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D2QfpXrdvmI?si=dPrw6fwAves2qmrn
저번 달부터는 매주 법회가 있고 해가지고 바쁘다. 다음 주에는 주중에 또 스님이 김천에 좀 갔다 와야 돼요.
스리랑카에서 공부했던 스님인데, 거기에 조그맣게 이제 거주처를 마련해 놨다고, 한국 스님이 한국 승복 입고 있으니까 한국식으로 살겠지 뭐. 테라와다식으로 살지는 않을 거고, 그래도 뭐 어쨌든 가서 들여다는 봐야 안 되겠어. 한번 오시라 해싸니까 가서 뭐 또 도와줄 게 있는지도 보고, 또 그 스님의 친한 스님이 지호 스님이라고 태종사에서 인연됐던 사제 스님인데, 지금 티벳 다람살라에 가서 공부하고 있대요. 처음엔 초기불교 막 공부해쌌더니, 언제 샛길로 새었는지 옆길로 새었어. 자기 나름대로 공부 열심히 한다 하니까 그 스님 소식도 좀 듣고 그렇게 하려고, 갔다 오려고 그럽니다.
이번 주는 "라가(rāga)라고 하는 욕망은 경계해야 된다"하는 부분으로 얘기를 하겠습니다.
요즘에 전화가 나이 든 사람보다도 젊은 사람한테 전화가 더 많이 와요. 그게 요즘 한국에 있는 불교 추세인지는 모르겠는데, 젊은 사람들이 명상에 대해서 되게 관심을 많이 가져요.
그리고 수행 문답을 이렇게 해보면 하나를 가르치면 금방 하나를 알아들어요. 나이 든 사람들은 10개를 가르치면 겨우 하나 할 정도, 되게 더뎌. 그래서 확실히 젊었을 때 힘이 있을 때 놀기도 잘 놀지만은 그걸 공부하는 쪽으로 돌려버리면 공부도 열심히 하는구나 하는 걸 이해를 하게 됩니다.
달이 보름달일 때 그걸 봤을 때 가슴에서 느껴지는 거 하고, 초승달이나 그믐달일 때 그걸 봤을 때 가슴에 느껴지는 거, 차이 나는 거 알아요?
훨씬 보름이 더, 보름 전후로 했을 때가 마음이 많이 들뜹니다. 그래서 젊은 애들은 그런 계절적인 요인으로 인해서도 사고를 많이 칠 때가 있어요. 그래서 스님 입장에서는 그런 분들을 되도록이면 바르게 인도해 주는 게 의무긴 한데, 지가 안 하면 또 할 수 없는 거고, 그렇습니다.
여기에 라가(rāga)라고 하는 게 나옵니다.
라가를 경계하고 그걸 버리고 끊어버릴 대상으로 봐왔는데, 그걸 하기 위해서는 부처님은 부정관(不淨觀)을 라훌라에게 추천했습니다. 물론 부정관도 좋은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중요한 거는, "수행 대상을 바르게 알아차리는 것" 그게 훨씬 중요한 부분입니다.
오늘 점심 때 맛있는 반찬에 맛있는 식사 나올 거 아니라. 탁 그거 보면 ‘먹고 싶다’ 하는 욕망이 착 일어나죠. 그러면 먹고 싶다는 욕망은 어디서 원인이 된 거라? 맛있는 음식에서 원인이 된 거라? 맛있는 음식이 없었으면 그 욕망은 안 일어났을 거 아니라. 근데 이렇게 사람들이 착각을 합니다. '외부적인 대상으로 인해서 욕망이 일어났다' 하고, '니가 나에게 칭찬하는 말을 했기 때문에 나는 기분이 좋아'
이번에 서울 갔을 때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스님 얼굴 보고 있으면 너무 맑고 좋아가지고, 그냥 부처님 보듯이 그냥 기분이 그냥 엄청 좋다’는 거라. 그게 계속 일주일 간대요. 그래서 속으로는 ‘기쁨이 일어나는 건 좋기는 하긴 하는데, 그게 외부적인 요인으로 작용을 하는 게 저 사람은 제대로 잘 알고 있는 건가?’ 하는 그런 의구심은 들기는 해요.
물론 법이나 부처님이나 청정한 상가들은 그런 신심을 일으키는 대상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서 신심이 일어나는 것은 충분히 좋은 일인데, 그 기쁨이 그냥 거기서 끝나버리면 좋은데 대부분 보면 집착을 합니다. 맛있는 거 있으면 더 먹고 싶어 하지, 탁 그만두지는 않는다는 거라. 누가 칭찬할 것 같으면 “그래 그래. 더 해. 더 해.”하지, 그냥 “그만해” 하고 하지는 않는다는 거라. 그게 인제 문제가 됩니다.
욕망은 반드시 집착을 낳는데, 그 욕망의 원인은 아까 스님이 얘기했죠. 외부적인 대상이 아니라고 했죠. 그럼 뭐가 원인일까? 외부적인 대상이 아니면? 느낌! 접촉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느낌.
내가 그걸 맛본 거는 접촉으로 인해서 ‘맛있다’ 하는 좋은 느낌이 탁 일어나거든. 그게 원인이 되는 거라. 그것으로 인해서 욕망이 일어나는 거고, 집착이 일어나는 거고.
그래서 욕망이 안 일어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그 느낌을 잘 관찰해서 느낌에서 그냥 그치면 돼. 느낌 안 일어나게 할 방법은 없어.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래서 간단합니다. 간단한 건데, 그게 그렇게 쉽게 잘 안되죠.
말로는 그럽니다. ‘나라고 하는 것이 없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대부분 그런 느낌이 있으면 그 소유주는 누구라? 지(자기)라고 생각합니다. 느낌의 소유주라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에 그 느낌이 항상 욕망이나 집착으로 넘어가 버리는 겁니다. 근데 그거 소유할 수 있는 거라? 지 거라고 소유할 수 있는 게 있어요?
자기 자식도 지 게 아니고, 자기 재산도 지 게 아니고, 마찬가지로 자기의 몸과 마음도 자기 게 아닌데,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건데. 왜 그러냐면 변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나에게서 떠나가고 사라지게 돼 있는 거고, 없어지게 돼 있는 건데, 사람들은 그걸 느낌을 그 소유주라고 자꾸 착각을 해버리는 거라.
그것으로 인해서 욕망이 일어나고 또는 싫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벗어나려고 하는 혐오가 일어나고, 계속 그렇게 발전하고 있는데도, 그걸 자기 것인 양 착각을 한다는 거라. 착각하지 말아라는 거라. 지 게 어디 있다고, 자기가 소유주인 것처럼 행세를 하느냐는 거라.
그거는 여러분들이 경계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처음에 서두에 얘기했을 때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수행해야 됩니다. 지금이 여러분들 인생에서 가장 젊을 때잖아.
저 뒤에 젊은이! 젊은이 삼총사 저기 있네. 눈 딱 감고 있지 말고, 공부해요. 공부! 지금 아니면 공부할 시기가 언제 있다고. 왜 젊었을 때 공부가 잘 되느냐면 에너지가 있기 때문에, 힘이 있기 때문에 그 힘을 수행쪽으로만 착 전환만 시키면 수행이 참 잘 돼요.
그런데 젊은 게 또 그런 좋은 부분도 있지만, 나쁜 게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거든 그 에너지들이. 요기 갔다가 저기 갔다가, 이것도 했다가 저것도 했다가. 물론 좋은 것도 하는 것도 있겠지만, 또 나쁜 것도 하기도 하고, 또 거기 계속 있지도 않고 계속 또 또 다닙니다. 그것만 잘 제어를 하면 됩니다.
그런데 어쨌든 젊었을 때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인생에서 가장 젊었을 때 수행해야 된다는 생각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출가한 스님들은 언제가 가장 젊었을까? 출가한 그때가 최고 젊은 거라. 그때부터 출가자들에게는 딱 정해진 규칙이 있습니다. 이 가사 외에는 못 입어. 그리고 탁발해 온 음식은 어떤 경우든지 큰 바리때에다가, 아니면 큰 발우 같은 데다가, 볼(bowl) 같은 데다가 다 섞어 가지고 비벼 먹게끔 합니다. 절대 따로따로 못 먹게 해요. 그런데 아직도 테라와다 스님들은 한국에서는 보면 싫어합니다. 그걸, 맛이 없다고. 그래서 따로따로 이렇게 먹으려고 자꾸 합니다. 그러면 안 돼요.
출가한 스님들은 그거는 의무적으로 정해져 있어요. 무조건 비벼 먹어야 돼. 요게 고기다, 요게 야채다, 이게 햄이다, 이런 분별심을 일으키지도 말고, 또 그것으로 인해서 그 맛 고유한 맛들을 느껴가지고 이게 맛있다, 아 이건 맛없다, 하는 느낌도 일으키지 말아라는 거라. 그 바리때에다 비벼 먹으면, 무슨 맛인지 어느 맛인지 잘 모릅니다. 물론 짭고 맵고 하는 것은 알겠지만, 그 고유한 맛을 알기는 참 힘듭니다. 그럼 그냥 먹는 거라. 어떨 때는 어쩔 수 없이 먹는다는 생각으로 먹게 돼요.
왜 먹을까? 출가한 스님들은, 공양을 왜 해? 그날 하루를 버티기 위한 거라. 그날 하루를 버텨서 수행하기 위한 도구로서 공양을 하는 것이지, 그걸 뭐 내가 맛있는 거 먹고, 또 그렇게 잘 먹음으로 인해서 얼굴이 번지르르 하게 되기 위해서 먹는 건 아니라는 거라. 그걸 출가한 스님들에게는 의무적으로 그걸 하게끔 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출가를 했으면 바리때에다 그렇게 다 비벼 먹어요.
그런데 “스님, 왜 자꾸 그렇게 드십니까?” 하고 그렇게 물어보면, 입버릇처럼 스님이 그렇게 말합니다. “그게 최고 맛있어.” 맛있기는 그게 맛있겠어? 따로따로 먹는 게 훨씬 맛있지.
그런데 출가한 스님들은 그런 좋고 싫은 느낌들을 일으키지 말아야 되기 때문에, 그걸 위한 도구로서 비벼 먹어라는 거라. 재가자들은 그리할 필요가 없겠죠. 그런데 수행을 하려고 할 것 같으면, 사소한 것 이런 먹는 거 하나에도 좋고 싫음을 일으킬 수 있는 도구들을 스스로 만들어주지 말아라는 거라.
그거 별 차이 없잖아. 따로따로 하나씩 먹든지 아니면 비벼가지고 그냥 먹든지, 몸 속에 들어가가지고 그게 영양분이 되고 그날 하루를 살 힘을 주고 하는 거는 똑같은 거잖아.
그래서 그런 것들을 잘 계율적으로 출가한 스님들은 방호를 합니다. 여러분들도 재가자라고 하더라도 욕망을 일으킬 수 있는 근거 그 느낌들을 갖다가, 좋고 싫은 느낌들을 일으킬 수 있는 것들을 자꾸 차단을 해나가고, 그것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수행에는 많이 도움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오늘도 계를 받은 거잖아. 계를 받은 것은 그런 거잖아. 내가 나쁜 짓을 한 것으로 인해서 일으키는 후회라든지 아니면 그것으로 인해서 잘못된 행위로 인해서 가져올 과보라든지 이런 것들을 원천적으로 차단을 시켜주는 거잖아.
요즘 우리 여기 선원에도 고양이가 3대가 지금 살고 있어요. 이 할아버지는 지금 이제 이빨이 다 빠져가지고, 이 사료를 못 먹어. 그래서 지금 한 달 전부터 계속, 그 뭐라고 그래야 돼? 묽은 거 그다음에 다 이겨져 있는 그런 것들 사가지고 먹이고 있거든. 그런데 주고 나서 싹 돌아서면 새끼 엄마가 와가지고 그걸 싹 다 뺏어 먹어버리는 거라. 이미 이 할아버지는 싸움에서도 안 되는 거라. 그럼 어떻게 해야 돼?
양쪽을 따로 밥을 주고 내가 중간에 딱 지키고 앉아 있어요. 다 먹을 때까지. 다 먹고 나면은 그때서야 이제 일어납니다.
그런데 또 새끼 엄마 입장에서는 새끼는 또 4마리가 있거든. 새끼 4마리 젖먹여 살려야 되니까 걔도 밥 잘 먹어야 돼. 그래서 걔도 먹는 걸 사료하고 또 그런 이유식하고 같이 섞어가지고 이렇게 먹이고 있는데, 이왕 찾아온 손님이니까, 그 손님들이 그래도 자기 수명을 다하고 죽음을 맞을 때까지는 뭐 어떡하겠어. 스님이니까 그걸 해줘야 되지 않겠어요? 그래서 그렇게 해주고 있는 거라.
마음에 그런 동물과 나를 차별하는 마음이 있다든지, 아니면 내 계만 소중해 가지고 다른 생명들에 대해서 자애의 마음을 일으키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은 그렇게 행동을 못 해. 그냥 이빨이 빠졌는지 뭐 볼 생각도 안 하고 그냥 사료만 계속 주고, 안 먹으면 ‘배불러서 안 먹는갑다’ 이렇게 생각을 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계라고 하는 것은 그런 의미를 지닙니다.
처음이, '자기 자신의 마음의 청정'입니다. 내가 한 행위가 그것으로 인해서 다른 존재들이 행복해지는 것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내 마음이 청정해지는 것들, 마음의 청정을 얻기 위해서 계를 지킨다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두 번째가, 만약에 고양이들이 사료를 먹어 죽었다. 그런데 뒤늦게 보니깐 이빨이 빠져가지고 못 먹어서 그렇게 됐다고 할 것 같으면, 다른 사람들이 비난 안 하겠어? 스님이 그것도 못 보고 얘 밥도 못 먹는 걸 계속 줘가지고 굶겨 죽였다고 할 거 아니라.
남의 비난으로부터 그걸 피해야 되고, 또 그것으로 인해서 ‘아, 저분은 그래도 참 믿음이 간다.’ 다른 사람들 다른 생명들에 대해서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믿음을 줄 수가 있고, 그게 두 번째라는 거라.
여러분도 마찬가지라. 남에게 비난받을 짓을 하면 안 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보고 ‘아, 저 사람은 법이 없어도 잘 사는 사람이다’ 하는 그런 믿음을 줄 수가 있어야 된다는 거라. 그게 계라는 의미들을 지닙니다.
적어도 계만 잘 지켜도, 계만 잘 지켜도 수행하는 데 힘은 있습니다. 그게 장애 요인으로서 붙잡질 않기 때문에.
그런데 젊은이들은 계를 지키고 하는 것들을 자꾸 등한시하려고 그럽니다. 그것은 스스로 경계를 해야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계를 지키는 의미를 잘 파악을 해서, 그걸 지킴으로 인해서 나에게 있는 이 에너지들, 이 힘들이 수행하는 데 돌아갈 수 있다 하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아따삐(ātāpī)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대상에 대해서 끊임없이 그것을 알려고 하는 힘들이 생겨났을 때 사띠(sati)는 반드시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사띠가 지속을 하게 되면은 삼빠자나(sampajāna)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거는 수행의 기본적인 원칙입니다. 수행하려는 열의가 한참 있을 때는 수행을 해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 자꾸 마음이 다른 데로 간다 해가지고 그 다른 일을 자꾸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특히 이제 여러분들이 수행을 하니까,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대상을 보고 있는데, 대상이 자꾸 다른 것들이 또 나타나고 하면 거기에 갔다가, 또 또 다른 대상에 갔다가, 또 호흡에 왔다가, 왔다 갔다 왔다 갔다 합니다.
그것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사띠하고 있을 것 같으면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데, 문제는 뭐냐면 "그 대상들이 금방 사라지는 현상으로서 보이지를 않는다"는 거라.
그냥 대상만 일어나고 또 다른 또 대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거는 못 보고, 그냥 또 다른 대상이 일어나는 것만 사띠하고, 또 저기 일어나면 그것도 대상을 사띠하게 되고, 이렇게 마음이 자꾸 왔다 갔다 하는 거라.
'아따삐, 사띠, 삼빠자나' 라고 하는 삼박자가 갖춰져야 됩니다.
그런 열의도 있고 사띠도 분명히 있는데, 삼빠자나가 안 일어납니다.
무상한 성품이 보여야 변하는 것이 보여야만이 그 대상이 끊임없이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그 자리에서 사라지는 것이 속도도 빨라질 뿐 아니라, 금방 또 다른 것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나는 즉시 알아차리고, 또 그렇게 알아차리니까 금방 또 사라지는 게 보이고, 그럼 또 마음이 금방 또 다른 대상을 찾고 이럴 것 같으면 문제가 되지는 않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고 일어나는 것만 지속적으로 보인다 할 것 같으면 단호하게 스톱! 단호하게 스톱을 하고, 그냥 그것들은 일어나는 대로 놔줘버리고 호흡으로 돌아와요. 그게 처음부터 단추가 잘못 끼워져서 그래요.
사띠는 하기는 하는데 아따삐가 없으니까 사띠가 강해지질 않는 거라.
사띠가 강해지지 않으니까 당연히 삼빠자나가 안 일어나는 거라.
여기 쭉 적어 놓은 게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라가(rāga)라고 하는 것이 완전하게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경계해야 되는 게, 그런 에너지가 있는 열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게 선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이 돼야 된다는 거라.
선한 마음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본인의 느낌도 좋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들이 반드시 분노와 결합을 하고, 나라고 하는 것과 결합을 하고, 그래서 나중에는 무지하고도 결합을 하게끔 되는 거라.
탐·진·치와 결합이 되는 욕망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잘못된 행위를 하면서도 그게 잘못됐다는 상황을 인지를 못하는 상황이 돼버리게 되는 거라. 그런 것들은 굉장히 경계를 해야 되는 거다 하는 거라.
그래서 그것들을, 이런 열정들이라고 하는 것들을 수행해서 좀 찾도록 하라는 거라. 수행에서 열정들은 굉장히 많습니다. 삐띠(pīti)가 그런 열정에 속하는 거라. 삐띠가 일어나면 몸도 마음도 흥분합니다. 수카(sukha)가 일어났을 때도 마찬가집니다. 그런 것들은 부작용이 없는 거라.
그런데 앞에 욕망이라고 하는 그런 열정들은 반드시 부작용들이 일어납니다. 좋은 면만 싹 뽑아가지고 할 것 같으면 몰라도, 그것들이 부작용들이 크기 때문에 그것들은 경계를 해야 된다고 하는 거고, 부처님은 그거를 끊어내라고 하는 거라.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렇게 했을 때, 자신이 그 에너지들 열정들을 좋은 쪽으로 돌릴 수 있는 도구들을 뒤에 적어놨습니다. 몸을 통한 도구, 그다음에 마음을 통한 도구.
그게 몸을 통한 거는, '소욕지족'이라고 적어놨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스님이 슬리퍼를 신고 있는데, 나는 그게 메이커가 뭔지도 몰라요. 그냥 누군가가 보시한 거니까, 그게 가죽으로 된 거는 아니고, 계율에 어긋나지도 않고, 또 발에 맞고 또 편하니까, 그냥 신습니다. 왜 슬리퍼 신죠? 발을 보호하기 위한 거라. 그래서 그냥 신는 거라.
그런데 만약에 또 누군가가 또 슬리퍼를 또 보시했다 할 거 같으면 또 그걸 또 아마 신을 거라. 그게 뭐 메이커가 뭔지 뭐 얼마 값어치가 있는지 전혀 중요하지 않거든. 필요할 경우에는 그걸 사용하면 돼.
그런데 여러분들은 필요하니까 사용을 하는 게 아니고, 그게 얼마짜리인지 그게 무슨 메이커인지가 중요한 거라. 특히 젊은 애들. 그거는 필요한 것이 아니고 소유하는 거라. 소유의 의미가 있으면 안 되는 거고, 그것보다는 내가 필요에 인해서 사용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게 소욕이라는 거라. 욕구가 있긴 있는데 그것들은 필요에 인해서 사용하는 것뿐이라는 거라. 그거 필요 없으면 그냥 버려버리면 돼.
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그것으로 인해서 그 슬리퍼로 인해서 만족하고 잘 살고 잘 신고 있잖아. 불만 없잖아. 그게 몸을 도구로 사용해서 욕망이라고 하는 탐욕을 갖다가 몰아낼 수 있는 방법들이라는 거라.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첫 번째가, 감각적 욕망에서는 벗어나야 됩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멧따(mettā) 수행을 하고 있다. '내 어머니가 행복하기를'
저번에 서울에 갔을 때 누가 개인적으로 와서 질문을 해요. 어머니한테 어머니를 생각하고 멧따를 이렇게 보내면 욕망이 확 일어난다는 거라. 그게 쉽게 말하면 감각적인 욕망이. 어머니를 대상으로 했는데도 그렇다는 거라.
그거 왜 그럴까? 그게 감각적인 욕망인지, 아니면은 어머니에 대한 집착인지 알 수 있어요? 같이 결합을 한 거라. 그 대상을 집착을 함으로 인해가지고, 그 대상에게 내가 멧따를 보내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내 마음이 그것으로 인해서 불선한 마음이 계속적으로 일어나게끔 된다는 거라.
그래서 아직 젊은 애였기 때문에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수행하려고 하는 마음이 좋기는 한데,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감각적 욕망이 일어나고 집착이 일어난다고 할 것 같으면 하지 마라! 왜 자애를 어머니한테 아직 보낼 대상도 아닌데 보내가지고, 니 마음에서 안 좋은 마음들이 일어나고, 그것으로 인해서 집착이 일어나고 하는 것들을 계속하느냐는 거라.
선하게 일으키는 마음에서조차도 이렇게 감각적인 욕망이나 집착들이 일어날 수가 있다는 걸 항상 경계를 해야 됩니다.
사띠하면 안 그럴 것 같아요? 수행 잘 되면 그냥 그대로 또 집착합니다.
대상이 오롯하게 그냥 성성하고 안 변하고 있어요. 지가 그걸 집착하고 붙잡고 있다는 생각을 안 하고, “1시간 내내 그냥 그 대상을 알아차렸습니다.” 이럽니다.
좋고 싫은 느낌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변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대상을 여러분들이 아는 것은 그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 대상이 변하지 않고 있다? 열반에서나 가능한 것이지,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대상은 변하게 돼 있습니다.
마음도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다른 데 갈 수밖에 없는데, 내가 집착하고 있으면 그거 그냥 그 대상에 붙잡혀 있게 되는 거라. 그래서 수행도 항상 경계를 해야 됩니다. ‘내가 집착하고 있는지, 밀어내고 있는지’ 이런 것들을 잘 생각을 해야 됩니다.
왜 그럴까? 그런 것들이 있으면 위험하기 때문에. ‘어, 내가 어느 경지에 도달했네’ 지가 판단을 합니다. 자기 스스로, 그래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 재단을 막 또 합니다. 그 위험을 분명하게 보라는 거라.
그래서 자기가 다시 돌아보라는 거라. ‘어, 내가 그 대상을 붙잡은 거는 아닌가? 그래서 그 대상이 안 변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숙고를 해보면 아, 내가 잘못됐다는 걸 알게 되는 거라.
그게 정신적으로 이 욕망이 일어났을 때 그걸 벗어나는 길입니다.
그 대상에 대해서 위험한 걸 보고, 그것들을 다시 숙고해 보고 하는 거라. 그러면 다시 마음은 고요해지고, 청정해지는 상태가 됩니다.
그런 대상은 마음은 빨리 변합니다. 그럼 대상을 다시 또 알아차리면 돼요.
이게 몸과 마음으로 인해서 욕망을 다스려 나가는 방법이라는 걸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고, 또 부처님이 추천했던 부정관, 항상 자꾸 돌아봐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몸은, 스님은 아침에 세수도 안 했거든. 한 이틀 샤워 안 했나? 그럼 어떻게 돼요? 그럼 기름기 흐르고 꾀죄죄할 수밖에 없는 거라. 여러분들 몸입니다. ‘몸은 항상 부정한 것이다’ 하는 생각을 일으켜야 됩니다. 그래서 그 부정한 것들을 너무 의지해가지고 그것들을 먹여 살리는데 온 힘을 쏟고 그렇게 하지 말고, 정신적인 성장을 위해서 자꾸 노력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제목이 뭐라고요? “마음의 성장엔 욕망을 경계해야 한다.”
반드시 경계를 해야 됩니다.
욕망은 경계를 해서 자꾸 끊어내고, 그리고 바른 방향으로 마음을 돌리도록 해야지, 그걸 그냥 있는 그대로 두고 수행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은 어떠한 경우든지 그 감각적인 욕망도 일어날 뿐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서 집착도 일어나고, 불선한 마음들도 일어나게 되고, 수행은 자꾸 깨지게 돼 있습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사두 사두 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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