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LQO0ZZPKnhY?si=XdEuxILldC6tMr9C
* 열반에 이르는 7청정의 로드맵(6부)-행도지견청정_(사)21세기 불교포럼 정기법회_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2025. 9. 27)
잘 지냈습니까? 수행해 보니 좋아요?
수행을 하면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면 수행이 재밌어집니다. 재미있어지면서 이제 갖가지 뭐 기쁜 현상들이라든지, 행복감이라든지, 마음이 날카롭게 변한다든지, 이런 현상들로서 나타나지게 됩니다. 그런데 저번 시간에 그런 것들은 10가지 종류가 전부 도의 길은 아니라고 그랬죠? 버려버려야 되는 것들입니다.
어쨌든 수행을 하면 되게 좋습니다. 편안해지고, 그래서 ‘내가 이 상태로도 충분히 잘 살겠구나’, ‘내가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하는 그런 확신들이 들기도 하고 그렇긴 합니다. 그것에 머물러 있어 버리면 지혜는 안 일어나지고, 그걸 이제 자신이 잘 돌아보면 됩니다. ‘이거 이렇게 일어나는 기쁨이 내가 깨달은 것은 아닌데, 계속 이렇게 기쁨에 그냥 휩싸여가지고 이렇게 있어도 되느냐’ 뭐 이런 생각들을 하게끔 됩니다.
그걸 그렇게 봤을 때 이제 지혜가 열릴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지금의 현상에 대해서 이해를 하게 될 때 그 현상들을 다시 한 번 더 보게 됩니다. 그러면 그런 기쁨도 어쨌든 사라지는 거라. 사르르 사라져 버리고, 아니면 그 기쁨이 다른 거로 변해가 버리고 이렇게 되게 되는 거라.
그래서 그걸 갖다가 "지혜의 토대가 되는 세 가지다" 하고 얘기합니다. "냐나, 아위보다, 빳짯땅 웨디땁보"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것에 대해서 분명한 이해가 있고, 아, 그것들을 아는 지식이 있고, 그것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가 있고, 그리고 그것들에 대해서 내가 체험해서 이게 따라갈 것인지 아닌지를 분명하게 아는 것, 이렇게 세 가지. 그러고 나면 인제 지혜가 열릴 조건은 갖추어졌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어쨌든 아직은 지혜의 단계에는 이르지는 못한 상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을 하다 보면 이 단계를 뛰어넘은 사람들은 그다음부터는 그런 10가지 현상들이 안 일어납니다. 왜? 그것들이 지혜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거고,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에 오히려 집착하는 대상만 되지, 그것으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르게 해주지는 못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알고 나면 버려버리거든. 버려버리고 나면 안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게 지혜의 토대가 된다고 그렇게 얘기들을 하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지혜가 일어나면 세상은 조금 편해질 건데, 수행을 통해서 이렇게 체험하는 것으로 인해서 지혜가 일어나기도 하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도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으로 인해서 내가 행복해질 수 있고, 부처님 가르침으로 인해서 내가 지은 행위들은 내가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끔 되고 확신하게 되고, 그리고 그 부처님 가르침을 부처님이 전해주는 것이 아니고 지혜 있는 스님들이 전해주기 때문에 그 스님들이 가르치는 방식을 그대로 따라서 하려는 마음들이 생겨나는 거고. 그런 것으로 인해서도 지혜는 일어나집니다. 그런 확신들만 완전하게 든다면. 그런데 그러기 참 힘들죠.
그래서 마음이 오롯하게 그 길을 따라갈 수 있는 상태는 되지는 못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도의 길이 아니고 도의 길이 아닌 것들을 잘못 따라가는 경우들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래도 어쨌든 수행을 통해서 상태들을 분명하게 알면 가장 빠른 길이라는 거라. 그러면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서 확신도 들고, 가르치는 스승에 대해서 확신들도 드는 거고, 이런 여러 가지들을 같이 겸할 수 있게끔 됩니다.
지금까지 잘 이해는 했을 거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 단계 이후에는 "행도지견청정"이라고 이렇게 합니다.
그전에는 "도비도지견청정"이었는데, 그래서 도의 길만 걸어가면 되는데, 마지막에는 일곱 번째는 "지견청정"인데 앞에 붙은 두 개는 '도·비도'가 있고, 이거는 '행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도·비도'에서 비도는 안 따라가게 되고, 도의 길을 가게 되는 거죠. 그 도의 길을 쭉 따라가는 그 길이 쉽게 말하면 '행도'입니다. 그걸 이제 빨리어로 '빠띠빠다(paṭipadā)'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들 팔정도 잘 알죠? 팔정도가 '빠띠빠다'다 하고 얘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중도'라고 하는 겁니다.
중도가 지나친 것도 치우치지 않고, 그다음에 좋은 것도 가까이 하지 않고 나쁜 것도 가까이 하지 않고, 이런 상태를 중도라고 이야기 하는데, 수행에서는 그걸 '중도'라고 얘기를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일반적으로 그냥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 다 중도적으로 살아간다고 봐야 되는 거지.
그래서 그렇게 얘기하지는 않고, 수행에서 '중도'라고 하고 '팔정도'라고 하는 것은 "사띠가 있느냐 없느냐"를 가지고 판단합니다.
사띠가 있을 때는 어떤 마음이라요? 항상 선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사띠가 있을 때는 항상 대상을 알아차리게끔 됩니다. 내가 뭘 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는 거죠.
설혹 그 중도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사띠가 있으면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크게 벗어나지지를 않는 거라. 그래서 그걸 수행에서는 "중도"라고 얘기를 합니다. "사띠가 있는 삶!"
그래서 수행의 처음도 사띠고, 마지막 죽음에 이르기 직전에도 사띠고, 그리고 일상생활에서도 사띠입니다. 쉽게 말하면 "사띠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마라" 라고 하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또 "사띠 없이 살아가면 그거는 죽은 시간이고, 죽은 것과 같다" 하고 얘기들을 하는 이유가 그렇습니다.
어쨌든 빠띠빠다라고 하는 것은 그 길이 되게 깁니다. 여러분 일생이 빠띠빠다라고 보면 됩니다. 여러분 태어났으면 어쨌든 성장을 하고 늙게 돼 있고 병들게 돼 있고 죽음을 맞게 돼 있는 거라.
그러면 그 길 동안에 물론 여러분들 일상생활도 참 다채로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지만, 수행에서는 그 길 동안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그전에는 좋은 일들이 일어났잖아. 기쁘고 행복하고 막 이런 것들이 일어났는데, 이제는 정반대입니다. 벗어나고 싶고, 싫고, 두려운 마음도 생기고, 그런 것들만 일어나게 되는 거라. 쉽게 말하면 이 길(道)이라는 게.
부처님이 태어나는 것은 뭐라고 그랬어요? 고(苦)라고 그랬죠.
고(苦)는 여러분들이 싫어하는 거잖아. 삶 자체가 고라는 거라 쉽게 말하면.
왜 그럴까? 왜 고(苦)라고 했을까? 나라고 하는 것이 있으면 항상 하기를 바라는 거고, 나라는 것이 있으면 행복하기를 바라는 거고, 나라고 하는 것이 있으면 좀 더 살고 싶어 하는 생존 욕구가 있게 되는 거고, 그리고 내가 항상 세계의 중심에 있어야 되는 거라. 그런데 나라고 하는 것이 부처님은 없다고 했거든. 그러니까 반대가 돼버리는 거라. 항상 행복하고 싶은데 항상 행복하지는 못하다는 거라. 언젠가는 괴로움이 일어나지게 돼있고, 파도를 치게끔 돼 있다는 거라. 언제까지 살고 싶어도 언젠가는 또 죽어야 되는 수밖에 없다는 거라.
쉽게 말하면 수행을 통해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부처님이 모든 것이 고라고 했듯이 수행을 통해서 지금부터 나아가는 길들은 전부 고의 영역에 다 속하는 것들을 내가 이해하는 상태가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할까? 힘들어 죽겠는데. 싫어. 그거 안 했으면 좋겠는데 어쨌든 그 길을 통과해야 된대. 깨달음이 이르려면 그 통로를 지나가야 된다는 거라.
그럼 어떻게 해야 이 통로를 스무스하게 지나갈 수 있을까? 그 전에 좋은 거 있을 때는 참 좋았는데, 이제는 그게 안 나타난다는데 어떻게 할까? 어떻게 이걸 통과해 나갈까?
집착을 안 하면 됩니다. 그냥 뭐가 일어나더라도 ‘아이고, 그러려니’ 그러려니 해버리고 지나가 버리면 스무스하게 통과를 해나갈 수가 있다는 거라. 쉽게 말하면 여러분의 인생에서도 뭐 괴로운 일들이 일어나고 하더라도 ‘아이고, 이것도 뭐 한때 일어났다가 또 언젠가는 또 그게 지나가겠지’ 하는 마음을 먹고, 지금 그러면 이럴 때 내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만 잘 대처를 해나가면 충분히 그걸 극복해낸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그걸 극복한다 해가지고 또 안 나타나는 것은 아니야. 또 다른 게 또 나타나겠지.
그래서 이렇게 여러 가지가 계속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게 인생인데, 수행도 똑같아요. 수행도 아, 그냥 싫어. 자꾸 변하는 것들이 안 변했으면 좋겠는데 변하니까 싫어. ‘아이고, 싫은 것도 한 때겠지. 그냥 그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났으면 그거 그냥 보자’ 하고 봤다고 치자. 그렇게 해가지고 싫어하는 마음이 싹 사라졌어.
그러면 마음이 깨끗해지고 평화로워져야 되는데, 아 그게 아니고 이제는 싫어하는 마음이 탁 사라지고 나니까. 막 변하는 것들이 너무 빠르니까 두려운 마음이 또 퍽 생기는 거라. 그것도 어떻게 해야 돼? 지켜보고 집착하는 것들을 내려놓으면 또 그걸 극복을 해.
그렇게 해가지고 여러 단계들을 겪는 거라. 그게 이제 지혜의 단계에서는 10가지를 이렇게 쭉 설정을 해놔놨습니다. 그런데 10가지로 해놨는데, 여러분이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스님이 딱 간추려가지고 세 가지로 설명을 하겠습니다.
대상을 보면 사라집니다. 그것도 이제 그 전에 물질적인 현상이 있을 때는 항상 사고가 끼어듭니다. ‘어,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이 일어납니다. 변하니까. 그런데 물질적인 현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어느 정도 잠잠해지고 나면, 그것을 관찰하는 정신적인 현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보여집니다. 그래서 내 마음이 뭔가가 생각이 탁 일어났다, 그럼 그 생각을 관찰하면 금방 뽀로록 하고 사라져. 그런데 사라지는 속도가 물질적인 것보다 훨씬 빠르다는 거라. 물질적인 것은 좀 천천히 사라져. 천천히 바뀌어요.
예를 들어봅시다. 여기 칼에 베어가지고 통증이 있다. 통증이 빨리 없어져요? 잘 안 없어지죠. 오래도록 갑니다. 이 물질적인 현상들은 오래 갑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렇게 아픈 걸 보다가도 누가 옆에서 탁 때리면 금방 착 잊어버립니다. 마음은 금방 바뀌어버립니다. 금방 사라져버리고 새로운 것이 탁 나타나 버립니다. 조금만 강한 자극만 나타나면 금방 마음은 그쪽으로 탁 가버린다는 거라.
그렇다고 해가지고 물질적으로 통증이 사라진 것은 아닌데, 마음은 금방 그래 갈 수가 있다는 거라. 그마만큼 빨리 갑니다. 쉽게 말하면 여기서 있었던 마음이 금방 없어져 버리고 다른 마음이 탁 생기는 거라. 쉽게 말하면 물질적인 것하고는 틀리게 물질적인 아픔은 여기가 쑤셨다가 여기가 쑤셨다가 자꾸 바뀌는데, 정신적인 현상들은 일어난 자리에서 그대로 탁 사라져버리고 다른 마음이 탁 생겨나버리게 되는 거라. 그걸 경험을 해야 된다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일어난 곳에서 사라진다." 그걸 본 사람은 물질적인 현상을 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현상으로 본 것이 돼버립니다.
그래서 정신적인 현상을 딱 보고 나면은 재미있거든요. 그래서 막 여러 가지, 열 가지 현상들이 막 일어납니다. 일어난 것이 사라지는 게 금방 보이니까. 그래서 이제는 마음이 물질적인 현상보다는 정신적인 현상에 더 마음이 더 쏠려가 있어요. 그거 관찰하고 사띠하기 바빠. 그런데 이놈의 정신적인 현상이라는 게 일어나면 사라지는 것이 그전에는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 어느 정도 속도가 있다가 점점 이게 빨라집니다. 왜 그럴까?
사띠가 깊어지는 데 집중하는 힘이 커지기 때문에 그런 거라. 점점 마음은 정신적인 현상에 집중하는 힘이 커져가고 있는 거거든. 물질적인 것일 때는 사고들이 자꾸 일어나기 때문에 자꾸 벗어나지는데, 정신적인 현상을 관찰할 때는 잘 안 벗어나집니다.
그럼 그거 그냥 계속 관찰을 하게끔 되는 거라. 일어나면 사라지고 일어나면 사라지고, 이걸 따라가다 보면 정신적인 현상이 너무 빨리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 보입니다. 그러면 따라가기 힘들어집니다. 쉽게 예를 들면 탁 일어난 것을 봤는데 언제 사라졌는지 팍 사라져 버리거든. 그럼 이게 계속적으로 된다 할 것 같으면 어떻게 보이냐 하면,
수행자 입장에서는 사라지는 것만 보이는 거라. 쉽게 말하면 과녁이 탁 올라왔는데 올라온 걸 갖다가 총을 가지고 탁 쐈다고 해봐. 그럼 탁 맞는다고 하면, 그게 계속적으로 이 과녁, 이 과녁, 이 과녁 계속 일어날 것 같으면 어떻게 돼요? 그냥 ‘탕, 탕, 탕, 탕’ 하는 것만 보입니다.
오소리 튀어나오는 거하고 마찬가지입니다. 요게 튀어나오는 전체적인 모습이 다 보이는 게 아니고, 튀어나오는 것은 보이는데 전체적인 건 안 보여도 이거는 이미 튀어 나온다는 건 알아. 마음으로 안다는 거라. 그러면 그냥 탁 쳐가지고 그냥 사라지게 되는 거라. 그래서 그냥 나중에는 어떻게 하냐면 그냥 ‘탕, 탕, 탕, 탕’ 하는 것만 보여. 쉽게 말하면 사라지는 것만 보이는 거라. 사라지는 것만. 대상이 빠르면 그렇게 보여집니다.
안 죽고 싶죠? 그런데 지금은 계속 사라지는 것이 죽음으로 보여요. 사라지고 사라지고. 사라지는 것만 보이면 두려움이 생깁니다. 왜 그럴까? 아까 얘기했죠. 행복하고 싶고, 살고 싶고, 그중에서 뭐가 작동을 해요? 살고 싶은 욕구. 생존욕구가 있기 때문에 생존욕구가 탁 있는 상태에서는 계속 죽음-사라지는 것이 죽음과 같으니까, 사라지는 것만 보이니까 덜컥 겁이 나버리는 거라. 두려움이 굉장히 엄습해 옵니다. 그런데 한번 두려움이 일어나더라도 어쨌든 그걸 극복해야 될 거 아니라.
그래서 안 좋은 거 세 묶음으로 아까 스님이 얘기를 한다고 했는데,
맨 첫 번째로, 일어나는 것이 사라지는 것만 보이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두려운 것이 먼저 일어난다는 거라.
어떻게 극복을 할까? 두려움은 어디서 일어나는 거라? 생각! 두려움이라는 실제적인 현상이 일어나는데 '두렵다고 생각을 해버리기 때문에' 두려움이 사라지지를 않는다는 거라. 아까 정신적인 현상이 빠르게 변한다고 했잖아. 그럼 두려운 것도 정신적인 현상인데 그걸 그냥 봐버리면 두려움이 사라져버릴 거 아니라. 그런데 왜 두려움이 계속 있어? 두려움이라는 실재적인 현상이 일어났는데, 그걸 두렵다고 하는 대상으로서 보지를 않고 두렵다는 생각이 탁 일어나버리게 되는 거라. 그러면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는 거라. 붙잡고 있는 형태와 같은 거라.
간단하죠? 두려움을 없애게 하려는 것은 ‘아, 또 내가 실제적인 대상은 놓쳐버리고 대상이 아니라 대상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생각에 딱 묶여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면 됩니다.
세 가지로 크게 나누는데, 이거는 뭐냐면 쉽게 말하면 나라고 하는 것이 없는 거기 때문에 집착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상태로 가기 위한 거거든. 쉽게 말하면 어떠한 것이든 집착하고 있는 것들이 소멸되는 단계라고 보면 됩니다.
이 지금 크게 세 등분으로 나눈 것은 전부 「무아의 현상들로 인한 집착의 소멸의 단계」라고 보면 됩니다.
뭐가 최고 먼저 일어났어요? 뭐가 집착하는 것이에요? 생각입니다. 생각에 집착하고 있는 거라. 두렵다는 생각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그냥 그 생각을 또 사띠 하면 돼. 관찰하면 그 생각은 또 사라지게 돼있는 거라.
그래서 1단계를 탁 극복을 했다고 칩시다.
그런데도 현상은 빨리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그것도 일어나는 거는 보이지도 않고 계속 사라지는 거만 보여요. 나는 행복하고 싶고, 나는 이제 두려움은 극복은 했는데, 그렇다고 해가지고 내 인생이 나쁜 상태로 빠지는 것들을 막아주고 있는 것은 아니잖아. 그래서 이제는 마음이 그런 위험함을 보기 시작하는 거라. 그래서 그걸 위험함을 보는 현상들이 계속적으로 일어납니다.
"어떤 만족도 없고 어떤 기쁨도 없다" 하고 경전에서는 설명을 합니다. 머물러 있지 않으니까 만족할 수도 없고, 기쁨이 일어나지도 않는 거라. 그렇게 위험한 상황이 오면은 대부분은 앉아서 수행하다가 나락에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라. 그러면 자기가 천 길 낭떠러지에 떨어질 것 같으면 어때요? 금방 눈을 팍 떠버리든지, 안 그러면 벌떡 일어나버립니다. 일어나서 도망가 버립니다. 수행은 거기서 땡 쳐버려요.
어떻게 극복해버릴까? (수행자 대답 ...) 그렇죠. 정신적인 거죠.
지가 위험하다고 느낀 건데, 어쨌든 몸과 마음이 분리돼 있는 거잖아. 몸과 마음이 분리돼 있는 거기 때문에, 그러면 몸과 마음이 분리돼 있다는 사실을 빨리 알아차려야 됩니다.
사띠를 통해서, 덩어리를 잡고 있으면 극복을 못합니다. 정신적인 현상도 계속적으로 여러 가지 다른 현상들로서 계속 일어나고 있는 거라. 그럼 낱낱으로 분리된 것으로 이렇게 보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수행자 대답 ...) 그렇죠.
그래서 나라고 하는 것은 전혀 거기에 개입을 안 시키고, 그냥 단지 나는 사띠만 있어가지고 그 현상들을 본다고 자꾸만 느껴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그 위험한 것들로부터 빠져나오지를 못하는 거라.
여러분들 경전 읽으면 그런 거 많이 접하죠? 오온의 해체, 그다음에 모든 것들을 갖다가 다 분해해가지고 해체해가지고 낱낱이 따로따로 봐야 된다. 왜 그러냐면 마음은 하나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 찰나에는. 그러면 그 찰나에 하나 보인 그것만 알면 돼. 다른 것은 나하고는 관계없는 것들이라. ‘내 몸과 마음은 이렇게 전부 다 해체시켜 놔 있는 상태라고 분명히 알고, 지금 일어나는 것들만 분명하게 사띠한다’ 하고 마음을 먹어야 됩니다. 만약에 위험하다고 느껴도 ‘위험하다’고 보면 될 거 아니라. '위험하다고 보는 마음'을 갖다가 관찰을 하면 되는 거라. 그러면 그것도 정신적인 현상이니까 툭 사라지게 되는 거라.
‘불만족스럽다’ 불만족스러운 것 그 마음을 갖다가 보라는 거라.
‘왜 이렇게 무미건조하고 무덤덤하지?’ 그 마음을 보라는 거라.
그런데 두 가지 마음을 동시에 볼 수는 없잖아? 그래서 동시에 보려고 할 것 같으면 위험함은 항상 존재를 하게끔 되는 거라. 그래서 그걸 분리해서 보는 노력들을 자꾸 해야 됩니다.
여러분 집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씩, 하나씩! 뭐든지 걸어갈 때는 걷는 데만 그냥 집중해. 뭘 자꾸 보고 들으려고 하지 말고. 그리고 뭔가 밥을 먹으면 밥 먹는 데 집중을 해. 밥 먹으면서 말하는데 같이 하려고 하지 말고. 경전에 나와 있는 얘기입니다. 경전에 정확하게, "대소변을 볼 때는 대소변을 보는 것을 사띠하라. 옷을 입을 때는 옷을 입는 것을 사띠하라."
그렇게 해가지고 지겨워하고 위험하고 두려워하고 하는 것들을 극복을 하고 나면은, 그다음에는 벗어나고 싶어하는 거라. 그런 것들이 너무 싫다는 거라. 자꾸 바뀌는 것들이. 자꾸 바뀌는 것들이. 그래서 어쨌든 여기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마음이 탁 일어납니다.
이게 쉽게 말하면 10개의 지혜의 단계가 쭉 이어서 마지막에 일어나는 마음입니다.
이제 그렇게 벗어나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강하게 일어나면 일어날수록 빨리 우뻭카의 상태에 도달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그런 단계 단계들은 전부 우뻭카(upekkhā)에 이르기 위한 상태라고 보면 됩니다. 우뻭카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쨌든 그런 싫은 현상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거라. 그냥 좋은 감정들, 좋은 마음들이 일어났다고 우뻭카에 탁 도달하면 얼마나 좋겠어. 그런데 그렇게 되는 법이 없다는 거라.
그런데 인제 어쨌든 이렇게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마음들이 탁 일어날 때, 그것도 마찬가지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마음’들을 관찰을 해야 됩니다.
그것도 벗어나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났을 때,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것들에 딱 묶여버리면 수행 자체로부터 벗어나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거는 아주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게 되게 됩니다. 두 번 다시는 안 하려고 그럽니다 수행을. 그래서 어쨌든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도 정신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관찰하도록 해야 됩니다. 집착하는 것들이 뭔가 하는 것들을 잘 보도록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우뻭카가 개발이 되는 상태가 되면은, 이때는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현상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만 보이고 하더라도, 그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너무나 빠르게 변하더라도, 마음은 전혀 그것으로 인해서 요동치지 않는 상태입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어떤 현상이 일어나더라도 평온한 상태"가 되는 겁니다.
그걸 보통 빨리어의 용어로 중립적인 상태에 대해,
'따뜨라맛잣땃따(tatramajjhattatā)'고 해서 '중립적인 상태에 마음이 도달했다'하고 얘기를 합니다.
수행을 통해서 일어나는 '우뻭카', 쉽게 말하면 상카라가 우뻭카가 되는 '상카루뻭카(saṅkhārupekkhā)'라고 하는 상태가 있고,
또 십바라밀이라고 알죠? 십바라밀에 개발해야 되는 바라밀 중에 '우뻭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또 뭐가 있죠?
범천과 같은 삶이라 해서 '브라흐마위하라'라 해가지고 거기에도 자·비·희·사에 '사, 우뻭카'가 있습니다. (수행자 대답 ...) 그렇죠.
똑같은 '우뻭카(upekkhā)'라고 용어를 쓰는데 같은 걸까? 뭔 차이일까?
바라밀을 좀 많이 쌓아야 된다고 얘기를 하죠? 그래서 바라밀을 많이 쌓아야 됩니다. 계도 지켜야 되고, 보시도 해야 되고, 그다음에 노력하는 힘들도 키워야 되고, 그다음에 결정해가지고 뭔가를 실행하고 끝까지 하려고 하는 마음도 키워야 되고, 이런 여러 가지 중에서도 우뻭카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거기서 말하는, 바라밀에서 말하는 우뻭카(upekkhā)는 어떤 용도로 쓰였을까?
내가 당신에게 10원을 줬어. 그러면 나는 또 다음엔 쟤가 나한테 10원 주겠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우뻭카가 안 되는 거라. 쉽게 말하면 우뻭카는 “내가 행한 행위에 비해서 돌아오는 결과가 어떤 것이 되더라도 받아들이는 상태", 이게 바라밀에서 말하는 우뻭카 입니다. 그래서 ‘왜 나는 선행을 참 많이 했는데 왜 나는 요 모양, 요 꼴이 됐을까?’ 이러면 우뻭카 개발을 해야 되는 거라. 이해가 되죠?
그러면 사범주라고 하는 자·비·희·사의 사, 우뻭카(upekkhā)는 어떤 걸까?
남이 기뻐하면 나도 같이 기뻐해주고 슬퍼하면 같이 슬퍼해주고, 그런데 사는 어떤 마음이라? 남이 기뻐하든 슬퍼하든 나는 평온한 마음을 유지한 상태가 되는 거라. 그 대신에 남이 기뻐하면 마음은 기뻐하지만, 같이 그 기쁨의 물결에 휩싸여지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좋다고 하하하하 웃으면 그건 어떻게 돼요? 그건 따라가는 거라. 슬프다고 해가지고 같이 울어주면 어떻게 돼요? 그것도 따라가는 것이 되는 거라.
슬플 때는 이 사람이 왜 슬프고 이 사람이 기쁠 때는 왜 기쁜지를 갖다가 내가 분명히 알고 이해하고 있을 것 같으면, 그럼 이 사람한테 기쁜 일이 일어났을 때는 “아, 참 잘했어. 그래도 네가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에 이리 좋은 일이 있는 거야.”하고 평온하게 얘기해 줄 수 있는 거고, 슬픔이 있고 할 때는 “그래. 뭐 살다 보면 그렇게 잃어버릴 때도 있고 죽음을 맞을 때도 있어. 안 죽은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그래” 이런 마음으로 위로를 해줄 수도 있다는 거라. 그게 쉽게 말하면 사범주에서 말하는 우뻭카 입니다. 아까 얘기한 바라밀에서 우뻭카하고는 틀리죠.
그러면 수행에서 말하는 우뻭카(upekkhā)는 어떤 상태일까?
수행에서 분명히 '상카라-우뻭카'라고 했습니다.
상카라(saṅkhāra)는 어떤 거라요? (수행자 대답 ...) 몸과 마음의 현상입니다. 몸과 마음으로 인해서 만들어지는 모든 현상들. 여러분들 몸도 있고,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도 있고, 이렇게 접촉하면 오는 느낌도 있고, 모든 것들이 다 포함이 됩니다.
쉽게 말하면 탁 접촉을 했는데 차갑다 ‘앗, 차가워’, 뜨거우면 ‘앗, 뜨거워’ 이렇게 할 것 같으면 우뻭카가 아닌 거라. 차가우면 ‘차갑다’ 하고 마음은 평온한 상태에서 알아차리고 있어야 되는 거고, 뜨거우면 ‘뜨겁다’ 하고 알아차려야 되는 거고, 그래서 손을 떼야 되겠다는 마음이 일어나면 손을 떼면 되는 거고.
그게 쉽게 말하면 오온을 분해했을 때 느낌이 있으면 느낌으로 인해서 우뻭카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 마음이 있으면 그 마음으로 인해서 어떤 마음이 일어나더라도 우뻭카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 몸이 늙고 병들고 죽음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그 몸으로 인해서 우뻭카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 이게 '상카라우뻭카(saṅkhāra-upekkhā)'라고 하는 거라.
틀리죠? 앞에 두 개는 지 몸과 마음이 대상이 되지를 않아. 밖에 게 대상이 되고, 그리고 지가 닦는 선과 악에 대한 결과가 대상이 되는 건데, 상카라우뻭카는 어떠한 경우든지 자기의 몸과 마음입니다. 이때까지 몸과 마음을 봤잖아 수행해서. 그래서 그 상태가 어떤 상태가 나한테 일어나더라도 마음이 평온한 상태가 되도록 만들어야 되는 거라. 그게 두려운 마음이 일어나든 아니면 벗어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일어나든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동요하면 안 된다는 거라.
왜 안 동요하게 될까? 상카라는 어떠한 경우든 니 게 아니라. 내 게 아니라. 나, 나의 것이라고 할 만한 집착할 만한 것이 없어. 그걸 이때까지 수행해서 쭉 봐왔잖아.
그런 마음은 그 어떤 현상이 일어나더라도 그냥 그것들을 그냥 사띠하는 것밖에 없어. 여기까지만 탁 도달하면 요 긴 터널을 다 빠져나온 것이 됩니다.
쉬울 것 같죠? 그런데 하다 보면 이렇게 빠져나오면서 두려움에서 도망가기도 하고, 공포감으로 인해서 도망가기도 하고, 벗어나고 싶다 해가지고 진짜 벗어나버리고, 무지하게 이 과정들을 반복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반복을 하는데 어디서부터 반복을 할까? 그게 앞에 것하고 지금 것하고 청정을 구분해놓는 이유입니다.
그전에 청정에서는 도비도까지의 전 단계에서는 거기서 수행을 멈춘다든지 벗어나면 처음부터 다시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을 구분하는 것부터 다시 해야 되는데, 이제는 그게 아니고 탁 보면 이 현상들이 싹 빠르게 변하는 것이 먼저 보여. 그마만큼 수행이 많이 쌓였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빠르게 생멸하는 현상들이 먼저 보이고, 그리고 생멸하는 것에서 사라지는 것만 먼저 보이게 되고, 이런 과정들을 겪게 됩니다. 그런데 그리하면 사라지는 것만 보이면, 그다음에 두려움이 일어나고 그렇게 할 것 같죠? 그런데 한 번 이렇게 통과하고 나면 그다음에는 별로 영향을 안 미쳐요. 일어나긴 하는데, 다른 현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어, 내 몸이 확 사라져버리네’ 이렇게 보이기도 합니다. 이거는 사라지는 현상들이 다른 현상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래서 깜짝 놀래가지고 수행이 탁 깨지는 경우들이 있는데, 그리하더라도 그것도 어쨌든 또 지나면, 지가 만져보면 지 몸이 있다는 거 알잖아. 느낌이 있죠. ‘어, 내 몸이 사라진 건 아니네’ 분명하게 알고 다시 또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는 거라.
현상들은 각각 다르게 나타날지 몰라도 이러한 10가지 지혜의 단계들을 빠르게 다시 또 반복을 하게 됩니다. 그리해도 또 뛰쳐나가고 수행 그만두고 하는 것들이 비일비재로 일어나게끔 됩니다. 그래서 상카라우뻭카의 상태에 도달했는데, 그냥 거기서 계속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
왜 그러냐면 깨달음을 이루려면 상카라우뻭카냐나(saṅkhārupekkhā ñāṇa)에서 시작을 해야 되거든.
그레서 모든 것들을 대상을 붙잡지도 않고 밀쳐내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상태가 상카라우뻭카라. 그 상태에서 그대로 보게 되는 거라. 그래서 무상, 고, 무아의 성품에서 특히 무아가 더 두드러지게 보이게끔 되면서 이제는 도와 과로 탁 들어가게 되는데,
그래서 어쨌든 이 우뻭카의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 되는데, 그렇게 놔주질 않는다는 거라. 그런데 어떡하나? 반복을 하더라도 계속적으로 그 길을 가는 수밖에 없는 거라. 그래서 그걸 "행도(行道)"라고 그럽니다. 실천하고 따라가야 될 길이라는 거라.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길은 어차피 잘 닦여져 있기 때문에 그 길을 그냥 걸어가는 수밖에 없는 거라. 설혹 장애에 부딪혀가지고 탁 멈췄다 하더라도 또 걸어가는 수밖에 없는 거라.
왜 그럴까? 지금은 이제는 돌이킬 수가 없거든. 터널로 들어갔으면 다른 데로 갈 방법이 없어요. 다른 걸 할 방법이 없다는 거라. 즐거운 현상들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들이 되지를 못해요. 자기가 정신적으로 극복을 해서 평온한 마음의 상태가 유지되도록 만드는 길밖에 없어요. 그래서 그 터널을 탁 벗어났을 때 그냥 햇빛이 착 비치듯이 우뻭카의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거라.
그게 오늘 여러분들에게 설명한 "행도지견청정"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 터널은 다른 거하고는 틀리게 굉장히 깁니다. 굉장히 길기 때문에 주저앉지 말고 계속적으로 사띠하면서, 대상은 대상일 뿐입니다. 그렇게 계속 이어나가면 언젠가는 도와 과에 이르른다 하는 걸 잊지 않고 그런 확신들로 인해서 걸어가도록 그렇게 노력을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 시간에는 수다원에 이르는 길에 대한 얘기들을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