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라나눗사띠(maraṇānussati)_죽음에 대한 관찰 (20090908)
짜뚜라 락카 바와나(Caturārakkha bhāvanā) 부분에 대한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언젠가 스님이 그 얘기 한 번 했죠? 죽음에 대한 얘기!
아마 두 번에 걸쳐서 했지 싶은데, 죽음에 대한 얘기들입니다.
'짜뚜라 락카 바와나'라는 건 뭐냐면 수행자가 수행을 해나가는데 장애를 없애주고 또 수행자를 보호해 주는 법이라는, 그런 수행 방법이라는 뜻입니다. 보통 우리는 예비수행단계 네 단계 해가지고 나와 있는 거 있죠? 그걸 얘기하는 겁니다.
많이 알려지기는 붓다눗사띠(Buddhānussati)라 해서 부처님 명호를 외우면서 하는 방법들, 그다음에 또 많이 알려진 게 멧따 바와나(mettā bhāvanā)라 해가지고 자애수행 하는 것들, 그다음에 또 많이 알려진 게 아수바 바와나(asubha bhāvanā)라 해서 '죽고 나서 몸이 썩어가고 변해가는 것들을 관찰'하는 방법, 이런 것들을 많이 합니다. 그다음에 오늘 설명할 것은 마라나눗사띠(maraṇānussati)라고 하는 '죽음에 대한 관찰' 부분입니다.
이 네 가지를 '수행자를 보호하는 법이다' 하고 얘기를 하는데,
보통 탐욕-욕망이 많은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는 보통 아수바 바와나를 시킵니다.
그다음에 성내는 것들이 좀 많은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는 멧따 바와나를 많이 하라 그러고.
그다음에 믿음이 부족한 분들, 그리고 의심이 많은 분들은 붓다눗사띠를 많이 하라 그럽니다.
오늘 할 죽음에 대한 관찰은 언제 많이 하느냐면, 수행하는데 힘이 많이 떨어졌을 때, 게으른 생각이 많이 일어났을 때, 내가 이 수행해야 되는가, 안 해야 되는가? 조차도 구분도 못하고 좀 흐리멍텅하게 살게 될 때, 이럴 때 많이 하는 방법들입니다.
죽음에 대한 것들을 왜 그러면 부처님이 수행을 하라고 했을까?
하고 많은 것들 중에 우리가 가장 건들기 꺼림칙하고 또 되도록이면 피할려고 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왜 하필 그 죽음에 대한 것들을 수행하라 했을까? 수행자를 보호하는 네 가지 법 중에 두 가지가 죽음에 관계된 겁니다. '죽음에 대한 것'들이 하나가 있고, '죽은 후에 변해가는 모습에 대한 것'이 하나가 있고 이런 건데, 그 반을 차지하고 있단 말이라. 왜 그러면 부처님은 이걸 말씀을 했을까?
보통 살아가는 데서 빠지는 위험성들이 뭐냐면 자기중심적인 것에 많이 빠집니다. 내 위주로, 그리고 항상 내가 중심에 서 가지고 모든 것들을 생각하고 행동하고 이렇게들 해갑니다. 그게 하나가 있고, 또 하나는 뭐냐면 욕심에 의해서 살아가지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욕심 안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 있나요? 거의 없죠! 그리고 뭘 생각할 때 내 중심, 내 가족 중심으로 해가지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 있어요? 보통 잘 없다는 거라.
이런 것들로 인해가지고 사회에서 살아가는데 조화롭지 못하게 되고, 또 그런 것들이 고착화되다 보면 내 생각 또 내 이익 위주로 이렇게 하다보면 그런 사고를, 생각을 변화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자꾸 충돌이 있게 되고 이런 거기 때문에, 그래서 이 죽음에 대한 것들을 생각하는 것들은, 죽은 사람이 생각할 수는 없는 거 아니라. 그리고 여러분이 다음 세상에 가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거고, 그러니까 살아있는 사람들이 해야 되는 것들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니까 살아갈 때 어떻게 하면 이런 자기중심적인 것들과 자기 욕심대로 살아가지고 하는 이런 것들을 조화롭게 맞춰가느냐 하는 것들을 가르치는 게 이 '마라나눗사띠'이다 라고 보면 됩니다.
어쨌든 살아있는 것은 불확실합니다.
언제든지 죽을 수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병들 수 있고, 그리고 항상 늙어가고 있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은 불확실합니다. 돈 많이 벌었다 싶어도 금방 잃어버리는 거고, 그런데 꼭 하나 확실한 것은 죽음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확실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청정도론 같은 경우에 마라나눗사띠의 부분에 대한 것들을 잘 설명을 해놓고 있습니다.
마라나눗사띠를 하면 얻어지는 이익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뭐냐면 사띠(sati)가 조금 더 계발되어 집니다. 알아차리는 것들이. 어쨌든 내가 지금 당장 죽는다고 생각하면 안 죽기 위해서 발버둥을 칠 거 아니라. 대부분 사람들은 그렇다고. 그럼 그 발버둥을 치다 보면, 쉽게 말해 물에 빠졌으면 안 죽기 위해서 뭐라도 빨리 알아차려가지고 지푸라기라도 잡을라고 하는 것처럼, 그러니까 마라나눗사띠를 하면 이처럼 알아차림은 점점 더 강화될 수밖에 없다 하는 거라.
그다음에 '상웨가(saṃvega)'라 해서 '긴박감'들, 내가 언제 죽을지 몰라서 빨리 뭔가를 해야 되겠다. 수행을 해야 되겠다. 아니면 돈을 이마만큼 많이 벌어야 되겠다. 이런 긴박감을 가질 수가 있다는 거라.
그다음에 하나 중요한 게 뭐냐면 '냐나(ñana)'라 해서 '이해력', 아! 삶은 이런 것이고 죽음은 이런 것이다. 그런 이해를 갖다가 더욱더 깊이 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이 마라나눗사띠를 실천하는 것은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굉장한 이익이 있다 라고 얘기합니다.
경전에는 뭐라고 돼있느냐면
[죽음의 수행에 전심전력하는 제자들은 언제 어디에서라도 주의 깊고, 살아가는데 욕구에 빠져서 즐거움을 얻을려고만 하지는 않는다. 또 다음 세상을 갈망하는 것도 없어지고, 나쁜 행위들을 피해버려서 일상생활에 여러 가지 일어나는 일들로부터의 집착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더불어 어느 때라도 존재하는 것은 변해간다는 무상을 알아차릴 수가 있어, 존재의 본질인 허무함과, '나' '나의 영혼'이라는 실체가 없는 것, 이런 것들을 확실히 의식해서 유지시켜 나가준다.
그래서 비록 이 세상에서 열반에 이를 수가 없다고 하더라도 죽음 이후에는 행복한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 하고 청정도론에서 얘기를 합니다.
죽음을 의식한다는 것은 지금 살아갈 때 마음을 조금 더 맑고 깨끗하게 유지시켜 주는 역할들을 할 뿐 아니라, 막상 죽음에 이르게 됐을 때 죽음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공포, 두려움으로부터 보호를 해준다는 거라.
그런 공포나 두려움이 일어나서 나쁜 세상에 태어나는 것들로부터 보호를 해준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죽음에 이르게 됐을 때도 강하게 내가 확신을 가지고 '아! 나는 절대 죽고 나서 다음 세상에 나쁜 몸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인해서 행복한 마음을 자꾸 가지게끔 됩니다. 그런 큰 이익들이 있게 되고,
또 더불어서 지금 당장 내게 죽음이 와도 '나는 그래도 잘 살았다'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죽을 준비를 항상 하고 있다' 하는 얘기와 마찬가집니다.
이게 죽음에 대한 건데, 그래서 부처님은 열 가지 숙고해야 되는 것 중에 반드시 넣어놓은 것이 이 죽음에 대한 관찰 부분입니다.
그럼 불교에서는 죽음을 어떻게 인식했나 하는 것들을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업(業), 업으로써의 죽음을 부처님이 얘기를 했습니다.
생(生)과 사(死)라고 하는 것은 외부의 절대자에 인해서 좌지우지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지은 행위로 인해서 다음 몸을 받게 돼있고, 또 지은 행위에 인해서 지금 현세에서 받는다는 것이, 업(業)이라고 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나무가 성장해서 시들었다고 하는 것은, 그 원인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이지, 누가 뭐 뚝딱 '너 시들어라' 해가지고 시드는 법은 없다는 겁니다.
업의 법칙으로 인해서 항상 생과 사라고 하는 죽음이 있고 또 다른 삶이 있다는 것들을 얘기하는 것이고, 그게 '죽음을 보는 업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죽음을 볼 땐 항상 업의 법칙으로 이해를 해야 되는 것이지, 외부적인 대상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봐선 안 된다 하는 게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가 뭐냐면 상카라(saṅkhāra), 상카라의 법칙입니다.
'상(saṅ)'은 '서로서로'라는 뜻입니다. 그 경전 중에 있는 '상윳따' 라고 하는 경인데 '서로 대응한다.'라는 뜻이고, 상카라도 마찬가지 그 '상'입니다. '상'이 '서로'라는 것이고, 그리고 '정리해 놨다.' '두 개의 댓구되는 걸 이렇게 하나로 묶어가지고 정리해 놨다'하는 그런 뜻으로 쓰여집니다. 그다음에 '카'할 때 '카라' '구성되어 있다' '조립되어 있다.' 그래서 상카라는 '서로서로 끼워 맞춰져 있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온을 뭐라고 그럽니까? '빤짜 상카라'라 그러죠! 색수상행식이라고 하는 것. 그러니까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서로 조합되어 있는 것이지, 서로 서로 묶여져가 있는 것이지 그것이 한 덩어리가 아니고, 또 그것이 묶여져 있는 것들도 서로 관계에 인해가지고 묶여져 있는 것이지, 요거 하나만 독립적으로 되어있는 경우는 있을 수가 없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걸 '상카라의 법칙'이라고 하는 겁니다.
변화돼 나가는 것들, 어떤 경우든 서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변화되어 나가게 돼있다는 겁니다. 하나가 수가 틀리면 그것도 변하게 되는 것이고, 또 하나가 수가 틀리면 또 변하게 되는 거고, 이렇게 변화되는 연속의 흐름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 몸도 변하는 거고 마음도 변하는 거고.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게 상카라의 성질이다 하는 거라. 당연히 그러니까 이 몸도 변하니까 변화돼서 없어지기도 하고, 없어졌다가 또 변화돼서 새로운 몸으로 받기도 한다는 거라. 그게 상카라의 법칙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보통 우리 신체는 일어났으면 유지돼나가고 나서 죽음을 맞게 돼있다는 거라. 이 법칙을 '상카라의 법칙이다' 그럽니다. 계속되어나가서 변화되는 그런 요소들이 요렇게 요렇게 모였다가 흩어지고, 또 모이고 흩어지고 모이고 하는 그런 관계에 있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항상 이런 관계에 있다 라고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죽음에 대한 것들의
마지막 순간에 일어나는 게 '마라나산냐 자와나(Maranāsanna-javana)'라고 그럽니다. 그걸 '임종 때 일어나는 속행심'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 임종 때 일어나는 속행심이 조건에 의해서 없어지고 나면, 그러니까 똑같습니다. 일어나고 유지되고 그다음 소멸된다는 것은, 그 소멸이 딱 되고 나면 그다음에 일어나는 게 뭡니까?
죽음의 마음-쭈띠 찟따(cuti citta)라는 사심(死心)이라는 것, 죽음의 마음, '아! 인제 죽는다' 하는 마지막 죽음의 마음이 일어나서, 그러고 나서 다시 새로운 재생연결식으로 연결된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 법칙을 벗어날 수가 없다는 거라. 어떤 것이든 일어나고 유지되고 사라지고 나면 또 다른 것이 일어나고 유지되고 사라지고, 또 그다음에 또 일어나고 사라지고 그 관계들을 계속해서 이렇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관계에 있다, 그런 변화되는 연속상에 있다 하는 것이 부처님이 얘기하는 '상카라의 법칙'입니다.
그런데 어쨌든 우리가 죽음에 이를 때 쭈띠 찟따(cuti citta)라는 사심, 죽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어떤 것들이 보통 있습니까?
죽을 때 어떤 현상들이 일어납니까? 저번에 한번 스님이 얘길 했죠?
그 표상들이 나타나고, 업으로 인해서 내가 지은 행위로 인해서 다음 생이라는 것이 있게 된다고 하는 것들.
그러면 마지막 사심 때 업이라고 하는 것들이 일어나집니다.
그다음에 그것으로 인해서 상징이 나타난다. 그런 상징성이 또 나타나지고,
또 그다음에 정치상이라 해가지고 그 다음생에 태어날 어떤 현상들이 보이거나 장소가 보인다든지 이렇게 해서 그 정치상이 나타나고,
이런 현상들이 있고 이걸 통틀어서 사심(死心)이라고 합니다. 죽음의 순간에 반드시 이런 것들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는 다음생이 있게 된다는 겁니다.
업이 나타날 거 같으면 업으로 인해서 내가 못된 짓 했으면 다음 생은, 재생연결식은 못된 것으로 인해가지고 나쁜 악처에 태어날 것이고, 좋은 행위지었으면 그런 업으로 인해서 좋은 결과를 받게 되는 그런 것이고.
또 상징이 나타남, 그러니까 마지막 죽음의 마음에 그런 어떤 상징들이 나타난단 말이라. 뭐 친척이 보인다든지 하면 아! 그럴 거 같으면 그런 현상들은 다음 생에 인간으로 태어날 징조라든지 이렇게 해서 인간으로 또 태어나게 되는 거고, 이런 여러 가지 징조들이 있단 말이라.
그다음 정치상이라 해가지고 거기서 일어나는 다음 세상이 보여지는 현상들. 그래서 아! 내가 어떤 행복한 어떤 세계에 있는 듯이 보이고, 안 그러면 아주 어두컴컴한 터널을 지나는 거라든지 이런 것들이 나타난다는 말이라. 그런 것들로 인해서 다음 생이 결정되어지고.
이런 것들이 사심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어쨌든 그 사심으로 인해서 재생연결식으로 연결이 됩니다.
죽음의 순간에는 반드시 마지막 임종 때의 속행심이 일어나지고, 그다음에 사심이 일어나지고, 재생연결식으로 연결됩니다.
그것도 마찬가지로 일어나고 유지되고 사라지는 것이 다음 일어나고 유지되고 사라지는 것으로 계속되는 것이지 어떤 특정한 개체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게 '상카라의 법칙'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죽음은 또한 반드시 상카라로 이해해야 된다'하고 부처님이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죽음은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연기의 법칙'
12연기를 여러분들 보통 어떻게 얘기합니까? 과거생 현재생 미래생 이렇게 얘기하기도 하죠! 또 현재 전체를 통틀어서 연기로서 이해하기도 합니다. 설명하는 방법에 의해서도 달라지는데,
연기라고 하는 것 중에 '바와(bhava)-유(有)'라고 하는 '생존', '생존의 법칙'으로써 얘기합니다.
마지막 죽음의 의식으로 인해서 다음 결생심-재생연결식이 일어나는 것을 빠띠산디 윈냐나(paṭisandhi viññān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재생연결식이 일어난다는 사실.
예를 들어보면 내가 집착함으로 인해가지고, 내가 이걸 가지고 싶다는 마음으로 인해서 어떻게 돼요? 내가 손을 뻗어가지고 이걸 가지는 것이 생겨난다는 거라. 그러니까 집착하는 것으로 인해가지고 이걸 내가 가지게 된다는 거라.
유(有)는 집착으로 인해서 일어난다는 거라. 그런 거와 마찬가지라.
그런 유는 또 유가 있음으로 인해가지고, 내가 존재하는 것으로 인해가지고 또한 죽음이 있게 된다는 거라. 이런 법칙으로써 이해를 한다는 거라.
집착으로 인해서 내가 태어났고, 태어난 것으로 인해서 죽음이 있게 된다 하는 거라. 태어났으면 반드시 죽어야 된다는 거라. 이렇게 이 법칙으로 살아간다는 거라. 보통 그러니까 '유(有)의 법칙'이기 때문에 살아있다 하는 것은 대부분 사람들은 집착하면서 산다는 얘기와 마찬가집니다.
그럼 집착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죽겠지!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집착을 할 거 같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안 죽겠어요? 안 죽을 수는 없죠! 어차피 죽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죽는 순간에 오히려 집착을 놔버리면 더 나은 재생이 될 수가 있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게 '바와의 법칙'이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렇게 죽음을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래도 여러분들에게 죽음은 아직 피부에 안 와 닿습니다. 여러분들만 그런 게 아니고 보통 다른 사람들이 다 그렇습니다. 난 안 죽을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천신 중에 '박가'라고 하는 천신이 있었는데, 과거에 공덕을 좀 많이 쌓고 그랬던 모양이라. 그래서 수명이 한량없는 거라. 다른 천신들은 다 죽음을 맞이하는데, 쉽게 얘기하면 나는 맨날 젊어있다는 거라. 그러니까 절대 나는 안 죽는다는 생각을 가지는 거라. 한량이 없어서 그랬겠지.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계속 행복해 있다고 할 거 같으면 불행이 있다는 걸 생각을 못하는 거와 마찬가지라. 그런데 불행이 없는 거는 아니죠? 언제든 행복이 끝나는 때가 있다는 거라.
그 천신도 마찬가지로 한량없이 수명이 있는 거 같지만, 어쨌든 죽음은 있게 된다는 거라. 윤회의 법칙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그런데 그 사실을 모르는 거라.
부처님이 가서 얘기를 합니다. "너도 죽는다. 그런 소리 하지 말아라. 왜 너는 안 죽는다고 생각하냐?" 그래도 이해를 못하는 거라.
부처님이 그리해도 이해를 못하는데, 여러분들에게 "여러분들은 죽습니다" 얘기한다고 해가지고 이해하겠어요? 이해를 못하는 건 당연한 거라. 그렇지만 어쨌든 나도 죽는다는 거라. 그 사실은 틀림없다는 거라. 항상 그 부분에 대한 것들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된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그걸 하나의 법칙으로써, 수행방법으로써 만들어 놓게 됩니다.
죽음을 관찰하는데,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죽음을 관찰할 것이냐?
여러분 늙습니까, 안 늙습니까? 늙죠! 그 늙음을 피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병이 듭니까, 안 듭니까? 병이 든다는 거라! 그것도 피할 수 없다는 거라. 죽는 것도 마찬가지로 죽음도 피할 수가 없다. 모든 것들과 헤어지게 돼있다는 것도 피할 수가 없는 일이라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첫 번째 공식으로 제시해 놓은 게 뭐냐면,
'살아있는 자들은 누구든지 늙고 병들고 죽게 돼있다'는 거라.
그래서 살아있는 것은 불확실한 것이다. 죽음만이 확실한 것이다 하는 사실을 자꾸 염두에 두라는 거라. 맨 첫 번째. 늙고 병들고 자꾸 변해가기 때문에 불확실하다는 거라. 항상 살아있는 것은 불확실한 것이다.
내가 지금 만약에 그 생각을 안 할 것 같으면 내가 화가 일어났다 할 거 같으면 화가 항상 일어날 것으로 생각을 한다는 거라. 그래서 거기에 따라서 대처를 한다는 거라. 내가 잘살고 있으면 항상 잘살 것처럼 생각을 해서 다른 사람을 대한다는 거라.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거라.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그게 재산이든 아니면 화를 일으키는 것이든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불확실하다고 불안정한 것이다 라고 자꾸 염두에 두라는 거라. 그래서 그 끝은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라는 거라. 그게 뭐냐면 '생은 불확실하고 죽음만이 확실하다'는 이 사실을 반드시 처음에 염두에 두라는 거라.
그다음에는 그리해도 사람들은 가슴에 안 와닿는다는 거라.
두 번째가 뭐냐면 '나도 죽는다' 나도 죽는다고 생각을 해야 된다는 거라.
다른 사람들도 죽는데 나는 안 죽는 것처럼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나도 죽는다고 생각을 해야 된다는 거라. 나도 죽는다는 의미는 큰 의미를 가집니다.
다른 것들과 평등하게 대해야 된다는 얘기와 마찬가집니다. 고관대작들이 죽고 나서 썩는 것은 그냥 천민이 썩는 것과 다르냐는 거라. 그건 아니라는 거라. 나도 죽는다는 것은 내가 지금 현재 어떠한 상황에 있든지 간에 똑같은 상황이 된다는 얘기라.
그러면 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명심할 거 같으면 다른 어느 누구, 어떤 대상과 만나도 평등심을 가지고 평등하게 대하려는 마음을 자꾸 가져야 된다는 거라. 그것이 어린아이이든, 아니면 나이든 어른이든, 아니면 내가 기르고 있는 동물이든, 어떤 대상이든 평등한 마음을 자꾸 가져야 된다는 거라. 그게 뭐냐면 '나도 죽는다'는 거라. 나는 죽는다는 거라. 그 사실을 명심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다음 세 번째, 명심을 해야 되는 것이 뭐냐면 그것을 피할 방법은 없다는 거라.
'죽음을 피할 방법은 없다'하는 거라. 그거 피할 수 있습니까? 어디에 가더라도 그걸 피해가지고 달아난다 하더라도 그걸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거라. 아무리 내가 노력을 해도 안 되는 거라. 안 되는 건 어떻게 해야 돼요? 여러분들은. 하다하다 안되면 포기합니다.
포기하라는 거라. 집착하고 하는 그런 것들을 포기하는 거고, 내가 내 자신에 대한 견해를 가지는 그런 것들도 포기하라는 거라. 포기를 해야 만이 '나'라고 하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끔 되는 거고, 포기를 해야 만이 집착하고 하는 것들이 떨어져 나가버리게 된다는 거라. 포기를 하라는 거라.
그게 인제 세 번째입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항상 자꾸 염두에 두도록 하라.
그리해야 만이 살아있을 때 바르게 살아가지고, 죽음을 맞았을 때도 공포로부터 해방이 되는 것이고, 또 살아갈 때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갈 수가 있게 된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이고, 또 수행하는 자들에게는 그런 경각심을 일으켜서 자꾸 사띠와 긴박함과 그리고 그런 지혜들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자꾸 이 마라나눗사띠를 하라 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마만큼 이 마라나눗사띠는 중요합니다.
경전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것들이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대부분 보면 부처님이 마라나눗사띠를 얘기했을 때 알아듣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어요. 다른 거를 얘기할 때는 금방 사람들이 알아듣는데, 마라나눗사띠를 얘기해가지고 단박에 수다원에 이르렀다는 경전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시일이 걸립니다.
그 직조공의 딸에게 이 얘기를 했습니다. 물론 그 직조공의 딸에게만 얘기한 게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이 죽음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지금 스님이 얘기하듯이 이런 방법으로 얘기합니다. 그런데도 그 죽음에 대한 수행을 하지를 않는 거라. 살아가는 것이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그런데 꼭 하나 그 직조공의 딸만 그 마라나눗사띠를 합니다. 그래서 아까 얘기한 방법으로, 그 세 가지 방법을 자꾸 되뇌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보니까 이 직조공의 딸은 어떤 현상까지 일어나느냐면 여러분도 마라나눗사띠를 해보면 그런 경험들을 할 겁니다.
내가 지금 딱 죽을 때 마지막 임종의 순간에 일어나는 의식을 알아차립니다. 살아있는데도. 아! 이것으로 인해서 다음 의식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그런 상태까지 아주 예민하게 갔습니다. 그 기간이 얼마나 걸렸나면 삼 년이 걸렸어요. 삼 년. 다른 사람들은 그 많은 대중들은 아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고. 그래서 부처님이 그 얘기를 듣고 '아! 인제 저 놈이 도의 경지에 이르를 때가 됐다' 하고 판단을 하고 삼 년 뒤에 찾아갑니다.
마라나눗사띠를 하면 어디까지 이르를 수 있다고 보십니까? 어디까지 이를 수 있다고 봐요? 항상 경각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선정 삼매도 깊은 삼매에 들을 수가 없습니다. 초선정 이상 나아가지를 못합니다. 사띠의 입장에서 볼 것 같으면 이마만큼 좋은 게 없어. 위빳사나 할 때 사띠는 어떻게 해야 돼요? 찰나 삼매만 있으면 됩니다. 찰나 간에 자꾸 알아차리는 거라. 그 이상 계발을 못 시켜, 마라나눗사띠는.
아까 얘기한 네 가지 수행법들 중에 두 가지는 사선정까지 가지거든. 깊은 삼매까지 들어가지는데 이 마라나눗사띠 그리고 아수바바와나라고 하는 것, 죽음에 대한 것들은 절대 찰나삼매 이상 계발이 안 되는 거거든. 왜? 긴박감을 가져오고 있고 항상 깨어있어야 되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런 수행자들은 금방 법에 대해서 설명을 하면 금방 위빳사나 수행으로 바로 그냥 들어가지게 되는 거라. 이 소녀가 똑 그와 같은 상황이었던 거라.
부처님이 가서 여러 가지를 얘기를 합니다.
예를 들어볼게요. 내가 한마디만 얘기를 합니다. 부처님이 그 소녀에게만 얘기를 합니다. “그래. 그동안 잘 살았느냐?” 이렇게 얘기할 것 같으면 소녀의 입장에서는 그걸 어떻게 듣겠어요? 마라나눗사띠를 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게 되는 거라. 항상 찰나삼매가 계발이 돼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 소리를 의미로써 파악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거라.
금방 무상하고 너무나 빨리 변해가지고 불만족스럽고 그리고 그 속에서 어떤 실체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금방 부처님 말씀에서 알아차리는 거라. 다른 사람 말에서는 못 알아차렸던 이유가 뭐냐면 부처님이란 존재 때문에, 부처님이라는 존재 자체가 가지는 위엄들, 그리고 거기서 일어나는 환희심 이게 더해지기 때문에 금방 그런 사실을 갖다가 빨리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니까 소녀는 부처님이 말을 몇마디 하기도 전에 이미 수다원에 탁 이르게 됩니다.
그게 뭐냐면 이 마라나눗사띠의 이익이라는 겁니다.
항상 위빳사나로 계~속 연결해 왔다는 거라. 그러니까 때가 딱 이르니까 금방 수다원에 이르는 거라. 그게 이 마라나눗사띠의 이익입니다.
다른 수행법들, 만약에 자애수행을 한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는 본삼매까지도 들어가집니다. 깊은 삼매, 사선정까지도 이르게 됩니다.
그러면 위빳사나로 전환을 할려면 어떤 경우에는 애를 먹습니다. 그걸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안 생기기 때문에! 왜? 자꾸 대상에 함몰되어버리게 되니까! 그런데 이 마라나눗사띠는 그렇지가 않다는 거라. 항상 위빳사나의 전초단계로써 항상 유지가 돼있는 상태라는 거라.
그래서 항상 죽음에 대해서 내가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 곧 죽는다, 이 호흡 한순간에 죽는다는 사실을 자꾸 숙고하게 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실제로 수행에서 그런 '상웨가' 그리고 '냐나' '사띠'가 자꾸 계발이 되도록 만들어야 만이 수행에 이익이 있다. 그래서 이걸 갖다가 그런 마음을 계속 유지시켜 주기 때문에 부처님이 이걸 '짜뚜라 락카 바와나' 수행자들의 번뇌, 욕망, 이런 장애들이 없도록 장애로부터 보호해준다. 장애가 없도록, 장애를 없애도록 만들어주는 법이다 하고 그걸 마라나눗사띠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그렇게 자꾸 죽음에 대해서 숙고를 하도록 해서 여러 가지 이익들을 자꾸 얻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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