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수행기초[초보수행반] 법문

몸을 의지해서 수행하라 / 사념처, 아수바(부정관), 사대요소...(20080909)

담마마-마까 2020. 1. 12. 10:14

https://youtu.be/6bKiFxrP5Bs

* 몸을 의지해서 수행하라 / 사념처, 아수바(부정관), 사대요소...(20080909)

  생로병사의 끝- 진리는 몸에서 찾아진다.

 

「몸을 의지해서 수행하라」 하는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부처님 당시 때 천인이 있었는데, 로이땃사 라고 하는 천인입니다.

부처님한테 와서 물어봅니다. "부처님! 태어남도 없고 늙음도 없고 병듦도 없고 죽음도 없는 우주의 끝까지 인간이 걸어서 갈 수 있느냐" 하고 물어봅니다.

 

과거 생에도 여러 가지 훈련들을 해서 신통이 열려서 한걸음을 뛰면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 한걸음에 달려갈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인데, 그리해도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하는 그 끝을 알 수가 없는 거라. 그럼 이 우주의 끝까지 걸어가다 보면 그걸 알 수 있겠지 해가지고 우주의 끝까지 걸어갑니다. 요즘으로 할 것 같으면 빛의 속도로 우주의 끝을 향해서 나아가 봤습니다. 그래서 부처님한테 물어봅니다. 지금도 과학이 발달하면서 빛의 속도로 우주선이 우주를 향해서 나아갑니다. 그리해도 우주의 끝이 어딘지를 모릅니다.

 

부처님이 로이땃사 범천에게 그렇게 얘기합니다.

늙음도 없고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고 다시 또 태어나는 것도 없는 우주의 끝이라고 하는 것, 그 끝이라고 하는 것은 '닙바나(Nibbana, 열반)' 이다.

그 끝은 반드시 있다는 거라. 생로병사에 대한 끝은 있지만 그 생로병사의 끝에 도달하기 위해서 걸어서 우주를 아무리 가봐야, 우주 끝에 간다고 해서 우주 끝이 어딘지 알 수도 없을 뿐아니라 그 생로병사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는 거라. "생로병사의 끝은 닙바나를 의미하는 것이다"하고 얘기를 합니다.

 

이 범천이 물은 것은 '오까사 로까(okāsa loka)-보이는 세계', 내가 직접 보이고 확인할 수 있는 세계의 끝이 어딘가? 태어나는 것도 보이는 것, 늙고 병들고 죽는 것도 보이는 건데, 그 보이는 것의 끝이 어딘가? 그걸 멈출 수 있는 것이 뭔가? 해서 찾는 거라.

여러분들이 천상에 태어나고 싶다고 해서 천상을 저 멀리 몇억 광년 멀리 있는 곳으로 생각할 거 같으면 이 로이땃사 범천과 마찬가지의 생각을 하는 경우가 됩니다. 불국정토가 아무리 경전에서 얼마만큼의 거리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거리로 측정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같으면 보이는 세계, 오까사 로까에 묶여버리는 경우가 됩니다.

 

부처님이 말하는 우주의 끝, 늙고 병들고 죽음을 맞이하고 하는 것의 끝이라고 하는, 닙바나라고 하는 것은 그런 거리로써의 보이는 세계가 아니라 '상카라 로까(saṇkhāra loka)' 입니다. '조건지워진 세계'라는 겁니다.

그 조건지워지는 세계가 소멸되어 버리고 나면 닙바나라고 하는데 이르게 되는데 그것이 생로병사의 끝이다 하는 얘깁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생·로·병·사의 끝은 닙바나인 것이지 거리로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스님 며칠 동안 공부하면 닙바나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선정에 이를려면 얼마만큼 해야 됩니까? 그것으로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겁니다.

생로병사의 끝은 거리나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몸에서 발견해내는 것이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생로병사나 닙바나는 곧 자기 자신의 몸을 어떻게 알아차리고 어떻게 탐구해 나가느냐를 가지고 이른 말이라는 뜻입니다.

 

이 몸을 받아서 태어났으면 누구든지 생로병사를 겪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이 생로병사를 겪는 것은 부처님은 '둑카(dukkha). 불만족스러운 것이다. 고통스러운 것이다.' 하는 얘기를 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몸을 대상으로 관찰할 때는 이와 같이 봐야됩니다.

'이 몸은 고통스러운 것이다'라고 볼 줄 알아야 됩니다.

마찬가지로 '이 몸으로 인해서 보는 것도 고통스러운 것이고 듣는 것도 고통스러운 것이고 냄새 맡는 것도 고통스러운 것이다'하고 알아야 됩니다.

'이 몸은 나의 것이 아니고, 내가 아니고, 나의 영혼도 아니다'라고 부처님이 얘기했습니다. '몸과 마음이라는 이 오온이 나의 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몸과 마음이라는 이 오온은 이것 자체가 괴로움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가끔씩 수행하시는 분들이 괴로움을 피해서 수행하는 경우들이 간혹 있습니다.

어떤 곳에서든지 몸을 대상으로 수행을 해야 되는데 좀 더 좋은 조건을 찾아서 수행을 합니다. 즉, 이 선원에 와서 고요하고, 또 같은 도반들이 많이 있으니까 즐거우니까 집안일들을 걱정할 필요가 없이 괴로워할 필요가 없으니까 여기 와서 수행을 합니다. 아니면 조용한 한갓진 곳에 가서 수행을 하고 숲에 가서 수행을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게 큰 도움을 받습니다. 그렇지마는 그것도 마음속에서 즐거움을 쫓아가지고 수행을 하는 것이라 할 거 같으면 잘못 방향을 잡은 경우가 됩니다. 어떤 경우든 이 몸을 가지고 수행을 하는 것이지 다른 조건을 가지고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받는 괴로움들, 육체적인 괴로움도 있고 정신적인 괴로움도 있습니다. 이런 것은 모두가 생로병사의 괴로움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이 몸을 잘 관찰해보면 숨을 들이셨으면 내쉬게 돼있고, 발을 들었으면 내려놓게 돼있고, 이렇게 변화하게 돼있습니다. 이렇게 변화로 인해서 일어나는 괴로움들이 있습니다.

또한 정신적인 조건지워진 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괴로움이 있습니다. 누가 나를 괴롭혔는데 1년 전에 괴롭힌 게 지금도 내가 그 생각을 하면 괴롭힘을 당합니다. 조건지워져있기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몸이라고 하는 것은 괴로운 것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몸은 괴로움을 먹이로 하고, 그런 생로병사라고 하는 고통을 먹이로 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괴로운 것을 아는 마음도 마찬가지로 괴로운 것이다 라고 먼저 받아들이도록 해야 된다는 겁니다.

보통 사람들은 수행을 하기 전에 먹고 보고 또 들리는 것을 즐거움으로써 간주합니다. 그래서 그런 즐거움을 더욱더 느낄려고 하게 되고 그것에 집착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부처님이 말한 괴로움의 원인입니다.

 

내 몸을 관찰해서 그 괴로움 성품을 알고 그 괴로움의 원인을 알 거 같으면 도에 이르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 것을 확연하게 깨달았을 때 도의 결과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그걸 부처님이 몸을 통해서 고·집·멸·도라고 하는 사성제를 관찰하도록 하라 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몸을 통해서 고집멸도를 관찰하고 알 것이냐?

이 몸의 현상은 시시때때로 일어났다가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물질적인 이 몸의 현상을 관찰하도록 하라. 앉아있을 때는 호흡을 관찰하고 움직일 때는 그 움직임을 관찰하도록 해서 물질적인 현상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알아차리도록 하라.

정신적인 현상도 꼭 마찬가지로 일어날 때마다 알아차려나가도록 하라.

또한 즐겁고 괴롭고 고통스럽고 덤덤하고 하는 느낌이 일어날 때마다 알아차려 나가도록 하라.

또한 마음으로 망상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 그런 마음들을 알아차리도록 하라.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또한 두근거리고 이런 것들이 있을 때 그것은 마음의 대상입니다. 그런 마음의 대상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알아차리도록 하라. 그래서 볼 때는 '봄' '봄' 하고 알아차리고 들릴 때는 '들음' '들음' 하고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이것이 몸으로 알아차리는 방법, 느낌으로 알아차리는 방법, 마음으로 알아차리는 방법, 법으로써 알아차리는 방법입니다.

그것을 신수심법 사념처라고 얘기를 합니다.

네 가지를 대상으로 해서 명확하게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 네 가지는 다른 데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내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성품입니다.

 

이렇게 네 가지를 대상으로 해서 알아차려나갈 때 뭘 알아차릴 것인가?

그냥 '봄' '봄' 하고, 아니면 느낌이 일어났으면 '아픔' '아픔' 하고, 또 망상이 일어나면 '망상' '망상' 하고, 또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면 '일어남' '사라짐' 하고 알아차리기만 하면 될 것이냐? 그것은 아닙니다!

알아차리는 것도 무상··무아라고 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러한 신·수·심·법으로 일어나는 성품들이 항상하지 않는구나 하는 것을 알도록 해야 되고, 이러한 것들이 불만족스럽고 고통스럽다꼬 하는 것을 알아차려야 되고, 또 이러한 것들이 내가 제어할 수 없는 특성들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을 알아차려야 되고,

 

하나 더 추가를 하면 아수바(asubha)라고 하는 부정(不淨)- 깨끗하지 못하구나. 이 몸은 깨끗하지 못하고 청정하지 못하다 하는 것을 알아차려서 이 몸에 대해서 싫어하는 특성들을 이해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것을 '아닛짜 둑카 아낫따 아수바(anicca dukkhā anattā asubha)'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어떤 경우이든 몸에 대한 관찰이든 느낌에 대한 관찰이든 마음에 대한 관찰이든 법에 대한 관찰이든 이 특성들을 알아차려야 됩니다. 무상··무아 그다음에 부정(不淨)이라고 하는 것.

 

항상(恒常)하는 생각을 없애버리면 무상함을 압니다. 항상 존재한다는 생각을 버리도록 하면 무상에 대해서 빨리 이해하고 그것을 확인해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즐겁다 라고 하는 것들을 버려버리면 불만족스러운 것을 이해하고 알아차려 나갑니다. 그래서 즐거움을 쫓을려고 하지 말고 즐겁다는 생각 자체를 버려버리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나」가 있다 하는 생각을 버려버리면 제어할 수 없는 특성, '나'라고 하는 것은 제어할 수 없는 것이고, 그 어디에도 내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의 특성을 이해하게 됩니다.

추하고 더러운 것들을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모든 것을 아름다운 것을 좋은 것으로 아름답게 보는 생각들을 버려버리고 나면 부정한 것들을 이해하게 됩니다. 청정하지 못하고 깨끗하지 못한 성품들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앉아있을 때는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숨을 알아차리도록 하십시오. 아나빠나사띠(ānāpānassati),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호흡을 명확하게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또한 걸어갈 때는 걷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도록 하고,

서있을 때는 서있는 것을 알아차리도록 하고,

누워있을 때는 누워있는 것을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행주좌와 어떤 것도 알아차릴 대상이라고 판단을 하고 알아차려나가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걸어갈 때는 '왼발' '오른발' 하고 알아차려나가고, 서있을 때는 '서있음' 하면서 관찰을 하고, 누워있을 때는 '누워있음' 하고 관찰을 하고, 앉아있을 때는 '앉아있음' 하고 관찰을 하고, 행주좌와를 다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통상적으로 사람들이 배를 관찰할 때는 '일어남' '사라짐' 하고 관찰을 하고, 경행을 할 때는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하고 관찰을 하고, 또 경행의 끝에 가서는 '멈춤' 하고 나서 '서있음' 하고 관찰을 합니다.

 

그렇게 해나가는데 문제점이 뭐냐 하면, 명확하게 알아차리고 분명하게 알아차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한번은 사띠해서 알아차릴지는 몰라도 그 사띠도 일어나는 마음으로 인해서 연속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려고 하질 않습니다. 그러니까 대상 자체에 머물러 버리든지 그렇지 않으면 대상을 벗어나 버리고 다른 일들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게 있습니다. 분명하게 알도록 해야 됩니다.

 

경행을 할 때도 경행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판단을 하십시오. 내 손도 없고 내 몸도 없고 오직 걸어가는 다리만 있다고 판단을 해야 됩니다.

분명하게 그렇게 인식하지 않으면 걸어가면서도 앞에 보이는 거는 다 보고, 누가 부르면 그 소리 다 듣고, 손도 알아차림 없이 그냥 씩씩 돌려버리고, 아니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에 따라서 화장실도 갔다가 이렇게 해버립니다. 잠깐의 알아차림이 있을지는 몰라도 명확하게 알아차리지 못하고 분명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걸 연속하지 못한다는 거라.

 

그래서 경행을 할 때는 모든 걸 다 버려버려야 됩니다. 오직 발바닥에 닿는 느낌, 그 움직임들만 알려고 해야 됩니다. 그것만 있다고 판단을 해야 됩니다. 좌선을 하고 있을 때에도 다른 것을 다 잊어버려야 됩니다. 오직 배에서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움직임과 그 느낌만 알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분명하게 인식하면서 모든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을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몸을 알아차리는 것은 서른두 가지 부분으로써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 몸은 머리카락부터 몸의 털, 손톱, 발톱, 치아, 피부, 살, 힘줄, 이런 것들과 대변, 소변, 고름, 피, 땀, 눈물, 콧물, 오줌, 여러 가지 기관들 이런 것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서른두 가지를 알아차리도록 해서 아수바(asubha), 이 몸은 부정(不淨)한 것이구나 하는 것들을 일으키도록 해야 됩니다.

 

머리카락 하나를 보더라도 머리카락은 피부를 지렛대로 해서 서있습니다. 그 피부 밑에는 온갖 찌꺼기와 고름이라고 하는 더러운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먹고 자라는 것이 머리카락입니다. 결코 아침마다 씻어준다고 해서, 향긋한 냄새가 나고 깨끗하다고 해서 그 머리털이 깨끗한 것이 아닙니다. 머리카락의 본질은 이와 같이 더러운 것을 먹고 자라고 더러운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루만 씻지 않으면 냄새나는 것들입니다.

이렇게 몸의 서른두 가지 부분을 차례차례로 알아차리면서 이 몸은 부정(不淨)한 것이구나 하는 것들을 자꾸 일으키도록 해야 됩니다.

 

그리고 이 몸이라고 하는 것은 지수화풍이라고 하는 네 가지 요소로써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서 호흡하는 것도 바람의 작용이고, 호흡으로 인해서 일어날 때 배가 불러오는 것은 딱딱함이라고 하는 땅의 요소가 드러나는 것이고, 호흡이 사라질 때 꺼지는 것은 바람의 작용이고 또 땅의 작용입니다.

발이 땅바닥을 디딜 때 딱딱하고 물렁하고, 또는 바람의 요소가 있고 뜨거운 요소가 있고 이런 요소들 각각을 알아차리도록 하라 라고 하는 것이, 그런 이 몸은 다른 것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사대로써 이루어져 있다.

마하부따(mahābhūtā)라고 하는 사대요소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그 사대요소를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배가 불러올 때, 불러올 때의 팽창함과 딱딱함과 여러 요소들을 알아차려야 되고, 배가 꺼질 때 '사라짐' 하면서 어떤 요소들이 일어나고 어떤 요소가 강한가 하는 것을 자꾸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걸어갈 때도 꼭 마찬가지고 발을 들어올릴 때 가벼움이 강해지는 건지, 발을 내릴 때 무거운 요소들이 점점 더 강해지는 것인지, 그 무거움이나 가벼움의 요소가 똑같이 느껴지는 것인지 아니면 변화되는 요소인지 관찰을 하도록 하라 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 몸은 부정(不淨)하다 하는 생각을 일으키도록 해야 됩니다.

이 몸이 죽고 나서 썩고 문드러지고 반점들이 생기고 구더기가 생기고, 그러한 물기의 요소들은 전부 사라지면서 일어나는 악취, 가죽에 뼈만 남아있는 모습들, 그 뼈마저도 없어지고 누가 건드리기만 하면 변화되는 모습들을 가지고 있고, 그런 뼈도 오랜 세월이 지나면 하나도 남김없이 가루로써 나와버린다는 것을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아홉 가지, 이 몸이 죽고 나서 시체가 됐을 때 일어나는 현상들을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이렇게 몸을 알아차리는 것만 하더라도 마음으로 알아차리는 것이 열네 가지나 됩니다.

여러분들은 그냥 오로지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호흡만 관찰을 할려고 하는데 꼭 그것만이 다가 아닙니다. 호흡만을 관찰을 하더라도 그 호흡에서 분명하게 알아차리도록 해야 되고, 그 호흡에서 사대요소에 대해서 알아차리도록 해야 되고, 그 호흡이 항상하지 않고 그 호흡이 변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갖다가 자꾸 알려고 해야 됩니다. 이렇게 열네 가지 요소는 서로 연관을 가지고 있게 됩니다.

 

위빳사나 수행은 사띠 수행이다 하고 통상적으로 얘기합니다.

그마만큼 알아차림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들, 가려움이든 통증이든 배가 불러오고 꺼지는 것이든 이런 것들을 있는 그대로 단순하게 알아차림을 통해서 분명하게 마음으로 파악을 하도록 해야 됩니다.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마음으로 인해서 모든 현상들, 좋고 싫다는 가치판단을 하지 않고 나에게 인식되고 알아차리는 경험을 그대로 명확하게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알아차리는 것은 알아차림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상에 대해서 분명하게 아는 것과 짝을 이루어야 만이 수행을 제대로 한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알아차리는 것이 단순한 것 같지만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닙니다. 강한 노력과 열의가 있어야 됩니다. 한 시간의 좌선 한 시간의 경행을 함부로 생각을 해버릴 거 같으면 그 한 시간은 무의미해져 버립니다.

그 한 시간 동안 내가 반드시 열네 가지 몸을 알아차리는 방법을 총동원해서라도 분명하게 현상들에 대해서 알아차려야겠다는 강한 열의와 노력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 노력이 없으면 그냥 일상적인 수행을 해나갑니다. 관념적으로. 수행의 진전은 없게 됩니다.

항상 어떤 경우든지 강하게 노력하고 또 이 수행을 통해서 닙바나에 이르겠다는 마음을 내도록 해야 됩니다.

 

이런 수행은 누구든지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마음을 내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바른 방법으로 수행을 해나가게 됩니다. 바른 방법으로 수행을 해야 만이 좋은 결과를 얻습니다. 좋은 집중이 이루어지고 집중이 되어서 알아차림이 이어지면서 분명하게 알게끔 됩니다.

그래서 사마디(samādhi)라고 하는 마음집중과, 분명하게 이해하는 빤냐(paññā) 라고 하는 지혜가 힘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우리에게 붙는 집착, 번뇌나 갈등이나 불안이나 우울이나 하는 부정적인 요소들이 제거되어 나갑니다.

그래서 이 몸을 통해서 고를 보고, 고의 원인을 보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수행에 가속도가 붙게 될 때 이런 현상들을 경험하고, 이런 현상들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게 돼서, 최종적인 목표인 도에 이르르게 됩니다. 그 도에 이르는 것은 다른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몸을 통해서만 도의 길을 가게 되는 겁니다.

 

배가 불러오는 현상들, 그 단순한 하나의 현상에도 우리는 팔정도를 알 수가 있습니다. 발을 한발 디디는 것에도 그 속에는 팔정도(八正道)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여기에 수행하러 오면 우선 기본적으로 갖춰지는 것이 수행을 하기 때문에 바른 생활들을 해나가게 됩니다. (正命, sammā ājīva)

또한 수행을 하면서 바른 행위들을 하게 됩니다. (正業, sammā kammanta)

침묵을 지키고 또 말을 하더라도 수행에 관한 말을 하기 때문에 바른말을 하게 됩니다. (正語, sammā vācā)

또한 한발을 내디딜 때 '들어올림'하고 알아차리는 것은 바른 견해를 지니고 있는 겁니다. (正見, sammā diṭṭhi)

걷고 있는 것을 내가 알아차릴 때는 바른 겨냥, 그 걷는 것을 분명하게 알기 때문에 바른 겨냥, 바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正思惟, sammā saṅkappa)

한발 한발 걷는 힘 걷는 노력을 하는 것은 바른 노력을 하고 있는 겁니다. (正精進, sammā vāyāma)

그래서 이런 행위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있기 때문에 바른 알아차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正念, sammā sati)

마음이 대상을 알아차리면서 계속 걸어가기 때문에 바른 집중을 하고 있는 겁니다. (正定, sammā samādhi)

이 몸에서 결국은 팔정도(八正道, Ariya aṭṭaṅgika magga)가 다 드러나게끔 해야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이 몸을 대상으로 해서 수행을 하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이 몸을 벗어나서 수행을 할려고 하지 말고 이 몸을 대상으로 해서 수행을 하도록 그렇게 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담마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몸에서 찾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에서 담마를 찾을려고 하지 말고 자기 자신과 담마를 의지해서 나아가도록 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몸을 의지해서 수행을 하라」 하는 얘기로 대신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