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행 점검의 과정 <법문교재> (20070420)
점검 과정은 아주 간단합니다. 당신은 짧은 시간 안에 자신의 수행의 핵심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 자신에게 자신에 관한 연구보고서를 작성한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왜냐하면 위빳사나가 실제로 그렇기 때문입니다. 간결성, 정확성, 정밀도 같은 과학의 세계에서 사용되어지는 기준에 충실하도록 하십시오.
우선은, 가장 최근의 하루 동안에 몇 시간의 좌선 수행을 했으며 몇 시간의 경행을 했는지를 보고하십시오. 당신이 이에 관해 매우 진실되고 정직하다면, 그것은 당신 수행이 진지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다음으로, 당신의 수행과정을 묘사하십시오. 각 좌선수행을 모두 상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만일 각 좌선수행들이 비슷했다면 당신은 공통적인 것들을 묶어서 보고하면 됩니다. 가장 분명했던 좌선을 세부묘사하도록 하십시오. 수행의 주 대상인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으로부터 묘사를 시작하십시오. 이것 후에 여섯 감각기관 중에서 일어난 다른 대상을 추가해도 됩니다.
좌선수행을 묘사한 후에 경행 수행을 이야기하십시오. 여기에서 당신은 걷는 움직임과 직접 관련된 경험만을 묘사해야만 합니다. 좌선수행을 묘사할 때 포함되었을지도 모르는 대상들은 포함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당신이 경행시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의 세 단계로 관찰을 한다면 각 부분들과 당신이 그 부분에서 경험한 것들을 포함하도록 하십시오.
무엇이 일어났으며, 어떻게 그것을 알았으며, 무슨 현상이 일어났나.(세 단계)
수행의 어느 대상이든지 이러한 대상들에 대하여 세 단계로 당신의 경험을 보고하십시오. 하나, 무엇이 일어났나를 확인하십시오. 둘, 당신이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지를 보고하십시오. 셋, 당신이 본 것, 느낀 것, 이해한 것을 묘사하십시오. 말하자면 당신이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 무슨 현상이 일어났나를 이야기하십시오.
배의 일어남과 사라지는 움직임인 주 대상을 예로써 들어봅시다.
그러기 위해서 처음으로 할 일은 일어남의 과정이 발생하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일어남이 발생했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그것에 명칭을 붙이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일어남'이라고 알아차렸습니다."
세 번째 단계는 '일어남'에서 무슨 현상이 일어났나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내가 '일어남'을 알아차렸을 때 이것은 내가 느낀 감각들입니다. 이것은 그때의 감각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러고 나서 좌선 수행동안에 일어나는 다른 대상들과 '사라짐' 과정에 대하여 똑같은 세 가지 단계의 묘사를 사용하여 당신은 점검을 계속합니다. 당신은 대상의 일어남을 언급하고, 어떻게 그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나를 묘사하고, 그 대상이 사라지거나 당신의 관심이 다른 어디인가로 가버리거나 하는 등 그 후의 경험을 이야기하십시오.
비유를 들어 좀 더 분명히 설명하겠습니다.
내가 당신 앞에 앉아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나는 갑자기 공중으로 손을 들어 올리고, 내가 사과를 쥐고 있다는 것을 당신이 볼 수 있도록 손을 펴 보입니다. 당신은 이 사과에 관심을 쏟습니다. 당신을 그것을 인식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사과'라고 말합니다. 이제는 나아가 그 사과가 붉고 둥글고 빛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나는 그 사과가 보이지 않도록 천천히 손을 오므립니다.
만일 그 사과가 수행의 주 대상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그 사과의 경험을 보고하겠습니까? 당신은 말할 것입니다. "사과가 나타났습니다. 나는 그것을 '사과'라고 알아차렸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붉고 둥글고 그리고 빛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사과는 천천히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사과에 관련해서 세 가지 단계로 정밀하게 보고를 했을 것입니다. 첫째, 사과가 나타났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것을 인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둘째, 당신은 주의력을 사과에 쏟았고, 그것이 무엇인지 인식했습니다. 사과를 도구로 수행을 하고 있으므로 당신은 마음속으로 명칭을 붙이려고 특별한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셋째, 당신은 사과에 주의력을 지속시켰고, 그것이 알아차림에서 사라져가는 양상과 특성을 식별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세 단계 과정은 실제의 위빳사나 수행에서 따라야만 하는 것과 같습니다.(물론 당신이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의 경험에 대해 보고하고 관찰한다는 점은 제외하고 말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은 가상의 사과를 관찰하는 당신의 의무는 그 사과가 수분이 많다거나 또는 자신이 먹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까지는 확장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수행 점검에서 당신은 상상하거나 그려보거나 대상에 대해 의견을 개진하기보다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으로 묘사를 한정해야만 합니다.
당신이 알 수 있는 것처럼, 이런 형태의 보고는 실제 위빳사나 수행에서 알아차림이 어떻게 기능해야 하는지의 길잡이가 되어줍니다. 이 때문에 점검은 스승의 가르침을 받을 기회 이외에 부가적인 이유를 위해 도움이 됩니다.
수행자들은 이런 종류의 보고를 만들어내도록 요구받는 것이 그들의 수행에 활기를 주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에게 가능한 한 뚜렷이 경험에 초점을 맞추도록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알아차림, 정확성, 인내대상을 무관심하게 되는 대로 혹은 알아차림 없이 기계적으로 보는 것은 충분하지 못합니다. 이 수행은 당신이 마음챙김 없이 어떤 정신적인 공식을 암송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전심전력으로 대상을 보아야만 합니다. 가능한 정확하게 모든 주의력을 그 대상에 쏟으며, 당신은 그 대상의 본질을 통찰할 수 있도록 자신의 알아차림을 유지시켜야 합니다.
우리의 최상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항상 배에 머물러 있을 만큼 잘 훈련되어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음은 산만해집니다. 이때에 산란해지는 마음인 새로운 대상이 일어납니다. 어떻게 우리는 이것을 다뤄야 할까요? 우리는 산만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단계입니다.
자, 이제 두 번째 단계는 그것을 '산만함, 산만함'이라고 명칭 붙이는 것입니다. 산만함이 생긴 후에 우리는 얼마나 빨리 그 산만해짐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까? 1초? 2분? 30분? 그리고 그것에 명칭을 붙인 후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산만해지는 마음이 즉시 사라졌습니까? 아니면 마음은 계속 산만한 채로 남아있었습니까? 또는 생각의 강도가 줄어들고 결국에는 사라졌습니까? 이전 생각이 사라지는 것을 다 보기 전에 새로운 대상이 일어났습니까? 만일 당신의 마음이 방황하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그것 역시 스승에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만일 방황하는 마음이 사라진다면, 당신은 다시 배의 일어남 사라짐으로 돌아갑니다. 당신은 다시 주 대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는지의 여부도 이야기해야 합니다. 보고를 함에 있어서 새로운 대상이 일어나기 전에 일어남 사라짐의 움직임에 통상 얼마나 오랫동안 머무는지를 이야기하는 것도 좋습니다.
얼마간의 좌선시간이 지난 후에 고통과 아픔, 불쾌한 감각들이 일어납니다. 갑자기 가려움이라는 새로운 대상이 일어났다고 합시다. 당신은 그것을 '가려움'이라고 이름 붙입니다. 가려움이 더욱 심해집니까? 아니면 그대로입니까? 그것이 변화합니까? 아니면 사라집니까? 긁고자 하는 욕망이라는 새로운 대상이 일어났습니까? 이러한 모든 것들을 가능하면 정확하게 설명해야 합니다. 상상과 보이는 것, 소리와 맛, 열기와 차가움, 긴장, 떨림, 마비, 의식대상의 끊임없는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떠한 대상이건 간에, 당신은 그것에 똑같이 세 단계 법칙을 적용해야 합니다.
이러한 모든 과정은, 스스로에게 너무 많은 질문을 해서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경험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고요한 조사과정입니다. 스승에게 중요한 것은, 당신이 일어나는 어떠한 대상이든지 알아차릴 수 있는지, 그것을 정확하게 관찰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완전하게 관찰하는 인내가 있는지의 여부입니다.
스승에게 정직하십시오. 만일 당신이 대상을 찾을 수 없거나, 알아차릴 수 없고, 또는 명칭을 붙인 후에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이 당신이 수행을 불충분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하고 정확한 보고를 통해 스승은 당신의 수행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스승은 당신의 잘못을 지적하고 바른길로 돌아오도록 바로잡아 줄 것입니다.
이러한 점검에 관한 설명이 당신에게 이익이 있기를 바랍니다.
* 수행 점검방법(과정)_인터뷰 방법 <법문녹취> (20070420)
& 대상을 만났을 때 대처하는 방법 : 대상을 빠져나오든, 대상을 바꾸어주든 해야 될 경우
걱정할 필요 없어요. 어쨌든 다음주부터는 정상적으로 프린트물 나가고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 여러분들 교재 못할 정도로 그렇지는 않으니까.
자! 오늘 한번 봅시다. 그 프린트물 나간 거는 수행 점검방법, 수행 점검과정에 대한 것들입니다. 위빳사나 수행방법에 그 수행점검 과정 프린트물 있던가요? 안 들어가 있던가요? 대충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가지고 그 부분만 내가 또 한번 뽑아봤습니다. 그거는 이미 날아간 거니까 어쩔 수 없는 거니까 놔두고.
수행 점검방법은 여러분들이 책을 통해서 많이 알고들 있는 부분입니다.
왜 이게 중요하냐 하면 점검을 잘못해버리면 수행의 발전에 장애가 올 수가 있습니다. 또한 점검하는 방법을 모르고 나름대로 설명을 할 거 같으면, 그걸 스님이 잘못 알아들어버릴 거 같으면 점검을 잘못해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점검방법은 여러분들이 명확하게 이해를 하고 있어야 되는 부분이다 싶어서 이 부분에 대한 얘기를 중점적으로 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자! 여러분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수행 점검방법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수행 점검하고 있어요? 집중수행 가본 사람? 점검 어떻게 하던가요? 보통 가면 어떻게 합니까? “좌선할 때 스님! 저는 이런 현상을 봤습니다.” 하고 얘기를 하죠? 그래서 이런 현상에 대해서 쭉 얘기를 하면 스님이 “아! 그것은 이런 것이다” 하고 답을 내려주고 “이렇게 다시 수행하라” 하고 점검을 해줍니다.
대부분 놓치기 쉬운 것들이 뭐냐하면 그 부분입니다.
맨 처음 부분을 대부분 놓쳐버립니다.
점검을 할 때 얘길해야 될 부분인데 놓쳐버리고, 이미 대상이 나타나고 나서, 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가 하는 부분은 얘기를 잘 안 해버립니다.
상당히 중요한 부분인데, 이 부분은 안 해버리고, 나타난 현상에 대해서 요러쿵 저러쿵 얘기들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만 해도 많이 부족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점검은 어떤 면에서는 앞에 부분이 더 중요합니다. 대상이 있으면 '대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알아차렸다'는 부분이 큰 부분으로써 작용을 합니다.
대부분 수행할 때 어떻게 합니까? 내가 한번 이제부터 수행을 해봐야지 마음을 먹는단 말이라. 그러죠? 그래서 아침 저녁으로 요런요런 계획을 세워가지고 한번 해봐야지.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서 혼자서 수행을 시작합니다.
그 부분이 없을 거 같으면 여러분들 입장에서는 바로 나타난 대상에 대해서 몸과 마음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대상을 놓쳐버리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수행한다 할 거 같으면 일주일에 꼴랑 한두시간 여기와서 앉아서 좌선하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을 해버립니다. 일상생활하고 자꾸 동떨어져나가 버립니다. 그 부분이 뭔 부분이냐 하면 이 앞에 부분을 놓치기 때문에 그런 현상들이 일어난다 하는 겁니다.
어쨌든 수행을 시작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먹고 수행을 시작할려고 하는 노력을 기울이게 될 때가 맨 처음 수행의 점검 첫 번째 단계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대상을 먼저 아는 것"입니다.
거기에 한번 보십시오. 첫째, 둘째, 셋째 해가지고 세 단계로 스님이 구분을 해놨죠!
「수행의 점검 단계」
"무엇이 일어났나" 확인하는 것이 첫 번째 단계이고,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가" 보고하는 것이 두 번째 단계이고,
"그 본 것, 느낀 것, 이해한 것들, 일어난 현상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세 번째 단계이다.
하는 부분을 얘기를 해놨습니다.
일어난 것이 없으면 내가 그것을 안 것도 없습니다. 알아야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일어난 부분은 이미 습관적으로 일어난 것들이다 해서 터부시해버리든지, 아니면 일어난 것들은 관찰의 대상이 아니다 해서 그걸 관찰할려는 마음들을 안 내버립니다.
그래서 마음을 이미 일어난 대상보다는, 일어났다는 것보다는, 두 번째 단계의 대상, 그것을 내가 언제 알았다 하는 부분만 먼저 포인트로 잡아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내가 배가 '일어남' '사라짐' 하는 걸 관찰했습니다.” 하고 먼저 얘기를 한다는 거라. “'일어남' '사라짐' 하는 걸 관찰하고 나서 그러고 나서 관찰하다 보니까 거기에 딱딱한 느낌이 있고, 팽창하는 느낌분이 있었습니다.” 하고 두 번째 세 번째 부분만 이렇게 얘기를 해버린다는 겁니다. 거의 대부분이 첫째 부분은 빠져버립니다.
그런데 점검을 할 때는 명확하게 이 세 단계로써 구분을 해서 알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일어나는 과정이 발생하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하십시오.
그래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확인해서, 분명하게 일어났다 하는 사실을 알고 나서, 대상을 관찰하는 습관들을 길러야 됩니다.
명칭을 붙일 때, 내가 보통 마음으로 좌선을 할 때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들을 관찰을 해야지 하는 마음을 내고 나서, 배가 어떻게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을 알아야만이 명칭을 '일어남' '사라짐' 하고 붙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습관화되어있기 때문에, 배를 관찰해야지 하고 생각할 것 같으면 바로 배에다가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 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오토매틱화 돼버립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보다는 명칭에다가 호흡을 같이 맞춰버리는 거라.
지금 현재 자연적인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차리지를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습관화 안 됐기 때문에,
이것이 나중에 어느 정도 수행이 무르익고 나면 내 호흡의 상태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해를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명칭조차도 필요없이 바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서 바로 파악으로 들어가집니다. 그때는 1단계나 2단계가 필요하지 않고, 바로 3단계로 들어가져버립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일단 대상을 먼저 알아차릴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됩니다. 그런 대상들은 배 뿐아니라 어떤 대상도 마찬가집니다.
그 대상이 어떤 겁니까? 크게 보면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이죠!
그래서 스님이 자꾸 "느낌을 알아차리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사실은 "이것이 전부다" 라고 얘기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자! 앉아있는데 다리가 구부러져 있으니까 고통스러운 느낌이 일어났습니다. 육체적인 느낌이죠! 또 앉아가지고 있으니까 침이 꼴까닥 넘어간다. 이것도 느낌입니다. 그것도 육체적인 현상이죠!
이렇게 뭔가 어느 지점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분명하게 여러분들은 알죠? 다리에서 일어나고, 발바닥에서 일어나고, 그리고 손바닥에서 일어나고 이런 것은 어느 지점인지 분명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육체적인 느낌들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일어나는지를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생각이라든지 망상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어디서 일어나는지 여러분들은 압니까? 모르는 경우는 정신적인 느낌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정신적인 느낌과 육체적인 느낌 두 가지만 이렇게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 느낌들이 일어났으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걸 알아차려야만이 거기에 파묻혀 들어가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대상에 대해서 접근하는 방법이 대상을 명확하게 알아차리고 이해하지 못할 거 같으면 대상에 내가 끄달려들어가버립니다.
꼭 수행할 때 호흡이 오토매틱화 돼가는 거와 마찬가지로! 화두를 드는 사람들도 꼭 마찬가지고. 화두에 대한 의문이 들어서 이게 화두가 뭔가 하고 파악을 먼저 하지 않을 거 같으면, 화두라고 하는 그냥 어떤 상징물, "무(無)" 라고 하는 이 속에 그냥 잡혀들어가 버린다는 겁니다. 아무것도 못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반드시 수행 점검할 때도 마찬가지고, 수행을 실제적으로 할 때도 마찬가지고 대상을 먼저 알아차릴려고 하십시오. 대상을 먼저 알아차려야만이 그 대상에 대해서 명확하게 파악을 할 수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대상을 단순화하는 방법들에 대해서 얘기를 해줄겁니다.
그 대상을 먼저 알아차린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는가 안 알아차렸는가를 먼저 얘기를 해야됩니다.
대부분이 보면 알아차리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의도가 일어나는 것조차도 모르게 되있는 것이고. 대상이 이 대상에서 저 대상으로 넘어갈 때, 대상이 다시 또 일어났을 때 일어난 것을 모르고, 그냥 바로 알아차림으로 바로 넘어가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대상을 먼저 알아차릴려고 노력을 하고.
두 번째 단계로써 알아차린 것에 대해서, 그것을 명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 명칭을 붙이든지 아니면 그 대상을 명확하게 이해할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명칭을 붙일 때가 있고 붙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어쨌든 지금 여러분들의 입장에서는 거의 대부분이 명칭을 붙여서 알아차리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거는 조금 있다가 세 가지 방법에 대한 얘기를 해주겠습니다. 그거 할 때 얘기를 하고.
다음에 그렇게 명칭을 붙여서 알아차렸을 때 그 알아차린 대상과 마음에서 어떤 현상들이 일어났는가? 마음이 이 대상을 밀쳐낼려고 했는지 아니면 이 대상이 변해나갔는지 어떻는지 하는 것들 현상들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됩니다.
그것이 3단계입니다.
수행점검은 다른 거 없습니다. 이 3단계만 완벽하게 갖춰지면 수행점검은 받을 수가 있고, 일상적인 수행을 할 때도 이 3단계가 갖추어질 거 같으면 일상적인 수행을 해나가는데 큰 무리는 없어집니다.
전문적인 용어로 얘기를 하면 보통 할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야 되겠죠?
수행하려는 마음.
그래서 시작하는 노력 같은 것들이 먼저 있어줘야 됩니다. 할려고 하는 마음들이 일어난다는 것이 쉽게 말하면 1단계에 해당이 들어갑니다. 수행의 시작부분에 들어갑니다.
그건 대상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할려고 하는 의도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의도가 일어나야만이 대상이 일어나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거는 1단계에 해당이 됩니다. 그래서 위리야(vīriya) 부분은 수행을 향상시켜주는 요인들 중에서 맨 첫 번째로 꼽는 것이 그런 이유들입니다.
그다음 두 번째 일어나는 것들이 뭡니까? 두 번째는 뭐라 그랬습니까? 주의력을 대상에 쏟는 것이죠! 그게 뭡니까? 위딱까(vitakka)! 대상에 겨냥을 시켜주는 것!
그러고 나서 그 주의력 지속시켜서 쏟는 것이 어떻게 변해가는가 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관찰해나가야 됩니다. 그게 위짜라(vicāra) 라고 합니다.
그거는 아비담마 다음 시간에 위딱까, 위짜라 부분할 때 자세히 좀 설명해나갈 겁니다.
그래서 수행 점검 과정은 그런 과정들을 겪는다 하는 것을, 밑에는 사과로 비유를 해놔놓기도 하고 다른 부분들에 비유를 해놔놓기도 했습니다. 그런 부분은 여러분들이 한번 읽어보시면 크게 무리는 안 갈겁니다.
대부분 수행할 때, 내가 대상에 대해서 막 겨냥을 하면 어떻게 됩니까?
(수행자 대답) 네? 머리가 아프다고요? 머리가 왜 아픕니까?
(수행자 대답) 예? 욕심을 내서?
어쨌든 욕심을 낸 것도 대상 외에 다른 마음들이 일어난 거죠? 마음이 대상을 벗어나버린 거죠? 마음이.
일단은 겨냥 대상에 주의력을 탁 기울이면, 요놈의 이 마음 그리고 물질적인 것이든 이런 대상은 항상 벗어날려고 합니다. 안 벗어나면 그게 이상한 겁니다. 대부분 그렇게 벗어납니다.
대상을 벗어나는 데는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막 들떠가지고 있을 거 같으면 어떻게 될 것 같애요? 어떤 현상들이 일어납니까? 당연히 밖으로 튀어나가지. 마음이 들떠있을 거 같으면. 그럴 거 같으면 대상에 안정을 못시킵니다. 고요하게 가라앉지도 못하고 마음집중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대상이 자꾸 나타납니다. 자주 나타난다는 거라. 생각도 하나의 대상이니까 이 생각 저생각부터 해가지고 뭐 다른 가려운 느낌, 아픈 느낌, 대상들이 어떻게 보면 수도 없이 이렇게 나타납니다.
거의 보편적인 거는 어떤 겁니까? 겨냥이 안되는데 마음의 상태나 육체적인 상태가 들떠있는 상태라는 겁니다.
그런데 쉽게 말하면 들뜨지 않고 폭 가라앉아 있을 거 같으면 어떻게 됩니까? 대부분 디벼 자죠? 자버립니다. 대상이 거의 없어져버립니다. 일어나는 대상이 거의 없어져버립니다.
대상은 내가 관찰하든 안 관찰하든 어쨌든 끊임없이 사실은 있습니다. 있는데, 주의집중을 지나치게 많이 했을 경우에는 대상이 너무 많이 나타나서 문제고, 또는 좀 느슨해질 거 같으면 고마 잠에 쏙 빠져가지고 문제가 돼버립니다.
어쨌든 사띠로써 대상을 알아차릴 때 나타나는 현상은 이렇게 딱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가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 대상을 알아차리지 않을려고 했을 때는 어떻게 됩니까? 이것도 저것도 없죠! 어떤 면에서는 좀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단지 그 직접적인 현상을 갖다가 모르는 것뿐입니다. 그렇죠? 그럼 차라리 수행 안 하고 있을 거 같으면 마음은 오히려 더 좋습니다. 평상적인 마음들이 이렇게 일어나니까.
그런데 대상에 집중하면 할수록 이 두 가지 현상들이 나타나니까 오히려 더 산란해지고 아니면 무기력해지고 합니다.
그렇다고 여러분들이 그만둘 수 있습니까? 그만둘 수가 없죠!
그럴 때 '아! 내가 지금 뭔가 수행을 잘못하고 있구나' 하는 마음들로 해서 수행을 탁 그만두어버리면 안됩니다.
수행의 가장 기초적인 단계는 뭐냐하면, 일반적으로 여러분들이 이 몸은 참 하잘 것 없다 하고 얘기들을 합니다. 불교 공부들을 좀 많이 한 사람들은. 그러죠? 참 하잘 것 없다. 무상하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또 오온이 무상이다 하고 얘기들을 하죠. 그런데 이 속에는 뭔가 건질 게 있기 때문에 이걸 수행대상으로 하고 있죠? 그럴 거 아닙니까?
요즘 돈 버는 사람들을 보면 쓰레기 주워갖고 고물상하는 사람들이 돈을 많이 번다고 합니다. 억만장자 된다고. 밑천이 들게 없으니까.
그럼 여러분들은 적어도 쓰레기 같은 이 몸에서 뭔가 건져야 될 거 아니라. 건지려고 수행하는 것이고. 그래서 이 몸을 통해서 뭔가 내가 뽑아먹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같이 가져야 됩니다. 뽑아먹지 않을 거 같으면 이 몸 버려지고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똑 진드기가 피 빨아먹듯이 뽑아먹을 만큼 뽑아먹겠다 하는 마음을 먼저 가져야 됩니다.
뭘 뽑아야 됩니까? 보통 맨 처음 배우는 것들이 뭡니까? 계정혜(戒定慧)죠!
계정혜입니다! 계정혜도 꼭 이 몸과 마음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지, 이걸 벗어나서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걸 벗어나서 내가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더더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 나태해지고 수행대상으로 인해서 마음이 들떠지고 한다고 해서 이걸 갖다가 벗어날 수 있습니까? 못 벗어납니다.
죽을 때까지 내가 관찰하고 있든 하고 있지 못하든 이 몸과 마음을 벗어날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그럴 거 같으면 어차피 내가 마지막 숨 꼴딱 넘어갈 때까지 요 몸 요거하고 같이 가야 된단 말이라. 그럴 거 같으면 이걸 대상으로 해가지고 이걸 뽑아먹을 만큼은 다 뽑아먹고 가라는 거라.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생사의 절박함이 나를 사로잡는다"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부처님 당시 때 어느 수행자가 아주 부유하게 있다가 출가를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빠세나디 왕이 이 수행자에게 가서 물어봅니다. 스님 뭐하러 그렇게 출가하고 계십니까? 힘들게. 집에 있을 거 같으면 편안하게 있을 건데, 왜 그렇게 있습니까? 하니까 이 스님이 그럽니다.
경전에 그런 게 있죠? 사람이 하나가 코끼리한테 쫒깁니까? 코끼리한테 쫒겨가지고 피하기 위해서 우물속에 쏙 들어가니까, 밑에는 뭐가 있고 흰쥐와 검은쥐가 막 갉아먹고 뭐 어쩌고 저쩌고 하는데, 꿀이 한방울 톡 떨어져가지고 그맛에 취해가지고 그렇게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꿀에 취하지만 않을 거 같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참 절박한 겁니다.
부처님이 이 생사가 그렇게 절박하다는 사실을 얘기를 하게 된 거라.
그러니까 이 사람은 '아유! 내가 지금 이렇게 절박한데 뭘 이렇게 미루고 있겠나' 해가지고 출가를 하게 된거라. 생사가 이렇게 절박한데 내가 출가를 안 하고, 뭐 출가해서 도를 닦지 않으면 뭘 하겠느냐 싶어가지고 출가를 한 거라. 그러니까 나한테 왕이 아무리 얘기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거라.
여러분들도 마음에서는 그런 생사가 절박함을 갖다가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걸 받아들이지 않고는 어떤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왜 그렇게 생사가 절박합니까? 예?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한순간도 머무는 것이 없기 때문에! 생각도 찰나이고, 여러분들 몸도 찰나이고, 찰나 찰나일 뿐이라. 찰나 찰나의 연속일 뿐이라. 그런데 그 찰나라고 하는 것들을 내가 내버려두고 뭘 할 수 있느냐는 거라.
수행이라는 것은 그 찰나 찰나를 아는 겁니다. 그럼 내가 그걸 안 하고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몸이 뭘 하고 있는지 마음이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산다는 것은 그건 있을 수가 없다는 거라.
비유를 하나 좀 들어보겠습니다.
사리불 존자 아시죠? 사리불 존자가 부채를 부치다가 깨달음에 이르르죠! 부처님이 더울까 봐서 부채를 부쳐줍니다. 그때 부처님이 했던 법문이 뭔지를 아십니까?
"느낌은 찰나일 뿐이다. 모든 것은 느낌일 뿐이다."
여러분들 몸이든 아니면 여러분들 마음이든 다 느낌일 뿐이다 하는 겁니다. 느낌은 찰나일 뿐이다 하는 얘기를 합니다. 그 말에, 요즘 말로 할 거 같으면 이렇게 부처님한테 부채질을 해주면서 그 소리가 사실은 제대로 들어왔겠습니까? 잘 안 들어오죠? 내가 지금 이 부채 부치는 행동들을 하고 있는데 그 소리가 명확하게 들어오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왜 그 소리를 듣고 깨달음에 이르렀겠습니까? 찰나! 깨달음도 찰나라는 얘기를 여러분도 들었습니다. 찰나의 순간을 내가 명확하게 알아차렸기 때문에 그 소리를 듣고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것도 찰나이고,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것도 찰나일 뿐이라는 거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다는 거라.
어쨌든 시간이 없어서 다 생략을 하고,
어쨌든 그런 대상이 나타날 때 그것이 느낌이든 아니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어떤 것이든, 대상이 나타날 때 맨 처음의 단계가 뭡니까?
그 대상의 중심에 마음이 향하도록 해줘야 됩니다. 그 중심으로 마음이 향하지 않을 거 같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럴려면 맨 먼저 뭐 해야 됩니까? 그 대상을 갖다가 먼저 알아야 됩니다. 뭔가 대상이 있다는 사실을 갖다가 알아야만이 그 중심으로 향할 수가 있습니다.
& 대상을 만났을 때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서 얘기를 좀 하고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 수행해보니까 어떻습니까?
대상을 열심히 알아차리다 보면 알아차리지 않고 대상 없이 그냥 멍하고 앉아있을 때보다도 굉장히 지치죠? 마음이 많이 지칠 겁니다.
지치는 것이 사실은 맞습니다. 대상을 알아차리면 일단은 여러분들이 균형을 맞춰야되는 요소들이 균형이 맞춰져있을 거 같으면 그렇게 지치지 않는데, 대부분은 균형이 안 맞아 있거든. 안 맞아 있으니까 당연히 지치게 돼있습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대부분 그 대상에서 빠져나와 버리죠? 그렇게 빠져나와 버린다는 거라.
수행을 하고 있는데, 대상을 관찰할 때 아무리 관찰을 해도 자꾸 다른 잡생각이 일어난다든지 아니면 수행을 계속하고 한 대상을 관찰하고 있는데, 만약에 '일어남' '사라짐' 배를 관찰하고 있다 그러면,
관찰하고 있는데도 몸에서 열이 많이 올라온다든지, 아니면 호흡이 가빠져온다든지, 이럴 거 같으면 그건 쉽게 말하면 대상을 관찰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깁니다. 지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계속 관찰해야 됩니까? 한 20분 30분 넘어했는데도 계속 그 상태가 계속된다면? 그때는 대상으로부터 빠져나와야 됩니다.
대상을 얼마간 관찰을 했는데 균형이 안 맞아지면 당연히 마음은 지쳐버립니다. 지쳐버리면 부작용이 생겨납니다.
그 부작용들이 어떤 것들로 나타나느냐 하면 호흡이 가빠진다든지, 아니면 쉬이 잠에 떨어진다든지 이렇게 됩니다. 그럴 때는 대상을 빠져나와야 됩니다.
대처하는 방법 맨 첫 번째가, 그 대상을 빠져나오는 방법입니다.
그것이 대부분 여러분들 같은 경우는 느낌을 관찰할 때는 그 느낌이 변화하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그러니까 그냥 수축하고 팽창하고 이런 것들만 있지, 그 속에서 수축의 강도가 변한다든지, 팽창의 강도가 변한다든지, 어떤 느낌으로 바뀌어져버린다든지 이런 것들이 없어져버린다는 거라. 변하는 것이 없이 그냥 '일어남' '사라짐' 하고 있다는 거라. 마음은 대상을 붙잡혀 있는 것 같지만 이미 대상에 싫증을 내고 있다는 거라.
그러면 그 대상으로부터 빠져나오도록 해야 됩니다. 그게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가 대상을 바꾸어줘야 됩니다.
대상은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곳곳에 있습니다. 그럴 때는 대상을 이쪽에 갔다가, 요쪽에 갔다가 인위적으로라도 자꾸 바꿔주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일어남, 사라짐' 하다가도 그 대상을 계속 하다가도 안 될 것 같으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포인트를 많이 주라고 얘기하죠! '일어남, 사라짐, 앉음, 닿음' 하면서 "닿음 포인트"를 여러 군데로 자꾸 늘려주라는 거라.
마음을 대상에 자꾸 일치시켜주는 훈련들을 하도록 해야됩니다.
대상은 배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건 "주대상"일 뿐인 것이지, 여러 "보조대상"들이 많이 있습니다. 생각이라든지 어떤 느낌이라든지 여러 가지 대상들이 많습니다. 그럼 대상을 여기저기로 자꾸 옮겨주라는 거라.
너무 자주 옮겨도 산란해져버리지만은, 대상에 대해서 아무런 반응이 없는 상태로써 계속적으로 나아가질 거 같으면 대상을 반드시 빠져나와서 이리저리 옮겨줘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그다음에 대상에 들어갔을 때, 일치시킬 때 그 대상을 붙잡을 수가 있습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그렇게 옮겨준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오래가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해서 어느정도 마음이 대상에 일치가 된다고 할 거 같으면 그때는 주대상으로 곧장 들어가야 됩니다. 주대상으로! 배가 되면 배쪽으로 그대로 들어가버려야 됩니다.
관찰하는데 그때는 어떻게 돼야되느냐 하면 전부 나머지는 다 무시해버려야 됩니다. 조그만한 느낌, 가려움, 고통스러운 거, 생각, 일단 모든 걸 다 무시해버려야 됩니다. 대상에 그냥 올인해야 됩니다.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두통 많은 사람? 머리 지끈지끈하게 아픈 사람? 보통 일상적으로 여러분들 머리 아프면 어떻게 합니까? '아이고! 머리아파 죽겠다' 이렇게 합니다. 그래서 이 머리 아픈 걸 갖다가 극복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들을 쓰죠. 어쨌든 이 하나의 대상에 대해서 여러 방법을 쓰지만 결국 어떻게 됩니까? 머리 아픈 게 안 가셔지거든.
그거는 그 머리 아픈 것에 대해서 명확하게 내가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 머리 아픈 것들을 몰아내지 못한 거라. 그럴 땐 어떻게 합니까? 의사한테 가면 간단합니다. 약 하나 주면 두통약 먹고 두통이 사라집니다.
그게 뭐냐면 두 번째 방법입니다.
주대상에 끊임없이 관찰하고 있는데도 그 대상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지 못했을 때는 그 대상을 빠져나가라는 겁니다. 약을 먹는 거와 마찬가지로 다른 대상으로 인해서 두통을 갖다가 잠재워야 되는 거라.
그래서 이 두통이 가라앉으면서 어떻게 됩니까? 나는 본격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갖다가 해나가게 된다는 거라. 두통이 있어버릴 거 같으면 일단 다른 것들을 못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해서 문제들을 해결해나갑니다.
문제에 부딪쳤을 때, 뭐 다른 대상 아니면 화가 많이 일어났을 때 내가 '화가 일어남' '화가 일어남' 이렇게 관찰하고 있어도 도저히 극복이 안 된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에이! 모르겠다.' 화 일어난 걸 관찰 안 하거든. 그러다가 '에이! 요리나 해야.' 요리를 합니다. 그럼 일단 화가 일어난 것에 대해서는 벗어나버립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화가 일어나는 쪽으로 마음을 돌려 볼 것 같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미 마음이 진정돼있기 때문에, 화도 물론 진정돼있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마음을 관찰하기가 더 수월해져버리는 거라. 이게 '왜 화가 일어났지?' 하고 원인을 파악할 수가 있게 되는 거라.
수행은 모든 대상은 이렇게 관찰해야 됩니다.
단지 그렇게 수행을 해나갈 때 여러분들이 염두에 두어야 될 거는
뭐냐하면 "하나에 한 가지" 라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두 가지를 동시에 할려고는 절대 하지 마십시오. 한 가지 하고, 한 가지 하고, 또 한 가지가 끝나고 나면, 그다음 한 가지 하고 한다는 생각을 항상 가져야 됩니다.
내가 좌선수행 하고 있으면 배가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고 있는데, 생각이 일어나면 '일어남' '사라짐' 하면서 이걸 할 수 있을 거 같애요? 그건 절대 못합니다. 마음을 오롯하게 한곳으로 다 쏟아부으십시오. 이걸 그만두고 생각으로 넘어가지고, 생각도 이 생각에서 다음 생각으로 넘어갈 때 어렴풋이 넘어갈려고 하지말고 요걸 완전히 쏟고 그다음 생각으로 넘어가지고, 이런 마음을 반드시 가져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이게 산란해지지 않습니다.
한 대상이 끝나야만이 그다음 대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만이 결과적으로는 원인·결과를 알 수가 있습니다.
모든 것들은 꼭 그와 마찬가집니다. 좌선을 하고 나서 그다음에 경행을 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눈감고 좌선하다가 경행할 때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눈 떠야 됩니다. 눈뜨고 일어나야 경행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맨 먼저 좌선하고 나서 경행할 땐 어떻게 해야 됩니까? 눈을 뜨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야 되는 것이고, 그걸 먼저 관찰해야 되는 것이고, 그다음 눈을 뜬다는 사실을 관찰해야 되는 것이고, 그리고 손이 왼손부터 하나씩 움직여서 바닥에 닿이는 걸 관찰해야 되는 거고, 그다음에 서서히 몸이 일어나는 걸 관찰해야 되는 거고, 그러고 나서 서서 있는 것 멈춰서 있는 것을 관찰해야 되는 거고, 그러고 나서 다시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나서 나아가지게 되는 거고.
그냥 좌선하고, 그다음에 경행하라 하고 죽비 세 번 턱턱턱 치면 후다닥 일어나서 경행을 할 거 같으면 어떻게 됩니까?
여러분들은 하나씩 안 하는 거라. 하나씩 하는 게 아니고, 뭉뚱그려서 하나씩 하는 거라. 뭉뚱그려가지고. 대상은 절대 뭉뚱그려가지고는 볼 수가 없습니다.
왜 사대를 관찰하라고 그럽니까? 그거는 분해할 수 없는 마지막 요소이기 때문에 사대를 관찰하라 그럽니다.
수행을 할 때 관찰하는 것도 분해할 수 있으면, 최대한 분해해가지고 관찰해야 됩니다. 하나, 하나, 하나씩 최대한 알아차릴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만약에 안 될 때는 천천히 하라는 거라. 천천히! 빨리 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천천히 해야만이 하나씩 하나씩 관찰할 거 아니라.
그리고 수행을 할 때는 두리번거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목표물이 정해지면 목표물에 정확하게 조준을 해가지고 다가가야 되는 것이지 두리번거리면 안됩니다. 그래서 수행할 때 이생각 저생각을 한다든지 아니면 주어진 시간을 다 채우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앉았다가, 경행했다가 그렇게 하는 수행자들은 '카멜레온 수행자'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우리 같으면 도마뱀 같은 겁니다. 도마뱀이 걸어가는 모습 한번 봤습니까? 여기서 저기까지 가는데 쭉 나아가는 법이 없습니다. 몇 발자국 탁 가고나면 머리를 이쪽저쪽으로 왔다갔다 쳐다보고 나서 또 그다음 몇 발자국 가고나서 이쪽저쪽 쳐다보고. 쭉 바로 갔을 거 갔으면 충분히 벌써 갔을 시간인데 이 도마뱀은 그렇게 주변 살핀다고 한참 늦어버리는 거라.
그래서 수행은 하다가 중단해버릴 거 같으면 꺼져버린다는 거라.
그 순간만 꺼져버리면 괜찮은데 수행하고 싶다는 마음조차도 꺼져버리기 때문에 다시 일으키기가 힘이 듭니다.
불을 피울 때 열심히 나무와 나무끼리 부딪쳐가지고 돌려야만이 하는데, 이 놈의 게 얼마만큼 탔노 볼 거 같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럼 이미 열은 식어버리는 거라. 그럼 다시 또 시작해야 되는 거라. 그냥 앞뒤 재지말고 계속 돌릴 거 같으면 그게 최고 빨리 불을 붙이는 방법이라.
수행도 마찬가집니다. 뒤를 돌아볼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 일정한 부분에서 회상하는 단계에 이를 때까지는 뒤돌아보지 말고 밀어부쳐야 됩니다. 그런 마음들을 항상 가지도록 해야 됩니다.
그리하더라도 어쨌든 마음이 착 가라앉을 때가 있고, 마음이 들뜰 때가 있을 겁니다.
마음이 가라앉을 때는 이런 법문을 통해서 환희심을 일으킨다든지 아니면 수행을 통해서 기쁜 마음을 일으킨다든지, 그다음에 집중하는 것들을 일으킨다든지, 환희심을 일으킨다든지 이렇게 해서 수행의 포인트를 맞춰나가주고.
또 푹 가라앉고 할 것 같으면 자꾸 마음을 갖다가 북돋아가지고 일으켜줘야 됩니다. 일으켜줘가지고, 노력할려는 마음들도 자꾸 일으키고, 부처님 법이 아! 이래서 이렇구나 하고 법을 조사하는 것들도 일으켜줘야 하고, 이렇게 자꾸 서로 균형을 맞춰주도록 해야 만이 수행은 해나갑니다.
이차적인 수행의 방법들에 대한 겁니다. 여기까지 하고.
수행 문답(점검)하는 방법은 대충 알겠죠? 마음을 한번 잘 내보도록 하십시오.
다리 아프다고 절대 다리를 바꿀려고 하지도 말고, 생각이 일어난다고 해서 주대상을 놓쳐버리고 생각에 끄달려들어가지 말고, 마음을 이렇게 저렇게 자꾸 바꿀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거는 여러분들의 수행의 퇴보를 가져오는 것일 뿐이다 하는 사실을 알고, 이 몸을 이렇게 받았을 때 경각심을 일으켜서 하루빨리 깨달음에 이르게 해야되겠다 하는 마음을 자꾸 가지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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