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25 일상수행법문

배가 부풀어 오르고 수축하는 것을 관찰하는 방법(20250621)

담마마-마까 2025. 6. 22. 12:59

https://youtu.be/WnmFbR6UVf0?si=26VABzqS8LPfVXzI

 

* 배가 부풀어 오르고 수축하는 것을 관찰하는 방법(20250621)

 

오늘은 제목이 「배가 부풀어 오르고 수축하는 것을 관찰하는 방법」이라는 제목으로 '명칭을 붙이는 것'에 대한 것들을 관점으로 얘기하겠습니다.

 

배가 부풀어 오르고 수축하고 하는 건 알죠? 그것뿐이라? 팽창하고 수축하고 하는 건 알죠. 팽창하고 수축하는 거는 누가 하는 겁니까? 몸이 하는 거죠. 몸이. 내가 관찰을 하든 안 하든, 안 하고 있어도 지는 수축하고 팽창하고 수축하게 되어 있습니다.

근데 그것을 마음으로 팽창하면 팽창한다고 알고 수축하면 수축한다고 아는 것, 이런 것은 마음이 하는 거죠.

마음이 아는 건데 '팽창하는 것을 아는 마음'하고 '수축하는 것을 아는 마음'하고 같은 마음이라? 다른 마음이죠! 완전하게 다른 마음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물질적인 현상들은 팽창하고 수축하고 합니다. 팽창을 하더라도 한번 보십시오. 팽창을 하면 한 번에 푹 팽창되는 게 아니고 서서히 팽창이 되고 서서히 수축이 됩니다. 이 움직임이 있는 거죠. 동작이 있고 과정이 있습니다.

 

근데 마음은, 팽창한다고 아는 것은 딱 한 순간입니다. 수축한다고 아는 것도 또 다른 마음이 또 한 순간입니다. 쉽게 말하면 마음은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생겼다가 사라지고 나서, 또 다른 마음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뿐입니다.

물질적인 현상들은 팽창하고 수축하고 하는 과정이 있지만은 마음은 딱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생·멸" 밖에 없습니다. '생'이 길게 이어지고 '멸'이 길게 이어지고 하는 법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기본적인 원칙이 그것들을 분명하게 이해를 해야만이 배를 관찰할 때 거기에 「나」라고 하는 것이 개입이 안 되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이 있더라도 그것에 관계없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그냥 그것들을 관찰을 해나갈 수가 있다는 거라.

대부분 처음 수행할 때 "배를 먼저 관찰하라" 그러죠? 배나 코나.

왜 이런 데를 관찰하라고 그럴까? 그러려면 그러려고 하는 마음 없이 그럴 수 있어요? 호흡 말고 여러분이 하는 모든 행위들, 여러분들 의지 없이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어요? 없잖아.

 

의지가 개입이 되면 어떻게 될까? 수행을 통해서 의지나 의도를 분명하게 본 사람이 아닐 것 같으면은 '나의 의지'라고 생각하고 또 내가 마음대로 조정을 하게끔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에 인해가지고 생각이나, 쉽게 말하면 그 생각에는 망상도 들어갑니다. 그다음에 자기의 견해나, 또 자기의 감정에 따라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거라. 의지가 개입되면 그렇게 돼버립니다. 의지를 보지 못한 상태에서는. 그래서 누군가가 반응을 탁하면은 그 반응에 따라서 마음에 탐진치가 탁 일어나든지 이런 식으로 반응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 가지가 딱 의지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거라.

 

그래서 수행할 때 가장 쉬운 게 의지나 의도가 없어도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거, 관찰하는 것만큼 쉬운 게 없어요. 실제로는. 그래서 "배를 관찰하라" "코끝을 관찰하라" 지가 지가 하든 안 하든 간에, 그리고 깜빡 놓쳤다 하더라도 다시 또 관찰할 수 있기 때문에. 왜? 그거는 자연스럽게 진행이 죽음이 오기 전까지는 진행이 되는 거기 때문에. 그래서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이 호흡을 관찰한다는 것이 여러분들 생에서는 시작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래서 굉장히 중요한 거기 때문에 의지나 의도가 개입 없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수 있게 될 때, 그마만큼 또 수행 성과가 빨리 일어나 수 있는 건 없어요.

 

호흡이 자연스럽게 들이쉬고 내쉰다 했죠. 그러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걸 내 생각이나 이런 거 없이 그냥 그대로 관찰한다고 해봅시다.

 

처음에는 어떤 게 보여질까? 들이쉬면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아차리겠지. 내쉬면 내쉰다고 알아차리겠지. 물론 중간에 망상이 들어 올 때도 있고 하겠지만은 그럴 때도 있고, 어떨 때는 그냥 들이쉬면 들이쉰다고 알아차리고 내쉬면 내쉰다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그러다 보면은 들이쉬는 숨과 내쉬는 숨이 다르다는 걸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들을 그냥 끊임없이 그냥 그렇게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 거라. 그래서 들이쉬는 숨도 일정하지 않다는 걸 알고 내쉬는 것도 일정하지 않다는 걸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것까지는 가능하죠. 아주 쉽습니다. 그것까지 할 때는.

 

그것까지 하고 나면은 대부분 마음이 이제는 들이쉴 때 들이쉰다고 알아차리려고 하지 않고 그냥 들이시는 것만알려고 그럽니다.

쉽게 말하면 들이쉬면 '들이쉰다'고 명칭을 붙여야 되는데 명칭을 놓아 버립니다. 내쉴 때도 내쉰다고 알아차려야 되는데 그 명칭을 놓아 버리게 되는 거라.

왜 그럴까? 일정하게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걸 계속하기 때문에, ‘아, 나는 대상에 탁 밀착돼 있고 집중력이 있다’고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근데 명칭을 붙이기 싫어도 명칭을 계속 붙이고 있을 것 같으면은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떼 버릴 것 같으면은 집중력이 있는 것처럼 그냥 착각하고 그냥 그대로 하게 됩니다. 그 대신에 들이쉬는 거나 내쉬는 호흡이 변하는 것이 안 보입니다. 그냥 들이쉬고 내쉬고 하게 됩니다. 명칭을 뗀 채로 그냥 들이쉰다고 알아차리고, 내쉰다고 알아차리고 있을 뿐입니다.

 

사실은 그 마음에는 뭐 어떤 마음이 있을까? '수행하기 싫어하는 마음'이 있는 거라.

근데 이걸 놓쳐 버립니다. 수행하기 싫어하니까, 명칭이 귀찮으니까, 명칭을 떼 버리고 그냥 ‘있는 그대로 나는 알아차린다’ 하면서 들이쉰다고 알아차리고 내쉰다고 알아차리고 있는 거라.

뭐 수행하기 싫어가지고 뭐 그 마음이 같이 딱 결합이 된 상태에서 무슨 발전이 있을 거라? 한 시간 내내 했는데 들이쉬고 내쉬고만 알아차리고 있는 것뿐이라.

 

들이쉬고 내쉬고 할 것 같으면 명칭을 분명히 붙였으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이 호흡만 하는 것이 아니고 온 데가 다 하고 있다는 것이 보입니다. 쉽게 말하면 팽창하고 수축하는 것이 꼭 거기뿐 아니라 다른 것들도 다 보여. 심지어 혈액이 흐르고 하는 것들도 다 보여.

그래서 마음이 거기 가는 걸 갖다 자꾸 끄잡고 올려고 하는 마음이 생겨나야 되는데, 그런 것들이 전혀 없이 되는 거라. 명상을, 수행하기 싫어하기 때문에 그냥 거기에만 매달려 있는 거라.

 

그리해도 여러분들은 지금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을 분명히 알아차려서 집중력이 있다 하더라도 명칭을 그럴 때는 떼서는 안 됩니다. 명칭을 계속 붙여야 됩니다. 되든 안 되든 간에. 그래야 그냥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이 오토매틱화 되고, 그냥 아무 변화 없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만 보이게 되는 것들을 피할 수가 있게 됩니다.

자세하게 보면은 수행하기 싫어하는 마음이 딱 거기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거죠. 명칭을 딱 붙이게 되면.

왜 그럴까? 명칭을 계속 붙이고 있을 것 같으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이 변하는 것들을 아는 거라.

 

호흡은 어떠한 경우든지 동일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냥 호흡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들이쉬는 숨과 내쉬는 숨이 다르다는 거는 분명하게 알고는 있는데, 들이쉬는 숨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생겨나고 사라지고 나서, 내쉬는 숨을 알아차리는 마음도 생겼다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다른 마음이 생겨났다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 때까지는 계속 해야 됩니다.

 

마음은 어떠한 경우든지 생멸밖에는 없습니다. 팽창·수축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은 생멸밖에 없기 때문에 굉장히 빠릅니다. 그래서 들이쉬는 숨 하나에도 무수한 각각 다른 마음의 생멸이 있을 수밖에 없는 거라. 근데 그 명칭 없이 그냥 그대로 그냥 들이쉰다고 알아차리고 있다? 마음은 어디 가 있는데? 딴 데 가 있을 수밖에 없는 거라. 망상을 하든지, 아니면 그냥 관념적으로 하게 되든지, 그럴 수밖에 없는 거라.

 

그래서 마음은 분명하게 생멸밖에 없고, 들이쉬는 숨을 알아차리는 마음하고 내쉬는 숨을 알아차리는 마음은 다른 마음이다 하는 것을 알 때까지는 계속 명칭을 붙여라.

왜? 한 번에 두 가지 마음이 동시에 일어날 수는 없거든. 근데 들이쉬는 걸 알아차리는 마음하고 내쉬는 걸 알아차리는 마음이 어떻게 동일한 마음이 될 수가 있어? 절대 그렇게 될 수는 없습니다. 마음은.

마음은, 생멸을 하는 것은 딱 하나의 대상밖에 없습니다. 그 생멸이 끝나야 다른 마음으로 인해서 또 다른 생멸을 보게 되는 것이지, 똑같은 마음이 생멸을 반복할 수는 없다는 거라.

 

만약에 그렇게 될 것 같으면 영원한 것이 존재를 할 수밖에 없고, 신이란 것이 존재를 할 수밖에 없어요. 근데 우리 불교에서는 그런 것들이 인정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 마음이 다른 마음이 생멸·생멸을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빨리 알려고 하지 를 않는다는 거라. 그게 바로 명칭을 붙이지 않아서 그런 거라.

그래서 어떤 경우든지 명칭을 자꾸 붙이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런데 호흡을 관찰하다 보면은 들이쉰다고 알아차리고 내쉰다고 알아차리고 하다가, 나중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들이쉴 때의 느낌을 알아차리고 내쉴 때의 느낌을 알아차립니다. 바뀌어 나갑니다. 움직임을 알아차릴 때와 느낌을 알아차릴 때는 속도가 똑같을까? 절대 안 같습니다. 느낌을 알아차릴 때는 빠릅니다. 그 느낌이 빨리 변하는 것들이 보입니다.

빠르게 물질적인 현상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것들을 알게 되면은 명칭 붙이는 게 힘이 듭니다. 그래서 그냥 놔 버려요, 명칭을 자꾸. 그냥 그것을 ‘그 느낌을 알면 되죠’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까하고는 다르게 느낌이 있을 때는 명칭을 붙이는 것을 놓아 버리고 느낌 자체를 관찰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마음이 게을러지는 겁니다.

마음이 게으름을 부르기 시작하면은 느낌도 빠르게 변하는 것이 보이다가 탁 어느 순간에 그냥 그 느낌만 알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은 코끝을 스친다. 그럼 숨이 스치는 때 시원한 게 있으면 시원하다고만 알아차리게 되는 거라. 스칠 때 시원한 것만 있는 게 아니고 따가움도 있고 무거움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것들을 다 못 보고 그냥 ‘시원하다’고만 알아차리는 거라. 내쉴 때 ‘텁텁하다’고만 알아차리는 거라.

 

왜 명칭을 안 붙이는데? 마음이 게으름 부리고 있는 것들은 딱 놓쳐 버리고 그렇게만 자꾸 알아차리게 됩니다. 분명히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이 다른 것을 아는데 들이쉴 때 각각의 느낌들을 알려고 하지를 않는 거라. ‘마음이 거기에 느낌을 알기만 하면 되지’ 하는 마음이 앞서 버리게 되는 거라.

수행은 그렇게 진행을 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 어릴 때 세발자전거 타 봤죠. 세발자전거 누가 뒤에서 잡아주고 이렇게 쭉 밀어주고 하는데, 잘 훈련이 되면은 나중에 그 뒤에 있는 두 발 떼 버립니다. 두 발 떼 버리고 그냥 바퀴 두 바퀴만 있는 것만 가지고 이렇게 타도 넘어지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좌로 가든지 뭐 우로 가든지 아니면 빨리 가든지 자유자재로 될 때까지는 무수한 세 발이라는 것들을 곁들여가지고 훈련을 해 온 겁니다.

 

여러분들이 명칭을 붙이지 않게 되는 것은 '마음에 망상이 일어나지 않을 때' 명칭을 붙이지 않아도 됩니다.

근데 장담할 수 있습니까? 마음이 망상 안 할 수 있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명칭을 붙이라는 거라. 훈련이 될 때까지는, 뒤에 두 발을 떼 버리고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될 때까지는 어떤 경우든지 명칭을 붙여서 호흡을 관찰하는 훈련들을 자꾸 해야 됩니다.

 

여러분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번뇌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한 번에 사라지는 법이 없습니다. 꾸준하게 훈련해가지고 탁 떨어져 나가는 것들이 하나씩 하나씩 떨어져 나가지, 한 번에 탁 떨어져 나가는 법이 없습니다.

대상을 알아차릴 때도 호흡을 알아차릴 때도 어떠한 경우든지 망상 없이 대상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될 때까지는, 그리고 그 호흡이 자연스러운 호흡이라는 것들을 알아차리고, 그 속에 '나'라고 하는 것이 개입이 안 되는 상태인 거를 알게 될 때까지는 어떠한 경우든지 그 명칭을 부여해야 됩니다.

 

망상이 없이 잘하고 있을 때는 대상 자체가 빠르게 바뀝니다. 그리고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분명하게 압니다. 쉽게 말하면은 몸에서 일어나는 각각의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이 팽창 수축하는 것들이 그대로 보입니다. 마음에서도 그것들이 생멸하는 것들이 다른 마음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까지는 어떠한 경우든지 명칭을 붙여라" 하는 거라.

 

수행은 그냥 맹목적으로 대상에 마음을 갖다 붙인다 해가지고 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도움을 받아야 되는 것들은 분명하게 도움을 받아야 바르게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이걸 세 페이지로 해서 쭉 적어 놨기 때문에 호흡을 붙이고 할 때 어떨 때 내가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가 하는 것들을 알 수가 있게 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포인트가 뭐냐면, 호흡을 관찰하고 명칭을 붙이고 있을 때 여러 가지 현상들이 생깁니다. 다리가 아프다든지 생각이 떠오른다든지 그럴 때 대부분은 보면 다리가 아프면 ‘다리가 아프다’ 하고 그걸 알아차립니다. 근데 한참 알아차려도 다리 아픈 게 안 없어져. 생각이 떠올라도 ‘망상, 망상’해도 망상이 금방 없어지지 않는 거라.

 

그럴 때는 호흡을 알아차리고 있어요? 안 알아차리고 있죠. 호흡은 놓아 버리고 다리 아픈 것이나 망상을 알아차리고 있어요. 그거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게 빨리 안 없어질까? 다리 아픈 게 다리 아프다고 다리 저리다고 알아차리면 되는데 이게 안 없어지는 거라. 왜 그럴까?

관념적으로 자꾸 하는 거라.

 

다리가 아프면 다리가 아프다고 알아차릴 때 명칭을 붙여서 다리가 아플 때 어떤 현상들이 일어나는지를 자꾸 보려고 해야 됩니다.

쑤시는 현상이 나타나는 건지, 아니면 누르는 현상이 나타나는 건지, 그걸 먼저 보려고 해야만이 쑤시는 현상일 같으면 쑤시는 것이 따끔따끔따끔 할 것 같으면 그것들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생멸하는 것들이 보인다고.

 

그러면 물질적인 통증에서 마음의 생멸을 보는 것으로 마음이 탁 이동돼 버립니다. 그럼 이거는 영향을 못 미치는 거라. 그러면 다리가 아픈 거는 싹 사라져 버리게 되는데, 실재하는 것들을 보지 않고 자꾸 관념적으로 ‘다리 아프다’, ‘망상이 일어났다’, 어떤 망상인데? 성내는 망상이라, 아니면 욕심을 가지고 있는 망상이라, 아니면 게으름 부리는 망상이라, 어떤 망상인데? 구분 안 하고 자꾸 그냥 맹목적으로 자꾸 하는 거라.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대부분 수행을 할 때 초기에 일어나는 다리 아픈 거나 망상이 일어나더라도 거기에 마음을 두면 안 됩니다.

그냥 내가 지금 하고 있는 호흡, 배면 배가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에 마음을 둘려고 자꾸 노력해야 됩니다. 온 전력을 다해서 그것들을 해도 힘이 드는 판이라. 근데 그거 놔줘 버리고 다른 것 뭐 일어난 거, 일어났으면 그냥 일어났다고만 알아차리고 다시 빨리 돌아와라는 거라. 호흡으로.

 

나중에 호흡 말고 다른 현상들을 마음을 두어야 될 때는 이런 통증이나 망상이나 이런 것들이 아니라, 수행에서 일어나는 각각의 현상들이 있습니다.

기쁨이 일어난다든지 아니면 뭔가 뭐 빛이 보인다든지, 이럴 때 그것들이 관찰의 대상이 돼야 되는 것이지, 그냥 본인 다리가 꾸부러져 있으니까 좀 있으면 다리가 통증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피가 안 통하니까. 이게 대상이 되고, 마음이 호흡에 가있다가 그것들을 분명히 알아차리지 못하니까, 마음은 어떠한 경우든지 생각이 일어날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망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그것들이 대상이 돼 가지고, 그러면 안 된다는 거라.

 

전심전력해서 어떠한 경우든지 호흡에 마음을 두어라. 다리 아픈 거 마음에 안 둬도 그냥 ‘다리 아픔’하고 알아차리고 나서 호흡으로 돌아오더라도 다리는 전혀 관계없습니다. 망상이 지 맘대로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나줘 버리고 나면 지 스스로 사라져 버립니다.

 

굳이 관찰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을 왜 거기에다가 시간을 뺏기면서 자꾸 마음을 흩트리느냐는 거라. 전심전력해서 호흡에다가 마음을 두도록 자꾸 연습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 거기에 집중하는 힘들이 생겨나서 사띠가 이어지게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사띠는 계속적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그다음에 그 밑에 적어 놓은 게 있습니다. 3페이지 마지막에 보면,

"판단하지 않는 것, 좋은 감각에 끌리지 않는 것, 나쁜 감각에 빠지지 않는 것, 이게 위빳사나 수행의 기본이다"하는 것들을 잊지 말아라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밑에 조금 수행이 진행되다 보면 수행 중에 각각 일어나는 느낌들이 있습니다. 그럼 그거는 그때 일어나는 느낌일 뿐인데 다음 수행할 때도 그거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거 바라지 말아라는 거라.

그래서 이 기본을 자꾸 지키려고 해야 됩니다.

 

이걸 지키면은 어떠한 경우든지 호흡을 관찰하는데 조금 수월해지고 그 호흡으로 인해서 다른 거 필요 없이 ‘아, 내가 이것으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하는 것들을 확신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럴 때까지 열심히 호흡을 관찰할 수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