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C3qzS2M1yXI?si=HXyAjt-jhLkUSwpW
* 열반에 이르는 7청정의 로드맵(7부)-지견청정_(사)21세기 불교포럼 정기법회
오늘 마지막 법회죠? 저번에 수다원에 이르는 것까지 설명을 했습니다. 수다원 다음에 뭐죠?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일래과, 불환과, 아라한과 그렇죠. 오늘은 일래를 할 차례입니다.
그걸 하기 전에 조금 바로 잡아야 될 게 뭐냐면 간혹 학자들 간에는 그렇게 얘기하는 게 있습니다. "수다원하고 아라한만 있지, 일래나 불환은 불교적인 것이 아니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 예를 들어봅시다.
수다원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생에서 내가 아라한이 되지 못했어. 그러면 어떻게 돼요? 또 윤회를 하죠. 물론 7번 윤회를 하겠지만, 7번 안에는 아라한이 되겠지만, 그걸 어떻게 증명하지? 천상에 태어났는지, 인간계에 태어났는지, 그리고 이번에 내가 몇 번째에 태어난 건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래서 "아라한이 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구제적인 차원에서 일래와 불환이 설해졌다" 하고 주장하는 분들도 간혹 있습니다.
왜 그러냐면 경전에는 일래과에 이르렀다고 부처님이 선언한 분이 그렇게 많지는 않거든요. 대표적인 게 누가 있을까? 수닷따라고 하는 아나타삔디까 장자, 급고독장자가 죽음에 이르르고 나서 부처님이 ‘일래과에 이르렀다’ 하고 선언을 하게 됩니다. 물론 그전에 수다원에는 이르렀는데 일래과에 이르렀다는 선언을 해주게 됩니다.
그것 말고는 딱히 뭐 없어요 일래과에. 그래서 경전에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일래나 불환은 불교적인 것이 아니다. 뒤에 첨삭한 것이다." 그렇게 인제 주장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수다원하고 일래하고는 분명히 차이가 나죠. 어떤 차이가 날까? 깨달음의 각각의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뻭카의 상태를 만들어야 됩니다.
우뻭카에 깊이의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 예를 들어봅시다. 도둑질을 하고 싶어. 그런데 부처님이 도둑질 하지 마라 했거든. 그럼 움찔해가지고 ‘그래 지금 내가 없어도 돼’ 하고 도둑질하려는 마음을 탁 버려버리고 나면, 어떻게 돼요? 마음이 어떤 마음이야? 평온합니다. 도둑질하려는 생각이 없어져 버렸으니까. 그것도 어떻게 보면 세속적인 우뻭카입니다. 악한 행위를 할 수 있는 것들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즉시 중단해버리고 행위를 하지 않고, 선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 그것도 우뻭카에 해당이 됩니다.
그런데 수다원에 이르기 위해서도 열심히 노력해서 대상에 대해서 잘 알아차리고 해서, 밖에서 있는 대상이든 안에서 일어나는 대상이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서 마음이 어디에 치우침이 없이 그냥 평온한 상태가 되고 있어. 그래서 각각의 과정들을 거칩니다. 뭐 빛을 보기도 했다가 두려운 마음이 일어났다가 이런 여러 과정들을 겪었는데, 그걸 한번 겪고 탁 나오면은 그다음에는 그런 것들이 일어나도 별시리 영향 안 받아. ‘또 이상한 거 나타났네’ 하고 딱 치부를 해버립니다. 그러면은 마음은 그것으로부터 보호가 돼 가지고 평온한 상태가 착 유지가 됩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사띠도 자동적으로 잘 돼. 그게 속도가 빠르든 느리든 아니면 대상이 사라지고 또 다른 대상이 나타나든 그리하더라도 마음은 그걸 따라가는 거라. 그러면서 그냥 평온한 상태가 유지가 돼요. 그러다 어느 순간 수다원에 탁 이르렀거든. 쉽게 말하면 자극에 대해서 반응하는 것, 외부적인 것이든 내부적인 것이든 자극에 대해서 반응하는 것들이 현저하게 줄어들어서 그것에 반응하지 않고 마음이 그냥 지금 현재 일어나는 대상에만 딱 머물러서 그것들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만 끊임없이 자동적으로 알아차려지고 있는 상태. 그런 상태도 우뻭카거든. 그렇게 해가지고 수다원이 됐어.
수다원이 됐는데, 그다음에는 일래과에 도달을 해야 되는데,
그럼 일래과에서의 우뻭카는 수다원에서의 우뻭카하고 차이가 날까?
어떻게 차이가 날 것 같아요? (수행자 대답 ...) 당연히 수다원에서 세 개의 족쇄가 끊어졌지. 세 개의 족쇄는 끊어졌는데, 일래과에서는 두 개의 족쇄가 더 끊어지죠. 그거는 치부하고, 그거는 내가 수행이 끝나고 나서 ‘아, 이건 나한테 안 일어나는구나’ 하고 알게 되는 거고, ‘이건 아직 내가 완전하지 않구나’ 해가지고 그게 불완전하다는 마음을 일으키면 더 수행하려는 마음들이 더 높은 단계에 갈려는 마음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일래과 쪽으로 향하게 되지, 수다원이 좋으면 그냥 평생 그 수다원에 있는 거라. 그냥 그게 좋은데. 왜? 내가 나쁜 행위를 하는 것도 아니고, 남한테 피해를 입히는 것도 아니고, 난 항상 부처님같이 자비롭게 그냥 허허 하고 있게 되거든 쉽게 말하면. 그럼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는 저 사람이 수다원에 드는지 아라한에 이르렀는지 전혀 분간을 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럼 본인 스스로 ‘아니야. 나 아직 불완전해. 더 공부해야 돼’하는 마음을 일으켜주기 전에는 이생뿐 아니라 다음 생에도 또 수다원에 또 이를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불완전하다는 생각을 일으키도록 해서 탁 수다원에서 일래과가 이르러야 되는데, 어찌 이르를까? 어떻게 그런 마음을 낼 수 있느냐는 거라.
아나타삔디까인 수닷따에게, 수닷따하고 사리뿟따 존자하고는 되게 친했어요. 어찌 보면 부처님보다도 사리뿟따 존자를 더 좋아했어. 그래서 사리뿟따 존자의 모든 시봉을 수닷따 장자가 책임을 졌거든. 나이가 들어서 죽을 날짜가 다 돼 가요. 그런데 이제 그 전에, 그냥 한국말로 쉽게 얘기할게요.
급고독장자, 급고독장자가 기원정사를 지어서 상가에 공양 올린 건 알죠? 그렇게 해가지고 모든 스님들한테 맨날 보시 올리고 하니까 돈이 바닥이 나버렸어. 거지가 돼버린 거라. 다른 사람들은 뭐라 합니다. “왜 네 거 좀 챙겨 놔놓고 보시를 하지, 그걸 그냥 다 퍼다 줘가지고 너는 아무것도 먹을 것도 없이 뭐하는 짓이냐? 옷도 입을 것도 없고” 이렇게 뭐라 하거든.
그런데도 평온한 마음을 지닙니다. 왜 그럴까? 수다원이었기 때문에! 수다원은 뭐가 있어요? 삼보에 대한 확고한 믿음입니다.
왜 그러냐하면, 내가 수행을 통해서 부처님 가르침이 맞다는 걸 알거든. 그러면 그 길로 계속 가면 된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걸 가르쳐준 부처님이나 그런 길을 따라가고 있는 상가에 대한 믿음들은 확고하게 자리 잡았기 때문에, ‘내가 뭐 딴 데 돈 쓴 것도 아니고 뭐, 상가 스님들을 상가를 위해서 돈 쓴 건데 뭐 돈이 없다 해가지고 그게 뭔 의미가 있어? 그냥 내가 뭐 그냥 넘의 거 빌어먹고 살아도 그냥 괜찮아’ 하는 마음이 생기게 돼버리는 거라.
그런데 이제 과보는 확실하거든. 그렇게 하더라도 그냥 그렇게 만약에 가난하게 살다 죽어버렸다, 그럴 것 같으면 ‘에이, 보시올려도 아무 의미가 없네’ 이럴 건데, 경전에는 그 뒤의 얘기들을 전해줍니다.
친구에게 돈을 3분의 1을, 자기 전 재산의 3분의 1과 자기의 식솔 3분의 1을 빌려줬어요. 옛날에 돈 많을 때. 그런데 이 친구가 지는 성공을 하고 이 급고독 장자는 인제 쫄딱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됐는데, 이걸 돈을 갚을 생각을 안 하는 거라. 그런데 이 급고독 장자는 돈 달라 소리도 안 하거든. 그런데 어찌 잘못해가지고 이 친구가 뭔 잘못을 했어. 그래서 그 밑에 있는 하인들이 왕한테 고발을 해버린 거라. 이렇게 잘 된 거는 급고독 장자가 돈 빌려줘서 잘 된 거지 지 돈 가지고 한 거 아니에요. 이렇게 고발을 해버린 거라. 국왕이 조사를 해보니까 진짜 그렇거든.
그러니까 국왕이 어떤 결정을 내렸냐면 네가 가지고 있는 재산은 네가 이룬 것이 아니고 급고독 장자의 돈 가지고 이룬 거니까 네가 지금 벌은 모든 것들은 급고독 장자에게 다 줘라. 그렇게 돼버린 거라. 그래서 말년에 그냥 급고독 장자는 또 옛날보다 더 부자가 돼버리게 됐어요. 인과라고 하는 거는 분명한 거거든. 그게 현생에서 나타나냐, 다음 생에서 나타나냐, 그걸 따지기 이전에 인과는 분명한 것이라는 거라.
어쨌든 그 급고독 장자는 잘 지내다가 내가 이생에서 아라한이 돼가지고 죽어야 되는데 아직 지는 수다원밖에 안 됐거든. 그래서 맨날 사리뿟따, 부처님은 어려우니까 그리고 부처님은 맨날 돌아다니거든. 이번에는 여기서 안거 지냈다, 다음에는 또 다른 데 지냈다가 이러는데, 사리뿟따 존자는 그냥 기원정사에 계속 있는 형편이거든.
그래서 존자를 찾아가가지고 “스님, 나를 일래과가 되도록 만들어주시오.” 이럽니다. 어떻게 일래과를 만들어줄까? ‘일래과가 돼라. 뿅’ 하면 돼? 안 되잖아. 그때 사리뿟따 존자가 급고독 장자에게 한 얘기가 있습니다.
"볼 때는 보기만 하라. 들을 때는 듣기만 하라. 맛볼 때는 맛보기만 하라."
"육근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들을 하나하나 짚으면서 그것만 알아차리도록 하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 소리를 듣고 급고독 장자가 소리 들리는 데다 집중을 합니다.
여러분들 한번 소리 듣는 거, 내가 일래과 만들어 줄게. 자, 한번 집중해 봐.
스님 소리가 들려요? 들리는 것은 어떻게 들리는 거라? 내 귀가 있어서 들리죠. 귀가 없으면 안 들리겠지. 그런데 귀가 있어도 내가 들으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야 되겠지. 그런데 마음이 있고 귀가 있어도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서는 그 소리가 나한테 안 전해지잖아. 그 뭔가 파장이 있어가지고 부딪치기 때문에 그 파장이 있기 때문에 그 소리를 들을 거 아니라?
그러면 여러분들은 뭘 알아차려야 돼요?
내 귀가 여기 있네 하고 알아차려야 돼요? 아니면 내 마음이 뭘 하고 있나 하고 알아차려야 돼요? 내 마음은 어디로 갈지 모릅니다. 귀에 가 있을지, 보는 데 가 있을지, 딴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럼 나는 지금 뭘 사띠를 해야 되겠어요?
귀에서 들리는 파장. 파장을 사띠를 해야 됩니다.
그럼 소리가 어떻게 들려요? 뭔가 툭툭 부딪히면서 들릴 거 아니라.
스님 소리가 높을 때도 있고 또 끊어질 때도 있고 계속 이어질 때도 있으면, 어떨 때는 툭툭 치기도 할 거고, 어떨 때는 파도같이 넘실넘실하기도 할 거고, 갖가지 방법으로 그 파장을 느낄 거 아니라. 그럼 그거 그냥 그대로 알아차리면 되는 거라.
소리의 파장을 집중을 하면 어떤 효과가 있을까?
앞에 파장이 미친 것들은 그게 사라져야만이 그다음 파장이 와 닿는 걸 압니다. 내 마음이 한 시간 한 찰나에도 한 곳에 머물러 있지 못하는 거라. 왜? 계속 파장은 나한테 오기 때문에. 그럼 나는 들리는 것이 계속적으로 그 파장만 알고 있는 거라.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형태로. 그런데 마음은 어때요? 그 파장에 대해서 어떤 것에도 집착함이 없이, 그냥 대상을 대상으로서 보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으로만 알아차리고 있는 거라. 아주 청명하고 깨끗해.
그 전에 수다원에서 일어났던 우뻭카의 마음하고는 완전하게 차이가 나버립니다. 일래과의 우뻭카라는 거는. 그전에는 자동적으로 대상을 알아차리고 있지만 그 대상으로 인해서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는 돼 있긴 한데, 불완전하거든 아직은.
왜? 내 마음 자체가 아직은 뭔가를 더 알려고 하고, 또 뭔가를 바라는 마음도 있고 그런다고. ‘내가 수다원이 돼야지’ 하고 마음을 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거든. 그러면 그 우뻭카라고 하는 것은 일정한 부분에서는 약간의 미세한 떨림이 있게 돼 있다는 거라.
그런데 그 상태를 딱 넘어서고 나서 이제는 외부적인 것이나 내부적인 자극에 대해서 반응하는 것이 평온한 상태가 아니라, 그냥 육근을 통해서 일어나는 자극에 대한 것들만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평온한 상태를 만드는 것은 마음이 완전히 바뀌어져 있는 상태가 됩니다.
일래과라는 거는 어떻게 설명을 해야 될까?
수다원하고 외부적으로 차이 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 수행하는 그 사람은 마음은, 대상을 알아차리는 마음은 완전히 바뀌어져 있습니다.
당연히 사띠는 자동적으로 되고 있지만 그전에는 수다원이라 하더라도 밖에서 보이는 대상이나 소리가 들릴 것 같으면 ‘누구 소리, 나한테 칭찬하는 말이구나’ 해서 기분 좋기도 하고, ‘저놈이 왜 또 그런 소리를 하나’ 하고 기분 나쁜 마음이 탁 들기도 하고 하는데, 이제는 그런 마음이 없어져버립니다.
왜 그럴까? 파장으로만 느끼고 있고, 보면 보인다고만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마음이 일어날 조건이 안 돼 버립니다.
그게 쉽게 말하면 탐욕, 그러니까 뭔가 원하는 마음, 그다음에 진에라고 하는 뭔가 싫어하는 마음, 이것들이 완전히 잠재워져 버린 상태가 되는 거라. 밖으로 드러나지지 않는 상태가 돼버리는 겁니다. 제거가 된 것은 아니지만.
드러나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이 드러나가지고 마음에서 성냄이 확 일어나는 것하고는 180도 틀린 마음입니다. 드러날 조건이 안 돼버려. 그런데 아직은 탐욕하고 성냄은 있어. 자기가 보니까 탐욕하고 성냄은 있는데, 그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조건이 전혀 안 되는 거라.
수다원하고 일래과는 죽고 나서 다시 재생을 하겠죠. 어디로 재생을 하게 될까? 어디로 재생해요?
수다원은 욕계에만 재생이 가능합니다. 왜 그럴까? 욕심이 있거든. 아직은 내가 ‘수행 더 해야지’ 하는 욕심도 부리고, 뭐 싫은 거 있으면 ‘에이, 싫어’하는 마음도 생기고, 지가 욕계에서 살고 있는 마음들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데, 욕계에 안 태어나면 어디에서 태어나겠어? 그러면 욕계 천상에 태어나든 인간계로 태어나든 하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욕계 천상은 뭐가 있어요? 범천 같은 거 그런 것들이라.
그런데 범천에 태어나도 거기서 깨달음을 이룰 수 있어요? 없어! 거기서 뭐 한정없이 살다가도 언젠가는 다시 또 인간으로 들어와야 돼. 그게 한 번 돌아와 가지고 그냥 그다음에 탁 깨달음을 이룰 수도 있는 거고, 7생까지도 갈 수 있는 거고, 그런데 어쨌든 인간으로 태어나야만이 아라한이 될 수가 있어.
그러면 일래과는 어떻게 될까? 일래과는 어디에 태어날까?
색계! 욕계는 안 태어납니다. 쉽게 말하면 색계 천상에, 색계에 태어날지 무색계에서 태어날지는 닦은 습에 따라 틀려지겠지만, 색계 무색계 쪽으로 가든지 그렇지 않으면 인간으로 태어납니다. 그런데 문제가 딱 하나 더 있습니다. 부처님도 정거천에 태어났다고 했거든. 그런데 거기서는 내가 아라한이 될 수가 없잖아. 내가 불환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럼 어떻게 해야 돼? 다시 한 번 더 윤회를 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러면은 일래과는 한 번 태어난다 했는데,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면 두 번 태어나는 것이 되잖아. 그럼 일래과가 아니잖아. 그럼 예류과야? 예류과가 아니고 일래과라 했거든. 여기서 문제가 생겨버리는 거라.
일래과도 마찬가지로 인간으로 태어나야만이 아라한이 될 수가 있습니다. 불환과를 제외한 나머지 세 과는 전부 인간으로 태어나서 아라한까지 도달이 가능한 과위라. 그럼 일래과도 어차피 지가 아라한이 되려면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야 돼.
그럼 천상에 태어난 거는 부처님도 “저놈 죽고 나서 정거천 태어났다” 그랬는데 그럼 어떻게 해야 돼? 정거천에서 목숨 다하면 다시 돌아와야 되는 거라.
그래서 주석서하고 경전을 다 뒤져보면 일래과에 대한 것들을 태어나는 장소와 그다음에 깨달음을 이루는 장소에 대한 것들이 다 틀립니다. 태어나는 곳이 천상 욕계는 안 태어난다고 그랬죠?
색계 이상에 태어나서 거기서 깨달음을 이룬 경우도 있고, 또 색계 이상에 태어났다가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서 완전하게 아라한이 된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고 죽고 나서 바로 그냥 인간으로 태어나가지고 바로 아라한이 된 때도 있고, 다 틀립니다.
그래서 근래에 있는 분들은 "한 번 돌아온다"는 의미를 "인간으로 한 번 돌아온다"는 의미로서 확정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상 세계에 너가 아무리 좋다고 가봐야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는 어차피 인간으로 나와야 된다는 거라.
얼마나 좋은 몸들 받고 있어? 이럴 때 공부 안 하고 언제 공부하려고 그러느냐는 거라.
그래서 일래과는 우뻭카의 상태도 그 전의 수다원하고는 확연하게 틀리고, 관찰하는 대상도 확연하게 틀립니다. 사띠하는 대상도. 이제는 호흡 이거 알아차리고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냥 일상생활을 하면서 모든 것 들리고 보고 듣고 맛보고 하는 그것들이 수행 대상이 되지, 다른 것이 대상이 되질 않는 거라.
그게 쉽게 말하면 수다원하고 일래과하고의 차이입니다.
아까 얘기했죠? 탐욕하고 성냄은 있지만 드러나지 않는다 하고 얘기합니다. 드러나지 않으면 그럼 불환과하고 별 차이가 없겠죠. 그런데 불환과는 또 일래과하고는 또 차별이 됩니다.
그런데 불환과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네. 왜 그럴까?
(수행자 : 그런데 거기서도 참 제가 이게 그 불환자라는 그 의미가 다시는 어떻든 간에 태어남으로 돌아오지 않는데, 다른 데로 간다 하더라도 다르게 오지도 않고 정거천에서 다른 쪽으로 생을 받는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더 높은 세상이라고 그렇게 얘기하죠. 어쨌든 거기서 그냥 열반에 들어버리거든.
열반에 드는 조건은 물론 경전에는 다 설명을 해놨습니다. 열심히 거기서 위빳사나 수행한다, 아니면 그냥 자연스럽게 뭐 하다가 죽을 때 돼 가지고 아라한이 된다, 아니면 그 천신의 몸이 수명의 반 정도 됐을 때 이미 아라한이 되어버린다, 주석서에는 다 틀리게 나오긴 합니다. 그리하더라도 인간의 몸을 받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는 불환자가 이 세상에 있을 조건이 없다는 거라.
그러면 뭐로 가지고 불환자의 과위에 있다는 걸 우리가 얘기를 할 수 있느냐는 거라.
일래과라는 거라. 일래과가 가지고 있는 번뇌가 드러나지 않는 번뇌로서 있는 것들을 그걸 완전히 소멸시키는 상태가 불환과가 되는 거라.
그런데 그거는 일래과는 어디에서 태어나요? 어쨌든 일래과가 돼 가지고 아라한이 되려면 인간으로 태어나야 돼. 인간 중에는 일래과에서 그다음에 불환과로 안 가고 바로 아라한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라.
그런 사람들을 보니까 분명히 욕심도 있고 성냄도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상태로 있다 할 것 같으면, 그러면 완전히 그걸 소멸한 천상 세계에 있는 존재가 있지 않느냐 하고 얘기합니다.
경전에는 각각의 천상 세계, 욕계 말고 색계 무색계에서 있는 천신들이 와서 부처님한테 보고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여기 천상 세계에 11명의 불환자가 있습니다. 하고. 어떤 천신이 와가지고 여기에는 얼만큼 있습니다. 하고 얘기를 한 게 경전에 다 써져 있습니다. 그래도 여러분이 못 믿겠지? 천신이라서.
그런데 천신을 본 사람들은 어떡하노? 천신을 본 사람들은 천신을 믿을 거 아니라. 그게 지금 현재 살아있는 스님들 중에서는 무수하게 많습니다. 천신을 본 사람들이.
그래서 여러분들이 인간의 세계 외에 다른 천상세계의 존재를 갖다가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거는 여러분들의 수행력에 달린 것이지, 수행이 무르익으면 천신들을 봅니다. 그 천신들이 또 여러분들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생에서 태어난 것은 아라한이 되기 위한 거라고 생각을 하고 열심히 수행들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재가자죠. 재가 아라한이 되면 어떻게 될까?
이게 이제 논쟁거리입니다. 논쟁거리. 경전, 주석서 말고 경전에는 재가자로서 아라한이 된 사람 딱 세 사람을 들먹여놨습니다.
그게 맨 처음이, 부처님이 다섯 비구 그거 하고 나서 그거 하고 나서, 야사 야사한테 얘기해서 야사가 바로 아라한이 돼서 야사는 그 자리에서 출가를 해버립니다. 그때는 "에히, 빅쿠"라 해가지고 “이리 오너라 비구여” 할 것 같으면 그냥 경전상에는 머리가 홀랑 깎이고 가사가 착 입혀졌다고 그럽니다. 어쨌든 간단했어 비구계를 주는 것이. 그 야사가 있고.
그다음에 두 번째가 바히야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풍랑을 만났는데 배가 난파돼서 옷도 다 없어지고 했는데, 와가지고 그렇게 돌아다니니까 사람들이 뭔 성인이 왔나 해가지고 존경을 막 표하거든요. 그러면 자기가 아라한으로 착각을 하게 되는 거라. 나중에 친구가 친구인 천신이 와서 “너는 아라한 아냐” 하니까 부처님 찾아가가지고 부처님 법을 듣고 그 자리에서 아라한이 됩니다. 그게 바히야입니다.
그런데 바히야는, 이미 그때가 되면은 부처님의 교단에서는 "우빠삼빠다"라고 하는 게 확립된 상태가 됩니다. 쉽게 말하면 비구를 만드는 게 "에히, 빅쿠"의 단계가 있고 "띠사라나 빅쿠"라고 하는 단계가 있고 "우빠삼빠다" 단계가 있거든. 그래서 이 우빠삼빠다 단계에서는 스님들이 적어도 4명 이상 5명 이상의 스님들이 모여야만이 계를 줄 수가 있고, 계 받는 사람도 지가 스스로 바리때하고 가사를 구비를 해야 돼. 그렇게 해가 와가지고 계를 받을 수가 있거든.
근데 바히야가 가난하잖아. 그거 구하려고 가다가 결국 경전에는 소한테 받쳐가 죽었다고 이렇게 나오는데, 그래서 그걸 뒤에 후에 주석서들은 뭐라고 하냐면 그게 하룻밤이 이미 지난 것이다. 그거 구하려고 돌아다니다 하룻밤이 지나버렸기 때문에 아라한이 되고 나서는 재가자로서는 하룻밤을 넘길 수가 없다. 하고 주석서에서는 얘기합니다. 죽음을 맞을 수 있는 조건을 스스로 찾아갔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재가인으로서 못 삽니다. 주석서까지 다 뒤지면, 하루를 넘길 수가 없다고.
그다음에 세 번째가 케마. 빔비사라왕의 부인이었죠. 케마가 아라한이 된 것.
아라한이 되고 나서 케마는 그때는 비구니가 존재를 했기 때문에 비구니 교단에 바로 출가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재가 아라한이 가능한가 하는 의문들을 품게 됩니다.
‘출가자만 장땡이냐? 나도 얼마든지 아라한으로서 살 수 있어.’
어떻게 한다고? 못 산다! 지금 테라와다 불교권 내에서는 여러분들이 출가를 할 조건이 안 된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죽든지 아라한이 안 되든지 둘 중에 하나여야 돼. 어떤거 할래?
그래서 아라한 되기 싫어? 죽더라도 아라한이 되지. 이 사람들아!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건데, 왜 아라한이 안 되려고 그래? 이렇게 살고 싶어 갖고, 이러니 공부들을 안 하는 거라.
(수행자 질문 : 여자 신도로서 가장 이상적인 것은 예를 들어서 거의 죽는 순간에 아라한이 돼서 가는 게 최선이...)
그렇지. 그래서 수다원에 이르른 분들이 보입니다. 쉽게 말하면 저 메치든 달라신이든 뭐 이런 존재들을 보면은 청정하게 참 잘 사는 분들이 있어요. 그러면서 수다원에 어느 정도 이르렀다 하고 판단이 되는 분들이 보여요. 그분들은 그냥 수다원인 상태에서 계속적으로 수행을 합니다.
그런데 수다원하고 일래과, 불환은 없으니까 빼고, 아라한하고 차이가 날까?
겉으로는 전혀 모릅니다. 그래서 가끔 농담 삼아 그런 얘기를 해요. 그분을 만나면 “언제 죽을 거야?” 쉽게 말하면 그분이 죽을 때를 알면, 적어도 3개월 전에는 알 수가 있습니다. 자기 호흡을 분명하게 파악을 하고 있으면, 숨이 끊어지는 상태가 언제가 될 것이다 하는 것들을 어느 정도 알게 됩니다.
그럼 3개월 전에 죽음을 준비하게끔 되고, 하루 전날 아라한에 이르른다는 거라.
그럼 “아직 멀었습니다.” 이러거든. 그럼 “그래. 오래 살아요.” 이렇게 인제 농담 삼아 하기도 하고 그러는데.
그래서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는 가장 먼저 우선시해야 되는 것이 수다원입니다.
특히 여성 재가자들은 수다원에 이르지 않고는 어떠한 경우든지 밑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거라. 지속적으로 윤회를 하게끔 되는 거라. 지속적으로.
그래도 수다원으로 이르면 그게 일곱 번이든 한 번이든 두 번이든 간에 언젠가는 윤회로부터 끝이 나는 보장이 있는데, 그 이르지 못하면 언제가 될지를 모르는 거라. 그래서 수다원을 목표로 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인은 네 단계가 있죠. 하나 또 여러분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 사쌍팔배라고 해가지고 수다원도 수다원과, 일래도 일래과, 이렇게 해가지고 사쌍팔배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게 수다원도입니다.
수다원도를 성인으로 봐야 될까? 어떤 학자들은 “아니야. 과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성인이 아니야.”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경전에는 사상팔배가 다 성인의 경지에 이르는 거라.
여기서 차이가 뭐냐면 수다원 도를 어디로 잡을 것이냐? 그냥 삼보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지면 그걸 수다원 도의 흐름에 들었다고 볼 것이냐? 그런데 테라와다 전통에는 그렇게 보는 법이 없습니다. 수다원 도라고 하는 건 도에 이르르면 어떻게 해야 돼요? 그다음 마음이 무슨 마음이 일어나요? 과의 마음이 바로 일어납니다. 도에 들었으면 도의 마음에서 탁 죽는 어떤 불상사에서 탁 죽는 경우가 아니면은, 도의 마음이 일어서면 그다음 마음은 과의 마음이 바로 일어납니다. 쉽게 말하면 쌍입니다. 그냥 도에 들었으면 과에 이르르게 돼.
그래서 이걸 쌍이라고 그러는 건데, 왜 학자들은 이상하게 자꾸 전개를 해가지고 부처님이 얘기한 걸 자꾸 흠집을 내려고 그러지? 왜 그래? 여기 교수들? 그렇게 하지 마. 부처님 가르침을 자꾸 왜곡하려고 하면 안 돼요. 그게 하나 있고,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도와 과는 쌍입니다. 도에 들었으면 그다음은 과에 들게끔 돼 있다. 그래서 그분들은 도에서 끝나는 법이 없어요. 갑작스럽게 죽는 경우가 아니면. 도에 들었으면 반드시 과에 들어. 그래서 그냥 편안하게 그냥 예류과 일래과 불환과 아라한과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것이지. 그걸 자꾸 하나를 잡아 떼내 가지고, 그거는 존경의 대상이 아니다 하고 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거라.
그다음에 또 하나 정정하고 싶은 게 수행은 오래도록 해서 수다원에 이르렀으면 또 한참 어떨 때는 몇 생을 지나가지고 그다음 단계로 또 넘어가고, 그렇게 점진적으로 닦아가는 것이지. 한 방에 그냥 ‘팡’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거라. 그래서 한 번에 내가 앉아서 싹 체험해서 내가 아라한이 됐다 그러면 “사기꾼” 하면 됩니다. 그러는 법은 없습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대승불교에서 한 번에 완전히 내가 탁 깨달음을 이루었다. 그런데 어떨 때는 좀 저분이 과연 깨달음에 이르렀나? 왜? 그분이 깨달음에 이르렀을 때의 현상들을 갖다가 읊어봐라고 할 것 같으면 대부분이 ‘빛을 봤다든지, 그 행복에 일주일 동안 쌓여 있었다든지’ 이런 겁니다.
그런데 그거는 여러분들이 위빳사나 수행하면서 10가지 현상들에 다 포함되는데, 그거는 아직 수행이 한참 무르익고 있는 단계, 수다원에도 이르지 못한 단계인데, 저 단계를 갖다가 과연 깨달음으로 볼 수 있느냐 하는 거라.
천상 세계를 한번 예를 들어봅시다. 천상 세계와 선정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대상에 대해서 끊임없이 위딱까 위짜라가 일어나서 대상을 잘 알아차리고 있어요. 번뇌 없이 잘 지내고 있어요.
욕계 천상. 브라흐마짜라라고 하는 거 있죠? 사범주, 범천들이 머무는 세계라는 거라. 그 사람들은 욕심 없이 그냥 그냥 자애의 마음을 가지고, 까루나의 마음을 가지고, 무디따의 마음을 가지고, 우뻭카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세계들이 이 범천 세계입니다.
화두를 열심히 잘해서 화두가 일념이 딱 돼 가지고 하면 그 세계와 마찬가지입니다. 이 비난하려고 하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이건 분명하게 바로 잡아야 될 부분이기 때문에, 초선정과 딱 다를 게 없습니다. 초선정을 다른 말로 탁 돌려서 얘기하면, 초선정을 자유롭게 하는 사람들은 예류과에 들기가 쉽습니다.
예류과의 상태가 딱 그 상태거든. 오로지 대상과 대상을 알아차리는 마음만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상태. 그런데 그런 상태가 딱 지나고 나면은 그다음에는 빛이 보입니다. 색계 빛을 나타내는 천상 세계는 참 많이 있습니다. 광음천부터 해서 색계 천상 세계, 빛을 상징하는 세계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세계를 공통적으로 다 보면 욕계도 아니고 무색계도 아니라. 색계라. 색계이기 때문에 색을 나타내는 천상세계를 상정을 해놔놨습니다.
부처님이 보인다든지 광명에 휩싸여 있다든지 이런 세계들은 전부 색계, 천상 세계와 진배 없는 겁니다. 색계 천상 세계는 여러분들이 윤회에서 얼마든지 갈 수 있는 세계입니다. 잘 내가 수행하고 수행 안 한다 하더라도, 보시 열심히 잘하고, 계율 잘 지키고, 그렇게 할 것 같으면 그 색계천상 세계 간다고 경전에도 분명히 기록이 돼 있습니다.
위빳사나 수행자가 그렇게 빛에 막 쌓여가지고 부처님이 나를 갖다가 머리를 쓰다듬는 듯이 한다고 그럴 것 같으면, “이놈의 자식이 또 망상 부리고 있네. 더 가서 공부해.” 하고 합니다.
왜 그럴까? 그것은 그 세계가 아무리 1개월을 가든 3개월을 가든 뭘 하든 간에 번뇌를 제거하는 것하고는 전혀 관계 없기 때문에! 그리고 그 세계를 항상 그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언젠가는 떨어지고 빠져나와야 된다는 거라.
나오고 나면 어떻게 해요? 돌아버리는 거라. 막행막식하는 거라. 막 그냥 아무 때나 고기 먹고 아무 때나 가서 술 먹고 계율이 오히려 더 엉망이 돼버린 상태가 돼요. 그걸 자꾸 합리화시키려고 합니다. 그러지 말아라는 거라.
어떤 수행을 하더라도 그 수행법으로 인해서 바른 경지에 이를 수는 있지만은 그걸 정당화해가지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훼손시키지는 말아라는 거라.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떠한 경우든지 오롯이 하나의 길만 가고 있습니다. 윤회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길을 가리키는 것이지, 내 자신을 합리화하고 막행막식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는 거라.
너무 세게 얘기했나? (아니요)
어쨌든 선정과 같은 단계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거라. 여러분들도 수행하다가 선정삼매에 들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좋습니다. 그것들이 그 힘이 사띠의 힘을 키워주기 때문에 도움을 줍니다. 그래서 때때로는 필요해요. 그리고 몸이 많이 아프고 힘들 때는 또 삼매에 들어서 그것들을 보충을 합니다. 그때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경험을 깨달음으로 연관시키지는 말아라는 거라.
그 경험은 그 상태에서 가능한 것이고, 그 상태에서 지내고 온 것이지. 그 상태로부터 벗어나면 전혀 번뇌하고도 관계없고 깨달음이 과위하고도 관계없는 상태가 돼버린다는 거라.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무상 · 고 · 무아, 지혜 부분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뿐 아니라 깨달음에 이른 분들은 공통적으로 하는 것이 모든 현상들에 대해서 그러니까 상카라, 모든 상카라에 대해서, 상카라라고 하는 것은 생성되고 소멸하는 모든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것들에 대해서 무상한 성품으로 보는 것,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고로 보는 것,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무아인 것들을 체험하는 것, 이것들이 뒷받침이 되지 않으면 도와 과에 이룰 수가 없다.
그게 첫 번째.
두 번째는 스님이 항상 그런 얘기를 합니다. 수행할 때 수행 대상을 먼저 막 달려들어 갖고 관찰하려고 하지 마라 그럽니다.
먼저 몸을 편안하게 하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나서 가볍게 하고 나서, 마음이 지가 배에 가면 그때 배를 관찰하고, 마음이 딴 데 갈 것 같으면 그거 딴 데 가는 걸 갖다가 관찰하라는 거라. 쉽게 말하면 적정의 상태가 되라는 거라. 마음이 대상을 알아차릴 수 있게끔 만들어줘야 되지, 마음을 자꾸 자기가 끄잡고 와가지고 여기다 붙이고 저기다 붙이고 이렇게 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거는 수행을 방해하는 요소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가 적정의 상태.
그다음에 세 번째가 아까 얘기했죠. 우뻭카. 밖의 대상이든 안에서 일어나는 대상이든 어떠한 대상이든 그 대상에 대해서 마음이 움직이면 안 돼. 좋고 싫은 마음들이 일어나버리면 안 된다는 거라. 그냥 평온한 상태, 고요한 상태를 유지하려고 지극정성으로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조금 더 지나고 나면 그러한 대상들은 어디를 통해서 내가 알 수 있어요? 육근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럼 육근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 모든 것들에 대해서 그것들을 그냥 그 느낌으로만 자꾸 알아서 하려고 하라는 거라.
그렇게 하면은 우뻭카의 상태가 지속적으로 유지됩니다.
이 세 개는 어떠한 경우든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개발해야 되는 거고, 반드시 있어야만이 되는 것들이라는 거라.
이걸 기준점으로 잡아야 되지, 내가 선정의 힘이 있어서 선정에 잘 든다. 아니면 열심히 노력해 가지고 내가 한 번 앉으면 한 10시간 앉아 있을 수 있다. 그런 것 가지고 똑 힘자랑하듯이 자기 자랑하려고 할 필요 없다는 거라. 그마만큼 어리석은 게 없어요.
스님도 그렇게 해가지고 실패를 했거든. 너들 한번 봐봐라. 태국 사람들한테, 나는 앉으면 적어도 다섯 시간은 앉아가지고 꼼짝 안 하고 있다. 온몸에서 땀이 뻘뻘뻘 나면서 그러고 있다는 거라.
수행은 그러한 방법으로 하지 말아라는 거라. 갖춰야 될 걸 갖추고, 그리고 이루어야 될 것들은 이루도록 해야 되는 것이지.
수행을 또 하나 조심해야 될 게, 쭉 하다가 보면 자기가 뭐가 부족한 걸 압니다. 여러분들은 뭐 완벽하게 갖추고 인간으로 태어난 것 같아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부족한 게 틀림없이 보입니다. 그 부족한 것들을 메우려고 해야 됩니다. 그게 힘이 돼서 수행은 받쳐줍니다. 그걸 자꾸 등한시해버리고 ‘나는 오로지 수행만 하겠어’ 안됩니다. 일정하게는 갈 수 있을지 몰라도,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방법이 없습니다. 그걸 메꿔주기 전에는.
특히 서양에 지금 문제가 되는 게 뭐냐면 가면,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님 우리 계 설할 필요 없습니다. 그냥 바로 수행법 가르쳐 주십시오.” 방법만 자꾸 할려고 그럽니다. 그거 어디에 쓰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어.
바라밀은 반드시 본인이 스스로 체크해 봐야 됩니다. 바라밀들이 충족되지 않으면 수행은 단계 단계를 넘어갈 때 아주 힘들고, 아니면 아예 좌초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자꾸 신경 쓰도록 해서 살도록 해야 됩니다.
인간이죠. 뭘 해야 돼? (수행자 : 수행해야 됩니다.)
어떻게 수행해야 돼? 열심히? 뭘 어떻게 열심히 할 건데?
대상을 있는 그대로 무상 고 무아로 보려고 해야 됩니다. 어디에도 집착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고 수행할 수 있을 때, 수행은 진전이 된다는 걸 잊지 않도록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올해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네 가지 성인의 단계에 대한 것들을 좀 더 세밀하게 한번 해서, 여기서는 할 기회가 없겠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끝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