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25 일상수행법문

졸음에 대처하기 (20251018)

담마마-마까 2025. 10. 18. 23:33

https://youtu.be/vsSFX9NuYl8?si=Puxe24F4ZjIZD-SJ

<5:35초이후부터 법문이 시작됩니다.>

 

* 졸음에 대처하기 (20251018)

 

오늘은 졸음에 대한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두 가지 말이 있어요 졸음에는.

"졸음은 무상을 보여주는 선물이다." 하는 얘기가 하나 있고,

"졸음은 수행자의 오랜 벗이다."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해당이 돼? (수행자 : 친구...) 응? (수행자 : 친구라고...)

친구야? 그냥 그러면 졸음 오면 그냥 조불겠네? 왜, 왜 조불게 되는 거라? 즐기기 때문에 그런 거라! 졸음은, 졸음은 몰아내려고 해서도 안 되고 즐겨서도 안 됩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없이 ‘그것은 하나의 대상이다’ 하고 생각하고 그것을 사띠해서 알아차려서 그게 변하는 것들이 보이면은 졸음은 확 달아나게 됩니다.

그러면 졸음이 선물이 돼 버리는데, 무상한 성품을 보기 위한.

그렇지 않고 그냥 ‘아이고’ 앉아서 수행하면 그냥 내내 조부는 게 일이고, 조불지 않으면 무기에 빠져가지고 멍하게 있다가, 그것도 졸음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티나밋다(thīna-middha)'라고 하는 거라. 게으름 부리는 거라. 게으름 부리는 거하고 졸음이 한 묶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해버리면 그냥 그건 그냥 오랜 벗이 되는데, 졸음은 벗이 될 만한 성질은 못 되잖아. 좋은 마음 심소가 아니잖아 졸음은.

 

면밀하게 따져보면 졸음이 하나의 대상인 줄 모르는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치 중에서도 ''의 영역에 사실은 속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졸음이라는 게 좀 미묘해요. 그래서 게으름 부리고 즐기는 마음들이 일어나면 졸음에 져서 졸음에 떨어지는 건데, 그렇게 생겨나는 원인들은 틀림없이 있을 거라. 경험들은 해봤는지 모르겠는데, 망상 많이 하고 나면 졸립니다. 막 욕심부리고 나도 졸립니다. 쉽게 말하면 탐, 진은 이 졸음하고 연관이 돼 있지, 졸음 혼자서 지 혼자서 어리석음이 그냥 쭉 일어나지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해야 될까? 오랜 벗이라고 했는데 그 벗이 좋은 벗은 못 되는데, 그러면 그 벗은 일단은 대상으로서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그런데 졸음이 와 있는 상태에서는 그걸 알아차리려고 하면 참 힘듭니다. 그렇죠? 그럼 일반적으로 내가 마음을 내는 것이 10을 냈다고 할 것 같다면 그보다 훨씬 많이 내야만이, 쉽게 말해서 마음을 북돋아가지고 용맹심을 일으켜야만이 졸음을 대상으로써 볼 수가 있고 그것을 극복해낼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졸음이 한참 쏟아지고 이럴 때는 그런 마음을 내는 것이 굉장히 힘이 들죠. 그래도 어떡하나? 그렇게 해야 되는데. '위짜라 위딱까'라고 하는 건 알죠?

'위딱까(vitakka), 위짜라(vicāra)'라고 하는 것들. 대상에 대해서 정확하게 겨냥을 하라. 졸음이 수행 대상이 됐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됩니다.

이때까지는 사띠를 어디 하고 있었어요? 앉아 있었으니깐 배를 통해서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걸 알아차리든, 코를 통해서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걸 알아차렸는데,

졸음이 강하지 않을 때는 ‘졸음이 오는 갑다’ 하고 그냥 무시를 해버립니다. 무시를 해버리고, 그냥 호흡을 합니다.

 

그런데 졸음에 떨어진다는 건 뭐라? 졸음이 이미 수행의 대상이 이미 마음에서는 바뀌었다는 거라. 호흡이 아니라 졸음이 수행 대상이 돼 있는 상태인데, 그게 수행 대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라.

대상을 먼저 파악을 해야만이 수행은 사띠를 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 대상은 어떤 대상이든지 일어났으면 사라지게 돼 있습니다. 배를 보더라도 일어나는 것을 분명하게 보고 사라지는 것을 분명하게 볼 것 같으면 거기에는 사띠가 계속 머물러 있게 됩니다. 그래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보기만 해도 사실은 졸음이 안 일어나는, 안 일어나야 되는데, 그걸 끝까지 보지 못하니까 졸음이라는 놈이 탁 일어나버리는 거라.

 

또는 대상을 일어나고 사라지는 걸 분명하게 봤는데 무상한 성품으로 보지 못할 때, 무상한 성품이라는 것은 변하는 성품을 이야기합니다. 변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으면 단조로우니까 게으름이 일어나버리는 거라. 그러니까 대상을, 호흡이 대상이 돼 있던 것을 놓아버리니까 졸음이 착 몰려오고 하는 거라.

 

아까 '위딱까, 위짜라'라고 그랬죠? 대상이 지금 바뀌었죠? 호흡에서 졸음으로 대상이 바뀌었습니다. 그럼 대상을 알아차려야 될 거 아니라? 주 대상이 바뀌었잖아.

위빳사나 수행은 어떠한 경우든지 주 대상 하나를 관찰하다가 마음이 저쪽으로 많이 쏠려버려서 그게 주 대상이 될 것 같으면 그게 주 대상이 돼버려야 됩니다.

졸음이 오다가도 통증이 있다. 다리 통증이 있다. 무시할 정도가 되면 이게 주대상이 아닌데, 무시하지 못할 정도가 돼서 강하게 오면은 통증이 주대상이 돼버려야 되는 거라. 그럼 통증을 관찰해야 되는 것이지, 졸음이나 호흡을 관찰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라.

 

마찬가지로 호흡을 관찰하고 있다가 졸음이 와 있는 상태에서는 졸음이 강하면은 어떻게 돼요? 그게 주 대상이 됩니다. ‘아, 졸음이 오는구나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을 해야 되는 거라. 그리고 졸음을 보라는 거라. 그러면 졸음이 변할 거 아니라?

졸음한테 지면은 어떻게 돼요? 고개가 ‘까딱’하는 겁니다. 그럼 또 번뜩 또 정신 차려 가지고 또 졸음을 관찰을 하고, 뭐 그리하더라도 끊임없이 그 졸음하고 싸우려고 하는 마음이 있으면은 그게 설혹 졸음이 무상한 성품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졸음이 주 대상이 돼야 되는 거라, 호흡으로 돌아가려고 하면 안 된다는 거라.

 

끝까지 싸워! 그 졸음하고 싸워가지고 졸음이 변하는 성품을 보라는 거라.

그러면 눈이 번쩍 뜨이듯이 졸음이 달아나는 것이 보입니다. 그게 수행하는 바른 방법입니다.

그런데 자꾸 사람들은 졸음을 즐겨서 그냥 자버리든지, 아니면 졸음을 몰아내고 그냥 호흡을 하려고 한다든지, 이러면서 수행에서 하지 마라하는 두 가지를 다 합니다. 붙잡든지, 밀치든지! 뭔 수로 수행을 할 거라? 그렇게 해가지고.

 

그래서 수행은 크게 일어나는 대상이 될 것 같으면 그것이 주 대상이 된다하는 걸 갖다가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수행하다가 그것만 일어나는 거 아니잖아. 망상도 일어날 거고, 오만 것들이 다 일어납니다. 장애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그 장애들도 극복해야 될 대상일 뿐입니다. 그리고 사띠해야 될 대상이라는 생각을 해야 되는 것이지, 밀어내거나 붙잡을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라.

그 대상으로 인해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면 안 됩니다. 배를 관찰할 때도 좋아하고 싫어함 없이 있는 그대로를 관찰해야 되듯이, 그 대상도 주 대상이 됐으면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 없이 그냥 대상으로서만 보려고 자꾸 해야 됩니다.

 

무상한 성품이 어디 배에만 있어요? 망상도 무상한 거고, 고통도 무상한 거고, 졸음도 똑같이 무상한 성품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습니다. 그러면 그 장애는 나한테는 뭐라? 선물이라! 무상한 성품을 보기 위해서 나한테 온 선물이라. 좋은 선물이 왔는데 왜 그걸 갖다가 팽개치느냐는 거라. 모른 체 하느냐는 거라.

수행을 하다가 장애가 없으면 극복할 대상이 없어져 버립니다.

극복할 대상이 없으면 수행은 진척이 안 됩니다.

그러한 장애 하나하나를 갖다가 바르게 보지 못하고 극복하지 못하고 수행은 진척을 이룰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좋은 대상이 나타난 겁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오히려 큰 진보가 있기 위해서 나타난 나한테는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아까 그러한 대상이 나타나면 극복해야 되는 방법 2가지를 얘기했습니다.

하나는 뭐 크지 않으면은 그냥 무시해버리고 1차적인 주 대상인 호흡을 관찰하는 것,

그다음에 두 번째는 그것이 주 대상이 될 정도로 크면은 그것이 주 대상이 돼서 그 대상이 변해가는 성품을 보는 것.

 

첫 번째 방법은 크게 문제없죠? 졸음에 떨어지지 않을 정도가 되니까.

그거는 뭐냐면 그 대상이 크게 일어나지 않게끔 사띠를 가지고 지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호흡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데 사띠가 어느 정도 붙어 있으니까 장애들이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졸음이라는 장애는 나에게 크게 문제가 되지 않고 영향을 미치지 않는 상태라. 졸음이 온다는 것은 알아. 그런데 졸음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는 된다는 거라. 그럴 때는 그냥 주 대상인 호흡을 하면 됩니다. 그건 크게 문제가 안 되는데,

 

두 번째 주 대상이 바뀌어버리는 상황이 되었을 때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는 거라.

대부분은 그냥 ‘꼬박’, 또 ‘어, 잠잤네’, 또 하다가 호흡을 하다가 주 대상이 왔는데도 주 대상 놔두고 또 호흡합니다. 호흡하다가 또 ‘꼬박’, 1시간 내내 그러고 있는 거라.

 

그런데 수행 방법이 굉장히 다양한데 그 다양한 방법들을 본인이 그걸 활용할 생각을 안 합니다.

배를 관찰할 때 '일어남, 사라짐'만 관찰하는 거 아니죠?

'일어남, 사라짐, 앉음, 닿음'까지 하면 됩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남, 사라짐, 앉아있는 상태를 보고, 닿아 있는 두 번째 포인트를 보고,

다시 일어남, 사라짐하고, 앉아있는 걸 보고, 닿음의 세 번째 포인트를 보고,

쉽게 말하면 그 포인트는 오른쪽 눈꺼풀, 왼쪽 눈꺼풀, 입술이 닿아 있음, 손이 오른손이 무릎에 닿아 있음, 왼쪽 손이 무릎에 닿아 있음, 엉덩이가 닿아 있음, 닿음 포인트는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걸 계속 바꿔주라는 얘기라.

 

쉽게 말하면 마음에 활기가 있게끔 만들어 주도록 만드는 방법입니다.

잠이라고 하는 것이 와서 주 대상이 돼 있어도, 그것들을 도저히 내가 극복 못하겠다 하는 사람은 그 방법을 쓰라는 거라. 마음에 잠이 들어올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주지 말아라는 거라.

그렇게 해도 안 되면 어떻게 해? 일어나 경행해야 되는 거라. 왜 어리석게 앉아 있느냐는 거라. 일어나 경행하더라도 빠르게 경행하라는 거라. 빠르게. 잠이 올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주지 않을려면 빠르게 경행을 하든지, 아니면 천천히 경행하더라도 모든 포인트를 갖다가 구분해서 볼 수 있을 정도가 돼야 됩니다.

 

뒷발이 들리더라도 들리는 거 하나하나하나 다 관찰하고 처음에 들리는 거하고, 중간에 들리는 거하고, 마지막에 들리는 것이 느낌이 틀리다는 걸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그렇게 해가지고 낱낱이 구분해서 할 수 있을 정도가 되면 천천히 해도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빠르게 경행해야 됩니다. 그냥 ‘왼발, 오른발’ 하면서 경보 수준으로 빠르게 걸어야만이 잠을 잘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지 않는 거라. 게으름 부릴 수 있는 조건이 안 되게끔 만들어 주는 거라.

 

그래서 그렇게 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입니다.

 

그래서 경전에는 7가지로 나눠놨습니다.

눈을 씻으라부터 해가지고, 태양 같은 밝은 것을 보라, 그다음에 경행하라, 그래가지고 결국에 마지막에는 그리해도 정 안되면은 조금만 몸을 갖다가 누워서 누워있는 상태를 갖다가 관찰하라 하고 해놨습니다, 잠을 자라는 얘기가 아니고.

그런데 그거는 경전의 설명이고, 실제 수행자들은 앉아서 좌선할 때는 앉아서 해결을 해야 됩니다. 경행까지 하고 자꾸 포인트를 바꾸려고 해서는 사실은 안 됩니다.

 

그럼 앉아서 잠을 몰아낼 때는 어떻게 몰아내야 될까?

그 포인트를 써놓은 것이 여러분들한테 내준 프린트물 자료입니다.

 

아까 그랬죠? 졸음은 어리석음의 영역에 속합니다. 그래서 ‘아, 내가 게으름 부리려고 하네’ 하는 마음을 일으키면 가장 좋습니다. 그러면 게으름 부리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을 탁 보면 게으름이 싹 변하면서 사라지는 것이 착 보입니다. 그러면 잠은 탁 깨어납니다. 이게 가장 좋은 방법인데, 그런데 그게 잘 안되는 거라.

졸음을 탐··치 중에서 어리석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는 얘기라. 그럼 뭐로 먼저 생각을 해야 되겠어요? ·진으로서 보라는 거라.

내가 잠을 즐기는 탐심이 생겨난 것이 아닌지, 잠을 몰아내야 될 성질이라고 생각해서 자꾸 잠을 깨려고 하는, 밀어내려고 하는 마음이 진심이 생겨난 것이 아닌지를 보아야 되는 거라.

 

그런데 수행 중에는 그게 생겨난 것들을 모릅니다. 왜 그럴까?

탐심이 생겼는지 진심이 생겨났는지 하는 것은 돌아봤을 때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럼 지금 현재는 잠을 관찰하든지, 그렇지 않으면은 잠을 몰아내기 위해서 다른 대상으로 바꾸든지 그 두 방법밖에 없습니다.

 

일어나지 않고 앉아서 어떻게 그러면 잠을 몰아낼 거라?

탐심이 일어나고 진심이 일어난 것은 나중에 잠이 깨고 나서 아, 내가 아까 잠 오는 과정들을 한번 다시 한번 보라는 거라. 어떻게 해서 잠이 왔는지를.

왜 목이 팍 꺾이는 상태가 됐는지를 한번 보라는 거라.

‘어, 내가 잠을 조금 즐기려고 했네’. ‘내 몸의 피로를 몰아내기 위해서 일부러 조금 잠이라고 하는 것을 용인을 해버렸네’ 하는 그런 마음이 들기도 하고, 또는 그 잠이라고 하는 것들을 주 대상으로 보지 않고 자꾸 호흡으로 들어가려고 했다든지, 이런 마음들이 생겨난 것들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잠이 더 강해진 것들을 보게 된다는 거라.

그게 탐·진으로 인해서 어리석음이라는 잠이 오는 과정들을 보는 상태가 돼버립니다.

 

그것은 쉽게 말하면 '빳짜웩카나(paccavekkhaṇa)' 입니다.

뒤돌아봤을 때 ‘요런 과정들을 겪었네’ 하는 것들을 반드시 마음에 새기도록 해야 됩니다. 그런 것이 자꾸 새겨지면 새겨질수록 실제 수행할 때 잠은 덜 옵니다. 내가 몰아내거나 붙잡으려고 하지만 않으면은, 쉽게 말하면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만 일어나지 않고, 그냥 잠을 잠 그대로만 볼 것 같으면 금방 잠이 소르르륵 아지랑이 사라지듯이 사라지는 것이 보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구분해서 볼 수 있는 것은 그 뒤에 가능한 건데,

그럼 지금은 어떻게 해야 돼? 무조건 주 대상을 봐야 됩니다.

잠이 주 대상이 되어 있는 상태라. 잠이 그냥 한 번에 잠에 툭 떨어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웬만히 피곤하지 않으면은 그렇게 안 떨어집니다. 많이 피곤할 때는 자야 됩니다. 부처님도 잠을 잤는데 여러분이 뭔 수로 잠을 안 자고 할 거라? 너무 피곤할 때는 잠을 자야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을 경우는 잠을 관찰을 해야 됩니다.

 

졸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그 경로를 밟아가게 됩니다. 그 길을 따라가게 되어 있는 것이지, 다른 길을 가지는 않습니다.

잠을 관찰해 본 사람들 눈꺼풀 따가운 거 경험한 적 있죠?

또 잠을 관찰해 본 사람들 눈을 아무리 뜨려 해도 눈이 떠지지 않는 경험을 한 적도 있을 겁니다. 또 졸음이 오는 것들을 관찰해 보니까 점점 더 송곳으로 눈꺼풀을 갖다 쑤시는 것처럼 콕콕콕 쑤시면서 아픔이 오는 것들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겁니다. 그게 나중에 강도가 너무 강해가지고 졸음이 주 대상이 되지 않고 그 아픔이 주 대상이 돼 버리기도 합니다.

 

또는 졸음이 오면은 그냥 큰 바위가 나를 갖다가 누르는 것처럼 온몸을 갖다가 완전히 눌러가지고 땅속으로 집어넣는 것처럼 그렇게 큰 무거움이 오는 것들을 알기도 합니다. 그게 다 잠이 오는 길들입니다. 그 길이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딱 잠은 그 길로만 옵니다. 눈꺼풀이 닫히고, 그리고 그 눈꺼풀이 무거워져 와지고, 그리고 눈꺼풀이 따가워져 와지고, 그리고 나서 온몸을 누르는 무거움들이 와지고, 하는 것이 잠이 오는 길입니다.

 

그럼 잠이 오면 ‘잠이온다’ ‘잠이온다’ 해가지고 관찰이 안 되면, 실재하는 그 성품들을 관찰을 하라는 거라. 따가움이 있으면 ‘눈꺼풀이 따갑다’하고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됩니다. 송곳으로 쑤시는 것처럼 느껴지면 ‘송곳으로 쑤신다’고 알아차려야 되는 것이고, 그리고 그 눈꺼풀의 따가움이 아주 강도가 크다 할 것 같으면 콕콕 쑤시듯이 아프다 그러면 ‘콕콕 쑤신다’고 알아차려야 됩니다. 눈꺼풀이 닫히면 ‘눈꺼풀이 닫혔다’고 알아차려야 되는 것이고, 온몸이 무겁다고 할 것 같다면 ‘무겁다’고 알아차려야 되는 것이고.

어느 것 하나라도 놓쳤으면 그다음 길에서 그것이 일어나는 것들을 분명하게 볼 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갖다가 명칭 붙여서 관찰을 하라는 거라.

 

한순간에 관찰만 제대로만 되면 한순간에 잠은 확 달아나 버립니다. 눈이 번쩍 뜨이듯이, 그냥 바람이 확 통하듯이, 그냥 잠이 확 달아나는 것이 보입니다.

그렇게 자꾸 여러분이 경험들을 해봐야 잠이라는 것 ‘아, 내가 그 오는 것들에 대해서 무상한 성품을 분명하게 볼 수 있는 좋은 선물이구나’ 하고, 잠을 진짜 주 대상으로 생각해서 관찰하려는 마음이 생겨난다는 거라. 그럴 때 그 잠이 위딱까, 위짜라가 정확하게 탁 포인트가 맞춰지면 어느 상황이든지 그 상황에서 잠은 탁 달아나집니다.

 

졸음은 오래된 벗입니까? 아닙니다. (수행자 : 선물입니다.) 뭐라고? (선물입니다.)

선물이라는 거라. 무상을 보여주는 선물인 것이지, 자꾸 친구하자고 하면서 거기에 빠져있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졸음을 그렇게 몰아낼 수 있는 힘들이 자꾸 생겨날 때 앉아서 좌선하고 있을 때라도 졸음을 몰아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앉아 있으면서 졸음도 그런 식으로 몰아내고, 망상도 몰아내고, 통증들도 몰아내고, 하는 것들을 자꾸 경험을 해봐야 수행에서 ‘아, 수행 그냥 내가 열심히 노력하면 된다’ 하는 마음들이 생겨납니다. 그 균형만 잘 잡으면 됩니다.

 

마음이 가벼워져 있을 때 집중하고 노력하는 힘들은 커집니다.

그럴 때 그 사띠는 분명하게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관찰을 하게 됩니다.

생겨난 대상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좋아하고 싫어함 없이, 붙잡고 밀쳐내는 거 없이" 그것이 주 대상이 되도록 해야 되는 거라. 그래서 위딱까, 위짜라가 생겨나면 그 속에서 마음은 가벼워져 있게 되고, 기쁨을 느끼게 되고, 행복을 느끼게 되는 거라.

딱 그 대상만 관찰을 하면서 그 대상이 변하는 성품들을 그대로 보게 됩니다. 그래서 완전히 탁 사라지는 것들을 보면 몸에서는 하나의 경계를 뛰어넘었다 하는 희열들이 탁 일어납니다.

 

수행은 주 대상을 잘 관찰하는 것으로 인해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그렇게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수행문답]

Q.수행자 질문 : 스님 한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티나밋다(thīna-middha) 우리가 표현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이 티나밋다 자체의 성품이 탐·진·치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고, 우리가 티나밋다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서 탐진치가 생기는 것이 아닌가...

-스님 : 어디 아비담마에 그렇게 있었나요?

-수행자 : 제 생각입니다.

-스님 : 불선심소입니다. 티나밋다는.

-수행자 : 불선심소인데요. 그런데 이게 티나 성품 자체가 어차피 우리가 삼매에

-스님 답변 : 그러면은 부처님이 뭐 하려고 이거는 선한 마음이고 이거는 불선한 마음이고 이거는 공통된 마음이라고 왜 구분해 놨을까?

-수행자 : 그런데 그 아미담마에는 보면 그거는 무기, 모하에

-스님 : 모하(moha)에 의한 것이든, 탐심에 의한 거든, 진심에 의한 것이든, 어쨌든 탐진치로 인해서 일어나는 마음들은 불선심소에 들어가집니다. 그러면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티나밋다라고 할 것 같으면 그건 당연히 불선심소로서 하나가 일어난 것이지, 티나밋다 자체가 아무런 그 형체도 없는 무형물이라고 할 것 같으면은 그럼 그 무형물은 어디서 생기는 거라?

 

-수행자 : 저 질문 자체는 티나 자체의 성품은 탐진치하고 관계가 없는데 우리가 어떻게 거기에 대응을 하느냐에 따라서 일어나는 게 아닌가...

-스님 : 그게 잘못됐다는 거라.

아니야. 아니야. 티나밋다 자체가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마음이라고. 어리석은 불선심소라고. 그런데 그걸 갖다가 불선심소가 아니고 그냥 '하나의 일어나는 마음'이라고 자꾸 할 것 같으면은 그걸 자꾸 놔줘 버리는 거라.

‘그러면 그것을 관찰하는 불선심소가 안 일어나도록 하면 될 거 아니냐’ 할 것 같으면, 대상은 놓아버리고 그러면 호흡을 관찰하는 거하고 무엇이 다른 게 있어요? 그게 잘못 보는 것들이라.

 

그 대상 자체는 선한 마음이든 불선한 마음이든 그때 일어나는 찰나 간에 일어나는 마음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갖다가 '아무것도 없는 마음'이라고 자꾸 판단해버리면, 그러면 그 아무것도 없는 마음은 어디에서 생겨난 거라? 뭐 진아에서 나온 거라? 왜 마음을 그렇게 자꾸 먹느냐는 거라.

그거는 그렇게 하면 안 돼. 어떠한 경우든지 마음은 공통된 마음이 있고, 선한 마음이 있고, 불선한 마음이 있고, 그렇게 구분되어 있을 때는 그 영역에 속하는 것이지, 아무것도 없는 마음이라고 생각해버리면 자꾸 이중적인 마음이 돼버립니다. 그렇게 대상을 보면 안 됩니다. 됐죠? (예)

 

Q.수행자 질문 : 스님, 선심소가 일어났는데도 거기에 집착을 한다든가 자꾸 그렇게 마음을 그렇게 쓰면 그것도 일종의 그러면 불선심소로 변하는 겁니까?

-스님 답변 : 집착이 일어나면 선심소에서 불선심소로 바뀌어 버립니다. 선한 마음이 일어나는 그 선한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는 몰라도 그 마음이 일어난 거는 틀림없는 사실인데, 그 선한 마음을 집착을 해버리면 그러면 불선심소가 일어나버리게 됩니다. 그럼 선한 마음은 이미 사라져버린 상태라.

 

마음은 찰나 간에 일어납니다. 찰나 간에 바뀌고. 그래서 탁발할 때도 마찬가지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탁발하기 전의 마음하고 탁발 후의 마음은 틀립니다. 탁발을 할 때의 마음도 틀리고. 각각의 마음들이 새롭게 일어나서 새롭게 사라지고 다른 마음이 생겨난 것이지, 그 선한 마음이 지속적으로 쭉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선한 마음이 이어지더라도 그것은 다른 선한 마음인 것이지, 동일한 선한 마음이 쭉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걸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사띠가 자꾸 끊어지는 이유가 뭐냐면, 사띠하는 마음이 있을 때는 그 사띠를 하고 있는데, 그 사띠하는 마음에서 내가 집착하는 마음이 탁 일어나는 순간에 사띠는 없어져 버리는 거라. 집착하는 마음이 이미 생겨나 버린 상태라.

 

-수행자 : 집착하는 마음이 일어났던 걸 알게 되면 사띠는 되살아나는 겁니까?

-스님 : 그때는 다시 사띠가 살아나는 거죠. 그런데 어쨌든 사띠가 그렇게 자꾸 끊어져 버리면 안 된다는 거라.

그래서 대상을 쭉 이어지도록 만드는 영역이 뭐냐면 무상·고·무아를 보는 거라.

무상은 변하는 거기 때문에 한 번의 마음가짐으로는 변하는 걸 볼 수가 없습니다. 여러 개의 마음이 있어야만이 무상한 걸 볼 수가 있습니다. 고도 마찬가지고, 무아도 마찬가지고. 그러면 사띠의 마음이 계속적으로 이어져야 됩니다.

 

그 이어지는 걸 뭐라고 하느냐면 '삼빠자나(sampajān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아, 이게 무상한 것이구나’ 하고 분명하게 아는 것들이라. 그래서 사띠에는 반드시 삼빠자나가 같이 붙어야만이 수행을 제대로 해서 무상 고 무아의 성품을 볼 수 있는 거지, 한 번 탁 사띠한다? 어디 쓸 건데 그걸? 그런 건 의미가 없어져 버리는 거라.

 

마찬가지라. 탁발할 때도 탁발할 때 걸어오면서 선한 마음들을, 쭉 사띠를 지니고 있으면 선한 마음이 유지가 됩니다. 그러면 탁발하면서 탁발하는 것들을 하는 동작을 그대로 또 관찰하면 사띠가 유지가 됩니다. 돌아갈 때도 천천히 가면서 동작을 관찰하면서 앉으면 사띠가 유지가 됩니다.

그럼 그 탁발은 온전하게 탁발 전과, 할 때와, 하고 나서의 선한 마음이 그대로 유지가 됩니다. 그럼 그게 공덕이 크겠어? 아니면 탁발 한번 탁 했을 때 선한 마음 탁 낸 게 공덕이 크겠어? 전자가 훨씬 크다는 거라. 그래서 탁발을 할 때 탁발하기 전의 마음하고, 탁발할 때의 마음하고, 하고 나서의 마음들을 잘 관찰하라는 이유가 그래서 그런 거라.

 

대부분 보면 자애와 같이 있는 마음들은 선한 마음들이 유지가 돼 나갑니다. 그래서 자애를 지니고 있을 때는 탁발하기 전에는 항상 마음에는 기쁜 마음들이 일어납니다. 이걸 스님한테 공양 올린 것으로 인해 가지고 스님이 건강해지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 일어났기 때문에 기쁨들이 일어납니다.

이 기쁨이 계속하면서 탁발할 때 천천히 걸어오면서 사띠를 할 것 같으면 탁발할 때는 그냥 그대로 그냥 하면 돼. 쉽게 말하면 평온한 마음들을 그대로 유지를 하는 거라. 하는 동작을 관찰할 때는 우뻭카(upekkhā)의 마음과 비슷한 마음들을 그대로 유지를 해나가게 된다는 거라.

 

그러고 나서 탁 돌아가서 모든 동작이 끝나고 나서는, 다시 내가 탁발하고 나서 내가 탁발을 했는지 안 했는지를 관찰할 것 같으면 탁발을 했거든. 그러면 나에게는 기쁨보다는 즐거운 마음들이 일어나게 되는 거라. 행복한 마음들이 일어나게 되는 거라. 내가 훌륭한 일을 잘 해냈다는 마음들로 인해가지고 그게 연결되었을 때는 행복한 마음들이 일어나게 되는 거라. 그래서 경에는 "탁발 전에는 기쁨의 마음이 일어나고, 탁발할 때는 평온한 마음이 일어나고, 탁발 후에는 행복한 마음이 일어난다" 하고 말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어지는 때는 그 공덕들은 온전하게 과보들을 받게 되는 거라.

그래서 사띠를 한 번만 자꾸 하려고 하지 말고, 한 번 해서 대상을 알아차렸다 하더라도 그것이 계속적으로 이어지도록 자꾸 노력을 하는 훈련들을 자꾸 하라는 그런 뜻입니다. 알겠습니까?

 

-수행자 : 스님, 아까 저 질문을 착각했습니다. 그 티나밋다를 마음과 관계없는 하나의 객관적인 현상으로 봤기 때문에, 그 관찰대상을 잘 못봐서 그렇게 생각해가지고 질문이 나왔습니다.

-스님 : 그렇게 하면 안돼요.

그런데 그런 생각을 왜 하느냐면 스님이 자꾸 뭐라하는 이유가 뭐냐면 문제점이 뭐냐면, 자꾸 뭔가가 있는 것처럼 대승적인 사고가 안 깨지고 있는 거라. 그러면 안 돼. 어떠한 경우든지 그런 건 없어. 대상은 조건 따라 일어나고 조건 따라 사라지는 것이지, 범아일여 같이 뭔가 존재를 하는 것은 없다는 거라.

 

-수행자 : 그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현상으로서 마음의 현상을 일반적인 하나의 물질적인 현상으로 티나밋다를 그렇게 봤거든요.

-스님 : 티나밋다를 물질적으로 봤다 할 거 같으면 진짜 그거는 어리석은 거고, 어떻게 정신적인 걸 갖다가 물질적인 것으로 봐? 그거는 잘못하는 거라.

자, 여기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