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zDQuWlcQ7UQ?si=yNeu633idD80Y1Ih
* 열반에 이르는 7청정(七淸淨)의 로드맵 4부. 도의청정__21세기 불교포럼 정기법회_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2025.07.26)
오늘은 칠청정(七淸淨) 네 번째 '도의청정' 부분입니다. '의심을 넘어선다'는 거죠.
수다원이 되면 끊어지는 세 가지 중에 한 가지는 뭐가 있죠?
(수행자 대답 : 의심입니다.)
그런데 거기서는 왜 '끊어진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넘어선다'고 그럴까? 뭔 차이가 날까?
(수행자 대답 : 열 개가 나열되어 있으니까 '끊는다'는 표현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그럼 넘어선 거하고 끊는 거하고 똑같애?
(수행자 대답 : 그건 뭐 '넘어선다'는 거도 비슷하지만 뉘앙스가 조금 달라요.)
틀립니다. 그럴 것 같으면 도의청청에만 도달해도, 원인·결과에 대해서 아는 지혜만 생겨도 수다원이 된다고 얘기를 했겠지. 근데 그건 아니잖아. 아직 여기서 수다원까지는 한참 멀었거든.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여기 불이 있죠. 불이 들어와 있거든요. 요걸 스위치를 탁 내려버리면 불이 탁 꺼져버리죠. 근데 스위치를 내렸다 해가지고 전기가 안 들어오는 거예요?
(수행자 : 그건 아니죠.) 그건 아니죠.
(수행자 : 일시 정지 상태) 일시 정지 상태된 거죠.
쉽게 말하면 여기서 말하는 도의청정이라는 것은 의심을 완전히 끊어내서 다시는 의심하지 않는다는 얘기는 아니고, 의심할 만한 일이 생기면 의심은 하겠지. 그런데 그럴 일은 잘 안 생긴다 그렇게 이해하면 됩니다.
이것도 번뇌의 종류이기 때문에, 그래서 보통 이런 번뇌를 '감춰진 번뇌'라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도의청정에만 도달해도 '작은 수다원'이라고 그러거든요. 수다원하고 별 차이가 없어.
또 다른 예를 들어보면 일래과에 도달을 했다. 그럼 성냄이 있어요, 없어요?
(수행자 대답 : 엷어진다고 그랬습니다.)
엷어진다고 그랬죠. 이것도 마찬가지로 '감추어진 번뇌'입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작용을 안 하는데, 없다고는 얘기는 못한다는 거지.
그런데 일래과에 도달한 사람이 성을 낼까?
(수행자 : 내죠) (수행자 : 아니요)
없습니다.
이게 '감추어진 번뇌'라고 하는 의미가 뭐냐면 있긴 있는데, "있긴 있는데 작용할 수 없는 상태"에 있다 하고 보면 됩니다. 실제적으로는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게 보면 됩니다.
(수행자 : 그게 엷어진 상태라고 이렇게 표현을...)
그렇죠. 경전에는 '엷어진 상태'라고 하는데, '작용을 못하는 상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불환과에 갔을 때는 거기서 완전히 끊어진다고 그렇게 얘기하죠. 사실은 일래과 하고 불환과는 수행에서는 차이가 많이 나는데, 번뇌가 없어지는 부분에서는 외부적으로 표현되는 것은 그렇게 드러나지질 않는다 하고 보시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의심' 하나만 딱 봤을 때는 수다원이나 도의청정에 도달한 분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이해가 됐어요? (예)
그래서 뭐 끊을 절(切)이든지 단(斷)이든지 해서 단의청정이라 안 하고, ‘극복한다, 건넌다’ 해가지고 도의청정, 건넌다는 뜻이죠. 그래서 건너기는 건너는데 그 강은 그대로 있는 겁니다. 단지 내가 물을 안 묻히고 그걸 건넜기 때문에, 강이 있는 줄은 이제 안다는 거라. 그래서 강이 있는 줄은 알면 누가 빠질라고 일부러 오겠어요? 그런 거는 없죠? 그래서 그런 것을 '감추어진 번뇌'라고 그렇게 얘기한다 하고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이해가 됐죠? (예)
뭘 의심하게 될까?
(수행자 대답 : 이대로 가다 깨어날 수 있을까?)
이대로 가다가 깨달을 수 있을까? (예) 그렇지. 그것도 하나가 되겠지.
‘야, 과연 내가 이 수행으로 인해가지고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을까?’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면 그럼 이 방법으로 깨달은 사람들은 또 뭔데?
그렇잖아요. 불교 2600년을 흘러오면서 얼마나 깨달은 사람들이 많아요?
단편적인 예를 들면, 불교에서는 갖가지 결집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6차 결집, 이렇게 얘기들 하고 하는데, 결집할 때 그 조건이 뭐지? 아라한이 되어야만 결집에 참가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1차 결집에도 아난다가 참가를 못하고 있었던 이유가 아라한이 되기 전이었거든. 그래서 참가를 못했는데 마지막 날에 용맹정진 해가지고 결국 깨달음을 이루어서 그 결집에 참가를 하게 됩니다. 그거는 불교 역사를 여러분들이 읽어보면 드러나집니다.
쉽게 말하면 그렇게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분들이 있기 때문에 ‘이것으로 인해서 깨달을 수 있을까?’ 지 잘못이지 뭐 그게 법이 잘못된 건 아니잖아. 그럼 그런 걸 의심하면 안되는 거라.
당연히 그걸 가르친 부처님도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분일 거고, 부처님이 설하신 법은 깨달음에 이르게 했으니까 그 법이 잘못됐을 리가 없는 거고. 그래서 쉽게 말하면 머리로는 이해가 되죠? 불·법·승에 대해서 의심을 안 하게끔은 됩니다.
근데 완전하게 의심을 안 하게 될까? 그건 아니죠. 수행을 통해서 나중에 수다원이 완전히 돼야만이 그것들이 완전하게 정착이 되긴 하는데, 이 도의청정에만 이르러도 내가 경험을 했기 때문에 이것에 대해서 의심을 안 해.
왜 그럴까? 아까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을까?’ 그런데 수행해 보니까 전에는, 여러분 한번 스님 한번 보십시오. 보입니까? (예) 잘생겼어요? (예) 이렇게 보면 다 틀리게 되는 거라. 그냥 보여야 되는 거지. 그전에는 스님 형상이 보이고 했는데, 왜 형상이 보이겠어요? 내 눈이 있고, 밖에 대상이 있고, 그걸 보려고 하는 의식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걸 막아주는 공간적인 제약이나 이런 것들이 없기 때문에 보인 거거든.
쉽게 말하면 이런 여러 가지들은 '원인'이라고. 내가 아무리 앞에 뭐가 있어도 내가 눈 감아버리면 안 보입니다. 그렇잖아. 앞에 벽이 막고 있어도 안 보이는 거고, 그 대상이 없어도 아무리 볼려해도 볼 수가 없는 거라. 그런 것들이 원인인 거라.
그런 것이 원인이라서 보여지는 결과가 생겨나는 거라. 원인 결과로서 분명하게 이해를 하게 되면 적어도 보는 것을 그냥 대상으로서 ‘스님이다’ ‘잘생겼네’ ‘어쩌네’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보인다’고 알아차릴 수가 있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보인다고 알아차릴 때는 그런 여러 가지 원인들로 인해서 이런 보이는 결과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끔 되는 거라. 그것만 돼면 여러분들은 다시 윤회할 때 악처에는 안 떨어져.
그래서 자꾸 스님이 그런 얘기를 하는 거라. "보이면 보인다고 알아차리고, 들리면 들린다고 알아차리고, 걸어가면 걸어간다고 알아차려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것만 해도 되는 거라. 그런데 그렇게 안 하니까 문젠 거라.
쉽게 말하면 아까 삼보에 대한 의심들을 안 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내가 직접 수행해 보니까 원인· 결과에 대해서 의심을 안 하게끔 되는 거라.
간단한 예를 들어봅시다. 누가 막 나한테 고함을 지르면서 욕을 하고 있다. 그럼 내 귀에는 어떻게 들릴까요 이게? (수행자 : 그냥 소리로만..)
그냥 ‘소리 들림’이라고 하는데, 그냥 평범하게 들리는 소리하고는 틀려요. 이게 고막이 찢어질 듯이 아파요. 똑같이 고함을 지르는데도 ‘아, 잘한다’ 하는 거하고 ‘저놈 죽일 놈 살릴 놈’ 이렇게 할 것 같으면 그 들리는 소리가 그냥 들리지만 다르게 들려요. 아예 아예 다르게 들립니다.
사마타 수행해 보신 분은 경험할 겁니다. 아주 고요하고 대상에 딱 몰입되어 있는데, 뭔가 살큼 발소리라도 들리면 그 소리에 내가 깜짝 놀랍니다. 그러면서 깜짝 놀라는 것까지는 좋은데, 막 그 사람을 막 뭐라 합니다. 왜 여기서 걸어 다니느냐고.
그런데 아까도 얘기했지만, 집중이 잘 되고 있을 때는 그 소리가 좋은 소리를 듣는 거하고 싫은 소리를 듣는 거하고는 여기서 미치는 파장이 다르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말을 할 때 여러분들이 싫은 소리를 한다, 그럼 뭐부터 찢어질까? 저 사람 귀가 먼저 찢어질까? 내 가슴부터 찢어집니다! 내가 그렇게 악에 물들지 않으면 악하게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누가 먼저 최고 아파할 거라? 본인이 먼저 아파합니다.
그래서 원인 결과에 대해서만 알아도 그다음에는 말할 때는 절대 남한테 싫은 소리나 안 좋은 소리를 할 수가 없게끔 됩니다. 좋은 소리 해도 충분히 가능한데 왜 싫은 소리를 해? 여러분이 뭐 평생 그렇게 살 것 같아요? 얼마 안 남았어요. 여기 보니까 나이 든 분들도 많고 한데, 얼마 안 남은 기간이라도 내가 선한 마음들을 자꾸 지녀서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고요해지고 평안해지고, 그것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이 더욱 행복해진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 같이 좋은 게 어디 있어요?
그게 원인 · 결과라는 겁니다.
업과 업의 결과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를 하게끔 됩니다.
그러니 어떻게 악한 행위들을 할 거라? 안 하는 거라. 선한 행위만 하더라도 시간이 모자란다는 거라. 그 선한 행위만 한다 해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분명하게 그것들을 알아차리면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수행을 해야 되는데, 언제 그런 거 할 거라? 헛되게 그냥 시간 흘려보낼려고 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다음에 또 뭐가 있을까요?
여러분들은 윤회를 한다고 믿습니까? (예) 믿어요?
그러면 과거가 있고 또 다음 생이 있겠네?
그거 안 믿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니까, 내가 뭔가 손을 하나 올리려고 하더라도 올리려고 하는 의도가 있기 전에는 손을 올릴 수가 없어. 의도가 먼저 앞서고 나서 손이 올라가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것 같으면, 그럼 손이 올라가는 지금 현재의 상황은 그 앞에 분명히 원인이 있었다는 거라.
여러분이 이렇게 태어났으면 태어난 원인이 있었을 거 아니라. 그러면 지금 살고 있는 모습들을 보면, 다음에 어떻게 태어날 건지가 보여지게 되는 거라.
또 그것 말고도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 생각해야 되는 것이, 지금 현재라고 하더라도 여러분 지금 뭐 하고 있어요? 수행하고 있습니까? (예)
수행하고 있는데, 왜 나를 내세우는데? 내세운 일 많죠? 아까 여기 들어올 때 보니까 "법회 참가할 때 법회 참가비 만 원씩 내시오"라고 적어놓은 것이 보입니다. 만 원씩 냈어요?
(수행자 대답 : 그거 안 내는 사람이 많아요)
그것도 집착하고 있는 모양이네.
(수행자 대답 : 집착은 안 하는데, 소리를 들어서 그렇지 집착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왜 냅니까? 만원의 행복을 사기 위해서?
보통 사람들은 현재에 집중하고 있지 못하면 만 원을 냈으면 만 원의 결과를 받으려고 합니다. 만 원만 받을려고 하는 게 아니라도 대부분 보면 2만원 3만원 받을려고 합니다. 욕심들이 증가되게 됩니다.
그런데 현재에 집중하는 사람들은 내가 이거 내는 이유를 분명하게 압니다. 내가 이걸 냄으로 인해서 이 '21세기 불교 포럼'이 유지가 되고, 그것으로 인해서 나는 법문을 듣고, 수행을 할 수가 있고, 그것으로 인해서 나는 도과에 이를 수 있다는 마음이 들면, 아주 기쁘게 만원을 그냥 넣습니다. 어떤 보시가 더 나을까?
그게 뭐 때문에 가능하다고요? "지금 현재에 집중하는 것"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에 대해서 더 이상 의심하지를 않게 됩니다.
의심을 하지 않으면 참 좋은데 의심을 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라도 이론적으로라도 분명하게 이것들을 이해를 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수행하는 사람이 맞죠? (예)
수행하는 사람들은 의심을 분명하게 극복을 해야 됩니다.
뭐로 가지고 극복할까? 열심히 수행해야 됩니다.
열심히 수행해서 '찰나 생 찰나 멸'하는 것을 봤을 때, 의심은 극복됩니다.
‘어, 생겨났는데 그것을 사띠를 하니까 호로록 사라졌네’. 그것도 처음에는 아주 용을 써가지고, 성냄이 있었다, ‘성냄, 성냄, 성냄, 성냄’ 안 사라져.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수행자 : 사띠해야 됩니다.) (수행자 : 호흡을...)
여기에서 여러분들이 주의해야 될 게 사마타 수행은 고통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수행자 : 없습니다.) 없죠. 아주 편안하고 아주 좋은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그래서 한 대상에 가만히 머무르고 있으면 그마만큼 좋은 게 없거든. 여러분들 다 게으르게 되는 거라. 왜 그러냐면 고요하게 머물기를 다 바라고, 안 변하길 바라게 되는 거고. 근데 그런 대상을 하나만 계속 하고 있으면 그마만큼 좋은 게 어디 있어?
그런데 어떡하나, 위빳사나 수행은 대상이 자꾸 바뀌어야 되는 거라. 그러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가끔 수행에 대해서 물어보는 사람들 중에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스님, 나 괜히 위빳사나 배웠습니다.” 왜 그럴까? (수행자 : 괴롭습니다.) 힘들거든.
뭔가 조금 안정된 것 같고, 고요하게 그냥 행복을 느끼려고 하는데 대상이 호로록 바뀌어 버리니까 또 그 대상 쫓아가야 되는 거라. 그러니까 마음만 바쁘고, 수행은 되는 것 같이 보이지 않고 하니까, ‘아이, 이거 안 하고 그냥 편안하게 그냥 한 대상만 보면서 가만히 머물렀으면 좋겠다.’ 그래서 “수행 괜히 했습니다.” 이럽니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런데 사마타 수행하면서 일상생활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해도 돼. 여러분이 무슨 뭐 등신불도 아니고 가만히 있으면서 뭐 누가 밥 안 먹고 살 수 있어요? 못 하잖아. 일상생활 또 해야 되는 거고, 어차피 움직여야 되는 거라.
그러면 움직이면서 움직임을 관찰하면서 그 고통스러운 걸 갖다가 빨리 극복하려고 해야 되지, 지금 현재 그게 고통스럽고 힘들다 해가지고 그걸 안 하면, 그거 뛰어넘을 수 있겠어요? 못 뛰어넘는다는 거라.
얼마 전에 한 달 너머 됐나, 그때 이제 스님이 경험한 건데, 선원에 일이 좀 많아 가지고, 풀도 베야 되고 이런 적이 있었어요. 더워 죽겠는데 그걸 하고 나니까 나중에 탈진이 돼버렸거든. 그런데 탈진하기 전에 스님이 그걸 알아요.
내 지금 몸의 에너지가 어느 정도 남아있다는 걸 알아. 근데 남아있는 게 딱 그마만큼 남아있네. 근데 요걸 다 하고 나면 내가 탈진할 것 같애. 근데 이걸 또 남겨두기가 뭐하고, 그래가지고 그냥 다 했어. 다 하고 나니까 몸이 완전히 탈진이 돼버렸어.
그래서 탈진된다는 게 어떤 거냐면, 이렇게 누워있는데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가 힘들어. 그마만큼 완전히 그냥 에너지가 다 빠져나가 버린 상태라.
(수행자 : 그거는 탐욕의 과부하 아닙니까?)
근데 할 일이 있으니까 할 일을 해야 된다는 거지, 내가 무슨 그거 안 짜른다 해가지고 뭐라 하는 것도 아니고, 그걸 또 욕심부려 갖고 그걸 다 할려고 하는 건 아니고, 어차피 해야 되는 거니까 그냥 다 하자는 생각을 해서 그렇게 한 건데, 그래서 그걸 보면서 이제 그랬어요.
아, 이 몸을 유지하기 위해 가지고 필요한 게, 내가 지금 어느 정도의 에너지가 남아있는 걸 분명히 알아차린 거는 마음으로 알아차린 거라.
그런데 이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사실은 필요해요. 그런데 그것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날이 많이 더웠거든. 안 더웠다 할 것 같으면 조금 덜 했을 거라. 근데 그런 '기후'도 분명히 몸에 영향을 미친다는 거라. 근데 결정적으로 필요한 게 뭐였죠? '영양분'입니다. 아마 여러분들 같이 하루 세 끼 먹었다 할 것 같으면 그런 사태는 안 벌어졌을 거라. 근데 한 끼 먹거든. 한 끼 먹는데 오후에 그걸 했으니 몸이 못 견디는 거라.
그럼 어찌 해야 되노? 뭘 먹어야 돼? 먹으면 안 되는 거지. 먹을 필요도 없을 뿐 아니라, 그냥 안 하면 되는 거지. 그냥 가만히 누워 있으면 되지, 누가 올 때까지 그냥 누워있으면 되는 거지.
(수행자 질문 : 자시면은 계를 파하기 때문에 먹으면 안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거는 자연스럽게 지켜지는 겁니다. 어느 정도 수행이 된 사람들은 계에 대해서 걸려버리는 것이 아니고, 그건 당연히 그냥 자연스럽게 생활하고 살아가는 거하고 마찬가지로 지켜지는 상황이라.
그래서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들이 참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겁니다.
그것도 원인 결과입니다. 원인 결과. 아침에 조금이라도 더 많이 먹었으면 오후에 그렇게 탈진되지는 않았을 거라. 그런데 마음으로 알아차린 것들을 ‘내가 여기서 그만하자’ 할 때 그만했으면 또 그렇게 탈진되지는 않았을 거라.
원인 결과는 일상생활에서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갖다가 여러분들이 잘 이용을 해야 되는 거라. 쉽게 말하면 여러분들은 어차피 몸과 마음이라는 것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서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이 몸에 영향을 미치고 몸의 상태가 마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근데 우리 같은 스님이니까 탈진이 돼도 ‘그냥 누워가지고 쉬면 되지’ 하고 마음은 편안해. 근데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게 안 된다는 거라. 이 두 개를 얼마만큼 잘 조화롭게 하느냐에 따라서 여러분들 살아가는 데는 영향을 많이 미칠 수밖에 없다는 얘깁니다.
자, 아까 얘기를 했죠. '찰나생 찰나멸' 하고 얘기합니다.
물질적인 몸의 에너지도 점점 떨어져서 결국에는 사라지게 되듯이, 마음은 그보다도 훨씬 빠르게 일어났다가 탁 사라져 버립니다. 사라져 버리고 나면 그 마음은 다시는 이생에서는 나하고는 관계없는 마음이 됩니다. 다른 마음이 일어나게끔 되는 거죠.
예를 들어봅시다.
발을 들어 올릴 때 들어 올리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그럼 마음이 원인이라서 발을 탁 들어올렸습니다. 나아갈 때 나아갈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야만이 발이 나아갑니다. 발을 들을려고 올리려고 하는 마음하고, 나아가려고 하는 마음하고 같은 마음입니까? (다릅니다.) 다른 마음이잖아요.
그럼 들어 올리려고 하는 마음은 이생에 딱 한 번밖에 없어. 나아가려고 하는 마음도 이생에 딱 한 번밖에 없습니다. 그게 원인이라서 그다음 결과가 있게끔 되는 겁니다.
도와 과가 성숙해지면 해질수록 실수하는 부분들이 줄어들고, 결국에는 아무런 실수 없이 살아가게 됩니다. 더 이상 업을 쌓을 일이 생기지 않게끔 된다는 거죠.
여러분은 모든 것들이 다 생애 한 번뿐인 것들입니다. 허투루 그냥 ‘아유, 이번에는 나를 용서하고, 아니면 이번에는 내가 화를 좀 내도 되고’ 그런 법은 없다는 거라.
그런데 여러분이 아라한이 되기 전에 짓는 행위들은 모든 것들은 업이 됩니다. 왜 허투루 업을 쌓으려고 그래? 왜 허투루 그 업이 악업이 되도록, 악업의 결과가 되도록 만들려고 하느냐는 거라.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원인·결과뿐인데, 그 결과로 인해서 또 다른 결과가 나오도록 만들어야 되는데, 왜 그렇게 자꾸 안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하느냐는 거라. 그러면 안됩니다.
그래서 수행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지금 현재 사띠하는 것은 이생에 딱 한 번밖에 없다고 마음을 먹어야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관찰하는 것이 관찰하는 힘이 커지면 커질수록 금방 일어나는 것이 보였는데 그대로 탁 사라지는 게 보입니다.
근데 그렇게 안 될 때는 어떻게 하라고? 고통 견디면서 그렇게, 그래도 알아차리려고 해야 된다는 거라. 왜? 고요함만 좇을 수 없기 때문에.
통증이 있다. 예를 들어서 다리가 이렇게 있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까 다리에 계속 통증이 있어요. 위빳사나 수행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돼요?
호흡을 관찰할 수 있을 만큼보다도 훨씬 큰 통증이 있으면 호흡 놓아버리고, 그리고 지금 현재 내 마음은 통증에 가있다는 거라. 그럼 통증을 관찰해야 되는 거라.
그럼 어떻게 통증을 관찰해요? 관찰해도 안 사라지는데 어떻게 해? 그래도 해야 된다는 거라. 이걸 어쨌든 넘어서야 돼. 그런데 참 힘듭니다.
힘드는데, 스님도 한 3~4일 동안 그냥 다리를 묶어 놔놓고 몸을 묶어 놔놓고 이 통증을 관찰하려고 있어 봤거든요. 다른 사람들은 다리 그러면 못 쓰게 된다고 그럽니다. 피도 안 통하게 되고 뭐 이러면서. 그런데 그때는 그거 생각할 여유가 없었어요. 어쨌든 통증을 극복하고 싶어가지고, 그냥 그렇게 있었거든요. 근데 결국엔 극복이 되더라고. 독한 마음 먹지 않으면 대상은 있는 그대로 드러나지질 않습니다.
지금은 ‘통증, 통증’하고 알아차리고 있지만 나중에는 그냥 그 통증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쑤시는 것이 툭툭 쑤시는 것이 보이고 통증이라고 관찰되어지질 않아요.
이 툭툭툭툭 쑤시는 것이 그냥 그 자리에서 일어나고 그 자리에서 사라지는 게 그대로 보여. 그게 보이고 나면, 마음이 좀 편안해지면 또 다른 데서 또 그러고. 그러다가 그냥 어디 전차가 와가지고 그냥 다리를 그냥 짓밟는 것처럼 이렇게 확 짓누르는 느낌이 들고. 근데 그게 그대로 보이는 거라.
그렇게 해서 극복을 하고 나면 그다음에는 조그만 통증 오는 거, 그냥 ‘뭐지’ 하고 보면 그냥 탁 사라져 버리는 거라. 그래서 그게 더 이상 영향을 미치지 않게끔 됩니다.
통증은 내 몸에는 어떠한 경우든 다 있게끔 돼 있습니다. 근데 통증이 없는 것은 아닌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상태, 의심은 있는데 의심이 나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 됩니다. 그게 원인 결과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 때 그게 가능해집니다.
'찰나생 찰나멸'이라고 그랬죠. 대상은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게끔 됩니다.
그런데 그 원인이라는 것은 마음이 항상 앞서게끔 됩니다.
배가 불러온다, 배가 불러올 때 불러오려고 하는 마음이 없으면 배가 불러오는지 꺼지는지 모릅니다. 그럼 불러오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 가지고 불러오는 게 보여지는 거라. 원인 결과로써 계속 연속되는 것밖에 없어요.
그럼 그것만 보면 적어도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은 싹 사라지게끔 됩니다.
통증이 있어도 통증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통증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거라.
집착하는 마음만 딱 사라지고 나면 그냥 그 통증의 각각의 요소들만 보이게 되는 거라.
발을 들어 올리고 할 때, 발을 들어 올릴 때 처음에는 발을 들어 올리려고 하는 마음이 있다고 알아차리고 발을 들어 올립니다.
순 가식적으로 하게 되죠. 그런데 그렇게라도 하라는 거라.
그렇게 하니까 좀 있으니까 들어 올린다는 마음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발은 들어 올려지는 걸 알거든. 그럼 ‘발이 들어올려지네’ 하는 게 보이는 거라. 쉽게 말하면 그게 움직이는 게 보이는 거라.
그다음에는 어떻게 보여요? 조금 더 집중이 되어 지니까 발이 들어 올려질 때 어, 이게 발에서 무슨 느낌이 보이거든. ‘어, 가벼워지네’ 발이 갑자기 ‘가벼워지네’ 아니면 ‘무거워지네’ 아니면 발이 ‘누군가가 당기네’ 이런 느낌이 보여진다는 거라.
그다음에는 어떻게 돼요? 그렇게 느낌이 보이는데 느낌이 하나가 아니고 통으로 하나가 아니고, 느낌이 여러 개가 그 하나 들어 올려지는 것도 여러 개가 보여지는 거라.
적어도 그 정도가 됐을 때 그다음에 그 여러 개 쪼개지는 것 사이에도 내가 마음이 들어가지 않으면 그게 안 들어올려지고 탁 멈춰지는 상태가 되는 게 보여진다는 거라. 그때서야 "아! 마음이 먼저 앞서고, 그게 원인으로써 움직여지는 결과들이 생겨난다" 하는 것들을 이해를 하게끔 됩니다.
원인 결과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아차릴 때는 망상이 없습니다.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 나가기 때문입니다. 수행을 잘하고 있는 겁니다.
적어도 여기까지 할 것 같으면 의심을 극복한 상태가 됩니다.
더 이상 수행으로 인해서 내가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의심 안 합니다.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의심하질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선한 말 하면 선한 결과가 오고 악한 행동하면 악한 결과가 온다, 더 이상 의심하지 않습니다. 우선 내가 선한 말 할 때 내 마음이 고요해지고 청정해지니까, 악하게 마음을 먹었을 때 내가 먼저 아프니까, 본인이 알거든.
그래서 윤회하는 것들에 대한 것들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게끔 됩니다.
이걸 '쭐라소따빤나(cūḷa-sotāpanna)'라고 그럽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서 더 이상 의심하지 않는 상태!"
의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하지 않게끔 되는 거죠. 행동하는데 나쁜 말 하고 나쁜 행동 하겠어요? 안 한다는 거라. 악처에 떨어질 일이 뭐가 있어요? 윤회는 하겠지만, 악처에 떨어질 일이 없어요.
적어도 도의청정만 되더라도 적어도 윤회한다고 하더라도 계속 수행할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거라. 그것까지는 해야 됩니다.
적어도 이 생에서는 가장 기본입니다. 몸과 마음을 구분할 수 있는 상태에서 그것들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게 되는 상태까지는 하는 게 그렇게 어렵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진짜 열심히 노력을 해야만이 가능합니다.
그거는 해야만이 부처님 법을 만난 보람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가능하겠죠? (예)
자, 그러고 나면 그다음에는 쭉 내달리는 길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다음 시간에는 '도비도지견청정'이라는 부분에 들어갑니다.
쉽게 말하면 '어떤 게 내가 해야 될 것이고 어떤 게 하지 말아야 될 것인가?' 하는 그런 것들입니다.
(수행자 질문 : 근데 스님께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도의청정에서 있잖습니까? 저희가 삼귀의 의례를 할 때, '상강 사라낭 갓차미(Saṅghaṁ saraṇaṁ gacchāmi)' 했을 때 '상가에 귀의합니다' 이랬을 때에, 뭐 대승불교권에서는 가타부타 할 필요는 없고 예, 원전을 보게 되면은 어떤 개인을 얘기하는 게 아니고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성자들이 모인 그 상가(Saṅgha)가 귀의의 대상이라 해서 그 본뜻은 그런 뜻에 두고서 삼귀의를 한다. 이게 분명히 나와 있거든요. 소부에도 있는데, 대승불교 경전 쪽으로 흘러오면 그 대상을 사람으로 하고 있거든요.
스님, 이거는 확실히 테라와다 불교 쪽에서도 이거는 확실히 정리가 돼야 되지 않겠습니까?)
정리돼 있습니다. 정리돼 있는데 (수행자 : 다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모르고 있었는 것뿐이지. 상가는 어떠한 경우든지 쉽게 말하면,
상가(Saṅgha)의 개념이 현전상가와 사방상가의 개념이 있습니다.
현전상가라는 것은 지금 현재 살아있는 출가한 스님들 중에서 도와 과에 이르신 분들, 수다원부터 아라한까지, 그래서 사쌍팔배라고 그럽니다. 그 '도와 과에 이르신 분들만을 현전상가에서의 상가'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이제 이게 사방상가라는 개념으로서 확대가 되면 어떻게 되냐면 그런 상가가 옛날에 아라한들이 없었어요? 있었잖아. 앞으로도 아라한들이 생길 가능성이 있죠? 그럼 '과거·현재·미래 다 그러한 성자가 될 수 있는 존재들을 다 포함할 때는 사방상가'의 개념이 됩니다.
이랬든 저랬든 성인을 얘기할 때 상가(Saṅgha)라는 개념을 딱 붙이게끔 됩니다.
이게 기본적인 개념입니다.
여러분들이 '붓당 사라낭 갓차미' 할 때, '상강 사라낭 갓차미' 할 때 상가(Saṅgha)의 개념은 딱 그 개념입니다.
그러면 성자가 되기 전에 출가한 스님들은 상가가 아니라요?
(수행자 대답 : 사방상가..) 아니죠. 사방상가의 개념하고는 틀립니다.
그래서 상가의 개념이 나중에 어떻게 바뀌었느냐 하면,
스님들은 출가의식을 통해서 출가를 하게 되죠. 출가하고 나면 그다음에는 잘잘못에 대해서 '상가깜마'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잘잘못에 대해서 갈마를 하게끔 됩니다. 그래서 갈마로 인해서 청정하게 된 스님들만 상가의 일원이 됩니다. 그게 첫 번째입니다. 쉽게 말하면 죄짓지 않는 잘 살아가는 스님들이 상가의 일원으로서 존재를 하게끔 됩니다. 죄를 숨기는 사람이나 아니면 죄를 지은 사람이나 이런 사람들은 상가의 일원에 포함이 안 되어 버린다는 뜻입니다. 이게 첫 번째 개념이고,
두 번째는 뭐냐면, 그 상가 스님 중에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으면 어떻게 할까?
‘나는 윤회 안 믿어.’ ‘나는 아비담마는 부처님이 설한 게 아니니까 아비담마는 안 믿어.’ 이렇게 돼버리면 어떻게 될까?
쉽게 말하면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서 이견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이거는 상가에서 딱 정립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맞는 자들만 상가의 이름으로써 받아들입니다. 나머지는 상가에서 쳐버립니다.
결집을 한 것들이 전부 여기에 해당이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부터 해가지고 맥을 쭉 이어오는데 뭔가 다른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 분이 있다. 그럼 이건 상가의 일원으로서 빼버립니다.
근데 여기는 어떻게 돼요? 그냥 그대로 존재를 합니다. 그건 또 계속 내려오고, 그리고 또 무슨 또 문제가 생기면 또 그런 결집을 통해서 또 빼버리고.
그래서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부파불교'라고 하는 개념은 테라와다에서는 그렇게 얘기를 안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오직 하나의 줄기다." 하고 얘기합니다. 하나의 줄기로 쭉 내려오면서 다른 견해가 되면 다 쳐버린 것이지, 그걸 쉽게 말하면 부파라고 하는 것이지, 원래의 줄기는 부파라고 하는 개념을 쓸 수가 없다고 얘기를 합니다. 그냥 한 줄기라.
부처님 당시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존재를 하고 그대로 유지를 해 나가고 있고, 문제가 생겼을 때는 그런 결집을 통해서 분명하게 정립을 해왔다는 거라.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지금은 상가의 개념은 이 두 가지가 결합 된 형태입니다.
법에 대해서 어긋난 견해를 가져서는 안 되는 거고, 그다음에 율에서도 어긋나는 것들을 해서는 안 된 출가자들을 갖다가 상가로서 묶어둡니다. 그런데 그거는 이제 상가, 모든 상가인데, 그런 출가한 스님들을 상가로서 모두 묶어 둔 게 하나가 있고,
아까도 얘기했지만 지금 귀의의 대상으로서의 갓차미(gacchāmi)라 할 수 있는 것은 아까 얘기했던 과거·현재·미래에 존재하는 모든 성인들을 얘기합니다!
그래서 상가의 개념이 이렇게 다르지만은, 갓차미(gacchāmi)라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게 차이를 둡니다. 이해가 됐습니까?
(수행자 질문 : 그럼 부파 불교가 18개 정도 이렇게 갈라지는데, 테라와다 불교를 중심으로 한 그 이외에 딸려져 나간 부파들은 부처님의 한 법에 배치되는 행위 내지는 이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짤려나가게 됐고, 그래서 부파가 생겼다고 이렇게 보면 됩니까?)
그렇죠. 그래서 따로 나와가지고 자기들이 원하는 그 학파들을 만들은 상태죠. 학파를 만드는 것뿐 아니고, 그래서 지금도 대승불교 스님들은 출가자로서 인정을 못 받고 있습니다. 왜? 계를 동일한 계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동일한 부처님 가르침을 갖다가 인정하고 그걸 따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분들 뭐 아미타불부터 해가지고 많이 하고 있잖아요. 관세음보살, 테라와다에는 그런 게 없다는 거라. 부처님 가르침에 그런 것이 없다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인정을 못 받고 있는 것이지, 그렇다고 해가지고 현재 존재하고 있는 스님들에 대해서 무시할 이유는 또 없습니다. 그건 그대로 존중을 해주고, 단지 상가 깜마를 한다든지 아니면 포살을 한다든지 할 때는 어떠한 경우든지 여기에는 청정한 법과 율을 지닌 사람만 참석이 가능하게끔 됩니다. 그런 차이는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