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수행기초[초보수행반] 법문

아수바 산냐(asubhā sañña)_유골과 부정상 (20170727)

담마마-마까 2020. 1. 22. 17:06

https://youtu.be/1srOMTBdW8I

* 아수바 산냐(asubhā sañña, 부정상) (20170727)

 

오늘은 유골과 부정상 - 아수바 산냐라는 것에 대해서 하겠습니다.

아수바 바와나(asubhā bhāvanā)라는 게 있고,

아수바 산냐(asubhā sañña)라는 게 있습니다.

예비수행 중에 부정관, 부정상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오늘은 부정상(asubhā sañña)에 대한 얘기를 좀 하도록 하겠습니다.

요즘은 누가 돌아가실 때 유언을 할 때 보면 그냥 화장하고 흩어버려라 하고 화장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돌아가실 분이 그렇게 유언을 했다 하더라도 남아있는 가족들이 그걸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 하는 것 그게 문제입니다. 잘 지키면 문제가 없는데 가족만 있는 게 아니고 친척들이 있기 때문에 절대로 그렇게 못한다 해가지고 다툼이 있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절충안으로 하는 것이 화장을 하기는 하는데 유골을 납골 형식으로 모셔두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돌아가신 분을 추억하고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서는 참 좋은데 그 이상의 다른 의미들을 찾을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다투는 걸, 어제 그제도 그런 걸 누가 얘기를 하면서 다투는 모습을 보기도 하고, 간간이 그런 것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들을 봅니다.

 

그래서 유골이라는 것이 어떤 개념인가, 부처님 사리도 포함된 겁니다.

부처님 사리도 다 포함된 유골이라는 게 어떤 개념인가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고, 그러고 나서 살아있는 분들이 해야 되는 것이 그런 죽은 이나 아니면 그런 유골 등을 통해서 어떤 수행을 해야 될 것인가 하는 부분에 대한 얘기를 좀 하도록 하겠습니다.

 

돌아가신 분을 구제하기 위한 방법은 사실은 없습니다.

그래서 경전에도 돌아가신 이를 위해서 공양 올리고 보시 올린다 해서 그 사람을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하고 명시를 해둔 상태입니다. 왜 그러냐면 살아있는 분들한테도 그 사람이 행한 일들을 여러분들이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부처님도 구제를 못 해줬는데 여러분이 그걸 구제해 줄 수 있는 방법은 없는데, 돌아가신 분들에게는 더더욱 더 그렇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아마 스님이 정확하게 날짜는 모르겠는데 다음달 되면 백중한다고 각 절에서는 아마 지금 하고 있는 절도 있고 그럴 겁니다. 그게 「우란분경」을 근거로 해서 그렇게 돌아가신 조상들에게 공양을 올린다 해서 그 조상들을 천도시켜준다는 건데, 빨리어 경전에는 그런 부분들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아귀사경」이라고 하는 경에는 그런 부분이 나옵니다. 아귀로 태어난 조상이 아귀계에서의 사는 생명(수명)이 거의 다되어갈 무렵에, 그때 스님들에게 누군가가 공양을 올리는 때인데, 공양 올리면서 떠들썩하게 하고, 공양 올린 것에 대해서 스님들이 아누모다나를 하면서 그것들에 대해서 찬탄하고 공덕을 회향하는 게송들을 합니다.

이와 같은 공덕으로 건강하고 행복하시오 하는 게송들입니다. 그 게송들을 하며 떠들썩하게 기뻐하는 소리를 듣고, 그 아귀가 나에게 살아있는 가족들이 공양을 올리는구나 하는 걸로 착각을 해가지고, 그래서 기쁜 마음을 일으키는 순간에 그 아귀의 목숨이 다 끝났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렇게 기뻐하는 마음으로 인해서 그다음 생에 천상세계에 태어나는 기회가 됐다 하는 그런 것은 있습니다.

 

아귀계는 관계있는 사람들이 일으키는 마음을 음식으로 해서 살아가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분들이 일으키는 마음들 좋은 마음이든 싫은 마음이든 기뻐하는 마음이든 증오하는 마음이든 그것으로 인해서 영양분으로 삼고 살아가게 되고, 또 그것으로 인해서 그 아귀가 일으키는 마음으로 인해서 업이 되어서 그 다음생으로 이어지고 이렇게 되는 결과들을 가져와지게 됩니다. 그런 부분은 있습니다. 그런데 돌아가신 모든 분들에게 공양을 올리고 제사를 드린다 해가지고 그분들, 돌아가신 분들이 다음생에 천도가 된다든지 아니면 극락에 간다든지 하는 대목은 전혀 나오질 않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도 아귀계도 아귀계의 목숨이 아직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것으로 인해서 다음 생이 정해지는 법은 없습니다. 마침 그 찰나가 아귀계의 목숨을 버리는 찰나에 또 그 공양을 올리는 소리를 듣고 기뻐하는 마음을 일으켰기 때문에 천상에 태어났다는 것이지 아귀계에 태어났다 해서 모든 것들을 우리가 공양을 올리고 하는 것으로 인해서 천상에 태어나도록 유도한다는 법은 또 없습니다.

그 부분은 분명한 부분이니까 여러분들이 잘 알아야 됩니다.

 

그렇게 했을 때 여러분들이 아귀계에 올리는 그 고마움이 회향을 했을 때 그것들의 영향을 단지 일부만 미칠 수 있다 하는 것뿐이다 하는 그것을 분명하게 알도록 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엄밀하게 얘기하면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뭐 사십구재도 없을 뿐아니라 이런 백중이라고 하는 천도재나 이런 것들도 없고 하물며 기제사 조차도 존재를 하지 않습니다. 단지 추억하기 위해서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수는 있지만 그것들이 그 공덕이 돌아가신 분께 회향이 된다고 인식하고 있는 경우는 없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부분은 알 수 있도록 하고.

 

어쨌든 돌아가신 분을 화장을 해서 흩어버리면 참 좋은데 그러지 못할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보통 이렇게 보면 됩니다. 여러분 몸은 깨끗합니까?

 

사리뿟따 존자가 그런 비유를 들어놓은 게 있습니다.

아주 잘 생긴 외모에 아주 수려한 옷을 입고 깔끔하게 몸을 단장하고 온 청년이 탁 앉아있는데 그 앉아있는 몸의 목에 더러운 구렁이가 이렇게 기어가는 모습이 보이는 것과 같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몸은 실제로는 하나하나 뜯어보면 굉장히 더럽습니다. 머리털 하나를 뽑아봐도 굉장히 더럽고, 또 피부도 아마 모르긴 해도 요즘 같은 여름철에는 반나절만 씻지 않아도 금방 더러워지고 냄새가 납니다. 모공에서 분비물들이 이렇게 나오고 그럽니다.

 

그래서 첫 번째가 부정한 것을 청정하다고 해서 착각을 일으키는 것, 그것이 처음부터 문제가 되게 됩니다.

그다음에 유골을 모실려고 생각을 가지는 것에는 그것뿐 아니라 실제로는 무상한 것인데 죽고 나면 몸은, 몸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이 떠난 몸은 그냥 서서히 부패되어서 없어져 버리든지 아니면 화장을 해가 흩어버리더라도 싹 흩어져버리는 것이지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고 변화되지 않는 것은 아닌데 그걸 항상하는 것으로 생각을 한다는 거라. 무상한 것을 영원하다고 착각을 하는 것으로 인한 것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유골은 그 사람이 아닙니다. 실제로는 살아있을 때도 무아인데 죽고 나서 그것이 그 사람과 동일시하는 '나'라고 착각해서는 안된다는 거라. 그렇게 무아를 자아로써 착각을 하는 것들.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을 할 때 사람들은 아! 뭔가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납골을 할려고 한다고 한다든지 아니면 어떤 수단으로든지 그것을 보존할려고 한다든지 그런 마음들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대로 할 거 같으면, 무상·고·무아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이 '나'라고 하는 것들이고 이 몸이라고 하는 것이고 마음이라고 하는 것인데, 그것들을 거역하고자 할 때, 항상 조상에 대한 것들을 가질려고 하고 뭔가 추억할려고 하는 것들을 가진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명심을 해야 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죽음에 이를 것 같으면 그런 생각을 항상 가져야 됩니다. 죽음에 이르고 나서 마음이 떠난 이 몸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건 죽고 난 여러분들이 관여할 부분도 아닐 뿐 아니라 또 그걸 누군가가 관여해가지고 유골로 만들고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여러분들과는 다른 부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럼 평소에 여러분들이 가져야 되는 것은 죽음에 이르고 나서는 그런 흔적들을 남기지 않으려고 자꾸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게 요즘은 수목장이라 그럽니까? 수목장이라 해서 나무 아래나 이런 데 가서 화장한 재들을 싹 뿌려버리고 하는 것들이 가장 좋은 방법에 속하기도 합니다, 지금 현재로서는. 그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색법으로써의 유골에 대한 것들을 먼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몸은, 나는 뭐로 만들어져있죠? 색(色)과 명(名)입니다. 물질적인 색(rūpa, 루빠)과 정신적인 명(nāma, 나마) 이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물질적인 색(色)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색수상행식 할 때의 오온으로서의 색(), 그거는 물질과 정신을 얘기할 때의 물질을 말할 때를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우리가 보통 육근을 통해서 뭔가를 보고 듣고 뭐 어쩌고 했을 때, 색성향미촉법 할 때의 육근에서 나오는 색(), 이것은 물질적인 대상을 말할 때를 얘기합니다.

그래서 색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유골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은 색수상행식의 색을 얘기합니다.

 

그 색(色)이라고 하는 것들에 대한 것들을 조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물질적인 몸이 생긴다는 것은 네 가지에 기인해서 여러분들의 몸이 생겨난다고 합니다.

첫 번째 죽고 나서 뭐를 가지고 영향을 받습니까? 업의 영향을 받습니다. 업으로 인해서 여러분들 몸이 태어나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그다음에 이 몸은 뭐에 또 영향을 받습니까? 마음에 영향을 받습니다. 마음이 안 좋으면 몸도 아파지는 거고, 마음이 즐거우면 몸도 즐거워집니다. 이렇게 마음의 영향을 또 받습니다.

또 하나는 이 몸은 살아갈려면 뭐로 해야 돼요? 끊임없이 뭔가를 먹어야 됩니다. 영양소가 기인이 됩니다.

그다음에 이 몸은 또 하나 네 번째가 보통 기후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걸 시절이라고 얘기합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에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나이를 먹으면 이 몸은 반드시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죽고 나서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이 네 가지 중에서 뭐에 해당이 되느냐면 그 기후, 계절이라고 하는 것이 원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유골이라고 하는 것은 이 네 번째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고, 계절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돼요? 덥거나 춥거나 합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덥거나 춥거나를 느끼는데 죽은 자들은 덥거나 춥거나를 모릅니다. 기후라고 하는 원인이 이미 단절되어버렸기 때문에.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떠나버리고, 업이라는 것이 다른 조건으로 바뀌어버리고, 이럴 거 같으면 그건 죽은 자라고 그렇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골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감각을 느낄 수가 없고 그다음에 그것으로 인해서 덥고 춥고 하는 것들을 알 방법이 없습니다. 그게 유골이라고 하는 겁니다.

 

경전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욕계 색계에 있어서의 이 몸이라고 하는 색은 생멸적 현상적인 존재이며, 늘 불변하는 실체적인 존재가 아니다.]

위빳사나 수행으로 인해가지고 깨달음에 이르는 분들은 그러한 몸이라고 하는 색은 영원불변하는 것이 아니고, 그 몸이라고 하는 색 그 자체는 무상한 것이고 무아라고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서, 그 몸이 바뀌는 것에 따라서 마음이 바뀌는 법은 없다 하고 그랬습니다. 마음은 항상 평안하고 고요함에 머물러 있다 그렇게 경전에 나와 있습니다.

 

가만히 한번 보십시오. 이 몸만 떼어놓고 보면 몸은 몸이 열반에 가는 것도 아니고, 몸이 선을 행하는 것도 아니고 악을 행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 몸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많은 역할들을 합니다. 몸이 있음으로 인해가지고 나는 번뇌에 얽매이기도 하고, 또 뭔가 가족이나 이런 것들에 결박되기도 하고 하는 여러 가지 역할들을 합니다. 그러한 특징들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부분은 이 몸이라고 하는, 색이라고 하는 특징은 어떠한 경우든지 무상하다는 겁니다. 변한다는 것들은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 몸이라고 하는 것은 죽을 때까지 계속적으로 늙어가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 몸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윤회나 해탈로 이끄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몸을 굳이 애지중지하고 또 죽은 자의 그 몸을 갖다가 유품으로 남겨야 될 이유는 불교적으로 봤을 때는 어디에도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그 몸에 대해 분명하게 알아차렸을 때 마음의 평온을 가질 수가 있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이 몸은 어떻게 알아차려야 될까? 경전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 몸은 부정하다 하고 알아차려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 몸은 부정하고 혐오스럽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려라. 한번 생각을 좀 해보십시오.

 

아수바 산냐에 대한 설명을 좀 하겠습니다.

사실은 아수바 산냐를 설명하는 것이 굉장히 조심스럽습니다. 지금은 거의 대부분이 이 수행법들을 잘 안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러냐면 요즘은 누가 죽음을 맞고 나서, 그 죽어가는 모습을 그대로 지켜보면서 그 사람을 보내는 경우들은 없습니다. 대부분은 관에 바로 넣어버리든지 염을 해가지고 관에 넣어버리든지, 아니면 바로 화장을 해버리든지 이렇게 하지, 시체가 뒹구는 모습을 보는 경우는 잘 없습니다.

 

그런데 일부 승가의 승원들이나 병원에는 그러한 모습들을 전시를 해두기는 합니다. 그 시체가 썩어가는 모습들을 1일차 2일차 3일차 이런 식으로 쭉 전시를 해두는 경우들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는 보통 사람이 죽고 나서 변화되는 모습들을 잘 못 봅니다. 그래서 수행들을 지도할 때도 스승들이 '아수바 산냐'는 잘 안 가르칩니다. 그 대신에 '아수바 바와나(부정관)'라 해가지고, 이 몸의 머리털부터 해서 피부 이빨 이런 것들을 순차적으로 관찰하라 해서 '아수바 바와나'는 가르치는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여기서는 아수바 산냐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아수바 산냐는 여러분들이 죽음에 이르렀다고 생각을 하고 상상들을 하면서 수행을 하면 좋습니다.

 

죽고 나서 몸이 부풀어 오르는 것,

그다음에 죽고 나서 몸이 검푸러지는 것,

죽고 나서 몸이 문드러지는 것,

그다음에 관절이나 이런 것들이 짜개지면서 그 관절관절 사이가 분리가 되나가는 것들,

그다음에 그렇게 분리되고 나서는 개나 산짐승들이 그것들을 물어뜯는 것,

그리고 그 몸은 한곳에 있지 않고 전부 흩어져버리는 것,

흩어지는 것이 나중에는 난도질당한 것처럼 되어서 깨지고 부서지고 해가지고 뿔뿔이 흩어져버리는 것,

그 바닥에는 온데 피나 가죽 피부 이런 것들이 널브러져 있는 것,

거기에는 벌레나 날짐승들이 와가지고 들끓고 있는 것들,

그다음에 마지막으로는 해골이 되어있는 것들,

 

이것들을 관찰하는 게 아수바 산냐라고 하는 겁니다.

 

이 열 가지를 처음에는 입으로 외웁니다.

죽고 나서 몸이 부풀어오르고 색깔이 변하고 썩어 문드러지고 하는 이런 식으로 순차적으로 입으로 외웁니다.

그다음에는 마음으로 외웁니다.

그다음에는 그것을 색깔로써 보게 됩니다. 처음에 죽고 나서 첫번째의 색깔과 그다음에 썩어 문드러졌을 때의 색깔과 나중에 뼈만 남았을 때의 색깔과 이런 색깔이 다 다릅니다. 이렇게 색깔로써 구분하기도 하고.

그다음에 모양으로써 구분하기도 합니다. 처음에 죽었을 때의 모습하고 나중에 바뀌어 나가는 모습들, 그 모습들 모양들이 다 각각입니다.

그다음에는 방향을 따라서 봅니다. 처음에는 똑바로 남북으로 누워있는데 나중에는 보니까 머리는 어느 방향으로 가 있고 팔은 어느 방향으로 가 있고, 이런 것들로서 방향으로서.

그다음에 흩어지는 모습들이 각각의 장소로 다 분리돼가지고 머리는 어디에 있고 팔은 어디에 있고 하는 것들로서 기억해서 하는 것들도 있고.

그런 특징들로써 구분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아수바 산냐는 실제적으로는 그러한 방법을 지속적으로 계속합니다.

처음에는 입으로 열 가지 아수바 산냐를 계속 외우고, 그다음에 마음으로 외우고, 그다음에 그것들의 모양이나 형태들이나 색깔들이나 이런 것들을 계속적으로 구분해내고 하면서 죽은 이의 모습들을 그대로 마음속에서 니미따가 생길 때까지 계속적으로 반복하는 것들입니다.

 

반복을 해가지고 그것들로 인해가지고 니미따가 딱 생기면 참 좋은데 대부분 그렇게 잘 안됩니다. 왜 그러냐면 대상들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기가 참 힘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대부분 더럽고 추하고 피해야 될 것들로써 자꾸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럴 때는 수행하는 것을 딱 중단을 하고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됩니다. 경행처로 돌아가야 되는데, 아수바 산냐를 하기 위해서 올 때 경행하고 오면서 그 모습을 분명하게 그리고 장소를 분명하게 기억했듯이, 돌아갈 때도 마찬가지로 분명하게 자신이 걸어가면서 어느 정도의 위치에 떨어져 있고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기억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경행처에 돌아가서도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서도 아수바 산냐를 다시 떠올려 보는 거라, 죽은 이의 모습. 직접적으로 그 주위에 있지 않고 멀리 떨어져나가 있을 경우에는 조금 더 냉정하게 아수바 산냐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다시 반복적으로 아수바 산냐 열 가지를 입으로 외우고, 다시 마음으로 외우고, 모양과 형태나 색깔이나 이런 것으로서 기억을 하고, 하면서 다시 마음이 고요한 상태에서 니미따가 형성되는지를 다시 봐야 됩니다. 그렇게 해서 니미따가 형성이 되면 반복적으로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못할 경우에는 다시 그 아수바 산냐를 놓고 그냥 바로 좌선과 경행을 반복적으로 해나가야 됩니다.

좌선과 경행을 해나가면서도 항상 이 몸은 부정한 것이다 하는 것들로부터 떠나서는 안 됩니다. 이 몸은 부정하고 이 몸은 혐오스러운 것이다 하는 생각을 반복적으로 계속적으로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다가 좌선 수행을 하고 있는데 호흡을 관찰하는 것이 아주 예리하고 할 거 같으면 위빳사나 수행에서 다시 사마타 수행으로 다시 전환을 해버립니다. 그랬을 때 니미따가 생기고 다시 선정에 들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선정에서 나와서 다시 아수바 산냐를 할 경우에는 보다 정확하게 아수바 산냐를 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이게 일반적으로 아수바 산냐를 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구분해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탐심이 많은 사람, 진심이 많은 사람에 따라서 수행하는 것들을 일정하게 한 부분만 가지고 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몸의 아름다운 모습을 좋아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아수바 산냐를 할 때 죽고 나면 몸이 부르트는 것, 이 부분의 명상을 집중적으로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살아가면서 뭔가 몸에 장식하기를 좋아하고 꾸미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매니큐어 칠하고 화장하고 하는 것 좋아하고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죽고 나서 몸에서 냄새가 나는 것, 악취가 풍기는 것, 이런 것들에 대한 것을 집중적으로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살아있는 동안에 몸이 만날 건강하기만 바라고, 병 없기를 바라고 하는 그런 사람들, 어디 한 번도 안 아프고 병원 가는 일 없이 그냥 건강하기를 바라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몸이 부패가 되고 썩고 나서 문드러지고 나면 반드시 그 몸이 마디마디 사이에 간격이 생깁니다. 그 간격이 생겨나서 그 틈이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틈이 보이는 것, 온 몸이 전부 절단이 되어가지고 틈이 보이는 것들로써 자꾸 알아차려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또 어떤 분들은 유방확대 수술이라든지 아니면 피부-뭐라 그러지? 땡기는 거, 보톡스라 그러나? 그런 것들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가지고 하는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시체가 부풀어올라가지고 솟아있는 것들 이런 것들에 대한 관찰을 많이 하라고 그렇게 시킵니다. 부풀어 올라있는 것은 항상 부풀어있는 게 아니고 가스가 빠진다든지 아니면 그 부패한 것들이 썩어지면은 굉장히 비참해져버리고 오히려 원래의 상태보다도 더 못해지는 경우가 됩니다. 그래서 부풀어 올라오는 그런 것들을 많이 관찰하라 그럽니다.

 

그다음에 평소에 욕심을 좀 많이 부리는 사람들, 그러한 사람들은 죽은 시체가 산란하게 흩어져 있는 모습들, 그러한 모습들을 많이 관찰하라 그럽니다.

 

그다음에 본인이 완전한 것들을 자꾸 추구해나가는 사람들, 다른 사람들의 조금의 실수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시체가 뿔뿔이 흩어져서 어느 것이 다리이고 어느 것이 팔인지 하는 것들을 구분하지 못한 상태가 돼있는 것들을 관찰을 하라고 그럽니다.

 

그다음에 외관상 아름다운 것들을 자꾸 탐하는 사람들, 아름다운 것들을 볼려고 하고 아름다운 모습들만 볼려고 하고 하는 그런 사람들을 얘기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땅바닥이나 시체에 피가 묻어있어서 피칠갑이 돼있어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보기 힘드는 그런 광경들을 자꾸 명상하라 그렇게 합니다.

 

이렇게 아수바 산냐를 할 때도 자신이 평소에 잘 못해나가는 것들을 갖다가 집중적으로 한 부분만 계속적으로 아수바 산냐를 해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색깔이든지 아니면 형태이든지 어떠한 경우든지 그 한 부분만 골라서 수행을 지속해 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뭐냐면 죽은 시체를 통해서 나도 언젠가 그와 같이 죽음을 맞는다는 사실을 일깨우기 위한 겁니다. 그래서 내가 죽음을 맞기 전에 하루빨리 깨달음에 이르러야 되겠다. 또는 죽음에 이르기 전에 하루빨리 도와 과에 이르러서 더 물러남이 없는 상태에 이르러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자꾸 일으키기 위한 겁니다.

 

아수바 산냐로써 도달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지어져 있습니다.

니미따와 선정에는 이르게 할 수는 있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고요하고 평안해졌을 때 순간순간 변해가는 모습들의 무상·고·무아들을 위빳사나 수행을 통해서 관찰해나가는데 좀 더 용이한 상태가 되게 됩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그러한 좀 더 용이한 상태에서 도와 과에 이르기가 수월하게 됩니다.

 

부처님 당시 때는 이 아수바 산냐를 통해가지고 몸의 부정하고 혐오스럽다는 것을 일으킨 수행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처님이 의도한 바가 아닙니다. 몸이 부정하고 혐오스럽다는 걸 알면은 당연히 이 몸에 관계된 것들을 집착하지 말아야 됩니다. 좀 더 내가 아름답게 꾸미려고 한다든지, 아니면 이 몸이 건강하지 않으면 괜히 괴로워하고 그 몸에 매달려가지고 그것들로 해서 시간을 다 보내고, 이런 것들로부터 멀어져야 됩니다.

 

그래서 살아있을 동안에 더욱더 수행을 열심히 해야 되는 것이고, 이 몸이 부정하듯이 이 몸이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서 다른 사람들도 그와 같이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고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이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용서하는 마음들이 생겨나는 것이고, 자신이 또한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것들에 대해서 매달리지 않게 됩니다. 자신의 몸에도 매달리지 않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견해에도 매달리지 않게 되는 거고.

 

그러한 효과들을 가지기 때문에 아수바 산냐가 어찌 보면 수행하는 데는 참 용이한 수행방법 중에 하나가 될 수가 있습니다.

살아있을 때는 그와 같이 자신의 몸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를 가지고 그러한 수행을 해야 되는 것들입니다. 하물며 돌아가신 누군가의 유골을 가지고 다툼이 있다고 할 거 같으면 그거 같이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가끔씩 여러분들은 부처님 사리를 보고 환희심을 일으키기도 할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보관하고 있는 유골함을 열고 환희심을 일으키는 경우들은 드뭅니다.

 

똑같은 겁니다. 색으로 이루어진 것들은 그것이 부처님의 유골이든 아니면 일반 범부 중생들의 유골이든 똑같은 색의 범주에 속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색은 색으로써 받아들여야 되듯이, 그것이 사리이고 아니고, 또는 그것이 색깔이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이고, 이것은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유골과 아수바 산냐라고 하는 부정상에 대한 것들을 분명하게 인식해서 여러분들이 혹시라도 죽음에 이르고 나서든지 아니면 죽음에 이르른 가족들을 봤을 때 내가 어떻게 대처해야 되는가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인식할 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들에게 좋은 수행주제가 생긴 것이고, 또 그러한 것들을 통해가지고 부처님이 말한 색에 대한 것들을 분명하게 정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하는 것들을 명심을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 질의응답 ]

수행자1 질문 : 스님! 아까 법문 중에 아수바 산냐를 했을 때 니미따가 생긴다고 하셨는데 그 니미따는 시체의 어떤 한 장면이 니미따로 떠오른다는 뜻입니까?

스님 대답 : 아닙니다. 그 시체로 인해서 마음이 거기에 오롯하게 고정이 되면 그 시체에 대한 부정하다든지 아니면 불결하다는 생각은 잊어버리고 그냥 그 대상만 딱 떠오르게 됩니다. 그래서 그 대상만 좋고 싫음을 떠난 상태에서 그대로 딱 고정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살아있는 자뿐 아니라 죽은 자들도 이 육체는 부정하다는 생각에 딱 고정이 돼는 경우도 있고, 아니면 어떤 특정한 부위에 마음이 탁 고정되어 있는 경우도 있고,

아니면 그 부위뿐 아니라, 띳사 스님이 그랬다 그러거든. 히~ 웃는 여자의 이빨을 보고 몸 전체가 전부 뼈로 이루어져 있다는 니미따가 탁 생겨났다고 그렇게 합니다. 그렇게 그 특정한 부위를 보고 전체가 뼈로 이루어졌다는 니미따가 생기는 경우도 있고. 그래서 니미따가 생기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이러한 여러 가지 조건들을 봤을 때 마음이 그 대상에 대해서 좋고 싫음을 떠난 상태가 됐을 때 니미따가 생긴다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됐습니까?

 

수행자2 질문 : 그럼 아수바 산냐 수행을 실제로 할 수 없을 거 아닙니까? 상상으로 해야 되겠네요 수행을.

스님 대답 : 지금 한국에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그 돌아가신 분들을 갖다가 하루 지나고 나서 모습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전시해 놓은 병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만약에 아수바 산냐를 할려고 할 거 같으면 지금 인터넷에 아수바 산냐 하고 탁 치면 각각의 시체의 모습들을 확연하게 그림으로 보여주는 곳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그림을 가지고 대상으로 해도 됩니다.

그래서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조건이 옛날보다는 조금 더 어렵다는 것뿐입니다. 어렵기 때문에 아수바 산냐를 권장하지는 않습니다.

 

왜? 아수바 산냐를 잘못 할 경우에는 그걸 바르게 지도해 주지 않으면 부처님 당시 때처럼 그렇게 자살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가 있기 때문에 그걸 권장하지는 않는데, 강하게 할 경우에는 문제가 되는데, 단지 그것이 니미따가 생기고 선정이 일어나도록 하는 데는 빠른 방법이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수행지도 스승에게 와서 분명하게 지도를 받고 가야 됩니다. 나는 이러한 성품을 지녔기 때문에 이런 아수바를 하겠다. 그래서 거기에 대한 것들을 스님한테 지도를 받고 그럴 경우에는 뭐 어떻게 해야 된다 하는 방법을 분명하게 얘기를 듣고 수행을 하도록 그렇게 합니다.

그럴 때는 자주 자주 질문을 해야 됩니다. 그게 나는 어떠한 상태에 이르렀고 어떠한 것들이 지금 떠올랐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얘기를 해서 거기에 대한 지도를 받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래서 아수바 바와나거나 아수바 산냐를 할 경우에는 혼자 독립해가지고 혼자서 수행하는 것은 극도로 피하도록 자꾸 얘기합니다.

 

그러한 단점은 있지만, 빨리 선정에 대한 체험들을 해보고 싶을 때는 좋은 방법 중에 하나이다 하는 것들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자! 여기서 끝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