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정진/위빳사나수행, 신행노트

다나빠라미(dānapāramī 보시바라밀)

담마마-마까 2019. 3. 13. 23:00


   ♠ 다나빠라미(dānapāramī 보시바라밀)


보시바라밀의 기본은 마하까루나(대연민)와 우빠야꼬살라(지혜)입니다. 연민과 지혜가 생길 때부터 내가 아닌 상대방을 위하게 됩니다. 만약에 ‘내가 너에게 이것을 주면 넌 나에게 고마워하면서 내 말을 잘 듣겠지? 또 앞으로 나에게 더 크게 돌려주겠지? 그리고 이 공덕으로 내가 다음 생에 태어나면 더 잘 살기를 바란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빠라미가 아닙니다. 그러나 연민과 지혜로 상대방의 입장에서 ‘저 사람이 이것을 필요로 하고 있네.’라고 알게 되면 주고 싶어 합니다. 그때 있으면 바로 주거나, 없으면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빠라미입니다. 여기서 상대방이 필요로 하는 것을 해 주고 싶어 하는 것이 연민이고, 해 주는 방법을 찾는 것은 지혜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보시를 비롯한 모든 빠라미의 기본이 마하까루나와 우빠야꼬살라라고 알아야 합니다.


다나빠라미의 락카나는 알로바쩨따나(alobhacetanā욕심 없는 의도)입니다.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을 주려고 하는 의도입니다. 다나는 주는 것입니다. 손을 펴서(펼쳐서) 잡고 쥐고 갖고 있는 것을 놓아 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강사스님이 선원에서 법회가 있는 날 석가모니 부처님의 빠라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보디삿타(보살)는 항상 손바닥이 펼쳐져 있다. 잡고 쥐는 것이 없다. 항상 펴고 있다.”

그때 어떤 개구쟁이 스님이,

“스님, 저도 항상 손을 펴고 있습니다. 스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것을 저에게 주세요. 주고 싶은 것 다 주세요.”

그러자 강사스님이

“그래. 보살이 펴는 손은 부처님 되는 길! 네가 펴는 손은 거지 되는 길!”

보살이 손을 펴는 것은 잡지 않도록 펴는 것이고, 동자스님은 가지려고 손을 펴는 것이지요? 이렇게 다나(보시)의 락카나(특징)는 욕심 없이 펼쳐져 있는 손이고 가지고 있던 것을 다 내어 주는 것입니다.


다나빠라미의 라사는 보시물에 대한 욕심을 부숴 버리는 것입니다. 보시물에 대해 갖고 있는 욕심을 부숴 버려야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보시바라밀의 역할은 로바(lobha탐욕)를 부숴 버리고 없애 버리는 것입니다. 보시는 내가 가진 것을 주는 것이니까 내 것이 없어지는 것은 맞는데 그때 진짜로 없어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욕심입니다. 욕심이 없어지고 공덕이 생기는 것입니다.


다나빠라미의 빳쭈빳타나는 보시물에 대한 애착 집착이 없는 모습입니다. 남에게 뭔가를 주는 것을 보면서, ‘저 사람은 주는 것에 대한 걸림이 없고 취착이나 집착이 없구나, 잡고 쥐고 가지려고 하는 마음이 없구나.’라는 이미지가 나타나는 것이 다나빠라미의 빳쭈빳타나입니다. ‘뭇따짜가(muttacāga놓아버림)’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걸림이 없고 묶어 놓는 줄이 없다는, 그래서 완전히 벗어난 자유라는 말입니다. 아무 조건 없이 주는 무주상 보시와 같은 의미입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그냥 주는 것이 뭇따짜가인데, 이것이 다나빠라미의 빳쭈빳타나입니다.


다나빠라미의 빠닷타나는 보시물이 있는 것입니다. 보시한다면 보시 받는 사람과 보시물과 보시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 중에 보시물이 제일 중요합니다. 보시물이 있어야 보시할 수 있지요? 재능이나 돈이나 사물이나 옷이나 음식 등 뭔가를 가지고 있어야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보시물이 있는 것이 다나빠라미의 빠닷타나입니다.



이렇게 다나빠라미의 락카나는 놓아 버리면서 주는 것이고, 하는 일은 보시물에 대한 로바(탐욕)를 부숴 버리는 것이고, 나타남은 뭇따짜가, 즉 애착이나 집착 없이 걸림 없이 선뜻 내어 주는 모습이고, 가까운 원인은 보시할 수 있는 보시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인의 보시를 이렇게 분석할 줄 알고 남의 보시도 이렇게 분석하면서 빠라미가 되는 보시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출세간으로 갈 수 있습니다. 빠라미가 안되는 보시는 세간에서 끝없이 윤회할 뿐입니다.


 다나(보시), 실라(계율)빠라미의 상호관계


(1) 보시가 계율보다 하기가 쉽다.

십바라밀의 첫 번째가 다나빠라미입니다. 그러면 왜 보시를 먼저 해야 하는가? 보시는 나이 학벌 종교와 상관없이 누구나 다 하는 일입니다. 보시는 모든 사람들과 관계되어 있고 또 하기도 쉽습니다. 즉 쉬운 것부터 시작하라는 그런 의미이지요. 사념처를 수행할 때 신(몸), 수(느낌), 심(마음), 법(법) 대상으로 순서대로 하는 이유가 몸은 느낌보다 알기 쉽기 때문입니다. 물질이 정신보다 알기 쉽기 때문에 물질을 먼저 관찰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십바라밀 중에서도 보시바라밀이 가장 쉽기 때문에 먼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보시는 아기들도 할 수 있고 동물들도 할 수 있습니다.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것이 있지요. 이렇게 보시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고 또 하기도 쉽다는 의미입니다.


보시할 때 우리는 보시를 잘 하려면 가진 것이 많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보시하는 방법이 아주 많은데 쉽게 할 수 있는 보시부터 하면 됩니다. 예를 들면 설거지할 때 나오는 밥 한 알이라도 개미들에게, 새들에게 나누어 주면 그것도 보시입니다. 보시라는 것이 지혜롭고 자애로우면 할 수 있는 것들이 아주 많습니다. 부자라고 보시를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얀마에도 스님들이 탁발하면 부자들은 잘 나오지 않습니다. 돈 벌러 나가고 집에 없습니다. 오히려 중산층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나와서 많이 보시합니다. 진정한 보시는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지, 많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많이 가져야 보시 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많이 가진 사람들보다 적당히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보시를 잘하고, 또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합니다. 그래서 보시는 많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하고 싶어서 한다고 알아야 합니다. 많이 있어도 하고 싶지 않으면 보시를 하지 않습니다. 보시를 가진 것이 많아야 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보시가 무엇인지 연구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보시만 하면 된다고 알아야 합니다.


보시를 지계와 비교해 보면 지계가 보시보다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지계는 본인이 직접 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보시는 대신할 수 있지만 계율은 대신 지켜줄 수가 없습니다. 보시는 내가 가진 것을 주는 것이지, 내 몸과 내 입을 챙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계율은 내 몸과 입을 책임져야 합니다. 내 몸으로 나쁜 짓 하지 않고 내 입으로 나쁜 말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내 몸으로 좋은 일을 하도록 해야 하고, 내 입으로 좋은 말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이유로 지계가 보시보다 어려워서 보시를 먼저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2) 계율 공덕이 보시 공덕을 지켜준다.

보시 다음에 지계를 가르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보시를 하긴 하는데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보시 공덕이 보장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잘 살다가 갑자기 가난해지는 사람은 지계 공덕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계 공덕이 없다면 보시 공덕을 받을 수 없고, 있던 보시 공덕도 언제든지 다 날아가 버릴 수 있습니다. 계율을 지켜야 보시 공덕이 보장이 되고 그것이 빠라미 공덕이 될 수 있습니다. 빠라미 공덕은 내 이익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시 공덕이 보장이 되든 안 되든 무슨 상관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내가 가진 재산이 보장되어야 다른 사람의 이익을 챙겨줄 수 있습니다. 내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힘이 있어야 남을 도와줄 수 있기 때문에 보시 공덕이 보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살은 어떤 생에 태어났건 열심히 살면서 빠라미 공덕을 쌓았습니다. 불교를 잘못 이해하면 사람들이 게을러집니다. 부처님의 전생담을 읽어 보면 부처님이 보살행 할 때 돈도 열심히 벌었고, 권력을 차지할 때도 왕이 되거나 최고의 장군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최고의 학자가 되었습니다. 뭐든지 하면 열심히 하고 최고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의 차이점은, 돈을 많이 벌어도 여러 사람과 같이 나누었지, 혼자만 독차지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억누르고 이기면서 나쁘게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가지는 것 자체가 여러 사람의 행복을 찾아주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힘을 가질 때도 왕이 되어야 자기 나라 사람들을 지키고 보호할 수 있고 또 잘 살게 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최고로 하면서, 최고로 얻은 그 모든 것을 세상에 되돌려 주는 것이 빠라미입니다. 그런데 불교를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은 만족과 게으름을 구별하지 못하고 엉뚱한 말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많이 벌어 많이 가진다고 만족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벌 때는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벌고, 돈을 쓸 때 욕심과 자만과 사견 없이 잘 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족하는 사람은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연민으로 다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계율이 있어야 보시 공덕이 보장된다는 말은 자기 이익을 챙기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빠라미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본인의 이익을 챙기려고 하는 마음은 하나도 없습니다. 보시를 하는 것 자체가 내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시할 때도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이 줍니다. 보시 공덕으로 다음에 잘 살게 되어도, 그 잘 사는 것을 통해서 여러 사람을 더 많이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계율을 못 지켜 보시 공덕이 다 날아가 버리면 여러 사람의 행복을 찾아줄 수가 없겠지요? 이렇게 보시 공덕을 지계 공덕이 지켜주기 때문에 빠라미를 가르칠 때 보시를 가르친 다음에 계율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시할 때 빠라미가 되는 보시를 하고 보시할 때마다 계율을 지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계율을 지키면 보시 받는 사람도 공덕이 커지고, 보시 하는 사람도 공덕이 커집니다. 서로서로에게 빠라미(바라밀) 공덕이 되면서 서로에게 좋은 일이 되지요.


(3) 보가삼빳띠, 바와삼빳띠

보시와 지계의 연관성을 ‘보가삼빳띠(bhogasampatti부자)’와 ‘바와삼빳띠(bhavasampatti건강)’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보가(재산), 삼빠띠(성공, 성취, 완벽함), 바와(생生).

보가삼빳띠는 부유함을 말합니다. 보가삼빳띠가 되면 사람으로 태어나도 부자로 태어나고, 신으로 태어나도 매우 아름답고 풍요로운 신으로 태어납니다. 바와삼빳띠는 태어나는 생의 완벽함, 건강을 말합니다. 이 두 가지를 볼 때 보가삼빳띠는 보시에서 오고 바와삼빳띠는 지계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나빠라미에서 보가삼빳띠가 오고 실라빠라미에서 바와삼빳띠가 온다고 알면 됩니다. 인간으로 혹은 신으로, 완벽한 생으로 태어나서 행복한 삶을 주는 것은 지계바라밀입니다. 보가삼빳띠가 있어도 바와삼빳띠가 없으면 보가삼빳띠는 의미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재산과 자기 몸과 생명을 중요시합니다. 한평생 그 세 가지를 위해서 열심히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벌기 위해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일합니다. 그리고 부자가 되어 부를 누리며 즐겁게 살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제 좀 살 만하다고 하자마자 중병에 걸렸습니다. 그 병을 고치기 위해 결국 그동안 벌어 놓았던 돈을 다 써버립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몸을 무척 아낍니다. 날마다 맛있는 음식으로 잘 먹이고 깨끗이 씻어 주고 예쁘고 감촉이 좋은 옷으로 입혀 주며 챙깁니다. 자기 몸을 너무 아끼다 보니 행여나 다칠까, 행여나 더러워질까봐 선뜻 나서서 선업을 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알뜰살뜰 자기 몸을 챙겨도 몸은 하루하루 추하게 늙어 가며 결국 자신을 배신합니다. 늙지 않으려고 애를 많이 쓰지만 세월 앞에서는 속수무책입니다. 어떤 사람은 생명을 아주 귀하게 여깁니다. 오래오래 살려고 합니다. 모든 존재들은 자기 삶에 대한 애착이 있습니다. 우리는 개가 똥 먹고 행복해 할 때 비웃지만 개는 똥을 먹고 사는 개의 생을 혐오하지 않고 더 오래 살면서 죽지 않으려고 합니다. 병이 들거나 늙어서 다 죽게 된 사람들의 임종을 보면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칩니다. 어떻게든 살려고 생명줄을 부여잡고 애원을 합니다. 그러나 죽지 않는 생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이런 불쌍한 중생들의 삶을 보시고 “계속 부자로 사는 방법이 있다, 선업을 하면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오래 사는 방법이 있다, 죽지 않는 방법이 있다.”라고 하시면서, 자기가 가진 재산의 가치는 보시에 있고 자기 몸의 가치는 지계에 있고 자기 생명의 가치는 수행에 있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보시를 하면서 자기가 가진 재산이 없어진다고 여기는데 실제로 없어지는 것은 보시물에 대한 욕심입니다. 게다가 깨끗한 마음으로 한 보시는 그 공덕이 매우 크게 생기는데 그것이 바로 빠라미 공덕입니다. 우리는 계율을 지키면서 힘들다고 하지만 계율을 잘 지키면 내 몸도 건강해지고 마음도 평화로워집니다. 계율을 지키면서 양심과 수치심이 증장하게 되고 뿌듯함으로 자신감이 생깁니다. 아무리 많은 재산도 건강이 무너지면 소용이 없습니다. 또 건강함으로써 재산을 많이 모을 수 있습니다. 보시 공덕은 계율 공덕으로, 계율 공덕은 보시 공덕으로 지킬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서로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인간으로 태어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살아 있는 동안 1초도 무시하지 말고 부지런히 보시와 지계바라밀 공덕을 쌓으면서 수행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아라한이 되면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다. 다시 태어남이 없으면 죽음도 없습니다.


(4) 보시의 뿌리는 욕심 없음, 계율의 뿌리는 성냄 없음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남에게 주는 보시는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리고 줄 때엔 욕심을 버리면서 주어야 합니다. 그때의 마음의 뿌리를 보면 알로바(alobha욕심 없음)입니다. 보시물에 대한 욕심을 부숴 버릴 수 있는 힘이 있어야 보시할 수 있습니다. 욕심을 버리고 하는 보시는 일단 보시하는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 줍니다. 사실 마음이 부드러울 때 줄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누구에게 뭔가를 주고 싶다는 마음이 생길 때부터 그 마음 자체가 착하고 욕심 없는 마음(알로바)입니다. 아비담마를 공부해 보면 알로바가 있으면 아도사가 같이 있습니다. 알로바와 아도사는 서로 떼어낼 수 없습니다. 이들은 ‘아름다운 마음부수들’에서 ‘반드시들’ 그룹에 들어 있습니다. 알로바는 보시의 뿌리이고 아도사는 계율의 뿌리인데 이 둘은 항상 같이 있습니다. 아도사(adosa성냄 없음)는 자애와 똑같은 종류의 마음부수입니다. 내가 상대방에게 줄 때 자애 없이 주지는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주거나, 무엇인가를 바라면서 주면 안됩니다. 그래서 진짜 줄 수 있다면 욕심을 버릴 수 있기 때문이고(알로바), 상대방에게 자애가 있기 때문입니다(아도사). 이렇게 알로바와 아도사의 마음이 보시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가 보시를 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빠라미 측면에서 볼 때 제일로 하기 쉬운 일이 보시입니다. 왜냐하면 보시는 아직까지 내 몸과 내 입과는 관련이 없기 때문입니다. 보시는 돈을 주거나 옷을 주거나 먹을 것을 주는 것이지, 나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계율은 나를 주는 것입니다. ‘나의 말과 행동으로 당신을 다치게 하거나 아프게 하지 않고, 오히려 나의 말과 행동으로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겠습니다.’라고 약속하는 것이 계율입니다. 예를 들면 ‘아빠짜야나(apacāyana존경, 경의, 숭배)’는 예의를 지키는 것입니다. 절을 하거나 존댓말을 쓰거나 상대방을 존중하면서 행동하고 말하는 것인데, 이것도 나의 자만을 버리고 몸으로 직접 하는 것이기 때문에 계율 안에 들어갑니다.

웨이야왓짜(veyyāvacca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봉사한다는 것은 내 몸과 말을 주는 것입니다. 입으로 지혜롭고 자비로운 말을 해주고, 몸으로 무료 급식이나 의료 봉사를 해줍니다. 그래서 봉사하는 것도 계율 공덕입니다. 이렇게 보시는 내가 가진 외물을 주는 것이고 지계는 ‘나’를 바로 주는 것이기 때문에 보시가 지계보다 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보시를 많이 하다 보면 사람의 마음이 부드러워지면서 계율을 지키기가 쉬워집니다. 보시를 먼저 함으로써 마음이 착해지고 부드러워지는 것이 알로바(욕심 없음)와 아도사(성냄 없음)가 서로 연결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도사가 자애이고 알로바가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마음이 부드러워지면 몸의 행동과 하는 말도 부드러워집니다. 보시하면서 자애로운 말과 행동이 따라가지요. 이렇게 보시가 계율을 끌어당기고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계율이 따로 있고 말과 행동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쁜 말과 나쁜 행동을 피하는 것도 지계이고,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을 계속하는 것도 지계입니다. 계율을 잘 지키려면 그 뿌리가 자애(멧따)와 성냄 없음(아도사)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알로보다나헤뚜(alobhodānahetū욕심 없음이 보시의 뿌리이다),

아도소실라헤뚜(adososīlahetū성냄 없음이 지계의 뿌리이다).”


이렇게 보시를 하면서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말과 행동이 예의 바르게 되는 것이 바로 계율이 좋아지는 것입니다. 보시는 열심히 하면서 계율을 안 지키면 보시 공덕의 질이 계속 떨어집니다. 투자를 많이 하지만 이익을 제대로 못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보시 다음에 지계를 반드시 해야 합니다. 계율을 지키면서 하는 보시가 제대로 되는 보시입니다.


보시를 하면서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잘 살지만 일찍 죽을 수 있고, 일찍 죽지 않아도 병이 들 수가 있습니다. 지계가 약해서 바와삼빳띠가 보장이 안되는 것이지요. 잘 사는 것은 보시 공덕이지만 부도가 나는 것은 지계 공덕이 약해서 그렇습니다. 이것은 지계 공덕이 약해서 보가삼빳띠가 보장이 안되는 것입니다. 지계 공덕이 없으면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키지 못합니다. 지계가 좋은 사람은 뭔가를 잃어버려도 다시 찾게 되고, 지계가 약한 사람은 잃어버리지 않았는데도 누가 뺏어 갑니다. 귀중품을 잃어버리면 찾아서 돌려 줄 사람이 없습니다. 계율을 잘 지키는 사람은 도둑질을 안 하기 때문에 내 것을 누가 가져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보시 받는 사람도 계율을 잘 지켜야 합니다. 보시 받는 사람이 계율을 안 지키면 보시 받는 사람의 공덕이 떨어지고, 보시하는 사람이 계율을 안 지키면 보시하는 사람 쪽에서 공덕이 떨어집니다. 보시 받는 사람도 계율을 잘 지키고 보시하는 사람도 계율을 잘 지킨다면, 그 보시 공덕이 엄청나게 커집니다. 그래서 보시바라밀을 성공적으로 하려면 지계바라밀이 받쳐 줘야 한다는 상관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출처: 아신 빤딧짜 사야도 법문, 여래가 오신 길 보물산 둘레길다음카페 사띠 사마디 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