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수행기초[초보수행반] 법문

23. 다나(dāna, 보시) (20100112)

담마마-마까 2019. 12. 8. 13:41

https://youtu.be/mpbziQUy6q8

 * 다나(dāna, 보시) (20100112)

 

오늘은 조금 전에 우리 보살님이 구기자? 구기자를 선물을 하던데, 선물하면서 이렇게 스님한테 드리고 바로 가더라고. 그러면서 뭐라고 마음속에서 생각하면서 줬어요? “스님! 이거 구기자 잘 잡수십시오.” 하면서 준 거라? (보시자 대답)

내 건강만 기원했어요? 예! 그 부분에 대한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닥키나 위방가 숫따(Dakkhiṇā·Vibhaṅga Sutta, 보시분별경)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 '보시에 대한 가르침'이라는 건데, 여러분들 부처님의 양모 마하빠자빠띠 고따미(Mahapajapati Gotami) 라고 하는 분을 잘 알죠! 그분이 부처님이 카필라왓투를 방문했을 때 옷감-천을 부처님한테 보시할려고 합니다. 그 천을 가지고 와서, “이건 내가 스스로 실로 짠 옷감입니다. 이걸 부처님이 받아주십시오.” 하고 얘기를 하거든. 그런데 부처님이 그걸 안 받고 “나에게 보시하지 말고 상가에게 보시하라. 그러면 나에게 보시하는 것이 된다.” 하고 얘기를 하거든. 그렇게 세 번이나 얘기를 하게 됩니다.

그때 아난다가 “부처님! 좀 받아주십시오. 그래도 마하빠자빠띠 고따미는 부처님을 키웠던 사람이고, 그래서 부처님에게 도움이 됐던 그런 분인데, 부처님도 그 옷감을 받아주므로 인해서 그 마하빠자빠띠 고따미한테 도움이 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간청을 합니다.

 

그때 부처님이 이 보시에 대한 개념을 정리를 한 것이 이 「닥키나 위방가 숫따」에 나와 있습니다.

 

오늘 보시할 때 어떻게 했어요? 처음에 '아! 내가 이걸 사가지고 스님한테 드려야지'하고 마음을 먹었죠? 그게 먼저 되어야 됩니다.

그걸 '뿝바 쩨따나(pubba cetanā)'라고 그럽니다. 보시하기 전에 그 보시 할 것을 생각해가지고 내가 마음을 일으키는 것! 이건 물질적인 겁니까, 정신적인 겁니까? 정신적인 거죠! 마음으로 먼저 그런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서 보시하는 원인이 되는 거죠! 그게 먼저 선행조건이 돼야 됩니다.

 

그러고 나서는 보시를 이렇게 합니다. 보시를 할 때는 어떻게 합니까? 내가 가지고 있던 걸 스님이든지 상가에 이렇게 드리면, 내가 실질적으로는 그것을 포기하게끔 됩니다. 나에게는 그것이 없어져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을 '문짜 쩨따나(muñca-cetanā)'라고 그럽니다. 보시의 시점에서 일어나는 의지력! 쉽게 말하면 가지고 있는 물건을 포기를 한다는 그런 겁니다. 포기를 하는데 어떤 마음으로 포기를 하느냐 하는 게 중요한 부분입니다. 물건에 대한 것들이 나오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보시라고 하는 것은 의지가 있어야 그다음에 되고, 물질이 있어야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의지의 다나', '물질의 다나'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게 합해져야 만이 보시라는 개념이 성립을 하게끔 됩니다.

 

예를 들어서 오늘 밥을 했습니다. 쌀을 안쳐가지고 이렇게 했단 말이라. 그럼 그 밥을 할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가스로 인해서 불을 피워야 만이 밥이 된다는 거라. 그러니까 그 가스 없이는 불을 일으킬 수도 없고, 그 불이 없으면 밥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가스로 인해서 불은 붙게 되고, 불로 인해서 쌀은 요리가 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다나라고 하는 것이 단순하게 물건 하나를 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앞의 전제조건으로써 여러 가지 의지들이 일어나야 되고, 또 실제로 물건을 줄 때도 물건만 주는 것이 아니고 내가 여러 가지 의지들이 그 속에는 일어납니다. 내가 이것을 포기를 해야 되는 거고, 그리고 거기서 가지는 마음가짐들도 있게 되는 거고, 이런 것들이 중복되게 됩니다.

 

그런데 인제 부처님이 보시기에 마하빠자빠띠 고따미는 그 옷감을 정성스레 만든 옷감을 부처님에게 줄 때 어떤 마음으로 과연 하겠는가?

여러분 같으면 여러분 자식에게 만약에 옷을 하나 사가지고 입힌다, 어떤 마음으로 해요? 이 옷을 살 때 돈이 아깝다는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경우가 있습니까? 뭐 그렇게 산다고 치자! 그렇게 사가지고 옷을 입힐 때, 애가 이 옷을 잘 입었으면 하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옷을 줬는데 애가 그 옷을 '에이! 마음에 안든다'고 안 받아버렸을 경우에는 어떻게 됩니까? 섭섭하겠죠! 그럼 그거는 보시가 되겠습니까? 이미 줬는데, 그걸 애가 옷을 받아서 입고 안 입고는 그 애의 마음인데, 내가 그런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근본적인 보시의 뜻은 아니라고 봐집니다.

 

그래서 보시를 할 때 개인에게 했을 때는 이런 위험성들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부처님한테 한 거라고 하더라도 마하빠자빠띠 고따미는 틀림없이 그런 마음들이 있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보시의 종류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개인에게 하는 보시가 있고, 상가에게 하는 보시가 있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개인에게 하는 보시는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부처님에게 하는 보시가 있겠죠!

따타가따 아라한 삼마삼붓다(Tathāgata Arahan sammā-sambuddha)라고 하는 정등각자. 스스로 깨달음을 이루신 여래인 부처님에게 하는 보시가 있습니다.

그다음에 여러분들 잘 알고 있는 빳쩨까 붓다(pacceka-buddha) 독각, 벽지불이라 그러죠! 스스로 깨달음을 이루었지만 법을 설할 인연이 안 돼서 법을 설하지 않고 스스로 깨달음을 즐기고 있는 분을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또 한 분은 보통 한국에서는 성문이라고 그렇게 하죠! 사와까(savaka) 사와까도 부처님으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른 분입니다. 그래서 '따타가따 사와까 아라한따' 이렇게 얘기합니다. 부처님에 의해서 완전하게 아라한을 이룬 성스러운 제자를 성문이라 그럽니다. 그런 제자들은 부처님 당시 때부터 있어왔던 사리불, 목련 존자를 비롯해서 지금까지 쭉 이어져왔던 분들입니다. 그런 분들에게 하는 보시가 있습니다.

 

그거 말고도 불환과에 이른 분들,

그다음에는 불환과에는 이르지 못해도 불환도에 이르신 분들. 불환과에 가기 위해서 그 길을 가고 있는 분들.

그다음에 일래과에 이르신 분들,

그다음에 일래과에 이르기 위해서 길을 가고 있는 분들.

그다음에 예류과에 이르신 분들,

그다음에 예류과에 이르기 위해서 길을 걷고 있는 분들.

이런 분들은 보통 성인의 경지에 다들 들어간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렇게 성인들에게 하는 보시가 있습니다.

 

그다음에 욕심이 없는 수행자에게 하는 보시, 통상적인 스님들을 이른다고 보면 됩니다.

 

그다음에 또 어떤 보시가 있습니까? 범부중생.

범부중생인데 보시할 때 그냥 아무한테나 그냥 보시합니까? 주고 싶은 사람한테 보시를 하죠? 뭔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주는 거 아닙니까? 그걸 도덕적으로 잘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범부중생이라도 도덕적으로 잘 살고 있는 이런 사람에게 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이 있습니까? 그거하곤 관계없이 불쌍해서, 진짜 내보다도 못살고, 도덕적으로 살고 있고 안 있고 하는 그것을 떠나가지고 그래도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하는 보시가 있고,

 

또 어떤 것이 있습니까? 여러분들 집에서 키우는 애완동물들 같은 동물들에게 하는 것.

 

이렇게 개인에게 하는 것은 이렇게 14가지로 구분을 합니다.

 

그 열네 가지는 다 공덕이 있겠습니까?

집에 기르는 개한테 밥을 줘도 개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잘 따릅니다. 어쨌든 보시한 그 공덕으로 인해서 나를 잘 따르는 이익이 있다는 거라. 축생에게 해도 공덕은 있게끔 됩니다.

그런데 공덕은 다 똑같지는 않겠죠? 축생에게 한 공덕이든 아니면 성인에게 한 공덕이든 공덕의 차이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니까 되도록 공덕이 많은 분에게 보시를 하면 좋겠죠. 그리하더라도 공덕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그 보시는 한 사람에게, 한 개체에게 한정되게끔 된다는 겁니다.

 

그 대신에 상가에게 하는 시주(보시)가 따로 있습니다.

 

부처님의 제자들은 상가를 구성했습니다.

부처님 당시 때, 부처님의 제자들 중에 비구, 비구니들에게 시주하는 경우들.

예를 들면 부처님의 제자들을 위해서 뭐 이런 가사를 지어가지고 올린다든지, 그래서 우리 결제가 끝나고 나면 스님에게 가사공양을 할 때, 그 절에 있는 모든 스님들에게 가사공양을 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제자들인 비구, 비구니들에게 하는 보시는 인원을 가리지를 않습니다. 그 부처님이 머물고 있는 곳에 다섯 명이 존재하면 다섯 명에게 다 해야 되는 거고, 열 명이 존재하면 열 명에게 다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부처님하고 같이 있는 비구, 비구니들은 만날 수가 없죠? 이미 부처님은 열반하셨기 때문에. 어쨌든 상가에게 보시한다는 것은 그게 먼저 들어갑니다.

 

그다음에 해당될 수 있는 게 뭡니까?

부처님 입멸 후에 비구, 비구니들에게 하는 보시.

부처님 입멸 후에 상가가 구성되었습니다. 그래서 비구니교단, 비구교단 이런 식으로 형성되었습니다. 테라와다에는 물론 1100년경에 비구니는 맥이 끊어지고 없습니다. 지금은 비구교단 밖에 없습니다.

어쨌든 그 비구교단에게 보시를 하는데, 정사를 짓는다든지 아니면 수행처를 짓는다든지 할 경우입니까? 개인에게 주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그 교단에게 주는 것이겠습니까? 개인에게 주는 것 아니죠! 그 교단, 승단에게 주는 겁니다. 어느 스님이든지 거기에 머무를 수가 있기 때문에!

 

절을 짓는데 규정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맨 먼저 지어야 하는 것이 스님들이, 객스님들이 왔을 때 머물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 그것은 필수조건입니다.

그다음에 수행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 그것이 두 번째 조건입니다.

세 번째 조건은 그 스님들이 모여서 서로 포살을 하고 자자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 이 세 개는 반드시 지어야만이 절로써 인정을 받게끔 됩니다. 교단에서.

 

그 얘기는 뭐냐면 개인에게 아니면 거기에 머무는 스님들에게 그 절을 지어준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스님 외에는 다른 스님들은 머물 수가 없습니다. 지금 한국의 실정하고 꼭 마찬가집니다. 객스님들이 가면 객스님들이 머물지를 못합니다. 방을 안 내줘요. 그 얘기는 뭡니까? 상가 공동 소유가 아니고 그 절 스님들만의 개인소유라는 뜻이 됩니다.

 

테라와다에는 이런 개념을 가지지를 않습니다. 지금 존재하는 모든 스님들, 교단에 있는, 여기에 여기 부산에 안 있더라도 서울에 있든지 아니면 대구에 있든지 그 스님들이 왔을 때 머물러서 자기 절 같이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 현재뿐 아니라 앞으로도 출가해서 스님이 돼서 승가의 일원이 된 스님들이 언제든지 와서 머물 수 있는 곳, 이게 인제 절이라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한국의 절하고 테라와다의 절하고는 개념이 이렇게 다릅니다.

 

그 절에는 비구도 머무를 수가 있고, 비구니도 머무를 수가 있게끔 됩니다. 지금도 사찰들을 가보면 구역을 분명하게 정해놓습니다. 절에 도로를 딱 내놔가지고 요쪽에는 비구스님들이 머물 공간, 요쪽은 비구니스들이 머물 공간.

그런데 요즘은 테라와다에는 비구니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매치(Maechi)라든지 아니면 띨라신(Thilashin)이라 해서 9계를 지키는 자, 8계를 지키는 자들, 머리를 깍고 있는 분들, 비구니는 아닙니다. 그런 분들이 머물 공간을 따로 이렇게 줍니다.

그래서 수행자들도 남자수행자들은 비구들이 머무는 옆에다가 짓고, 여자수행자들은 8계나 9계를 지키는 분들 옆에다가 방사를 짓고, 이렇게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한 절 안에 비구, 비구니 같이 존재하는 형태들을 띠고 있습니다.

 

이게 인제 부처님 입멸 후에 비구, 비구니에게 시주하는 형태들입니다.

그런 거는 보통 크게 봤을 때는 정사라든지 이런 건물이 되고, 물건을 시주할 경우에는 어떻게 됩니까? 물건도 꼭 마찬가집니다. 그것을 동등하게 배분을 합니다. 만약에 사과를 한 박스 했다 그러면 그거를 갖다가 동등하게 비구, 비구니들에게 배분합니다. 그런 시주 같은 경우에는 개인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상가에게, 비구 비구니 상가에게 하는 경우들입니다.

 

그다음에는 한정됩니다.

비구 상가에게 하는 시주 보시.

그다음에 비구니 상가에게 하는 시주.

그리하더라도 인원은 제한을 두지 않습니다. 몇 명의 스님이라는 규정을 두지 않고 모든 분들에 다 해당이 됩니다. 만약에 모든 분들인데도 내가 모든 분들에게 줄 만한 양이 안 될 때는 어떻게 됩니까? 그리해도 그거는 나누면 되는 거라. 나누지 못할 거 같은 경우에는 상가 공동소유가 돼버리는 거라. 그리하더라도 물론 나는 적게 보시를 했지만 그것은 상가 전체에게 보시한 것이 돼버리는 거라.

 

그다음에는 인제 한정됩니다.

비구, 비구니 상가 중에서 몇 명의 스님들에게 하는 보시.

내가 집안에 경사스러운 일이 있어서 스님들 초청해서 점심공양을 드리고 싶다. 비구스님 다섯 분, 비구니스님 다섯 분을 초청해서 공양을 대접하고 싶다. 그러면 상가에게 부탁을 한단 말이라.

그리하더라도 인원수는 얘기할 수 있습니다. '다섯 분의 비구, 비구니 스님들 열 분을 초청을 하고 싶습니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만약에 "진용스님은 꼭 거기에 와야 됩니다." 이렇게 할 경우에 어떻게 됩니까? 한정돼버리죠. 한 스님에게! 이것은 상가에게 보시하는 것이 아니게 됩니다.

그래서 인원을 제한을 하더라도 특정인을 지명하지는 못하게끔 됩니다. 그래야 상가에게 보시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지만 그 다섯 명의 스님들이 가더라도 그것은 그 상가를 대표해서 가는 것이기 때문에 상가 전체를 의미하게끔 된다는 거라.

 

이렇게 비구, 비구니 스님을 같이 인원수를 제한을 해서 보시하는 경우가 있고,

또 비구 스님들을 인원수를 한정해서 보시하는 경우가 있고,

아니면 비구니를 인원수를 한정해서 보시하는 경우,

 

이렇게 일곱 가지 경우가 상가에게 보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외에는 상가에게 보시하는 경우가 아니고 개인에게 보시하는 것들입니다.

 

어떤 것이 공덕이 크겠는가 하는 것은 그것은 불문가지입니다.

어떤 경우든지, 만약에 예를 들어서 내가 정 형편이 안돼서 한 스님만 초청하게 된다. 그러면 한 스님이라도 “진용스님을 초청하고 싶습니다.” 하고 얘기하는 경우, 또는 한 스님이라도 “한 스님을 초청하고 싶습니다.” 그중에 마침 한 스님이 진용스님이 올 수도 있고 아니면 또 다른 스님이 갈 수도 있고 이렇게 될 경우, 이럴 경우에는 똑같은 한 스님이라 하더라도 앞에 전자 같은 경우에는 이름을 한정해서 할 경우에는 개인에게 하는 보시가 되고, 뒤에 같은 경우에는 상가 전체에게 하는 보시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가전체에게 보시를 하는 것이 바른 겁니다.

 

그래서 조금 전에 보살님 같은 경우에도 보시를 할 경우에는 상가에게 보시한다는 마음을 항상 가져야 됩니다.

'이 물건을 상가에게 보시합니다.' 무슨 목적으로?

'이 세상에서 내가 빨리 깨달음에 이르기를' 하든지 아니면

'이 세상에서 내가 행복하기를' 하든지,

뭔가 그런 마음으로 보시를 해야 만이 되는 것이지

'스님 이거 잡숫고 기운 차려가지고 더욱더 법을 설해주십시오.' 할 거 같으면 어떻게 돼요? 그거는 개인에게 한정이 돼버리는 겁니다.

다음에는 보시를 할 때는 반드시 그런 마음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이 물건을 상가에게 공양 올립니다.' 하는 마음으로 해야 됩니다.

 

그런데 보시를 하는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가져야 될까?

만약에 나쁜 짓 실컷 하다가 개인에게 하든지 아니면 상가에게 하든지 이렇게 보시를 했다. 그러면 거는 공덕이 될까, 안될까? 응? 될까, 안될까? (대답)

그렇지! 보시할 때의 마음입니다. 보시할 때의 마음이 어떤가에 따라서 개인이든 아니면 상가에게 하든지 그런 보시공덕이 되느냐 차이가 납니다.

즉, 마음이 탐진치로부터 떠난 상태에서 보시를 하느냐, 그렇지 않고 탐진치를 가지고 보시를 하느냐에 따라서 공덕이 되고 안되고의 차이가 나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자! 아까 얘기를 하다가 말았는데 상가에게 하는 보시는,

원래 상가는 네 사람이 존재해야 만이 상가가 구성이 됩니다. 네 스님의 출가자가!

 

그런데 보시는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보시는 오로지 한 스님이 존재하더라도 상가로써 보시를 하는 것이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상가가 존재하는 것은 의식을 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입니다. 스님들이 모여서 포살을 하든지, 자자를 하든지, 결제를 하든지, 아니면 새로운 스님들을 배출을 하든지, 이런 의식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이 네 명 이상이라는 그런 규정이 됩니다.

이 보시라는 것은 의식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보시하는 겁니다. 보시하는 거기 때문에 한 스님이라 하더라도 상가로서 규정을 지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특히 요즘 같은 경우에는 각 절에 한 스님 아니면 두 스님씩 존재를 합니다. 그렇더라도 되도록 개인에게 보시한다는 마음을 내지 말고, 상가에게 보시한다는 마음을 내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래서 보통 뭐라고 하느냐면 '상갓사 데마(Saṅghassa dema)' 라고 합니다.

'이 보시를 상가에게 드립니다.'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받는 스님도 상가의 대표로서 받는다는 마음을 갖는 것이지 개인으로서 받는다는 생각을 가지질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돈을 갖다가 어디로 기부를 하고 싶다. 그러면 어느 단체에다가, 아니면 내가 한국 테라와다 불교라는 단체에다가 일정부분 돈을 기부를 한단 말입니다. 여러분들 같은 경우에는 매월 보시금을 여기 붓다의 길따라 선원에 보시를 한단 말입니다. 그럼 그 보시금이 개인에게 가는 겁니까? 그렇지는 않죠?

그런데 그 보시를 받는 것은 그 단체의 장이 받습니다. 그러니까 여기 우리 한국 테라와다 불교 같은 경우에는 내가 이사장으로 있으니까 내가 그걸 받는 형태를 띤단 말입니다. 통장으로 들어오든 뭘로 하든 간에.

 

그리하더라도 그것은 개인에게 준 것이 아닙니다. 그 단체에게 준 것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줬다가 내가 '아! 이건 안되겠다' 싶어서 돌려받는다고 할 거 같으면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승단에 시주한 것은 그렇게 돌려받을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는 거라. 개인에게 준 것이 아니고 단체, 하나의 그룹에 준 것이기 때문에 그 그룹을 대신해서 그 스님이 받는 것뿐이라는 겁니다. 그러면은 일단 주고 나면 돌려받을 수는 없다는 겁니다.

 

쉽게 예를 들면 여러분들 아이에게 옷을 사줬는데 애가 안 입는다. “에잇! 빌어먹을 놈” 하면서 뺏어갖고 다른 아이에게 줄 수 있느냐는 거라. 여러분은 줄 수 있을 거 같죠? 그러면 이거는 이미 보시의 개념이 아니게 됩니다. 보시라는 것은, 남에게 준다는 것은 돌려받는 규정이 없습니다.

그래서 공덕이 될려고 할 거 같으면 돌려받는다는 생각을 가지지 말아야되는 것이고, 그래서 보시를 할 때의 마음이 깨끗한 마음으로 해야 된다는 겁니다.

탐진치는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번뇌의 근본 원인입니다. 번뇌를 가지고 보시를 할 거 같으면 그거는 보시가 안 된다는 겁니다. 공덕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탐진치를 완전히 없앨려고 할 거 같으면 어떻게 해야 돼요?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르러야 만이 탐진치를 없앨 수 있습니다.

그럼 그거 없애지를 못하는 상태인데 그럼 어떻게 해?

탐진치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하더라도 보시할 때는 탐진치를 억누를 수가 있습니다. 그때 당시는 없애고 보시를 할 수가 있습니다.

'따당가 빠하나(tadaṅga-pahāna)'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순간적인 깨달음'이라는 뜻입니다. 탐진치가 없는 것은 깨달음의 상태입니다. 보시를 할 때에는 순간적으로 탐진치가 없는 상태에서 보시를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보시를 할 때의 마음은 순간적인 깨달음에 이르른다.

 

그렇게 하는 보시여야만이 위없는 공덕이 된다.

어떤 겁니까? 욕심을 가지지 않는 것! 내가 보시를 하더라도 아까운 생각을 가질 것 같으면 이미 욕심을 가지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아까운 생각을 하지 않고 주어야되는 거라.

그다음에 '아이고! 내가 저기에 보시해가지고 아직 어린아이 인제 막 출가한 스님인데 무슨 공덕이 되겠나' 이런 마음을 가지면 어떻게 되겠어? 이미 화를 일으키게 된다는 거라. 분노가 일어나지 않게끔 분노를 없애고 하는 것!

그다음에 '보시해도 내가 무슨 그게 큰 이익이 있겠나?' 하는 것, 그건 어리석음이라는 거라. 보시공덕에 대한 좋은 결과가 없을 거라는 마음을 가지는 겁니다. 그런 어리석은 마음을 가지지 않고 보시하는 것!

 

그래서 아로바(alobha), 아도사(adosa), 아모하(amoha)의 상태로써 보시를 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보시를 보통 불교에서는 빨리어 용어로 뭐라고 하느냐면

'빠야따빠니(payatapāṇī)'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자신의 손을, 물로써 자신의 손을 씻는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더러워져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우린 물로써 손을 씻습니다. 보시를 하는 것은 곧 그와 같다는 얘깁니다. 마음을 청정하고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하는 겁니다.

 

특히 그렇게 보시를 하는 데다가 하나 더 보태면 '기뻐하는 것'

그 보시한 것에 대해서 '아! 이건 참 내가 잘한 일이다. 좋은 일을 했다' 하고 기뻐하는 것. 그런 것들로 인해서 공덕은 더 배가되어져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인제 보통 보시라고 하는 개념입니다.

 

어떻게 한다고요? 보시는 개인에게도 할 수 있지만 개인보다는 상가에 하라.

그다음에 상가에 보시를 하더라도 어떻게 하라고요? 어떤 마음으로? 탐진치가 없는 마음으로 보시를 하라.

그래야만이 바른 보시가 된다 하는 사실을 반드시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 이 법문 글은 붓다의 길따라 선원장이신 아짠 빤냐와로(진용) 스님께서 법문하신 내용입니다.

아짠 빤냐와로 스님의 육성을 그대로 담고자 노력하면서 법문을 듣고 옮겨적었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법문내용을 잘 담아내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약 제대로 전달이 안된 부분이 있다면 옮겨 적은 이(담마마-마까)의 불찰일 것입니다.

그럴 경우 부디 법문내용의 속뜻을 헤아려 주시길 바랍니다.

 

*** 모두 평온하길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