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칠각지, 칠청정 법문

열반에 이르는 7청정의 로드맵(7부)-지견청정_(사)21세기 불교포럼 정기법회_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2025.10.25)

담마마-마까 2025. 11. 18. 22:10

https://youtu.be/H_8g_zgeV4U?si=t1RYBeFxA68239bY

 

* 열반에 이르는 7청정의 로드맵(7부)-지견청정_(사)21세기 불교포럼 정기법회_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2025.10.25)

 

오늘은 지견청정에 대한 얘기입니다. 오늘은 상카라우뻭카냐나부터 해서 수다원까지 이르는 것에 대한 얘기를 할 겁니다. 다음 시간에는 수다원에서 아라한까지 이르는 것에 대한 얘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옛날에, 요즘은 스님들이 석씨라는 걸 잘 안 쓰던데, 옛날에는 출가하면 스님들 법명 앞에다 석씨를 붙였어요. 석진용 뭐 이런 식으로, 석가산 이런 식으로 했는데, 그 석이 석가모니에서 나온 거죠? 쉽게 말하면 스님 원래 속가 성은 이씨인데 이제 석씨로 바뀌었다는 뜻이라. 그래서 앞에 석 자를 붙이고 했는데,

사실은 석가모니는 부처님에 대한 존칭이지, 부처님은 맛지마니까야에도 부처님은 성씨가 뭐라고 그랬어요? (수행자 대답...) 그렇지. 고따마라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걸 보통 한문으로 구담이라고 그럽니다. 그러면 정확하게 할 것 같으면 ‘석 누구누구’ 붙여야 되는 게 아니고, ‘구담 누구누구’ 이렇게 붙여야 되는 게 사실은 맞죠. 어쨌든 그렇게 많이 붙였습니다.

 

그래서 상카라우뻭카냐나(saṅkhārupekkhāñāṇa)에 오래도록 아마 머물 겁니다. 오래도록 많이 갈고 닦아서 어느 정도 이렇게 익숙해질 때까지 있어야 됩니다. 이제 그러고 나면은 때가 무르익으면 착 수다원에 이르를 수 있는데, 수다원에 이르기 위해서 그 문이 쉽게 말하면 '고뜨라부(gotrabhu)'라 해가지고 종성(種姓)입니다. '새로운 성을 부여받는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종성하고 수다원에 탁 이를려고 할 것 같으면 이제는 대상이 바뀌어버리죠. 열반이 대상이 돼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열반을 경험을 하게 됩니다. 열반을 경험하고 나면 곧바로 도(道)에 이르르고 과(果)에 이르릅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또 어디로 돌아가요? 다시 빽(back) 해서 상카라우뻭카냐나부터 다시 또 시작을 해서 쭉 나아가는데, 그만큼 이 우뻭카(upekkhā)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부처님은 평상시 살아갈 때 어떤 마음으로 살아갔을까? (수행자 대답...) 그렇지. 스님이 가르쳐줬지. 우뻭카(upekkhā)의 마음으로 삽니다. 수다원도 우뻭카(upekkhā)의 마음으로 삽니다. '수다원에 이르지 않은 수행자도 우뻭카(upekkhā)의 마음으로 살아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스님들이 출가를 하면 어른 스님들이 맨 처음 가르쳐주는 게 “부처님의 마음으로 살아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같이 살아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할 것 같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우뻭카(upekkhā)의 마음으로 살아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마만큼 우뻭카의 상태에 있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 그럴까? 우뻭카의 상태.

(수행자 대답 : 업을 짓지 않는 마음...)

업을 짓지 않는 마음? 깨닫기 전에는 업은 어쨌든 짓게 돼 있어. 물론 선업도 업은 업이지. 우뻭카가 중요한 부분인데, 이렇게 한번 보면 됩니다.

스님 법문을 탁 듣는데 그 법문 소리만 귀에 탁 들어오는 사람? 다른 거는 일절 보이지도 않고 생각하는 것도 없고 그렇게 돼 나간다, 그러면 그게 어찌 보면 우뻭카와 비슷한 상태입니다.

 

아까 그런 분이 있었는데, “수행하면 자꾸 망상을 합니다.” 그럽니다. 그런데 망상이 들어올 자리가 있으니까 망상을 할 거 아니라. 그런데 망상이 들어올 수 있는 자리가 없으면 어떻게 돼요? 망상은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망상이 들어올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띠가 계속적으로 이어지면은 망상은 못 들어옵니다. 쉽게 말하면 그러한 상태가 우뻭카의 상태라고 보면 됩니다. 쭉 사띠가 이어지는 상태, 그게 우뻭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러려면 여러분들이 조심해야 되는 게 아까 어른 스님들이 출가하면 맨 처음 하는 게 "부처님같이 살아라" 그랬잖아요. 우뻭카의 마음으로 살아라고. "말할 때는 말만 하고, 들을 때는 듣기만 하고, 걸어갈 때는 걷는 데만 마음을 집중해라." 그럽니다. 그러니까 하나씩 하라는 얘기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면 적어도 우뻭카를 자꾸 닦을 수가 있습니다. 가끔씩 그 차 운전하는 사람들 라디오 틀어 놔놓고 차 운전하고 그러죠? 그러면 안 돼. 그러면 우뻭카를 닦을 수가 없어. 차 운전할 때는 운전하는 데만 집중해야 돼요. 그 라디오 소리를 들어가면서 운전할 경우에는 흩어질 수밖에 없는 거라.

사띠는 어떠한 경우든지 하나씩 하는 것들을 습관 들이고 할 때 잘 익혀지게 됩니다.

 

왜 그렇게 자꾸 하나씩만 하라고 그럴까?

(수행자 : 두 개씩 할라 그러면 하나도 제대로 안 되니까 그렇습니다.)

그렇죠. 당연히 그렇긴 한데, 그런데 하나의 대상에 집중을 하는 것으로 인해가지고 우뻭카는 강화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뻭카를 닦으려면 어떠한 경우든지 '일념집중', 하나에 딱 집중해서 그것만 계속하는 습관을 들여야 돼요. 그게 이제 우뻭카를 닦는 데 중요합니다.

 

고요한 평정심의 마음을 유지를 하려면 이게 다섯 가지 기능이 잘 조화가 맞아야 됩니다. 그게 맞지 않으면 그 평정심은 어느 순간에 탁 깨져버립니다.

그래서 노력하는 힘이든 집중하는 힘이든 이런 것들이 잘 균형이 맞아야 되는데 조금만 핀트가 어긋나면 대상이 탁 달아나버리게 되든지 놓쳐버리게 됩니다. 사띠는 하고 있는데. 그런 경험들을 아마 많이 해봤을 겁니다.

그런데 그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 뭐일 것 같아요? (수행자 : 사띠요) 아니요.

사띠는 당연히 있어야 되는 거죠. 다섯 가지 균형은 다섯 가지 균형을 잡아주는 5근 중에 사띠는 포함이 되어 있는 거고, 그게 뭐냐면 이 우뻭카라는 기능입니다.

우뻭카가 요 균형을 잡아주는 거라. 쉽게 말하면 얼마만큼 내가 노력을 해야 되고, 얼마만큼 집중을 해야 될 것인가? 하는 것들을 균형을 잡아주는 게 바로 이 우뻭카의 역할입니다.

 

하나를 대상으로 자꾸 하려다 보면, 이런 경험들을 해봤을 겁니다. 뭔가를 내가 소리를 듣고 있다고 그러면, 듣고 있는데 누가 저쪽에서 온다 그러면, 어떨 때는 그 오는 대상이 보이는데 어떨 때는 그 오는 대상이 안 보일 때가 있습니다. 오로지 그 듣는 데만 집중하고 있을 때는 저 오는 것이 안 보입니다. 쉽게 말하면 노력하는 힘과 집중하는 힘이 균형이 딱 맞아떨어질 때는 저 오는 것이 안 보여요. 그런데 이게 균형이 안 맞으면 저쪽에서 오는 게 보입니다. 그럼 마음은 어떻게 돼요? 보이기 시작하면 들리는 것은 안 듣고 보려고 합니다.

감각적인 것들에 따라서 사람들은 자꾸 마음이 바뀝니다. 그렇게 따라가게끔 됩니다. 그래서 한번 우뻭카를 경험해 본 사람들은 노력하는 힘과 집중하는 힘들이 균형이 맞는 점을 탁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뭘 하더라도 그 균형을 잡는 부분을 하고 있을 것 같으면 사띠가 계속 이어지는 것이 알아차려지게 됩니다. 그래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어쨌든 우뻭카의 상태에 도달했다고 칩시다.

그래서 그게 몇 년이 될지 아니면 몇십 년이 될지 계속적으로 그 길을 닦아 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좀 닦여서 외부적인 자극이나 아니면 그 망상하고 하는 습관들이 좀 많이 없어지고 이럴 것 같으면은 대부분 그 스승들은 "이제 너는 가르침을 펴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법을 설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렇지 않고 물어봤을 때 “나는 법을 설하는 것보다 내 수행 더 하려고 합니다.” 할 것 같으면 수행 더 하게끔 계속 지도를 해나갑니다.

그래서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고 그러죠 대승불교에서는. 보리를 구하고 나서 중생을 제도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게 쉽게 말하면 우뻭카의 상태가 되었을 때 그러한 자격을 갖추는 것으로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가르칩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자기가 그 상태에 도달하지 않은 상태에서 법을 설한다든지 아니면 수행을 지도한다든지 이런 것들을 못 하게끔 합니다.

 

보통 얼마 정도 걸릴 것 같아요?

(수행자 : 마음 챙김에서 그것들에 현혹될 일이 없다면 그 상태를 우뻭카라고 해도 됩니까?)

그건 아라한의 상태지. 오온의 상태로만 살아간다면 그건 아라한의 상태인 거고, 그런데 대부분은 오온이 발생함과 동시에 집착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안 생길 수가 없는 것이 “오늘 당장 죽을 수 있어?” 그러면 “나 죽을게” 하고 탁 죽을 수 있는 사람 있어요? 없죠? 생존 욕구는 누구든지 가지고 있다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오취온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사실은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그거는 경전상으로는 오온으로만 살아가면 뭐 당장 우뻭카의 상태라고 얘기하겠지만, 그거는 이미 우뻭카의 상태, 물론 아라한도 우뻭카의 상태로 살아가는 거고, 다 우뻭카의 상태지만, 한참 수행에서는 지난 상태가 돼버립니다.

 

보면 ‘보인다’ 하고 알아차리고 들리면 ‘들린다’ 하고 알아차리는 것, 들리는 것은 그냥 들리기는 하고 보면 보이기도 하고 맛보면 맛보기는 합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인해서 좋아하고 싫어하고 하는 마음은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쉽게 말하면 대상으로 인해서 일어남과 사라짐이라고 하는 집착하는 것들이 멈춘 상태가 딱 되어 있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냥 그대로만 알아차립니다. ‘보인다’ 하고 알아차리고 ‘들린다’ 하고 알아차리고, 설혹 누군가가 나에게 나쁜 말을 한다 하더라도 그냥 들린다고 알아차릴 것 같으면 그게 나쁜 말로 인해서 내가 탐진치가 일어나지는 않는 상태가 됩니다.

쉽게 말하면 탐·진·치가 일어날 수 있는 조건들이 만들어지지 않게끔 계속 사띠를 하고 있는 거라. 들리는 것만 계속 사띠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일어남과 사라짐이라고 하는 것들이 딱 멈춘 상태가 우뻭카의 상태다" 하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렇게 계속 지나면 어떻게 될까? 깨달음에 이르는 데는 그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길이 뭐냐면 고뜨라부의 상태라고 얘기를 합니다. 종성을 얻는다 하고 얘기합니다. 하나 여쭤볼게요.

종성은 언제 얻게 될까? 수다원 직전에! 맞죠? 그러면 일래과 직전에, 그다음에 불환과 직전에, 아라한과 직전에, 그 직전에는 언제든지 그 성인의 문에 들어서는 성을 받는 상태가 딱 됩니다.

 

그러면 사마타 수행에서는 그런 게 없을까? 사마타 수행은 1선정, 2선정, 3선정, 4선정 그렇게 얘기합니다. 1선정 직전에는 그런 조짐이 없을까? 2선정 직전에는 그런 조짐이 없을까? 3선정, 4선정? 있습니다.

그래서 각각의 문에 들어설 때는 언제든지 이 고뜨라부라고 하는 문을 통과를 해야만이 1선정에 들고, 수다원에 들고, 불환과에 들고 할 수밖에 없는 상태라는 겁니다. 그마만큼 고뜨라부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데, 아까 얘기를 했죠. 우뻭카의 상태가 엄청 지속이 되어야 되는데,

 

지금 우뻭카를 하고 있을 때는 뭐를 가지고 내가 알아차립니까?

쉽게 말하면 들리면 들린다고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보이면 보인다고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어쨌든 사띠하는 마음으로 인해서 밖의 대상도 있고, 내 밖의 대상이든 마음속에 일어나는 대상이든 대상도 있고, 그것들을 인식하는 마음이 분명하게 있습니다.

그런데 고뜨라부에서는 이 인식하는 마음이 있으면 고뜨라부에 들어가 그 문으로 통과해 나갈 수가 없어. 쉽게 이렇게 보면 됩니다. 고뜨라부를 통과하는 문이라고 딱 치면은 그 통과하는 문을 갖다가 탁 밟았을 때는 도(道), 그 통과해서 탁 넘어갔을 때는 과(果).

 

어느 누가 문 앞에 섰는데 그거 통과 안 하고 갈 사람 있어요? 지금은 어쨌든 그 길은 이미 고속도로에서 탁 뚫려져 있는데, 멈출 수가 없어. 멈추면 뒤에 차가 받아버려요. 그러면 고뜨라부를 경험을 했으면 바로 그다음에는 도의 마음이 일어나고, 도의 마음으로 인해서 과의 마음이 일어나고, 과의 마음이 일어나고 나서는 다시 또 도는 경험은 안 합니다. 한 번으로 족합니다. 다시 우뻭카의 상태로 들어가집니다. 그게 사이클입니다.

그리고 다시 또 우뻭카를 닦을 때는 '도에서 끊어진 것이 무엇인지, 남아있는 것이 뭔지'를 분명하게 알게끔 됩니다. 그리고 내가 경험한 것이 '열반을 경험했다, 안 했다' 하는 것들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런데 고뜨라부에 탁 들어서면 대상이 뭐라고 그랬어요?

우리 인식이 아니죠. 인식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밖의 대상이든 안의 대상이든, 대상은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어요? 무상한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각도 무상한 것이고, 밖에 있는 대상 소리든 물체든 뭐든 다 무상한 것이지, 무상하지 않는 게 어디 있어요? 다 무상한 겁니다. 그러면 대상이 이 무상한 것이 대상이 되어버리면 어떠한 경우든지 도와 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열반을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열반은 이게 대상이 안 된다는 거죠.

 

그럼 뭐가 대상이 돼야 될까? 대상이 끊임없이 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아주 빨라지는 것이 대상이 탁 끊어져 버립니다. 없어져 버립니다. ‘어? 뭐지?’ 하고 생각을 합니다. 사띠는 있는데, 대상은 없어져 버려요. 물질적인 대상도 없고 정신적인 대상도 없고, 그런데 마음은 되게 가볍고 평화롭거든. 그냥 좋은 상태에 있는 거라.

그럼 이 마음이 어디로 향해야 돼? 어디로 향해야 돼요? 향할 데가 없습니다. 변하는 무상한 성품에서는 향할 데가 없어져 버립니다. 우뻭카도 무상한 성품입니다.

절대 그쪽으로는 향하질 않고, 그래서 '열반'이라고 하는 데를 향하게 됩니다.

 

(수행자 : 1선정, 2선정, 3선정, 4선정 할 때도 계속 종성이 바뀌어야 된다는데, 종성은 초선에서 한 번 바뀌면은...)

종성이 바뀌는 게 아니고 '종성을 통과한다'는 얘기입니다. 그 문을 통과한다는 얘기입니다. 쉽게 말하면 여기 문이 4개가 있어요. 그럼 첫 번째 문을 여는 게 이게 그 문이라. 그러고 나서 쭉 가다 보면 또 그다음 두 번째 문이 있어. 그럼 두 번째 문을 열고 가는 거고, 세 번째도, (수행자 대답...) 그렇죠. 그렇죠. (수행자 대답...) 그렇죠.

 

그게 안 열리는 게 왜 안 열리는지 아세요?

1선정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을 경우에는 2선정으로 못 가는 거고, 수다원이 좋아서 거기 수다원에서만 계속 즐기면 그다음 단계로 못 넘어갑니다. 그래서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는 반드시 종성의 단계를 통과를 해야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집니다.

그 종성을 통과하는 것이 뭐냐면 앞에 것들이 불완전하고 집착할 만한 것이 못 된다는 마음을 탁 내는 순간에 그다음 단계로 탁 넘어가지게 됩니다. 그게 쉽게 말하면 종성이라는 의미입니다.

조금 전에는 무상한 성품을 관찰하고 있었는데, 무상한 성품이 너무 빠르게 변하고 사라지기도 하고 하거든. 집착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마음이 탁 들어버리면 그다음에는 이 문 앞에 서서 도와 과를 향하게 됩니다.

 

도와 과는 어떠한 경우든지, 도와 과의 상태에서는 그걸 경험할 때는 열반을 경험을 합니다. 열반의 상태에 있게끔 됩니다.

열반은 뭐죠? 설명할 수 있는 사람 있어요? 열반은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없습니다. 그래서 열반을 설명할 때 열반에 들어가기 직전의 마음의 상태를 스님같이 이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는 거라. 그런데 내가 그러면 열반을 경험한 걸 어떻게 알아? 열반을 경험하고 나서 그다음에는 도에 이르고, 그다음에는 과에 이르고, 바로 순차적으로 일어납니다. 그게 중간에 끊길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수행자 질문...) 그렇죠? 각각의 단계에서 다 경험할 수 있습니다.

멸진정은 아라한에 가야만이 가능한 거고, 열반은 각각의 단계에서 다 경험이 됩니다.

 

왜 그러냐면 열반의 상태에 있고 나서 그다음엔 도를 이루고 과를 이루고 나서는, 그다음에는 아까 뭐라고 했어요? 다시 빠져나온다고 그랬죠. 그래서 우뻭카의 상태로 다시 옵니다. 이때 돌아볼 수 있는 거라. 그렇죠.

그래서 ‘내가 뭘 경험했지?’ ‘어떤 번뇌가 떨어졌지?’ ‘남아있는 게 뭐지?’ 하는 것들을 알게끔 된다는 거라.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해보니까 더 이상 그러한 것들이 남아있는 게 없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수행자 : 그런데 종성이 제가 이해가 좀 부족한데 종성이라고 하는 것은 글자 그대로 한자대로 얘기하면은 그 종자의 자체가 바뀌었다는 거 아닙니까? 종자가 바뀌었는데 그 바뀐 종자가 한 번 바뀌어 버리면 되지, 선정에 2선정 3선정 4선정 갈 때마다 그걸 갖다가 바뀌어야 된다 하는 것은...)

 

종성을 자꾸 오해를 하는데, 종성은 쉽게 말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문'입니다. 그 문이라고 생각을 해야 되지, 쉽게 말하면 이렇게 문이라. 문이라고 생각해야 되지, 그게 이제 맨 처음이 일반 속인하고 성인하고의 경계를 나눈 문인 거고, 그 경계를 넘어섰다 해가지고 그다음 단계로 바로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수다원에 이르고 나서 아라한까지 싹 바로 이를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수행자 대답 : 다 종성이라는 문을 통과를 해야 된다는...) 그렇죠.

쉽게 말하면 앞에 것들에 대해서 부족한 것들을 이해하고 그것들을 버리게 될 때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는 거라. 그렇게 이해를 하면 됩니다.

 

그래서 그걸 어떻게 설명을 해줘야 되나? 그냥 이렇게 보면 됩니다. 각각의 문이 존재를 하는데 그 문은 이전 것들을 버려야만이 그다음 단계의 문을 열고 들어갈 수가 있다 생각을 하면 됩니다.

(수행자 : 그러면 또 다른 걸 해서 다섯 가지를 갖추면 초선정에 들어가는데, 이거와 같습니까? 사유와 숙고를 버려야 말하자면, 이선정에 들어가고 이선정에서 일어난 그 희열과 행복을 버려야 사선정에 들어간다는 것도 똑같은 것입니까?)

그렇죠. 그렇죠. 그렇죠. 그걸 버려버려야만 그다음 단계로 탁 넘어가지는 겁니다.

(수행자 : 알겠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남아있는 번뇌가 뭔지 하는 것들을 알 것 같으면 본인은 어떻게 해야 돼? 더 공부를 하려고 그러는 거라. 더 넘어가려고.

그럼 어디서부터 다시 해야 돼요? 우뻭카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우뻭카가 그래서 중요한 거라. 우뻭카에서부터 다시 시작을 하는데, 단지 마음이 그 전에 우뻭카의 상태에 있었던 거하고 지금의 우뻭카의 마음의 상태는 완전하게 틀린 거라. 완전하게.

 

예를 들어봅시다. 아까 사명대사 얘기하면서 대의를 위해서 죽이는 것도 용납할 수 있다. 그렇게 얘기를 하는 것들이 있었는데, 그전에는 마음이 살생하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을 했어. 그런데 이제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살생하는 마음이 안 일어나져.

그건 왜 그럴까? 마음이 이미 자애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살생하려는 의도가 일어나지를 않게끔 되는 거라.

그게 쉽게 말하면 수다원의 상태라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자애의 마음이 가득하다 해가지고 모든 게 다 해결돼요? 그건 안 그렇습니다. 아무리 자애의 마음이 여러분들이 가득하다 하더라도 먹고 살려고 돈도 벌어야 되고 쉽게 말하면, 뭐도 해야 되고 아이들도 뭐 해야 되고 합니다.

그런데 그전에는 내가 자애의 마음만 가지고 있으면서 이러한 일들을 해나가는 데는 힘에 부쳤거든. 그래서 가끔씩 자애의 마음이 없어지진 않는데 희미해지기도 하고 안 일어나려고 하는 때도 있기도 해. 그런데 어느 순간 탁 되고 나니까 ‘어, 이건 당연한 거다. 내가 저질러 놓은 일인데 당연히 내 새끼 내가 건사하는 거는 당연한 거고,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돈 벌어야 되는 건 당연한 거다’ 할 것 같으면 그냥 즐겁게 하게 되는 거라. 쉽게 말하면 마음이 그 전의 상태하고 지금 상태하고는 많이 바뀌어져 있는 거라. 똑같은 일을 하는데도.

 

그러면 자애의 마음뿐 아니라 다른 마음들도 생겨나 있는 상태라. 그래서 사무량심이 갖추어지는 상태가 딱 돼버리게 됩니다. 이게 쉽게 말하면 이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단계라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어쨌든 성자의 지위에 도달했다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살생하려는 마음은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돼야 되는 거라. 쉽게 말하면 수행적으로 얘기할 것 같으면, 어떠한 상태든 그게 강도가 크든 작든 간에 우뻭카의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는 뜻이라. 그래서 그마만큼 우뻭카는 중요하다 하는 겁니다.

 

수다원에 이르렀으면 많이 바뀌었겠죠. 어떤 게 바뀌었을까?

아까 얘기했죠? 그전에는 그냥 자애의 마음만 있는 상태에서 내가 막 그냥 하긴 해야 되니까 하는데, 이제 수다원에 이르고 나니까 ‘당연한 거, 기쁘게 하지’ 하고 이렇게 마음이 바뀌는 거라. 쉽게 말하면 어떠한 경우든지 마음은 기쁘고 행복한 상태가 항상 돼 있는 상태라. 짜증 부릴 수 있는 조건이 안 돼.

(수행자 질문...) 어, 그렇지. (수행자 질문...) 음.

 

가끔씩 수행 편지나 이런 것들을 스님한테 보내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마음이 조금 여린 분이라서 보낼 때마다 ‘아, 이렇게 길게 쓰면 스님이 읽을 때 귀찮을 건데, 귀찮으면 어떡하지?’ 이런 마음을 내는 거라. 그래서 자꾸 얘기해. “스님 그런 마음 안 일어나. 걱정하지 말고 니가 쓰고 싶은 대로 써. 그래서 내가 답해줄 거 있으면 답해줄게.” 그런데도 매번 쓸 때마다 ‘아이고, 스님 수행시간 뺏고 이러면 어떡하지?’ 지레짐작으로 자기 혼자서 그러는 거라.

그래서 성인의 지위에 도달을 했다 할 것 같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마음은 지속적으로 평온함과 행복과 기쁨의 마음들은 항상 지속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거라. 그게 차이가 나는 겁니다. 우뻭카를 갈고 막 닦을 때하고는 틀립니다. 마음이 많이 넓어져 있는 상태가 됩니다.

 

두 번째는 뭘까? 인제는 내가 가는 길에 대해서 의심은 안 해. 당연히 우뻭카의 상태만 돼도 의심은 안 해. 그냥 계속 하게 돼 있어요. 그런데 수다원이 되면 그 의심을 보는 관점 자체가 틀려져 버립니다. 우뻭카의 상태에 있어도 가끔씩 그럽니다. ‘어, 과연 이 세상에 성인이 있을까? 성자가 있을까? 아라한이 있을까?’
지가 경험 안 해봤으니까, 아니면 ‘수다원이 있을까?’ 경험 안 해봤으니까 그걸 모르는 거야. 그런데 이제 지가 탁 이르르고 보면 ‘어, 있네?’ 이렇게 돼버리는 거라.

쉽게 말하면 믿음의 영역이 완전하게 바뀌어 버립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과 부처님 가르침과 그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성자에 대해서 어떠한 경우도 흔들림이 없는 상태가 딱 돼버립니다.

 

그리고 또 하나 바뀌는 게 있습니다. 뭘까?

(수행자 대답...) 그렇지. 계금취인데, 그게 어떤 식으로 드러나지느냐는 거라.

견해를 내세우는 법이 없어요. 어떠한 경우든지 내 견해, 니 견해 없어요.

오늘도 붓다의길따라 선원 식구들이 와서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서울 같은 데는 가면 탁발을 안 하고 그냥 물품을 이렇게 쌓아놔 놓고 스님이 그냥 그걸 터치를 하게끔 합니다. 그런데 우리 선원은 맨날 오면 내 한 사람씩 다 탁발을 합니까?” 이렇게 물어봅니다.

“그거는 방식이 틀리니까 그러지” 어떤 게 틀리고 맞다는 게 아니고, 쌓아놓고 스님이 터치를 해도 괜찮아. 그런데 스님이 봤을 때는 그거는 진짜 시간이 없을 때, 그리고 모여 있는 스님들이 몇백 명이 될 때는 언제 다 탁발하고 할 거라? 그거 하다가 하루 다 가버리는데. 그럴 경우에는 몇 스님이 가가지고 터치만 이렇게 쭉 해줘버리면 가능해요. 그런데 꼴랑 몇 명 모여가지고 그 탁발할 시간이 없어서 탁발을 안 하고 그냥 터치를 한다? 그건 좀 안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 선원에서는 무조건 개개인이 다 탁발을 하도록 합니다.

그게 보시의 원칙이거든. 보시의 가장 큰 원칙이 "직접 그 보시를 행하라. 보시를 행하기 전에 일어나는 기쁨과, 보시를 행할 때 알아차리는 고요함과, 그리고 보시를 하고 나서 일어나는 행복감들을 스스로 느끼려고 하라"는 거라. 그것이 모였을 때 일어나는 그 보시의 공덕은 더 클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직접 하라고 그럽니다. 그 인원 몇 명 안 되니까.

그런데 “스님, 그러면 우리가 그냥 탁 터치하고 마는 거 이거는 틀렸습니까?”

“그거는 방식이 잘못되고 잘 되고의 방식이 아니다. 그 방식을 해도 되고 이 방식으로 해도 된다. 단지 스님이 생각할 때는 몇 명 인원이 안 될 때는 직접 해주는 것이 보시의 공덕을 더 크게 낳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그렇다고 그 방식을 서울에서 하는 방식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그 방식이 하고 싶으면 그 방식 하면 돼.” 그렇게 얘기를 하거든. 그러면서 이제 그런 얘기를 합니다.

“그 대신에 내가 보시를 해서 스님이 그냥 터치를 하는 것으로 했는데, 자기 보시가 들어있는지 어떤지 모른다 하더라도 마음은 내가 상가에 보시 공양을 올렸다 하는 마음을 항상 내고 있어라. 그렇지 않으면 보시공덕이 돌아올 것이 없어져 버린다.”

 

빠세나디 왕이 매일 같이 500명의 스님들한테 공양을 올렸어요. 그런데 지는 한 번도 안 나갔어. 신하들에게 다 시키고, 지는 왕이 거기 가는 게 좀 체면이 안 섰는가 어쨌는가 안 나갔거든. 그때 부처님이 따끔하게 뭐라 합니다.

“너는 그렇게 많은 보시 공덕을 행했지만, 너에게 돌아가는 공덕은 없다.”하고.

그런 꼴은 당하지 말아라는 거라. 내가 보시를 했으면 보시공덕이 나의 것이 되는 것인데, 그 공덕이 나의 것이 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은 스스로 했다는 거라. 그래서 “마음을 항상 보시하는 마음을 갖다가 내도록 해라. 그래서 보시를 하기 전에 항상 기쁨의 마음이 일어나도록 하고, 보시할 때 하는 동작들을 그대로 알아차리면서 고요하고 평온한 마음을 가지도록 하고, 보시했다는 것으로 인해서 내가 행복한 마음이 일어나도록 만들어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랬을 때는 그것이 설혹 터치를 하든 직접 내가 하든 그것에 관계 없이 그 보시공덕은 너에게 돌아간다.” 하고 애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견해라는 것이 없어져 버립니다. 어떤 것이 맞고 어떤 것이 틀리다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견해를 내세울 게 그렇게 있어? 이것이 맞고 이것이 틀리다는 걸 꼭 할 이유가 있어? 견해라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본인이 아직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을 때 자기 것이라고 고집하는 것들입니다.

견해에 나라고 하는 것이 개입이 안 되는 견해가 있어요? 없습니다. 그런데 유신견이라고 하는 것은 나와 나의 영혼이라는 것들이, 그리고 나의 견해라는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가끔씩 화가 이만큼 올라올 때는 있는데, ‘화가 올라오네’ 하고 알아차리고 탁 잠재울 수는 있어. 그런데 '나'가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리고 아직은 ‘아, 내가 죽고 나서 천상에 좀 태어났으면 좋겠다.’ 아니면 ‘다음에 내가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다.’ 하는 그런 마음들도 생겨나. 죽고 나서 이후도 걱정을 한다는 거라. 쉽게 말하면 죽음으로 인해서 나라고 하는 것이 그대로 다음에 전해지려고 하는 그것이 영혼이라고 하든지 뭐라고 하든지 간에 그랬으면 좋겠다는 마음들도 있어. 그런데 지금 뭐가 없어진 거라? 내세우는 견해.

 

그래서 유신견이라는 것은, 내 몸은 뭐로 이루어졌어요? 오온으로 이루어졌어요. 몸과 마음밖에 없어. 몸과 마음은 빠르게 변하고 있는 상태라.

그럼 그 어디의 것에다 집착을 할 거라? 집착할 만한 대상이 아무것도 없는 거라. 그런데 어떻게 견해를 내세울 수가 있어? 없는 거라. 그게 탁 달라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냥 이 방식이든 저 방식이든 그것에 관계하지 않는 상태가 돼버립니다.

그 대신에 담마에 대한 확신들이 분명하게 들기 때문에 잘못됐을 때는 분명하게 그 잘못은 지적을 합니다. 무조건 ‘허허’하고 좋다는 게 아니고, 이것은 바른 것이고 그른 것이다. 법과 율에 맞게끔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가림을 하는 거라. 그것은 견해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고 법에 대한 확신의 영역에 속하는 거라.

 

당연히 그렇게 되니까 어떻게 돼요? 계금취라고 하는 어떤 형식에도 얽매이지 않는 상태가 되는 거라. 누가 나에게 종이컵에다가 커피를 따라주든 아니면 그냥 플라스틱 컵에 주든 물컵에 주든 ‘이게 미세먼지 나오는데 왜 이걸 줬어?’ 이런 마음이 없어집니다. 그릇이라는 것이 없어져 버리는 거라. 중요한 것은 뭐라? 그냥 커피를 마시는 거라. 그냥 마시는 거라. 그게 이제 계금취라고 하는 어떠한 형식들에도 얽매이지 않는 상태가 되는 거라.

 

그 전에 우뻭카의 상태하고는 지금은 마음이 그마만큼 많이 달라져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성질이 올라오고, 저거 보면 ‘아, 나도 저거 하나 있었으면’ 하는 욕심도 생기고, 그렇게는 하는 거라.

그런데 차이가 뭘까? 일반인들도 그렇게 하잖아. 그런데 일반인들은 성이 올라오면 못 참고 바라락 성내버리고, 좋다 싶으면 지가 가지려고 하게 되고, 마음이 연달아 일어나는데, 수다원에 이른 사람들은 그게 밖으로 표출되어지지를 않는 거라.

 

일어나면 그건 대상은 뭐라? 무상한 성품 아니라? 무상한 상품이라. 그럼 그것들을 관찰하면 그것도 사라지게 돼 있는 거라. 사라져 버리는데 그것들에 대해서 욕심낼 게 뭐 있고 화를 낼 이유가 뭐 있어요? 그냥 없어져 버리는 거라. 그래서 밖으로 표출되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적어도 그렇게만 돼도 별로 부처님하고 다르게 살아가는 것 같지는 안 해.

쉽게 말하면 그냥 우뻭카의 상태에 있을 때하고 지금 수다원이 돼 있을 때하고는 똑같이 대상을 몸과 마음을 갖다 관찰하는 상태라. 그래서 마음은 우뻭카의 상태가 되도록 하는 것들은 맞는데, 마음의 상태는 이미 많이 달라져 있는 상태가 돼버리는 거라.

아라한이 된 부처님은 안 그럴 것 같아요? 아라한도 똑같이 우뻭카의 상태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마음은 많이 또 달라져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 시간에 수다원 이후에 아라한까지의 과정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해야 될 것은? 우뻭카의 상태를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뭘 해야 돼요? 자극에 대해서 반응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자극은 언제든지 여러분들 옆으로 다가와집니다. 안으로 일어나는 자극, 밖으로 일어나는 자극, 우뻭카 상태는 그것에 대해서 반응하지 않는 상태라. 안 하고 그냥 하나만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것만.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고요한 마음이 깨지지 않는 상태가 되도록만 만들면 됩니다. 알겠죠?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