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위빳사나[기초수행반]

기초수행04. 경행방법1 (20071019)

담마마-마까 2019. 12. 30. 20:22

https://youtu.be/Qk2OfTqVTfY

 

* 기초수행04. 행선- 경행 방법1 (20071019)

 

오늘은 경행하는 부분에 대해서 얘기하겠습니다.

수행하는 사람들이 행복을 얻는 게 보통 두 가지가 있다고 그럽니다.

일부러 알아차림을 노력하면서 얻어지는 행복이 있습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몸의 아픈 통증이 있다든지 아니면 호흡을 관찰하든지 이렇게 했을 때 아! 내가 모르는 사실을 알아나가게 되고 또 그러한 통증이나 이런 것들을 사라지게 하는 것들을 보고 이러면서 얻어지는 행복이 있습니다.

 

그에 못지않게 또 큰 행복이 어떤 거냐 하면 일상적으로 살아가면서 얻어지는 행복입니다. 걸어가면서도 부처님 말씀을 명확하게 이해를 할 수 있게 되고, 또 일상생활을 할 때도 그걸 이해하게 되면서 얻어지는 행복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걸어갈 때, 전에는 부처님 말씀 몰랐을 때는 막 두리번두리번하면서 온데 다 쳐다봐가면서 갑니다. 그러다 부처님 말씀을 듣고 나서 마음은 하나의 대상밖에 취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그걸 실험을 해보는 거라. 가면서 보는 대상을 봤을 때 소리가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 확인도 해보고, 또 소리가 들릴 때는 눈앞에 있는 대상이 보이는지 안 보이는지도 확인해보고, 이런 식으로 쭉 해나가다 보면 거기서 오는 행복감이 또 있습니다.

 

또 일상생활을 할 때 만약에 접시를 닦는다면 접시를 닦으면서 얼마만큼 알아차림으로 인해서 명확하게 이 일을 할 수가 있는가, 또 그로 인해서 내가 실수하는 것이 없이, 또 마음의 번뇌가 없이 일을 해나갈 수가 있는가 하는 이런 것들을 체험해나가다 보면 거기서 오는 행복들이 오히려 앞에서 일부러 내가 그러한 환경조건을 만들었을 때 오는 것들보다도 더 큰 행복을 가져온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보통 여러분들은 일상생활을 해나간단 말입니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천천히 이렇게 하지를 못한단 말이라. 실제로는 천천히 하면서 오는 행복감이 더 큽니다. 그런데 지금 당장은 안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인위적으로 몸을 천천히 하도록 하라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천천히 해야 만이 뭘 조금이라도 알게 되는 거지. 애들이 밥숟가락 넣을 때 처음에 가져오는 것을, 어릴 때 한번 보십시오. 빨리 가져오는 법이 없습니다. 왜 그렇겠어요? 내가 이걸 잘 못하기 때문에 이걸 덜덜덜덜 떨면서 천천히 가져온다는 거라. 그리해도 겨우 입에 넣을동말동 할 정도가 된다는 거라.

 

수행의 포인트는 항상 3단계로 나눠집니다.

그게 뭐냐면 맨 처음에는 '슬로우 모션'이라 그럽니다. '천천히 행하라.'

어떤 것이든 일상생활을 하는 것이든 아니면 인위적으로 좌선을 하든 경행을 하든 수행을 할 때 처음에는 전부 다 천천히 해야 됩니다. 행동도 천천히 해야 되고 또 그것을 생각하고 알아차려 나가는 것도 그에 맞게끔 천천히 하나씩 하나씩 알려고 해야 되지, 그걸 한꺼번에 다 알려고 해서는 절대 안된다는 거라.

그래서 기본 조건이 항상 처음에는 익숙해지기 전에는 천천히 하려고 해야 된다 하는 겁니다. 말을 할 때도 일상적으로 말을 할 때 보다도 더 천천히 또박또박 할려고 하고, 일상생활 할 때도 일부러 더 천천히 하나씩 하나씩 하면서 알아차려 나갈려고 하고, 그렇게 천천히 하는 훈련들을 해야 되고.

 

천천히 하고 나면 그다음에 해야 되는 것이 뭐냐하면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들을 알아차려나가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축구나 이런 것처럼 '생중계 하듯이!' 생중계하는 것은 어떻게 됩니까? 지나간 것은 절대 못 봅니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것도 절대 못 봅니다.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만 단지 내가 볼 뿐입니다. 알아차리는 것도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만 자꾸 알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생방송을 하듯이 내가 해야 됩니다.

 

지금 일어나는 몸의 현상이나 느낌의 현상이나 여러 가지 현상들을 지금 현재 것만 자꾸 알려고 해야지, 지나간 거 생각도 할려고 하지도 말고 다가올 거 걱정도 하지 말고, 지금 현재만 자꾸 알려고 노력해야 됩니다.

천천히 해나가면서 지금 현재에 자꾸 머물도록 하고, 그러다 보면 뭘 알아지는가 하면 '내가 뭘 하고 있는가'를 알게 됩니다. 내가 움직이고 있다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생각하고 있으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렇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을 어느 정도는 이해를 하게 됩니다.

 

이해를 하고나면 그다음에 해야 될 게 뭐냐면

'이해한 상태에서 일어난 느낌들, 느낌들을 관찰할려고 해야 됩니다.'

걸어갈 때는 걸어가는 느낌들이 있고, 생각할 때는 생각했을 때의 느낌들이 있습니다. 좋은 걸 생각했을 때의 느낌하고 싫은 걸 생각했을 때의 느낌이 분명히 다릅니다. 그리고 좌선하고 앉아있을 때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할 때, 불러오고 꺼지고 할 때의 일어나는 느낌들이 또 다 다릅니다. 그래서 느낌들을 이해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게 수행의 기본 포인트입니다.

 

그게 돼야 만이, 이게 한 사이클로써 이루어지고 나야 만이 거기서

'아! 이게 참 무상한 것이구나' 하는 것들을 이해하게 되고, '아! 이렇게 일어나는 것이 이마만큼 힘드는 것이구나, 괴로운 것이구나' 하는 것들도 이해하게 되는 거고, '그 어디에도 몸과 마음의 현상만 있지 어디에도 내 것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돼서, 그로 인해서 지혜가 완전하게 돼서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고 하는 겁니다.

수행은 항상 이런 것들을 기준 잣대로 해서 나아가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또한 지금 여러분들이 수행하는데 잘 안 된다 해서 그것에 대해서 낙담할 필요도 없고 크게 신경을 안 써도 됩니다.

 

자! 예를 들어서 사리불 존자가 참 많은 걸 가지고 있던 분입니다.

지혜도 가지고 있었고 두타행도 남들보다 더 잘했고 또 어제 얘기했지만 화를 다스려나가는 것들도 훨씬 뛰어났다고 그럽니다. 자기 머리를 누가 뒤에 와서 시험해 본다고 탁 해가지고 머리가 터져서 피가 날 정도가 되더라도 화를 내지 않고 '무슨 일이 있었느냐?' 하고 돌아보는 그런 마음을 가진 분입니다. 우리보다 더 훨씬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사리불 존자가 부럽죠? 그렇지만 사리불 존자에게 있는 그런 지혜나 두타행이나 이런 것들을 여러분들이 가져올 수 있는 겁니까? 못 가져오죠! 절대 가져올 수 없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만들기 전에는!

 

그러면 내가 가지고 있고 가지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해서 그걸 자기 인생의 가치판단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조금 더 나아가면 내가 돈이 많다 돈이 적다, 아니면 내가 지금 건강하다 건강하지 못하다, 남들한테 칭찬받는다 그렇지 못하다, 그걸 왜 지금 가치판단으로써 둬버리냐는 거라. 그렇게 안 됐으면 만들면 되는 거고. 이런 것들을 보통 사람들은 '잘못된 견해'라고 그럽니다.

 

부처님도 이것을 여덟 가지로써 비유를 해놓았습니다.

그 여덟 가지는 가지고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서 판단을 내려야 되는 것이 아니고, 그로 인해서 또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럽니다. 돈 많다 해가지고 행복합니까? 그건 안 그렇다는 거라. 그래서 못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우울하거나 의기소침할 필요는 없다하고 그럽니다. 그래서 고요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고 하는 것은 그런 것으로 인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깨어있음으로 인해서 사물을 정확하게 판단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될 때 오는 것이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합니다. 실제적으로 여러분들도 경험을 해보면 분명히 그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뭐라고 얘기했는지 아십니까?

'백 년을 깨어있지 않고 사는 것보다, 단 하루라도 깨어있고 사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그럽니다. 백 년 동안 그렇게 사는 것보다도 단 오늘 하루라도 명확하게 깨어있으면서 알아차림 하면서 사는 것이 훨씬 낫다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알아차림을 하기 위한 훈련으로써 이 [위빳사나 기초수행반]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나간 부분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도 하지 말고, 또 다가올 부분에 대해서도 그렇게 염두에 두지 말고, 지금 현재 내가 뭘 하고 있는가만 자꾸 알아차리도록 해나가야 됩니다.

 

자! 행선 - 경행 부분 보시기 바랍니다.

 

경행을 시작할 때는 똑바로 선 자세에서, 보통 약 2m 앞 정도 됩니다. 6피트나 자기 키보다 조금 더 1.5배 정도 되는 지점에 시선을 두도록 해야 됩니다. 앞을 쳐다 보는 것이.

지금 나눠준 프린트물 말고 여러분들 원래 교재부분입니다.

걸을 때 왼발 걸을 때는 '왼발' 하고 명칭을 붙이고, 오른발 나갈 때는 '오른발' 하면서 명칭을 붙이면서 알아차려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경행을 하다가 앞에 장애물이 있거나 돌아서야 될 때는 '멈춤'하고 멈추고 나서 돌아서고, 돌아서는 것이 돌아온 자리 그대로 다시 일직선으로 왔다갔다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해서 돌아서서 다시 또 '왼발' '오른발' 하면서 나아가는 것이 경행의 기본입니다.

 

그러면 왜 눈을 반쯤 뜬 상태에서 2m 전방을 주시해야 되는가?

눈을 완전히 감고는 경행을 못합니다. 평형감각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그래서 많이 흔들려 버립니다. 그런데 수행을 좀 많이 하다 보면 일부러 눈을 감고 경행을 하기도 합니다. 내가 알아차리는 대상을, 명확하게 이 대상만 알아차리면서 걷고 있는가? 하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일부러 눈을 감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눈을 감고 하려고 하면 당장 자빠질라 해싸서 눈을 뜨게 됩니다.

그렇다고 눈을 완전하게 뜨지는 말고 반쯤 뜬 상태에서 한 2m 앞을 쳐다봐야 되는데, 눈을 정면을 향해버릴 것 같으면 정면에 있는 시각대상에 마음이 휩쓸려버립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정면을 향하더라도 눈은 아래로 향하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리해야 만이 정면에서 오는 것들, 그리고 양쪽 옆에서 오는 것들을 갖다가 방어를 해나갈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눈은 어떤 경우든지 좌우에서 오는 시각적인 것들로부터 차단을 시켜줘야 됩니다.

그래서 정면 2m 앞을 보더라도 한 점을 볼려고 자꾸 노력들을 해야 됩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내가 앞에 있는 연경이를 보고 있다.

그러면 연경이의 코를 딱 볼 거 같으면 코 이외의 다른 것들은 희뿌연하게 보이면서 안 보여야 되는 거라. 한 점을 본다는 것은! 그런데 보통 어떻게 합니까? 여러분들은 한 점을 보는 것이 아니고, 코를 볼 것 같으면 얼굴 전체가 다 보여 버립니다. 그렇죠?

한 점을 본다는 것은 거기에 집중을 한다는 뜻입니다. 불을 낼 때도 한 점에 계속 힘을 가해야만이 불이 일어나집니다. 이쪽저쪽으로 흩어질 거 같으면 절대 불이 나지 않습니다. 알아차림도 집중하는 포인트, 겨냥하는 대상이 한 점이 돼야 되는 것이지, 여러 점으로 흩어져버릴 것 같으면 알아차림이 지속되지도 않을 뿐아니라 집중하는 것들도 일어나질 않게 됩니다. 그래서 앞의 대상을 볼 때는 한 점을 자꾸 볼려고 해야 됩니다.

물론 그 한 점은 내가 이동하는 방향에 따라서 조금씩 조금씩 달라지겠죠! 달라지더라도 항상 하나하나 하나하나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하나의 대상씩 이어지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리고 걸어가면서 왼발을 들 때 '왼발' 하면서 들고, 오른발을 들 때 '오른발' 하면서 명칭을 붙이면서 알아차려 나가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러다가 조금 더 ‘왼발, 오른발’을 알아차리고 나면,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하면서 알아차려 나가야 됩니다.

 

경행을 하다 보면 처음에 '왼발'하고 알아차리고 '오른발'하고 알아차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상에 명칭이 일치가 되지 않을 거 같으면 오른발이 나아가면서도 '왼발'을 하는 수가 있습니다. 또는 꼭 그렇게는 안 되더라도 이미 왼발에서 오른발로 옮겨지는 상태에서 미리 '오른발'하고 명칭을 붙이기도 합니다.

그마만큼 대상에 일치시키는 것은 힘이 듭니다. 그렇지만 그 대상을 명확하게 인식을 할려고 할 거 같으면 명칭을 부여해줘라! '오른발' 하고 명칭을 부여해 줬을 때는 오른발이 반드시 움직이고 나아가고 내려놓을 때 '오른발'이라고 명칭을 부여해줘야 됩니다.

 

어느 정도 '왼발' '오른발'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나서, 그 '왼발, 오른발'의 움직임을 알고 나서는, 그다음에 해야 되는 것이 '한 발씩 알도록' 해야 됩니다.

 

2단계, 3단계, 6단계, 12단계까지 쭉 이렇게 나아가집니다.

 

그런데 통상적으로 처음에 수행할 때는 세 단계로 구분을 해서 알아차리는 것이 좋습니다.

왼발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고 할 때, '들어올림' 하면서 발을 들어올리고, '나아감' 하면서 나아가지고, '내려놓음' 하면서 내려놓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고' 이렇게 할 동안에 마음이 방황할 수도 있고, 생각을 일으킬 수도 있고, 앞에 있는 대상을 보기도 할 겁니다.

그럴 때는 즉시 걸음을 멈추고 마음속으로 '방황' '방황' '방황' 아니면 '생각' '생각' '생각' 아니면 '봄' '봄' '봄' 하면서 생각이나 방황하는 것이나 보는 것이 사라질 때까지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그 사라짐이 일어난 후에 발의 움직임으로 마음을 돌려서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하면서 발의 동작을 알아차리면서 걷도록 해야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통상적으로 걸어가면서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합니다. 걸어가면서 앞에 있는 대상을 보기도 합니다. 걸어가면서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그런데 마음이라는 것은 하나의 대상밖에 모릅니다. 하나의 일어난 마음은 하나의 대상밖에 취하지를 않게 돼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습관적으로 그렇게 해오기 때문에 자꾸 마음이 산란해지고 마음이 뭘 하는지도 모르고 따라가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이때까지 습관화 돼있었다는 겁니다.

그걸 고치기 위해서라도 하나씩! 하나씩! 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볼 경우에는 멈추고 나서, '봄' '봄' 하면서 보고 나서, 그다음에 걸어가도록 하고.

 

마찬가지로 일상생활을 할 때도 대부분이 두 가지 일을 합니다. 대부분이! 텔레비전을 보면서 밥을 먹는다든지, 밥을 먹으면서 얘기를 한다든지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그럴 때 한번 잘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조금만 깨어있다고 할 거 같으면 이야기할 동안에는 거의 대부분이 보면 밥을 먹는 걸 모릅니다. 이야기할 동안에는 어떨 때는 밥숟가락을 떠가지고 있는 상태에서도 얘기를 합니다. 뭘 얘기하는 겁니까? 얘기할 때는 사실은 이것은 정지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정지해 있지 않고 습관적으로 얘기하면서 밥숟가락을 넣는 것뿐입니다.

 

엄밀하게 따지면 마음은 얘기하다가 밥숟가락을 움직이는 것으로 갖다가 다시 또 얘기하다가 이렇게 정신없이 왔다갔다 하고 있는 겁니다. 실제적으론!

단지 우리가 그걸 모르고 있었던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생활에서 내가 얼마만큼 산만하게 습관화되어 있느냐는 거라. 그것을 고치기 위해서라도 일상생활에서도 물론 그렇게 해야 되겠지만 경행을 할 때도 하나씩 하나씩 자꾸 구분을 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래서 걸어갈 때는 걸어가기만 하고, 얘기할 때는 얘기하기만 하고, 볼 때는 보기만 하고, 생각할 때는 생각하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옛날 선사들도 그런 얘기 했죠. '밥 먹을 땐 밥만 먹고, 잠잘 때는 잠만 자라. 그것이 도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대부분 밥 먹을 땐 밥만 안 먹거든. 생각할 때 생각만 안 하고.

 

그렇게 해서 갔다가,

마지막 가는 길이는 보통 넓을 때는 20m 정도를 일직선으로 걸어가는 것이 좋습니다. 20m가 안 될 때는 그보다 짧게 해도 관계는 없습니다. 일직선으로 걸어갔다가 그대로 발을 멈추도록 해야 되는데, 멈추는 사실을 알고 멈추도록 해야 됩니다.

 

자! 여기의 경우를 봅시다. 저기에서 걸어와서 여기에 왔다. 그럼 마지막 순간에 보통 사람들이 보면 이 대상을 먼저 보고 나서 멈추겠다는 마음을 내고 멈춥니다. 그런데 수행을 조금 더 잘하는 사람들은 그냥 앞만 보고 걸어와집니다. 걸어와지다가 앞에 발이 나아가면서 대상에 발이 탁 부딪치면 부딪치는 사실을 명확하게 탁 알고 나서는 '부딪침'하고, 부딪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발이 멈추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멈춘 사실을 알고 발을 다시 뒤로 돌려야겠다는 의도를 내고 나서 '뒤로 돌림' 하면서 발을 멈춥니다. 그런데 대부분 그렇게 안 하죠? 이리 오면 부딪칠까봐서 겁이 나서, 이미 멈추겠다는 마음을 먼저 내버립니다. 그러고 나서는 발이 멈춥니다. 그러면 그 멈추겠다는 마음으로 인해서 멈추게 됩니다. 맞습니까?

 

동작이 일어날 때는 항상 의도가 먼저 일어납니다.

의도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멈추기 전에 분명하게 내가 볼 수가 있습니다.

마음이 앞서서 행위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다른 때보다도 멈추기 전에 분명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마음이 몸의 주인이라서, 마음이 몸의 동작을 이끌어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 이 '멈춤'의 상태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멈출려고 할 때는 더욱더 관찰을 뚜렷하게 할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멈추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할 거 같으면 '멈추고자 함' 하고 나서 몸이 멈출 때 '멈춤' 하면서 발을 멈추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멈추고 나면 어떻게 됩니까? 뒤로 돌아서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야 됩니다.

돌 때는 또 어떻게 합니까? 돌 때도 꼭 마찬가지로 하나의 동작이 끝나고 나서 다음 동작이 일어날 땐 항상 의도가 먼저 일어납니다.

그 의도를 관찰하기 쉬운 것이 동작이 끝나고 다음 동작이 일어날 때입니다. 그럴 때는 연속적인 동작이 일어날 때는, 의도를 처음에는 관찰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런데 하나의 동작이 탁 끝나고 나서는 의도를 관찰하기가 참 수월합니다. 그래서 항상 걸을 때는 내가 지금 의도를 관찰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멈추고 나서는 '돌고자함' 하는 명칭을 부여해주고 나서 '돎' '돎' '돎' 하면서 돌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처음에 갈 때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냥 '가고자함' 하고 나서 가도록 하고 나서, 발이 왼발 오른발 할 때는 '왼발 가고자함' 하고 나서 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왼발' '오른발' 했죠.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이렇게 연속적일 때는 의도를 처음에는 관찰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명칭을 일부러 부여해주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가면 그것도 다 의도가 있어서, 하나의 의도로 인해서 하나의 동작이 일어나고 그 동작이 사라지고 나서, 다시 하나의 의도가 일어나서 하나의 동작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는 '의도'를 항상 먼저 넣어줍니다.

 

그렇지 못하고 연속적인 동작에서는 대부분 관찰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의도'라는 명칭을 부여해주지 않고, 하나의 동작에서 다음 동작이 일어나는 상태에서는 의도를 관찰하기가 쉽기 때문에 '의도'부분을 명칭으로써 부여를 반드시 해줘야 됩니다.

 

그래서 걸어가는 처음에는 '걸어가고자함' 하고 나서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이렇게 명칭을 부여해주고, 멈출 때도 '멈추고자함' 하고 나서 '멈춤' 하면서 발을 내려놓고, 몸을 돌릴 때도 '돌고자함' 하고 나서 '돎' '돎' '돎' 하면서 돌고,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행선의 방법입니다.

 

이 행선은 항상 일상수행을 할 때 수행의 처음에는 좌선보다도 행선을 먼저 해야 됩니다. 행선이 먼저 되고 나서 좌선이 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행선에서 얻어지는 알아차림과 집중은 좌선할 때보다도 더 훨씬 크게 다가와집니다.

보통 마음은 가만히 붙잡아들려고 할 거 같으면 안 잡혀있습니다. 걸어갈 때는 어떻게 됩니까? 마음이 더욱더 활기찰 수밖에 없습니다. 노력하는 힘도 더 훨씬 배가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알아차림의 힘과 집중하는 힘들도 훨씬 더 많이 일어나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처음 수행할 때는 반드시 이 행선을, 좌선과 행선을 1 1 비율로 해야 됩니다. 30분 앉았으면 30분은 경행을 하고, 1시간 경행했으면 1시간 좌선을 하고 이런 식으로 비율을 자꾸 맞추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이 경행의 방법입니다.

여러분들에게 프린트물로 내준 경행부분을 한 번 보도록 하십시오.

 

부처님 당시 때 경행으로 깨달음을 이루었던 분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아난다 존자도.

부처님이 열반하고 나서 제1차 결집이 있었습니다. 500명의 아라한들이 모여서 경과 율을 송출했던 것입니다. 그때 부처님 말씀을 가장 많이 들었던 분은 아난다입니다. 부처님 45년간 중에서 25년간 시자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20년간도 아난다가 시자가 되는 조건 중에 하나가 "내가 못들은 부분은 부처님이 다시 얘기를 해주십시오." 해가지고 부처님이 다시 그 부분을 아난다 존자에게 시간 날 때마다 쭉 얘기를 해줬습니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부처님 45년 기간 동안 설법한 내용을 다 들었던 분은 아난다 존자 밖엔 없다 하고 말하다시피 합니다.

 

그런 분이었기 때문에 부처님의 경과 율을 갖다가 부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고 이런 계율을 갖다가 제정했다는 것을 확인할려고 할 것 같으면 아난다 존자가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그 1차 결집에 참가하는 조건은 아라한만 참가가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아난다 존자가 아라한이 아니었거든. 그래서 피나게 노력을 합니다.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

 

위빳사나 수행은 오히려 알아차릴려고 지나치게 노력하면 더 안됩니다.

물 흐르듯이 즉각 즉각 알아차려나갈 것 같으면 오히려 수행이 더 잘돼나갑니다. 지나친 노력이 오히려 수행을 방해하는 수가 있습니다.

아난다 존자도 꼭 마찬가지였습니다. 밤새 경행을 했거든. 지나치게 노력을 한 거라. 가만히 생각하니까 아닌 거라. 내가 지나친 노력으로 인해서 오히려 몸과 마음이 더 피곤해졌을 뿐 아니라 알아차림이 더 둔화됐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아! 이게 아니구나' 하면서 내가 조금 누워서 조금 쉬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내고 뒤로 누웠습니다.

눕는 자세에서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알아차리면서 누울 거 아닙니까? 그럼 누우면서 어떻게 됩니까? 몸이 좀 릴렉스하게 됩니다. 되면서 한 발은 땅에 닿고 한 발은 미쳐 땅에 닿지 않고 들린 상태에서 엉덩이도 바닥에 완전히 닿지 않은 상태에서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여러분들도 언제 그런 깨달음이 올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것 뿐아니라 부처님 제자 중에 짝쿠빨라라고 하는 제자도 꼭 마찬가지 상황이었고, 마지막 제자인 수밧다 제자도 꼭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분들도 다 똑같이 경행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르렀던 분입니다.

 

통상적으로 한번 예를 들어볼까요? 좌선을 통해서 깨달음을 이룬 분들이 많겠습니까, 경행을 통해서 깨달은 분들이 많겠습니까? 경행이라는 것은 움직이는 대상을 보는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꼭 좌선이 아니더라도 물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깨달음에 이르렀다든지, 아니면 자기 목을 이렇게 죽을라고 착 베면서 깨달음에 이르렀다든지 이런 것들이 다 포함된다고 할 때, 좌선은 거의 없습니다. 움직이는 상태에서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들입니다.

대부분은 언제 여러분들한테 그런 상황이 올지는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부처님이 말씀하신 수행법으로 자꾸 연습을 하고 그로 인해가지고 자꾸 한 발짝씩 다가가는 것이 내가 설혹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행복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로 인해서 번뇌도 엷어지고 또 낱낱이 내가 알아차려 나가니까 생각도 적어지고 판단해야 할 일도 적어지고 참 행복하구나 하는 것들을 믿고, 더더구나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이 길이기 때문에, 최고의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자꾸 실천해 나갈려고 노력들을 해야 됩니다.

 

그러다 보면 알아차림을 항상 놓치지 않고 어느 때든지 알아차려 나가겠다 하는 마음을 가지다 보면 아난다 존자와 짝쿠빨라 존자와 같은 그런 상황들이 여러분들에게 언제 닥치든지 닥치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이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시간과 때가 없다' 하고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자! 그 경행이란 무엇인가 하는 부분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경행이 중요한 이유에 대해서 처음 부분에 얘기했습니다. 반드시 수행의 균형을 유지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것이 이 경행입니다. 그래서 경행을 반드시 하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한 번 더 경행을 하는 것에 대해서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수행을 할 때는 위나 옆이나 뒤쪽을 보면 안 됩니다. 앞부분만 보고 걷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마음이 대상과 일치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음이 걸어가는 발걸음, 그 걸어가는 대상과 일치할 때, 그렇게 일치해서 알아차림으로 인해서 더 이상 번뇌는 발전하지 않게 됩니다.

어떤 경우든지 마음은 대상이 보임과 동시에 알아차리면 더 이상 번뇌가 일어나지 않고, 더 이상 발전하지 않게끔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처음 부분에서는 명칭을 분명하게 붙여주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걸어갈 때 발을 들어올리고, 앞으로 나아가고, 내려놓고 할 때,

들어올릴 때 알아차리는 것이 발이 들려지는 움직임을 보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발이 들려지는 움직임과 동시에 일어나는 느낌들, 발을 들 때는 가벼운 느낌들이 일어나집니다. 발을 들 때 가벼운 느낌이 커지는 것을, 가벼운 느낌들은 점점 더 커집니다. 그것을 자꾸 알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발이 앞으로 나아갈 때는 나아가는 움직임과 함께 가벼운 느낌도 커집니다.

또한 몸이 이 발에서 저 발로 무게중심이 이동하는 것들도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발을 내려놓을 때는 발이 밑으로 내려가는 움직임과 동시에 무거운 느낌이 점점 커지는 것을 느끼도록 하십시오.

 

다시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발을 들어올릴 때는 들어올리는 움직임과 동시에 가벼운 느낌이 커지는 것을 알도록 하십시오. 느낌도 순간순간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발이 앞으로 나아갈 때 나아가는 움직임과 동시에 가벼운 느낌이 커지고, 몸의 무게중심이 이동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차려 나갑니다.

발을 내려놓을 때는 발이 밑으로 내려가는 발의 움직임과 함께 무거운 느낌이 커지는 것을 느끼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발을 들어올릴 때 '들어올림', 나아갈 때 '나아감', 내려놓을 때 '내려놓음' 하면서 발을 움직이도록 하는데,

 

발을 내려놓을 때 되도록이면 발을 똑같이 내려놓도록 하십시오.

앞발(앞꿈치)이 먼저 닿는다든지 뒷발(뒷꿈치)이 먼저 닿는다든지 이렇게 하지 말고, 되도록이면 처음에 할 때는 발바닥이 동시에 닿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또한 발걸음 보폭은 한 발뼘 정도만 나아가도록 해야 됩니다.(자신의 발사이즈)

발이 많이 나아간다고 할 것 같으면 발(발바닥)이 동시에 착지를 할 수가 없습니다. 뒷발(뒷꿈치)이 먼저 닿든지 아니면 발이 옆으로 가든지 그렇게 돼버립니다.

 

또한 발을 너무 지나치게 들어올려 버릴 것 같으면 내려놓을 때는 앞발(앞꿈치)이 먼저 닿을 수가 있습니다. 지나치게 너무 올릴려고도 하지 말고, 일정하게 올려서 내려놓을 때는 그대로 내려놓도록(발바닥 전체가 동시에 닿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수행하는 사람의 시선은 항상 앞 전방 앞에 아래 한 점을 향하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누가 옆에 지나가더라도 지나가는 것을 몰라야 됩니다. 누가 여러분들한테 누가 지나갔느냐 물어봤을 때 "나는 모릅니다." 하고 얘기할 정도로 전혀 몰라야 됩니다. 지나가는 것들을!

 

부처님이 밤에 좌선을 하고 있었는데 천둥번개가 쳐가지고 그 주변에 있는 집들이 와르르 다 무너져버렸어요. 당연히 사람도 죽고 가축도 죽었어요. 아침에 와서 보니까 주변이 다 초토화 돼있어. 사람들이 부처님한테 물어봅니다.

"부처님! 이렇게 천둥번개가 치는 걸 몰랐습니까?" "나는 몰랐다."

"그럼 잤습니까?" "나는 안 잤다."

"안 잤는데 어떻게 모릅니까?"

대상을 알아차리고 있을 때는 주변에 일어나는 것들을 전혀 모릅니다.

여러분들도 걸어갈 때는 걸어가는 데만 알아차림을 유지해서 명확하게 알고 걸어가고 할 거 같으면 그 주변적인 것들은 전혀 모릅니다. 아예 백지화되다시피 됩니다. 혹시 걸어가다 보면 그런 경험들을 할 겁니다.

 

그럴 때는 내가 대상에 정확하게 일치시켜주고 있다는 것을 알면 됩니다. 그것 때문에 '아! 기쁘다' 하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 내가 수행 잘 하고 있다'는 생각만 잠시 일어나고 나면, 그 사실만 알아차리고 나서 다시 대상을 알아차리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만약에 그렇게 하는데 주변이 자꾸 보인다 할 거 같으면 '아! 내가 아직 알아차림이 약하구나' 하는 사실만 알고 자꾸 더 노력을 하도록만 하면 됩니다. 괜히 그것 때문에 아까 처음에도 얘기했지만 내가 못 가진 것에 대해서 부러워할 필요도 없고 그것으로 인해서 짜증을 낼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수행을 하다 보면 그게 참 잘 안 됩니다.

 

어느 스승에게 제자가 오랜만에 찾아왔거든.

그래서 그 제자한테 "오! 그래. 빨리와 빨리." 이렇게 했어요. '빨리와 빨리' 이렇게 하고 나서 그 제자가 보니까 다시 스승이 팔을 천천히 뻗었다가 다시 한번 더 이렇게 구부리는 거라.

그 제자가 와서 물어봅니다. 여러분들 같으면 그 사실도 아마 몰랐을 거라. 그 제자는 그래도 명확하게 알아차리면서 살아갔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알고, "스승님 왜 그랬습니까?" 아, 내가 깜빡했다는 거라. 기쁜 나머지 알아차림이 없이 그냥 빨리 오라고 했다는 거라. 그러고 나서 즉시 아! 내가 알아차림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팔을 한 번 뻗었다가 뻗은 사실을 알고, 다시 또 굽힌다는 걸 알고 굽혔다는 거라.

 

마찬가집니다. 여러분들도 보면 하다가 아! 안 되고 있다는 걸 알 겁니다. 틀림없이! 그럴 거 같으면 안 되고 있다고 그만두지 말아라는 거라. 한 번 더 알아라는 거라. 천천히 내가 되돌아서 내가 한 번 더 해보겠다 하고 그대로 다시 알아차리면 그만입니다. 그렇게 해도 안 될 경우에는 또 한 번 더해. 여러분들이 해야 될 거는 바로 그거라는 거라.

수행을 할 때는 이와 같이 해야 됩니다.

 

그리고 팔은 앞에든지 뒤에든지 고정하도록 해야 됩니다.

뒤로 살짝 손을 맞잡든지 앞으로 살짝 맞잡든지 몸이 긴장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몸의 다른 부분이 움직이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팔랑팔랑한 옷을 입어가지고 할 경우에는 거기에 많이 신경 쓰이겠죠? 그래서 그런 것들은 되도록 피하고, 그래서 수행할 때는 수행복을 입어라 하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걷는 거 외에는 다른 움직임이 전혀 없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신체적으로도 움직이는 것이 없어야 될 뿐만아니라 마음도 걷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 외에는 다른 것들은 다 없애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시선을 아래로 향하고 아주 좁은 범위로 고정시킨 상태에서,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주의 깊게 마음으로써 알아차리도록, 그 알아차리는 주의 깊음이 대상을 향하도록 자꾸 하다 보면,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게 알아차려나가질 겁니다.

 

뒤에 나간 프린트물 2페이지 부분까지 오늘 했습니다. 다음 시간에 경행과 사대부분에 대한 것들을 해나가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오늘은 경행을 한번 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