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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혜가 열리는 조건 - 붓다의길따라선원 포살법회 법문. 20250906
프린트물 한번 보십시오. 「지혜가 열리는 조건」 입니다. 오늘 시간이 많이 늦었어. 이걸 다 할 수가 없어가지고, 읽어보십시오. 요점만 간추려 볼게요.
왜 지혜가 일어나지 않죠? (수행자 대답 : 무지에 갇혀서. 무식해서) 무식해서? 여기 이렇게 나와 있잖아. "마음이 안정되지 못해서! 바른 담마를 알지 못해서! 믿음이 흔들려서!" 적어놨잖아. 여기 처음 시작을 하면서 "지식하고 지혜는 분명하게 틀리다"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어떻게 구분이 될까? 지식하고 지혜는?
'지혜'는 어떠한 경우든지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게 되죠. 그리고 점점 생존 욕구가 엷어지고 없어지는 방향으로 가게 되는데, '지식'은 어떠한 경우든지 생존 욕구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거는 어떤 면에서는 수행하는 방향하고는 정반대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판단할 때 지식으로 판단을 합니다. 그래서 바른 판단을 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걸 이제 불교에서는 '윗자까나'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올바르게 판단해서 바른 결정을 내려서 그것에 따라 실행한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지혜를 처음에 이룰 때는 윗자까나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이 윗자까나라고 하는 것은 지식으로 끝날 가능성이 커집니다.
자, '이 길로 갈까? 요 길로 갈까?' 두 갈래 길이 있다. 지식이 있을 것 같으면 판단하겠지. ‘이게 높네. 이게 좁네. 이게 조금 더 나을 것 같네’ 판단해 가지고 그 길로 가면 됩니다. 그걸 이제 윗자까나라고 그럽니다.
그런데 지혜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할까? 두 갈래 길이 있다. 아무 길로나 갑니다. 먼저 보면 보이는 길로 가면 돼. 그 길이 오히려 험한 길이고 안 좋은 길이라 하더라도 그건 본인이 헤쳐나가면 됩니다.
지혜와 지식은 그래서 차이가 납니다. 단지 어느 길로 갈까 하고 판단할 때는 자신에게 유리하고 이로운 방향으로 판단을 했는데, 그래서 그게 생존 욕구와 결부되어 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지혜가 있는 사람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생존 욕구가 없는 상태입니다. 완전히 없는 경우도 있고 점점 엷어져 가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그러한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냥 가는 길이 바른 길이 돼버립니다. 그게 인제 차이가 나는 그런 형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조금 더 수월하게 수행하려면 윗자까나도 일부는 필요합니다. 어떻게 수행하는지를 모르고 수행할 수는 없는 거죠. 그리고 이게 일어나는 현상들이 어떠한 현상인지 모르고 그냥 대처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필요한 부분이긴 한데 꼭 그게 필수적으로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니다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구분을 해야 됩니다.
또 하나 차이가 뭐냐면 윗자까나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나라고 하는 것이 개입이 되게 돼 있고, 감정이 개입되게 돼 있고, 견해가 개입되게끔 됩니다.
그럼 이게 개입되면 어떻게 돼? 내 마음은 고요하지 않아요. 동요할 수밖에 없는 거라. 남들하고도 다툼이 자꾸 일어날 수밖에 없는 거라. 왜? 틀리니까. 사람도 틀리고 견해도 틀리고 서로 생각하는 것도 다 틀리기 때문에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거라.
그런데 지혜는 그걸로부터 떠나야 됩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다툼이 없고,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지식과 지혜는 분명히 구분할 줄 알아야 되고, 이렇게 판단을 하면 됩니다.
무상·고·무아라고 하는 성품들을 볼 수 있는 것들은 그리고 거기에 맞게끔 행동하는 것들은 지혜로운 것들이고, 그렇지 못하면 지식적인 것이라고 생각을 하면 거의 맞을 겁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도 붙잡지 않고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놔줘 버리고, 그냥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만 하면은 그건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는 방편이 됩니다, 붙잡지 않으니까 당연히 마음이 그것으로 인해서 동요하지는 않게 됩니다.
그래서 경전에 첫 마디가 "마음이 안정되도록 만들어야 된다" 하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하는 것이, "삿담마 - 바른 담마를 알아야 된다"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믿음", 여기서 말하는 거는 확신이 들도록 만들고, ‘아, 이 길이 내가 바른 길이구나, 이거는 내가 따라가지 말아야 될 길이구나’ 하는 걸 분명히 구분할 수 있는 상태가 돼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지혜가 열리는 조건이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몸과 마음에 대해서 구분할 수 있는 능력들이 있죠? 그것도 지혜로운 겁니다. 지혜가 열리기 시작한 겁니다.
그렇게 지혜가 열리기 시작한 사람들은 뭐가 갖추어지게 될까?
첫 번째, 오늘 팔계지녔죠. 계를 지키는 것. 계는 반드시 지켜야 되는 것이고, 그것이 계를 지키는 것이 자연스러워져야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수행할 때 뭘 해요? 보면 본다고 알아차려야 되죠. 들리면 들린다고 알아차려야 되죠, 쉽게 말하면 감각기관을 잘 방어하는 겁니다. 감각기관의 문을 방어하지 못하면 거기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탐진치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가 감각기관의 문을 잘 방어하도록 한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그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항상 대상을 지금 현재 일어난 것들에 사띠를 하라. 사띠를 놓치는 순간 감각기관도 방어가 안 되고, 계를 어기는지도 모르게 됩니다.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해서 무상 고 무아의 성품으로 알아차리지도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항상 사띠하는 습관들이 있어야 됩니다.
그다음에 지혜가 열리기 시작하면 그다음에 갖춰지는 것이, 지금은 항상 사띠하는 게 힘들다고 하더라도 자꾸 하려고 노력을 해야 되는 겁니다.
네 번째, 자애가 없는 데는 지혜가 없습니다. 지혜가 있는 곳은 자애가 있게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자애를 지닌 채 말하고 행동하는 습관들이 자꾸 길러지게끔 해야 됩니다.
하나 빼먹은 게 있습니다. 계율을 지키는 것, 그다음에 감각기관을 방어하는 것,
그다음에 세 번째가 뭐냐면 식사량을 아는 것, 본인의 식사량, 동일해야 됩니다.
크게 여러분들에게 변동사항이 없을 것 같으면 식사하는 양은 자기가 자신의 식사량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이 정도 먹으면 몸이 버틸 수 있는 것, 그리고 어떤 것이 더 수행에 유리한 조건인지 아는 것들을 분명하게 구분할 줄 아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사띠하는 것,
다섯 번째가 자애가 있는 것,
그다음 여섯 번째가 히리-옷땁빠라고 들어봤죠? 히리-옷땁빠 없이는 지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잘못한 행위들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그것으로부터 피하려 하는 마음들이 없을 것 같으면 본인도 모르게 나쁜 행위들을 할 수밖에 없는 거라. 그래서 항상 선한 마음들이 일어나야 되고, 선한 행위들이 지속되려고 할 것 같으면은 그것에 대한 경각심이 항상 마음속에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그게 여섯 번째고.
일곱 번째가 뭐냐 하면, 수행을 하다 보면은 깊이 있게 삼매들을 개발하게 됩니다. 그게 찰나삼매이든 본삼매이든 근접삼매이든 그것에 개의치 않고 찰나찰나의 선정과 다름없는 상태들을 자꾸 경험들을 하게끔 됩니다. 그게 집중하는 힘을 키워주게 되고 사띠하는 힘을 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지혜로운 자들은 그러한 역할들을 하게끔 됩니다.
스님이 쭉 열거를 했는데 그중에서 과연 내가 몇 개나 지키고 있는가 하는 것을 잘 판단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 지키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부처님이 설하신 길로 오롯하게 따라가는 사람이 될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조금 더 노력해야 되는 그런 사람이 됩니다. 어쨌든 지혜가 열리는 조건들을 여러분들이 스스로 만들어야 됩니다.
수행하니까 예를 들어볼게요.
지혜가 안 열리는 데는 이유가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배가 불러오고 꺼지는 현상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있는데, 하다가 게으름에 툭 빠지는 경우들이 있거든. 그럼 사띠를 놓쳐버리게 되죠. 그럼 지혜가 열리는 길로는 가지 않고 탁 거기서 중단되어 버리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맨 첫 번째가 수행할 때 게으름에 빠지는 것. 왜 그럴까? 노력의 힘이 없으니까. 사띠할려는 마음이 사라져버린 상태가 되는 거라. 집중하는 힘은 생겨나 있는데, 그래서 집중은 해 있어.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대표적인 게 뭐냐면 일어나고 사라질 때, 배가 불러온다면 불러오는 부분의 끝부분에서 딱 멈춥니다. 거기서 멈춰 있는 상태가 됩니다. 거기서 노력을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사라지는 처음 부분을 알지를 못합니다. 한참 진행이 되고 나면 사라지는 부분을 알게끔 됩니다. 마찬가지로 사라지는 부분의 끝부분에 딱 멈춥니다. 계속 멈춤, 멈춤, 멈춤들이 있게 됩니다. 실제로는 ‘일어나고 멈추고, 사라지고 멈추고’ 해야 되는데, 일어나는 부분에서 마지막에서 자기의 마음이 노력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멈춰버립니다. 그래서 “계속 멈춤, 멈춤만 있습니다.” 하고 얘기합니다. 경우가 틀립니다.
정확하게 수행을 했을 때 일어남이 끝나고 멈추고, 사라짐이 끝나고 멈추는 것과, 일어난 상태에서 ‘이제 일어나는 현상인데도 멈춘 상태가 된다’고 하면 틀립니다. 후자의 부분은 게으름에 빠진 겁니다. 그럴 때는 어떠한 경우든지 지혜가 열리지 않는 조건이 돼버립니다. 그래서 그럴 때는 빨리 노력의 힘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노력을 더 하려고 해야 됩니다.
현재 일어난 걸 탁 보면 이미 멈추는데 그걸 노력하는 힘이 탁 생기도록 만들면은 이미 배가 한참 불러져 있는 상태를 보게끔 됩니다.
그다음에 또 수행을 하다 보면 기쁨이나 즐거움이나 환희심이 일어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이 약해져 있는 경우들, 그리고 뭔가를 내가 달성했다는 성취감에 딱 젖어 있어버릴 것 같으면 그 환희심은 오래도록 갑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기쁨이나 환희심이나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찰나 간에 일어났다가 찰나 간에 사라집니다. 그런데 내가 힘이 부족하니까 거기서 멈춰 있으니까, 계속 그게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게 되는 거라. 뭐 얼마만큼 큰 성취를 했다고 성취감에 젖어가지고 그걸 보고 있느냐는 거라.
그래서 환희심에 빠져있을 때도 사띠는 탁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그럴 때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에 대해서 더욱더 관찰하려는 마음을 키워야 되고, 내가 이 정도의 성취가지고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을 빨리 일으켜야만이 거기에서 빨리 탈출을 하게끔 됩니다.
그다음에 또 수행을 하다 보면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으로 인해서 아주 고요하고 편안한 상태를 경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평정심이 일어난 상태에서 고요하고 편안할 것 같으면 괜찮은데 대부분은 그렇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은 그냥 스스로 다 그 고요하고 편안한 걸 만듭니다. 수행하기 싫으니까, 그냥 고요하고 편안하고 싶거든. 행복한 것도 싫고 고통스러운 것도 싫기 때문에 마음으로 그 대상을 만들어 내는 거라. 편안한 걸.
그래서 배를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걸 보더라도 무상한 성품을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불러오고 꺼지는 것만 편안하게 자꾸 보려고 합니다. 자연스럽게 호흡하는 것들을 볼 수는 있으니까. 그런데 그거 해가 어떡하려고 그러느냐는 거라. 수행해서 탁 일어나자마자 그 편안함은 탁 깨져버리는데, 왜 그걸 자꾸 쫓아가지고 1시간 동안 기분 좋게 수행했다고 자꾸 만족을 하느냐는 거라.
집중하는 힘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편안한 걸 갖다가 더 추구를 하게끔 됩니다. 빨리 내가 지금 사마타 수행을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위빳사나 수행을 해서 변하는 성품을 봐야 된다는 것으로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은 편안함을 계속 추구를 합니다. 그럴 때도 사띠는 끊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주의를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 고요한 상태, 숨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이 안 보여요. 그냥 숨은 있는 건 아는데, 그냥 고요하게 그냥 숨을 쉬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나쁘게 얘기하면 숨 쉬는 데 관심이 없다는 얘기라. 머릿속으로 생각을 뭔가를 하고 있을 경우에는 숨 쉬는 데 관심이 없습니다. 그럼 호흡은 들이쉬는 건지 내쉬는 건지를 전혀 모릅니다. 그냥 호흡이 있다는 정도만 알지, 그냥 고요하게 멈춰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내가 숨을 안 쉬나 하고 착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수행문답하는 사람들도 꽤 있습니다. 그럴 때 만약에 누군가가 탁 어깨를 쳤다 그러면 깜짝 놀랩니다. 왜? 그 고요함은 진짜 고요함 아니고 내가 만든 거기 때문에. 완전한 평정심이 들어서 중도적인 입장에서 고요함이 왔을 것 같으면은 그런데에 놀라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외부적인 자극에는 굉장히 약할 수밖에 없는 거라. 빨리 내가 변하는 성품들을 알아차리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때도 사띠는 끊어지고 있다는 것들을 알아차려야 됩니다.
쉽게 말하면 수행하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현상들은 바른 길로 바른 방법으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하고 판단들을 해야 됩니다.
‘지금 즐겁고 고요하고 편안하다’ 그것으로 인해서 수다원에 이르렀어요? 상카루뻭카에 이르렀어요? 왜 아니면서 그걸 추구를 하고 있느냐는 거라.
그걸 쉽게 말하면 '가짜 도'라고 그럽니다. 가짜 도를 추구를 하면 수행은 멈춥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하려고 하지 말고 뭔가가 자꾸 변하는 성품들을 보든지, 그게 빠르다, 느리다 그거는 관계없습니다.
그것들을 자꾸 보려고 해서 변하는 것들로 인해서 그것들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있다는 것들을 분명하게 보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되지, 그 외의 다른 가공의 도를 가지고 즐기면 수행은 안 된다 하는 것들입니다.
"만족하지 말고 거기에 빠지지도 말아라" 하는 얘깁니다.
진짜 좋은 것은, 사띠가 딱 멈출 때가 있습니다.
적멸지에 들어갈 때, 도와 과에 들어갈 때, 도에 들어갈 때는 탁 사띠가 멈추는 상태가 있습니다. 사띠가 없는 것처럼 착각을 하는 거라. 차라리 그런 쪽으로 가도록 노력을 해야 되지, 다른 방법으로 수행을 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현상의 본질인 무상·고·무아를 분명하게 볼 수가 있게 돼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야 되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일어나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부분입니다.
지혜는 어떠한 경우든지 그렇게 해서 순차적으로 해 나갈 때 지혜는 열리게 됩니다. 그렇게 했을 때 마음이 안정된 것이 진짜 마음이 안정된 겁니다. 그 마음이 안정되는 것은 쉽게 말하면 외부적인 자극이든 안에서 일어나는 자극이든 그 자극에 대해서 반응하는 것들이 없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과 관계없이 나는 지금 현재 일어난 대상들을 분명하게 사띠하고 있는 상태가 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점점 더 법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더 노력하고 그것을 존중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법에 대해서 존중하는 마음이 없고, 가르치는 스승에 대해서 존중하는 마음이 없고,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그건 더 이상 수행 진척도 못할 뿐 아니라 바른 길로 들어서지도 못하게끔 됩니다. 그래서 법에 대해서 더욱더 알려고 하고 더욱더 실천하게 되고, 그러면서 자기 자신이 경험을 통해서 ‘아, 이게 무상이구나, 이게 고구나, 이게 무아구나’ 하는 것들을 알게 되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수행, 내가 가고 있는 길이 바른 길이다 하는 확신이 듭니다. 그렇게 될 때 지혜는 열립니다.
지혜를 여는 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더욱더 노력하려고 해야지, 지금 현재의 상태에 자꾸 만족을 하고 거기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하는 부분을 얘기하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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