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칠각지, 칠청정 법문

열반에 이르는 7청정의 로드맵 3부. 견청정_(사)21세기 불교포럼_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2025. 06. 28.)

담마마-마까 2025. 8. 22. 17:16

https://youtu.be/9bZB0bFWzeY?si=9BH1saBRZvjy-GEV

 

* 열반에 이르는 7청정의 로드맵 3부. 견청정_(사)21세기 불교포럼_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2025. 06. 28.)

 

반갑습니다. 오늘은 세 번째 시간이죠. 「견청정」

이 이후에 '견(見)' 자가 많이 나오죠, 칠청정 중에. 여기서 나오는 견청정이 있고, 뒤에 한 칸 건너뛰고 나면은 도비도지견청정 할 때 거기도 지견 나옵니다. 예. 행도지견청정, 지견청정, 다 그 견(見)이 나오죠.

 

똑같은 견(見)입니까? 조금 달라요? 어떻게 다른데?

여기 지금 오늘 할 견청정은, 그 견은 '딧티(diṭṭhi)', 빨리어에.

근데 뒤에 나오는 견은 딧티 입니까? '닷사나(dassana)' 그렇게 되죠. '냐나 닷사나(ñāṇa dassana)' 이렇게 묶음으로 해서 '지견' 그렇게 나옵니다.

 

'딧티'하고 '닷사나'는 다르죠? 똑같이 한자로는 견(見)이라고 쓰는데 다릅니다.

여러분들 윤회합니까? 여러분들 좋은 일 했으면 좋은 결과 받죠. 나쁜 일 했으면 나쁜 결과를 받는 거고, 그걸 아는 거는 '딧티'겠죠. 그거는 그냥 머리로 다 이해가 가능하죠.

근데 수행에서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고 있다. 불러오면 불러온다고 알고 꺼지면 꺼진다고 분명하게 알고, 불러오는 것은 배가 불러오는 물질적인 현상인데, 불러온다고 아는 것은 마음이 아는 거다, 그래서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도, 그때 쓰는 거는 그것도 '딧티'.

 

그런데 수행을 쭉 하다 보니까 내가 분명하게 장애가 뭔지, 그리고 이제는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번뇌가 뭔지 하는 걸 분명하게 알거든. 수행해서 좋은 게 뭐냐면 자기가 뭘 잘하고 자기가 뭘 못 하는지를 안다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그래서 만약에 평소에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수행하다 보니까 뭐 열심히 돈은 벌긴 하는데 그렇게 욕심 부리지는 않고 있다는 것들을 알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수행을 하면서 얻어지는 이익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그전에는 열심히 벌어서 분명히 경제적인 것들을 많이 마련하면 자기들만 위해서 썼거든, 쉽게 말하면. 자기 가족이나 자기들 자기를 위해서. 근데 이제는 그것도 물론 쓰지만은 일부는 또 좋은 곳에다가 쓸 줄을 알게 되면서, 그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기쁨들을 분명하게 아는 거라. 그래서 용처가 조금씩 달라지게 되는 거죠. 그럴 때도 '딧티'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근데 수행을 굉장히 잘했어. 그래서 하다 보니까 견해가 탁 떨어지는 걸 알거든.

보통 '견해'라고 하면 보통 크게 세 가지로 얘기를 합니다.

첫 번째가 뭡니까? '진아(眞我)가 있다', '상주불멸하는 것이 있다'고 하는 '상견',

그다음에 상견의 반대가 뭡니까? '단견', ‘죽고 나서 윤회라는 건 없어. 이 생에서 내가 열심히 잘 살고, 놀고 싶으면 놀고, 즐기고 싶으면 즐기고, 남한테 해를 안 끼치면 되지’ 하는 견해에 빠지는 것, 단견. 상견 단견은 이해하기 쉽죠.

 

근데 하나 어려운 게 '유신견'이라고 있습니다.

이렇게 문제가 되는 것들이 보니까, 사회생활을 하면서 전부 내가 가진 견해로 인해서 그런 것들이 많다는 거라. 그래서 견해를 탁 없애버리고 나면은 ‘그래. 니 말도 맞아. 네 말도 맞아.’ 황희 정승이 되는 거지. 조금 전에 6.25에 대한 얘기를 영상으로 봤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럽니다. ‘지금 스님 법문도 좀 시간이 모자라는데 저거 뭐할려고 저거 하고 있어.’ 또 어떤 사람은 ‘그래 맞아. 우리가 이렇게 된 거는 저 사람들 덕이 커. 그래도 오늘은 저거 보는 게 그래도 참 좋았어.’

 

다 자기 견해에 매여있죠. 그런데 그게 없으면 어떻게 될까?

영상을 틀고 있어. 나는 뭐 해야 돼? 그 소리는 분명히 듣고 있는데, 마음이 영상에 가 있든 마음이 귀에 가 있든 둘 중에 하나는 하겠지.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럼 귀에다가 마음을 두고 있었다. 그러면 귀라고 하는 물질적인 것에다가 소리라고 하는 것이 파동으로 인해서 들리는 물질적인 현상이 있고, 그것들을 분명히 알아차리는 마음이 있어요. 그래서 그냥 그 소리를 그냥 듣고 있는 거라.

그리 하면 견해가 생기겠어요? 그냥 그거 그냥 사띠하면서 듣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럼 견해라는 것이 생기질 않아요.

그게 이제 유신견이 어느 정도 탁 떨어져 나갔다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 무슨 견해를 가지고 있고 무슨 얘기를 하더라도 나에게는 영향을 안 미치는 거라. 그 정도는 돼야 안 되겠나?

 

그래서 견해가 탁 떨어진 것을 내가 알게 되는 거라.

근데 견해는 떨어졌는데, 그래서 마음은 좀 평온하고 고요한데, 그래도 욕심은 생기거든.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아예 없는 것도 아닌데, 있는 것은 알겠어. 그래서 자기가 떨어진 게 뭔지, 아직 남아있는 게 뭔지를 분명하게 아는 상태가 되는 겁니다.

그게 수행에서 얻어지는 이익이고, 수행에서 얻어지는 지혜고, 또 수행으로 인해서 이룬 도와 과거든. 그런 도와 과에 이르렀을 때도 뭘 쓴다고요? 견, '딧티'라고 씁니다.

 

그러니까 '딧티'라고 하는 의미는 굉장히 넓습니다.

쉽게 말하면 그냥 들어서 알고 이해한 것부터 해가지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나만의 고유한 견해도 있고, 또 수행으로 얻어지는 견해들도 있고, 또 견해라는 것이 떨어져 버림으로 인해가지고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견, 그거는 '삼마딧티(sammādiṭṭhi), 바른 견해를 지녔다' 하고 얘기하는 것들이 있고.

그래서 '견해'의 의미는 참 큰데, 그러면 뒤에 견청정 뒤에 쭉 나오는 견은 그거하고는 조금 틀리죠. 그거는 '냐나 닷사나(ñāṇa dassana)'라고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냐나 닷사나(ñāṇa dassana)' 그래서 그 닷사나(dassana)라고 얘기할 때의 견(見)은 이런 '견해'하고는 조금 차이가 납니다. 어떤 차이가 날까?

체험되지 않는 것은 '닷사나'라는 용어를 붙이질 않습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배워서 또 이해해서 알고 있는 견해, 누가 죽었다, ‘아, 참 무상하다’ 거기에 대놓고 무상한 견해를 지녔다 하고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쉽게 말하면 거기서 무상한 견해라고 하는 견 자는 닷사나를 얘기하는 건데, 거기에는 그 닷사나라는 용어를 붙일 수가 없습니다.

 

'닷사나(dassana)'를 붙일 수 있을 때는 어느 때 붙일 수 있을까?

지혜가 일어났을 때 지혜가 생겨나서, 그것을 냐나(ñāṇa)라고 그러거든요. 지혜가 일어나서 분명하게 그것을 알아서 그 밑으로는 안 떨어지는 상태가 되었을 때 '닷사나'라는 명칭을 붙일 수가 있다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 수행할 때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죠. 불러오고 꺼지고, 사띠를 합니다. 누가 “누구야?” 하고 부르면 사띠 안 하고 “어” 하면서 금방 쪼르르르 그 일을 합니다. 사띠가 지속되지는 않았다는 거죠. 그런 사람들에게는 지금 현재 내가 뭔가를 분명하게 알고 있고 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에겐 '닷사나'가 생겼다고 얘기를 하지 않는다는 거라.

 

또는 수행을 할 때 열심히 했어. 그래서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게 보니까, 예를 들어봅시다.

나는 여기서 수행을 하고 있는데, 요 위에서 이렇게 내가 수행하고 있는 걸 보는 것처럼 볼 때가 있어요. 그런 경험을 할 때가 있어요. 그럴 때는 실제로 자기가 위에서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니고, "몸과 마음이 분리돼 있을 때" 그렇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정신적인 현상과 육체적인 현상이 분명히 분리돼 있다는 걸 그게 현상으로서 드러난 겁니다. 근데 본인은 그게 이제 그렇다는 걸 나중에는 알겠지만, 그때 당시에는 모릅니다. 단지 ‘엄마야, 이게 뭐지’ 하고 놀라기는 하는데.

 

그런 상태에 있다가, 쉽게 말하면 육체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상태가 됐거든.

근데 육체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은 구분이 됐는데, 그게 속도가 점점 빨라지니까 겁이 나가지고 그냥 사띠하는 것들을 탁 놓쳐버립니다.

그렇게 만약에 안 하고 지속적으로 계속적으로 수행을 했다, 그럴 거 같으면 빠른 건 빠른 대로 그냥 알아차립니다. 왜 그러냐 하면, 육체적으로 변하는 것들이 아무리 빨라봐야 마음이 그보다 더 사실은 더 빠르거든. 그걸 알아차리는 것이. 그렇기 때문에 얼마든지 편안한 상태에서 그것을 관찰할 수가 있어요, 수행을 하다 보면은. 그래서 그걸 그냥 그대로 편안하게 따라갑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쭉 하다가 그걸 따라가다 보면, 이제는 변하는 속도가 빠르다 보니까 그냥 일어나는 것은 놔둬 버리고 사라지는 것만 자꾸 보게 됩니다. 그런데도 사띠는 계속 지속하고 있는 게 보여요.

만약에 여기까지 갔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그렇게 했는데도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 청정한 상태가 지속이 된 상태가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은 거기서 사띠를 탁 놓쳐버렸다고 하더라도 그다음에 다시 또 수행을 할려고 하면은 처음부터 육체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부터 관찰이 되어지질 않습니다.

 

그걸 관찰하자마자 바로 빠르게 변하는 게 보입니다. 육체적인 현상도 빠르게 변하고 그것을 관찰하고 있는 정신적인 마음도 빠르게 변하는 게 보입니다. 물론 망상이 떠오르면 망상이 일어난다고 탁 관찰하면 바로 착 사라지고 그렇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처음 수행을 시작할 때 어떤 단계로부터 시작이 되느냐, 하는 걸로 가지고 이걸 '딧티'라고 붙일지 '닷사나'라고 붙일지가 결정이 된다는 뜻입니다.

"다시는 떨어지지 않는 상태가 된다" 그럴 것 같으면 그거는 '닷사나'로 볼 수가 있는 거라.

 

떨어지지 않는다는 게 죄를 짓지 않는다든지, 아니면 그 사람이 만날 좋은 일만 한다든지 아니면 욕심도 부리지 않고 막 그냥 만날 싱글벙글하고만 있다든지 그걸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근데 무상·고·무아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알아서, 그걸 안다는 거는 관념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실제 내가 체험을 통해서 알았기 때문에, 어떠한 현상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그냥 좌지우지되고 이러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런 상태가 된 사람들은 이미 수행에서 어느 정도 단계에 올라섰기 때문에, 그 단계부터 계속 나아가게 되는 거라. 밑에 단계부터 하는 것이 아니고.

 

근데 여러분들은 지금은 ‘일어남, 사라짐’부터 하고, 이게 일어나는 것도 내가 일어난다고 알아차리려고 마음을 내니까 알아차려지는 거고, 그러고 나서 그걸 딱 ‘일어남’이라고 알아차리는 결과가 생기고, 이런 식으로 단계단계 이렇게 밟아 나간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아직은 수행에서 무르익지 않았다는 뜻이고, 아직은 지혜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거라. 지혜가 일어나긴 한데, 그것도 지혜는 지혜지. 그런데 아직은 부서지기 쉬운 지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뒤에 나중에 ‘내가 이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어’ 하고 계속 수행을 통해서 나아가는 단계에 이르르게 되면 그때는 '딧티'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닷사나'라는 용어를 쓴다는 걸 이해를 하면 됩니다.

 

그래서 스님이 여러분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그 단계까지만 딱 올려주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지가 물론 수행이 잘 되고 있는지 잘못되고 있는지 하는 것을 분명하게 다시 체크를 해야 돼요. 왜그러냐 하면 거기서도 잘못 빠지는 수는 있어요. 그리 하더라도 그 상태에서 다시 또 시작할 수 있기 때문에 크게 걱정은 안 하게 됩니다.

거기까지는 여러분들이 올라갈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하는 「견청정」은 물론 수다원이나 불환과에 이르렀을 때, 또 이 '견'이라는, '정견'이라는 것들을 쓰기는 쓰지만, '딧티'라는 용어를 쓰긴 쓰지만, 그것보다는 여러분들은 지금은 그냥 '지식적으로 아는 것, 들어서 아는 것, 유추해서 아는 것, 또 수행을 통해서 약간 ‘어, 그렇다’ 하고 몸과 마음을 분명하게 아는 상태에 있는 것" 요 정도까지라고 봅니다.

그게 지금 오늘 하는 「견청정」이라는 겁니다. 쉽게 얘기하면 아직 '이제 시작하는 단계다' 하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초보자다' 하는 겁니다.

 

견해가 청정해지면은 그래도 지금 현재 그 정도의 상태에 이르렀다고 할 것 같으면,

견청정에 이르렀다고 할 것 같으면 그래도 다르겠죠 아까보다는.

어떻게 달라질까? 마음이 탁 바뀝니다. 어떻게? 붙잡고 있는 견해가 없어져요.

그래서 여러분들 여기 한번 봐봐요. 뭐가 보여요. 누구예요?

(수행자 대답 : 스님입니다.)

이런 생각이 안 든다는 거라.

‘스님이 보인다, 여자다, 남자다’ 이러면 아직은 견청정에 이르지 못한 거라.

‘보인다’고만 알아야 되는 거라. 왜 그럴까? 내 마음은 보고 있는 밖의 대상을 향해 있든지, 아니면 보고 있는 내 눈을 대상으로 하든지, 아니면 그것들을 인식하고 있는 인식에 마음이 가 있든지, 세 가지 중에 하나는 할 거 아니라. 근데 밖에 있는 대상을 향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나는 마음으로 알 때 ‘보인다’고 알아차리지, 그걸 ‘스님’으로 알아차리진 않는다는 거라.

 

스님으로 알아차리니까 어떻게 돼요? ‘어, 스님이 잘생겼네’, ‘스님이 부처님 같네’ 이렇게 자꾸 사유로 자꾸 넘어가는 거라. 그렇게 되니까 ‘저 스님이 계속 와서 법문해 줬으면 좋겠다.’ 아니면 ‘안 왔으면 좋겠다.’ 집착을 하게 되는 거라. 그러면서 자기만의 세계에 또 탁 빠져버리게 되는 거라.

 

근데 견청정에 이르르면 그 사람이 설혹 법이 아닌 다른 것들을 설한다고 하더라도 그냥 듣고만 있는 거라. 들리면은 ‘소리 들림’ 하고 그냥 알아차리는 거라. ‘들림, 들림’ 하면, 내 귀를 통해서 파동이 전해지니까 들리는 거라. 그냥 ‘들림’하고 알아차리는 거뿐이라.

물론 그 사이에는 ‘아, 이게 부처님 말씀에 맞니, 안 맞니’ 하는 것들은 분간은 하게 되겠지. 그렇지만 그것이 부처님 말씀하고 같지 않다고 해가지고 그것으로 인해서 화가 일어나고 하진 않는다는 거라. 들림으로만 알아차린다는 거라.

 

그런데 견청정은 아주 간단하다고 그랬죠. 그냥 대상을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으로 구분만 하면 가능해진다고 그랬거든. 얼마나 좋아!

그것만 할 줄 알면 적어도 내가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확 바뀌어버린다는 거라. 쉽게 말하면 ‘스님이네, 남자네, 여자네, 저 소리가 법에 맞니, 안 맞니’ 이런 알음알이를 일으키지 않고 동일하게 소리 들리면 ‘소리 들린다’고 알아차리게 되고, 보이면 ‘보인다’고 알아차리게 되는 거라.

 

쉽게 말하면 ‘나라고 하는 것이 높니, 낮니’ 하는 생각 자체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뜻이라. 모두가 동일하고, 모두가 동일한 목소리고, 모두가 동일한 대상일 뿐이라는 거라. 그 대상일 뿐인 것이지, 대상 이외로 생각을 하지 않게끔 되는 거라. 그냥 대상이면 그냥 그거 알았으면 되는 거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어. 그냥 대상을 사띠하는 것만 지속하면 나는 수행이 계속 진행이 되게 되는 거라.

 

(수행자 질문 : 좀 더 쉽게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서 대상을 보거나 대상의 소리를 듣다가도, 분별하는 마음이 없이 보고, 분별하는 마음이 없이 하면, 견청정에 들어가는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까?)

 

그거는 대상을 분명하게 정신적인 현상과 물질적인 현상으로 구분이 안 되면 분별이 되게끔 됩니다. 그러니까 이론적으로는 분별함이 없이 하면 좋은데, 그렇게 안 된다니까. 그러니까 수행을 안 하면 분별을 안 할 방법이 없어요.

그래서 부처님도 그 세 가지로 얘기를 했죠.

들어서 아는 지식, 그다음에 이해해서 유추해서 아는 지식, 그다음에 수행해서 아는 지식. 앞에 두 개는 어떠한 경우든지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을 구분하는 것하고는 관계가 없어요. 그런데 수행을 통한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을 구분할 수 있어야만이 가능해지는 거라.

 

그래서 알음알이라든지, 분별한다고 하는 것, 구분한다고 하는 것은 수행을 통하지 않으면 그냥 쉽게 말하면 빠라맛타(paramaṭṭha)가 아니고 빤냣띠(paññatti)라. 개념적인 것이 되는 거라. 자기 마음은 억제하고 조절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언제 그게 터질지 모른다는 거라.

 

그런데 수행이 좋은 게 뭐냐면 수행은 어떠한 경우든지 개념이 아니고 실재하는 것들이죠.

뭐가 여러분들한테 실재합니까? 실재하는 게 뭐라요?

부처님 열반 한 거 실재한 겁니까? 왜 고개를 저어? 열반이 존재해요? 오, 이 사람들 봐라. 그럼 부처님이 열반한 거 안 믿어? (믿어요.) 안 해봐서 모르겠지. 그래도 어쨌든 '열반'은 실재하는 거라고 분명하게 경전에 기록이 되어 있어요.

또 뭐가 실재하는 거라? 여기 있는 '스님'이라는 것이 실재하는 겁니까? 스님이 실재하는 건 아니죠? 스님이라는 것은 개념입니다. 그걸 스님이라고 붙이든, 아까 황 회장 같이 삼장법사라고 붙이든, 아니면 진용이라고 붙이든, 빤냐와로라고 붙이든, 명칭은 다 틀리는데 똑같은 걸 얘기하는 거잖아. 그럼 '스님'이라는 것도 개념인데, 개념으로 보는 게 아니고, 내 몸이 구성되어 있는 건 뭐로 구성되어 있어요? (물질로)

물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냥 물질로 보는 것들은 실재하는 거죠. 실재하는 겁니다, 물질은.

근데 여러분들은 죽죠. 물질은 어떠한 경우든지 변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부서지게끔 되어 있고, 생겨나고 사라지고 유지가 되고 이렇게 하는 작용들을 하는 게 물질입니다. 이 '스님'이란 명칭을 가지고 있는 이 몸뚱이만 그런 게 아니고, 모든 게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물질'은 실재하는 거죠.

 

물질인 걸 아는 건 누가 압니까? 마음이 아는 것이지, 내 마음이 아는 건 아니죠. 나라고 하는 것이 없으니까. 그럼 '마음'도 실재하는 겁니다.

그런데 마음이 그냥 한마음입니까? 성질내는 마음도 있고, 욕심내는 마음도 있고, 갖가지 마음이 있습니다. 그걸 이제 '마음부수'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이것도 실재하는 것들이라.

그 실재하는 거는 요 딱 네 가지뿐이라.

 

근데 열반은 여러분들 체험하기 전에는 모르죠? 그럼 일단 뺐다. 그러면 실제 존재하는 거는 뭐라요? 물질적인 몸과 마음입니다. 왜? 마음이 없으면 마음 부수가 일어난 거 알지를 못하게 됩니다.

그럼 몸과 마음뿐입니다.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거는. 아주 간단합니다. 몸이 몸이라고 알고, 마음이 마음이라고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 가장 쉽죠.

 

그럼 「기초」 들어가겠습니다.

몸은 변한다고 그랬죠? 내가 사띠를 하든 안 하든 그냥 지 혼자서 자동적으로 이 몸에서 움직이는 게 뭐가 있어요? (호흡)

호흡. 또? 또 뭐가 움직여요? 심장박동 소리. 살아있을 때는 어쨌든 심장은 뛸 거 아니라. 이런 것들은 내가 관찰을 하든 안 하든 살아있는 동안에는 어쨌든 자동적으로 하게끔 되는 겁니다.

 

근데 자동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 대상이면 어떻게 될까?

내가 일부러 마음을 거기 갖다 붙여줘야 됩니다. 만약에 서 있다가 걸어간다. 그럼 걸어간다고 알아차려야 되는데, 어떨 때는 걷고 싶지 않아. 그러면 탁 멈춰버립니다. 그러면 걸음을 걸어간다는 것을 관찰할 수가 없어.

그래서 내 마음이 내가 의도를 내가지고 관찰하는 것은 차후에 해야 될 일이지, 지금은 어떻게 해야 된다고? '자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을 대상으로 해야 된다!

 

심장박동수 알아차리기 쉬워요? 여기 뭐 잡고 있으면 알아차리기 쉽겠지. 그런데 그것보다는 알아차리기 쉬운 게 뭐가 있어요? 호흡밖에 없는 거라. 그래서 "앉아있을 때는 호흡이 주 대상이 되도록 자꾸 하라"하고 얘기합니다. 내가 사띠를 하든 안 하든 지는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자연스럽게 호흡을 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자, 한번 호흡 알아차려 봅시다. 호흡하고 있다는 것만 알아차려 봐봐요.

“숨을 들이쉬어 봐요.” “쑤욱 들이쉬어 봐봐요.” 또 “쑤욱 내쉬어 봐요”

자, 이번에는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숨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만 알아차려 봅시다. 자,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관찰되어지죠?

얼마나 쉬워? 수행이 이렇게 쉬운 거라.

 

자, 들이쉬었으면 들이쉰다고 알아차리고, 내쉬면 내쉰다고 알아차리고, 이걸 한번 10번만 해봐라 할 것 같으면 10번 할 수 있는 사람이 여기에 아무도 없을 거라.

10번 하는 동안에 끊어져 버린다니까. 망상을 하든지, 지겹다든지. 그런데도 내가 끊어졌든 뭘 했든 간에 속으로는 지는 또 하고 있어요. 그렇죠? 그래서 적어도 한 열 번 왔다 갔다 하는 걸 갖다가 알아차리는 게 참 좋은데, 참 하기가 처음에는 하기 힘이 든 거는 맞습니다. 그래도 해야 됩니다.

? 견청정에는 일단 도달해야 될 거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보일 정도의 상태가 돼야 되는데, 그거 못하면 안 되거든.

 

그래서 일단은 무조건 들이쉬면 들이쉰다고 알아차리고, 내쉬면 내쉰다고 알아차려야 되는데, 문제는 채 10번을 못하기 때문에 인위적인 것들을 부여를 하게끔 됩니다.

어쨌든 끊어진다는 건 마음이 다른 데로 달아난다는 얘기잖아. 그럼 달아나지 못하게끔 마음을 탁 거기다 붙잡아 두라는 거라. 들이쉴 때 들이쉰다고 알아차리고, 내쉴 때 내쉰다고 알아차리면서, "명칭"을 부여해보라는 거라.

숨을 들이쉴 때는 ‘들이쉰다’고 알아차리고, 내쉴 때는 ‘내쉰다’고 알아차려 보라는 거라. 명칭을 부여하면, 명칭을 부여하지 않을 때보다도 훨씬 그 대상에 잘 붙어있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마음을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끔 거기에다가 딱 붙잡아 두려고 자꾸 노력을 해봐요. 한 번씩 그렇게 해보세요. 명칭 없이 하고 있을 때가 잘 되는지, 아니면 명칭을 부여했을 때 그것들을 알아차리기가 쉬운지, 한번 비교해보면 100명 중 99명은 명칭을 부여했을 때가 훨씬 오래도록 그 대상을 알아차리게끔 됩니다.

왜? 마음은 굉장히 빠르게 움직이려고 하고, 굉장히 망상하기를 좋아합니다. 쉽게 말하면 수행하기 싫어하는 거라. 안 하려고 해. 틈만 나면 그냥 도망가려고 하는 거라. 도망가는 게 그게 눈에 보이면 뭐 보인다고 알아차리고, 망상하고 이게 도망간 겁니다.

 

그래서 일단은 처음에 할 때는 무조건 명칭을 붙여서, 요놈을 자연스럽게 하는 호흡에다가 자꾸 마음을 갖다 붙이려고 자꾸 노력을 해보십시오.

그리하면 적어도 뭐 한 10분 했다 할 것 같으면 엄청 아마 힘들 겁니다. 엄청 힘들 겁니다. 분명히 알아차리고 사띠는 한 것 같은데, 땀이 뻘뻘 날 정도로 그것들 따라가는 것이 힘들구나, 그마만큼 마음이 천방지축으로 지금 움직이고 있는 걸 갖다가 붙잡아 뒀으니까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하고 나면 좀 뿌듯하겠지. 그래서 점점 시간을 늘려갈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십시오. 그건 할 수 있겠죠? (예)

 

적어도 대상이 배가 불러올 때 불러온다고 명칭 안 붙이고 꺼짐이라고 명칭 붙이는 일은 없도록 해야 됩니다. 근데 하다가 보면 그렇게 또 됩니다. 이게 왜 그러냐면 명칭 붙이는 게 오토매틱화 되다 보면 배가 불러오는데도 ‘꺼짐’ 하고 알아차리고, 배가 꺼지는데도 ‘불러온다’고 명칭을 붙입니다. 그래도 거기에 붙잡혀 있는 것처럼 보이거든.

그런데 중요한 거는 뭐냐면 불러올 때는 불러올 때의 특성이 있고, 꺼질 때는 꺼질 때의 특성이 있습니다. 명칭을 거꾸로 붙이면 절대 그걸 모릅니다.

 

코를 코에다가 손을 이렇게 딱 한번 대봐봐요. 숨을 들이쉬면서 ‘들이쉼’ 하고 알아차리고, 내쉬면서 ‘내쉼’ 하고 알아차리면서, 자연스럽게 호흡해서, 들이쉬고 내쉬고 한번 5번 해보십시오. 해봤어요?

들이쉬는 것하고 내쉬는 거 하고 틀리죠? 특성이 틀린다니까. 들이실 때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있고, 내쉴 때는 텁텁한 느낌이 있고, 그러면 쉽게 말하면 그 느낌들이 다 틀리는데, 배는 안 그럴 것 같아요? 불러올 때의 느낌이 다르고 배가 꺼질 때의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할 때 명칭을 정확하게 부여해주어라!

 

명칭은 어떤 게 정확할까?

''라고 하는 것 제거! ‘내가 숨을 들이쉰다, 내가 숨을 내쉰다’ 절대 안 됩니다! 나라고 하는 것들은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움직이는 동사를 명칭으로 활용을 하라! ‘들이쉰다’, ‘내쉰다’, ‘불러온다’, ‘꺼진다’ 실제 움직이는 거거든. 명칭은 움직이는 동사를 명칭으로써 활용을 하려고 해야만이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다음 단계는 뭐가 있을까?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할 때, 그거는 틀림없이 지금은 '움직임'만 봤는데, 거기에는 틀림없이 '느낌'들이 일어납니다. 배가 빵빵해진다든지, 아니면 한쪽에서 뭔가 툭툭 쑤시는 거라든지, 찌릿찌릿 한다든지, 아니면 뽀곡뽀곡 한다든지, 느낌이 각각 다르거든. 그러면 그것들을 명칭 붙여가지고 관찰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런 것들이 일어나는데도 그거 무시해버리고 ‘불러온다’, ‘꺼진다’ 이런 바보들 같은 짓을 하면 안 된다는 거라.

마음이 이미 "몸을 관찰"하는 데서 느낌으로 가버린 상태라. 그럼 "느낌을 관찰"해야 되는 거라.

그럴려면 정확하게 명칭을 붙였을 때 그게 가능해진다는 거라.

자, 느낌까지 관찰을 했다 칩시다. 안 돼도 뭐 할 수 없는 거고.

 

"느낌을 관찰"하고 있으면 어떻게 될까?

마음이 그 느낌으로 인해서 틀림없이 "마음의 어떤 현상들"이 일어납니다.

만약에 배가 볼록 하고 있다 할 것 같으면 볼록 한다고 알아차리고,

그럼 볼록 하고 있다고 알아차리는 마음이 일어난 상태가 됩니다.

나는 지금 뭘 관찰해야 되죠?

배가 '볼록 하는 느낌'을 알아차려야 돼요?

아니면 '볼록 하고 있다고 알아차리는 마음'을 관찰해야 돼요?

틀렸어요. 볼록 하고 한 번 할 때는 '볼록' 하고 있다는 느낌을 알아차려야 됩니다!

근데 볼록 하고 있다는 것이 변할 때는 그 변하는 것들을 알아차리는데,

그게 빨리 탁탁 바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마음을 관찰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은 그 대상에서 달아나 버리는 거라.

 

이 정도 되면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이 완전히 분리가 돼버리죠. 분리가 돼버렸습니다.

"마음을 관찰"할 때는 마음이 있다는 걸 관찰하면 됩니다.

아까 얘기했죠. 관찰하고 있는데, 내가 위에서 이렇게 쭉 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나는 뭘 지금 관찰해야 되죠? 배를 관찰해야 될까? 아니요. '위에서 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 마음'을 관찰해야 되는 거라. 그러면 이 마음이 다시 소로록 배로 나옵니다. 들어옵니다.

그렇게 또 잘 관찰했다. 칩시다.

 

그렇게 잘 관찰해가지고 어느 정도 한 5분 10분만 하게 될 것 같으면은 여러 가지 현상들이 생깁니다. 너무 좋거든. 너무 좋거든. 이때까지 모르던 것들이 알아지니까 마음이 그냥 부르르르르르 떨리는 거라. 그게 '대상'이 되는 거라.

떨리면 ‘떨린다’고 알아차리라는 거라. 그게 "법에 대한 관찰"입니다.

 

떨림만 있겠어요? 기쁨도 일어날 뿐 아니라, 부처님이 와서 나를 쓰다듬어 주기도 하고, 빛이 팍 내 속으로 들어오는 것도 있고, 오만 것들이 다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것도 대상’이란 생각을 안 하면, 그냥 거기에 빠져가지고 한세월 보내다가 ‘수행 잘했다’ 하고 나옵니다. 지는 그 속에서 그냥 헤매고 있었는 거라.

 

「신·수·심·법」 네 가지가 대상이 되어야 되는 거라.

앉아서 수행할 때도 이 네 가지가 대상이 되어야 되는 것이지, 하나만 할 수 있다? 천만에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수행이 진척되고 상황에 따라서 뭘 대상으로 할지를 스스로 결정을 할 수 있는 능력들이 만들어져야 된다는 거라.

그래서 그러기에 가장 쉬운 것이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것, 호흡을 관찰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앉아있을 때는 뭘 관찰하라고? 그러면 ‘다리 아프다’ 이게 관찰 대상이 됩니까? 무시해라! 처음에 수행할 때 안 죽어. 그러니까 다리 병신 안 되고 하니까 그냥 무시하고, 편안하게 그냥 숨 관찰하는 것만 해보라는 거라.

 

거기에서 어느 정도 기쁨이 일어나고 뭔가 조금 성과가 있을 때, 그때 다리가 아프고 할 때는 ‘고통’이라고 분명히 알아차리면 그 느낌이 싹 사그라지는 게 보이지,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요 느낌이라든지, 아니면 생각이 일어나면 망상이 일어나면 ‘망상, 망상, 망상’, 다리가 아프면 ‘다리가 아픔, 다리가 아픔’ 해도 안 사라져! 안 사라지고 계속적으로 그게 또 일어나. 시간 괜히 왔다 갔다 하면서 바쁘게 하다가 그냥 시간 다 보내버리게 되니까,

 

그냥 지금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호흡에서 움직임이면 움직임, 느낌이면 느낌, 그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마음이면 마음, 또 그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이면 현상들, 그것들을 관찰하려고 자꾸 노력을 하라! 가능하죠?

 

오늘부터 여러분들 1일차 입니다. 1일차!

자, 그러면은 그렇게 했다고 치고, 그러면 앉아만 있을 수는 없잖아. 걸어가기도 하고, 밥을 먹기도 하고, 샤워하기도 하고, 그렇게 다 해야 되잖아.

그럼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될까? 그럴 때는 호흡을 관찰해야 되는 게 아니고, 그 행동을 관찰해라.

좋은 게 뭐냐면 행동으로 할 때는 몸과 마음을 딱 분리시키기 가장 좋아! 왜 그럴까?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 행동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러는 거라.

 

내가 걸어가고 싶지 않은데 걸어갈 수 있어요? 잠자고 싶지 않은데 잠이 와져요? 많이 피곤하면 또 오긴 하겠지. 그리 하더라도 의도가 있어야만이 행위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거라.

의도는 뭐에 해당이 돼요? 마음입니다.

근데 그 행위는 물질적인 현상입니다.

이걸 구분해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게 '움직일 때'입니다.

 

그래서 딱 서 있으면 서 있다고 분명하게 탁 알아차리고 ‘서있음’ 하고 알아차리고, 걸어갈 때는 걸어가려고 한다는 '의도'를 먼저 탁 알아차리려고 자꾸 노력해야 됩니다.

‘걸어가고자 함’ 하고 의도를 탁 내고 나자, 발이 들어 올려지고 나아가지고 내려놓고 하는 것을 일단 관찰하려고 노력을 해보라는 거라.

그러면 몸과 마음이 구분이 되는 게 딱 보이게 됩니다.

"의도를 알아차리기 가장 좋은 것은 움직일 때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걸어갈 때는 자꾸 의도를 먼저 알아차리려고 하고, 걸어가고자 하는 마음이 앞서고 나서 걸어가지는 것이 있다고 알아차렸다고 할 것 같으면, 걸어가질 때 발을 들어 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고, 이렇게 명칭을 붙이면서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이렇게 명칭을 붙입니다.

 

호흡도 나중에 알아차리는 게 점점 빨라지고 많아지듯이, 이때도 마찬가지로 대상이 점점 많아집니다. 어떻게 많아지게 될까?

발을 들어 올릴 때 들어 올린다고 분명히 알아차리는 것까지 됐다. 그러고 나서 나아갈 때 안 멈추고 나아갈 수 있어요? 없습니다. 멈춤하고 알아차리게 되는 거라.

그러고 나서 나아갈 때는 또 어떻게 돼요? 나아가고자 하는 의도가 먼저 일어나야만이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 보이고 나아가는 게 보이는 거라. 그리고 멈추고 다시 내려놓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나서 발을 내려놓게 되고, 점점 많아지죠? 관찰해야 되는 게.

근데 그 속에는 뭐가 보여요? 의도가 보이는 거라.

 

동작을 시작할 때 의도를 보기가 참 편합니다.

걸어가기 시작할 때, 그러고 나서 만약에 발이 들려져 있다고 한다면, 발이 멈춰지고 나서 의도를 보기가 쉽습니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돼요? 내려놓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 수행하는 사람들은 이게 의도인지를 모릅니다. 빠르게 발을 들어 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기 때문에.

그런데 뭘 가지고 의도라고 알 수 있느냐 하면, 멈추는 게 보인다는 거라. 발을 들어 올리고 나서 나아가기 전에 멈추는 게 보이고 나아가지고, 멈추는 게 보이고 내려놓는 게 보인다는 거라.

 

멈추는 게 보이면 수행을 잘한 겁니다. 의도가 보이기 시작을 했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호흡을 거기에 적용해 보면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할 때, 불러오고 나서 멈춰야만이 꺼지게 됩니다. 꺼지고 나서 멈춰야만이 다시 불러오게 됩니다.

그게 "멈춤"이 보이는 거라. 그래서 그전에는 ‘불러오고, 꺼진다’ 하고 알아차렸는데, 이제는 ‘불러오고 멈췄다, 꺼지고 멈췄다, 불러오고 멈췄다, 꺼지고 멈췄다’, 이렇게 알아차리게 되는 거라. 가능하겠죠?

 

그래서 움직일 때는 그 움직이는 모든 것들을 처음에는 알아차리려고 하라. 그것도 명칭을 붙여서.

밥 먹을 때는 밥 먹는다고 분명히 알아차려라. 숟가락을 들었으면 숟가락이라는 명칭 말고 ‘들어올림’하고 알아차리고, 입에 넣음 할 때 넣을 때는 ‘넣음’ 하고 알아차리고, 씹을 때는 ‘씹음’하고 알아차리고, 삼킬 때는 ‘삼킴’하고 알아차리고, 모든 움직임에 명칭을 붙여서 알아차리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설거지할 때도 마찬가지, 잡았으면 ‘잡았다’고 알아차리고, 닦으면 ‘닦는다’고 알아차리고, 적어도 이렇게 모든 행위에 명칭을 붙여서 하면, 마음이 거기게 딱 밀착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착 그냥 붙어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착 붙어 있을 동안에는 아직은 몸과 마음이 뭔지를 사실은 잘 모르는 상태입니다. 근데 어느 순간 보니까 난 분명히 잡고 있고 설거지를 해서 닦고 있는데, 내가 닦는 게 아니고 다른 사람이 닦고 있고, 난 닦고 있는 걸 보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어요. 요 때가 "몸과 마음이 분리되는 때"라는 거라. 그래서 그렇게 될 때까지는 주구장창 해야 됩니다.

 

가장 중요한 거는 사띠(sati)가 얼마만큼 이어지느냐?

앉아있을 때든, 걸어갈 때든, 다른 행위를 할 때든 간에, 그 사띠가 적어도 지속적으로 계속 이어지도록 해야 됩니다. 아까 우리 황 회장님이 '정념·정지'라고 그랬죠? '사띠 삼빠자나(sati sampajāna)' 사띠 삼빠자나라고 하는 것은 그 사띠가 지속적으로 이어져서 분명하게 그것을 알아차리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보통 사띠 삼빠자나 앞에 관용구로 쓰이는 게 '아따삐(ātāpī)'라. 열심히 노력 안 하면 사띠 삼빠자나가 안 된다는 뜻입니다.

죽을동 살동 그것들을 하려고 노력을 해야만이 사띠 삼빠자나는 지속됩니다.

 

수행을 그냥 편안하게, 그냥 마음을 쉬기 위해서, 아니면 잡념이 많이 일어나는 것 조금 그걸 잠재우기 위해서,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부처님이 가르치는 수행은 어떠한 경우든지 견해를 없애고 나서, 평등하게 대상들을 보게 되면서, 내가 서서히 나아가져서,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겁니다.

이제 처음 시작을 했는데 그냥 가볍게 하려고 생각하고, 그냥 조금 수행하고 말지, 이렇게 마음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아따삐(ātāpī)' 죽을동 살동 노력을 하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적어도 견청정에는 도달할 수 있다는 것들을 잊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그렇게 했다고 치고, 견청정에 도달했다고 치고, 다음 시간에는 그다음 부분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것은 정신적인 현상과 육체적인 현상이 분리가 될 때까지는 지속적으로 노력을 하라.

그래서 적어도 그게 분리가 될 것 같으면 외부적인 영향이 좀 적어. 남이 나에게 뭐라 하더라도 그 사람은 그 소리일 뿐인 것이지 나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라는 거라.

그래서 그렇게 될 때까지는 지속적으로 몸과 마음에 대해서 관찰을 지속하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