키라는 거라.

 

그 대신에 계를 지킬 때는 어떻게 하라고? 지금 현재 무슨 마음을 일으켜야 된다고? 지금 선한 마음을 일으켜야 되는 거라. 선한 마음을 일으킨 상태에서 말을 하고, 선한 마음을 일으킨 상태에서 뭔가 행위를 하고, 선한 마음을 일으킨 상태에서 내가 남들을 보살피든지 그렇게 돼야 되는 것이지. 선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에서는 그걸 할 방법이 없어지는 거라.

 

사띠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그 선한 마음들을 일으켜 줄 수 있는 것들이 사띠입니다. 선한 마음이 일어난 상태에서는 계를 어길 수 있는 조건이 안 됩니다.
그래서 지금 일으키는 행위, 지금 일어나는 탐욕과 성냄 부분은 어떠한 경우든지 선한 마음을 일으키면 잠재워 줄 수가 있습니다. 이걸 완전히 지금 몰아내지는 못하더라도 영향을 미치지 않게끔은 만들어줄 수 있다는 거라.

 

보통 불교에서는 삼독심이라고 그러죠? 탐·진·치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탐심과 진심은 완전히 없애지는 못하더라도 뭐만 지켜도 가능해요? 계만 잘 지켜도 탐심과 진심은 여러분들한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거라. 치심은 어차피 아라한이 되어야 가능합니다.

왜? 어떠한 경우든지 사람들은 무상 고 무아가 아니라 반대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항상 하길 바라고, 오래도록 오래도록 살길 바라잖아요. 그리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거고, 그리고 뭔가 '나'라고 하는 것이 있어가지고 존재한다고 생각을 하지 그거 없이 살아가진 않는다는 거라.

 

그래서 마음을 어떤 마음을 일으키느냐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탐심과 진심이 선한 마음을 일으키면 일단은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거라. 화가 나더라도 선한 마음이 탁 일어나면 누른다는 거라. 남의 거 저거 예쁘다 하고 마음이 탁 들더라도 ‘아니야, 저건 내 거 아니야’ 하고 마음을 먹으면 그거는 그걸 훔치려는 마음은 안 생긴다는 거라. 남을 미워할려 해도 나도 미워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되는 거고.

그래서 지속적으로 계속적으로 오계를 여러분들은 지켜나가야 됩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재가자들의 오계는 어떠한 경우든지 이것은 다 지켜야 되는 것이지 취사 선택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는 것들을 분명하게 여러분들이 이해를 해야 됩니다.

‘오늘 끝나고 나서 술 한잔 해야지’ 안 됩니다! 오늘 끝나고 나서 집에 가면 “아 나 불교 공부하고 왔으니까 피곤하니까 밥 차려!” 안 된다는 거라.

 

선한 마음이 일어날 것 같으면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동정하고 자애를 가지게끔 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상황을 살피게끔 됩니다. 계를 청정히 하면 적어도 계로 인해서 족쇄가 되어서 나를 얽어매는 역할들이 아니라 마음을 탐심과 진심으로부터 벗어나게끔 만들어주기 때문에 자유로워지게끔 되는 거라. 그리고 그것을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내 마음은 점점 더 기쁨으로 행복함으로 채워지게끔 되는 거라.

그게 계청정입니다. 쉽죠? 계청정. (예)

 

근데 완전한 계청정은 사실은 아라한이 돼야 가능합니다. 심청정이 됐다 해가지고 계청정이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또는 내가 해탈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서 해탈로 나아가고 있는 상태라고 하더라도, 계청정이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완전한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는 계는 끊임없이 청정하게 되도록 만들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 계라고 하는 것은 등급이 있습니다.

그냥 여러분들이 이건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 지키는 계 - 그것은 저 밑에 계를 지키는 것들이 되는 거고, 수행하면서 사띠를 하니까 자연스럽게 계가 지켜진다 - 그러면 중간 정도 되는 거고, 근데 내가 도와 과에 이르러 가지고 이제는 더 이상 계가 나하고는 아무 필요 없이 영향을 못 미치는 것이다. 계가 있든 없든 간에 나는 살아가기 때문에 - 그런 상태가 될 것 같으면 상등급이 되는 거라. 똑같은 계청정이라도 이렇게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경전에는 그렇게 적어놨습니다. "아라한들은 계가 필요 없다." 계가 필요 없어서 없는 것이 아니고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이지, 계를 안 지킨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은 자연스럽게 지켜져 나가는 상태가 되기 때문에, 사띠만 해도 그게 가능한데 도와 과에 이른 상태일 것 같으면 당연히 그것은 의미가 없어져 버리는 상태가 돼버립니다.

 

적어도 여러분들은 자연스럽게 지켜지는 계가 얼마나 나를 행복하게 만들고 나를 열반으로 이끌어 주는 지를 경험을 해봐야 되는 거라. 어려운 거는 맞습니다. 계를 지킨다는 것이. 그렇지만 부처님이 선언을 해놨지 않습니까?

"나의 제자, 재가 제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계를 지켜야 된다."

계를 지키지 않으면 쉽게 말하면 부처님 제자가 아니라는 거라. 부끄럽지 않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나는 부처님 제자답게 살아가고 있나' 하는 것들을 자꾸 돌아볼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설명은 여러분들이 이걸 보면 계청정에 대한 이해를 할 겁니다. 그래서 계가 자연스럽게 지켜질 수 있는 조건들이 자꾸 되도록 평상시에 노력을 해야 됩니다.

 

계를 지키고 나가면 어떻게 될까? 쉽게 말하면 배지 하나 단 겁니다.
그걸 경전에는 "부처님 제자를 나타내는 장신구 하나를 달았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게 그마만큼 훈장을 하나 단 겁니다. 훈장을 하나 달았으면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가 있다는 거라.

꼭 수행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이 반드시 명심해야 되는 것은 계를 지킴으로 인해서 내가 기쁘고 행복해지고 바른길로 나아가게 되고, 다른 사람들을 또한 그와 같이 기쁘고 행복한 마음을 일으키게끔 만들어준다는 사실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자, 오늘은 계청정까지만 하고, 다음 시간에 심청정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그 대신에 숙제! 심청정을 할려면 일단은 여러분들이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법들을 알아야 됩니다. 염불을 하시는 분들 있죠? ‘석가모니불’ 해도 괜찮습니다.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하면서 한번 거기에다 마음을 실어 가지고 염불을 한번 해보십시오. 그 대신에 석가모니불 할 때 절 해가면서 석가모니불 하지 말고, 가만히 앉아가지고 염주도 돌리지 말고,

 

가만히 앉아가지고 그냥 ‘석가모니불’, 부처님이 이 앞에 딱 계신다고 생각하고 그분을 떠올리면서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지속적으로 계속 한번 해보십시오. 오로지 그것만! 염주나 절이나 이런 거 하면 흐트러져 버리기 때문에 그거 하지 말고, 오로지 그것만 한번 해보십시오. 할 수 있겠죠?

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 다음 시간에 숙제!

 

염불하시는 분이 아닐 것 같으면 자애의 마음을 가지도록 한번 해보십시오.

자애의 마음은 쉽게 말하면 여러분들 가족 있죠? 가족을 대할 때 어떤 마음입니까? 예뻐 죽겠죠. 진짜 가족은 내 편입니다. 그 가족도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자기 편이 있다는 것만 해도 마음이 든든합니다. 내가 가족을 떠올리면서 생각해야 되는 것은 ‘아, 참 이 사람이 고통 없이 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거라.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고통 없이 행복한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내가 안 행복한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 행복해지겠어?

 

적어도 가족을 떠올리면서 아니면 아주 친한 친구를 떠올리면서 ‘내가 행복하고 괴로움이 없기를’ 하는 마음을 자꾸 지속적으로 가지는 거라.

아까도 얘기했지만, 이거 할 때도 절이나 염주 돌리지 말고, 그냥 가만히 있으면서 그것만 한번 해보십시요. 마음에 틀림없이 뭔가 벅찬 마음들이 일어납니다.

 

그것들을 다음 시간에 가져오도록 하십시요. 이 두 가지, 두 가지 중에 하나는 반드시 하고 오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됐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