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보리행론 제4장 불방일품" "제 6장 인욕품"
1. 선서의 아들들은 보리심을 굳게 지니고 항상 흔들림 없이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해설) 선서는 부처님의 십대 명호 가운데 하나로 ‘윤회의 바다에 빠지지 않고 피안으로 잘 건너간 이’라는 뜻입니다. 그 아들이란 보살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제자를 뜻합니다. 불자라면 언제나 흔들림 없이 보리심을 지켜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는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경솔하게 시작한 일이나 신중하게 검토하지 않은 일은 아무리 맹세를 했을지라도 해야 할 것인지, 말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해설) 굳게 마음먹은 일이라도 경솔했거나 신중하게 검토하지 않았다면 실패합니다. 즉, 의지가 강해도 내용이 부실하거나 반드시 해야 할 것인지 해서는 안 될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으면 그 성취의욕은 힘만 들지 성과는 없습니다. 바르게 판단하는 것은 지혜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3. 부처님과 보살들께서
큰 지혜로 두루 관찰하셨고, 나 또한 거듭 관찰한
발보리심을 어찌 늦출 수 있겠습니까?
(해설) 공성의 지혜에 의해서 사물에 대해, 대상에 대하여 착각, 왜곡, 폄하, 숨김, 빼거나 첨가하여 인식하는 것을 멈추고 있는 그대로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잘못 알아서 고통에 빠지는 중생들을 위하여 공성의 지혜로써 민첩하게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4. (부처님께서는) 아무리 사소한 물건이라도 ‘베풀겠다’ 결심하고는 그 누구에게도 베풀지 않았다면 아귀로 태어난다고 하셨습니다.
(해설) 비록 보시하고자 하는 마음을 냈어도 자기 것이 아까워 남에게 베풀지 않는다면 그 보시하고자 하는 마음은 어느덧 아끼고 탐욕의 심리로 바뀝니다.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면 탐욕의 심리로 인하여 후생에 늘 배고픈 귀신인 아귀로 태어나는 불행을 자초할 것입니다.
5. 한 순간일지라도 보살의 공덕을 방해하는 것은
중생의 이익에 해가 되니
악도는 끝이 없네.
(해설) 보살은 중생구제가 본업인데 보살의 선업을 방해하는 것은 곧 중생의 자유를 속박하는 것이 됩니다. 선업을 방해하는 일은 대개 질투와 상호공존의 진리에 대한 무지 때문에 일어납니다. 모든 존재가 멈추는 일이 없는 변화의 연속임을 알면 소유할 수 없는 이치를 알아 질투와 무지에서 벗어나 모든 것에 자유로워집니다. 이 이치를 따르면 보리심을 일으킬 수 있으며 또한 악도에서도 벗어날 수 있습니다.
6. 모든 유정에게 이로움을 주시는 무량한 부처님께서 오셨지만 저는 제 자신의 허물로 인해 구원의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해설) 항상 자기 자신의 허물을 살필 때 비로소 붓다의 자비심에 감응하여 가피를 입고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7. 건강하고, 먹을 것이 많고, 장애가 없다 해도 이 생은 한순간의 속임수와 같으니 이 몸은 그림자와 같습니다.
(해설)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은 세속의 학자들도 이구동성으로 변하지 않는 진리라고 합니다. 과학자들은 보이고 들리는 것이 파장인데 그 파장이 눈을 통해 들어오면 색깔과 모양, 부피로 인식하며 귀로 오면 소리로, 코로 오면 냄새로 인식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파장에는 색깔, 모양, 소리, 냄새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모양, 색깔 등은 곧 마음이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고정되어 있다. 분리되어 있다. 스스로 존재한다고 알고 인식한다면 이 앎은 모두 환영이며 속임수, 그림자와 같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마음의 투영’이라고 경론에서는 설합니다.
8. 지금, 좋은 인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선업을 짓지 않는다면, 삼악도의 고통에서 혼미해진 제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해설) 인간으로 태어남은 매우 귀합니다. 기쁨이 커서 수행하기 힘든 천신보다 낫다고 여러 불전에서는 언급하고 있습니다. 천신보다 나은 인간의 삶인데 고통이 너무 커서 수행하기 힘든 지옥, 축생, 아귀의 유정들과 어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몸 받은 것에 기뻐하며 열심히 보리심 일으키는 선업을 지어서 다음 생에라도 인간 몸을 받아 보리심 일으키는 수행을 지속 할 수 있게 말입니다.
9. 세존께서는 넓은 바다 위를 떠다니는 나무토막 구멍에 거북이 목을 끼우고 쉬는 것처럼 사람 몸을 받는 것이 매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해설) 샨띠데바 존자님은 ‘맹구경’의 ‘눈먼 거북이에 대한 비유’를 들어 인간 몸 받기의 귀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위에 있는 천국의 신들은 즐거움이 많아 수행하기 힘들고 인간의 아래 갈래인 지옥, 축생, 아귀의 삶은 괴로움이 많아 수행하기 어렵습니다. 인간이야말로 괴로움과 즐거움을 함께하기 때문에 수행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 몸 받기 어렵기 때문에 사람일 때 선업을 쌓아 다음 생을 기약하거나 수행하여 진리를 깨치지 어느 때 하겠습니까?
10. 인간으로 태어나는 기회를 얻고도 제가 선행을 익히지 않는다면 이보다 더 거짓된 것은 없고 이보다 더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해설) 인간 몸을 받고서도 안으로 몸과 마음을 거울같이 비쳐보고 밖으로 선행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운다면 어찌 다음 생에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보장이 되겠습니까? 인간의 수명은 100년 살기 어렵습니다. 어찌 단 한 순간이라도 이 귀한 시간을 아껴 열심히 수행하여 삶과 죽음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대 자유를 얻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11. 만약 제가 이것을 알고도
어리석은 탓에 나태하다면 죽음의 시간이 다가올 때 큰 아픔이 몰려올 것입니다.
(해설) 흔히들 ‘죽음 앞에는 평등하다’고 말합니다. 제 아무리 큰 권세와 명성, 재물을 가진 사람도 죽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와 같은데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 어찌 세속의 가치이겠습니까? 죽는 순간에도 숨 쉬지 않고 땀 흘리지 않는 참 마음이 성성하다면 무엇을 걱정하리요.
12. 분노와 탐욕 같은 저의 원수들은 팔다리가 있는 것도 아니며, 용맹스럽고 지혜롭지도 않은데 마치 저를 하인처럼 부립니다.
(해설) 사물이든 심리이든 객관적으로 보지 않고는 대상에 끌려갑니다. 그래서 일어나는 분노와 탐욕을 사물 보듯이 보고 알 때 끌려가지 않습니다. 분노와 탐욕 등은 대상을 소유할 수 없을 때는 그 대상을 파괴하는 감정입니다. 또한 자신도 모르게 항상 대상을 향해 움직이는 것이 감정이므로 탐욕과 분노가 자기를 하인 부리듯 하는 것입니다. 벗어나는 방법은 정신적 물질적 어떤 현상이든 대상이 변하고 내재하는 것 없고 규정지을 특성이 없음을 알 때 하인감정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13. 탐욕과 성냄 같은 센 번뇌인 이 원수는 무엇을 만나건 수미산마저도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태워버리니, 제 자신조차도 한순간에 없애버립니다.
(해설) 탐욕은 대상을 소유하여 소모시키므로 불같으며 분노를 일으키면 가슴에서 뜨거운 기운이 올라가면서 목이 쉬게 하고 혀 바닥이 갈라지게 하며 눈을 실명케 합니다. 그러므로 불의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탐욕과 성냄의 감정 때문에 테러와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고 재산이 파괴되며 또한 화석연료를 쓰고 고기를 먹기 위해 수많은 동물을 키우기 때문에 여기서 나오는 탄소에 의해 지구가 뜨거워져서 환경파괴와 생존의 위협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왠수입니다.
14. 저의 번뇌, 이 원수는
긴 세월 동안 끝도 시작도 없이 고통을 주니 그 어떤 적도 이토록 오래 해를 입히지는 않았습니다.
(해설) 적은 밖에 있지 않습니다. 상대가 화나게 하면 화가 올라옵니다. 그래서 저 사람이 나를 괴롭힌다고 하지만 사실은 반응하는 자기의 화난 감정이 자기를 괴롭히는 적입니다. 아무리 멀리 타국으로 떠나 여행을 할지라도 탐욕과 성냄은 자기 마음속에 있어서 떠나지 않습니다. 그 피해는 탐욕과 성냄을 멈추지 않는 이상 영원할 것입니다. 따라서 상대의 자극에 반응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행을 게을리 할 수 없습니다.
15. '윤회’라는 감옥의 간수가 지옥의 망나니로 변하듯이 탐욕의 올가미에 걸려든다면 어찌 저에게 안락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해설) 불의 특성은 위로 타오르는 것이며 아래로 내려오지 않듯이 욕망, 탐욕의 불은 그 특징이 위로 타올라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좋은 것을 가져도 ‘더’ 좋은 것을 가지려고 하는 욕심이 바로 욕망, 탐욕이기 때문입니다. 탐욕의 불은 도덕성(계율)으로서 잡고 보시를 행함으로써 줄이고 자비의 물로써 끄고 지혜의 칼로 그 뿌리를 잘라야 비로소 그 올가미를 부술 수 있습니다.
16. 적이 입힌 하찮은 상처까지도 훈장처럼 뽐내고 다닐진대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수행자에게 고통의 상처가 어찌 부끄러움이 되겠습니까?
(해설) 싸움터에서 입은 흉터를 ‘영광의 상처’라고 부릅니다. 큰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만큼 애써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고통의 바다를 건너기 위해 수행하다가 번뇌의 상처로 진전이 없다고 부끄러워하면서 수행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중생의 윤회를 벗어나게 하는 것보다 더 큰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데 어떻게 게으름을 피울 수 있겠습니까?
"입보리행론 제 6장 인욕품"
17. 천 겁 동안 쌓은 보시와 부처님께 올린 공양,
그 모든 선행이 한순간의 분노로 무너집니다.
(해설) 밖에서 생긴 원인 때문일지라도 분노는 바로 자신의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입니다. 한 순간 분노의 불로 그간에 쌓아온 자비와 지혜의 식량과 선행을 모두 태워버린다면 그것보다 아까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부처님의 입에서 태어난 자, 법의 상속자(불자)라면 언제나 인욕으로, 심은 선근을 지키고 지혜와 자비의 식량을 지켜야 합니다. 잘 참음은 생로병사가 없는 열반으로 인도한다고 붓다는 설하셨습니다.
18. 분노보다 더한 악은 없고 인욕보다 더한 고행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지하게 여러 방법으로 인욕을 수행해야 합니다.
(해설) 인욕은 분노의 불을 다스리는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화를 내는 순간, ‘화내는 자가 누구인가’ 하고 살펴보거나 불보살의 명호를 한번만이라도 외워도 성냄의 기세는 줄어들 것입니다. 언제나 성냄의 악업을 명심해야 합니다. 분노의 심리가 왕성해지면 지옥의 심리로 바뀔 것이고 그 심리로 지옥으로 갑니다
19. 분노의 고통으로 가득하면 마음의 평온은 사라지고 기쁨과 안락을 얻지 못하고 잠도 오지 않을 만큼 불안하게 됩니다.
(해설) 마음속에 일어나는 분노를 참지 못해서 잠을 설쳐본 적도 있을 것입니다. 분노 때문에 다음날, 그 다음날도 마음이 불편하다면 결국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손해를 끼치는 일을 자청한 셈입니다. 현명한 사람은 이런 일을 반복하겠습니까 아니면 그치려고 노력하겠습니까?
20. 원하지 않는 것을 시키고 원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에서 분노가 생깁니다. 마음의 불만을 먹이 삼아 분노를 키워 결국 저를 집어삼킵니다.
(해설) 분노가 생기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그 가운데 하나는 ‘나와 나의 것이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아상 때문에 자기 것을 고집하고, 그것의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모든 것이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존재함을 알면 고정 불멸의 자아란 이름일 뿐이며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깨우치게 되며 분노는 그만큼 줄어들고 소멸합니다.
21. 이런 저의 적, 분노를 모두 없애겠습니다. 저를 해치는 이 적보다 더 큰 적은 없기 때문입니다.
(해설) 분노를 일으키는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반응하는 나의 감정에서 일어납니다. 적은 안에서 일어나는 분노의 감정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은 내 안으로 향하여 관찰하는 것입니다.
22. 행복의 원인은 드물지만 고통의 원인은 너무나 많습니다. 고통 없이는 출리심도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마음, 그대여! (인욕의 마음) 굳건하게 지니길!
(해설) 다른 사람의 멸시와 분노를 받으면서도 참는 인욕 바라밀다를 정진하면 그 사람 때문에 생기는 고통이 나에게는 정신적 성숙이 일어나니, 그 사람에게 연민심이 일어나며 그로 인해 행복이 찾아옵니다. 또한 세상은 마음이 만든 환영인줄 알아 여기서 벗어나고자하는 출리심이 생깁니다.
23. 익숙해지면 모든 것은 쉬워집니다. 작은 어려움에 익숙해지면 큰 어려움도 견딜 수 있습니다.
(해설) ‘천리 길도 한걸음부터!’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일어나 뒤뚱거리며 걷다가 나중에는 쏜살처럼 달리게 됩니다. 모든 일의 그 첫발자국이 어렵지만 익숙해지면 쉬워지는 법입니다. 자아관념이 강할수록 상처도 큽니다. 그 첫발이 고통을 통해 자아가 없는 줄 아는 것이며 알면 참는 것은 쉬워집니다. 인욕 바라밀다 수행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24. 뱀이나 해충, 굶주림이나 목마름, 옴 같은 피부병을 의미 없는 고통으로만 여길 뿐 어찌 인내의 기회로 보지 못합니까?
(해설) 수행도 의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대상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합니다. 단지 적으로 돌리지 말고 나쁜 것이야 말로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고 깨달음을 가져다주는 진정한 수행의 큰 재료가 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고통도 인내하게 하는 스승이 아닐 수 없습니다.
25. 현자는 고통이 생겨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원래 번뇌와 싸울 때에는 많은 고난이 뒤따릅니다.
(해설) 속박을 통해 자유를, 고통을 통해 생사가 없는 열반의 즐거움을 알아차릴 때 마음의 동요가 없으며 번뇌가 열반의 길을 인도하는 길잡이임을 압니다. 그러므로 번뇌와 싸울수록 점점 평온을 찾습니다. 번뇌와 깨달은 마음이 같은 마음이므로 첫 마음이 발심하는 순간 끝 마음인 정각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26. 모든 고통에 개의치 않고 분노와 같은 적을 무찌르는 사람, 그를 큰 영웅이라고 부릅니다. 세속의 영웅이란 그저 사람을 죽이는 자에 불과합니다.
(해설) 부처님의 10대 명호 가운데 승자라는 것이 있습니다. 욕망과 분노, 어리석음이라는 탐진치 삼독을 정복한 진정한 승자라는 뜻입니다. 살생을 저질러 악업을 쌓는 세속의 영웅을 어찌 진정한 승리자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오직 자신의 삼독을 정복한 자만이 진정한 승자이며 번뇌로부터 중생을 해방시킬 수 있습니다.
27. ‘화를 내겠다’는 생각 없이도 사람들은 쉽게 화를 냅니다. ‘일으켜야지’라는 생각이 없어도
분노는 저절로 일어납니다.
(해설) 무의식적으로 화를 내는 것은 화는 감정이기 때문에 즉각적입니다. 감정은 머리에서 일으키는 생각이 아니며 가슴에서 반응하여 불의 기운을 타고 머리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병을 앓는 사람들의 특징은 가슴이 막히거나 딱딱하며 쓰리고 통증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두 ‘자아가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되며 진리를 모르는 무지가 그 배경이며 원인입니다.
28. 세상의 모든 허물과
모든 죄악들, 전부는 연기의 힘으로 생겨납니다. 제 스스로의 힘으로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해설) 부처님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다름 아닌 연기법입니다. 첫째, 인연, 인과의 뜻이며 둘째 상호의존의 뜻입니다. 화날 원인과 조건이 있어서 화나는 결과가 생기는 것이며 또한 주객이 상대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이치를 알면 화내는 주체인 자아가 없음을 말합니다. 모르면 화가 났을 때 그 사람이나 사물은 독립되어 있는 존재로 보입니다. 연기의 이치를 알게 되면 화낼 이유가 없어져 분노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29. 이런 인연들 역시 ‘고통을 발생시키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인연에 의해 생겨난 것들 역시 ‘나는 인연에 의해 생겨났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해설) 인연의 이치는 ‘독립되고 분리되며 실체성을 가지고 스스로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없다’입니다. 그러므로 인연은 자아가 아니므로 고통을 야기하는 의지가 없으며 생겨난 현상들도 인연이라는 자아 또는 자성에 의해 생겨났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인연의 뜻은 ‘자아는 없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30. 만약 아가 ‘항상 하는 것’이라면 허공과 같이 결과를 있게 하는 것이 없음이 분명합니다. 다른 조건들과 만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해설) 부처님께서는 ‘항상하는 나라는 것이 없다’는 무아를 설하셨습니다. 분노는 항상하는 나와 나의 것이 있다는 어리석은 아집에 의해서 발생합니다. 무아의 이치를 제대로 파악하기만 해도 대부분의 분노는 다만 스쳐지나가는 감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허공이 결과를 낼 수 없듯이 분노를 일으키는 자아는 없습니다.
31. 만약 원하는 일만 일어난다면 고통을 원하는 사람은 없으므로 몸을 가진 그 어떤 중생에게도 고통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해설) 예를 들면 고기를 즐겨 먹는 현대인들이 많습니다. 만약 원하는 일만 일어난다면 죽고자 하는 중생이 없을 것인데 어느 동물이 죽기를 바라겠습니까? 뜻대로 되는 일이란 처음부터 없으므로 생사의 괴로움도 마찬가지라 수행이라는 인연이 소중합니다. 지금 단 하루, 단 한 시간을 수행하더라도 인과의 이치를 안다면 게으름을 피울 수 없을 것입니다. 지극히 원하는 것이라도 인연의 이치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32. 항상 번뇌의 힘에 이끌려 (어떤 자는) 소중한 자신의 몸까지 죽입니다. 그와 같은데 타인을 해치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해설)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은 자기 자신의 몸입니다. 단순히 육체의 몸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이 몸은 법신, 보신, 화신의 세 가지 몸 갖춘 몸입니다. 법신은 공성과 지혜가 둘이 아닌 몸이며, 보신은 마음과 기운으로 이루어진 몸이며, 화신은 정밀한 육체로서의 몸입니다. 수행하면 육체의 몸을 통해 보신과 법신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중합니다. 이 소중한 몸을 죽인다면 타인을 해치는 것은 어렵지 않는 일입니다.
33. 번뇌로 인해 자신을 해치는 사람에게 자비심은 못 낼망정 화를 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해설) 대승의 수행은 사랑과 연민이 시작입니다. 왜냐하면 천하의 악인이라도 붓다와 똑 같이 불성을 가져 평등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해치는 사람에게 자비심을 내어야 하며 화를 내는 것은 차별 없음을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34. 만약 몽둥이 같은 것으로 때리는 사람에게 화를 낸다면 (자기 스스로) 분노에게 부림을 당하는 한 것이니
(자신의) 분노에게 화를 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해설) ‘남 탓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분노를 일으키게 하는 상대방이 일차적 원인이 아닙니다. 반응하는 자신의 감정이 화나게 하는 일차적 원인입니다. 상대가 화나게 하더라도 반응하는 감정이 없다면 화가 나지 않습니다. 항상 대인관계나 대상을 인식할 때 반드시 반응하여 일어나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알아차리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이 때 비로소 남 탓하거나또한 자신의 분노에게 부림을 당하지 않습니다.
35. 제가 이전에 중생에게 해를 입혔습니다. 그러므로 (이전에) 중생에게 해를 끼쳤듯이 지금 저에게 해가 생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해설) 분노가 일어났을 때 그것에 대한 대처방법은 다양합니다. 인과의 법칙을 이해하고 몸소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과법칙이란 자신이 한 말은 상대도 듣지만 자기 귀로도 듣기 때문에 행위의 정보가 무의식에 씨앗으로 저장되었다가 그것이 대상을 인식하여 대상(상대방)의 영향으로 인연이 맞았던 저장된 씨앗이 현재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지은 것은 내가 받는 이치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이치를 바르게 알 때 인과의 법칙에 따른 인욕 바라밀다의 수행입니다.
36. 어리석은 사람은 고통을 원하지 않으나 고통의 원인에는 탐착합니다. 자신의 허물에서 비롯된 해악이거늘 왜 남을 탓합니까?
(해설) 선업도 악업도 남이 대신 지어주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 자신이 짓기 때문에 자업자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단 하루를 살아도 귀한 이 인간 몸을 받은 한 생, 아직도 남을 탓하는 사치를 부립니까? 수행자라면 붓다께서 가르쳐주신 수행법으로 대 자유를 얻는 진리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37. 비유하자면 지옥의 옥졸에게서 받는 날카로운 칼 숲과 같이 고통은 자신의 바로 이 업으로 생긴 것입니다. 그와 같은데 어느 누구에게 화를 내겠습니까?
(해설) 중생들은 연기의 공성을 이해하지 못해서 자신이 받는 고통의 원인을 밖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오히려 밖의 모든 현상도 알고 보면 자기 마음의 투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고통의 원인을 내면의 마음에서 찾아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38. 마음은 형상이 없어서 그 누구도, 그 무엇으로도 없앨 수 없습니다. 몸을 애착해서 일어난 고통이 오히려 마음을 해칠 뿐입니다
(해설) 마음은 머리와 꼬리와 그 중간도 없으며 있음과 없음도 없으며 색깔도 없으며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고 말로서 형용할 수 없습니다. 형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허공과 같이 텅 비어 있어 생멸하는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마음에는 자아라는 착각 있어서 몸을 애착하고 그 고통이 마음을 해칩니다.
39. 모욕하는 말과 거친 말, 불쾌한 말, 이것들이 몸에 해를 끼치지 않는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은 그렇게 화를 냅니까?
(해설) 유마경에서 ‘몸은 아는 성질이 없다’고 합니다. 단지 반응하는 마음에 의해 몸을 타고 화라는 감정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화내는 자는 누구인가’라고 반문하거나 화낼 대상은 상호 의존하는 존재이므로 그 어떤 자아나 실체가 텅 빈 것임을 알아차린다면 마음은 평온해 집니다.
40. 다른 사람이 저를 싫어한다고 해도 이생에도 다음 생에서도 저를 해치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를 싫어하겠습니까?
(해설) 다른 사람의 싫어하는 말이나 행동이 곧장 자기 자신을 해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자기 마음이 성냄이나 미움으로 반응한다면 평온한 자기를 해치는 결과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미움과 분노, 의심, 질투, 교만 같은 부정적인 심리들을 알아차림하여 자신을 보호할 필요가 있습니다.
41. 저는 차라리 오늘 죽는 것이 삿된 삶을 오래 영위 하는 것보다 낫다는 자세로 살겠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오래 살아도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해설) 죽음의 고통을 끝내려면 ‘고정되어 있다. 분리되어 있다. 스스로 존재한다.’는 연기 공을 모르는 무지를 없애면 됩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죽음의 고통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지가 없어진 자리는 생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금생과 다음 생에서 중생구제 하는 공덕을 쌓는 삶입니다.
42. 많은 부를 얻었어도 오랫동안 행복을 누렸어도 도둑에게 모두 빼앗긴 것처럼 알몸에 빈손으로 떠나가야 합니다.
(해설) 아무리 오래 살았어도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또한 죽지 않은 생명은 없습니다. 전생과 후생을 오가며 가져갈 수 있는 것이라고는 무지로 쌓은 업뿐이 없습니다. 그 업이 무의식에 저장되는 씨앗이 되어 다음 생을 결정합니다.
43. 만약 재물을 모은 후
죄를 없애는 복덕을 짓겠다고 하면서 재물을 벌면서 화를 낸다면 오히려 죄를 짓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해설) 충분히 재물을 모은 후에 보시하겠다는 자세는 실천할 수 없습니다. 보시란 지금 가진 것을 나누려고 하는 마음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욕망이란 끝없이 증가할 뿐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이들이나 수행자라면 재물을 벌면서 저지르는 악업에 대해서 항상 참회하고 법문을 듣고 사유하며 일 년에 한차례정도는 계를 받고 포살에 참여하여 도덕성을 갖추어야 삶의 만족도가 높아집니다.
44. 스승과 형제와 같은 가까운 이에게 해를 입히는 자 또한 이전의 연에 의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을 알고 분노를 없애야 합니다.
(해설)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부모, 형제, 일가친척, 가까운 친구에게 해를 입히는 자는 그 정보가 무의식에 저장되어 있다가 현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정적인 감정인 큰 분노를 자비심으로 없애야 합니다.
45. 어떤 사람은 무지 때문에 죄를 짓고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의 무지 때문에 화를 낸다면, 그 누구에게 허물이 없다 할 것이고 그 누구에게 허물이 있다 하겠습니까?
(해설) 어린아이가 알지 못해서 행한 일과 그것에 화를 내는 것은 모두 상호의존의 연기실상을 모르는 무지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쨌든 화를 내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우선 화가 나면 사물이나 사람들이 상호의존이 아니라 독립된 존재로 보입니다. 그래서 화가 나는 순간에는 그 화에 대한 알아차림이 필요하며 화를 내서는 안 되는 이치를 생각해야합니다.
46. ‘무언가 다른 사람이 저에게 해를 입히는 그런 업을 예전에 왜 내가 지었던가?’
모든 것이 지은 업에 의한 것이라면 제가 어찌 제가 지은 업에 화를 낼 수 있겠습니까?
(해설) 불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전생후생으로 이어지는 인연의 흐름이 그침이 없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자신이 받고 있는 고통의 과보는 이미 그 이전에 지은 악한 업의 결과라는 생각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분노는 절로 줄어들고 인욕 바라밀다 수행은 이루어집니다.
47. 어떤 것에 집착하여 분노의 불길이 번질 때면 복덕의 보배가 불타지 않도록 집착의 근원을 없애야 합니다.
(해설) 화가 나면 남을 쳐 다치게 하지만 나도 다칩니다. 인욕 바라밀다의 수행은 분노하는 주체가 없는 무아임을 아는데서 출발합니다. 즉, 집착의 근원이 자아입니다. 자아의 ‘자’는 스스로이며 자아의 ‘아’는 나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스스로’가 없습니다. 태어남도 부모를 의지해서 태어났지 스스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나’라는 것도 관계 속에서의 나입니다.
48. 지금 겪는 이 정도의 고통도 제가 참을 수 없다면 지옥 고통의 원인인 성냄을 어찌 버리지 못하겠습니까?
(해설) 손톱 밑에 박힌 가시 하나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내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이 정도 고통도 참지 못하는데 지옥의 큰 고통의 원인인 분노를 어찌 가볍게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항상 경계하고 경계할 것이 바로 분노입니다.
49. 자신의 덕을 칭찬할 때면
그 사람까지도 즐거워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덕을 칭찬할 때면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해설) 자신이 잘되면 칭찬받기를 바라면서 다른 사람이 잘되면 질투가 일어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심사입니다. 모두 ‘자아’가 있다는 잘못된 믿음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방법은 질투의 마음이 일어날 때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면 이와 같은 마음이 옳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50. 중생이 행복해지는 것은 바라지 않으면서 그들이 깨닫기를 원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다른 사람이 얻는 이익에 화를 낸다면 보리심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해설) 분노만 참을 것이 아니라 질투도 참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공덕을 칭찬해야 할 일이지 결코 질투해서는 안 됩니다. 고통은 개인의 것이 아니며 붓다가 될 수 있는 씨앗인 불성은 차별이 없어 평등하기 때문입니다. 이 이치를 모른다면 인욕 바라밀다의 수행은 요원하기만 할 것입니다.
51. 그대는 스스로 지은 죄악에
괴로워하기는커녕 다른 사람이 지은 복덕에 시기 질투하십니까?
(해설) 자신의 복덕 짓기도 바쁜 한 생인데도 다른 사림이 지은 복덕에 시기 질투한다면 그 복덕이 증가하겠습니까, 감소하겠습니까? 시기와 질투가 일어날 때는 시기질투를 수행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인욕 바라밀다 수행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52. 명예를 위해 재산을 탕진하고 영웅이란 이름을 얻기 위해 자기 자신까지 죽인다면 세상의 명성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죽고 나면 그 누구에게 이득이 되겠습니까?
(해설) ‘모든 것은 변합니다.’ 이것은 세계의 학자들도 변하지 않는 진리라고 합니다. 세상의 명성은 하늘에 일어났다 사라지는 구름조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삶과 죽음을 해결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있습니까? 수행만이 생사에서 벗어나는 길임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53. 모래성이 무너질 때 어린 아이들이 얼마나 울던가? 그처럼 칭찬과 명예가 사라질 때 우리 마음은 어린 아이와 같아집니다.
(해설) 어린아이들의 모래성과 같은 세간의 칭찬의 명예에 휘둘려 진정으로 벗어나야할 생사문제를 무시한다면 그 삶에서 무슨 공덕이 남아 있겠습니까? 세간의 여러 가치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며 육바라밀 수행을 애써 행해야 할 것입니다.
54. 대자대비하신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을 한 치의 의심 없이 자신과 같이 여기셨습니다. 그런 중생을 제가 어찌 존경하지 않겠습니까?
(해설) ‘부처, 중생, 마음 이 세 가지는 차별 없이 평등하다’고 화엄경에서 설합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연민으로 항상 자신과 다른 사람을 대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인욕 바라밀다를 수행하게 도와주는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다른 어디에서 수행 처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언제 어디서나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이해하려는 것이 대승 불자의 자세가 아닐까요.
55. 인욕 수행만이 여래를 기쁘게 합니다. 자신의 바른 뜻을 성취하는 것도 바로 인욕 수행입니다.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것도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항상 인욕 수행을 하겠습니다.
(해설) 인욕 바라밀다 수행은 곧 사랑과 연민을 키워 세상의 고통을 자각하고 없애는 수행입니다. 한없는 중생이라도 구제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천천히 몸과 마음을 길들여 가면 그것이 곧 붓다에 이르는 해탈의 길이며 중생구제의 길입니다. 늦지 않았음을 알아차리고 언제나 수행하는 마음으로 참는 훈련을 하는 것이야말로 참다운 삶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끝.
- 원허 지운스님의 자비선명상 문자서비스 모음 2015. 08. 03 ~ 09. 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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