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질투의 해독제 - 무디따(기쁨) 수행법 11가지 (20140612)
울랄라님 요즘 안보인다? (수행자 대답 : 협착증이 있으니까 힘들어가지고 다리가 좀 아프셔갖고 무리하지 마시라니까 좀 쉬신다고 그러시더라구요)
음, 가끔씩 전화를 해줘라. (예)
빨리 나아서, 그래도 최고 열심히 할려는 노보살님인데.
(유진이 만났는데 요번 안거할 때는 아무래도 참석 안 하시겠습니까)
(수행자 대답 : 아마 나으면 곧 나올겁니다. 전화는 자주 드립니다.)
오늘은 「무디따(muditā)는 질투의 해독제다」 하는 내용으로 얘기를 하겠습니다.
질투 안 해본 사람 있어요? 질투 다 한번 해봤을 거라. 분노의 일종이죠! 인색한 것도 분노의 일종이고, 그냥 성내는 것도 분노의 일종이고, 또 후회하는 것도 분노의 일종입니다. 분노는 종류가 많습니다.
탐욕을 다스리는 것보다 분노를 다스리는 게 세분화돼있기 때문에 오히려 다스리기가 수월합니다.
예를 들어서 누가 이걸 가지고 있는데 나는 없다. 그러면 이것에 대해서 아, 쟤는 이걸 가지고 있다 하는 생각이 일어날 것 같으면 일단은 '나'라고 하는 '마나(māna)'라고 하는 것이 생겨납니다. 그러면은 내가 이걸 가지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을 하면 됩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하면 돼. 그러면 나는 이걸 가지게 됩니다.
그러면 마나는 어떻게 보면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물론 마나라고 하는 '나'라고 하는 것을 내세우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죠? 나쁜 마음이지만은 그래도 좋은 방향으로 유도를 할 수는 있는데,
질투라고 하는 것, 저번에 얘기한 인색함이라고 하는 것, 이런 분노의 일종들은 이건 대처방안이 없어. 이거는 이걸 좋은 방향으로 돌릴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조금 전에 마나라고 하는 것은 좋은 쪽으로 만들 수가 있는데 분노의 일종들은 이걸 탁 끌어내버리기 전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거라.
그런데 인제 좋은 게 뭐냐하면, 탐욕의 일종은 종류가 굉장히 많은데 비해서 분노의 일종은 아주 단순하다는 거라. 다 구분되어 있으니까. 그래서 "이게 뭐다" 하는 것만 알 거 같으면 적어도 그걸 끌어내리기가 수월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부처님 진리 사성제의 첫 번째가 괴로움입니다.
그러면 괴로움이 소멸할려고 할 거 같으면 괴로움이 있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되겠지. 그래서 괴로움을 소멸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들을 쓰면 됩니다. 그러면은 결국에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걷게 되게 되고, 그러다 보면 괴로움이 완전히 소멸된 상태에 도달하게끔 됩니다.
질투라고 하는 것도 꼭 마찬가집니다.
내가 '질투하고 있네' 하는 거는 먼저 알아야 됩니다. 질투하고 있다는 걸. 그런데 아까도 얘기했지만 질투라고 하는 것은 '질투하고 있네' 하고 알아가지고 질투를 완전히 끊어내버리기 전에는 이걸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라.
그래서 가장 좋은 게 경전에는 "질투를 없애기 위한 것이 무디따라고 하는 마음에 항상 기쁨을 일으키는 그런 수행을 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경전에는 무디따 수행에 대해서 어느 정도 설명을 해놓은 것들은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하게 나와있지는 않고, 그걸 인제 무디따를 실천하는 방법에 대한 것을 경전들을 여러 가지로 종합을 해보면 그중 열한 가지 정도로 나누어집니다.
예를 들어서 부처님에 대해서 숙고하는 훈련들을 하고, 담마에 대한 숙고하는 훈련들을 하고, 상가에 대해서 숙고하는 훈련들을 하고 이런 것들은, 기본적으로 다른 수행법과 비슷하게 설정을 해놔놨습니다.
우리 스님들이 훈련을 하려고 할 때는 그 방법으로 잘 안 합니다. 다른 방법으로 무디따를 훈련을 많이 합니다.
예를 들어서 나에게 기쁨을 일으킬려고 할 거 같으면 부처님에 대해서 부처님 명호를 계속 외우므로 인해서 기쁨이 일어나기도 하는데, 가장 빨리 기쁨을 일으키게 하려고 할 거 같으면 내가 잘한 거 생각하면 기쁨이 금방 떠오릅니다. '어, 내가 뭘 잘했지' 그거 생각하면 금방 기쁨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 잘한 것에 대해서 그걸 떠올릴 때마다 나는 계속적으로 기쁨이 일어나고, 잘한 것들을 한 것들에 대해서 내가 좋은 공덕이 돌아왔다고 생각을 하면 또 기쁨이 일어납니다.
기쁨을 일으키는 방법들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수행할 때 '아, 내가 이런 것들을 잘한 것이 있구나' 하면서 떠올림으로 인해서 기쁨을 일으키기도 하고,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이 한 것들에 대해서 좋은 부분만 자꾸 떠올리게끔 하고, 이런 방법들을 쓰는 게 무디따 수행의 일반적인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경전에서 설하는 방법하고 조금 차이가 나긴 합니다.
그래도 어쨌든 오늘은 이 질투라고 하는 것들에 대한 해독제로써 무디따(muditā)에 대한 애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질투, 좀 그런 게 있어요. 뭔가 어떤 사실을 보면 사람들이 항상 삐딱하게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봐주면 좋은데 꼭 나쁘게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음이 이미 습관화되어 있다는 거라. 질투하는 것으로서 습관이 되면 남이 잘되고 그리고 남이 행복해하고 남이 좋은 방향으로 되고 하는 것들을 마음에서 받아들이지를 못하니까 항상 나쁜 방향으로만 보게 됩니다.
질투의 습관이 들면 마음은 거기에 딱 익숙해져버립니다. 그러니까 뭘 해도 다른 사람들을 볼 때 좋은 방향으로 봐지질 않는 거라.
그런 사람은 자꾸 그렇게 할 거 같으면 옆에 사람들이 붙어있겠어? 친구나 여러 가지들도 자기 주변엔 안 붙어있게 됩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이 나쁜 방향으로 얘기할 것 같으면 "거기서 그만 하시오. 나 그 소리 듣기 싫어" 하면서 오히려 그 사람에 대해서 칭찬을 하는 말을 해주는 것이 오히려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져야 되는 방향인데, 한술 더 떠서 더 나쁜 방향으로 하게 된다는 거라.
처음에는 자기의 마음이 후련할지는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자기는 오히려 더 괴로워집니다. 주변에 사람들이 점점 더 떠나기 때문에.
그래서 절대 그러지 말아라는 거라. 다른 사람의 단점이 보이고 잘못된 것이 보이더라도 그것은 자기에게 임팩트하지 말고, 딱 거기서 중단시켜버리라는 거라. 중단시켜버리고 좋은 점을 자꾸 보려고 하라는 거라.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좋은 점을 자꾸 얘기할려고 해야지 싫은 부분을 자꾸 얘기할 것 같으면 상황이 안될 거 같으면 자기가 거기서 나와. 그렇지 않으면 상황이 될 거 같으면 좋은 부분을 자꾸 얘기할 수 있도록 방향을 돌려주는 것이 좋은 부분입니다.
또 질투를 자꾸 하게 되면 안 좋은 게 뭐냐면 자기는 그렇게 안 할려고 하는데 자기의 능력은 자꾸 위축돼버립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면 자기는 끝나버립니다. 우선 속은 시원하게 보이니까. 남이 100원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쟤는 뭐 어쩌다가 저렇게 벌었겠지 하고만 생각하고 끝나버릴 것 같으면 자기는 그 100원을 벌 수가 없습니다. 100원이 있는 것에 대해서 아, 참 저사람 100원이 있어서 얼마나 좋을까, 저사람 참 기쁘겠다 하는 마음이 일어나서 나도 100원 한번 벌어볼까 하고 생각을 할 거 같으면 나도 100원을 벌 수가 있는데, 아예 이 100원 번 것에 대해서 부정을 하는 마음을 가져버리니까 자기는 이미 100원 벌 수 있는 방법이 없어져 버리는 거라.
자신의 능력은 점점 더 위축돼버리는 거라. 마음이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지고 또 자기의 능력들을 더 많이 쓸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되는 것인데 거꾸로 가는 방향으로 택하게 된다는 거라.
그다음에 남에게 질투할 때 즐겁게 하는 사람 없습니다. 자기는 즐겁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실제로는 보면 굉장히 움추러들어 있습니다. 뭐하러 그렇게 해?
가슴을 찌르는 그런 통증들이 있으면 질투가 일어나는 경우들입니다. 그런데 본인은 그걸 모르는 거라. 자기 자신을 해친다는 생각들을 일으키지 못한다는 거라. 즐겁게 하지도 못하고 자기 자신을 해치는 것들이라는 거라.
질투라는 게 이거 말고도 여러 가지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알 거 같으면 내가 질투가 일어났으면 '아, 질투가 일어났다'고 알고 '이거는 다시는 일으키지 말아야겠다' 하고 자기가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걸 끊기 위해서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이리 얘기해도 질투하는 걸 계속하겠다 할 거 같으면 답이 없어. 그럼 그렇게 그냥 살아야 되는 거라. 그럼 뭐 부처님 말이나 부처님 할아버지가 오더라도 해결해 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명심해야 되는 것은 '그것은 나에게는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는 거라. 그리고 '이것은 끊기가 수월한 것이다' 하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아주 수월합니다.
자기가 뭔가에 대해서 기쁜 마음들이 계속 일어날 거 같으면 질투는 안 일어납니다. 그래서 오히려 참 끊기 수월한 것인데도 그 질투라는 것이 나쁘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못하니까 끊지를 못하는 거라. 대부분 보면 “난 이래서 잘 안됩니다.”
자기가 안 한다는 생각을 안 하는 거라. 그게 나쁘다는 것을 알고 그게 좋다는 것을 알 거 같으면 나쁜 건 안 할려고 하게 되고 좋은 건 더 하게 돼있는 건데 그 생각을 못 일으키니까 못 끊는 거라.
자! 질투가 있다, 그러면은 일단은 여러분들은 이렇게 생각을 해야 됩니다.
내가 지금 질투하는 마음이 있는가 없는가? 아, 이건 나중에 얘기를 합시다. 끝날 때 돼가지고 해줄게요.
그러면 질투에 대한 해독제로써 무디따 부분을 얘기를 하겠습니다.
경전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붓다·담마·상가의 공덕을 기뻐한다.
이게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나와 있는 겁니다.
우리 보통 삼보예찬 하죠? 그것과 같이 삼보에 대한 회상을 하면서 아, 참 부처님으로 인해서 내가 참 좋은 본보기로 스승으로서 삼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일으키면 기쁨이 일어나집니다.
그리고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서도 아, 참 진짜 따라가야 될 진리이다 하는 생각을 합니다. 또 그런 가르침을 전해준 스승님에 대해서도 아, 참 고맙다 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그래서 불법승 삼보에 대해서 생각하고 숙고하는 것으로 인해서 마음은 기쁨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게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입니다.
네 번째가 자신의 공덕을 숙고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게 보통 스님들이 무디따 수행할 때 쓰는 방법입니다. 자기가 공덕 쌓은 게 있어요? 뭐 있어요? 공덕 쌓은 거? 조금 전에 여러분들이 스님한테 탁발을 했습니다. 그것도 공덕 쌓은 거죠? 바른 방법으로 탁발했어요? 했어요? (예)
언제 시간이 되면 가장 공덕이 많이 생기는 보시 방법에 대한 얘기를 한 번 해드릴게요.
어쨌든 보시했다는 생각조차도 일으키지 말아야 되는 것이고, 보시할 때 마음이 깨끗한 마음 상태가 되면 가장 좋고, 그리고 내가 하고 있는 행위를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하면 좋고, 그대로 하면서 알아차리면서 바리때에 공양물을 올리고, 그리고 인사하고 다시 돌아가고 할 때까지 마음이 계속적으로 평온하고 고요한 마음을 유지한 상태로써 가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게 여러분들이 해야 될 몫입니다.
어쨌든 스님들이 해야 될 몫이 있고, 그리고 공양물에 대한 것들도 있고 하겠지만, 여러분들이 해야 될 몫은 그게 거의 기본적인 주를 이루게 됩니다.
공덕들을 쌓은 것들에 대해서 회상을 하면 그게 자꾸 기쁨으로써 일어나야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경우에 의무적으로 했을 경우, 또는 하기 싫은데 했을 경우, 그리고 자기가 하더라도 바른 방법으로 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그걸 회상을 하더라도 기쁨이 일어나질 않는다는 거라.
가끔씩 스님들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어떤 게 가장 큰 공덕이 많이 될까?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러면 대부분 스님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게 "사원을 짓는데 보탬이 되는 것이 그래도 공덕이 가장 클 것이다" 하고 얘기들을 합니다.
왜? 그 사원은 스님들이 계속적으로 살게 되고, 거기서 계속 부처님 법을 설하게 되고, 수행을 하는 장소가 되고, 그 스님이 떠나고 나도 다른 스님들이 또, 한 세기가 지나더라도 그 장소에 계속 있으면서 계속적으로 그 일을 하게 되기 때문에.
그런데 내가 떠올리든 안 떠올리든 공덕을 쌓은 사람이 떠올리든 안 떠올리든 간에 그 공덕들은 계속 그 사원을 짓는데 보탬이 된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대부분 그게 가장 큰 공덕이 될 것이다 하고 얘기들을 많이 합니다.
그와 마찬가집니다. 자기 자신이 뭔가를 했을 때 그것을 떠올렸을 때 그것이 '아, 참 내가 잘한 일이다' 하고 마음을 먹을 수 있게끔 해야 됩니다. 그럴려면 자기가 뭔가를 해놔 놓고 자기가 뭐 했는지는 분명하게 알아야 되는 거고, 그리고 그렇게 했을 때 내가 어떤 마음으로 했다는 거는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래야 만이 '아, 그때 내가 참 좋은 일을 했다. 그때 그래도 좋은 마음으로 그 일을 했다'는 걸 떠올릴 것 같으면 기쁨이 일어나게 된다는 거라. 그 일은 결과는 한 번을 받았을지 몰라도 기쁨을 일으킬 때마다 또 다른 결과들을 받게끔 된다는 거라.
공덕을 많이 쌓는 것도 물론 좋은데, 공덕을 떠올릴 때마다 그것이 새로운 공덕이 될 수 있게끔 하라는 거라. 그게 인제 경전에 설해진 네 번째 부분입니다. 자신의 공덕을 숙고하라.
이게 인제 다섯 번째, 자신이 보시한 것들에 대해서 생각이 미치도록 하라 하는 것하고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대부분 "무디따 수행할 때 자신의 기쁨에 생각이 미치도록 하라" 하고 보통 얘기합니다.
그 기쁨이라는 것은 지금 당장 누군가가 나에게 뭔가를 잘해줬을 때 일어나는 기쁨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속적인 기쁨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뭔가를 베풀었을 때, 그리고 내가 정당한 것들을 했을 때 그것이 부처님 법에 맞다고 판단했을 때 일어나는 기쁨들을 얘기합니다.
남이 힘든 경우가 있다, 그럴 것 같으면 그 사람을 잘 타일러 가지고 그 사람이 그 힘든 것들로부터 빠져나오게끔 했다, 그러면 그거는 부처님 법에 맞는 얘기들을 한 겁니다. 남들이 화가 나 있다, 그 사람이 나에게 화를 낸다고 하더라도 내가 아주 평온하고 고요한 마음으로써 화를 가라앉히도록 설득을 시켰다, 그럴 것 같으면 그것도 부처님 법에 맞는 말을 한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화가 난 것이 잠재돼서 아, 내가 화를 내서 미안하네 하는 마음을 일으켰다, 그러면 그것은 잘한 일을 한 겁니다.
행위나 말을 한 것이 부처님 법에 맞게끔 하는 것이 돼야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변하는 속성을 지니는 것들로 인해서 기쁨이 일어나는 것은 부처님 법에 맞지 않는 것이다 하는 겁니다.
돈이 십 원이 생겼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기쁨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십 원은 어차피 변하고 없어지게 돼있습니다. 그러면 없을 때는 슬픔을 느껴야 되는 건가? 그건 아니잖아.
그래서 변하는 속성을 지닐 수 있는 것, 그리고 두고두고 계속 기쁨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닐 것 같으면 그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가맛따'라는 그럽니다. 죽어버린 기쁨과 같다는 거라. 앞으로 계속 일어날 것이 아니고 한 번 하고 끝나버리는 죽어버리는 기쁨과 같다는 거라. 그래서 그런 것들로써 기쁨을 만들려 하지 말고 자기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숙고를 할려고 할 거 같으면 그렇게 계속적으로 일으킬 수 있는 현상들로 인해서 기쁨을 일으키도록 하라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다음에 여섯 번째가 경전에는 신들의 공덕을 숙고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천신들, 인간보다는 오히려 천신이 더 높은 상태에 있는 분들이니까 '아, 저 천신들은 얼마나 복을 많이 지었으면 저렇게 천신이 되어 있을까' 하는 마음을 일으키라는 거죠. 그런데 여러분들 천신 본 적이 있습니까? 없죠? 스님들은 가끔씩 봅니다. 그래도 긴가민가 합니다.
스리랑카에서 한 번 그런 적이 있어요. 일주일 동안 잠을 안 자고 나무 밑에서 수행을 하는데, 신기하게 천신들이, 나무 아래는 스님들이 앉아서 수행을 하고 있었고 그 큰 나무 위에 천신들이 그 위에 붙어서 쫘악 내려오는 모습들이 보여요. 그런데 나만 그걸 본 것이 아니고 여러 스님들이 그것을 봅니다. 그래서 다들 공양을 하면서 그 얘기를 하는데 다 맞아. 그래서 어, 이상하다. 하면서 했는데, 그리해도 그게 실제로 진짜인가? 하는 얘기는 확신을 못 해.
그것만 그렇게 일어난 것이 아니고 그리고 나서 기이한 현상들이 또 생깁니다. 사리가 갑자기 하늘에서 툭 떨어져요. 그래서 그걸 그 절에서 고이 모시기도 하고 이랬는데, 그런데도 그게 진짜 사리인지 어쩐지 아니면 부처님 사리인지 아니면 어떤 자연적인 현상으로 인해서 날아온 것인지 그것에 대해서 확답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그런 것들을 가끔씩 경험함으로 인해서 뭔지는 모르지만 인간보다도 더 높은 공덕들을 더 많이 쌓은 천신들은 있구나 하는 생각들은 가지고 있게 됩니다.
어쨌든 참 복도 많이 지었지, 저 천신은. 나는 항상 즐겁고 행복하지만은 않은데 저 양반들은 뭔 복을 지어서 저렇게 행복한 생활들만 이어질까 하는 것에 부럽기도 해요. 그렇기 때문에 경전에서는 천신에 대해서 생각이 미치도록 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일반인들에게는 솔직히 그거 경전에서 하는 것이지 그것으로 해서 기쁨을 일으키기는 참 힘이 듭니다. 일부 스님들만 겨우 그걸 할 수 있는 상태들입니다.
그래서 무디따 수행을 할 때는 이 부분을 변경을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기쁨을 일으켜라 하고.
다른 사람들, 여러분보다도 더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더 좋은 일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거 부러워해야 되는 거라. '아, 참 저사람 얼마나 좋은 일을 많이 했으면 저렇게 좋은 일만 자꾸 일어날까' 하는 마음을 일으키면 아, 참 저 사람이 한 일에 대해서 내가 기쁨을 일으키게 되는 거라. 그래서 그 사람을 다음에 보더라도 내 마음에서는 기뻐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행복한 마음이 일어나게끔 하는 거라.
실제로는 주변에 여러 가지 세속적인 것들의 높낮이를 떠나가지고 나보다도 훨씬 좋은 상태에 있는 분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네팔에 가도 그런 사람들이 있고, 저 가난한 방글라데시에 가더라도 그런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기뻐. 그 사람들을 보면. 그리고 우리는 겨우 뼈빠지게 해야 먹고 살 뿐 아니라 수행할 시간도 공부할 시간도 참 내기가 힘드는데 그 사람들은 별 노력 안 해도 그거 하고 있는 거라.
나보다도 지위가 낮고 가진 것이 적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은 나보다도 훨씬 더 많은 공덕을 쌓았기 때문에 그 기쁨을 누리고 있는 겁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기쁨을 자꾸 가질려고 노력들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다른 존재들에 대해서 업신여기고 다른 사람 존재들을 해칠려고 하는 마음들이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그 존재들이 계속 더 기쁨을 누리고 계속 더 행복하기를 바라게 되지, 그것들을 질투해서 나쁜 방향으로 이끌려고 하는 마음들이 일어나지를 않는다는 거라.
그래서 천신을 대신해서,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기쁨이 자꾸 생기도록 그렇게 만들어야 됩니다.
그다음에 경전에 일곱 번째가, 완전한 평온함에 대해서 숙고하라 그렇게 나옵니다.
딱 두 구절! 이것밖에 없어요. 완전한 평온함에 대해서 숙고하라. 뭐 완전한 평온함이 어떤 건지에 대한 얘기도 없고, 그것을 어떻게 숙고하라 하는 그런 것도 없습니다.
어떤 게 완전한 평온함입니까? 무디따의 경우입니다.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름에 덥기 때문에 밖에 나가면 눈이 부시기 때문에 선글라스를 낍니다. 파란색 선글라스를 끼면 사물이 파란색이 좀 많은 형태로써만 다 보이게 됩니다. 이걸 봐도 그렇게 보이고 저걸 봐도 그렇게 보이고, 빨간색이 많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을 거 같으면 빨간색이 많은 색깔로써 어떤 것이든 다 보이게끔 됩니다.
여러분들이 무디따-기쁨이 항상 충만해져 있을 거 같으면 어떤 대상을 보더라도 기쁨이 항상 충만된 상태에서 그것들을 보게끔 된다는 거라. 그렇게 할 수 있겠어요?
마음에 무디따 수행이 잘 무르익어 갈 거 같으면 나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항상 기뻐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돼있습니다. 어떤 대상을 접하더라도!
그게 쉽게 말하면 완전한 평온함에 대해서 숙고하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똑같이 완전한 평온함을 유지하는 것, 그래서 그 대상에 대해서 항상 고요한 마음을 가지게끔 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옛날 스님들이 이걸 설명할 때 색안경을 비유를 많이 했습니다.
"기쁨의 색안경을 입혀라" 하고 얘기합니다. 온통 생각할 때나 말을 할 때나 행동할 때, 기쁨의 현상을 가지고 행하라. 사물을 볼 때 색안경을 끼고 사물을 보는 거와 꼭 마찬가지로 모든 것들을 기쁨을 가지고 모든 것들을 행하라. 그렇지 않으면 아예 행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다음에 경전에 여덟 번째, 아홉 번째는 대부분 다른 것에 다 있습니다.
나쁜 친구 사귀지 말고 좋은 친구 사겨라 하는 것.
그거는 뭐 어떤 경우든 무디따를 일으키는데, 또는 칠각지의 기쁨의 요소를 일으키는데, 아니면 또 다른 요소들을 일으키는데 다 공통적으로 다 있는 겁니다.
그거는 뭐 불변의 진리입니다. 깨달음으로 나아가는데 좋은 조건의 사람들하고 가까이 지내야 되는 거고, 또 자기를 이끌어주는 사람들하고 같이 가야 되는 것이지, 그렇지 못하고 흐리멍텅하게 뭐 하는지도 모르고 있는 사람들하고 같이 있어가지고는 큰 발전은 힘들어.
가끔씩 그런 얘기들을 합니다. 스님들이 법문을 안 할려고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되게 뭐라 하는 편입니다. 법문하는 상태가 되어있을 거 같으면 법문을 해라. 그런데 왜 법문하는 버릇들을 들이지 않느냐 하고 얘기합니다.
물론 여러 가지 핑계들을 댑니다. 그런데 그거는 하나의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바른 법을 자꾸자꾸 전해주지 않으면은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가 속해있는 데에 만족을 하고 거기서 벗어날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도둑질 많이 하는 사람들하고 같이 어울리게 되면 그게 나쁘다는 생각을 일으키질 못하는 거고, 거기서 벗어날 생각들을 못하는 거고. 바른 법을 듣지 못할 거 같으면 엉뚱한 법 아래 살고 있으면서 그게 엉뚱한 법인 줄도 모르고 산다는 거라.
그래서 스님들한테 자꾸 얘기합니다. 그게 네가 바른 줄 알고 있고, 거기에 대한 확신이 있고, 거기에 대한 경험이 있을 거 같으면 설하라는 거라. 나는 법문을 잘 못한다는 거라. 하다가 보면 잘하게 돼있는 거지 처음부터 잘하는 경우가 어딨느냐는 거라.
여러분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분명한 것은 바른 것과 바르지 못한 것은 여러분들이 구분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바르지 못한 것은 벗어나야 되는 거고, 바른 것들은 따라가야 됩니다.
그런 바르지 못한 사람하고 같이 있고, 계속 나쁜 방향으로 인도할 거 같으면 그것에서부터 벗어나와야 돼. 좋은 것으로 인도할 거 같으면 그건 계속적으로 그 사람들하고 같이 어울려서 내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된다는 거라.
그거는 수행의 이전에 기본적으로 갖춰야 되는 것들입니다.
그게 경전에는 여덟 번째, 아홉 번째 부분에 대한 것으로 나와 있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열 번째가, 경전에 대해서 숙고하라 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그런 적 혹시 있습니까? 어느 순간에 경전 구절을 읽는데 너무 좋아가지고 기쁨의 눈물이 주르르륵 흘러본 적 있느냐는 거라.
경전에 대해서 숙고한다는 거는 경전이 자기 옆에 딱 붙어있도록 만들어라는 얘깁니다. 자신의 얘기, 자신의 방식으로 모든 걸 판단하고 하는 것이 아니고 경전이 그 판단의 기준으로 잡아라는 거라. 그래서 그게 내 옆에 딱 붙어있기 때문에 그것이 어떠한 경우도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게끔 하지 않는 도구 역할을, 안전판 역할을 하게 된다는 거라. 경전은 그와 같은 역할들을 해줍니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쭈욱 따라가다 보면 어떠한 경우도 나쁜 방향으로 가지 않습니다. 지금은 빈궁할지 모르고 지금은 또 다른 사람들에게 욕을 먹을지 몰라도, 적어도 경전대로만 할 거 같으면 자신은 전혀 빈궁하지도 않고 또 나쁜 방향으로 나아가지지도 않게끔 된다는 겁니다.
경전은 그와 같습니다. 그래서 가끔씩 경전을 떠올릴 때마다 '아, 이게 진짜 맞는 건데 왜 내가 이걸 몰랐을까' 하는 것 때문에 기쁨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조사·확인하라고 했는데 조사·확인 못한 거 때문에 내가 나쁜 판단을 내린 거라. 그러니까 조사·확인하라는 구절을 보면 아, 내가 참 이 좋은 걸 옆에 놔놔 놓고도 이걸 모르고 있었다는 거라. 그러니까 그 구절을 읽을 거 같으면 기쁨의 눈물이 주르르르 흐르는 거라.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항상 자기 옆에 붙어있도록 해야 됩니다.
경전이 자기의 근거가 돼서 자기 옆에 딱 붙어있듯이, 모든 것들은 기쁨을 일으키는 대상들이 된다는 겁니다. 기쁨을 일으키지 않는 대상들이 있을까? 없습니다. 마음이 기쁨의 현상으로 젖어있을 거 같으면 어떠한 것들을 보더라도 기쁨의 마음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렇지 않은 대상은 없습니다. 자기 마음이 그렇지 않은 것뿐인 것이지.
그래서 기쁨이 항상 옆에 딱 붙어있도록 하라는 거라.
마음에서 기쁨의 현상이 일어나지 않을 거 같으면 지금 생각하고 있고, 말하고 있고, 행동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딱 중단하라는 거라. 그러고 나서 기쁨을 일으키고 나서 다시 뭔가를 하라는 거라.
무량한 마음이라는 것은 그와 같습니다. 그것이 한량없이 일어나야 되는데 일어나지 못할 경우에는 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딱 중단하고 그것을 일으키고 나서 다시 하게 되는 겁니다.
자애의 마음도 그와 같고, 까루나의 마음도 마찬가지이고, 우뻭카의 마음도 마찬가지이듯이 무디따의 마음도 꼭 그와 같습니다. 자기 옆에 딱 달라붙어 있게끔 만들어야 됩니다. 반복해서 자꾸 해서 자기 옆에 붙어있게끔 하라는 거라.
이게 인제 경전의 설명과 일반적으로 수행하는 방법입니다.
일반적으로 수행할 경우에는 이렇게 네 가지 방법으로 합니다.
1. 자기 자신에 대해서 기쁨을 일으키도록 하라.
2. 남에 대해서 기쁨을 일으키도록 하라.
3. 기쁨의 색안경을 끼워라.
4. 기쁨이 항상 붙어있는 상태에서 모든 일을 행하라.
이 네 가지 방법으로 무디따 수행을 보통 합니다.
자! 그게 인제 질투의 해독제로써 기쁨에 대한 수행입니다.
무디따-기쁨의 이익은 시간이 다 돼서 내가 그냥 읽어만 드릴게요.
마음이 성장하고, 능력이 개발되고, 세상의 변화에 동요하는 일이 없이 대응하게 되고, 침착해지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게 되고, 그리고 자신에게 자신이 나쁘게 생각하거나 라이벌로 생각하는 것들이 없어져 버리게 되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생활을 하게 되고, 집중력이 향상되고, 지혜가 서서히 일어나고, 마음의 더러움이 서서히 적어지게 돼서, 해탈의 문으로 가는 단초가 된다.
이렇게 경전에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틀린 부분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이익들이 있는 거기 때문에 질투의 해독제로써 무디따 수행을 하라 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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