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ANqPyh8a7sg?si=HrYJtNPsOsqqkweY
*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평온함에 이르는 길이다. (20250816)
오늘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평온함에 이르는 길이다." 하는 내용으로 하겠습니다. 부처님 가르침 따라 하고 있습니까? 뭐뭐 하고 있는지 한번 확인해 보십시요.
보통 「부처님 제자나 수행자들이 실천해야 되는 10가지 항목」이라고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 "보시", 보시 오늘도 했죠.
그런데 보시를 할 때 바리때를 이렇게 쓰고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바리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건데도 꼭 이렇게 터치를 하고 옆으로 놓는 경우가 있거든. 터치는 스님이 그 물건을 딱 터치를 할 때 터치가 필요한 것이지. 바리때가 있을 때는 바리때에 들어갈 때는, 들어가는 물건일 때는 바리때 안에 넣는 것이 맞습니다. 안 들어가면 그건 어쩔 수가 없지. 위에다 올려놔야 되는데, 자신이 여기다 탁 터치하고 옆에다 놓는 거는 그건 조금 안 맞아.
왜 이 바리때에 넣으라고 그럴까? 바리때에 넣는다는 것은 그 보시를 완성한다는 의미와 마찬가지고, 그리고 그 보시한 것들의 공덕들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다는 그런 의미가 되는 거죠.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되는 거지.
스님들 어디 비구계를 준다든지 아니면 상가깜마를 한다든지 할 때 재가자들은 못 들어오게 하죠? 그리고 스님들은 요렇게 말굽 형태로 바리때 같은 형식으로 이렇게 앉습니다. 그 안으로는 절대 못 들어오게 합니다. 그게 뭐냐면 우리 옛날에 '소도'라고 하는 개념이 있었죠. 소도라는 개념과 같습니다. 신성한 구역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상가의 할 일은 상가에서 해야 되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이 타치를 못합니다. 그래서 그 구역에는 다른 사람들이 못 들어오게끔 하는 거라.
마찬가지로 바리때라고 하는 것은 보시는 누가 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했죠. 여러분들이 한 것들에 대해서 이 바리때 안으로 들어감으로 인해 가지고 그 공덕이 오로지 자신에게 생기도록 만든다는 그런 의미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탁발 나갈 때도 반드시 바리때를 가지고 가서 바리때에 받아가지고, 바리때가 넘칠 때면 rm 스님이나 아니면 보좌하시는 분들이 꺼내도록 하는 것이지. 지가 옆에 턱 터치하고 옆에 놔버리고 그러면 안 돼 이. 알았지? 그래서 보시도 자신이 행한 것들을 선한 마음으로 했을 때 그 보시의 공덕이 생길 수 있도록 자꾸 만들어주는 것들이 좋습니다. 그게 첫 번째.
그다음에 두 번째 "봉사"라고 그렇게 얘기를 하고 하는데, 좁은 의미에서 얘기할 것 같으면 "스님을 시봉하는 것"들을 얘기하기도 합니다.
왜 스님 시봉을 하고, 그리고 또 넓게 봤을 때 여기 선원에 왔을 때 다른 사람들이 좀 편하게 하기 위해서 누군가가 그늘막을 치는 봉사도 하고 공양하는 봉사도 하고 이런 것들을 할까? 왜 그래요? 왜 봉사하는 거라? 봉사할 때는 어쨌든 선한 마음들을 가질 거 아니라? 선한 마음은 선한 업을 짓게끔 되는 거죠.
그런데 스님 시봉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리고 조금 전에 차양막을 치고, 이 선원도 깨끗하게 정리정돈하고, 방석이라도 펴고 하는 이유가 뭐라? 선한 공덕만 짓는 건 아니죠. 선한 공덕뿐 아니라 이 자리는 뭐가 필요한 겁니까?
법이 필요한 겁니다. 법은 왜 들어요?
그 법을 듣고 내가 부처님 가르침 따라 실천하기 위해서 확립된 것들을 만들기 위한 겁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 가지고 수행을 할 것 같으면 수행을 통해 가지고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도와 과에 이르게 되는 거고, 꼭 그렇게 도와 과에 이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분명히 해야 될 것과 하지 말아야 될 것들은 법을 통해서 구분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그마만큼 법을 듣는 것은 마음을 청정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지만 도와 과를 얻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세속적인 것과 담마적인 것들을 구분하기 위한 것들도 필요합니다. 그게 법이라고 하는 것들입니다.
단순히 선한 업을 짓기 위해서 스님 시봉하고 봉사하고 하는 것들이 아니라는 얘기라. 그래서 그마만큼 수행자들이나 재가불자들이 갖춰야 되는 열 가지 항목 중에 두 번째로 얘기하는 것들이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려면 뭐가 되어야 돼요? 가장 먼저 봉사하기 위해서는 선한 마음을 지녀야 되겠지. 쉽게 말하면 깨끗한 마음들을 지녀야 된다는 거라. 그걸 지니지 않으면 봉사하는 건 의미가 없어.
그런데 요즘은 어딜 가서 법문을 하고 해도 스님이 솔직히 마음이 이렇게 우러나서 아, 하나라도 더 전해줘야지 하는 그런 마음이 안 일어나요. 왜 그럴까? 선한 마음이 일어나서 뭔가 자기 자신이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려고 자꾸 노력하려고 하는 마음들이 보여야 되는데, 그냥 형식적으로 보이는 거라. 그냥 스님 오는 거니까 뭐 그냥 법문 듣는 거고, 법문 듣고 나면 그냥 스님 떠나자마자 툴툴 다 털어버립니다. 아무것도 남는 게 없어요.
법을 들을 때도 선한 마음을 지녔다고 얘기도 못하는 거고, 끊임없이 망상들을 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법을 듣고 나서 그것이 실천되는 모습들도 보이지도 않고, 어떨 때는 아, 법을 가서 설하긴 해야 되는데 어떨 때는 괜한 짓을 또 내가 피곤하게 하면서 하고 있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해요. 여러분은 안 그렇죠? 여러분은 적어도 법을 들을 때는 법을 듣는 조건들을 갖추도록 해야 됩니다.
그게 쉽게 말하면 스님에 대한 시봉, 이런 선원에서의 봉사들이 해당이 되는 겁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오계",
그리고 뒤에 나중에 여덟 번째가 "팔계",
오계는 항상 지켜야 되는 것, 팔계는 불재일마다 지키는 것!
스님 욕심에는 매주마다 법회를 해서 그때는 팔계를 줬으면 참 좋겠어. 근데 그게 안 되니까 그래도 2주에 한 번씩이라도 팔계를 지키도록 하는 것들이라. 나머지는 뭘 해야 되요? 오계 지켜야 되죠 평상시 때는. 그래서 계를 어기려고 하는 것들이 이루어지면 안 됩니다. 어떤 경우든지 계는 반드시 지키도록 해서 나중에는 그것이 자연스럽게 지켜지도록 해야 됩니다.
자연스럽게 지켜진다는 것은 뭐냐 하면 마음에서 탐·진·치가 안 일어나고 말하고 행동하게 된다는 뜻이라. 탐진치 없이 말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되는 것. 일상생활에서 그렇게 되면 참 본인은 편합니다. 대표적으로 볼까? 이건 다섯 번째 얘기를 하면,
다섯 번째가 경전에는 "나쁜 행위를 떠나는 것"이라고 하는데, 수행자는 뭐가 나쁜 행위일까? 망상!
망상하는 순간 사띠 안 하게 되죠. 그래서 망상만큼 나쁜 행위가 없어. 그럼 왜 망상 자꾸 하려고 그러느냐는 거라. 잘하면 잘한다고 망상하고 있고, 못하면 못한다고 망상하고 있고, 그냥 대상을 대상으로서 그냥 보면 안 돼?
그런데 왜 망상하지마라고 그럴까?
가끔씩 어떤 사람들이 스님한테 와서 뭔가 물어봐요. 그게 뭐 불교적인 게 아니라도 세속적인 것들이라도. 근데 스님은 그렇게 답이 나와. 그게 분명하게. 답이 나와 얘기하는데도 그 사람은 그게 귀에 안 들어오는 거라. 왜 그럴까? 분명히 답을 가르쳐 줬는데, 그대로 하면 되는데, 안 들어오는 거라. 자신의 견해에 싸여 있든지, 아니면 다른 자신의 이익되는 것들만 생각하고 받아들이든지, 이러니까 그 말이 귀에 안 들어오는 거라.
수행할 때도 망상 안 하면 어떻게 돼요? 사띠 계속 이어지죠.
왜 이어지는지 알아요? 사띠가 이어진다고 하는 것은 지금 현재 대상들을 끊임없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판단하는 것도 없고, 거기에 견해가 들어가는 것도 없고, 그냥 변하면 변하는 대로, 안 변하면 안 변하는 대로, 느리면 느린 대로, 그냥 그대로 보고 있는 거라. 그게 쭉 이어진다는 뜻이라. 왜 그러냐면 거기에 대상에 나라고 하는 것들을 합쳐놓지도 않고, 그 대상에다가 내가 뭔가 조작하려고도 하지 않는 거라.
망상을 안 한다는 것은 즉각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수행하고 있으면 즉각적으로 판단하는 건 뭐라? 지금 현재 계속 사띠해서 사띠가 이어지는 것들이라. 일상생활에서는 뭔가 문제가 생겼으면 문제에 대한 답이 금방 나와야 된다는 뜻이라.
망상만 안 하면 금방 나오는데, 그래서 스님이 분명히 그걸 얘기를 하는데도 안 듣는 거라. 어떨 때는 그럴 거 같으면 뭐하려고 스님한테 와가지고 일부러 그 얘기를 할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라.
그래서 망상하지 말아라. 망상으로부터 떠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사무량심" 입니다. 자·비·희·사라고 하는 사무량심 입니다.
사실은 사무량심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망상하는 습관들만 없으면 사무량심은 저절로 무르익어 갑니다. 남을 해치려고 하는 마음이 없으면 무슨 마음이 생기겠어요? 자애의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는 거라. 남이 다치면은 ‘아이고’ 그걸 가엽게 여기는 마음이 생기는 거고, 남이 힘들고 할 것 같으면 내가 도와주려고 하는 마음이 생기는 거라. 어떤 대상이든지 그 사람이 선한 일을 할 것 같으면 내 일 같이 기뻐해 줄 수가 있는 거라. 나만 소중한 것이 아니고 다른 모든 생명들도 다 소중하고 다 평등하다는 생각들을 일으킬 수가 있는 거라. 사실은 망상만 안 하면 가능한 것들이라, 사무량심이.
그래도 망상하는 걸 도와 과에 이르기 전에는 사실은 버리지 못합니다. 그리해도 망상을 적게 하려고 자꾸 노력하고, 그 사이사이에는 사무량심을 자꾸 실천하려고 그렇게 노력을 해야 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이 뭔지 알아요? "망상 안 하는 가장 좋은 방법" 아까 얘기했죠.
이게 이익이 되는 건지, 이게 나에게 도움이 되는 건지, 그리고 결론이 있는 건지, 이런 것들로 인해서 망상을 판단한다고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거는 내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지? 내 견해를 자꾸 가지고 내세우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그게 설혹 법이라고 하더라도, 그거는 법이 되는 것이 아니고 내 견해가 돼버린다는 거라. 견해를 내세우는 것들을 갖다가 자꾸 막아주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견해가 점점점 엷어져서 어떠한 경우든지 견해 없이 실행할 수 있는 것들이, 쉽게 말하면 생각하지 않고 망상하지 않고 행하는 것들이 될 수 있도록 해야 돼.
보이면 그냥 행하면 돼. 그리고 내가 판단해가지고 ‘이것은 맞다. 이것은 틀리다’ 할 필요 없어. 왜 자신의 마음이 그걸 갖다가 결정을 해? 그 사람이 행한 것들은 그 사람의 행위는 그 사람이 받는 결과라. 근데 내가 내 견해로서 그걸 잣대로 기준을 잡을 이유가 뭐 있어?
그다음에 여섯 번째가 "만족하는 것"
그다음에 일곱 번째가 "노력하는 것"
그다음에 아까 여덟 번째는 "팔계" 얘기했고,
아홉 번째가 "팔 정도에 따라서 살아가는 것"
그다음에 열 번째 마지막이 "부처님 가르침을 배워서 새기는 것"
그냥 배워가지고 그걸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새긴다는 것은 그에 맞게끔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게 부처님이 얘기한 「수행자의 10가지 덕목」 또는 「재가신자들이 갖추어야 되는 10가지 덕목」이라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이것들을 자꾸 갖추도록 해야 됩니다.
첫머리에서 너무 길게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가' 하는 첫머리를 얘기했는데, 어쨌든 그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 어떻게 된다고?
평온함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평온함은 케마(khema)를 얘기합니다.
다 할 수는 없고 "평온함에는 등급이 있다." 하는 부분, 뒤에 보면 등급이 무슨 등급, 무슨 등급이 있어요?
일상생활이 원활하게 진행될 때의 평온함, 악에서 벗어나 선한 행위를 할 때의 평온함, 진리를 배우거나 이해할 때의 평온함, 수행할 때의 평온함, 수행이 진전될 때 경험하는 평온함, 그다음에 완성될 때 도달하는 궁극의 평온함,
이 평온함도 종류가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리하더라도 앞에 부분들은 보통 일상적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것으로써 충분히 도달할 수 있는 건데, 수행할 때의 평온함부터 그 밑에는 직접적으로 수행을 통해서 자신이 도달해야 되는 평온함입니다.
수행 재밌어요? 어떤 사람은 “수행 너무 힘듭니다.” 하고 얘기하고, 어떤 사람은 “수행하니 재밌습니다.” 하고. 근데 수행은 얘기로 하는 게 아니죠? 지가 재밌고 자기가 괴롭고 한 건데, 근데 '수행이 재밌고 즐겁다' 하고 애기합니다. 수행은 그런 거 없습니다. 수행은 그냥 대상을 그냥 사띠하는 것뿐입니다. 실제적으로 보면.
그래서 수행하는데 괴롭다 할 것 같으면 뭔가 내가 밀어내려고 하든지 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들이 많이 찾아올 거고, 수행이 즐겁다 할 것 같으면 뭔가 재미있는 것들이 사실 생겨나니까 그것들에 대해서 내가 또 집착하니까 즐겁다고 생각하면, 쉽게 말하면 밀어내거나 집착하는 것으로 인해가지고 괴롭고 즐겁고 하는 것이지, 수행 대상은 아무 소리 안 합니다.
여러분들 그걸 잊어버리면 안 돼. 그 생각하지 말고 수행은 어떠한 경우든지 내가 할 일은 즐겁고 괴로운 것들을 경험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그냥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서 그 속에서 무상 · 고 · 무아라고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보는 것이다 라고 판단을 해야 됩니다. 그거 안 하고 즐거운 것만 계속 많고, 수행 힘들어서 도저히 못 하겠다, 그러면은 계속 그렇게 해가지고 어떻게 해? 지속을 못해 나갑니다, 대상을. 대상을 있는 그대로 계속 봐가지고 무상한 성품이나 그것으로 인해서 뭔가 의식 자체가 확 바뀌어야 되는데, 바뀌지 않고 즐겁고 괴로운 느낌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무상한 것들이든 고든 무아든 그걸 보면 어떻게 될까? 본 사람? 안 있겠지. 스님은 그걸 보니까 그것이 대상이 빨리 변하고 뭐 어쨌든 간에 그렇게 하는 것들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지루해져요.
지루해진다는 게 뭐냐면 아이고, 저렇게 변하는 것도 또 사라질 건데, 생겨났다? 저것도 조금 있으면 사라지는데, 내가 그것으로 인해서 수행이 너무 잘 된다는 마음이 일어난다? 그 즐거운 마음도 조금 있으면 또 사라질 거라. 괴로운 마음이 일어나도 그것도 사라진다고 생각하니까, 계속 변하는 것들이 보이기 때문에, 그것들이 항상 있는 것이 아니고 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 같으면은 어느 것도 별로 재미가 없어, 쉽게 말하면. 그래서 느끼는 게 지루하게 느껴지는 거라. 아우, 저렇게 변하는 것이 안 변했으면 좋겠는데 이게 계속 변하니까, 그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안 보이는 게 아니고 계속 그렇게 보이거든.
그러니까 그렇게 변하는 것들로 인해서 아, 어떤 것도 집착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 딱 박혀버리면 그것들에 대해서 집착을 안 해. 탐욕이 탁 일어나도 그것들이 탁 보면 싹 사라지기 때문에 그걸 집착할 대상이 되지 못하는 거라. 나라고 하는 것들이, 나의 견해라고 하는 것이 탁 일어나도 그것들도 보면 또 사라지기 때문에 그것들에 대해서 집착할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걸 아는 거라.
무상 · 고 · 무아를 보면 가장 먼저 행해지는 것이 집착할 만한 대상이 아무것도 없다는 거라. 그게 내 몸이든 내 마음이든 내가 일으키는 생각이든 견해든 뭐든 아무것도 집착할 만한 것이 없다는 거라. 그래서 시들시들해 그것들이. 의미가 없어져 버리는 거라.
그리고 그렇게 의미 없는 것에 뭘 특별히 그걸 가치를 둘 이유가 뭐 있어? 그래서 누가 딴 얘기하더라도 “그래. 그냥 네가 어련히 알아서 해라.” 그러니까 특별하게 그것들에 대해서 “아니야. 그건 틀렸어.” 이러고 싶은 마음이 안 일어나는 거라.
그냥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존중을 해주고 그냥 놔둬버리는 거라. 왜 그러냐면 그러한 것들에 맞고 틀리다는 것들도 변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것들에 대해서 특별한 의미들을 두지 않는 거라. 그것도, 그 사람 생각도 언젠간 또 바뀔 것이고. 근데 뭐 하러 지금 내가 그걸 갖다가 ‘이것이 맞다. 틀리다’ 하고 얘기할 이유가 전혀 없어져버리는 거라. 가치 있는 것은 내 몸과 마음에도 가치 있는 것이 없듯이, 다른 사람의 것들에도 가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거라.
그리고 그게 이제 계속되면 대상하고 자신하고 동일시하는 것이 없어져 버립니다.
이때까지 싫고 좋고 하는 마음들은 그 대상을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자기 자신이라고 투영을 했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마음이라는 거라. 근데 요게 딱 분리가 돼버리는 거라. 나라고 하는 것이 완전히 그 대상으로부터 분리가 되는 거라. 그러면 그냥 대상은 놔두면 어떻게 돼요? 저절로 생겨났다가 저절로 사라져 버리는 거라. 거기에도 가치는 없을 뿐 아니라, 그게 내 마음속에 일어나는 대상이든, 밖에 있는 대상이든, 어떠한 것이든 대상은 자연적인 성품에 따라서 생겨났다 사라지는 것뿐이라는 거라.
이게 사실은 그 무상·고·무아를 보면서 일어나는 염오(染汚) 부분에 해당이 됩니다. 염오라는 것이 싫어가지고 멀리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 아니라, 그래서 그 대상으로부터 떠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에 대해서 일으키는 바른 마음, 조금 전에 얘기한 그런 마음들을 얘기합니다.
적어도 수행을 하면 그 대상에 대해서 무상 고 무아는 봐야 될 거 아니라.
그래서 그 대상에 대해서 그렇게 봄으로 인해서 마음은 평온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하는 것들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뭐만 하면 돼? 대상에 대해서 육체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으로 구분만 해도 이 부분이 충분히 가능해. 그래서 부처님이 지혜의 첫 단계가 물질적인 부분과 정신적인 것들을 구분하는 것부터 시작이 된다하고 얘기합니다. 제발 좀 구분해.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들 자꾸 헤매려고 해?
대상은 나가 아니라는 거라. 대상은 대상일 뿐이라는 거라.
단편적인 예로 내가 숨을 관찰하고 있든 관찰하지 않든, 숨은 저절로 내가 생존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저절로 들이쉬고 내쉬고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걸 잊어버리지 않도록 자꾸 하시기 바랍니다.
단지 그 숨으로 인해서 내가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을 구분하게 돼서 그것으로 인해 가지고 무상한 성품, 고의 성품, 무아의 성품을 빨리 발견할 수 있도록 하는 도구다 하고 생각을 하시기 바랍니다. 망상도 도구고 어떤 것이든 다 도구라고 생각을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프린트물을 내주는 이유가 이걸 다 할 수 없기 때문에 읽어봐라고 하는 겁니다.
'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 > 2025 일상수행법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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