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칠각지, 칠청정 법문

열반에 이르는 7청정의 로드맵(5부)-도비도지견청정_(사)21세기 불교포럼 정기법회_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2025. 8. 23)

담마마-마까 2025. 9. 23. 11:03

https://youtu.be/zhWqdK_4gtQ?si=ZgjEO-DAPwFfPmaX

 

 

열반에 이르는 7청정의 로드맵(5부)-도비도지견청정(2025. 8. 23)

 

오늘은 도비도지견청정 부분인데, 도(道)가 있고 비도(非道)가 있고 그러니까 부처님 가르침 따라서 걸어가야 될 길이 있고 걸어가지 말아야 될 길이 있고 그렇다는 거죠.

 

꼭 수행이 아니라도 청정에 이르는 길의 기준점은 뭐죠? 탐·진·치가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탐·진·치가 없으면 청정하게 잘 사는 겁니다. 수행도 사실은 탐·진·치가 없어야 만이 바르게 수행을 해나가게 되는 거죠.

그런데 수행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경험되는 것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경험되는 것들 개별적으로만 다 놓고 보면 필요한 것들이고, 또 그것들을 개발해야 되는 것인데, 이게 자칫 잘못하면 거기 안주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거든요.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 미세하게 좋아하는 마음들이 생긴다든지 그렇지 않으면 ‘아, 내가 도와 과에 이르렀나’ 착각한다든지, 아니면 어떤 경우에는 ‘수다원에 이르렀나’, 어떤 경우에는 ‘아라한에 이르렀나’, 이렇게 착각을 하게 됩니다. 착각을 하는 순간에 그거는 자기가 가는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갔기 때문에 그런 착각을 했겠지.

 

왜 그러냐 하면, 본인이 바른 길로, 그 도의 길로 그냥 쭉 걸어갔으면은 적어도 그 경계를 넘어서 버리게 되는데, 그래서 다시는 그게 안 나타나야 되는데, 그다음 또 수행에서 또 나타나거든. 빛이 나타난다든지 관세음보살이 나타난다든지 계속 이렇게 되거든.

그래서 그런 면에서는 이게 뭔가 분명히 개발하기는 해야 되는 부분인데, 기쁨도 개발해야 되고 사띠도 개발해야 되고 행복도 개발해야 되고 다들 필요한 것들인데, 이게 어떤 부분에서 뭔가 잘못돼 가지고 이렇게 됐을까? 하는 부분에 대한 얘기를 오늘 하는 시간입니다. 그게 도(道)와 비도(非道), 잘못됐으니까 그건 비도(非道)가 되는 거죠. 그래서 그걸 바로 잡으면 다시 인제 도(道)의 길로 가게 되는 거죠.

 

대부분 수행해 보니까 어떤 현상들이 일어나요? 가장 많이 일어나는 게 기쁨의 현상들입니다. 그래서 몸이 어떨 때는 주체가 안 될 때도 있고, 어떨 때는 그냥 기쁨들이 막 일어나고 온몸이 그냥 세포 터지듯이 그냥 기쁨의 현상들이 일어나기도 하고 그런 것들이 가장 대표적인 것들인데, 이 지금 하고 있는 게 칠청정 부분인데 칠청정에서 분명히 그러면 이 기쁨 부분을 갖다가 비도의 영역에 넣어놨는데, 또 불교 경전을 보면 칠각지나 이런 데 보면 삐띠 각지가 있거든요. 그럼 개발해야 되는 거라고!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거 구분할 수 있어요? 구분이 안 되죠.

 

오늘 이 시간에는 그걸 구분하는 법을 가르쳐 줄 테니까 잘 듣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자, 수다원 이상의 성자에 도달한 사람들은 이 10가지, 대표적으로 10가지라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10가지 장애라고 하는 현상들이 일어날까, 안 일어날까?

(수행자 대답 : 일어나요) 일어납니까? (예)

세 개의 족쇄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게 유신견이라고 하는 나라고 하는 것들이 없다는 견해가 확립되고 나면 내가 없는데 기쁨이 어디 있어? 안 그래요? 내가 없는데 광명이 일어날 이유가 뭐 있어요? 유신견이 버려지고 나면 이 10가지 현상이라고 하는 것은 안 일어나집니다. 착각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10가지는 도와 과에 이르렀으면 다시는 안 나타나는 부분이다' 하는 걸 분명하게 얘기를 합니다.

 

그다음에 또 이런 현상들을 경험을 못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수행 안 하는 사람은 당연히 경험 못하겠지. 그다음에 또 어떤 사람일까?

수행 대상을 잘못 착각하는 경우.

쉽게 말하면 수행대상이라는 것은 위빳사나 수행대상이라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대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입니다. 실재하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인데, 변하는 현상인데 그 변하는 현상을 관찰하다가 어느 한 곳에서 탁 머무릅니다. 그러면 이 10가지 현상들이 일어나집니다. 머물기 시작하면 이게 일어나지는 현상들입니다.

쉽게 말하면 사마타samatha 수행을 하는 분들은 자주 경험되는 게 이 10가지 현상인데, 순수하게 위빳사나vipassanā만 할 것 같으면 잘 경험 안 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순수 위빳사나만 가능할까? 하는 데는 의문이 들죠. 왜?

위빳사나 수행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필요한 게 가장 기본적인 건 사띠sati가 있어야 되고, 그다음에 집중하는 사마디samādhi가 있어야 되고, 그다음에 위리야viriya라고 하는 노력이 있어야 되고, 이게 잘 균형을 맞춰야 되는데 사마디가 너무 강해도 안 되고 위리야가 너무 약하거나 강해도 안 돼.

그래서 어느 정도 잘 조화를 맞춰야 되는데, 강하지 않은 사마디는 어떤 거예요? 순간순간 알아차리는 것들입니다. 순간순간의 사마디라고 합니다. 그럼 순간 순간의 사마디 중에서 대상을 관찰하다 보면 어떨 때는 그 순간에서 변하는 것이 안 보일 때는 대부분이 보면 마음은 딱 거기에 머무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고 있다. 그럼 들이쉬는 걸 분명히 관찰을 했어요. 관찰이 약한 사람들은 들이쉬면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아차리겠죠. 그리고 나서 내쉬면 내쉰다고 알아차립니다. 그런데 이제 이때까지 쭉 따라와서 어느 정도 청정에 조금 이르른 분들은 들이실 때 그냥 한 번 들이쉰다고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고 여러 번 들이쉬는 것이 보여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똑 물방울이 툭툭툭툭 터지듯이 이렇게 느껴지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물결이 치듯이 착착착착 이렇게 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그거는 다르지만 어쨌든 한 번 들이쉬는 게 아니고 여러 번 들이쉬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멈추고 나서 다시 마음이 거기 호흡에 가 있어야만이 사라지는 게 보여집니다. 여기까지는 된다고 칩시다.

 

그런데 언제 머무르냐면 탁 멈출 때, 멈추고 나서 그다음에는 마음이 들이시고 나면 어떻게 돼요? 자연스럽게 내쉬는 호흡이 일어나게끔 됩니다. 내가 의식을 안 하고 있는 것뿐이죠. 호흡은 저절로 들이쉬고 났으면 내쉬게 돼 있습니다. 내쉬고 있는데, 그 내쉬는 쪽으로 가지를 않고 멈추는 데 딱 가 있는 거라. 그러면 대상이 안 변합니다.

그럴 때는 이 삐띠가 안 일어납니다.

그런데 아까 같이 들이쉴 때 들이쉬는 게 여러 개로 쪼개져서 이렇게 보여진다, 새로운 현상을 봤거든. 그러면 이 10가지 현상들 중에 어느 것 하나가 탁 일어납니다. 기쁨이 일어난다든지, 아니면 아, 너무 좋다든지, 아니면 이렇게 하는 것들이 고요하다든지 뭔가가 일어나게끔 됩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이렇게 무상한 성품이 쪼개져서 보여질 때 이런 장애들이 일어나면 거의 99.9%는 그 장애 쪽으로 많이 쏠려버립니다.

기쁨이 일어나면 기쁨으로 가버리지 호흡으로 가 있지를 않는 거라. 그냥 기쁨이 있으면 ‘기쁨이 일어났네’ 하고 짧게 탁 관찰하고 호흡을 그냥 관찰하면 되는데, 대부분은 그냥 그 기쁨으로 가버리는 거라.

 

그런데 기쁨은 각지 부분에서도 개발해야 되는 부분이고 사띠도 개발해야 되는 부분이고 다 개발해야 되는 부분인데, 그런데 이게 왜 장애가 돼서 딱 거기서 머물까?

각지 부분의 사띠나 기쁨이나 이런 것들하고 여기서 말하는 사띠나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경우가 조금 다릅니다. 그 순수하게 사띠만 있는 게 아니고, 순수하게 기쁨이 있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하나 더 뭔가가 탁 달라붙습니다. 그걸 알아차려야 되는데 그걸 못 알아차리면 그냥 거기에 놀아버립니다. 놀아나 버립니다.

 

그래서 하나씩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수행자 질문 : 다음 넘어가시기 전에, 10가지 족쇄 중에서 10가지 족쇄가 굉장히 중요한데, 저도 대승불교 25년 30년 하면서 족쇄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들은 거는 초기 불교를 하면서 공부를 했거든요. 그런데 스님께서 아까 말씀하시는 '유신견'하고 '계금취'하고 '의심' 세 개가 끊어지면 다른 것에 대한 장애가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없으시면은 탐을 왜, 탐과 진을 왜, 그러니까는 이제 엷게 해야 된다고 하는 그 전제가 어떻게 되는 거고, 좀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진은 여기 10개의 장애 부분에는 해당이 안 됩니다.

(수행자 : 큰 ..에 속해 있지 않습니까? 탐·진을 끊으려고 그러면은 탐진을 엷게 하고, 그다음에 완전히 탐진을 없애고, 그래서 오하분결을 갖다가 무력화시켜서 그다음에 아라한 쪽으로 향한다. 이래 돼 있지 않습니까?)

 

맞아요. 그건 경전상으로 분명히 맞는 얘기입니다. 맞는 얘기인데 그걸 얘기하려고 하는 게 아니고, 지금 10가지 족쇄라고 하는 건 어쩔 수 없이 개발되는 부분인데, 이게 장애가 된다고 하는 것은 어떤 거냐면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게끔 하기 때문에 장애가 된다는 거죠. 그런데 3개의 족쇄를 딱 끊고 나면은 어떠한 경우든지 이 10가지 장애는 이게 장애인 줄을 알기 때문에 일어날 수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수행자 : 예. 알겠습니다.)

 

그래서 도비도 부분은 아직은 여기로 갈지 여기로 갈지를 결정을 못하고 있는 상태고, 수다원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도의 길로만 쭉 가는 한참 뒤의 얘기입니다. 이거 뒤에도 또 뒤에 한참 더 진행이 돼야만이 가능한, 쉽게 말하면 상카루뻭카냐나(saṅkhārupekkhā-ñāṇa)까지 이르는 단계가 굉장히 많이 있는데, 그 단계들을 밟아 다음 시간에 하고 그다음 시간에 해야 될 지견청정 부분에서 해야 될 부분들을 밟아 나가고 나야, 그다음에는 완전하게 도의 흐름에 들어버리는 상태가 되는 거고, 지금은 딱 쉽게 말하면 두 가지 갈래 길이 있으면 어떨 때는 발을 잘못 디뎌 갖고 안 해야 되는 걸 하게끔 되기도 하고, 또 안 그러면 또 잘 가는 길로 따라가기도 하고, 왔다 갔다 왔다 갔다 하는 그런 단계라고 보시면 됩니다.

자, 한번 봅시다. 수행을 하다가 여러분들이 가장 난처해하는 것들이 뭐냐 하면, “뭘 관찰해야 되죠?” 이럽니다. 쉽게 말하면 호흡을 관찰하고 있다. 아니면 경행을 해서 발을 관찰하고 있다. 스님이 자꾸 명칭을 붙여가지고 배가 불러오면 ‘불러온다’ 배가 꺼지면 ‘꺼진다’ 하고 알아차리고, 코끝을 통해서 숨을 들이쉬면 들이쉰다고 알아차리고 내쉬면 내쉰다고 알아차리고, 걸을 때도 ‘발을 들었다’고 알아차리고, ‘나아간다’고 알아차리고, ‘내려놓는다’고 알아차리고, 이렇게 알아차려라 그럽니다. 그렇죠?

 

그러면 알아차릴 때 그렇게 알아차려야 됩니까?

‘배가 불러온다’고 하는 명칭은 실재하는 겁니까? 실재하지 않는 겁니까? 배는 여기서 지금 불러오고 있는 건데, 명칭이라고 하는 것은 실재하는 게 아닙니다. ‘발을 듦’이라고 하는 것은 발을 내리면서도 ‘발을 듦’이라고 명칭 붙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실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발을 들 때 발을 든다고는 알아차려야 되는데 ‘발을 듦’하고 그 명칭에 붙잡혀 있으면 발을 들 때 일어나는 현상들을 모릅니다. 그렇죠? 배가 불러올 때 배가 불러온다고 명칭에 딱 잡혀 있으면 배가 불러올 때 각각의 현상들이 일어나는 걸 내가 알 방법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이게 쉽게 말하면 수행을 어느 정도 해서 대상하고 명칭하고 어느 정도 딱 일치되고 나면 수행자들이 헷갈리는 게 이 부분에서 헷갈리거든.

 

여기서 뭘 관찰해야 되느냐 하는 거라.

배가 불러올 때는 배가 불러오는 것 중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느낌들 중에 하나를 갖다가 알아차려야 됩니다. 스님이 항상 강조를 하는 게 "느낌은 일어난 자리에서 반드시 사라진다." 관찰하는 힘에 따라서 빨리 사라지기도 하고 천천히 사라지는 것은 있을지라도 그것이 그냥 그대로 존재해 있는 법은 없다는 거라. 그럼 배가 불러올 때 뭔가 둔탁한 느낌이 있다든지 아니면 볼록하는 느낌이 있다든지 할 것 같으면 그걸 관찰해야 되는 거지,

 

그걸 불러온다고 명칭을 붙였지만, 관찰해야 되는 것은 그 현상이라. 발을 들어올릴 때도 발을 내려놓을 때도 마찬가지로 닿을 때의 느낌, 올릴 때의 느낌, 느낌들은 다 틀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 느낌들을 관찰해야지, 그냥 발을 들어올림하고 관찰하고, ‘내려놓음하면서 관찰할 것 같으면 계속 수행은 몸과 마음이 분리돼 가지고 관찰을 하고 있을지는 몰라도, 그 이상의 단계로 넘어가지지 못하는 거라.

그래서 수행이 어느 정도 지나고 나면 헷갈리는 부분이 바로 여기 부분이거든.

 

그래서 이 단계, 도비도지견청정의 단계라는 것은 위빳사나 지혜에서는 "삼마사나냐나sammasanañāṇa"라고 그럽니다. "깊이 있게 관찰해서 꿰뚫어 보듯이 관찰해서 그것을 안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실재하는 현상의 변하는 성품, 실재하는 성품이 불만족스러운 거구나, 실재하는 성품이 나라고 하는 것이 없구나, 하는 것들을 그 현상들을 보면서 분명하게 알아야 되기 때문에 삼마사나냐나라고 이름을 붙이는 거라. 그래서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실재하는 성품들을 자꾸 알아차리려고 해야 됩니다.

쉽게 말하면 그전에는 무상·고·무아라고 하는 것을 그냥 머릿속으로 이해를 했다고 할 것 같으면, 이제는 체험을 통해서 무상·고·무아를 알아야 된다는 얘기라. 이게 안 되면 이 단계에도 못 들어가고,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지지도 못한다는 얘기라.

 

실재하는 것들이 항상해 있지 않고 뭔가 변한다든지, 실재하는 것들이 좀 가만히 좀 있으면 좋겠는데 계속 널뛰듯이 변해 나가면 마음이 계속적으로 불만족스럽고 흥분이 자꾸 된다든지 이런 현상들, 그리고 그렇게 변하는 것들이 안 했으면 좋겠는데 가만히 있으면 좋겠는데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한다는 걸 다 분명히 아는 상태가 되는 거죠. 이걸 분명하게 알 수가 있는 것이 실재하는 성품을 분명하게 관찰했을 때 가능해지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인제는 여러분들이 어느 정도 수행을 쭉 따라 했으면은 명칭에 붙잡혀 있으면 안 됩니다. 명칭에 붙잡혀 있지 말고, 거기에 명칭을 붙이는 그것의 실재하는 성품을 자꾸 볼려고 해야 됩니다.

그렇게 봐서 실재하는 성품들을 탁 보게 되면 이제는 그다음 단계로 이 10가지 장애들이 탁 일어납니다. 이 상태가 되지 못하면 수행에서 장애들은 안 일어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실재하는 성품들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이 현상들이 일어나지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관세음보살 한번 본 사람? 열심히 기도할 때. 없어요? 봤어요? 관세음보살을 한두 번 하고 나니까 보이던가요? 한참 동안 거기에 집중해서 했을 때 관세음보살이라는 것이 보입니다. 그럼 관세음보살이 보이면 어떻게 해요? 그냥 관세음보살이라고 염불은 하고 있는데, 염불에 마음이 가 있어요? 아니면 관세음보살에 가 있어요?

(수행자 대답 : 관세음보살에 가 있습니다.)

이게 장애하고 딱 마찬가지라는 거라. 계속적으로 거기에 집중을 하고 있고 사띠를 하고 있고 노력하는 힘들이 있게 되면은 도비도지견청정에 이르는 준비는 돼 있는 상태라. 그래서 계속적으로 관세음보살을 할 수가 있어요. 잡념도 안 생기고 누가 소리 질러도 소리도 안 들리고 오로지 그것만 하게 돼요. 그렇게 하다 보면은 한참 하다 보면은 어느 정도 관세음보살이 진짜 나타나요. 나를 쓰다듬어주기도 하고, 어떨 때는 그냥 현현하듯이 그냥 탁 서가지고는 밝게 빛을 비춰주기도 하고 그럽니다.

 

그러면 마음이 어떻게 돼요? 입으로는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지만, 그전에는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할 때는 완전하게 일치돼가지고 관세음보살을 했어요. 실제 관세음보살을 떠올리면서. 그랬는데 이제는 입으로는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하고 있는데, 마음은 나타난 대상에 가 있게 되는 거라. 그러면 이 관세음보살은 사실은 실재하는 것들이 아니고, 내가 조작할 가능성이 다분해져 버리는 거라. 그와 같다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비유를 잘 든 것은 아닙니다. 관세음보살을 든 것은.

왜 그러냐면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어떠한 경우든 실재하는 대상을 관찰했을 때 일어나는 현상들이 10가지 장애 부분인데, 관세음보살은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실재하는 대상이 아니거든. 그러면 그것은 수행대상이 아니게 됩니다. 그거는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것이 틀리고 맞다의 부분이 아니고, "수행 대상이 아니다." 하고 붙여진 규정을 딱 해놔놨습니다.

 

(수행자 질문 : 앎에서 나타난 하나의 환상이라고 이렇게 생각을 하면 됩니까?)

그거는 지금도 보면 관세음보살이나 석가모니불 이미지로 그려놓은 것은 다 이미지가 자기 생각대로 그리기 때문에 다 틀리잖아요.

그거는 부처님은 실재하는 대상이었지만은 그게 지금 사진으로 남아있는 게 아니고 이미 2600년 전에 열반에 이르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거라. 그런 것들은 실재하는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라.

 

(수행자 질문 : 그러면 스님, 열심히 수행하다가 제가 이제 법당에서 하는데 앞에 부처님도 보이시고, 그다음에 그때 제가 절을 하고 있었거든요. 절하는 저를 보고, 또 그 절하는 모습을 보는 저도 보고 이런 현상을 경험했는데,)

절하는 걸 본 거는 맞아요. 쉽게 말하면 절하고 있는 행위들을 무언가가 보고 있는 거거든. 그게 보고 있는 마음, 알고 있는 마음이 그걸 보는 거라. 그래서 항상 쌍으로 일어나요. 육체가 있으면 절을 하고 있잖아요. 그럼 이것도 쌍으로 일어났잖아.

절하고 있는 건 육체적인 행위거든. 육체도 실재하는 거고 이게 쌍으로 일어났는데, 그걸 아는 마음이 있고 그 마음이 있다는 것을 내가 어떤 마음이 있는지 그것을 아는 마음도 있다는 거라.

그게 이제 쉽게 말하면 위에서 이렇게 보듯이 보이는 것으로 현상이 나타난 것뿐이지, 그러니까 그거는 실제로 본 거고, 실재를 본 것이고.

그거하고 이제 관세음보살을 본 거하고는 조금 틀립니다. 지금 얘기하는 건 실재를 본 것인데, 관세음보살을 봤다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하면 관세음보살을 봤기는 봤을 수가 있어요. 자기가 만든 대상으로 인해서 본 거라는 거지, 그것은 자기만의 세계지 통용될 수 있는 세계는 아니라는 거라.

 

쉽게 말하면 부처님의 진리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공통된 진리거든. 무상한 것은 누구에게나 공통된 거고, 고도 마찬가지고, 무아도 마찬가지잖아요.

공통된 진리가 거기에 적용이 되어야 되는데, 거기에는 공통된 진리가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라. 그럴 때는 그것들은 수행 대상이 아니다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해가 됐습니까?

그래서 적절한 비유는 아닙니다. 관세음보살을 예를 든 것은. 그래도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비유를 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스님이 어떤 걸 비난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착각을 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어쨌든 대상을 잘 봤다고 칩시다. 변하는 속성들을 무상·고·무아로서 분명히 보였어. 그런데 이게 참 재미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예를 들어봅시다.

배가 불러오고 있다. 불러오는 게 처음에는 볼록볼록볼록 보이더니, 그다음에는 볼록볼록볼록 하는 것이 하나 한쪽에서 툭 치고 일어나고 꺼지고 나서, 그 자리가 아니고 다른 데서 볼록한 게 보여. 그래서 한 자리에서 두 개가 일어나는 게 아니고 한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사라지고 나서 다른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보인다는 거라.

그렇게 마음이 점점 더 예리해져 가집니다. 그렇게 되면 거기에는 어떻게 돼요? 그런 현상이 배가 불러올 때 적어도 한 다섯 가지 정도씩 봤다. 그럴 것 같으면 되게 기분이 좋습니다. 마음이.

그러면 마음이 기분이 좋으면 기쁨이 일어나든지, 아니면 마음이 그렇게 좋으면 그다음에 일어나는 것이 뭔가 부처님이 보인다든지, 아니면 내가 뭔가 밝은 빛이 팍 앞에 솟구치는 것처럼 보인다든지, 이렇게 돼버립니다.

 

그래서 수행이 잘될 때 쉽게 말하면 무상·고·무아라는 성품으로 보일 때, 그쪽 한번 56페이지 한번 보십시오.

"아닛짱 카얏테나aniccaṃ khayaṭṭhena"라고 하는 "멸한다는 의미로 무상(無常)이다" 라고 얘기를 해놨습니다.

무상을 볼 때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너무 빨라 가지고, 멸(滅)하는 것으로 보여질 때 무상한 성품을 알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대상이 얼마나 빨리 바뀔까? 조금 전에 ‘볼록볼록’하는 거 있죠? 한 몇 번 정도 일어날까? 볼록하고 그대로 탁 사라지고 다른 데서 볼록하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져가는 게 무수하게 일어나지고 사라집니다.

이게 만약에 배가 불러올 때 시간이 적어도 1.7초 정도 될 거라. 1.7초, 1.8초 그 짧은 시간에 한 100번이 보인다 할 것 같으면 이거 따라갈 수 있겠어요? 못 따라갑니다. 그런데 마음은 계속 거기에 붙잡혀 있거든. 그럼 어떻게 보이겠어요? 그냥 사라지는 것만 보이는 거라.

 

일어나는 것이 보는 게 아니고 어느 한 자리가 사라지고 사라지고 사라지고 하는 것만 보이는 상태가 돼버리는 거라. 그런데 그것도 너무 빠르기 때문에 내가 컨트롤이 안 되거든. 그 사라지는 것들을 안 보려고 한다든지 아니면 안 일어났으면 한다든지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게 안 되는 거야. 그냥 사띠는 계속적으로 예리하기 때문에 그게 보여지는 거라. 사라짐만 계속 보여. 그래서 무상한 성품은 멸한다는 의미로 무상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냥 ‘배가 불러오고 불러왔으니깐 당연히 그다음에는 꺼지니까 무상이지’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아직은 수행이 아직 한참 안 무르익었다는 뜻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고(). 고라고 하는 것은 "두려움이 있다는 의미로 고(). dukkhaṃ bhayaṭṭhena" 하고 얘기합니다.

그렇게 빨리 변하면 두렵겠어, 안 두렵겠어? 굉장히 두렵습니다. 왜? 아직은 내가 번뇌를 끊은 게 아무것도 없거든. 조금 전에 황 회장님이 얘기했지만, 오상분결이든 오하분결이든 그 10가지 끊어야 될 족쇄가 있는데, 그중에 어느 것 하나도 지금 끊은 게 없어. 뭐가 있겠어요? 그러면. 내 마음에 아견(我見), 아(我)라고 하는 마나māna 그다음에 딧티diṭṭhi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견해들을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내가 나는 뭐하고 싶어요? 항상 건강하고 싶고 항상 살고 싶고 그렇거든. 그게 뭐냐면 존재욕구 입니다. 살고 싶은 이게 있기 때문에, 이게 있는 상태에서는 어떠한 경우든지 내가 빨리 변하는 걸 보면 마음에 두려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거라. 그 두려움이 바로 고라는 겁니다. 너무나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그다음에 그다음 페이지에 보면, 무아(無我)라고 하는 것은 "실체가 아니다 라는 의미로 무아(無我). anattā asāraṭṭhena"라고 해놓았습니다.

이거는 내 거라고 생각하고 싶은데 내 거라고 할 만한 정도로 가만히 있는 게 없거든. 빠르게 변하고 있고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있는 거라.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는 거라. 이 실체가 없다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걸 갖다가 무아라고 그럽니다.

그런데 10가지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상한 성품만 봐가지고는 되는 게 아닙니다. 결국에는 무아를 봐야만이 이 10가지 장애들을 극복을 해냅니다.

 

그래서 뒤에 61페이지 보면 관찰의 오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게 10가지 장애가 나타나는 것은 쉽게 말하면 내가 지금 사띠하고 있는 게 뭔가가 거기에 끼어들어서 오염됐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냥 그것만 딱 있으면 딱 좋은데, 그거 말고 뭔가 다른 게 또 하나가 딱 개입이 돼 있어요.

 

'(, obhāsa)'부터 나오죠. 61페이지 부분에.

빛이 환하게 비치면 어떨 것 같아요? 기쁘죠? 그러면 빛만 있으면 괜찮은데 이게 마음이 빛이 일어나면 마음이 기쁨을 탁 느끼는 거라. 마음이 기쁨을 탁 느끼니까 그걸 다시 또 기대를 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다음 수행할 때도 또 그런 빛이 일어나기는 하는데, 안 일어납니다. 안 일어납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내가 그것들을 기쁨으로 보는 순간에 이미 마음에는 그 빛이 오염돼 버린 상태라. 그냥 빛이 있는 게 아니고 그냥 빛이 가만히 있으면 그냥 저절로 비추고 있단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내가 호흡을 관찰하든 안 하든 내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호흡은 하게끔 돼 있다는 거라. 그와 마찬가지로 빛이 일어났으면 빛이 내가 하든 안 하든 수행 잘하고 있으면 빛이 일어나게끔 돼 있어요. 호흡을 자연스럽게 하고 있듯이. 그런데 이놈의 빛이 탁 일어나면 마음은 ‘엄마야’ 하면서 놀라든지 아니면 기뻐하든지 딱 그래요.

이게 이렇게 오염되니까 이게 그다음에는 ‘이게 좀 더 머무르기를’ 하는 바라는 마음이 생기는 거고, 안 그러면 ‘다음에 또 이런 경험들을 하기를’ 하는 기대가 생기는 거고. 이게 쉽게 말하면 좋은 현상인데, 수행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현상인데, 이게 오염되어 버린 상태입니다.

 

(수행자 질문 : 빛에 집착을 하기 때문에 집착하는 순간 오염이 일어나는 겁니까?)

집착은 아닙니다. 여기서는 집착하고는 거리가 멀고,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기대하는 것들입니다.

그것들을 바라는 거하고 집착하는 것은 경우가 틀립니다. 집착은 콱 움켜쥐는 건데, 이거는 움켜쥐는 정도는 아니고 움켜쥐는 건 아닌데 그냥 그대로 존재했으면 하는 걸 바라는 마음이 생기는 거라. 여기서 이제 집착은 일어나지진 않습니다.

10가지 장애는 어떠한 경우든 집착은 안 일어납니다. 그거는 분명한 거고, 그 대신에 이런 장애가 실제 일어나는 좋은 현상들을 갖다가 오염을 딱 시켜버린다는 얘깁니다.

 

예를 들어서 빛을 봤다고 칩시다. 빛이 팍 일어났어. 내 앞에만 환하게 비추다가 이게 점점 더 넓게 번지고 어떨 때는 이 우주를 다 빛으로 채우듯이 이렇게 되기도 해요. 어찌 보면 내가 꼭 부처가 된 것 같은 그런 느낌이 탁 들어요. 그런데 지는 깨달았어요? 여기에서 착각을 해버리는 거라.

오염되는 순간에 본인은 뭐라고 생각했냐면 ‘어, 내가 뭔가에 이르렀나’ 하고 착각을 해버리게 되는 거죠. 이게 무서운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걸 「장애」라고 얘기를 하시는 겁니다. 빛 자체가 장애가 아니라 빛으로 인해서 변질되어 나가는 과정이 장애를 만들어 버리는 거라.

 

만약에 수행하다 이 일어났다. 그럼 여러분들은 어떡할래요? 음?

아까 도비도의 가장 기본적인 것이 세 가지라고 했죠. 노력, 사띠, 사마디.

사마디는 고요하고 평화롭죠. 그 빛으로 인해서 고요하고 평화롭습니까?

사띠를 하고 있는 게 빛을 사띠하고 있는 거라, 아니면 내가 기쁨을 사띠하고 있는 거라?

그러면 지금 노력하고 있는 게 바른 대상을 가지고 노력하고 있는 거라?

그래서 빛이 탁 일어나면 먼저 이걸 세 가지를 딱 적용을 해보라는 거라.

 

이게 맞는 거냐는 거라. 안 맞다 할 것 같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아라한이 된 것 같다’ 순 거짓말이라는 거라. 그렇게 자기가 스스로 이걸 가지고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된다는 거라. 그런데 수행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일어납니다. 일어나는데 지금 조금 전에 스님이 얘기했듯이 이 부분을 반드시 자기가 생각해 가지고 여기로부터 빠져나가야만이 이제는 그다음에는 고속도로를 달릴 수가 있는 거라. 딴짓을 안 하게 되느 거라.

‘빛 그거 일어나봐야 내 수행 과정에서 아무 영양가 없는 거다’ 하는 것으로 딱 판정이 되고 나면 안 바랍니다. 일어났으면 뭐 할 건데? 내가 빛에 확 싸여 있는 거, 다른 사람 알아요? 지 혼자서 빛에 싸여 있는 겁니다.

 

그다음에 '지혜(智慧 ñāṇa)' 부분.

여기에는 지혜라고 해놨는데 지혜는 있어야 되죠? '냐나'는. 그런데 왜 이걸 장애라고 했을까? 지혜는 개발돼야 됩니다. 지혜만 있으면 되는데 지혜가 일어나면 이놈들이 생각하는 게 뭐냐면 ‘어, 내가 뭐가 됐다’고 생각하는 거라.

특히 이제 이 단계에서 ‘어, 내가 다시는 사악처에 떨어지지 않겠구나’ 하고 확신을 해버리는 거라. 사악처에는 떨어지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계속 사띠만 할 것 같으면. 이 단계 안 들어가도 가능한 거고, 앞에 단계에 의심을 없애는 부분에만 들어가도 그게 가능한 상태라. 꼭 도비도까지 안 가도.

그런데 지혜가 일어나면은 보통은 보면 ‘내가 인제 수다원에 이르렀다. 그래서 다시는 악처에 떨어지지 않는다.’ 하고 판단들을 합니다. 그래서 이게 오염되는 부분이라는 겁니다.

 

지혜 부분, 지금 몇 개 지혜의 부분을 거쳤죠?

몸과 마음을 관찰하다가 몸과 마음이 분리되는 것들을 알게 되는 것도 지혜 부분에 들어가고, 그리고 몸의 현상이든 마음의 현상이든 그것은 원인 결과가 있다는 것들도 분명하게 알게 되고, 그리고 그것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관찰하다 보니까 이게 몸과 마음이 무상·고·무아의 성품으로 전개된다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게 되고, 그것도 다 지혜 부분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만약에 탁 멈추면 어떻게 될까? 그다음에는 어디부터 다시 수행을 해야 될까? 다시 1단계부터 해야 됩니다. 다시 1단계부터 해야 됩니다. 다시, 쉽게 말하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 이거는 육체적인 현상이고 요거는 정신적인 현상이고 부터 다시 시작을 해야 되는 거라.

 

지금 조그마한 지혜가 있다 해가지고 여기서 만족하고 ‘아, 내가 아라한이다’ 하고 머물러 버리면 그다음 지혜로 못 넘어가지는 거라. 이게 빠르게 대상이 소멸하는 현상들이 보여지는 상태가 돼야만이, 그래서 뭐든지 대상을 보면 그냥 소멸되는 것만 보이는 상태가 돼야만이 그 밑으로 떨어지지 않게 되는데, 고마 여기서 어느 정도 지혜가 일어나서 마음은 청정해져 있는 것 같거든. 그러니까 여기서 그냥 머물러 버리는 거라.

그러고 나서 수행을 여러분들이 평생 수행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안 합니다. 그다음은 털털 털고 또 일어나버립니다. 그러면 다시 또 수행하려고 하면 또 처음부터 해야되는 거라. 참 비능률적으로 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처음에 할 때 지금 설명하는 부분하고 다음 달에 설명할 부분까지는 적어도 가야만이 그다음부터는 떨어지지 않고 그것부터 그냥 다시 나가면 되는 거라. 어쨌든 지금은 이 단계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떨어질 수밖에 없는 거라. 그러면 그 지혜는 그냥 이제 막 생기기 시작한 지혜다 하고 생각하고 버려버려야 되는 것이지, 그걸 집착할 만한 것들은 아니다 하는 거라. 그런데 무슨 수다원은 무슨 수다원? 그렇게 착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다음에 '삐띠(pīti)' '기쁨' 부분.

아까 그 도비도 부분에서 세 가지 자꾸 견주어보라고 그랬죠. 노력하는 힘이 있는지, 사띠하고 있는지, 찰나적인 사마디가 있는지.

그런데 삐띠가 일어났다. 그러면 이 세 가지는 서로 보완적인 역할을 합니다. 쉽게 말하면 열심히 노력하려고 할 것 같으면 뭘 가지고 노력하려고 하겠어요? 대상에 마음을 기울이려고 합니다. 그럼 사띠도 일어나게끔 됩니다. 그럼 사띠하고 위리야하고 있을 것 같으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자꾸 알아차리기 때문에 찰나적으로 자꾸 마음은 고요해지게 됩니다. 사마디도 있게끔 됩니다.

 

이게 서로 보완적인 관계고, 사마디가 또 강해지면 사띠도 더 강해지게 되고 노력하는 힘들도 다른 데로 안 벗어나고 거기에 계속 머물러 있게끔 되게 되면 위리야도 더 강해지고, 서로 보완적인 관계에 있게 되는데,

이렇게 되어 있다가 삐띠가 탁 일어났다. 그럼 이게 균형이 무너지는 거라.

삐띠가 일어나면 어떤 게 사라지겠어요? 가장 먼저 사마디가 사라집니다. 사마디가 사라집니다.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에서 대상을 봐야 되는데, 삐띠에 머물려고 하기 때문에 사마디로 빠져들게 됩니다. 조금 전에 얘기한 사마디는 그냥 찰나적인 사마디인데, 이게 찰나적인 사마디가 아니고 본삼매 쪽으로 가려고 하는 마음이 생겨버립니다.

 

만약에 위빳사나 수행 안 하고 사마타 수행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냥 삐띠 보면 됩니다. 삐띠를 보면 삐띠가 점점 강해지고, 삐띠에 머물기도 하고, 아까 빛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오롯하게 청정하게 되고 기쁨도 오롯하게 청정하게 되는 상태가 되면 내가 삼매에 탁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위빳사나 수행에서 이 세 가지의 균형을 맞추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일선정과 다름없는 선정을 위빳사나 수행에서도 가능하기 때문에 이 세 개의 균형을 맞추라고 하는 겁니다.

 

도비도지견청정은 사마타 수행에서 일선정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게 위빳사나 수행할 경우에는 1선정과 마찬가지의 상태가 되도록 계속적으로 지속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관건이거든. 그럴려면은 사마디가 1선정 이상으로 넘어가지지 않도록 만들어야 되는 거고, 그리고 노력하는 힘들도 떨어지지 않게끔 해야 됩니다. 사띠는 분명히 있어요. 사띠는 존재를 하는데 이 두 가지가 약해져 버리는 거라. 그래서 삐띠가 일어났을 때는 삐띠가 계속적으로 변한다 할 것 같으면 이 두 가지가 균형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럴 때는 바로 '기쁨'에서 나와야 됩니다.

 

‘이것은 내가 도와 과에 이르는데 오히려 장애다’ 하고 판단을 하고 나와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아까 빛하고는 다르게 기쁨의 현상은 굉장히 많이 일어납니다. 진짜 굉장히 많이 일어납니다. 나중에는 일어나다가 일어나다가 몸 자체가 완전히 그냥 없어지는 것처럼 그냥 돼버리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걸 내가 미리 잡지 못하면 사마타 수행을 할 수밖에 없고, 그렇지 않으면 수행은 계속 이 상태에서 정체를 하게끔 됩니다. 그래서 균형을 탁 세 가지 균형을 잡음과 동시에 기쁨이 싹 감소하는 게 보입니다. 그렇게 좋은 기쁨이 자꾸 일어나던 게 착 사그라듭니다. 그럼 그냥 기쁨 하나만 존재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 다시 호흡이면 호흡, 본래 대상으로 돌아와도 전혀 무리가 없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빨리 기쁨은 거기서부터 탈출하는 법들을 익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경안(輕安, passaddhi)'이라고 하는 '빳삿디'

이건 기쁨하고 비슷한데, 칠각지에 경안각지라고 있습니다. 칠각지의 경안각지는 어떤 거죠? 몸도 마음도 굉장히 가볍고 편안한 상태가 되어 있는 것들이라는 뜻입니다. 어쨌든 위빳사나에서. 경안은 그래서 대상을 보더라도 편안하게 대상을 갖다 관찰하게 됩니다. 편안하게 관찰하더라도 무상·고·무아의 성품은 어느 것 하나로, 하나는 보입니다. 그런데 착각을 하면 안 되는 게 그 대상을 보는데 세 개가 다 보이는 수는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든 하나만 보입니다. 어떨 때는 이게 보이고, 어떨 때는 이게 보이고, 이게 보이고 하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하나의 특성들만 보이게 됩니다. 무상한 성품이 보이더라도 무상으로 인해가지고 두려움이 안 일어나지고 마음은 오히려 고요하고 평안한 상태입니다. 그게 빳삿디의 좋은 상태인데 여기서는 그런 상태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가벼워지고 편안해지면 어떻게 될까? 대상 자체가 날아가 버립니다. 내가 있어야만 내 호흡이든 내 오온이든 그것으로 인해서 관찰을 해야 되는데, 내 자체가 없어져 버립니다. 내 자체가 없으면 대상이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면 마음은 그냥 가볍다는 데에만 그냥 가 있어버리게 되는 거라. 그게 그래서 이게 장애라는 거라. 빳삿디는 틀림없이 좋은데 이게 빳삿디로 인해서 대상, 수행 대상이 계속적으로 일어나야 되는데 대상 자체가 사라져버리는 거라.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상태를 경험할 때 그런 것들을 얘기 많이 합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그냥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게 빳삿디 장애가 일어난 상태입니다. 지가 없는데 뭘 어떻게 수행할 거라? 그런데 자기가 사라진 것처럼 알아도 그 사라지는 것을 안 것은 뭡니까? 자기의 마음입니다. 자기 마음은 사라지지 않은 겁니다. 그런데 본인은 알고 있기를 마음조차도 사라진 것처럼 착각을 해버리는 거라.

그럼 빨리 마음이 사라진 것들을 찾아서 다시 대상으로 돌아와 버려야만 빳삿디가 안정화되어 버리는 거라. 가벼운 상태에서 그리고 경쾌한 상태에서, 몸과 마음이 경쾌한 상태에서 어떤 장애도 없이 어떤 망상도 없이 그냥 대상을 알아차리는 상태가 되도록 빳삿디의 상태로 다시 또 돌아올 수가 있는 거라. 그게 이제 경안이라는 거고.

 

뒤에 '안락(, sukha)'이라고 하는 것.

이것도 이제 그 앞에 빳삿디하고 비슷하긴 한데 차이가 뭐냐면 아까는 빳삿디에 장애가 될 때는 나라고 하는 것이 탁 사라져버리게 되는데, 이 '수카'라고 하는 것이 장애가 될 정도의 상태가 될 것 같으면 그냥 행복하고 할 것 같으면 좋은데 행복하다는 것은 평안하다는 거라. 평온하다는 거거든.

어떤 외부적인 대상이든 몸 안에 있는 대상이든 대상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평온한 상태가 유지돼 나가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이게 강해져 버리면 그냥 안락해져 버리는 거라.

 

쉽게 말하면 소파에 기대면 그냥 기대면 편안하고 좋다고 해야 되는데 고인 게 그냥 뒤로 기대버리는 거라. 그냥 안락함에 폭 떨어져 버리는 상태가 이게 장애가 되는 상태가 되는 거라. 그런데 조금 전에 편안하다는 거하고 안락하다는 것의 편안한 거는 차이가 나버리거든. 더 좋아. 쉽게 말하면 마음이 그쪽으로 더 끌리기가 쉽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빨리 거기서부터 빠져나와서 편안하고 평온하다는 상태를 유지시켜줘야 된다는 거라.

 

그때 떠올릴 수 있는 게 이렇게 평온하고 평안하더라도 ‘내가 지금 윤회로부터 벗어났는가?’, ‘도와 과에 이르렀는가?’ 하는 걸 자꾸 떠올려야 됩니다.

10가지 장애는 '지금 내가 도와 과에 이르렀느냐'라는 걸 자꾸 확인하는 것으로 인해서 빨리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 얘기했던 이 위리야, 사띠, 사마디 상태가 균형이 맞아지는 것만 확인을 해도 충분히 또 가능해지는 거라.

그게 이제 수카라고 합니다. 지금 해탈한 게 아니다 하는 거라. 특히 여기서 많이 사람들이 헷갈리는 게 뭐라고 해야 될까? ‘더 이상 나는 괴로움을 받지 않는다’ 하고 마음을 먹게 됩니다. 사실은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다음에 '아디목카adhimokkha'라고 하는 '확신(確信)'.

확신이라고 해놨는데 이거는 사실은 사띠가 너무 지나친 것들을 얘기를 합니다.

수행을 자꾸 해보다 보면은 '삿다saddhā'라고 하는 확신은 듭니다. 이게 아디목카가 아니고. 어떤 확신이 들까? ‘아, 내가 계속 이 길을 가도 되겠다’하는 확신들, ‘부처님 가르침이 틀리지 않구나’하는 확신들, 그걸 가르치는 스님들에 대해서도 신뢰하게 되고, 자꾸 들으면 들을수록 더 내 수행에 도움이 되고, 나는 점점 좋은 상태에 빠진다 하는 걸 알게 되는 그런 것들은 삿다에 해당이 되는데, 이 아디목카라는 것은 확신이 너무 지나쳐버리면 아디목카에 떨어져 버려요.

그런데 여기서의 삿다라고 하는 것은 그것에 대해서 흔들림이 없는 상태가 된 것을 갖다가 얘기하기 때문에 용어는 믿음보다는 확신이라고 하는 것이 조금 더 낫겠죠. 그런데 그건 개인이 나는 믿음을 하겠다 할 것 같으면 쓰면 되는 것이고.

 

(수행자 질문 : 그러면 오력에서 그러면은 아디목카로 생각하는 게 낫겠습니까? 삿다로 생각하는 게 낫겠습니까? 오력에서 오력이 굉장히 중요하지 않습니까?)

오력에서는 삿다! 우리 오력에서는 삿다! 믿음 부분이죠. 아디목카는 이거는 쉽게 말하면 삿다가 변질돼버린 상태입니다. 변질돼서 지나친 상태, 쉽게 말하면 예를 들어서 테라와다가 좋다는 걸 알았거든. 그러면 아디목카로 삿다가 되면 테라와다 좋으면 ‘아이고, 나는 그냥 우리 스님 존경하면서 살면 되네’ 그리고 부처님·법 존경하면서 살면 되는데, 이게 지나쳐버리면 “니는 틀렸어” 하는 거라. “대승불교 니는 틀렸어.”

왜 그래야 되는데? 이게 틀린지 안 틀린지 지가 해보지도 않고 틀렸다고 해. 이게 쉽게 말하면 삿다하고 아디목카의 차이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지나쳐버리면 안 돼. 사띠 하는 것이 지나쳐버리면 사띠가 너무 강해져 버려도 아디목카로 바뀌어 버립니다. 사띠는 강하면 강할수록 좋은데, 믿음 부분에서의 사띠가 강해져야 되는 것이지, 이게 통제가 안 되는 상태가 될 것 같으면 안 된다는 거라.

쉽게 말하면 조금 전에 얘기한 '견해가 생긴다든지, 나라고 하는 것이 생긴다든지, 생존 욕구가 생긴다든지' 이런 것들이 생겨난 상태에서 사띠(삿다)가 강해져버리면 아디목카로 변질되어 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그럴 때는 그냥 이렇게 보면 됩니다. 내가 어떤 걸 보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존중(존경)하는 마음이 생겨나 있는 건지, 어떤 것도 비난하고 비판하는 마음이 안 일어나는지, 그것들을 보면 보통 판가름이 납니다.

그래서 아무리 내가 맞는 거라고 하더라도 견해를 내세울 자리가 있고 안 내세울 자리가 있는데, ‘그냥 나는 바른 얘기를 한다. 바른 부처님 법을 얘기한다. 바른 율을 얘기한다’ 하면서 그냥 얘기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전혀 신경을 안 쓰는 거죠. 저 사람이 기분이 나쁜지 어떤지. 아무리 마땅하더라도 그거는 삿다가 아니고 아디목카에 들어가 버리는 거라. 그런 것들을 얘기하는 겁니다. 요즘 대표적인 게 이런 게 있죠. '원리주의자' 그게 맞다고 하면 전쟁도 불사하는 상태가 되는 거죠. 여러분들은 거기에 빠져서는 안된다 하는 뜻입니다.

 

그다음에 '책려(策勵, paggaha)' '빡가하'라고 되어 있는 거.

이건 노력이라는 '위리야viriya' 부분입니다. 노력 위리야는 강하면 강할수록 좋기는 합니다. 더 노력하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좋죠.

그래서 수행을 열심히 하려고 하는 건 좋습니다. 그래서 시간만 나면 자꾸 수행하는 시간을 늘리고 하는 건 좋은데 이게 이제 지나쳐버리면 빡가하라고 해서 다른 거 다 팽개쳐버리고 수행만 하려고 하는 거라. 내 자식이나 처자식 너는 너 알아서 해. 엄마는 수행하러 가. 뭐 그거는 좋다 치자. 그거는 할 수 있는 상황이면 그래도 돼. 그런데 할 수 없는 상황이면 어떻게 해야 돼? 내가 도와야 되는 상황인데 나는 내 수행이 좋다고 그렇게 해버리는 거라. 그거는 잘못된 노력의 방향이 돼버리는 거라. 그걸 이제 얘기합니다. 수행하는 시간은 최대한 늘리면 늘릴수록 좋습니다. 본인의 상황에서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는.

 

그다음에 노력하는 것들은 왜 노력합니까? 그냥 노력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건 아니죠? 도와 과를 이루기 위한 겁니다. 노력의 목적이 뭐냐 하는 거라. 노력이 목적이 돼서는 안 돼. 그 노력하는 목적이 주안점이 돼서 그걸 위해서 노력을 한다고 해야 되는 것이지, 이게 뒤바뀌어 버리면 이 노력은 빡가하라는 거라.

 

그다음에 '안주(安住, upaṭṭhāna)'라는 '우빳타나'라고 하는 거.

쉽게 말하면 이것도 사띠 부분인데 사띠가 잘 되는 사람들한테 얘기하는 겁니다.

사띠가 잘 되면 어떻게 될까? 자동화됩니다. 자동화가 됩니다. 뭔 대상을 보면 그냥 사라지는 게 탁 보여. 그런데 오늘 사라지는 게 보이는 속도하고, 내일 보는 속도하고 똑같아. 분명히 무상한 성품을 보기는 보는데 이게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지지 못하고 그냥 계속 그것만 하고 있는 거라. 그걸 이제 '자동화'라고 그럽니다. 이걸 이제 안주하고 있다, 거기에 머물러 있다는 거라. ‘나는 이 정도로 충분해’ 하고 있다는 거라. 그럼 탁 죽을 때 돼봐야 ‘아, 이게 아니구나’ 알게 되겠지.

 

물론 이 상태에서는 탐진치도 안 일어나고 마음은 고요하고 평온하고 좋습니다. 그래서 대상을 보더라도 그냥 있는 그대로 보게 되고 수행만 자꾸 하려고 하는 마음이 자꾸 생기고 하는 건 좋은데, 그런데 그게 다야? 그거 할라고 지금 수행한 거라? 그러면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건 언제 하는데? 내가 아라한이 되는 건 언제 하는데? 수행하는 목적을 자꾸 빼먹어버리고 여기에다 지금 사띠의 수준에 머물러 있어 버리는 겁니다. 사띠가 나쁜 게 아닌데 여기 머물러 버리면 이게 인제 장애가 돼버리는 거라.

 

그다음에 '우뻭카upekkhā' '냉정함()'

냉정함이 참 좋은 건데도 이것도 지나쳐버리면 어떻게 될까? ‘뭐, 그거 변할 건데 뭐’ 안 해. 이렇게 돼버리는 거라. 칠각지나 여러 군데에서 보이는 우뻭카 하고는 틀린 겁니다. 용어는 똑같이 썼지만 여기서의 장애는 냉정한 상태가 있는데, '행하지 않는 냉정함'입니다.

쉽게 말하면 뭐든지 대상을 보면서 그것으로 인해서 냉정함이 유지가 돼나가야 되는데 ‘저것도 변하는 건데 뭐’하고 안 해버리는 거라. 그런데 마음은 냉정한 상태, 평온한 상태가 돼 있어. 그런데 실행하지 않는 상태가 돼버리는 거라. 이걸 갖다가 얘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평온하고 고요한 상태는 개발되어야 되는 것인데, 그것들이 왜 개발되어야 되느냐 하는 걸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대상에 부딪혔을 때 그것들에 대해서 반응하지 않기 위해서! 그런데 그 대상 자체를 피해버리면 그건 아니라는 거라.

그래서 밑에 70페이지 보면 "우뻭카가 강렬하게 되면 기분이 좋습니다." 그래서 만족해버린다는 거라. 그냥 거기서 끝나버린다는 거라.

 

그다음에 열 번째, '미세한 욕구(微欲 nikanti)'

쉽게 말하면 앞에 아홉 개는 전부 이 열 번째가 곁들여진 겁니다. 열 번째가. '그것들을 좋아하는 상태, 미세하게 좋아하는 상태'가 곁들여졌기 때문에 그게 장애가 되는 것이지, 그것 자체로만 보면 참 좋은 거고 개발되어야 되는 겁니다. 미세한 욕구 부분은 반드시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수행은 뭐 하는 거라고 했죠?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됩니다.

그런데 수행하면서 좋아하는 것이 일어나면 어떻게 돼요? 그 부분도 벗어나야 됩니다. 싫어하는 것이 일어나도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야 됩니다. 일단은 그것을 떨어뜨려 놔놓고 시작을 해야 됩니다. 쉽게 말하면 미세한 욕구는 딱 그거라고 보면 됩니다. 좋아하는 것들이 일어나는 것. 좋아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계속 더 오버가 되게 되는 거고, 그렇게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게 이제 10가지 장애입니다.

 

그래서 장애를 탈피할 때는 그렇게 어렵지는 않습니다. 수행은 계속 지속하다 보면은 이거 없어도 수행 열심히 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걸 좋아해버리면 여기서 딱 머물러서 그다음 단계로 못 넘어간다는 겁니다.

그러면 다시 처음부터 해야 돼죠. 이때까지 많이 해왔는데 다시 처음부터 해야 하니까 아깝잖아. 그래서 빨리 여기서부터 벗어나야 되는 거라. 벗어나는 것이 이런 현상이 일어났으면 그것으로부터 빨리 뛰어넘어야 되는 거고, 이러한 현상들을 좋아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되는 거라. 그래서 그걸 도(道)비도(非道)라고 그럽니다.

 

현상들이 일어나는 거 좋아하지 말고, 그거는 비도(非道)입니다. 비도에 빠지지 않도록 하고, 그냥 나는 ‘내가 할 일은 실재하는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사띠하는 것뿐이다’ 하고 마음을 먹고 그냥 사띠를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이해하겠습니까? (네.)

다음 시간에는 이 단계를 뛰어넘었을 때의 상태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질의응답]

(수행자 질문 : 오늘 이 강의를 들으면서 한 2, 3년 전에 스님 거처에 갔었을 때 그때 이제 무슨 말씀을 하셨냐 그러면, 선원에 앉아 있어도 우리 집에 기어가는 작은 개미의 발자국 소리도 다 들을 수 있다. 그런데 그거를 코치가 없어서 그걸 집착하다가 시력과 귀가 장애가 되었다 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것 역시도 같이 통합해서 얘기하면 어떠한 현상이 내 앞에 일어나더라도 거기에 집착하는 마음을 가지면 안 되는데 집착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났다고 이해하면 됩니까?)

 

스님 답변 : 나를 뭐라 하는 거죠? 비슷하긴 합니다.

그런데 이제 신통이라는 얘기 들어봤어요? 옛날에 스님이 신통 잘 부렸습니다. 진짜 태국에 있으면서 누가 하는 소리 다 들었습니다. 한국에서 하는 얘기를 다 들었어요. 거기에 마음을 맞추면. 그런데 전화가 오면은 “니 그날 뭐 무슨 무슨 무슨 무슨 얘기하고 뭘 뭘 했지?” 깜짝 놀랍니다. 그것뿐 아니라 아까 조금 전에 얘기했던 개미 기어가는 소리, 개미가 어떤 발을 움직여가지고 어떤 소리를 내는 것까지 다 들립니다. 그 정도로 미세한 상태가 됩니다.

그런데 이제 이게 미세한 상태가 되는 건 좋은데 그마만큼 쉽게 말하면 마음이 아주 예리하고 날카로워져 있다는 얘기거든. 그런데 이게 잘못 사용을 하면 거기에 조금이라도 내가 요것들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탁 든다든지, 아니면 요것들을 조금 더 개발하려고 마음이 탁 든다든지 할 것 같으면 이게 이제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거라.

 

그러면 기어가는 소리가 여러분들은 아예 안 들리는 소리인데도 나에게는 천둥 치는 소리같이 그냥 이걸 부수는 소리같이 들려요. 실제로는 그리 안 들리는데 그렇게 고막에서 들려요. 그러니까 보는 것들을 뭔가를 탁 봤을 때 저 사람에 대해서 그냥 보인다 하고만 알아차리면 되는데, 저 사람이 뭔 생각하고 있는 게 탁 보여. 눈으로 딱 느껴진다고. 그러면 뭐 생각하고 뭘 하고 있는지를 보려고 하는 마음이 강해지면 이게 장애가 돼버리는 거라. 그냥 보이면 보인다고 알아차리고 그게 거기서 무슨 마음이 일어나는지를 보면 그냥 보고 그냥 놔줘버려야 되는데 안 놔줘버리는 거라. 그걸 그걸 계속하면 그게 장애가 돼버리는 거라.

 

그러면 그게 갑자기 그게 탁 사라집니다. 사라지면서 눈앞에 그냥 번갯불이 탁 튀듯이 튀어버리는 거라. 그래서 신통을 좋아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자기 자신을 망치는 경우가 되는 거라. 차라리 그 시간에 내가 조금 더 수행했으면 좀 더 빨리 진척이 있을 건데 그냥 거기에 머물러 있는 거라. 그래서 지금도 스님은 오른쪽 눈하고 오른쪽 귀는 아예 안 보이고 안 들립니다. 그리고 그 장애 때문에 계속 한쪽 눈도 계속 안 좋아지기는 합니다. 그래서 사실은 이 앞에서도 이게 안 보여요. 이걸 캄프라치를 해가지고 안경을 쓰는데도 안 돼요. 이게 한쪽이 완전히 갔을 때는. 귀도 마찬가지로 이쪽 귀도 한쪽으로 듣기는 하더라도 사실은 엄청난 집중을 해야만이 가능한 상태가 되는 거죠.

 

그래서 어찌 보면 부처님은 신통을 자유자재로 부리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거는 본인의 이익을 위해서 한 게 아니거든. 다른 사람들에게 법을 펼치고 전해주기 위해서 신통을 때로는 부리는 거고, 그리고 제자들한테는 “너희들은 하지 마!” 이게 위험한 요소이기 때문에 하지 말라고 그랬거든. 왜? 신통이 있으면 그걸 다른 사람한테는 없는 거기 때문에 나한테 맞는 거로써 쓰려고 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그런 것들이 있을 때는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꼭 그걸 집착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신통으로 인해서 자신이 망가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항상 잊어버려서는 안 돼요.

그래서 하지 마라. 하지 마라. 안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그냥 무시해버리고 그 시간에 다른 것들을 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수행자 질문 : 그러면 결과적으로 그것도 하나의 비도에 해당되는 거라고 보면 됩니까?)

그럼요.

 

(수행자 질문 : 하나 더 여쭙겠습니다. 저희가 지금 칠청정 공부를 하고 있는데, 칠청정에 대해서 가장 잘 해석이 되어 있다라고 하는 것이 위숫디막가 청정도론이고, 또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청정도론을 부동의 준거라, 이 정도로 찬탄을 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제가 청정도론을 다 읽어보고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제가 스님께 여쭙는데 여기에서 붓다고사 스님은 싱할라 본의 게송에서 뭐라고 하셨냐 그러면은,

"이 논을 지어서 쌓은 공덕과 내가 쌓은 모든 공덕으로 다음 생에 욕계의 33천의 행복을 누리고 계행과 덕에 기뻐하며 첫 번째 과에 이른 뒤, 세 개의 족쇄를 끊은 뒤 이런 뜻이겠죠.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의 갈애를 끊고 마지막 생에는 미륵을 뵙고 그 지혜로운 분께서 설하신 정법을 듣고 최상의 과를 얻어 10개의 족쇄를 다 끊고 과를 얻어 성자의 교법을 드날리게 되기를"

이런 발원문 같은 내용을 이 책을 마무리하면서 써놨는데요.)

 

스님 답변 : 그게 물론 싱할라 본에서는 그게 있는데, 태국이나 미얀마 본에서는 그 부분이 없거든요. 그래서 어떤 게 맞는지는 우리는 지금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걸 싱갈라 본 하나만 가지고 실제로 이걸 붓다고사 스님이 했다고 단정 짓는 것도 무리가 있는 거고,

그리고 붓다고사 스님이 청정도론을 썼을 때는 아직 젊을 때입니다. 쉽게 말하면 대사파라고 하는 마하위하라 스님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서 청정도론을 집필을 하려고 한 거고, 그 집필이 맞는지 안 맞는지를 갖다가 대사파 스님들이 하나의 물음으로 인해서 물어봤을 때 그 붓다고사 스님이 그것에 대해서 정확하게 답을 했기 때문에 이 청정도론을 집필하도록 한 거거든요. 쉽게 말하면 이때 당시에 붓다고사 스님은 도와 과에는 이르지를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도와 과에 이르지 못했으니깐 다음 생에서는 천상에 태어나길 바랄 수도 있는 거고, 하게 된 것이기 때문에 그걸, 쉽게 말하면 붓다고사 스님이 그때 당시에 아라한이 된 것처럼 아라한이 이런 소리를 할 수 있나, 아라한이 됐으면 그런 소리를 못 합니다. 그렇게는 오해는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 대신에 청정도론은 일부에 문제가 있는 것들이 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더라도 그 청정도론이라는 것 자체는 지금 현재는 누구든지 다 역작으로서 지금 인정하는 부분이고, 그래서 그 부분은 인정할 것은 인정해줘야 됩니다. 그러니까 그 스님이 도와 과에 이르렀든 안 이르렀든 경전에 대해서는 해박하게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렇게 보는 것이 맞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난다 존자가 수다원에 이르고 나서 아라한이 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1차 결집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나중에는 결국 아라한이 되고 나서 1차 결집에 들어갔는데, 바꿔서 얘기해가지고 수다원에 이르렀을 때 부처님 말씀을 기억하는 것과 아라한에 이르렀을 때 부처님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 다를 것이냐 하는 거라. 그렇게는 보지 않거든요. 그거는 동일하다는 겁니다.

단지 그 결집이라는 의미 자체는 완전하게 성자가 된 분들이 결집했을 때 완벽성이 주어지기 때문에 아라한이 되기를 바라고 아라한이 돼서 결집에 참여했다고 봐야 되는 것이지, 그 아라한 과위의 성취 여부로 인해가지고 쉽게 말하면 아난다 존자가 경을 완전하게 구술을 할 수 있었다 하고 봐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와 마찬가지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수행자 질문 : 마지막으로, 하나 더 말씀드리고 싶은 거는 이제 우리가 수행을 해서 이제 오장애를 끊고 오력의 힘을 통해서 오장애를 끊으면 심·사·희·락·정이라는 초선정에 들어가는데, 욕계에서 초선정에 들어가는 순간 그건 색계이지 않습니까? 색계에 들어갔을 때에 스님께서 처음 느끼신 그런 천상계의 감정이라 그럴까요? 모습이라 그럴까요? 느낌이라 그럴까요? 그런 걸 좀 말씀해 주십시오.)

 

스님 답변 : 그걸 얘기해가지고 알아듣겠어요? 경험에 대한 것들은, 어떤 사람들은 그런 얘기를 합니다. 열반에 대해서 말로써 설명을 해달라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열반은 설명을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열반을 설명하는 순간에 이미 열반이 아니게 돼버립니다.

그런데 초선정에 들어가 보지 않은 사람한테 초선정에 대해서 얘기를 한다? 이론적으로는 이런 상태에 있다 하고 얘기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천상 세계하고 자꾸 결부시키지는 말아라는 거라. 초선정은 꼭 사마타 수행이 아니라도 위빳사나 수행에서도 가능하기 때문에 지금 현재 존재 내에서 욕계내에서도 초선정에 들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면 초선정에 꼭 들어야만 초선정에 들어야만이 천상 세계를 볼 수 있느냐 하면 그거는 아니라는 거라. 그거는 별개의 부분이라는 거라.

 

(수행자 : 그러면 질문이 잘못된 거네요.)

잘못된 거죠. 그래서 현실 세계에서 얼마든지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서 거기에 마음의 동요함이 없는 상태에서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있을 것 같으면 초선정과 마찬가지라는 거라.

 

(수행자 질문 : 제가 아까 말씀 중에 저는 테라와다 불교 공부를 좀 열심히 교학을 안 해서 용어를 잘 모르기 때문에 그냥 제 나름대로 저의 표현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찰나 찰나 생각들이 굉장히 많이 일어나는데 어떤 때는 그런 찰나의 생각들이 현실로 이어져 발현되기도 하고 이루어지기도 해서 가끔 두렵기도 한 적도 있어서,

예를 들면 어떤 생각을 하면 부정, 그런데 제가 또 하는 생각도 보면 부정적인 그런 것들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실제 벌어진 거에서 ‘저거 저렇게 되면 어떻게 되지’ 하면, 또 이렇게 해서 부정적인 것이 현실화 될까 봐 걱정하는 마음 때문에 그걸 알아차림 하면서 조절을 하고 있는데, 그런 찰나 생각들이 많이 일어나는데 이게 지금 잘 수행이 돼서 이런 건지, 어떻게 잘 못합니다.)

 

스님 답변 : 전혀 반대 방향입니다. 이렇게 봅시다. 긍정적인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게 편하겠어요? 부정적인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게 편하겠어요?

(수행자 : 평소에는 긍정적인 데요, 어떤 현상을 봤을 때 어떠한 것이든 마음이 그런 마음이 탁 올라오려고 해서요.)

그러니까 그거는 잠재되어 있는 부정적인 성향들이 드러난 거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든지 긍정적인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것이 자신에도 이롭고 다른 사람들에도 이롭고 행복하게끔 만들어주는 겁니다. 그래서 그거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겁니다. 이게 전제조건인 거고, 그래서 긍정적인 마음을 평소에 자꾸 가지도록 만들어줄 수 있는 게 뭔가 하는 것들은 그다음 문제고,

 

그러면 긍정적인 마음이 평상시에 많은데 왜 그러면 부정적인 게 가끔씩 툭툭 튀어나오느냐? 그거는 뭐라고 딱 꼬집어서 얘기하지는 못합니다. 과거의 인연이든 아니면 지금 내가 잠재되는 성향 자체가 부정적인 것이 있는 것이, 인과라고 그러죠. 여러 가지 조건이 맞아떨어지면 그게 탁 일어나지는 거거든. 그래서 그 조건은 그때 그때마다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단정하지는 못합니다. 어쨌든 부정적인 성향들이 뭔가가 밑에 잠재되어 있는 것들이 조건들이 맞아서 탁 일어난다는 얘기거든.

 

그래서 스님들이 가끔 그런 얘기를 합니다. "수행 안 해도 좋다. 수행 안 해도 좋은데 선한 마음을 자꾸 지녀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게 뭐냐면 선한 마음을 지녀가지고는 어쨌든 선한 결과들이 있을 가능성이 크지, 악한 결과들이 있을 가능성이 커지진 않거든. 그래서 선한 마음을 자꾸 지니도록 훈련하는 것이 오히려 맞는 것이지, 지금 내가 그게 다른 사람한테 영향을 안 미쳤다 해가지고, 부정적인 마음들이 탁 일어난다, 그것들이 잘 됐다고 얘기하지는 못한다는 거라.

 

차라리 그래서 그렇게 되기 위해서 선한 마음을 자꾸 지니기 위해서 해야 되는 것들이 보통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예비수행단계'라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게 가장 대표적인 게 '멧따바와나 - 자애의 마음을 지니는 것'. 그래서 자애의 마음을 자꾸 지니도록 하고, 자애의 마음이 자꾸 밖으로 표출되는 훈련들을 자꾸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아예 바라고 행동하는 것들을 하지 말라는 거라. 그리해도 자애의 마음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들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다음에 자기 성향에 따라서 '나도 언젠가는 죽을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내가 이런 생각을 일으킬 여유가 어디 있어? ‘빨리 수행해야지’ 하는 마음이 일어날 것 같으면 부정적인 생각을 줄이고 차라리 그 시간에 수행을 하게끔 하라는 거라. '나는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 '죽음이 내 앞에 있다'는 생각을 자꾸 일으키도록 하라고 하는 거라.

그리고 쉽게 말하면 '부처님에 대해서 자꾸 떠올리는 것' 그거는 부처님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믿음이 강해졌을 때 가능한 것들이라.

 

그래서 대부분 보면 이 두 가지들을 가지고 부정적인 성향들이나 부정적인 생각들을 잠재우게끔 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생각하고 사고하는 것들이 안 일어나게끔 하는 게 가장 좋은 건데, 지금 당장 그게 안 될 것 같으면 그것을 다른 선한 생각들로 대체하라는 거라.

그게 이제 '멧따바와나metta-bhāvanā'하고 '아수바바와나asubha-bhāvanā'라고 하는 그런 방법들을 동원하는 것이 맞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위험성은 본인이 스스로 알고 있어야 됩니다. 그게 어떠한 경우든지 부정적인 마음이 자꾸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수행자 : 부정적인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걱정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일하게 걱정하는 마음도 탐진치의 영역에 속하는 거거든. 그래서 그것이 일어난다 해가지고 문제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쨌든 부정적인 성향들이 자꾸 일어난다는 것은 오히려 좋은 방법은 아니라는 거라.

예를 들어봅시다. 다른 사람을 걱정하고 있다. 저 사람이 만약에 안 좋은 일이 일어났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돼요? 예를 들어서 그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불교에서는 저 사람이 안 좋은 일이 일어났으면 같이 슬퍼해 주라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저 사람의 슬픔을 빨리 제거해 주라고 하거든요. 그게 불교적이라는 거라.

그걸 스님은 얘기를 하는 거라. 그러니까 내가 그 슬픔에 빠져 있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그 사람의 슬픔을 빼내줄 수가 없다는 거라. 그게 기본적인 원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자신에 대한 것이든 다른 사람에 대한 것이든 부정적인 생각이 일어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거는 빨리 내가 그러한 성향들을 바꿔야 되는 것이지, 그것들이 지속되도록 놔둬야 되는 부분은 아니라는 거라. 지금 현재는 그것에 대해서 파고들면 들수록 부정적인 성향이 더 강해져요. 차라리 그것은 무시를 해버리고 그 시간에 그냥 사띠를 하라는 거라. 그게 맞는 방법이지,

 

수행에서의 두 가지 포인트가 있거든요. 내가 그 대상을 이길 수 있는 상태인가? 그렇지 못한가? 이기지 못하는 상황일 것 같으면 그것은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길 수 있는 상황이 될 때는 그것이 대상이 되면 그 대상이 팍 사라져야 돼요. 그러면 내가 그 대상이 맞는 대상인데, 팍 사라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만약에 그런 생각이 일어난다, 그건 아직 내가 이기지 못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건 대상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거라. 그렇게 판단을 하면 됩니다.

그럴 때는 그 대상을 놔줘버리고 차라리 선한 마음을 대상으로 한다든지 사띠의 대상을 찾아야 하는 거라. 그게 바른 방법입니다. 그래서 그걸 뿌리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조건이 맞을 때 찾아라. 그런데 그렇지 않을 때는 그걸 무시를 하는 것이 맞습니다. 성향은 내가 쌓인 습관에 따라서 성향은 드러나지게 됩니다. 그것만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