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수행기초[초보수행반] 법문

20. 일상 수행 (20091110)

담마마-마까 2019. 12. 5. 19:51

https://youtu.be/NWbaf8S_c2E

 * 일상 수행 (20091110)

 

오늘은 일상 수행에 대한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스님이 오늘 얘기하는 거는 반드시 실천하고 지켜라 하는 의미에서 하는 겁니다 이! 안 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알겠죠? (네)

 

맨 첫 번째, 자기 전에 모든 일을 다 끝내놓고 나서 밤에 인제 잠자리에 들어서 뭐 하라고 그랬어요? 뭐 하면서 자라고 그랬어요?

'배에다 손 올려놓고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그것을 알아차리면서 잠에 떨어지라' 그렇게 얘기했죠! 그거 하나는 꼭 지켜야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살아있을 동안에 그렇게 훈련을 하다 보면 잠도 편하게 자고, 숙면을 취하고, 또 쉽게 악몽을 꾼다든지, 또 잠자리가 사납다든지 이런 것들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편하게 잠잘 수가 있습니다.

 

몸이라고 하는 것은 싸이클이 맞아떨어져야 됩니다. 그래서 좀 피곤했다 싶으면 그 몸을 갖다가 완전히 쉬어줘야 됩니다. 마음도 꼭 마찬가집니다. 낮에 얼마나 많이 생각을 하고, 많이 활동을 했습니까? 잠을 잘 때는 그걸 완전히 쉬어줘야 돼. 몸과 마음을! 그럴려고 할 것 같으면 물론 저녁에 누워있으면 잠자기 전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오르겠지. 그렇지만 이때까지 낮 동안 해왔던 것만 해도 충분해.

그러니까 마지막 잠자기 전에는 단 5분이라도 그 시간 동안은 반드시 누워서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걸, 손을 배위에다 올려놓으면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걸 쉽게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잠을 자도록 습관화들이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괜히 잠자기 전에 잠이 안 온다고 재밌는 책 꺼내놓고 책 읽으면서 잠에 떨어진다든지, 아니면 음악을 듣는다든지 이렇게 할 거 같으면 오히려 더 산만해집니다. 잠에 들어가지고 꿈이.

 

그래서 그렇게 하지 말고 마지막 잠자는 순간에, 잠에 떨어지기 위해 일어나는 마지막 의식이 편안할 거 같으면, 잠에 떨어지는 첫 단계에 일어나는 의식이 편안합니다. 그럼 잠자리가 편안해집니다.

 

그렇게 훈련하면 또 좋은 것이 뭐냐면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도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죽을 때 자기가 죽는 줄 알고 죽을 거 같으면 얼마나 행복해? 그걸 다 못해서 문제지! 죽을 때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 그 사람 잘살아왔다' 하고 이렇게 대부분 얘기합니다. 적어도 죽을 때 그렇게 편안하게 내가 호흡을 하면서 호흡이 끊어지는 줄 알고 죽음을 맞이할 거 같으면 인간계 이하로 나쁜 방향으로 떨어지는 가능성은 적어지는 거라.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든가 아니면 천상으로 태어나든지, 지금보다는 더 나은 모습들로 윤회를 하게끔 되는 거라.

 

그렇게 훈련을 하다 보면 깨달음이 또 나에게 다가와져서 윤회를 완전히 벗어날 수도 있고, 그렇기 때문에 잠자기 전에는 반드시 단 5분 10분이라도 배에 손을 얹고 호흡을 알아차리면서 잠에 떨어져라. 그것이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는 아침에 일어났을 때, 정신이 반쯤 들어있을 때, 비몽사몽 간에 뭐 그냥 스위치 찾는다고 이렇게 하고, 아니면 일어나기 싫어서 빈둥빈둥하고 이런 시간들을 없애라는 겁니다.

'아침에 정신이 들자마자 바로 호흡을 알아차리도록 하라.'

 

이것은 왜 하느냐 하면, 보통 보면 알아차림 없이 살아가는 시간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일상적으로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것을 명확하게 아는 시간들이 드물다는 거라.

그런 습관들이 언제 길러지느냐면 아침에 일어날 때 뭐 그냥 깨어있는 것도 아니고 잠자는 것도 아니고, 그런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게 자꾸 습관화되는 거라. 그러니까 대충 해도 된다 하는 그런 생각들을 가지게끔 된다는 거라.

똑바로 깨어있어도 잘 살동 할 판에 반쯤 깨어있어 가지고 거 어떻게 할려고 그래?

 

또 하나는 일상생활에서 게으른 습관들이 자꾸 길러지는 것이 아침에 일어날 때이기 때문에 바로 의식이 탁 돌아와서 바로 일을 처리하는 습관을 들이면 일상생활을 할 때도 게을러지고 하는 것들이 적어진다는 거라. 그러니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거부터 자꾸 습관을 들이라는 거라. 일어나기 싫어서 오 분만 오 분만, 그러면서 오 분만 하면서 그 오 분 동안 잠을 자지도 않으면서, 깨어있는 것도 아니고 잠자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자꾸 어리석게 한다는 거라.

 

그래서 아침에 의식이 돌아오자마자 바로 호흡을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저녁에 잘 때는 배를 관찰하는 게 수월한데, 아침에는 코끝을 관찰하는 것이 수월합니다. 코끝을 스치고 들어오고 나가고 하는 바람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을 단 몇 분간이라도 알아차릴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마음이 단순하면 그걸 알아차리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의식을 완전하게 대상에 일치시켜주는 훈련들을 자꾸 해야 됩니다.

그래서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이 명확해지면 그때사 눈을 뜨고 일어나서 뭘 해야 된다 하는 것을 하나씩 해도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면은 그 단 몇 분간의 호흡을 알아차림으로 인해서, 아침도 맑고 개운해지고, 하루 생활하는데도 훨씬 용이하게, 내가 할 일 하지 말아야 될 일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날 때는 반드시 코끝의 호흡을 알아차리도록 하라.

 

그다음에 일상생활을 할 때 다 알아차리면 좋은데 그중에 꼭 하나, 밥 먹는 것, 밥 먹을 때 다른 거 다 놓쳐도 좋아. 숟가락을 들고 놓고 음식을 가져오고 이런 거 다 놓쳐도 좋은데 딱 하나 음식물을 씹을 때, 내가 분명하게 음식물을 씹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밥 먹을 때 조심해야 되는 것은 밥 먹을 때 텔레비전을 본다든지, 라디오를 듣는다든지, 신문을 본다든지 이런 것들은 하면 안 됩니다. 밥을 먹을 때는 밥만 먹도록 해야 됩니다. 밥만 먹는데 어차피 눈을 뜨고 있고 귀가 열려있으면, 소리도 들리고 눈으로 대상들이 보입니다. 그리하더라도 안 보이고 안 들리는 것처럼 해야 됩니다. 입을 꼭꼭 씹음으로 인해서 그 음식물을 씹고 있다는 데에만 마음을 집중하고 있으면 실제로 대상들은 보이지를 않고 들리질 않습니다.

 

그래서 씹을 때는 반드시 씹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씹도록 하면 음식물도 꼭꼭 씹게 되고 또 오래도록 씹게 되니까 소화도 잘되는 거라. 그럼으로 인해서 함부로 음식물을 허겁지겁 먹는다든지, 아니면 양을 많이 먹어서 몸에 이상이 생긴다든지 하는 것들을 방지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음식물을 먹을 때는 반드시 씹고 있다는 것 하나는 적어도 분명하게 알아차려라.'

아침 점심 저녁들 먹죠? 하루에 세 번, 적어도 그거는 할 줄 알아야 된다는 거라.

 

그래서 잠자리에 들 때, 아침에 일어날 때, 음식물을 씹을 때 이렇게 세 가지는 꼭 하도록 해야 되고,

 

그다음에 해야 되는 것이 뭐냐 하면 일상생활을 할 때 말하는 것, 몸으로 행하는 것, 생각하는 것, 이 세 가지는 할 줄 알아야 됩니다.

 

말을 할 땐 어떻게 합니까? 대부분 생각 없이 얘기를 합니다.

절대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일상생활에서 현대의 사람들은 침묵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참 드뭅니다. 뭣이든, 누구하고든 얘기를 할려고 자꾸 합니다. 말을 하고픈 욕망이 보통 앞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말을 할 때는 반드시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생각을 해야 됩니다. 내가 지금 하고자 하는 말이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을 분명히 먼저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말을 하므로 인해서 나와 상대방이 번뇌가 일어나도록 하는가, 아닌가?

쉽게 말하면 내가 이런 말을 하므로 인해서 내 자신뿐 아니라 상대방이 일으키는 마음이 선한 마음을 일으키게 할 것이냐, 아니면 일어난 선한 마음을 더욱더 증장시켜 주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반대로 악한 마음을 일으키게 할 것이냐, 아니면 일어난 악한 마음을 갖다가 더 확대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냐? 그걸 먼저 반드시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의도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내가 말을 하는가?

내 이익을 위해서, 내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인가? 아니면 상대방을 위해서 하는 것인가? 아니면 나와 상대방이 다 이익되고 행복하기 위해서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인가? 하는 것들을 먼저 판단을 하라는 거라.

'세 번째에 해당이 될 때 반드시 말을 하라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침묵하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먼저 의도를 파악을 하고 나서, 그것이 바른 의도를 가지고 하는 것이라 할 거 같으면 말을 하는데,

 

말을 할 때는 입술이 달싹달싹하는 것을 자꾸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말은 코나 눈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입으로써 하게끔 됩니다. 그러면 입술에 부딪치는 감촉이 어떤 경우에는 부드럽고 고요하고, 어떤 경우에는 거칠고 또한 그것이 나쁜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 느낌들도 있습니다. 고요하게 얘기할 경우에는 입술이 굉장히 부드럽습니다. 언성도 올라가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화가 난다든지 욕심을 가지고 말을 할 거 같으면 입술이 바르르 떨리든지 아니면 입술이 거칠게 느껴집니다. 그러면 그 느낌을 자꾸 알아차리라는 거라.

그래서 입술에서 오는 느낌이 부드럽고 고요하게 된다고 느낄 때 계속 말을 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게 처음부터 하면 잘 안됩니다. 입술을 관찰하는 것이!

 

그러면 두 번째로 할 수 있는 것이 뭐냐면 말을 하게 됐을 때 우리는 귀를 통해서 이 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면 귀를 대상으로 해야 됩니다. 내가 말을 하더라도 내 말은 내 귀를 통해서 내가 듣습니다. 그러면 마음을 알아차릴 대상을 어디에 두느냐면 귀에다 두라는 거라.

'귀에서 들리는 소리를 자꾸 알아차릴 대상으로 하라.'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들을 입술을 통해서 뱉어내는 것들이 내 귀를 통해서 들립니다. 그럼 그 들리는 소리들이 어떻게 들리는가? 똑같은 음으로 말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톤이 자꾸 바뀌고 이것이 찢어지는 소리가 나는가, 아니면 남에게 들리지 않게끔 비밀스럽게 소곤소곤하는 말이 되는가? 이런 것들을 잘 판단을 해야 됩니다.

 

부처님이 바른말이라고 하는 것들은 어떻게 규정을 뒀느냐 하면,

내가 말을 했을 때 상대방의 거리가 2m70cm에 있는 사람은 그 말을 뚜렷하게 알아들을 수가 있고, 5m40cm에 있는 사람은 그 소리를 무슨 소리인지 정확하게 분간하지 못하는 소리, 이 범주에 있는 소리가 바른말을 하고 있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언성이 높아지면 어떻게 돼요? 5m40 이후에 있는 사람도 그걸 뚜렷하게 알아듣습니다. 그럼 그거는 바른말이 아니라는 거라. 비밀스럽게 속닥속닥하면서 이간질하려는 말은 2m70 이전에 있는 사람도 잘 못 알아듣습니다. 그럼 그것도 바른말이 아니라는 거라. 또 쓸데없는 말이 될 가능성도 커집니다.

 

바른말이라고 하는 것은 2m70에서는 뚜렷하게 들을 수 있고, 5m40에서는 그것을 명확하게 분간하지 못하는 말이 바른말이다 하고 주석서에는 기록이 돼있습니다. 그 얘기는 말하는 사람이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말을 하는 톤도 거의 일정해야 되는 것이고, 또한 말하려는 의도하는 바도 나쁜 말이라든지, 욕설이라든지, 남을 비방하는 말이라든지, 아니면 이간질시키기 위한 말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안 하도록 해야 된다는 거라. 그래서 말을 할 때 귀에서 들리는 소리를 분명하게 알아차리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해서 말을 하고 말이 끝나고 나면, 내가 지금 한 말이 바른말을 했는가, 올바른 의도를 가지고 한 말이 올바르게 말을 하게 됐는가, 하는 것을 한번 더 판단을 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해서 하고 나면 그다음에 똑같은 방법으로 말을 할 때는 똑같은 의도를 가지고 똑같은 말을 하고 그러고 나서 판단을 하고, 이런 방법을 자꾸 동원을 하면 말을 할 때도 남에게 피해가 가지 않고 이익되게 하는 말들, 또 행복을 가져오게 하는 말들, 나도 이익되고 행복을 가져오는 말들을 자꾸 하게끔 된다는 거라.

 

라훌라에게 부처님이 그렇게 일렀습니다. 라훌라가 누군지 알죠? 부처님이 출가 전에 아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알고 있듯이 라훌라가 무슨 장애를 뜻한다고 얘기하는데, 꼭 그런 뜻은 아닙니다. 석가 종족 자체가 라가 신앙을 가져오는 종족이었기 때문에 '라후'라고 하는 것은 '용의 머리'를 뜻합니다. 그래서 그 '부족의 우두머리'라는 그런 뜻도 됩니다. 그러니까 꼭 나쁜 뜻으로만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어쨌든 라훌라가 일곱 살에 출가를 하게 됐는데, 쉽게 말하면 아버지가 부처님이다 보니까 남에게 으스대려고만 하는 거라. 자기가 공부가 돼야 으스대는 건데 공부가 안됐을 때는 어떻게 돼? 거짓말을 하게 되는 거라. 없는데도 있는 것처럼 해야 되는 거고, 남에게 나타내 보일려고 자꾸 더 해야 되고, 거짓말을 자꾸 하게 된다는 거라.

그러니까 사람들이 아무리 부처님 아들이지만 한두 번 봐주는 거지 계속 봐줄 수 없으니까 그 뒤부터는 라훌라를 잘 상대를 안 할려고 그럽니다.

그런데도 라훌라는 이 거짓말 하는 버릇을 못 고치는 거라.

부처님이 하루는 라훌라한테 가서 대야에 물을 떠오라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깨끗한 물을 떠오거든. 발을 씻기 위해서. “그 물 중에 반을 땅에 버려라.” 반을 가지고 부처님 발을 씻습니다. 발을 씻고 나서 다시 또 그 물을 버려버립니다.

 

조금 전에 처음에 떠왔던 물은 깨끗했던 물이라는 거라. 그 깨끗했던 물의 반을 땅에다 버린 거라. 그 물은 어디로 가겠어요? 거기 뭉쳐져 있습니까? 하늘로 올라가는 겁니까? 아니죠! 땅으로 스며듭니다.

그런데 반 남은 물을 가지고 발을 씻으니까 흙탕물이 돼있는 물도 또 땅에다 부으니까 어떻게 돼요? 또 똑같이 스며든다는 거라.

 

'습관들인다고 하는 것은 그와 같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를 합니다. 좋은 습관을 들이면 좋은 습관이 몸에 배인다는 거라. 나쁜 습관이 들면 나쁜 습관이 몸에 배인다는 거라. 거짓을은 자꾸 할 거 같으면 그게 습관이 돼서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을 자꾸 한다는 거라. 바른말을 할 거 같으면 그게 습관이 돼가지고 계속적으로 바른말을 하게끔 된다는 거라. 이 물과 같다는 거라. 좋은 물도 땅에 스며들고 더러운 물도 땅에 스며들 듯이 이것이 너의 습관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거짓말을 자꾸 하는가 하고 얘기를 합니다. 나쁜 습관을 자꾸 들여가지고 어떻게 할 것이냐?

 

그러면서 부처님이 법경이란 얘기를 합니다.

“거울을 가져 와봐라” 하면서, 거울을 갖다 놓습니다. “거기다 대놔놓고 말을 해봐라” 합니다. 말을 쭉쭉쭉 하니까, “니가 말을 하면서 니 입술이 달싹거리는 것을 볼 수 있느냐?”하니까 “볼 수 있습니다.”하는 거라.

“그러면 이 거울과 같이 마음속에서 뚜렷하게 니 입술이 달싹달싹하는 것을 알아차리도록 하라.” 그것을 거울을 보듯이 자꾸 알아차리라는 거라. “그래서 입에서 나오는 말이 바른말이 자꾸 나오는 것을 알아차리도록 하라. 바른말이 아닐 경우, 거짓말일 경우에는 그만두어라.” 그게 인제 부처님이 아들인 라훌라에게 가르친 방법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합니까? 애들이 거짓말하면 그냥 바로 큰소리가 나옵니다. 큰소리라 하는 것은 5m 40 이상에서도 들을 수 있는 소리들이라. 그러면 그거는 바른말이 아닌 거라. 말을 할 때는 이런 것들을 자꾸 지키면서 말을 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몸으로 행할 때, 여러분 몸이 대단한 거 같죠? 실제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몸입니다. 딱 몸 하나만 봤을 때 부처님이 그것은 썩은 나무토막보다도 못하다 그랬거든. 나무토막은 불이라도 일으킬 수가 있지. 그런데 이 몸은, 마음이 없는 이 몸은 어디다 쓸 거라? 아무데도 쓸데가 없어.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하더라도 죽고 나서, 마음이 떠나고 나서는 그 몸을 필요한 사람은 가져가라 그러면 누가 가져갈 거라? 응? 사가라 해도 안 사가는 거고 공짜로 가져가라 해도 안 가져가.

그래서 마음이 없는 몸은 아무런 역할을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몸을 가지고 갖가지 생각을 일으키거든. 니가 잘났네. 니는 못생겼네. 니는 키가 크네. 어쩌네. 나는 조금 더 젊어 보이네. 어쩌네. 갖가지 생각을 일으킨다는 거라. 쓸모없는 것들인데 왜 그 쓸모없는 것에다가 자꾸 비교대상을 삼느냐는 거라.

 

몸이라는 것은 그런 거라는 거라. 마음이 있지 않은 몸은 아무 이익이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몸이 움직일 때 마음을 어디다 둬야 되겠어요? 움직이는 몸에 둬야 그게 이익이 있는 것이지, 마음이 떠나있는 상태에서 몸 지 혼자서 간다고 쳐봅시다. 그게 무슨 이익이 있느냐는 거라. 로봇도 아니고 지 혼자서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가면 어디가서 부딪치고 어디가서 실수하게 돼있는 것이지, 그게 똑바로 하겠어요? 안되게 돼있는 거라.

 

어떤 경우든지 움직일 때는 움직이는 몸에다가 마음을 반드시 일치를 시켜주도록 해야 됩니다. 걸어갈 때는 그래서 걸어가는 것을 알아차려야 되는 거고, 그릇을 씻을 때는 그릇을 씻는 것을 알아차려야 되는 거고, 모든 일상생활에서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은 그대로 마음을 일치시켜서 알아차려야 만이 그것이 이익이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이익을 가져오지 못한다 하는 거라.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은 반드시 마음으로 알아차리도록 하라.'

그렇게 해야 만이 정신적인 번뇌로부터 벗어나게끔 됩니다. 또 몸 자체를 분명하게 이해를 하게 되면 함부로 몸을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수하는 것들이 없어지게끔 됩니다. 적어도 몸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실수들은 막아야 될 거 아니라.

애가 공부를 안 한다 해가지고 손이 나도 모르게 탁 가가 때려버린다 할 거 같으면 본인도 그걸 후회하게 되는 거고, 아기도 그걸 맞아놔 놓고 악감정 가지게 되는 거고, 왜 그런 것들을 하느냐는 거라. 때리더라도 마음을 분명하게 거기에 알아차리면서 때리라는 거라. 그러면 그거는 애한테도 사랑의 매가 되는 거고, 나도 반드시 응분의 잘못한 것에 대해서 사랑의 매로써 내가 때렸다는 것을 인식하기 때문에 나도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다는 거라.

'몸을 움직일 때는 반드시 마음을 일치시키도록 하라.'

 

그다음에 마지막에는 마음입니다.

마음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납니다. 내가 의도를 일으키고 나서, 의도를 일으킨 것이 대상에 접하고, 그 대상에 접한 것들을 내가 또 '아! 이게 뭐다'하고 어렴풋하게 알아차리고 나서, 그 알아차리는 걸 분명하게 내가 인식하는 과정, 이것은 동시에 일어나집니다. 어느 하나가 안 일어나지면 그것은 내가 마음으로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게끔 돼있습니다.

그게 마음의 메카니즘입니다.

 

그리하더라도 의도가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나야 만이 대상을 접할 수가 있습니다. 대상을 접하는 것이 일어나고 사라지고나야 만이 그 대상에 대해서 산냐(saññā 想) '이것이 무엇이다. 이것은 과거에 본 것이다. 아니면 처음 본 것이다' 하고 인식할 수가 있습니다. 그 인식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나야만이 그 대상에 대해서 분명하게 내가 '아! 이것은 무엇이지.'하고 확정지을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 반복돼가지고 명확하게 마음이 하나의 싸이클을 이루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그것 중에 어느 것 하나가 떨어져서 지 혼자서 독립할 수도 없고, 또 지 혼자서 안 일어나게 하는 법도 없다는 거라. 어쨌든 다 일어난다는 거라. 그게 마음이라는 거라. 이걸 우리가 콘트롤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내가 내 마음을 갖다가 내 마음대로 콘트롤 하겠다? 절대 있을 수가 없는 거라. 오히려 그런 마음이 일어나는 것들을 이해하는 것이 오히려 빠르다는 거라. 받아들이라는 거라. 받아들이고 나서, 그렇게 인식하고 나서 다음의 문제들을 갖다가 생각하도록 해나간다는 거라. 그렇게 인식하고 나서 우리는 마음이 그것이 좋은 것, 싫은 것 이런 것들로 인식한다는 거라. 좋은 것들은 더 가질려고 하는 거고, 싫은 것들은 배척할려고 한다는 거라.

 

좋고 싫은 마음들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그걸 뭐라고 그럽니까? 그렇게 행하게 되면 선업을 쌓게 되고, 불선업을 쌓게 되고 이렇게 됩니다. 선업과 불선업을 쌓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그런 마음으로 인해서 좋은 느낌, 싫은 느낌이 일어날 때 그것을 그대로 알아차리라는 거라. '아! 좋은 느낌이다. 싫은 느낌이다.' 하고 알아차리면 더 이상 그것으로 인해서 발전을 하지 않는다는 거라. 좋은 느낌은 취할려고 하고 싫은 느낌은 벗어날려고 하는 마음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라.

 

마음이 일어날 때는 반드시 이렇게 알아차리도록 하라는 거라.

마음을 내 스스로 자꾸 콘트롤해서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끔 만들려고 해도 그렇게 될 수가 없는 것이고, 그걸 부정해서 아예 없는 것처럼 생각하려 해도 그렇게 될 수가 없는 게 마음이라는 거라.

차라리 '그 마음을 받아들이고 나서, 그 마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느낌들, 좋고 싫은 느낌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도록 하라'는 거라. 그것이 오히려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고, 바르게 수행하는 방법이라는 거라.

 

그래서 이걸 불교에서는 뭐라고 그럽니까?

마음은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것들, 나쁜 마음을 일으키는 것들, 좋은 마음을 일으키는 것들, 이렇게 구분들을 한다는 거라.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거는 우리가 어쩌지를 못하는 거라. 그런데 왜 자꾸 사람들은 그걸 콘트롤 하려고 하느냐는 거라. 안 일으키게끔 만들려고 하고, 그거는 콘트롤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닌데.

마음은 반드시 느낌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느낌이 없으면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러면 좋은 느낌이나 싫은 느낌이 일어날 때 그것을 자꾸 알아차리라는 거라. 그래서 좋고 싫은 느낌들을 자꾸 가지지 않게끔 될 때, 그럴 때 우리는 바르게 수행을 해나가게 됩니다.

 

이렇게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그리고 식사를 할 때, 그리고 잠자리에 들 때, 말을 할 때, 몸으로 행할 때, 또 마음으로 일어나는 것들, 이런 여섯 가지는 반드시 알아차리도록 그렇게 노력을 해야 됩니다.

많이 부탁하는 거 아니죠?

적어도 그것만 하면 수행은 자꾸 무르익어 갑니다. 해서 그것은 반드시 여러분들이 지켜나가야 됩니다. 큰 거를 내가 부탁 안 했습니다. 하루 동안 일어나는 게 수만 가지는 되는데, 나는 딱 여섯 가지 밖에만 부탁을 안 했어! 할 수 있겠죠? 자! 그렇게 노력하도록 합시다 이!

 

그리고 여러분들이 여기 와서 부처님 말씀을 배우고 하는 것들은 여러분을 위한 것이지, 이게 사람이 종교를 위한 인간이 돼버리면 안됩니다.

크게 문제가 돼버린다는 거라. 종교는 어떤 경우든지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사람이 종교를 위해서 존재해버리면 안됩니다. 가끔씩 그런 모습들을 봅니다. 그거는 매우 위험한 요소들이기 때문에, 내 자신을 위해서! 내 자신을 위해서 부처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내 자신을 위해서 부처님 말씀을 자꾸 실천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게 부처님이 바라는 거라. 여기 와서 기도하고 절하고 떠받들어주라 해서 부처님을 여기 모셔놓은 것도 아니고, 부처님이 그걸 바라는 것도 아니라는 거라. 오로지 부처님은 그 바른길을 걸어가도록 하기 위해서 법을 설한 것이고, 그것이 도움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이렇게 불상이라도 모셔놔 놓고 그런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고, 그걸 또 이 스님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전달하는 것인데, 이것이 주가 돼버리면 바뀌어버립니다. 종교를 위해서 사람이 존재해버리지 말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어떤 경우든 내 자신을 위해서, 또 다른 이들을 위해서, 살아있는 생명들을 위해서 부처님 말씀을 자꾸 알고 실천하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