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위빳사나[기초수행반]

기초수행01. 수행(Bhāvanā)이란 (20071004)

담마마-마까 2019. 12. 29. 23:50

https://youtu.be/UFu55fD9aoY

 

* 기초수행01. 수행(Bhāvanā)이란 (20071004)

 

기초적인 수행방법에 대한 것들인데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입니다!

매번 들어왔기 때문에 수행방법에 대한 것들은 크게 설명할 부분은 없습니다.

 

부처님이 그런 말씀을 하신 게 있습니다. 두 가지 종류의 질병이 있다.

그 두 가지는 뭔가 하면 첫 번째는 육체적인 질병이고, 두 번째는 정신적인 질병입니다. 육체적인 질병은 간단한 거는 며칠 만에 그 질병으로부터 자유롭기도 하고, 아니면 일 년 가다가 자유롭기도 하고, 또는 십 년 가다가 자유롭기도 하고 그렇게 해나갑니다. 그래서 질병을 다스리는 것은 기간의 문제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노력을 하면 얼마든지 다스려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육체적인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은 참 주변에 많이 있는데, 정신적인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라한을 제외하고는, 단 한명도 이 세상에 없다고 얘기합니다. 정신적인 질병, 정신적인 번뇌로부터 자유로운 것을 말합니다. 그것도 그렇게 자유로운 사람은 아라한을 제외하고는 단 한명도 없는데, '단 한순간이라도 자유로운 자가 없다'하고 부처님이 얘기하는 게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서 수행에 대한 것은 통상적으로 '바와나(Bhāvanā)'라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바와나는 영어로는 '메디테이션(meditation)' 그렇게 하죠! '명상' 이렇게 얘기하는데, 바와나라는 뜻이 뭐냐 하면 정신적인 부분에 대한 얘기입니다.

불교수행은 그 목표가 뭡니까? 정신적인 평화, 정신적인 적정, 그리고 그런 건강한 정신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런데 이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만큼 오해를 많이 하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보통 여러분들 수행한다 할 것 같으면 어떻게 합니까? 대부분 절에 와가지고 하는 것들을 수행이라고 그러지 일상적인 것들은 수행이라고 생각을 안 한다는 것입니다. 참 불행한 겁니다. 어떤 면에서는 수행하러 간다 이렇게 얘기할 것 같으면 도피하러 간다 하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정신적으로 복잡하고 머리 아프고 한 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수행하러 절에 간다고.

안 그러면 저 어떤 특별한 것들을 계발하기 위해가지고 수행한다고 그럽니다. 스님들도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천안통을 얻기 위해서 수행하기도 하고, 아니면 남들보다도 더 뛰어난 뭔가를 하기 위해서 수행을 하기도 합니다. 수행은 그거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데 보통 이렇게들 생각들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여기서 부처님이 말한 바와나(Bhāvanā)라고 하는 것은 정확하게 얘기하면 '정신적인 수양'을 얘기합니다. '정신적으로 닦는다'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을 닦는데 그게 꼭 절에서 해야 될 이유가 있고, 마음을 닦는데 그런 신통을 계발해야 될 이유는 없다 하는 거라. 그런 거는 부수적으로 얻어지는 것이고 조금 더 집중하기 위해서 고요하고 한적한 곳에 간다고 할 거 같으면 이해를 하지만, 그 수행을 위해서 멀리까지 가서 고요한 곳에서 수행을 한다 하는 것은 이미 그 근본부터가 잘못되어버린다 하는 뜻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생각은 일단 주변에서 지우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욕망들이나 증오, 악의, 그리고 게으름, 근심, 걱정들 이런 것들을 깨끗이 청소한다 하는 생각을 가지면 됩니다.

 

그렇게 청소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뭐냐면, 내가 그러한 사실이 일어났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아야 되고, 그러한 사실에 대해서 '아! 이게 뭔가, 왜 일어났는가?' 하고 꿰뚫어 볼 수가 있어야 되고, 또 그런 것들을 관찰하려고 열심히 내가 이걸 없애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노력하는 것이 또 필요한 것이고,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꼭 집중하는 것도 필요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어느 정도 '아! 이게 마음의 정화를 위해서 참 필요한 것이구나' 하는 그런 확신들도 들어야 되고, 이런 여러 가지 자질들을 계발을 해야만이 수행을 한다 하고 얘기합니다.

 

다시 말해서 바와나(Bhāvanā)라고 하는 것은 '실재 그대로, 사물의 본성 그대로 깨닫는 것이다'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 것들을 위해서 필요한 수행은 부처님은 두 가지가 있다 하고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하나는 뭡니까? 부처님이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 여러 스승들에게 법을 배우죠. 그래서 뭐 비상비비상처가 어떻고 공무변처정이 어떻고 뭐 여러분들 보통 경전에서 얘기하는 사선정, 그다음에 팔선정 뭐 이렇게 얘기하는 그런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오롯하게 집중하는 것, 그 삼매를 계발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계발하면서 여러 가지 현상들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걸 갖다가 부처님은 뭐라고 얘기하느냐면 "이러한 상태들은 마음이 만들었고, 마음이 창조했고, 조건지워진 것일 뿐이다. 그러니까 실재하는 깨달음, 완전한 깨달음, 열반하고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실제 아무리 집중을 하고 그것을 보더라도 깨어나고 나면 일상생활에서는 별 소용이 없습니다. 그때 '아! 좋았다' 하는 느낌들만 있을 뿐인 것이지 실제 내가 행동하고 하는 실제 생활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들이다 하는 겁니다.

 

이런 형태의 수행은 부처님 이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각각의 종교에서 채택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명상이란 이름으로써!

그래서 이거는 부처님은 "순수한 불교적인 것은 아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룬 방법은 아니다 하는 거라.

 

그러다가 부처님이 여덟 살 때 농경제 때 했던 수행법, 호흡을 가지고 나중에 출가하고 나서 육 년 고행 뒤에 그 방법으로써 깨달음을 이루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방법을 정리해 놓은 것이 뭐냐 하면 "이것이 진정한 불교적인 수행이다" 해서 두 가지 수행방법 중에 하나로써 해놔 놨습니다.

 

그런데 왜 두 가지 방법으로 해놨느냐 하면 앞에 것은 분명히 불교적인 방법은 아니다 하면서도 하나의 수행방법으로 택해놓은 거는 그것이 뒤에 수행방법에 도움을 주기 때문에, 그것이 아닌 줄 알지만,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방법으로써 차용을 해놓은 것뿐입니다.

 

그래서 엄밀하게 얘기할 것 같으면 불교적인 수행법은 부처님이 말한 뒤의 후자의 방법, 후자의 방법인 "사띠빳타나(Satipaṭṭhāna)라고 하는 위빳사나 수행법 밖에 없다"하고 단언을 해놨습니다.

전자의 사마디 수행방법으론 이생에서 평온한 삶, 또는 신비한 경험을 갖다가 가져오게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하는 거라. 살레까 숫따라고 하는 경전에 보면, 맛지마 니까야에 있습니다. 거기 보면 분명하게 부처님이 선언을 해놔 놨습니다. 어쨌든 통찰력이라고 하는 "위빳사나 수행법은 열반으로 이끄는 것이다"하고 얘기를 해놨습니다.

 

그래서 불교적인 수행법은 이 위빳사나 뿐이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또 다른 종교에서는 없는 수행법이고, 고유한 수행법이다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죽음에 이르게 됐을 때 비구스님들이 그 사람 옆에 가서 맨 처음 들려주는 경전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대념처경」 입니다!

'마하사띠빳타나 숫따(Mahā-Satipaṭṭhāna-Sutta)' 라고 하는 '대념처경'을 합니다. 그리고 남방불교권 국가에서도 일반 가정에서 가족들이 앉아서 많이 암송하는 것도 '사띠빳타나 숫따'라고 하는 '염처경'을 많이 암송합니다.

 

이것을 왜 죽음에 이르게 된 사람한테도 하고, 일반적으로 살아있는 사람들도 항상 이 경전을 암송을 하고 되새기느냐 하면 우리의 삶과 단절돼있지 않기 때문에, 이 경전 자체가!

삶 자체를 그걸 회피할려고, 수행한다는 명목으로써 그걸 회피한다든지, 아니면 이 삶이 괴롭기때문에 그것을 피할려고 한다든지 이런 회피하는 것이 아니고, 삶과 직접적으로 맞닥뜨리도록 돼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그 맞닥뜨려지는 걸 갖다가 좀 더 바르게 살아가게끔 하고, 좀 더 바르게 관찰하게끔 하는가 하는 걸 가르쳐놓은 경전이기 때문에 이걸 독송을 하는 겁니다.

일상적인 우리의 행위들, 기쁨도 일어나고 슬픔도 일어나고, 또 말도 하게 되고 생각도 하게 되고, 또 움직이기도 하고 이런 모든 활동들 하고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이 대념처경을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입니다.

 

그 대념처경 중에서 맨 첫 번째 단락이 뭐냐 하면 몸에 대한 관찰입니다.

두 번째가 감각, 느낌에 대한 관찰입니다.

세 번째가 마음에 대한 관찰입니다.

네 번째가 다양한 여러 가지 현상들, 생각들이나 도덕적인 것이든 도덕적인 것이지 않든 일으키는 것들, 이런 것들을 주제로 해서 다루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사념처경이라고 합니다. 네 가지 알아차리는 대상에 대한 경전이다 하는 겁니다.

 

사실은 우리들 살아있는 것이 이 네 가지입니다. 네 가지 외에는 없습니다.

맨 첫 번째가 몸에 대한 알아차림이라 해서 '까야 빳사나(kāyānupassanā, 身念處)'라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몸에 대한 것은 여러 가지로 분류를 해놔 놨습니다. 그중에 가장 먼저 해놓은 것이 '아나빠나사띠(Ānāpānassati, 出入息念)'라 해가지고 호흡에 대한 얘기를 해놔놨습니다.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져 있고, 또 실제적으로 수행한다 할 거 같으면 대부분이 이 아나빠나 사띠를 합니다. 여러분들 수행한다고 할 거 같으면 일단은 먼저 조용하게 앉아서 호흡을 관찰하든 뭘 하든 이렇게 조용하게 앉아있는 것을 수행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부처님도 그 부분에 대해서 인정을 하셨기 때문에 맨 첫머리에 호흡에 대한 관찰을 여놨습니다.

 

다른 수행법들은 걷든지, 눕든지 아니면 서있든지 뭐 여러 가지 행동을 하든지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방식대로 하면 됩니다. 걸을 때는 걸어가면 되고, 누워있을 때는 누워있으면 되고,

그런데 앉아있는 방법에서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숨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세를 똑바로 세워야 되고, 또 다리도 좀 편안하게 그렇게 자리를 잡도록 해야 되고, 또 손은 자주 움직이지 않게끔 어느 일정부분에 딱 고정을 시켜놔야 되고, 그리고 눈은 앞을 바라보면서 눈을 살포시 감도록 해야 되고 이런 것들이 기본적으로 되도록 하고 있습니다.

 

물론 꼭 그렇게 따라하지 않아도 됩니다. 자세가 불편할 경우엔 의자에 앉아도 되고, 또 수행하는데 앉아있기 불편할 것 같으면 서서 해도 되고, 누워있어서 해도 되고 그렇습니다. 걸어가면서 하지는 못하더라도 꼭 앉아있을 필요는 없지만은 통상적으로 누워있다든지 서서 있는 것보다는 앉아있는 것이 오래도록 수행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게을러지지 않고 또 혼란되지 않기 때문에, 또 들뜨지 않기 때문에 앉아있는 수행법들을 가지고 호흡을 관찰할 때는 이 방법을 통상적으로 씁니다.

 

그래서 앉아있을 때는 관찰하는 것이 호흡입니다.

호흡은 밤낮으로 들이쉬고 내쉬고 합니다. 밤낮으로! 죽을 때까지! 그런데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단 1초도 자기가 호흡하는 걸 모릅니다.

수행이라 하는 것은 단 1초라도 들이쉬고 내쉬는 곳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호흡이 자연스럽게 되지 않으면 그 호흡을 오래도록 관찰하지 못합니다. 물도 가장 자연스러운 물은 죽을 때까지 먹어도 관계가 없지만 뭐가 섞여버리면 그건 죽을 때까지 못 먹어요. 호흡도 마찬가집니다. 복식호흡이 있고 단전호흡이 있고 어떤 호흡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몸의 건강이나 일시적으로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죽을 때까지, 그리고 의식을 하지 않고 숨을 쉴 때도 이 자연스러운 호흡일 뿐이라는 거라. 이 자연스러운 호흡을 갖다가 관찰을 해야 된다는 거라.

그런데 단 1초라도 이것을 관찰하다 보면 자연스러운 호흡이라고 하더라도 깊은 숨을 쉴 때도 있고 짧은 숨을 쉴 때도 있고 여러 천태양상으로 숨이 다르다는 사실을 안다는 거라.

 

그래서 앉아있을 때는 기본적으로는 호흡을 관찰하도록 합니다.

그 호흡에 충분히 마음을 집중시키는데 그 호흡은 반드시 자연스러운 호흡이어야만 된다. 그래서 그 호흡의 들이쉬고 내쉬는 움직임, 그리고 그 변화되는 것을 알도록 해야 됩니다. 이럴 때는 모든 주변적인 상황, 모든 주변적인 일들 그러한 환경조건들 조차도 전부 다 잊어버려야 됩니다.

그러려다 보면 눈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되도록 힘을 주지 말고 살포시 감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처음에 호흡에 마음을 집중하기가 참 어렵게 느껴집니다.

온데 산란하게 마음이 벗어납니다. 그럼 일차적으로 먼저 알아야 되는 게 '아! 내 마음이 이렇게 산란하구나. 이렇게 번잡하구나' 하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됩니다.

어떤 것이든 마음은 붙잡아둘려고 할 것 같으면 벗어날려고 그럽니다. 호흡에다 마음을 붙잡아둘려니까 이 마음이 굉장히 산란하게 움직일려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맨 먼저 알아차려지는 것이 참 마음이 부산하구나. 그래서 마음이 가만히 있지 못하는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밖에 소리도 들리고 마음도 어수선해지고 혼란스러워지고, 그 수행하는데 또 제대로 관찰이 잘 안되니까 실망하게 되기도 하고, 게을러지고 낙담해가지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기도 하고, 우선 이런 마음의 상태를 갖다가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마음에 대한 것이 고요하게 가라앉아있질 못할 거 같으면 호흡을 절대 관찰해 내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아! 참 내 마음이 이렇게 어수선해 있구나 하는 사실을 알고 나서 자연스러운 호흡에 마음을 살포시 갖다 놓는다고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호흡은 일단 들이쉬고 내쉬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런 생각 없이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을 갖다가 우선 바라만 보도록 해보십시오. 명칭을 붙이지도 말고 마음이 산란해진 사실만 알고 나면 아! 마음이 산란해졌구나 하는 사실을 알고 나서, 즉각 다시 호흡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십시오. 가만히 지켜보면 나도 모르게 그 호흡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데 마음이 쏘옥 빨려들어 가는 걸 느끼게 됩니다.

왜? 이미 내 마음을 갖다가 읽고 알았기 때문에! 이놈의 마음이 지가 읽히고 나면은 고마 포기해버립니다! 마음이 고요하게 돼버린다는 거라. 그럴 거 같으면 그 마음을 호흡으로 돌려버릴 거 같으면,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 대상을 배를 대상으로 하든 아니면 코끝으로 대상을 하든 그것은 어디든지 관계없습니다. 코끝이면 코끝의 한 지점에 숨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걸 갖다가 다 관찰을 하고, 배면 배의 어느 한 지점에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걸 관찰하고, 이렇게 관찰 포인트만 하나 딱 주고 나서 거기에 가만히 응시만 하도록 한번 해보십시오.

틀림없이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이 관찰이 돼 나갈 겁니다.

 

그렇게 집중이 되면 주변의 소리도 잘 안 들립니다. 내가 외부의 세계와 단절돼 있다 하는 그런 느낌들을 받습니다. 그때 참 '아! 이러한 순간에 경험이 나로 하여금 황홀하게 하고 기쁘게 하는구나' 하는 사실을 또 압니다.

그게 수행의 첫 포인트를 잡는 겁니다.

 

마음은 끊임없이 벗어날려고 그러고 이동할려고 하고 또 붙잡혀있지 않을려고 하지만, 고놈을 갖다가 내가 확실하게 봐버리고 나면, 그 마음도 내가 조절할 수가 있는 것이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호흡이라고 하는 아주 단순한 것에 관찰하고 있어도 마음이 벗어나지 않고 거기에 쭉 매달려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그때 이미 마음에서는 참 고요하고 또 어떤 경우는 전율을 칠 정도로 기뻐하는 것들이 일어납니다.

 

이럴 때 이제는 내가 이 길로써 한번 집중을 해보고, 이 길로써 깨달음에 이르러 보겠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오늘은 그런 시간을 10분을 가졌다 할 것 같으면 조금 있다가 저녁때는 20분을 가져보고, 또 내일은 30분을 가져보고 이런 식으로 그것을 반복해주는 겁니다. 그런 경험들을.

반복적으로 쭉 해줘 보면 어느 순간에 나도 모르게 호흡에다 마음을 완전하게 집중을 시켜서 자기 자신뿐 아니라 주변 상황을 딱 잊는 상황들을 자꾸 만들어나가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어느 대상에 완전하게 집중하는 법을 잘 모를 건데 이렇게 하는 것이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는 방법입니다. 아주 간단한 겁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었던 건 여덟 살 때 했던 이 방법입니다.

이거 외에는 없습니다. 이러한 호흡을 관찰하는 것이 효과가 많기 때문에, 또 금방 좋은 방법으로 이끌기 때문에 부처님이 맨 첫 단락에 호흡에 대한 관찰을 해줬습니다.

 

뭐 어떤 효과들이 있습니까?

정신적으로 괴롭지 않는 것, 정신적으로 번뇌에 휩싸이지 않는 것.

또 몸도 당연히 자연스러운 호흡이기 때문에 부담감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몸과 마음이 이렇게 일치됨으로 인해서 참 상쾌하고 좋구나 하는 느낌들을 받습니다. 깨어있는 애기를 등에 업고 가면 어느 정도 걸어가더라도 피곤하지를 않습니다. 자는 애기를 업고 가면 굉장히 피곤합니다.

몸과 마음이 깨어있어 가지도 딱 붙어있을 거 같으면 피곤한 걸 모릅니다. 그래서 휴식을 취하는 그런 느낌들을 받게 된다는 겁니다.

잠을 잘 때도 이렇게 해서 자면 편안하게 잠이 들기도 하고, 또 일상생활 할 때도 아주 경쾌하게 되고, 즉각적으로 이런 효과들을 가져오기 때문에 맨 처음에 앉아서 수행하는 것들을 얘기를 해놨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반드시 이 호흡에 대한 관찰로써 마음이 고요하고, 또 평화로워짐을 알게끔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해놓았던 것이 뭐냐면 행위들에 대한 것들을 알아차리는 방법을 부처님이 얘기해 놓았습니다.

우리는 앉아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일상생활을 다 해야 합니다. 걷기도 하고 눕기도 하고 또 팔다리를 구부리기도 하고 또 주변을 돌아보기도 하고 밥도 먹어야 되고 말도 해야 되고 옷을 입기도 해야 되고, 모든 행위들에 대해서 그 순간순간을 갖다가 행하는 행동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집중하고 알아차리는 방법입니다.

고요하게 앉아있을 때 호흡을 일단 관찰하고 알아차리는 방법을 할 거 같으면 움직이는 것들에 대해서 관찰하기도 용이해집니다.

 

딱 하나 명심해야 될 거는 현재의 순간에 현재의 행동만 알도록 하라.

과거 그리고 미래, 이런 것을 전혀 염두에 두지마라. 내가 살아있는 것은 현재라는 시간이고, 내가 지금 움직이는 것은 현재 일으키는 행위들입니다. 그러면 내가 살아간다는 것은 현재의 순간에 현재의 행위들을 알아차리는 것밖에는 없다는 겁니다.

 

보통 보면 그렇게 못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문제들이 발생하고 하는 것들은 현재를 살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누가 이런 얘기했는데 뭐 어쩌고 저쩌고 생각하고, 그로 인해서 일으키는 생각들로 인해서 ‘에이! 뭐 어째야지’ 뭐 하러 그렇게 하느냐는 거라. 미래를 아무리 설계하고 어쩌고 한다 해서 여러분들 앞에 미래가 뚝딱 지금 앞에 나타나집니까? 그건 아니거든. 지금 현재를 살다 보면 미래는 다가와지는 것들입니다. 다가오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걱정하고 근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에 지금 하는 행위에 대해서 관찰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마음은 딱 하나밖에 모릅니다.

현재라고 하는 순간에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밖에는 모르게 돼있습니다. 그러니까 두 개를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책을 읽을 때 밥을 먹어서도 안 되는 거고, 마음이 걸어가는데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걸어갈 수도 없는 것이고, 그러면 내가 즉각 알아차려야 됩니다. '아!, 그럼 내가 지금 현재에 살고 있지 못하고 있구나.' 그러면 걸어가는 걸 중단하든지 아니면 생각하는 걸 중단하든지 둘 중에 하나는 해라.

 

보통 보면 도피할려고 하면 이 두 가지 행위들을 합니다.

걸어가는 것이 하기 싫다, 벗어날려고 한다 할 것 같으면 생각을 하게 된다는 거라. 밥이 맛있어 봐요 책볼 정신이 어딨어요? 밥만 먹게 되지! 벗어날려고 하기 때문에 두 가지 행위들을 보통 합니다. 그럴 때는 즉시 '아! 내가 마음에서 싫어하는 마음들이 일어났구나' 하는 사실만 알아차리고 나면은 다시 돌아가집니다. 하나에!

 

그래서 수행은 지금 여기서 하라 하고 얘기들을 하는 겁니다.

이렇게 하다 보면 일상생활도 반드시 하나씩 하나씩 관찰을 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시간이 조금 넘어버렸는데 다음 시간에 몸에 대한 관찰부분을 더 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

삼보에 의지하여 나아갑니다.

 

이 법문 글은 아짠 빤냐와로 마하테로 스님께서 설하신 법문들에서 녹음된 것을 토대로 필사한 내용입니다.

 

개인적인 공부로써 삼장법사 스님의 법문을 듣고 옮겨 적으며 되도록이면 최대한 선원장 스님의 육성을 그대로 담고자 노력했습니다.

옮긴이의 앎과 노력이 부족하여 법문 본래의 뜻과 요지를 오롯하게 담아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부디 법문내용의 속뜻을 헤아려 주시길 바랍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감 없이 변형 없이 오롯이 전해주시는 붓다의 길따라 선원장 스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올바르고 귀중한 법문들이 설해질 수 있는 장소와 조건을 유지해주시고, 설해진 법문들을 잘 보존해오신 선배도반님들께 지극한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서로서로 힘이 되어주시는 모든 테라와다 도반님들에게 지극한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모든 존재들에게 공덕이 골고루 나누어지길 바랍니다.

 

모든 이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이 가르침으로 인해 법의 눈이 열리고 지혜가 증장되어지기를

이 가르침이 실천수행으로 이어져 닙바나의 토대가 굳건해지기를

 

 

2022년 12월 다시 필사하며 담마마-마까 올립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