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수행기초[초보수행반] 법문

무엇에 의지하면 안전할 것인가? (20081118)

담마마-마까 2020. 1. 12. 10:17

https://youtu.be/5vmxBtiQ3b0 

* 무엇에 의지하면 안전할 것인가? (20081118)

 

무엇에 의지하면 안전할 것인가?

우리 혜전님은 뭐 의지하는 게 안전해요? (대답)

뭐 부처님이든 예수님이든 마리아님이든 이런 부분을 말하는 건가?

 

종교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것에든 의지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고 생각을 보통 합니다. 어디든지 의지를 해야지, 의지하지 않으면 불안하다 생각들을 합니다. 불안하다는 것은 종교를 가지든 가지지 않든 이 세상에 태어나면 태어남과 동시에 같이 따라다니는 그러한 요소들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런 불안감으로 인해서 어떤 것에든 의지할려고 합니다.

단편적인 예로 그런 불안감을 떨치기 위해서 대부분 종교를 가지죠. 그래서 절대적인 신이라는데 의지합니다. 아까 혜전님 말한 것처럼 그런 변하지 않는 어떤 유일한 신들을 의지를 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아마 이 지구상에 반 이상의 사람들이 그런 형태들을 띠고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는 사람들은 또 뭔가를 의지합니다. 조그만 것은 뭐 부적을 의지하든지, 아니면 뭐 굿이라든지 제사라든지 이런 것에 의지하든지 그렇게 합니다. 그렇지 않고 또 좀 현실적인 사람들은 돈 같은데 의지를 합니다. 돈이나 권력 아니면 지위 같은 데다가. 그래서 돈을 열심히 모으고 경제적인 활동을 할 동안에는 그런 불안감이 없습니다. 부적을 몸에 지녔을 때는 또 그런 불안감을 해소를 합니다. 절대적인 신을 의지를 할 때도 그와 같이 불안감들을 해소를 합니다.

단지 돈이나 이런 것에 의지하는 사람들은 조금 더 현실적인 것뿐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의지할 대상을 현실적인 것이 아닌 초현실적인 것에서 찾는 것뿐입니다. 조금 더 현실적인 사람들은 가족들에게 의지를 합니다. 자식이라든지 남편이라든지 부인이라든지 아니면 형제라든지 이런 데에 의지를 하게끔 됩니다.

 

그 의지하는 대상이 이런 구체적인 것이든 아니면 종교적인 것이든 그런 것을 의지한다고 해서 완전하게 불안감이나 공포감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 가서 아니면 절에 가서 절대적인 신을 의지한다고 하더라도 그때는 그렇지만 돌아오고 나면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닙니다. 현실적인 불안감들은 또 그대로 존재를 하게 됩니다. 돈을 버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그런 불안감들을 해소는 시켜줄지 모르지만 완전하게 없애주지는 못한다는 겁니다.

대상들 자체가 그렇다는 겁니다.

 

또 가족들을 의지한다고 하더라도 얼마 전에 수능이니까 아이한테 “엄마가 니 지켜줄테니까 열심히 잘 쳐라.” 이렇게 해서 애가 엄마를 의지해가지고 시험을 쳤다. 아니면 “엄마가 기도 열심히 했으니까 시험 잘 칠 거야.” 아니면 엄마가 절대적인 어떤 신들을 의지해가지고 이렇게 하니까 마음이 든든하죠. 그렇지만 정작 답을 쓸 때는 그 신이, 아니면 엄마가 힌트 하나 줄 수가 없습니다. 애가 풀어야 되는 것이지. 그 어떤 것도 가족이나 절대적인 신도 그런 불안감들을 해소를 해줄 수가 없고 현실적인 문제들을 나누어줄 수 없는 것들입니다.

 

결국 우리가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의지한다는 것 자체는 각자의 마음의 문제에서 발생한 것이고, 마음의 문제를 해결해야 만이 확실한 것이지 다른 것을 대상으로 해서는 안 된다 하는 그런 겁니다.

 

저번에도 의지할 대상을 삼보로 하라 하고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삼보라고 하는 것도 의지할 대상입니다.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완전하게 깨달음을 이루신 분이라는 의지할 대상, 그분의 가르침인 진리라는 대상, 또 그 길을 따라가는 성스러운 제자들이라는 대상. 이런 대상이 나에게 의지할 대상이다 하는 그런 겁니다.

 

그렇지만 삼보를 의지하는 것도 완전하게 불안감을 해소시켜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 이렇게 삼보라는 것을 의지하니까 그래도 믿음이 생긴다는 거라. 아! 부처님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또 담마에 대해서 실천해 보고, 또 상가의 가는 길을 쭉 보니까 따라갈 만한 그런 분들이고 하는 것들이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이 있으니까 삼보를 의지하는 것이지, 믿음이 서는 것뿐인 것이지, 그것을 의지한다고 해가지고 지금 내 당면 문제들이나 아니면 불안감들이나 공포감들을 완전히 해소시키고 몰아낼 수는 없다는 거라.

 

삼보 삼귀의나 세 가지 대상에 의지하므로 인해서 참 좋구나 하는 그 정도뿐이라.

비교 해가지고 다른 대상보다는 좀 그래도 의지할 대상으로서는 맞다 하는 것뿐입니다. 다른 대상은 바뀔 수가 있지만 재물도 바뀌는 것이고, 아이들도 바뀌는 것이고, 절대적인 신이라는 것도 사실은 절대적이지 않고 바뀌는 겁니다. 내가 그 신을 믿지 않으면 그 절대적인 신은 존재를 하지 않고 변하는 겁니다. 기독교를 믿다가 이슬람교를 믿을 거 같으면 절대적인 신은 바뀝니다.

 

이렇게 어떤 것이든 바뀌는데 삼보도 물론 바뀝니다. 세 가지 의지할 대상이 바뀌지만 그 대상 자체는 그것으로 인해서 아! 내가 이것을 의지함으로 인해서 마음의 평안과 평온을 가져와서 좋다 하는 정도일 뿐이지 다른 대상하고 사실은 별반 차이는 없습니다.

 

그런데 차이 나는 것들이 뭐냐 하면 다른 대상들은 거기서 끝나버리지만은 삼보를 의지하는 대상으로 삼는 것은 그런 믿음으로 인해서 확신을 가져다준다는 거라.

그렇게 내가 실천하고 따라가다 보니까 아! 이것이 진짜구나 하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는 거라. 다른 대상들은 내가 절대적인 신이 될 수 없고, 내가 돈이 될 수 없고, 내가 아이가 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확신들을 가져다 줄 수가 없다는 거라. 단지 그냥 믿는다는 것뿐인 거라.

 

그래서 세 가지 의지할 대상을 가짐으로 인해서 확신으로 바뀌게 되면 의지하는 것들이 사라져버립니다.

궁극적으로는 의지할 대상이 없어야 된다는 겁니다. 세 가지 의지할 대상이라는 삼보 자체도 확신으로 바뀌고 나면 크게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전에는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아침 저녁으로 까라니야 멧따 숫따-필수독송 자애경을 열심히 독송한다든지, 마음이 좀 안 좋을 때는 부처님 일대기를 꺼내 읽는다든지, 아니면 부처님이 가르친 수행을 열심히 따라해 본다든지, 이런 데 와서 스님 법문 들어서 신심을 일으킨다든지, 이렇게들 한단 말이라.

자꾸 그리하다 보니까 나도 인제 그걸 이해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아! 부처님이라는 우리가 생각하는 절대적인 신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나도 마찬가지로 그와 같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쉽게 말하면 붓다가 될 수 있다 하는 그런 마음들을 가지게 되고, 또 그렇게 따라가고, 그 법을 실천하다 보면 서서히 눈에 보이는 거라.

그래서 어느 정도 확신이 들고 나면 인제 그 뒤부터는 별반 스님 법문도 별 필요가 없고, 경전도 별 필요가 없고, 또 시간 딱 정해놔 놓고 예불하고 경전 읽고 하는 그런 것들도 별반 필요가 없게 됩니다. 어느 정도 확신이 들었기 때문에!

 

그래서 수행을 하다 보면 최고 먼저 떨어져 나가는 게 그런 계금취입니다.

허례의식들, 얽매여져 있는 부분들! 목요일날 아니면 화요일날 선원에 가서 수행해야 된다 하는 것들, 이런 매여져 있는 것들이 딱 떨어져 나가버립니다. 일요일 되면 교회가야 된다 하는 그런 것들도 마찬가지. 기독교는 그런 확신들을 심어 줄 수가 없는 형태들이기 때문에, 신에 의지해야 되기 때문에 일요일에 대해서 빠지면 굉장히 목사님들이 나무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불교는 그렇게 하지는 않죠! 화요일날 기초수행 정해진 날에 기초수행 안 온다고 해서 이놈 죽일놈 살릴놈 이러지는 않는다는 거라.

왜? 이 화요일 수행하는 이 시간도 그런 의지할 대상에 대한 확신을 스스로가 가져서 의지할 대상마저도 놓아버리고, 스스로 의지하게끔 만들어주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거라. 그 도구가 될 거 같으면 당연히 나오든 안 나오든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거라.

 

부처님 당시 때 한 비구니가 출가를 했는데 출가하고 나서 임신을 한 사실을 알았어요. 출가할 때는 임신 했는지 안 했는지를 몰랐는데 출가하고 나서보니까 아기를 가졌거든. 그래가지고 승단 내에서도 문제가 많이 되었어요. 출가한 비구니가 아이를 가졌다 하면 이상하게 생각 하니까. 아니나 다를까 출가한지 7개월이 못 되어가지고 아이를 낳았거든. 나중에 알고 보니까 출가하기 전에 임신을 했던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출가한 비구니가 결국 아이를 기르게 되는 결과가 되는 거라. 전혀 허물이 없는 거니까.

 

십이 년간을 애를 길렀어요. 이 비구니가 출가해서 살았지만 뭘 의지했겠습니까? 애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거라. 애한테 열심히 뭘 해주고 해서 잘 키웠죠. 열두 살이 넘으니까 어느 날 애가 엄마 비구니한테 그렇게 얘기합니다.

"인제 나한테 의지하지 마시오. 당신에게 의지하시오" 이 비구니 스님이 깜짝 놀랍니다. 천년만년 내 곁에 있을 것처럼 생각했던 아들이었는데, 이 아들이 나를 귀찮아하거든. 귀찮아서 제발 내 생각하지 말고 출가했으니까 수행이나 하시오. 당신의 수행이나 해가지고 열심히 도닦아가지고 깨달음에 이르라는 거라. 당신 일이나 하지 내 일을 자꾸 하지마라는 거라. 12년간 매달려가지고 의지해왔던 것이 하루아침에 그냥 물거품이 돼버립니다. 그때서야 정신을 번쩍 차립니다.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불안해서 뭔가를 의지를 해야 됩니다.

그런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으면 뭔가를 붙잡아둘 대상이 반드시 필요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 대상이라 하더라도 그 대상 자체를 뛰어넘을 수 있는 대상을 잡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의지할 대상으로 인해서 그 대상을 뛰어넘어서 내 스스로를 의지하는, 그리고 스스로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는 상태가 되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은 대상을 자꾸 붙잡고 있을 거 같으면 오히려 더 나쁜 고리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적어도 이 자리에 온 사람들일 거 같으면 절대적인 신 아니면 절대적인 '나'라고 하는 그런 대상을 의지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리고 가족 친지라고 하는 대상들도 마찬가집니다. 경제적인 것, 권력과 명예 이런 것들에도 의지하지 말아라는 거라. 의지해서 목표는 달성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나의 불안감들이나 공포감들이나 삶의 평화로움을 완전하게 해소해 주지는 못한다는 거라.

 

그래서 반드시 뭔가를 의지할 대상으로 잡을 때는 삼보를 먼저 의지할 대상으로 잡고, 그 대상자체도 결국은 확신을 가지게 되므로 해서 뛰어넘을 수 있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처음으로 법을 얘기했던 분이 누구냐면 우빠까(upaka)라고 하는 분입니다.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일곱 군데를 돌아가면서 일주일씩 선정삼매를 여유롭게 즐기고 나서 녹야원에 있는 다섯 명의 수행자에게 법을 설하기 위해 떠납니다. 떠나면서 처음 만났던 사람이 이 우빠까입니다.

 

우빠까가 저쪽에서 부처님이 걸어오는 모습을 보니까 그렇게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일 수가 없거든. 그 모습이 이때까지 다른 사람들에게서 보지 못했던 모습이라. 그래서 물어봅니다. "당신의 스승은 누구냐?" 참 얼굴이 고요하고 평온하고 보기 좋다. 당신의 스승이 과연 누구기에, 그리고 그 스승의 가르침이 어떤 것이냐? 어떤 가르침을 받고 어떤 스승을 의지했기에 이렇게 고요하게 보이고 평화로워 보이느냐 하는 거라.

 

그때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삽바-비부(Sabbābhibhū)" 그렇게 얘기합니다. 삽바- 모든 것들을 , 아비부- 넘어섰다. '모든 것을 뛰어 넘었다. 모든 것을 성취했다.' 그것을 보통 한자로 일체승자(一切勝者), 나는 최상의 존재다 하고 그렇게 표현을 합니다.

그다음에 부처님이 "삽바-위두(sabbavidū)" 그렇게 얘기합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 한자로 일체지자(一切智者) 그렇게 얘기합니다. 모든 것을 다 뛰어넘어 버리고,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

"삽베수 담메수 아누빨릿또(sabbesu dhammesu anūpalitto)" '어떤 것들, 어떤 조건지워진 것, 어떤 사상들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사로잡히지 않는다.'

"삽반자호(sabbañjaho)" '모든 것들을 놓아버렸다.' 어떤 걸 놓아버렸냐면

"딴학카예(taṇhakkhaye)" '갈애들을 소멸해 버렸다.' 그걸 갖다가 소멸해버렸기 때문에 완전히 놓아버렸다.

그래서 "위뭇또(vimutto)" '나는 해탈했다. 나는 완전하게 깨달았다.'

그래서 "사양 아빈냐야 깡 웃디세이양(sayaṃ abhiññāya kam uddiseyyaṃ)" 그렇게 얘기합니다. '스스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나의 스승이 없다. 나를 뛰어넘는 스승이 없다' 하는 거라.

 

쉽게 얘기하면 "당신은 누구를 스승으로 하고 어떤 가르침을 받아서 수행했습니까?" 하고 물어본 것에 대해서 부처님이 그렇게 얘기합니다.

"나는 내 스승이 없다." 나보다도 뛰어난 사람이 없다는 거라. 나하고 동일한 사람도 없고 그것이 이 세상 사람뿐 아니라 천상에 있는 신까지도 절대적인 신까지도 전부다 통틀어가지고 비교를 해봐도 내하고 필적할 만한 대상이 없다는 거라. 내가 바로 가장 최상의 존재다. 내가 완전한 깨달음을 이룬 자이기 때문에 내 이상의 스승은 없다는 거라. 나는 그렇게 깨달음을 이뤘기 때문에 나는 평온하고 나는 해탈을 이뤘고, 그래서 나는 이 진리를 설하기 위해서 녹야원으로 가는 중이다 하는 거라. 스승이 누구냐, 가르침이 무엇이냐 물어본 것에 대해서 이렇게 당당하게 얘기합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얘기를 들을 거 같으면 어떤 사람들은 “아! 그래요? 가르침이 뭡니까? 좀 가르쳐 주시오.” 하고 얘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 같고, 또 어떤 사람들은 콧방귀를 뀌는 사람들도 있을 거고. “지가 뭐라고”

이 우빠까라고 하는 사람은 후자였던 모양이라. 서른다섯 살 된 수행자가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그래 니 잘났소.” 하고 얘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라.

당신이 한 말이 만약에 그게 사실일 거라고 할 거 같으면 당신은 '아난따 지노(ananta jino)' 라고 칭해야 될 것입니다. '가장 최상의 승리자'라고 칭해야 될 것입니다. 그때 부처님이 뭐라고 얘기하느냐면 그래 "그거 맞다 나는 최상의 승리자다." 쉽게 말하면 우빠까가 빈정대듯이 '그래 니 잘났소' 하고 얘기하니까 부처님이 '그래 내가 잘났다'하고 당당하게 얘기하는 거라.

 

부처님은 그런 겁니다. '아난따 지노(ananta jino)'라 해서 앞으로 이후도 이와 같은 분, 이와 같은 존재, 이와 같은 승리자는 없다 하는 겁니다. 부처님 이상 가는 스승은 없다 하는 거라. 당당히 부처님은 선언했거든. 절대적인 신, 그리고 사람들, 그리고 어떤 것들을 다 살펴봐도 내 이상 가는 스승은 없다!

 

여러분은 뭘 의지할 거라?

 

그런 스승과 그런 가르침 또 그런 분의 길을 따라가는 성스러운 분들을 의지해서, 그 의지 대상으로 인해서 나에게 평온함을 가져오고, 그런 확신들을 가져와서 깨달음에 이르도록, 그리고 마음의 평온과 지혜를 가지도록 자꾸 노력들을 해야 됩니다.

 

처음부터 얘기했지만 무엇에 의지하면 될 것인가 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인 것은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의지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불안하고 힘들고 할 때는 삼보를 의지해가지고, 그 의지대상으로 인해서 내가 실천하게 되고 확신을 가지게 돼서, 그것조차도 놓아버리고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의지할 대상으로 해서 끊임없이 노력들을 하고 자꾸 노력들을 해야 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 시간들부터는 수행 상에서 자주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한 의문들을 가지고 조금 조금씩 얘기를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프린트물 다음 시간부터 나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