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수행기초[초보수행반] 법문

18. 마음의 의지(cetanā)-사리뿟따 존자의 네 가지 서원(쩨따나) (20090920)

담마마-마까 2019. 12. 3. 23:00

 https://youtu.be/fjhYQwKA17c

 * 마음의 의지(cetanā)-사리뿟따 존자의 네 가지 서원 (20090920)

 

··· 거기서 한참 부처님 법에 대해서 얘기를 했거든.

대부분 한국 사찰이라는 게 스님들 법문 많이 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합니다. 안 들을라고 그래. 그러니까 아무리 '이게 부처님 진리다'하고 얘기를 하고, '이게 수행법이다'하고 얘기를 해도 그중에 듣는 사람은 100명 모였으면 겨우 한 다섯 명이나 열 명이나 될까 몰라. 그것도 완전하게 듣는 것도 아니고 어렴풋이라도. 나머지 사람들은 자기들 하고 싶은 거 다해. 그래서 한참 하다가 중단을 하고 물어봤어.

 

“절에 와서 할 수 있는 게 뭡니까?”

여러분들은 절에 와서 할 수 있는 게 뭡니까? 여기는 선원이니까, 선원이든 절이든 똑같은 거니까, 여기 와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어요? 응? (대답)

음! 절하고 수행하고, 또 뭐가 있을까? 그러니까 갖가지 대답들이 나오죠? 대부분 그 의견들을 종합을 해보면 기도라는 게 가장 많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은 단언적으로 얘기합니다. “절에 와서 기도하는 것 말고 할 게 뭐 있습니까?” 그러면은 거기서 물어봤던 걸 다시 여러분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이라는 불교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담마하고는 어떻게 차이가 납니까?

불교하고 담마(Dhamma)하고는 같은 겁니까?

부처님 가르침은 '붓다사사나(Buddhasāsana)'라고 빨리어로 얘기합니다.

부처님의 담마는 '붓다담마(Buddhadhamma)' 그러겠죠.

그 사사나와 담마의 차이가 뭐냐는 거라?

부처님의 가르침은 담마를 가리키는 건 틀림없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같은 뜻인데 어쨌든 다르다 치고, 불교하고 담마의 차이점이 뭐라? 불교를 믿을 것인지, 아니면 담마를 의지해서 나아갈 것인지 분명히 구분은 할 수가 있어야 된다는 거라.

 

적어도 담마를 의지해서 나아가려고 할 것 같으면,

담마의 기본 특성은 세 가지입니다. 배우는 것, 그다음에 그것을 실천수행 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찰해서 내 것이 되도록 완전하게 인식하는 것, 이게 세 가지 기본 조건입니다. 이 속에는 어디에도 절을 한다든지 기도를 한다든지, 아니면 부처님을 존경의 예경을 듣는다든지 이런 건 전혀 없다는 거라.

 

그런데 불교라고 할 거 같으면 어떻게 돼? 불교라고 할 거 같으면 경우가 좀 달라지겠지. 그러니까 그 대부분 사람들이 얘기했던 '기도 말고 뭐 할 게 있느냐' 그 얘기도 일견 맞습니다. 기도하는 것도 그속에 들어가 있고, 부처님에 대해서 존경하고 숭배하는 그런 것들도 있을 거고, 그리고 부처님에 대한 믿음들도 가질 것이고, 이런 것들이 기본 조건이 됩니다.

 

불교뿐 아니라 종교라고 할 것 같으면 이렇게 세 가지 특성·특징이죠. 일단은 믿음을 가져야 되는 거고, 그다음에 그것에 대해서 존경이나 숭배를 해야 되는 거고, 그리고 기도가 있어야 되는 거고. 그게 부처님이 들어주든 누가 들어주든 간에 어쨌든 이게 기본 조건이란 말이라.

 

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부처님에 대한 존경은, 완전한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는 존경이 되겠는가?

그 기도도 내가 존경하고 믿음을 가지는 부분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는 상태에서, 그 기도가 되겠는가?

사실은 기도가 전부라고 하더라도 기본 조건은 거기에 대한 확신들이 있어야 만이 가능한 부분이라.

그럼 그 가능한 확신들은 어디에서 가져오는 거라?

담마에서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거라. 담마의 세 가지 특징! 그것을 내가 배우고, 그걸 실천하는 거고, 그다음에 그것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내 것이 되도록 만드는 것, 이 세 가지 외에는 없다는 거라.

 

이게 전제조건이 안 된 상태에서는 종교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만들어질 수가 없는 상태라. 그런데 이걸 자꾸 사람들이 잊어먹어 버린다는 거라. 무조건 기도만 하면 된다고 생각을 해버리는 거라. 어떤 확신들이나 어떤 종교의 마음이 없더라도 기도만 하면 된다는 거라. 이게 참 잘못된 방향이라는 거라.

적어도 여기에 나오는 분들은 그런 마음들은 안 가지겠지? 그렇지? 스님이 뭐 뚝딱 해줄 거라고는 생각은 안 하지? 절대 그런 생각가지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 스스로 노력해서 여러분들 스스로 체험하고 확신을 가지고 또 그러한 경지에 이르도록 해야 됩니다. 단지, 스님의 입장에서는 앞서가는 선배의 입장에서 잘못되면 잘못됐다고 지적을 해주는 거고, 또 잘됐으면 “잘됐다. 계속해라” 하고 얘기를 해주는 것뿐입니다. 사실은 요즘 그 얘기조차도 못하겠어. 지적을 해주면 고마 자기견해하고 다르다고 삐져버려싸니까 인제는 고것도 못하겠네. 어떨 때는 '하! 이거 참 난감하다' 하는 그런 생각도 들기도 합니다.

 

그건 그렇고, 스님도 출가하고 나서 참 따라가고 싶은 분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게 내 스승님이었죠.

어떤 경우도 스승의 말, 행위 자체에서 결함을 발견하지 못했어요. 물론 아프면 늦게까지 좀 방에서 있다 나오시기도 하고, 수행지도를 안 해주시는 때도 있고, 그렇게는 합니다. 그리하더라도 그분이 살아가는 모습에서 한 번도 이중적인 것들을 본 적이 없습니다. 여기서는 이렇게 하고, 저기서는 저렇게 하고, 이런 것들을 본 적이 없어요.

 

또한 좋았던 것들이 뭐냐면 한 번도, 어떤 경우든지 화를 내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예를 들면 여기 떠들고 있다. 그러면 “조용히 해라”하고 처음 한 말이, 계속적으로 떠들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돼요? 계속 '조용히 해라'하고 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 '조용히 해라'하는 톤이 열 번하면 열 번이 똑같은 거라. 한 번도 바뀌지를 않아. 그러니까 외부적인 대상으로 인해서 당신의 마음이 바뀌어지는 경우는 없다는 거라. 그 영향을 안 받고 있는다는 거라.

 

그래서 굉장히 따라가고 싶은 분인데, 우리 은사 스님 이름이 아짠 통입니다. 아짠 통인데 그 스님이 평소에 가끔씩 했던 얘기가 있습니다.

나는 승려생활 해나가면서 가장 본받고 싶은 스님이 사리불 존자다.”하고 얘기를 해줍니다.

사리불 존자가 어떤 분인지 알아요? (대답)

한국식으로 부처님 십대제자 해가지고 지혜제일 누구, 신통제일 누구, 이게 틀렸다는 건 아닙니다. 빨리어 경전에도 그런 부분이 나오는데 십대제자라는 개념이 사실은 없죠! 54분이라고 하는 그런 개념들은 있는데, 어쨌든 10대 제자라 하든 20대 제자라 하든 뭐 그거는 관계없는데, 어쨌든 지혜제일이라고 칩시다. 그거 말고 어떤 게 지혜인지를 여러분들은 압니까? 그러면서 뭐 지혜제일이라 해?

 

우리 은사 스님이 들려줬던 얘기를 내가 좀 들려드릴께요.

왜 사리뿟다 존자를 그렇게 존경하고 따라갈 스님 표본으로 해서 그렇게 살아가십니까?” 하니까,

누구든지 깨달음을 이루고 나면, 아라한이 되고 나면 똑같아집니다. 동일한 경지에 이르르기 때문에, 물론 지내온 습, 지내온 과정에 대한 차이 때문에 나아가는 방향은 또 달라집니다.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그래서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기도 하고, 그렇지 않고 몇 사람만, 아니면 혼자서 이렇게 지내기도 하고, 그런 차이가 나기는 나는데, 깨달음 이후에는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 개인적으로 봐서도 어떤 허물도 발견을 못하는 거기 때문에. 그걸 문제 삼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전에 과정을 어떻게 겪어왔느냐? 하는 거라.

 

그래서 우리 은사 스님 같은 경우에는 그 모습이 너무 닮고 싶다는 거라. 그 모습이! 그게 뭐냐면 보통 행위를 할려면 뭐가 앞서야 됩니까? 마음이 앞서죠! 그 마음 중에서 특별하게 어떤 게 앞서야 됩니까? 의지·의도라고 하는 쩨따나(cetanā)가 앞서야 된다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앞서서 행위가 일어난다 할 때 그때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통상적으로 쩨따나를 얘기합니다. 마음 전체를 얘기하는 것은 아니고.

어쨌든 그 의지·의도라는 것이 스님 입장에서 너무 마음에 든다는 거라. 그게 뭐냐 하면 과거 전생부터 무수하게 닦아오면서 의지를 가졌던 것! '반드시 이거는 내가 세세생생 내가 완전하게 깨달음을 이루기 전까지는 반드시 이거는 이렇게 할 것이다.' 하면서 마음을 먹었던 게 4가지가 있다고 그렇게 얘기를 하더라고. 나도 그런 건 처음 들었거든. 경전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사리뿟따 존자 뭐 다 뒤져봐도 그런 부분이 없어. 그런데 우리 스님은 과거 스님들로부터 전해오고 이러면서 들은 것들, 그다음에 주석서에 복주석서 이런 것들 참고를 하고 해가지고 대조를 해갖고 얘기들을 해주더라고.

오늘 그 얘기를 해드릴게요.

 

사리뿟따 존자가 어느 때 과거에 왕으로 태어났을 때 부분입니다.

왕으로 태어났는데, 당연히 인도에서는 왕이 되면 왕비를 한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거느립니다. 그중에 특히 한 왕비가 굉장히 욕심도 많고 모든 걸 독점할려고 하는 그런 성향을 가졌어요. 그 왕비가 왕에게 그렇게 얘기합니다. “임금님! 오로지 내 하나만 보십시오.” 나만 바라봐라. 다른 여자 보지마라. 오로지 내하나만 바라보고 있을 거 같으면 나는 당신이 어떤 일 어떤 경우가 되더라도 나는 따라가겠다. 항상 옆에 붙어서 모든 걸 시중들고 모든 걸 다 하겠다. 그러니까 내하나만 바라봐라. 그럴려고 결혼들을 하죠! 그래서 왕이 허락을 합니다. “그래! 그럴꼬마!” 그래서 진짜로 그렇게 합니다. 그 왕도 그 왕비 하나만 끔찍이 위하고 아껴주면서 두 사람이 잘사는데 항상 같이 붙어있을 수는 없잖아.

 

어느 때 나라에 큰 변고가 하나 생겼어요. 도둑떼들이 지방에서 막 창궐을 하니까 도둑떼들을 무찌르기 위해서 왕이 직접 나가야 되는 거라. 그 도둑떼를 무찌르는 데 갈려면 왕비는 위험하고 말렸어요. 그래서 왕비에게 옆에 있어라 그리하니까, 왕비가 그리하면 안 된다 하는 거라.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면 그 도둑떼들을 무찌르기 위해서 가는 지역이 16요자나 떨어진 곳입니다.

16요자나라는 것은 1요자나가 몇 km냐면 보통 17키로 18키로 정도 됩니다. 그래서 16요자나면 한 300km 너머 떨어져 있다고 봐야 되겠죠.

그러니까 16요자나에 1요자나마다 한사람씩 사람을 보내라. 그러니까 왕이 어떻게 됐느냐, 지금 뭘 먹고 있느냐, 뭘 하고 있느냐 하는 것까지 다 보고를 하라고 그럽니다. 그 왕비에게 동의를 합니다. 그래서 1요자나 지나고 나면 한 사람을 보내서 왕비에게 보고를 하고, 그다음에 또 1요자나 지나면 또 한 사람을 보내고, 16요자나까지 갈 동안에 16명을 보내는 경우가 되는 거라. 돌아올 때는 또 어떻게 되겠어요? 마찬가지로 1요자나마다 한 사람씩 보내니까 전체 보낸 사람이 서른두 명이 되게끔 되는 거라.

 

어쨌든 기간은 굉장히 많이 떨어져 있게 되는 거라. 그런데 사람이라는 게 참 간사해가지고 떨어져 있으면 딴짓거리들을 할려고 그런다는 거라. 이 왕비도 아마 마찬가지였던 것 같애요. 그러니까 왕하고 깨가 쏟아질 때도 있다가 떨어져 있으니까 그 적적함을 못 달래가지고 1요자나 마다 보고하러 오는 그 병사하고 인제 눈이 맞았는 거라. 그렇게 지내게 된 거라. 그랬는데 왕이 가장 총애하는 대신이 그 사실을 알게 됩니다. 왕비가 겁이 나니까 이 대신하고도 관계를 가질려고 하는데 이 대신은 그거 싫다고 그럽니다. 어쨌든 왕은 돌아올 때가 됐어. 그러니까 왕비가 꾀를 내어가지고 방에 아픈 것처럼 드러누워 버린 거라.

 

왕이 가서 어떻게 된 거냐고 하니까 왕비가 거짓말을 합니다. 그 대신이 나를 겁탈할려고 했다. 이러면서 역으로 이렇게 하는 거지. 그러니까 왕은 왕비를 끔찍이 사랑하니까 당연히 그 말만 듣고 이 대신을 죽여버릴려고 합니다. 이 대신이 기가 찬 거라. 그래서 왕한테 간청을 합니다. “내 말이라도 좀 듣고 나서 나를 죽이라.”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럼 얘기해봐라” 그러니까 다른 얘기는 절대 안 합니다.

 

“내가 살아오면서 왕에게 내가 오계를 범한 것을 본 적이 있는가?” 한 번도 없다는 거라. 나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는 거라. 그런데 어떻게 왕은 왕비의 말만 듣고 나를 죽일려고 하느냐, 나는 죽는 거는 겁나지 않다. 그렇지만 어떤 것이 진실이고 어떤 것이 거짓인지는 알아야 될 거 아니냐.

그럼 니가 오계를 철저하게 지켰다는 걸 어떻게 증명하느냐?

그러면 왕이 1요자나마다 보냈던 병사들을 불러봐라.

그 병사들을 부르면 당연히 뽀록이 날 거 아니라. 그래서 왕이 화가 나서 이 왕비를 죽일려고 하는데 이 대신이 왕비를 죽이지를 못하게 합니다. 죽이지는 못하고 그 대신에 잘못한 것에 대해서 참회하게끔 합니다. 참회를 하고 나서 왕비의 자격만 박탈하고 내쫓는 형식을 취합니다. 죽인다는 것은 잘못한 것에 대해서 참회할 기회조차도 주지 않는다는 얘기니까.

 

그때 이 왕이 결심을 하게 됩니다. 의도를 내가지고

"나는 결코 앞으로 내가 완전하게 깨달음을 이루기 전까지 세세생생 생을 거듭하더라도 질투하는 것, 그리고 인색한 것, 이런 것들은 하지 않겠다."

인색했을 것 같으면 당연히 죽였을 거라. 질투를 했을 거 같으면 당연히 또 죽였겠지. 그리고 생사람까지도 죽였을 수가 있다는 거라. 그래서 질투하고 인색한 것들은 하지 않겠다 하고 다짐을 합니다. 그러니까 그 생 뿐아니라 다음생 또 다음생을 태어나도 항상 질투하고 인색한 것들을 하지 않게끔 되는 거라.

 

그래서 우리 스승 같은 경우에도 잘 퍼줍니다. 너무너무. 특히 내 같은 경우에 내가 젊었을 때 나갔거든. 스물일곱이었지 아마 그때가. 스물일곱 때 나갔는데 젊을 때 한참 뭐 공부도 해야 되고, 수행도 해야 되고, 그리고 더 신심이 생기면 어떻게 돼? 인도도 들어가 보고 해야 되고, 특히 내가 전공을 하는 게 고대 언어학이니까 아쇼카왕 석문에 대한 것도 연구를 해야 되고 석박사 할려면 어쩔 수 없는 거라. 그럼 뭐 젊은 스님이 뭔 돈이 있어?

그런데 우리 스님은 다 막 주는 거라. 그냥 쓰라고. 그 스님은 한 번도 돈을 만져보질 않아. 그러니까 스님이 가지고 다니는 쪼래기 있죠? 쪼래기 속에다가 항상 넣어가지고 있는 거라. 그걸 만지지를 않는 거라. 그러니까 그 속에 돈이 얼마 있는지도 몰라. 그래서 필요하면 그거 채로 그냥 던져. “필요한 만큼 가져가” 그러면 내가 그 속에서 필요한 만큼 가져오고 이렇게 했거든.

 

그러고 나서 사리뿟다 존자가 두 번째로 쩨따나- 의도로 의지를 냈던 것이 뭐냐 하면 또 똑같은 왕의 입장에 있었는데 되게 술을 좋아했던 사람이었던 모양이라. 어떤 경우든지 항상 어떤 모임을 하고 나면 그 뒤에는 반드시 술을 먹어야 했어요.

여러분들은 그러지는 않겠지? 여기 끝나고 나면 술 먹으러 가지는 않지? 요즘에 미국 같은데 새롭게 불교가 들어간 데는 얼마 전까지도 그렇게 했다고 그럽니다.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모였다고도 그러는데, 법에 대해서는 신랄하게 토론을 하고, 수행을 잘하고 나서는, 탁 끝나고 나면은 그거 싸악 잊어버리고 나와서 모여 갖고 술에 완전히 취해가 찌들은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그게 또 좋아가지고 가는 사람들도 있다고 그러더라고요. 그 패턴이 조금씩 바뀌고는 있는데 어쨌든 그렇대.

 

이 사람(왕)도 마찬가지라. 뭔 일만 있으면 하여튼 술을 그렇게 먹었다고. 술을 먹을 때 반드시 고기 안주가 없으면 안 된답니다. 고기 안주가 있어야 되는 거라. 그런데 인도 같은 경우에는 지금도 마찬가진데 불재일을 하위계층에선 철저하게 지킵니다. 그 불재일 날은 살생을 못하게끔 됩니다. 고기를 못 먹는 게 아니고 죽이지를 못하는 거라. 이 사람은 꾀를 내기를 그날 못 죽이니까 그 앞날에 두 마리를 죽여가지고 한 마리는 그날 먹고 한 마리는 그다음날 불재일 날 먹고, 어쨌든 불재일 날은 안 죽인 거야. 그렇게 했는데 아! 이게 두 마리를 죽여가지고 놔놨는데 한 마리를 누가 가져가 버렸네. 그러니까 그날 불재일 날은 고기가 없는 거라. 술은 잔뜩 취했는데 고기가 없으니까 더 정신을 잃어버리는 거라.

 

그래가지고 뭐가 꾸물꾸물 하니까 고놈을 탁 죽여가지고 하인한테 주면서 이걸 가지고 고기반찬 만들어오라. 하인이 보니까 기가 찬 거야. 그 왕의 아들을 죽여버린 거라. 왕은 술이 취했는데 그걸 모르는 거라. 그런데 이걸 또 요리를 안 해줄 수도 없는 게 안 해주면 어떻게 돼? 하인까지도 죽여버릴 판이니까. 어쩔 수 없이 요리를 해주고 그 하인은 몰래 도망가 버렸겠지. 그거가지고 그 고기를 잘 먹었어. 그 왕비 입장에서는 어떻겠어? 얼마나 밉겠어? 그래도 말을 못하는 거라.

 

만날 자기가 꼭 해야 되는 것들은, 반드시 그걸 할려고 하는 사람들은 자기주장을 안 굽힐려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그 주장에 대해서 반대를 한다든지 뭐 이의 제기를 할 것 같으면 불같이 화를 내버리는 거라. 그게 두려우니까 말도 못하는 거라. 그런데 그 다음날 정신이 깨 가지고 내 새끼 귀엽다고 볼라고 하는 데 애가 없거든. “어찌 된 거냐?” 하니까 “당신이 어제 죽여 갖고 고기를 먹었지 않느냐?” 거기서 이 왕이 확 돌아버립니다. “야! 이 술이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 거로구나.”

 

그래서 부처님도 음주가 다른 계율 전체를 범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다른 계율은 하나를 어겼으면 그 하나만 어기게 되는데, 음주는 그렇지 않다는 거라. 다른 걸 다 같이 범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거라. 그때 이 왕이 약속을 합니다.

"다시는 내가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르기 전까지는 절대 술을 마시지 않겠다."

하고. 여러분도 그걸 잘 기억 하십시요. 네 가지를! 여러분들도 지금 재가인의 입장에서는 그런 결심들, 그런 마음의 의도를 자꾸 내도록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또 한 번은 뭐가 있느냐면 이것도 꼭 마찬가지 왕이었을 때 좀 욕심이 많은 그런 왕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것 남에게 잘 안줄려고 하는 그런, 그리고 프라이버시가 과하기 때문에 누구든지 나에게 인사하고 이러는 스타일을 좋아하는 거라. 왕이 되기 전에 왕자일 때였어요. 그러니까 왕자였을 때도 꼭 마찬가지였어요. 왕자는 왕 다음으로 그 나라에서는 높은 사람이라. 그런데 왕이나 왕자 보다 높은 사람이 누구겠어요?

 

태국에 가면요 스님들한테 공양을 올릴 때 태국 푸미폰 왕 같은 경우에 집권한지 벌써 60년이 넘었거든요. 넘었는데 무릎 꿇고 쫄쫄쫄쫄 무릎 꿇은 채 가가지고 공양물을 올리고 그럽니다. 태국에서는 분명 그 왕을 신적인 존재 부처님 같은 존재로 여기는데, 그러니까 그 국왕보다도 더 높은 분이 이 출가한 스님들이라. 출가한 스님들 중에서 특히 아라한이라든지 아니면 성인의 경지에 이른 분들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거지. 그러니까 사람들 입장에서는 왕자하고 성인, 출가한 스님이 있다. 어느 분을 더 존경하겠어? 당연히 출가한 성인을 갖다가 더 존경하겠지.

 

모든 사람들이 그 성인에게- 빳쩨까 붓다라고 칩시다이. 벽지불이라고 칩시다. 그분에게 막 존경하고 이 왕자는 거들떠도 안 보네. 그러니까 왕자가 거기서 화가 많이 난 거라. 그래서 이 벽지불의 바리때를 뺏어갖고 내동댕이를 쳐버리는 거라. 땅에다! 그러면서 밥 먹지 말아라는 거라. 나보다도 존경을 받고 이러는 것에 대해서 질투가 일어나가지고 도저히 못 견디는 거라. 그래가지고 이 벽지불을 그렇게 돌려보내 버립니다. 그런데 이 왕자가 태어날 때 스님들이 예언을 합니다. "이 왕자는 태어나서 성인이 될 때가 되면 목이 말라 죽어버릴 것이다." 하고 예언합니다. 그래서 이 왕은 그 나라에다 온데다가 우물을 팝니다. 왕자가 어디가든지 목마를 염려는 없게끔.

 

그게 또 뭐냐면 좋은 왕의 조건이 뭐냐면

우물을 많이 만드는 왕, 그다음에 나무를 많이 심는 왕, 그리고 길을 잘 닦는 왕 이 세 가지가 옛날에는 좋은 왕의 조건이었다고 그럽니다.

우물은 목마름을 해결해주고. 지금도 동남아시아에 보면 각 마을 앞에 보면 물동이를 두레박하고 같이 항상 놔놓습니다. 누가 지나가더라도 목마른 사람은 먹으라고.

그리고 나무 많이 심는 것은 더운 지방에서는 쉴 수 있는 공간이니까. 길이 또 안 좋으면 사람들은 짐승들이나 이런 것으로 부터 피해를 입고 또 다니는데 힘이 들기 때문에.

그래서 이 세 가지는 선정을 베푸는 왕의 기본 조건으로써 이렇게 됩니다.

 

어쨌든 우물을 많이 팠으니까 왕은 선정을 베푼 왕이었겠지.

그런데 왕자는 그 불같이 일어나는 화를 삭이지 못해가지고 벽지불의 바리때를 깨고, 이렇게 해도, 그 벽지불은 밥 한끼 안 먹으면 될 거 아니라, 그냥 가버렸어. 자기한테 인사하라고 해도 인사도 안 하고 그냥 가버렸어. 출가한 사문이 인사할 수가 없는 거라. 그냥 가버리는 거라. 잡을라 해도 벽지불을 어떻게 잡을 거라. 그러니까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라. 화가 머리끝까지 나면 당연히 목말라 가지고 터져가지고 죽어버리는 거라. 그렇게 해서 죽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 왕자가 죽은 것을 보고 왕이 너무 애통한 거라, 너무. 자기의 오직 하나뿐인 혈육, 왕자가 죽었거든. 얼마나 사랑했겠어? 그 왕자가 죽은 거를 보고 자기가 너무나 아프니까 그때 결심을 합니다.

"나는 이후부터는 절대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특정인에게만 한정돼가지고 모든 집착, 욕망을 갖다가 쏟아버린다는 거 그러니까 그런 사랑은 절대 안 한 거라. 그런데 결혼을 할려면 어떻게 해야 돼? 뭔가 특정인한테 쏟아부어야 되지. 그래가지고 눈이 약간 가버려야 되지 안 그러면 우리 스님같이 요렇게 살아야 되는 거라.

그래서 사리불존자는 그 이후에 세세생생 태어나면서 항상 독신으로 삽니다. 결혼을 한 적이 없어요. 과거 전생에 자기가 그렇게 의지를 냈던 마음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네 번째, 사리뿟따 존자의 쩨따나가 뭐냐 하면 당연히 사랑하는 사람을 가지게 되면 힘이 듭니다. 힘이 들고 그리고 모든 것들에 대해서 다툼들이 있게 됩니다. 뭐 의견이 같이 맞을 때는 좋은데, 요즘 뭐 의학에서도 그런다고 그러대. 사랑하는 시간은 뭐 얼마 안 된다면서, 하여튼 뭐 그렇다고 그러대. 그 얼마 안 되는 게 지나고 나면 또 어떻게 돼요? 또 싸울 수밖에 없는 거라. 자꾸 다툼이 있고 이렇게 되니까 그 왕이 다시 한번 더 마음을 냅니다.

"집착하지 않겠다. 어느 누구에게도 집착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겠다."

적어도 집착하는 것이 없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고통을 받는 것은 없습니다.

 

이렇게 네 가지를 사리뿟따 존자가 과거생부터 서원을 세워가지고 그렇게 행해왔다고 그럽니다.

그런 인연으로 해서 사리뿟따 존자는 부처님 당시 때 태어나서 살아오는 과정들을 일대기를 쭉 읽어보면 굉장히 순탄합니다. 뭐랄까 큰 굴곡이 없어요. 다른 사람들 하고는 다르게! 뭐 그렇게 뭐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뭐 어떻게 됐다든지, 아니면 뭐 누구 가족을 잃어버린 것으로 인해서 뭐 어떻게 했다든지 이런 것이 거의 없어요. 그게 이 네 가지 서원들의 형태로 인해서 그렇게 됐다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출가한 스님의 입장에서는 그게 본받고 싶었겠어요?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일 거 아니라. 그래서 우리 은사 스님이 이런 네 가지 조건 때문에 나는 내 표본은 사리뿟따 존자로써 삼아가지고 나간다.”하고 얘기를 하시더라고. 그래서 나는 “나는 그거는 모르겠고, 나는 스님을 표본으로 해서 살아갑니다.”하고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수행이 잘돼나갈 때도 있고, 또한 안 돼나갈 때도 있습니다. 잘돼나갈 때는 수행력으로 인해서 어느 정도 확신들을 가지게 되고, 또 그것이 자기 것이 되고 하기 때문에 이루어나가는 것이 큰 무리가 없게 됩니다.

그런데 수행이 안 될 때, 안될 때 어떻게 할 거냐? 그럼 안 될 때 안 되다가 이생 그냥 종 치고 말아버릴 거냐는 거라.

적어도 마음속에서 이런 서원들을 가지게 되면 안 되는 것도 오히려 타파해나가는 데 도움을 주게 되는 거고, 설혹 이생에서 안 됐다고 하더라도 다음 생에서는 그 힘을 받아가지고 또 나아갈 것이다는 거라.

 

완전하게 깨달음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가지는 사리뿟따 존자의 네 가지 의도입니다. 의지! 여러분들은 어떤 의지를 가질 거라?

아까 담마를 따를려고 할 거 같으면 세 가지가 기본적으로 갖춰져야 된다고 그랬습니다. 배우는 것, 그다음에 실천하는 것 수행하는 것, 그다음에 그것에 의한 통찰로 인해가지고 확신을 가지고 자기 것이 되는 것, 세 가지라고 그랬습니다.

 

무조건 내가 어떤 것을 기대가지고 그것으로 인해서 뭔가를 받을려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의도라는 것은 내 스스로 확립하는 것들이라는 거라. 내 스스로 그렇게 마음을 먹고, 그렇게 자꾸 실천하고 따라갈려고 해야 된다는 거라. 왜? 그것은 바른 것이기 때문에, 또 수행에 도움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걸 따라가는 거라. 따라가다 보면 집착하지도 않게 되는 거고, 또 특별하게 뭐 사랑하는 사람을 가진다든지, 아니면 특별하게 내가 술을 먹는다든지, 이런 것들도 안 하게 되는 거고.

 

그래서 이 의도라는 것들도 수행자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부분입니다.

얼마만큼 좋은 의도를 가지느냐에 따라서 좋은 행위들이 일어나고 좋은 결과들이 일어나게 된다는 거라. 수행은 그런 선한 행위들로 인해서 선한 결과들을 낳게 되는 것들이라는 거라. 수행에서 일으키는 마음은 선한 행위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선한 행위들이 계속적으로 일어나게끔 만드느냐는 거라. 그것이 수행이든, 아니면 남에게 베푸는 것이든, 아니면 계를 지키는 것이든, 이것들은 다 선한 행위들이라는 거라. 선한 의도로 인해서.

그런 의도가 앞서야 만이 선한 행위들이 있게 된다는 거라. 이해하겠습니까?

 

사리뿟따 존자 같은 경우는 그런 네 가지 결의로 인해서 한 번도 세세생생 살아오면서 적이 없었다고 그럽니다. 내 주변에 나를 배척하고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그런 적(敵), 적을 만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열 명의 나의 편을 만드는 것보다 한 명의 적을 만들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소중하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를 합니다.

 

수행도 의도로 인해서 행위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 의도가 앞선다는 것을 수행에서 빨리 발견해야 되듯이, 이생에 살아가면서도 그런 의도들, 좋은 의도들을 어떻게 확립하고 어떻게 그것을 실천해나갈 것이냐 하는 것들도 여러분들이 생각해 봐야 될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늘은 수행에 관한 것보다도 사리뿟따 존자의 네 가지 쩨따나(cetanā) 부분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