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수행기초[초보수행반] 법문

위빳사나 바와나- 위빳사나수행의 기본원칙 3가지(20080728)

담마마-마까 2020. 1. 12. 10:12

https://youtu.be/WNm4EDqK2U8

♠ 기초수행 법문 / 제5기 초보수행 법문집

* 위빳사나 바와나_위빳사나수행의 기본원칙 3가지(20080728)

 

기초수행 오늘 5기의 첫 시간입니다.

위빳사나 바와나(vipassanā-bhāvanā)라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프린트물 우리 수행교재를 한번 참고를 하시기 바랍니다. " " "

위빳사나(vipassanā)의 '위(vi)'는 '명확하게 구별하며'라는 그런 뜻입니다. '빳사나(passanā)'라고 하면 '알아차린다. 본다. 관찰한다.' '바와나(bhāvanā)'라고 하면 '수행법, 증장시키는 방법' 그런 뜻입니다.

 

정리를 해보면 '자기 자신을 명확하게 관찰하는 수행법이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부처님이 이 위빳사나 수행으로 깨달음을 이루셨고, 이 수행법을 생애에 걸쳐서 열심히 제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부처님이 생존 중에 수천 명의 비구, 비구니나 재가신도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이 부처님의 가르침인 위빳사나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입멸 후에도 이 수행법은 깨달음에 이르는 길로써 2,500년 이상 스승으로부터 제자로 소중히 전해져 왔습니다. 그 덕분에 이 위빳사나 수행은 현대에 있어서도 테라와다 불교 나라에서 가르쳐지고 있고, 또 수행되어지고 있습니다. 초기 빨리어 경전에 '명상'이나 '수행'이라는 말이 나오는 경우는 거의 전부 이 '위빳사나' 수행을 말하게 됩니다.

 

어떤 방법이든지 지금 자기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 불교에서 위빳사나 수행의 포인트이고, 그것을 실천하는 방법이 이 위빳사나 바와나인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라 하는 것은 사띠(sati)라고 하는 마음의 기능을 빠뜨릴 수가 없습니다. 사띠는 팔정도에서는 정념에 속하고, 대념처경에 아주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 Ekāyano ayaṃ, bhikkhave, maggo sattānaṃ visuddhiyā,

에까-야노- 아양, 빅카웨-, 막고- 삿따-낭 위숫디야-

 

sokaparidevānaṃ samatikkamāya, dukkhadomanassānaṃ atthaṅgamāya,

소까빠리데--낭 사마띡까마-, 둑카도-마낫사-, 앗탕가마-,

 

ñāyassa adhigamāya, nibbānassa sacchikiriyāya,

냐얏사 아디가마-, 닙바-낫사 삿치끼리야-,

 

yadidaṃ cattāro satipaṭṭhānā.

야디당 짯따-- 사띠빳타--.

 

"비구들이여!" 바로 이 도는 유일한 길이니,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

슬픔과 비탄들을 모두 넘어서기 위한, 괴로움과 근심들의 소멸을 위한,

정확한 도의 방법을 터득하기 위한, 닙바나의 실현을 위한 것이니,

그것은 바로 네 가지 알아차림의 확립이다. ]

 

"에까야노 아양 빅카웨 막고 삿따낭 위숫디야

소까 빠리데와낭 사마띡까마야 둑카도마낫사낭 앗탕가마야

냐얏사 아디가마야 닙바낫사 삿치끼리야야

야디당 짯따로 사띠빳타나."

그렇게 대념처경의 첫머리에 나와 있습니다.

 

"수행자 비구들이여, 여기에 유일한 길이 있다.

그것은 살아있는 자들이 맑고 깨끗하게 되기 위해서

슬픔과 비탄을 넘어서 몸과 마음의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서

올바르고 성스러운 도를 알고, 닙바나-열반을 체험하기 위한 길이다.

그 길은 바로 네 가지 알아차림의 실천이니라."

하고 대념처경 처음에 시작이 됩니다.

 

'에까야노 막고' '유일한 길이다' 하는 말이 먼저 나옵니다.

이것을 그대로 직역을 해보면 '하나의 길'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에까'가 하나이기 때문에! 부처님이 하나라고 말씀하실 때에는 문자 그대로 이 길 하나밖에 없다는 유일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다음에 이 수행을 실천하는 이유는 살아있는 동안에 살아있는 모든 중생들이 몸과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기 때문에, 하기 위해서 하는 거고,

 

또 슬픔과 비탄, 슬픔과 한탄을 넘어서기 위해서, 마음과 몸의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서 라는 그런 말이 뒤따라 나옵니다.

어떤 재난도 당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떤 일이 일어나도 굴하지 않는다, 신경쓰지 않는다, 끔쩍도 하지 않는 상태가 된다고 하는 그런 뜻입니다.

수행을 한 사람이나 깨달음에 이른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마음의 맑고 깨끗하고 밝음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올바르고 성스러운 도를 알기 위해서, 열반을 체험하기 위해서 한다고 했습니다.

이 수행법은 오직 해탈-열반을 얻기 위한 실천법이다 하는 뜻입니다. 본래면목-본래 우리 몸과 마음이 가지는 특성을 올바르게 알아서 열반을 체험하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이 경전은 신수심법(身受心法)이라고 하는 몸과 감각과 마음과 진리라고 하는 것을 관찰하는 방법을 아주 자세하게 말하고 있는 경전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왜 살아있는가? 또는 생명이란 무엇인가? 또는 살아가는 것은 결코 편안하지 않은데 왜 이렇게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하는가? 이러한 의문을 아무리 머리로 생각해도 해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하라는 것입니다.

 

망상을 멈추고 자신을 관찰하는 것! 이렇게 관찰할 때는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고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소리가 들리면 차 소리다, '저것은 대형차 소리다', '저것은 소나타다' 하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귀가 소리를 인식했으니까 '소리' '소리'라고 듣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사실만이 있고 주관적인 판단은 아무것도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똑같이 눈은 색깔과 형상을, 코는 향기를, 혀는 맛을, 피부로부터는 딱딱함이나 뜨거움이나 하는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관찰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실을 관찰해가면 인간이 사물을 판단해서 만들어내고 있는 괴로움의 구조가 서서히 밝혀지고, 그런 괴로움의 구조가 서서히 사라져갑니다.

실상은 우리의 마음은 방치를 해두면 아무리 나이가 들고 오래 살아도 진화하지는 않습니다. 몸은 커가고 성장할지 몰라도 마음을 잘 조절하고 또 키워나가지 않으면 진화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이번 여러분들이 태어난 인생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무한히 계속되어온 윤회 속에서 끝없이 아무런 진화도 없이 빙글빙글 회전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생에서 보시를 하든지 공덕을 쌓아서 천계에, 천상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변화이지 진화는 아닙니다. 진화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방향성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그 때문에 그 방향성을 바꿀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 지혜의 눈을 뜨게 하는 수행법 그것이 위빳사나 수행인 것입니다.

 

이렇게 열반-해탈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 그것이라면,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면 이론적으로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 어떻게 자신을 관찰하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것인가? 어떠한 경지로 진화해 가는가? 그 과정을 한번 자세하게 알고 싶다' 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예. 그런 기분은 이해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현재는 그만두는 것이 좋습니다. 팔정도를 공부하고, 십이연기를 공부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것은 수행에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위빳사나의 구조를 지식적으로 너무 알려고 하면 수행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가 됩니다.

 

위빳사나 수행은 스승이 가르치는 대로 다만 오로지 실천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실제로 솔직하게 실천하는 사람들은 매우 빨리 마음이 변화합니다. 마음이 성장합니다. 그런데 철저하게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은 유감스럽게도 마음이 성장하는 것이 더디고 어렵습니다.

 

스님이 또 이렇게 말하면 어떤 것이든 제대로 이해하고 납득하고 나서 실천해선 안된다 라고 말한다고 반론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바르게 이해하고 납득하고 나서 실천해야 되는 것은 확실히 올바릅니다.

그러나 위빳사나 수행에 대해서는 별도입니다. 지혜나 깨달음에 대해서 우리가 이해하려고 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깨달음에 도달하는 시스템을 이해하기 위해서 마음의 법칙을 명확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부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냐 하면은 "마음이라는 것은 인간이 다 이해할 수 없다. 거기에 전력투구하지 않는 것이 좋다. 무리하게 이해를 하려하면 할수록 머리는 이상해져 버린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의 법칙이라는 것은 분명하게 말해 일반 우리 중생에게는 이해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선 이런 지혜가 생기고, 그것은 어떤 것이고, 다음에 또 이런 지혜가 생기고, 그것은 이러이러하고, 아무리 듣고 알고 있다고 해도 지혜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서 아무런 가감 없이 위빳사나 수행을 실천하면 자신도 모르는 동안에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수행에서는 이렇게 지식뿐만이 아니라 수행의 믿음도 방해가 됩니다.

예를 들어 수행이라는 것은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해서 희열감을 주는 것과 같다 라고하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그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런 훌륭한 체험을 얻겠다 하고 마음을 굳게 먹고 수행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위빳사나 수행은 장애가 발생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할 수도 없고 수행의 진척도 아주 더딜 수밖에 없습니다. 꼭 마찬가지로 수행에서는 많은 지식도 필요하지 않고 수행에 대한 믿음도 그렇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은 위빳사나 수행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알고, 무엇을 납득하면 좋을 것인가? 아무것도 모르면 수행하는 방법 자체를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처음에 말한 것처럼 사성제나 삼법인이라고 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을 공부하면 신뢰감-믿음이 일어나서 수행을 할 생각이 일어납니다.

 

그렇지만 또 하나 더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지금 자기 자신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오십년 육십년 삼십년 이런 세월이 지나도 실제로 변변하게 변한 것은 없구나. 그렇게 살아오는 동안 평온함이란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언제까지,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인생을 반복해 가야 하는가?' 라고 현실의 인생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하면 이렇게 살아가는 것에는 해결책이 있다. 해결이 되는 방법이 있다 하는 부처님의 말의 고마움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위빳사나 수행은 매일매일 고민하는 일을 해결하자고 하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위빳사나의 목적은 Dukkha, 근심・불만족・괴로움이라는 그 자체를 없애는 것입니다.

둑카라고 하는 것은 회사생활 할 때의 여러 가지 트러블들이나, 이웃하고 잘 지내지 못해서 곤란해 하는 그런 고민들이 아니라 좀 더 본질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 고민하는 것들이 큰일같이 보이지만은 지나고 보면 실제는 별일이 아닙니다. 생존근심이라고 하는 좀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일상적인 문제는 놓아버리고 조금 큰 스케일로 둑카-근심이라는 것을 근본으로부터 없애는 것을 목표로 해야 됩니다. 그 실천법으로써 위빳사나 수행을 노력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노력하면 보다 좋은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자! 이제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원칙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화를 내고, 질투하고, 잘 판단할 수가 없고, 두려워하고, 또 고민이 있고, 왜 그런가? 대답은 간단합니다. 어리석으니까!

그럼 왜 이렇게 우리는 어리석은 자가 돼있는가? 그것은 많은 원인들이 있지만은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보통 생각하면 영리해진다 라고 얘기합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끝없이 생각하고 있으니까 아마 이 세상은 천상과 같이 돼있어야 되겠지요. 그런데 세상은 문제투성이이고 괴로움투성이 입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자신의 탐・진・치 속에서 빙빙 돌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하면 낙담하고 자만하고 화내고 질투하고 합니다. 인간의 문제는 이런 생각하고 있는 것 그 자체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것저것 여러 가지 잡동사니가 머릿속에 들어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많이 생각하는 사람은 깨달을 전망은 얇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혜가 일어나면 그러한 생각은 줄어들어 갑니다.

 

자신의 여러 가지를 생각하는 것은 지혜롭게 되지를 않습니다. 우선 그 사고를 먼저 멈추도록 해야 됩니다.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관찰하는 것이 먼저 시급하게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고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게 멈출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의 개념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순간순간에 일어나는 미세한 개념도 이런 사고-생각입니다.

 

어떤 것을 본 순간에 개념이 먼저 튀어나옵니다. 말이 달라붙어 도착하기 전에, 무엇을 보았는지 알고 있고, 말은 나중에 따라 나와서, 그래서 우선 생각이 앞을 가려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생각을 멈춰라 할 거 같으면 그렇게 쉽게 멈춰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꼭 물고기가 육지 위에 올라와서 새로운 경험을 하고 새로운 환경조건을 보고 너무나 황홀해서 걷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래도록 물 위에 있지 못하고 다시 바닷속으로 들어가고, 생각이 잠시 멈췄다 해도 다시 또 생각의 바다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거와 꼭 마찬가집니다.

 

위빳사나 수행이라는 거는 이와 같이 물고기가 육지 위에 올라와서 걷게 하는 것과 같은 대단한 일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것을 '인간을 뛰어넘는 길이다.' '에까야노 아양 빅카웨 막고'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오직 하나의 길, 도에 이르는, 인간을 뛰어넘는 오직 유일한 길이다.'하고 말씀하신 겁니다.

 

구체적으로 사념처- 신수심법 네 가지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중에서 가장 하기 쉬운 신체를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합시다.

그때에도 세 가지의 원칙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천천히 하라.

두 번째가 생중계하라.

세 번째가 신체의 느낌- 감각을 느껴라.

하는 것입니다.

 

천천히 움직이고, 움직임을 느끼고, 그것을 마음으로써 생중계하는 것이 수행의 기본입니다. 이 세 가지가 갖추어지면 위빳사나 수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중계라고 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기 위한 방법입니다. 우리가 '안경이다', '벽이다', '시계다', 하고 생각하자마자 바로 감정도 일어납니다. 그래서 마음이 더러워집니다.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순간순간의 동작을 머릿속에서 생중계합니다.

'서 있다', '손을 긁고 있다',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있다', 이렇게 생중계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일어날 틈을 주지 않게 하는 것이 실황중계-생중계입니다. 생각으로 마음이 더러워지지 않게 합니다.

 

집중적으로 수행할 때는 서있는 수행, 앉아서 하는 수행, 걸으면서 하는 수행이라고 하는 세 가지의 단순한 동작을 선택해서 집중적으로 생중계하도록 해야 합니다.

평상시에는 1초 1초를 생중계하면 좋습니다. 어떤 것을 하고 있든지 그 1초 1초에 마음을 집중해서 지금 현재 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릴려고 노력을 하면 됩니다. 그마만큼 진지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열심히, 끊임없이, 알아차리는 것이 틈이 없게 생중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서 손을 든다면 '들어올림' '들어올림' '들어올림'이라고 하고, 멈추지 않고 매끄럽게 손을 움직이면서 그것을 하나하나 틈이 없이 생중계해야 됩니다. 그 생중계를 그만두자마자 생각은 일어나버립니다.

 

생중계를 그만두었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싶기 때문에 이 생중계를 그만두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곧바로 생각하려고 합니다. 고민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을 하려고 하면 마음이 저항을 합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노력하고, 가능한 한 지금 1초를 실황생중계 해야 됩니다. 시간은 계속하여 흐르고 있습니다. 어느 때라도 지금 1초가 있습니다. 앞의 1초를 볼려고 하면 이미 죽은 시간이고 지나간 시간이 돼버립니다. 지금 1초를 생중계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이것이 강력한 수행 방법입니다.

 

천천히 움직이고, 그 움직임을 느끼면서, 생중계하는 것이 위빳사나의 기본이다.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천천히 움직이면 집중력이 일어납니다.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오히려 쉽습니다. 천천히 움직이는 것은 어렵습니다. 마음이 초조하고 혼란돼있으면 천천히 움직이는 것을 할 수가 없습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포인트는 신체의 감각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 신체라는 것은 이 탁자나 물컵과 같은 단순한 물체입니다. 물체와 신체의 차이는 신체는 감각이 있는 것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그 감각-느낌을 관찰합니다. 이 느낌이 도대체 무엇인가? 라고 알아차리는 겁니다.

 

이 감각-느낌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깨닫는 열쇠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느낌은 '살아있다'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춥고, 아프고, 기분이 좋고, 지치고 하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부터 모든 행동이 일어납니다. 말하고 생각하고 노력하고 하는 것들, 우리의 모든 행위는 전부 무엇인가를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대단한 일을 느끼고 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눈으로는 색깔을 보아서 느끼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보고, 신체로 딱딱함이나 뜨거움이나 하는 온도를 느끼고, 머리로는 여러 가지 일을 생각하고 그것뿐입니다. 그것이 살아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빳사나로 이 살아있다 라고 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고, 산다는 것은 순간순간 느끼면서 이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손을 들어올리면 손을 '올림, 올림' 하고 손을 생중계하는 것이 아니라, 손을 들 때의 느낌-감각을 생중계해야 됩니다.

스스로 체험적으로 알려고 해야 됩니다. 생중계라고 하는 것은 그것의 수단인 것입니다. 이렇게 앉아있고 걷고 먹고 할 때, 지금 1초를 생중계하고 있다고 하면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이 훌륭한 뇌운동이 돼서 뇌세포가 소생하게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병들을 고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관이 만들어낸 환상 속에서 욕구나 분노라고 하는 망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망상은 즐거움도 조금 가져오고 괴로움도 또한 가져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수행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이런 욕구나 분노하는 망상으로부터 멀어집니다. 2분이나 3분 수행했다고 한다면 그 사이는 욕구나 분노로부터 멀어진 깨끗한 마음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은 욕망이나 분노를 아주 좋아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몹시 싫어합니다. 그러니까 2, 3분만이라도 생중계하면서 살아가면 굉장한 덕을 쌓는 것이 됩니다. 그마만큼 마음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항상 명심하십시오. 일상생활 중에서 망상이 비집고 들어가면 마음은 더러워질 뿐입니다. 또한 이 수행법은 2,500년간 쭉 이어져 왔던 수행법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은 초심자입니다. 그래서 이 깨달음의 길을 올바르게 배우기 위해서는 앞선 사람들에게 배우는 것이 무엇보다도 소중합니다. 어쩌면 수행의 참으로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을 합니다.

열심히 나와서 수행을 하고, 열심히 앞선 사람들을 따라서 배워나가도록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