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위빳사나[기초수행반]

기초수행02. 위빳사나란(vipassanā)? (20071009)

담마마-마까 2019. 12. 30. 14:05

https://youtu.be/j1SHW_pfi2o 

* 기초수행02. 위빳사나(vipassanā)란? (20071009)

 

편하게 앉고 교재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수행을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여러분들은 위빳사나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또 수행을 해나갈 겁니다. 교재 첫머리에 한 번 보십시오.

 

'위'와 '빳사나'의 합성어가 '위빳사나(vipassanā)'다 하고 나왔습니다.

'위(vi)'는 '다양하고 여러 가지'란 뜻이고, '빳사나(passanā)'는 '관찰한다 ‧ 본다'는 의미가 합해져서 '직관적 통찰, 내적 관찰, 완전하게 여러 가지들을 알아차린다' 하는 의미가 '위빳사나(vipassanā)'라고 적어놨습니다.

 

빨리어 사전에 '(vi)'라고 하는 것은 접두사입니다.

'여러 가지'라는 뜻으로 써졌는데, 이 '위'라는 것은 '여러 가지 중에서 중점적으로 세 가지'를 얘기합니다. 세 가지가 부처님의 사상 중에 핵심이 되는 제행무상(諸行無常), 일체개고(一切皆苦), 제법무아(諸法無我) 라고 하는 삼법인(三法印)을 얘기합니다. 그래서 보통 여러 가지 중에서 ''가 뜻하는 것은 보통 삼법인들 뜻하기도 합니다. 적어도 위빳사나에서 '위'를 말하는 겁니다.

 

첫 번째,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것은, 한번 우리 몸과 마음을,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숨을 들이쉬면 내쉬어야 되고, 먹으면 내어놓아야 되고, 나오면 들어가게 되어있는 것이 세상 만물의 이치입니다. 순간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은 이렇게 머무르지 않고 덧없이 변해간다는 것, 그것을 가슴으로 깨달아라 하는 것이 첫 번째 제행무상, 그리고 첫 번째 수행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두 번째, 일체개고(一切皆苦)라고 하는 것은 모든 생명체는 누구든지 태어나면 육체적이나 아니면 정신적인 괴로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거라. 늙고 병들고 죽고, 덥고 춥고 배고프고 목마르고 이런 일반적인 괴로움을 비롯해서, 환경에서 오는 괴로움들, 원하는 것들을 가지고 싶은데 가질 수가 없고, 또 싫어하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이 같은 환경에서 살아야 되고, 또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것들과 같이 있고 싶은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모든 것이 이렇게 허무하고 무상하게 변화해나가는 것에서 느끼는 조건적인 괴로움들을 통칭해서 불만족(dukkha)이라고 그럽니다. 이런 고통들은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자연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이 고통의 특성을 이해하면 더 이상 집착하지 않고 매달리지 않는다 하는 것이 수행의 두 번째 목표가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하는 것인데, 보통 나, 너, 우리들 이런 실재라고 생각해왔던 것들을 부처님은 분명하게 관념이라고 얘기하셨습니다. 그런 관념에서 벗어나라고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부처님 당시 때도 크게는 여섯 가지 아니면 잘게 나누면 62가지 이상의 사상들이 있었습니다. 그 모든 사상의 근원은 「나」를 전제해서 이루어져 왔습니다. 그런데 부처님만이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고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불교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불교가 태동된 것도 여기에서 태동이 됐고 또 불교에서만 찾을 수 있는 독특한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 때의 다른 사상들이나 또 지금 현재의 사상들은 다들 '나'를 전제해서 자아나 영혼 아니면 신성이라고 하는 것들을 받들고 찾을려고들 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이 구원을 받아서 신이나 하느님이라는 절대자와 일체화된다고 하는 그런 사상들인데, 그런데 불교만이 "나라고 하는 실체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다만 일어나고 사라지는 자연적인 현상일뿐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여러분들이 말하는 신이라는 것도 꼭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에 다 포함이 되는 겁니다!

 

여기에서 여러분들은 귀중한 기로에 서있을 겁니다.

지금까지는 나를 전제로 해서 살아왔단 말이라. '내가 뭘 어떻게 했다. 내가 느끼고 내가 생각했다.'하고 살아왔는데 '나'라는 실체는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고, 실재하는 것이 없다고 했는데, 만약에 이게 부처님 말씀이 맞다고 할 거 같으면 내 삶의 목표와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해야 되는 것이 나를 바르게 이해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앞에 해야 될 일과 뒤에 해야 될 일을 보통 분간하지 못하고 전도몽상 바뀌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걸 갖다가 어리석은 것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실제 내가 존재하는 것인지 아닌지 하는 것을, 내가 조사하고 확인하고 점검하고 나서, 삶의 목표와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는가 하는 겁니다.

 

부처님은 "내가 실재하지 않는다"고 했을 뿐아니라, 형식적으로라도 '그래도 내가 존재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으면 내 영혼이라도 존재하겠지' 라는 그런 의문마저도 용납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부처님 말씀대로 할 것 같으면 우리는 환상이라고 하는 착각 속에 살아왔다고 하는 결과가 됩니다. 과연 이것을 믿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그 가르침이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아무리 살펴보고 찾아봐도 나라고 하는 것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하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에 제법무아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부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생각적으로나 이론적으로라도 우선 이 가르침을 실천해서 검증해야 될 필요성이 있습니다.

의심이 생기니까! 의심을 그냥 묻어두고 그냥 무조건 따라가고 믿을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내가 진짜 그런가 아닌가 하는 것을 검증해 봐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왜? 나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데 왜 부처님이 무아라고 하셨을까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것을 믿든지 안 믿든지 하는 것은 자신이 선택해야 될 부분입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에히빳시꼬 오빠나이꼬 빳짯땅 웨디땁보 윈뉴히띠(ehipassiko opaneyyiko paccattaṁ veditabbo viññūhi ti)"

와서 조사·확인해보고 그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라 할 것 같으면 그것을 따라가라. 그렇게 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이 잘 살아가는 방법이다 하고 얘기를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다고 그럽니다.

달을 보려면 그 달을 봐야하는 것이지 그 손가락 끝을 봐서는 달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가는 길을 부처님이 제시해 놓은 것이 이 세 가지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라고 하는 세 가지 진리로써 제시를 해놓아서, 그것으로 인해서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다 하고 얘기를 해놓은 겁니다.

그래서 위빳사나의 맨 처음에 '위(vi)'라고 하는 것은 이 세 가지를 얘기하게 돼있습니다.

 

그다음에 '빳사나(passanā)'라고 할 때의 '빠'라고 하는 것은 '면밀하게 끊어짐이 없이 자세하게' 라는 뜻입니다. 뒤에 '사나'라고 하는 것은 '꿰뚫어서 알아차린다, 명확하게 관찰한다' 라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위빠사나(vipassanā)'라고 하는 의미자체는 '삼법인의 진리를 자세하게 꿰뚫어서 관찰해 나가는 것이다'는 뜻이 됩니다.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라는 삼법인의 진리를 바르게 관찰하고 자세히 봄으로 인해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것이 부처님의 실천수행법이고, 부처님의 핵심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확인하는 의미가 됩니다.

 

세상에 사람이 생겨나고 나서부터 이 괴로움을 벗어나는 방법을 찾아서 많은 사람들이 노력을 했고 그런 종교가, 그런 신앙들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했습니다.

그중에서 이 위빳사나라고 하는 것은 2550년이라고 하는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고 그렇게 이어져 왔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왜 생멸되지 않고 쭉 이어져왔는가?

가장 인간에게 합리적이고 현실적이기 때문에, 그리고 가장 과학적인 수행방법이기 때문에, 또한 스스로 이 수행을 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이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인해서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이어져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선언을 해놓으셨습니다.

"수행자들아! 네 가지 대상을 의지해서 마음을 챙기는 수행을 실천하면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 욕망과 갈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느니라. 그래서 완전한 자유를 얻고 행복과 위없는 지혜를 갖추어서 마음의 해탈을 성취하게 된다." 하고 얘기했습니다.

"마치 갠지즈 강이 서쪽으로 흘러가듯이 이 방법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결코 다른 샛길로 빠지지 않고 분명하게 열반·깨달음을 성취하게 되느니라." 하고 부처님께서 이 사념처, 위빠사나 수행방법에 대한 경의 첫머리에 이렇게 적어놨습니다.

 

인도 가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갠지즈 강은 동쪽으로도 흘러가고 서쪽으로도 흘러가고 어떨 때는 또 북쪽으로도 흘러가고 그렇게 합니다. 그렇지만은 발원지부터 시작을 해서 결국에는 마지막 서남쪽으로 빠져서 바다로 흘러가게 됩니다. 이렇게 갠지즈 강이 그 길을 따라서 쭉 흘러서 서쪽으로 빠지듯이 이 수행방법으로 수행하면 결국에는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하는 것을 부처님이 비유를 해놓았습니다.

 

그 네 가지 대상이 뭐냐? 어떻게 수행하는가? 하는 부분을 그다음에 부처님이 설명을 해놓았습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에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 느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 그다음에 진리‧마음 안팎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 이 네 가지를 마음을 챙겨 알아차리면 무상‧고‧무아라고 하는 삼법인의 진리를 깨닫게 된다." 하는 뜻입니다.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인해서 삼법인을 깨달을 수도 있고, 느낌으로 일어나는 현상으로 삼법인을 깨달을 수도 있고, 마음으로 일어나는 현상으로도 삼법인을 깨달을 수 있고, 정신적인 대상으로 일어나는 현상으로도 삼법인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해주는 방법이 뭐냐 하면 이 위빳사나다 하는 얘기입니다.

 

먼저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어떻게 삼법인을 깨닫는가?

우리 몸에는 여러 가지가 흐릅니다. 혈관을 통해서 피도 흐르고, 또 우리의 생각들도 흐르게 되어있고, 또 여러 가지 느낌들도 흐르게 돼있습니다. 서있든 앉아있든 걸어가고 있든 항상 우리는 이 흐름을 또렷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앉아있을 때 흘러가는 것은 배가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호흡입니다. 호흡이 흐르고 있습니다. 걸어갈 때는 다리가 나아가고 내려놓고 하는 것이 흘러가게 되어있습니다.

 

먼저 앉아있을 때 이 흐르는 현상, 호흡이라는 현상을 자세히 관찰을 해보면 바람이 코끝을 스치면서 가슴을 통해 아랫배로 흘러와서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는 과정이 진행이 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랫배가 불러오고 사라지고 하는 호흡의 현상은 어쩌면 우리가 인식을 하든 하지 않든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계속 진행될 수밖에 없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이 호흡을 하면 뭐 우짜겠다는 거냐' 하는 의문을 가지기 쉽겠지만 위빳사나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우리 주변에 있는 것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고, 이 주변에 있는 중요한 부분에 마음을 연결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알아차려서 깨닫게 해주는 방법입니다.

 

먼저 호흡으로써 세 가지 진리를 깨닫는 걸 한번 봅시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면 어떤 현상을 알 수가 있습니까? 들이쉬는 숨하고 내쉬는 숨하고는 분명히 차이가 나죠? 들이쉬는 숨은 산소가 들어오니까 당연히 시원하게 느껴지고, 내쉬는 숨은 이산화탄소가 배출되는 거니까 당연히 텁텁하게 느껴집니다. 들이쉬는 숨하고 내쉬는 숨은 이렇게 차이가 있게 돼있습니다. 변화되지 않는 거라고 할 거 같으면 들이쉬는 숨이나 내쉬는 숨이나 똑같은 느낌, 똑같은 것이 들어왔다가 나갔다가 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 짧은 찰나에 삶과 죽음이라고 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변화되어서 나옵니다. 들이쉬는 살아있는 공기는 그대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죽은 독가스로 변화돼서 나온다는 것이 무상의 진리를 확인해주는 것들입니다. 그것만 그럽니까? 먹는 음식도 신선한 것을 먹고 나면 하잘 것 없는 것으로서 나와야 되고, 모든 것이 변화돼서 흐르게 돼있습니다.

그것을 알아차리도록 해주는 것이 호흡을 통해서 무상(無常)을 아는 것입니다.

 

()를 어떻게 그러면 호흡을 통해서 알 것이냐?

숨을 한 번 쭉 들이쉬고 가만히 참아보십시오. 안 뱉어낼 수 있습니까? 안 뱉어내면 힘듭니다. 힘들면 괴롭게 돼있는 거라. 머물 수 없는 것들을 갖다가 머물도록 할려고 할 거 같으면 힘들고 괴롭다는 거라. 그게 괴로움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어느 부처님 제자가 물어봅니다. "부처님! 내가 왜 괴롭습니까?"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내가 왜 괴로우냐고 물어보면 안 된다. 이 괴로움이 왜 일어났습니까 하고 물어라." 하고 얘기합니다.

숨을 참으니까 힘들고 괴롭다는 거라. 왜 힘들고 괴로우냐는 거라. 숨을 참으니까! 그걸 딱 붙잡아둘라고, 숨이라고 하는 걸 붙잡아둘라고 하니까 괴롭고 힘드는 거라. 집착으로 인해서 괴로움이 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 호흡을 통해서 고(苦)를 알아나가는 방법이라는 거라.

 

무아(無我)는 어떻게 아는 것이냐?

나가세나 존자에게 밀란다 왕이 물어봅니다. '나'가 무엇입니까? 머리카락이 나입니까, 손톱이 나입니까, 또 이 심장이 나입니까? 하나하나 분리해서 봤을 때는 아무것도 나라고 할 수 없습니다. 손톱 하나 짤라 놔 놓고 '나야, 나야, 니가 생각해라. 니가 가라' 한다고 가집니까? 우리 몸은 이렇게 여러 가지가 모여 있는 것일 뿐이라는 거라.

왕이 타고 온 수레, 우리는 보통 수레라고 얘기합니다. 그 수레는 낱낱이 분리해보면 발통부터 시작해서 멍에, 여러 가지들이 있습니다. 멍에를 수레라고 할 수 있는 거야, 아니면 발통을 수레라고 할 수 있는 거야? 수레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은 그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는 거라.

 

호흡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 어느 특정한 부분을 잡아서 나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어디 있느냐는 거라. 내가 들이쉰다고, 내가 조정해서 쉴 수 있다고 하는 부분이 어디 있느냐는 거라. 적어도 살아있으니까 나라고 하는 겁니다.

그 살아있도록 하는 것은 호흡인데 호흡 어디를 잡아가지고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느냐는 거라. 나라고 할 수 있는 것 같으면 내가 마음먹은 대로 숨 한번 들이쉬고 한 일 년 있다가 다시 한번 더 내쉴 수도 있어야 될 거 아니라. 그럴 수 있는 것이 있어요? 못한다는 거라. 아무리 살펴봐도 나라는 존재를 결코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들에게 무아라고 일러주신 것입니다.

 

이런 세 가지 것을 의심이 생기면 묻어두지 말고, 왜 부처님은 저렇게 말씀하셨을까 하고 조사하고 확인하라.

그 확인하는 방법이 이 위빳사나의 길인데, 이 위빳사나의 길은 부처님이 단언을 해놓았습니다.

"갠지즈 강이 서쪽으로 흘러서 빠지듯이 이 길을 따라가면 반드시 목적지에 도달하게 된다. 어느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이것을 오직 한 길이다."하고 얘기합니다. 부처님도 이 길을 갔고, 그 제자들도 이 길을 갔고, 우리들도 이 길을 가야되기 때문에 오직 한 길이다.

 

공중 위에 외줄을 타고 있는 사람이 여기서 저기로 갈 경우에는 갖가지 방법을 통해서 떨어지지 않게끔 하면서, 손으로 잡고 가든지 발로 디뎌서 가든지 아니면 몸을 의지해서 가든지 이 줄에서 저 줄까지 가게 돼있습니다. 떨어지지 않으며!

그 길은 그 외줄 하나 뿐인 것이지 어떤 길도 있지 않다는 거라. 옆으로 새서 빠질 수도 없고, 외줄을 질러서 한발한발 내디디지 않고 날아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거라. 또 둘러갈 수 있는 길도 없다는 거라.

 

언제 어디서든지 또 누구든지 이 길을 따라가면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단 하나밖에 없는 법, 단 하나밖에 없는 길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에까야노 담모, 에까야노 막고(Ekāyano dhammo, Ekāyano maggo)' 하고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길을 따라가는 사람은 분명하게 처음부터 나타나서 마지막까지 나타나는 것이 누구에게든지 해당이 된다는 거라.

 

다른 수행방법은 수행의 과정에 대한 것들을 세세하게 파악해서 말하질 않습니다. 그러나 이 위빳사나 수행법은 열두 가지, 열여섯 가지 지혜의 단계, 그다음에 네 가지 도의 흐름에 드는 단계 이런 것들을 순차적으로 제시를 해놔 놓고, 이 단계를 누구든지 밟아가게 돼있는 것이고, 이 단계를 체험하게 돼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빨리 지나가느냐 늦게 지나가느냐의 차이인 것뿐이지 그 길은 누구든지 밟아나가게 돼있다는 거라. 그래서 이렇게 열심히 정진하고 노력하면 갠지즈 강이 반드시 서쪽으로 흘러가듯이 다른 샛길로 빠지지 않고 열반이라고 하는 깨달음으로 흘러간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이 수행은 인간의 몸을 가진 자만이 완전한 깨달음에 지금 즉시, 지금 여기서 해나갈 수 있기 때문에 천상에 태어나는 것은 바라지도 말고 구하지도 말아라. 그래서 이 몸을 받았을 때 생사윤회의 족쇄에서 벗어나라 하고 간곡하게 얘기를 하는 겁니다.

 

부처님의 자비가 크다고 하는 것은 이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있는 상황이 됐을 때 벗어날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한순간도 더 마무르지 않게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부처님의 자비를 크다고 대자대비라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밑에 줄을 한번 보십시오.

[위빳사나 수행은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알아차리고 집중이라는 적극적인 방법을 통해서 현상에서 드러나는 실체를 파악하여서 지혜를 발전시켜나가는 것이다.] 하고 얘기를 해놓았습니다.

그래서 이 위빳사나 수행은 결코 어려운 방법이 아닙니다.

밑에 부분은 사족에 해당이 되겠고, 그것을 하는 방법, 앉아서 하는 수행방법에 대한 것들을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한번 쭉 읽어보면 크게 모르는 부분 없을 겁니다.

 

앉아서 하는 수행방법에 대한 것들을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가부좌해서 앉든 반가부좌해서 앉든, 아니면 책상다리로 해서 앉든 불편하면 의자에 앉든 중요한 것은 자세가 아니라 어떤 자세든 자신에게 편안한 자세를 취하도록 하라 하는 겁니다.

그 대신에 내 몸과 밖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데 용이한 자세가 되도록 해야 됩니다. 가장 편안한 자세, 숨을 자연스럽게 쉴 수가 있고 몸이 경직되지 않고 부드럽게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자세가 발의 자세입니다.

 

오래도록 앉아있기가 힘들면 편한 평발자세도 관계가 없습니다.

오히려 스님 입장에서는 그 평발자세, 한쪽 다리를 붙이고 한쪽 다리 앞쪽으로 한쪽 다리를 놓는 방법이 가장 오래도록 수행하고 또 여기에 걸림 없이 수행할 수 있는 자세가 됩니다. 발의 자세는 그 그림에는 여러 가지를 그려놨지만 자기에게 맞는 방법으로 하면 됩니다. 그것도 한 자세가 끝까지, 열반에 이를 때까지 간다고는 얘기를 못합니다. 이 방법을 했다가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다른 방법으로 하니까 오히려 더 수행이 잘된다 할 거 같으면 그 자세를 취해도 관계는 없습니다.

 

그러고 나서 수행자들이 마음을 배에다 두도록 해야 됩니다.

마음이 눈에 가도록 하면 안 됩니다. 마음이 내 가슴에 가도록 하면 안 됩니다. 마음은 항상 대상, 배면 배에다 두어야 하고 코면 코끝에다가 두도록 해야 됩니다. 마음을 대상, 배로 정했으면 배에다 정했으면 배에다가 두어야 만이 배가 들어오고 나가고 하는 움직임을 알게 됩니다.

배에다가 마음을 두고 배가 불러오고 꺼지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릴 수 없으면 손바닥을 배에다가 대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면 배가 불러오고 꺼지는 움직임을 분명하게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배가 불러올 때는 배가 일어나는 것이고, 배가 꺼질 때는 배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해야 됩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배의 움직임에 대해서 관찰하도록 해야 됩니다.

배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은 실재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배에다가 마음을 두고 배의 형태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배가 불러오고 꺼지는 움직임과, 움직임으로 야기되는 느낌들, 육체적인 느낌들을 인식해야 합니다.

배의 형태에 마음을 두지 않고 이렇게 움직임과 느낌들에 관찰하는 수행을 계속 해나가야 됩니다. 이렇게 해야 만이 마음이 깨어있고 마음이 대상에 집중해나가고 마음이 명확하게 관찰을 해나가는데 효과적이고 이러한 것들을 발전시켜 나가게 됩니다.

 

처음에는 잘 안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수행이 자꾸 진척돼나가다 보면 가장 먼저 배의 움직임이 분명하게 인식되어 나갈 겁니다. 움직임을 알고 마음으로 일어나는 연속적인 것을 알아차려나갈 때만이 이 위빳사나 수행은 발전을 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아무리 할려고 해도 집중력도 약하고 주의력도 약하기 때문에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움직임을 분명하게 알아차릴 수는 없습니다. 또한 그 움직임과 그 느낌들을 계속 마음을 유지해서 관찰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이렇게 어렵다고 해서 '아, 참 나는 잘 안 된다'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마십시오. 처음에는 배우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십시오.

 

단지 배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은 지금 현재이다 하는 사실만 알면 됩니다.

그래서 조금 전에 지나쳐버린 것을 두고 후회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참 안 되는구나' 아니면 '내가 참 잘 되는구나' 하고 생각을 하면 이미 그동안에 배의 호흡을 놓쳐버리고 지나쳐버리게 됩니다. 누구든지 이 과정을 겪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단순하게 배가 불러오고 사라지는 것에만, 그 움직임과 느낌에만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참 어렵다 하는 사실만 알면 됩니다. 어려운 건 어려운 것이고 누구든지 어렵게 돼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수행을 항상 깨어있으면서 계속 해 나갈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현재 내가 배를 관찰하고 있으면 배를 관찰이 잘 되든 잘 안되든 현재에 자꾸 머무르면서 수행해 나갈려고 그렇게 해야 됩니다.

 

입으로 '일어남' '사라짐' , 마음으로 '일어남' '사라짐'하고 반복하지는 마십시오!

마음으로 반복하는 것은 실재적인 배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거하고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냥 그대로 배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과정만, 신체적인 과정만, 그 움직임만 지켜볼려고, 주시할려고 해야 됩니다.

 

이렇게 하려다 보면 또 오래도록 하려다 보면 배의 움직임을 뚜렷하게 알기 위해서는 일부러 길게 숨을 들이쉬거나 길게 숨을 내쉬거나 이렇게 하는 수가 있습니다. 잘 관찰이 안 돼나갈 때! 그렇게 하면 금방 피로해지고 또 수행에 방해가 되고 장애가 일어나기가 쉽습니다. 가장 자연스럽게, 평상시 내가 의식하지 않았을 때 쉬는 숨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냥 자연스럽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십시오.

 

설혹 내가 그 움직임이나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거는 당연한 것이다 생각하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내버려두고 그냥 그대로 배가 들어오고 나가고 하는 움직임만 완전히 깨어서 알려고만 하면 됩니다.

처음에는 명칭 자체를 부여하지도 말고 그 흐름만 먼저 파악해서 '아! 이런 움직임이 있고 이런 느낌들이 일어나는구나' 하는 것만 알면 됩니다. 설혹 모른다고 하더라도 숨을 인위적으로는 쉬지 마십시오. 가장 자연스럽게 쉬도록 그렇게 노력을 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시간에는 그 밑에 부분 '대상을 관찰할 때 명칭을 붙이는 것은' 하는 부분부터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