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뿌툿자나(puthujjana)와 수다원(sotāpanna) (20090823)
가끔 이런 질문들을 받습니다.
스님들이 돌아가시고 나면 어디로 가느냐 하는 부분입니다. 보통 한국이든 아니면 다른 나라에서든 큰스님들, 깨달음을 이뤘다는 그런 분들을 얘기합니다. 그분들은 만약에 다시 원해가지고 인간의 몸을 받아가지고 다시 태어나가지고 다시 중생구제를 하고 싶다 그랬을 때 과연 그게 가능한가?
대부분 한국의 큰스님들이 돌아가시면 살아있는 스님들이 뭐라는지 아십니까? 인제 화장을 할 때 “스님! 불 들어갑니다.” 하면서 화장을 합니다. 화장을 하고 나서 대부분 하는 얘기들이 “하루빨리 이 세상에 다시 돌아오십시오” 하고 이렇게 발원들을 하거든요. 또 간혹 그런 스님들도 있습니다. “내가 다음에 이 세상에 태어나면 어디 태어나고 싶다.” 하고 얘기를 하는 스님들도 있습니다. 소위 한국의 선지식 중에 그래도 대중들에게는 깨달음을 이뤘다 하고 하는 그런 스님들이 그런 얘기들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그게 가능하겠어요?
내가 깨달음을 이뤘는데 이 세상에 다시 삶을 받아 태어나가지고 중생구제를 하고 싶다, 그러면 그게 가능할까? 가능하지 않겠죠! 지 맘대로 왔다 갔다 할 수 있을 것 같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그렇게는 안 됩니다. 그게 좀 더 나아가면 티벳불교 같은 그런 형태들을 띠게 됩니다. 윤회하면서 계속 같은 형태, 라마면 라마, 린포체면 린포체, 그다음에 이렇게 윤회하는 형태들을 띠기도 하고 그러는데,
이게 불교에서 깨달음의 단계에 대한 것들과, 일반 뿌툿자나(puthujjana) 그러니까 일반불자들이라는 개념조차도 이해를 못하는데서 오는 어떻게 보면 몰상식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견해들은 가지지 마라 하는 뜻에서 이걸 가지고 에둘러서 좀 얘기를 해볼게요.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철저하게 빨리 경전에 근거해서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서 얘기하는 다른 경전들 하고는 분명하게 다릅니다.
빨리어 경전에는 성인의 경지를 네 부류로써 분류를 해놔 놨습니다.
수다원(須陀洹), 사다함(斯多含), 아나함(阿那含), 그다음에 아라한(阿羅漢) 이렇게 얘기합니다. 소따빤노(Sotāpanno), 사까다가미(Sakadāgāmī), 아나가미(Anāgāmī), 아라한따(Arahanta) 요렇게 분류를 한단 말이라.
이렇게 네 부류가 있고, '그 부류를 향해서 나아가는 자'라 해가지고 그 '나아가는 자'도 포함이 됩니다. 여기서 여기 꼭대기가 하나 있단 말이라. 꼭대기는 네 개가 요렇게 있는데, 그 꼭대기를 향해서 요렇게 나아가는 자, 그래가지고 첫 번째 꼭대기에 도달을 했고, 그다음에 두 번째 꼭대기를 향해서 나아가는 자, 그러면 두 번째 꼭대기에 도달을 했고, 나아가는 자까지를 한 부류씩으로 치면 여덟 부류가 되겠죠! 이렇게 여덟 부류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여덟 부류는 엄밀하게 치면 '나아가는 자'와 '과위에 이른 자' 이걸 한 쌍으로 놓게 됩니다. 그렇게 되니까 어떻게 돼요? 네 쌍이 되는 거죠! 네 쌍인데 여덟 부류의 성인이다 해서 사쌍팔배(四雙八輩) 이렇게 한자를 써서 얘기들을 하는 겁니다.
그러한데 오늘 이 자리에서 얘기하는 부분은 뭐냐면 수다원 부분에 대한 얘기고, 그리고 뿌툿자나(puthujjana)라고 하는 수다원 도와 과에 이르지 않은 그냥 평범한 중생들을 얘기합니다.
성인과 일반 중생들의 구분점이 뭔가 하는 겁니다.
성인이라 할 때는 그마만한 칭호를 붙여줄만한 이유가 있어야 될 거 아니라. 성인이라 할 것 같으면 적어도 일반적인, 객관적인 생각으로는 분명하게 일반 부류 뿌툿자나 하고는 다르다 하는 거죠.
뿌툿자나들은 예를 들면 내가 이만큼 나아갔다가 나아간 걸 잊어버리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을 해야 되는데, 성인이라는 것은 만약에 예를 들면 요만큼 나아갔는데 나아간 걸 잊어버렸다 하더라도 그다음에 기억해낼 때는 처음부터 다시 돌아가는 게 아니고 거기서부터 다시 나아갈 수 있는 형태들이 돼야만이 적어도 어떤 구분점이 있을 거 아니라.
왜 그러냐면 수다원에 이른 분하고, 아니면 아라한에 이른 분들하고, 또 여러분들 같은 뿌툿자나라고 하는 일반인들하고는 외형상으로는 전혀 차이점이 없습니다. 똑같이 몸을 지니고 있고 똑같이 눈과 코와 귀를 가지고 생활을 하시는 분들이란 얘깁니다.
그런데 그 구분점을 어떻게 둘 것이냐 하는 거거든요. 적어도 성인의 경지에 이른 분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은 차이점이 뭐냐면, 뭐 수행을 했다고 칩시다. 안 그러면 여러분들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어 산으로 칩시다.
산은 여기에서 여기 꼭대기까지가 있다. 그럼 이게 네 부류로 분류된다고 치자. 산을 요렇게 올라가다가 일반인들은 중지를 해버리고 쉬어버릴 거 같으면 그다음에는 여기 산 밑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을 해야 돼. 다시 처음부터 올라가야 되는 거라.
수다원에 이른 분들, 성인의 경지에 이른 사쌍팔배라고 하는 것은 거기서 한참 멈췄다고 하더라도, 이생이 아니고 다음 생에까지도 멈췄다고 칩시다. 그리하더라도 그다음에 다시 시작할 때는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절대 성인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는 뒤로 물러나는, 퇴보라는 것은 없다 하는 얘깁니다. 그게 일반인들하고 성인들의 분류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아! 내가 수행 경지에서 수다원 정도 이른 것 같다. 그러면 자기 스스로 점검을 해가지고 알았단 말이라. 그러고 나서 수행을 안 한다고 칩시다. 수다원이라 해서 다 수행을 하는 건 아닙니다. 수행하는 마음들은 항상 일으키고 사띠를 할려고 하지만은 안 될 때들도 있습니다.
왜 그러냐하면 계속 사띠를 하고 사띠가 이어졌을 거 같으면 끊어져야 될 욕망들이 아라한과 차이가 없어져 버립니다. 그런데 분명하게 차이가 있거든요. 쉽게 말하면 수다원에서는 세 개가 끊어지고 두 개가 약화되고 이런 게 있고, 그다음에 차차 끊어야 될 것들이 늘어나고 하기 때문에 분명한 차이점들이 있다는 거라. 그런데 일반적으로 봤을 때는 뭐 수행 안 할 수도 있다는 거라.
그런데 일반인들하고 차이점이 뭐냐면 다시 내가 돌이켰을 때 내가 이르렀던 수행에서 다시 시작을 하느냐, 아니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을 하느냐를 가지고 아! 내가 이때까지 수다원에 이르렀다 하고 착각을 했구나, 안 했구나 하는 걸 갖다가 스스로 판별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차이점이 있습니다.
'뒤로 물러나지 않는다고 하는 성인들'은 그런 의미들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네 부류들은 지금 여러분들한테 자세하게 설명을 할 순 없고,
단지 이 시간에는 그런 수다원과 뿌툿자나라고 하는 일반 범부중생 하고의 차이점만 가지고 대충 얘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그 이하의 삶을 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예를 들면 지금 한국의 실정에서 내가 다시 인간의 몸을 받아 태어나고 싶다하는 그런 큰스님들이 있었다, 그러면 그분들은 그렇게 자기가 원하면 다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수다원이었을 경우에 가능하겠죠! 그러면 아라한일 때는 불가능 하겠죠!
수다원하고 아라한의 차이점은 뭐냐 하면 수다원은 다시 윤회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라한은 윤회를 하지 않는 자입니다.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해서 다시 태어나질 않는다는 거라.
그러면 어쨌든 지금 큰스님들이 윤회를 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아라한은 틀림없이 아니다 하는 거라. 완전하게 깨달음을 이룬 분은 아니다. 단, 수다원이냐 사다함이냐 아나함이냐 그 차이가 나는 것뿐. 그러니까 수다원하고 사다함 아나함의 차이는 욕망의 엷고 깊음의 차이가 나는 것뿐입니다. 별로 그렇게 차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수행상에서는 분명하게 많은 차이가 납니다.
예를 들면 수다원이라고 할 것 같으면, 일단 성인의 경지 이상에 들었다고 하는 것은 다시는 범부중생으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얘기이기 때문에, 분명히 거기에는 그 나름대로의 경지가 있습니다. 그걸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들이 분명히 존재를 합니다.
그게 뭐냐면 일단 수다원 이상이라면, 적어도 다시는 내가 부처님에 대해서 의심을 하지 않는다 하는 것, 그리고 부처님 법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는다 하는 것, 그다음에 성스러운 상가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는다는 거라. 이게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그리고 다섯 가지 계율, 여러분들 조금 전에 오계했죠? 그 오계에 대해서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
이게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수행을 했는데, '아! 내가 깨달았다'고 했는데 마음속 한편에서 '아! 내가 과연 깨달은 이 법을 가지고 내가 깨달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들것 같으면 어떻게 돼요? 그건 이미 수다원 이상도 못 갔다는 얘긴 거라. 법에 대해서 확신이 없다는 것은, 어떤 경우든지 그 확신을 버리지 않는다는 얘기거든. 칼이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설혹 죽을 지경에 도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법에 대한 믿음, 부처님에 대한 믿음, 상가에 대한 믿음들이거든. 그런데 내가 마음속에서 잠깐이라도 그런 생각이 일어났다고 할 것 같으면 자기 자신은 알아야 되는 거라. '아! 내가 아직 성인의 경지에도 도달하지 못했구나' 라고 판단을 해야 된다는 거라.
경전에도 그런 것들이 곳곳에 나옵니다. 바라문 부부가 남편은 다른 종교를 믿고 있고, 아내 되는 분은 불교를 믿고 있는데, 이 아내 되는 분은 수다원에 이미 이르렀어. 그래서 남편이 보기엔 참 가소로운 거지. 만날 뭐가 있으면 “아이고! 우리 부처님 부처님!”하고 있으니까. 인도 같은 경우에는 모든 종교인에게 평등하게 공양청을 합니다. 꼭 불교인이라 해서 불교 출가자들만 초청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번은 불교스님들 초청했으면 또 다음에는 다른 종교인들, 자이나교든지 바라문 힌두교라든지 이런 성자들을 초청한다는 말이라.
스님들을 초청하면 다른 문제는 크게 안 일어납니다. 초청하는 스님들이 대부분 보면 성인의 경지에 도달 한 분들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티끌이나 욕망 같은 것들이 잘 안 일어나기 때문에 뭐 설혹 비난하는 말이 있다든지 불교를 안 믿는 사람이 있더라도 관대하게 대하고 평등하게 대해나가는데, 다른 종교인들은 그렇지 않다는 거라. 그러니까 공양청을 받았는데, 자이나교 성자인데 불교를 믿고 있다는 사실을 알 것 같으면 성을 내는 거라. “그거 뭐 쓸데없는 걸 믿고 그러냐” 하면서 그렇게 되거든. 이렇게 이미 화를 내는 것 자체만 하더라도 사실은 성인의 경지에는 사실은 반열에는 안 든 겁니다.
태국에서는 어떤 구분까지 하느냐면 진정한 스님인가, 그리고 진정한 스님이 아닌가? 성자의 반열하고는 관계가 없는 거라.
그러니까 출가자인가 아닌가 하는 구분을 갖다가 뭐로 하느냐면 '화를 내느냐, 안 내느냐' 하는 걸 가지고 구분을 합니다. 일단 화를 낸다고 할 것 같으면 스님 축에도 못 든다고 그렇게 인식을 하고 그렇게 대접을 해버려. 그러니까 스님 축에도 못 드는데 성자의 반열에는 더더구나 못 들겠지. 그러니까 기본 조건이 화를 얼마만큼 다스리느냐 하는 건데, 그것조차도 못 다스렸다고 할 것 같으면 출가자도 아니다 하고 판단을 하는 경우인데.
인제 다른 종교들은 그런단 말이라. 만약에 불교 스님인데 다른 걸 믿고 있다. 그런데 “에잇! 거 쓸데없는 그런 걸 왜 하느냐” 하고 화를 벌컥 내면서 “그건 틀렸다. 이것만이 최상의 것이다. 이걸 따라라” 이렇게 할 것 같으면 바른 거겠어, 아니겠어? 바르지 못하겠지. 그거는 태국의 예로 들것 같으면 스님 축에도 못 드는 자가 되는 거라. 그러니까 성인의 경지에는 더더구나 못 들게 되는 형태들을 띠게 되죠.
어쨌든 다른 종교인들이 왔을 때 아내가 그런 모습들을 보이는 것을 보고 남편이 그럽니다. “한 번만 더 부처님에 대한 것들을 갖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것 같으면 당신을 죽여 버리겠다” 그럽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그 성인의 경지인 수다원에 이르렀던 아내라고 할 것 같으면 무슨 말을 할 것 같애요?
붓다와 담마와 상가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 그게 바뀌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할 거 같애요? “그걸 버리라고 한다면 나를 죽여도 관계없다. 나는 죽는다고 해서 내가 가지는 확신들, 믿음을 갖다가 죽음 하나와 바꿀 생각은 없다” 하고 얘기를 분명히 하겠지. 남편 같은 경우엔 그런 얘기를 들으면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어지는 거지.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데 뭐 어떻게 더 얘기할 게 있어.
사실은 수다원이라는 것은 그런 경지라는 거라. 절대 어떤 경우가 되더라도 바뀌지 않는다는 거라. 그게 인제 수다원의 경지입니다. 여러분들 같이 이게 좋다 하면 여기에 쏙 쏠렸다가, 저게 좋다 하면 저기에 쏙 쏠렸다가, 또 내하고 맞는 것과 다른 것들을 하고 있으면 배척한다든지 이럴 것 같으면 이미 수다원에도 이르지 못한 거라. 그 부인은 다른 종교인이 왔을 때도 동등하게 대하거든.
자! 그러면 통상적으로 얘기하는 일반적인 뿌툿자나와 수다원의 차이는 그렇게 나눌 수가 있습니다. 조금 더 세세하게 한번 나눠볼게요.
수다원이라고 할 것 같으면 일단은 내가 어떤 경지에 있어야 되느냐?
물론 여러분들은 수다원이 아닐 것입니다. 적어도 여러분들이 목표로 하고 있는 성인이 될려고 할 것 같으면 그런 상태로써 꾸준히 만들어줘야 됩니다. 그래서 이것을 참조해가지고 지금 현재는 뿌툿자나라고 하더라도 '아! 요렇게 내가 점점 더 나아가겠다' 하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간혹 그런 얘기를 합니다. 목표를 잡을 때 뭐를 목표로 잡을 것이냐?
성불을 하는 것을 목표로 잡을 것이냐 그러니까 부처가 되는 것을 목표로 잡을 것이냐, 아라한을 목표로 잡을 것이냐? 여러분들 같으면 뭐를 목표로 잡을 것 같애요? 그리고 태국이나 버마나 스리랑카의 일반 뿌툿자나 일반 불교신자일 것 같으면 뭐를 목표로 잡을 것 같애요? 백 명에게 다 물어보십시오.
(수행자 대답: 수다원을 목표로 할 것 같습니다.)
아라한이겠죠! 아라한을 목표로 합니다! 수다원도 윤회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수다원을 절대 목표로 할 수는 없습니다. 아라한을 목표로 하지 부처를 목표로 하는 법은 없습니다.
부처가 한번 생기려면 얼마만큼 많은 시간이 걸리는지 아십니까?
나중에 언제 시간이 되면 겁(劫)에 대한 것들을 한 번 설명을 해줄 때가 있을 겁니다. 어쨌든 아주 아주 먼 시간 동안의 바라밀 공덕을 성취한 자들이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것도 내가 나는 반드시 다음 생에서 부처를 이룰 것이다 하는 그런 다짐을 한 자들인데 사실은 그것은 거의 현실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 말고 벽지불이라는 개념이 생기고, 그다음에 아라한이라는 개념이 생기고 그렇게 합니다. 일반적인 수행의 과위에서는 똑같은 경지인데 단지 어떻게 깨달음을 이뤘나 하는 그 차이가 나는 것뿐이죠. 그래서 동남아시아 같은 경우에는 외람되게도 “나는 부처를 목표로 해서 수행을 한다”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주 현실적입니다. 아라한은 적어도 내가 이생에서 아라한이 될 수가 있고, 또 이생이 아니라 다음 생에라도 될 수가 있고 하는 상태입니다.
단, 내가 그런 다짐들, 요즘 말로 할 것 같으면 뭐라 합니까? 한국에서 많이 하는 것들 있죠? 머리에다 뭐 흘리면서 수기 받는다고 하는 것, 마정수기라고 합니까? 그러니까 외국에 있는, 특히 티벳 린포체 같은 분들을 불러가지고 올리면서 마정수기 하라고 하고.
그 마정수기 하면서 해야 되는 것은 사실은 그겁니다. '내가 다음 생에서 꼭 부처가 되기를, 부처를 이루기를, 아니면 아라한이 되기를' 이런 것들을 소원하는 그게 마정수기입니다. 실제적으로는! 그거 안 하고 현실적인 이익을 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거는 마정수기에도 안 들어가겠지. 어쨌든 그런 다짐들을 했다고 치고, 내가 이생에서 깨달음을 이룰 수 있고 아라한이 될 수 있는 거기 때문에 현실적인 그런 부분들을 많이 잡습니다. 어쨌든 간에 그런 과위들이 있는데,
수다원이라고 하는 것은 적어도 이것 만큼은 반드시 되어야 만이 수다원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가 뭐냐면 여러분들 지금 현재 살아가는 것은 몸과 마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 이외에 어떤 것도 없구나 하는 사실을 알고, 특정한 것들이 존재해가지고 그것이 나의 영혼이다, 나의 것이다, 하고 마음을 먹는 경우들은 일단은 버려야 만이 가능해집니다. 조건 따라 일어났다가 조건 따라 사라지는 것뿐인 것이지 그 속에서 어느 것에도 나, 나의 것, 나의 영혼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고 반드시 바른 견해를 가져야 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돼!
그런데 살아가면서 여러분들은 대부분 내 영혼이라는 견해를 가집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죽고 나면 다시 굳이 짐 될려고, 영혼이 있다고 생각을 하니까. 또 살아있을 때도 뭔가 나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내가 있으니까 나의 것이라고 하는 집착하는 것들도 있고. 집착하는 것은 있을 수가 있습니다. 수다원이라면 집착은 있으니까, 그런데 그런 견해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라.
그걸 보통 우리말로 유신견(有身見 sakkāyadiṭṭhi)이라고 합니다. 나, 나의 몸, 나의 영혼이라는 그런 견해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 실제로 보면 여러분들 몸은 나마(nāma)와 루빠(rūpa)의 인연소생일 뿐입니다. 물질적인 것과 마음적인 것 이것의 두 가지 상호작용인 것뿐이지 거기에 특정하게 나라고 존재하는 것은 발견하지 못합니다. 수행상에서는!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도 육체적으로 불러오고 꺼지고 하더라도 정신적으로 인식해야 만이 불러오고 꺼지고 한다는 사실, 그리고 몸과 마음이라는 것은 이렇게 다른 것이다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압니다.
마음으로 알고 있더라도 그 마음이 다른 소리를 들었다 할 것 같으면 마음이 다른 쪽으로 확 쏠려버립니다. 그래서 마음이 고정된 실체가 있어가지고 요것만 바라보고 싶다고 해가지고 요것만 바라봐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마음대로 그렇게 조절할 수 있는 기능이 아닙니다. 그래서 마음이라는 기능 자체도 이것도 영혼이라는 게, 특정한 게 존재해가지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구나 하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분명하게 안다는 것이죠. 수행을 조금만 시작을 해보면! 해서 반드시 그런 견해들을 가지도록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다음 두 번째가 뭐냐면 이때까지 얘기했던 붓다·담마·상가라고 하는 것, 그리고 깜마(kamma)의 법칙- 업(業)의 법칙이라고 하는 것들에 대한 것들을 확실하게 가져서 거기에 대해서 한 치의 의심(위찌낏짜, vicikicca)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가끔씩 여러분들도 그럽니다. 붓다 담마 상가라고 하는 부분은 자주 바뀌기도 할 겁니다. 특히 요즘은 입시철이죠. 우리 선원에서는 입시기도 같은 이런 기도 아예 안 하니까 그렇다고 치고, 다른 절 같은 경우에는 입시기도를 합니다. 입시기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만약에 자기 아들이 대학에 합격을 못 할 것 같으면 어때요? 종교를 바꿔버리는 경우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을 안 믿는 경우도 있다는 거라.
얼마 전에도 내가 오랜만에 전화를 한 번 해봤는데 그런 거예요. 이제는 스님이라는 칭호도 안 써. 전에 계속 절에 다니던 분인데 “인제 종교 바꿨습니다” 그러는 거라. 종교를 바꾼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사람이 바뀐 것은 아닌데 종교가 바뀐 것으로 인해서 자기 자신이 확연하게 달라졌다고 판단들을 한다는 거라. 그게 일반적인 사람들의 패턴이라. 여기 좋다가도 만약에 여기 새로 오신 분쯤은 다른데 다른 것이 좋다고 할 거 같으면 거기 쏠리게 되어있다는 거라. 그거는 인간이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특히 내가 이마만큼 노력했는데 이마만큼 결과가 안 나왔으면 '아! 이 업의 법칙을 과연 믿을 수 있느냐' 회의를 가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적어도 수다원일 거 같으면 그런 의심은 하지 않는다는 거라. '아! 그런 인연으로 인해서 그렇게 됐구나'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그리고 붓다 담마 상가에 대한 것들은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 하는 거라.
수다원이 아닌 뿌툿자나가 수다원인 체하려면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가장 눈에 두드러지게 해야 될 거는 적어도 이런 의심은 하지 않아야 된다는 거라. 의심을 하지 않고 따라가는 거라. 그냥 따라가는 거라. 대부분 옛날에 성인이라고 칭했던 분들은 이런 경우에 해당이 많이 됩니다. 사실은 자기 자신은 그런 확신을 완전히 가지지도 않고, 그런 의심이 완전히 끊어졌다고도 얘기를 못 하면서도, 본인 스스로는 확신을 가지고 얘기를 하는 거라. 본인 스스로는 이 길만이 맞다 하고 얘기를 하는 거라. 그렇게 -으니까, 자기는 그런 확신을 안 가지고 있더라도.
그래서 대부분 남방불교에서는 '요놈이 가짜다. 아니면 진짜다'하고 구분하는 것들을 그걸 가지고 판단을 합니다. 과연 얼마만큼 붓다에 대한 의심이 없는가, 담마에 대한 의심이 없는가, 상가에 대한 의심이 없는가, 하는 것을 구분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스님들 간에! 여러분들한테 그런 얘기를 할 수는 없는 건데, 그것 가지고 판단들을 합니다. 대부분 스님들은 이렇게 안 되어있으면서도 확신을 가진 것처럼 얘기를 하게끔 된다는 거라.
그다음에 세 번째, 스님이 만약에 여러분들에게 '이 방법으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하고 가르친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거 그대로 따라 하겠습니까? 왜 따라합니까? 그것으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하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대답)
그렇지!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 건데 대부분 보면 스님이 이거다 하고 얘기할 것 같으면 그것에 대해서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그대로 따라합니다. 왜? 그것으로 해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하고 믿어버리는 거라. 이런 것들이 사라져버린다는 거라.
반드시 조사 확인해가지고 그것으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른다는 확신이 들 때 그것을 따라 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계금취(戒禁取, 실랍바따 빠라마사, silabbata paramasa)에 빠져버린다는 거라. 지장기도 열심히 하면 뭐 어떻게 된다. 그럼 지장기도가 최고다. 지장기도 열심히 합니다. 어떤 것도 한다 하면 이렇게 또 넘어가 버립니다. 아니면 붓다눗사띠, 붓다에 대해서 부처님 명호 열심히 외우면 어떻게 된다. 그런 하나 하나에 걸려버린다는 거라. 자기는 실제로 그걸 조사 확인해 보지도 않았으면서. 그게 보통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계금취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 것들에 대한 믿음들을 버려버린다고 하는 겁니다. 반드시 자기 스스로 확인된 것들, 그것들로 인해서 따라가지는 형태들을 취하게끔 된다 하는 겁니다.
적어도 이거 세 개 정도는 떨어져나간 자만이 수다원이라고 얘기한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수다원이 일반 뿌툿자나와 차이 나는 것이 뭐냐면 별로 여러분들하고 차이 나는 거 없습니다.
욕심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잘못된 행위들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차이 나는 건 뭐가 차이 날까? 잘못됐으면 잘못됐다고 분명하게 안다는 거라. 욕심냈으면 욕심냈다고 분명하게 안다는 거라. 그래서 다시 거기 돌아갈려고 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거라. 만약에 여러분들하고 완전하게 차이 나가지고 수다원이 욕심도 없고 화내는 것도 없고 어리석은 것도 없고 이럴 것 같으면 윤회를 아예 안 해버리겠지. 그런데 수다원은 그런 경지는 아닙니다.
잘못을 저지르기도 한다는 거라. 단, 차이 나는 게 바로 즉시 알아차린다는 거라. 그래서 거기로 돌아가질 않는다는 거라.
그런데 여러분들은 산을 내려간다고 치면 내려가다가 브레이크를 못 잡는 거야. 그냥 브레이크도 잡지 못하고 그냥 그대로 휩쓸려버리는 거라. 그걸 가지고 폭류(ogha)라고 그럽니다. 적어도 수다원은 폭류에는 들어가지 않는다는 거라. 발을 탁 넣는 순간에 '아! 이게 폭류다' 하는 걸 알고 발을 빼내버린다는 거라. 그러니까 폭류에는 휩쓸리지 않겠지. 그렇다고 해가 발을 안 담근 것은 아니지. 담궜다 하더라도 적어도 폭류에는 휩쓸리지 않는다는 거라.
그게 여러분들하고 차이점이라.
그게 뭐냐면 로바(lobha 탐욕), 도사(dosa 성냄), 모하(moha 어리석음)라고 하는 세 가지. 어떤 조건들이냐 하면 나쁜 상태로 빠지는 조건들이 되는 이 세 가지 탐․진․치로 부터는 떠난다는 거라.
나쁜 조건이란 것은 내가 욕심 많이 부리면 어떻게 됩니까?
예를 들어봅시다. 여기 먹을 게 있다. 개들 같은 경우에는 어떻게 됩니까? 여러 마리 개가 와서 이 먹을 것을 먹을려고 쟁취를 합니다. 그럼 막 싸우게 되겠죠. 자기가 먹을 만큼 어쨌든 다른 개를 물어서라도 이걸 먹어야 되는 거라. 이 먹는 게 중요한 것이지 다른 개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다른 개를 할퀴기도 해서 다른 개에게 피해를 입히기도 한다는 거라. 그리고 내가 적당하게 먹으면 될 건데 욕심을 부리니까 더 많이 먹게 되고, 안 그러면 못 먹을 거 같으면 다른 데 가서 버리든가 안 그러면 감추어 둬가지고 다음에 먹으려고 저장을 해두게 되는 거라. 그러면 다른 개들은 당연히 못 먹게 되는 거라. 이런 것들은 과한 상태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거라.
인간들은 그렇게 안 하죠? 적어도. 여기 음식이 있다 할 것 같으면 내가 적당하게 먹는다는 거라. 다른 사람들도 먹을 수 있게끔 해주는 거고. 나쁜 부류에 빠진다는 것은 이와 같은 겁니다. 적어도 인간은 나쁜 부류는 아니라는 얘기죠? 그럼 인간보다 못한 부류들 축생이라든지 지옥이라든지 아귀라든지 아수라라든지 이런 네 가지 부류들은 나쁜 부류에 해당이 되겠죠. 그걸 갖다가 '아빠야(apāya 악처)'라고 그렇게 합니다. 빨리어로. 적어도 이 네 가지 부류에 떨어지는 일은 적어도 하지 않는다는 거라. 가끔씩 이 음식에 대해서 욕심을 내가 완전히 떨어진게 아니니까. 욕심을 내더라도 먹을 만큼만 먹는다는 거라. 적어도! 요놈을 갖다가 이걸 내가 다 먹을라고 확 하지를 않는다는 거라.
그게 일반인과 수다원 하고의 차이점입니다.
탐․진․치 세 가지 부분에서 그렇다는 거라. 별로 여러분들 하고 차이가 없죠? 수다원하고! 여러분들도 그렇게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렇게 욕심 안 부리죠?
어쨌든 이 여섯 가지가 일반적으로 수다원과 일반 뿌툿자나와의 차이점입니다.
그러고 나서 수다원 이후에 과위에 있는 것들, 사다함 아나함이라고 하는 부류들은 이 뒤에 세 가지 부분 탐·진·치 부분이 얼마만큼 조금씩 더 떨어져 나갔느냐 그 차이가 납니다. 그 부분을 완전하게 떨쳐버릴 것 같으면 인제는 아라한이 됩니다. 물론 그것만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다시 또 미세한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까지가 완전하게 떨어져버리는 상태가 아라한이고.
그러니까 실질적으로는 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이라고 하는 것은 크게 차이가 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일반 뿌툿자나와 수다원은 크게 분명히 차이가 납니다. 그렇죠? 그런 것들을 잘 이해를 하기 바랍니다.
그래서 경전에 있는 것들을 얘기를 하겠습니다.
아난다가 어느 마을에 가면 “부처님! 이 마을에는 누가누가 살았고 어느 스님이 살았는데 죽고 나서 어찌 됐습니까?” 만날 물어보는 게 그거야.
참 부처님이 대답하기 힘 드는데도 일일이 다 얘기를 해주눈 거라. “아! 누구는 어디 태어나가지고 어찌됐다. 또 어느 스님은 어쨌다.” 만날 그러니까 부처님이 좀 그렇거든. 아난다가 그다음에 물어보니까 '아난다야! 만날 그 대답 해주다 보면 내가 실제로 법을 펴야 될 거는 하지를 못한다. 실제 가르쳐야 될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방법에 대해서 가르쳐야 되는데 맨날 그 얘기하다 보면 시간 다 가버리니까 이일을 우찌해야 되노?
다음부터는 요걸 기준으로 해가지고 살아있을 때 요거 이상 된 사람들은 아! 이 사람은 수다원 이상이었구나, 아니면 수다원도 안 됐구나 판단해가지고 수다원일 거 같으면 이렇게 됐을 것이고 수다원이 아니었을 것 같으면 이렇게 됐을 것이다 하고 판단을 하라' 하면서, 여러분들이 거울에 얼굴보면 내 얼굴이 비취듯이, 그래서 잘생겼구나 못생겼구나 하고 알듯이,
「법의 거울」이라는 말씀을 하면서 이 '수다원의 이익과 공덕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거기에 대한 것을 간단하게 얘기하겠습니다.
“아난다야! 이 부처님의 교단에서 수다원에 이르른 사람들은
첫 번째 붓다에 대한 흔들림 없는 신심을 갖추고 있다.
두 번째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흔들림 없는 신심을 가지고 있다.
세 번째 상가에 대해서 흔들림 없는 신심을 갖추고 있다.
네 번째 성인들의 마음에 드는 다섯 가지 계를 구족하고 있다.
아난다야! 자신이 수다원인지 아닌지 이 거울을 보듯이, 거울을 보고 살펴보듯이 살펴볼 수 있는 그런 법이라고 하는 것은 이 정도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한 법들을 구족한 자들을 수다원이라고 말할 수 있고, 각자 스스로 자신에 대해서 '아! 내가 수다원에 이르렀구나' 하고 확신들을 가질 수 있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이렇게 부처님이 「법의 거울」이라는 경전에서 얘기를 합니다.
예를 들어서 부처님에 대해서 확신이 들었다. 어떤 경우도 부처님을 의지처로 하지 부처님 이외에는 의지처로 하지 않는다는 거라. 어떤 경우라고 하더라도,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럼 이생에서만 그럴까? 죽고 나서 다음 생에 뭐로 태어났다. 다시 만약에 인간으로 태어났다. 그때는 어떻게 될까? 불교를 모르는 상태인데 어떻게 될까? 수다원일 거 같으면. 그때도 변함이 없다는 거라.
부처님 이외에 어떤 것도 의지처로 하지 않는다는 거라. 단지 부처님을 모르는 상태에서는 의지처를 구하지 않는다는 거라. 그런데 다시 부처님을 알게 되면 거기서부터 바로 다시 시작을 하게 되는 거라. 이미 수다원의 경지에서 부터 시작을 하게끔 된다는 거라. 그 차이가 나는 겁니다. 그래서 다음 생이 바뀐다고 하더라도 부처님을 의지처로 하는 것에서는 변함이 없다는 거라.
담마에 대한 것도 상가에 대한 것도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리고 다섯 가지 계율을 지켜나간다고 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꼭 마찬가집니다.
(수행자 질문)
그렇죠. 도의 흐름에 든 자.
자! 다시 한번 얘기하겠습니다. 수다원에 이르게 되면
첫 번째 딧티(diṭṭhi 見)라고 하는 견해를 바르게 세우게 됩니다. '나'라고 하는 것들, 이 몸이라고 하는 것은 색수상행식이라고 하는 몸과 마음의 관계에 있다. 그래서 몸과 마음, 정신과 물질의 법칙들을 분명하게 이해해서 나, 나의 것, 나의 영혼이라는 것들의 견해를 가지지 않는다.
그걸 딧티(diṭṭhi) 상요자나(saṃyojanā 족쇄)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 견해를 반드시 끊어버립니다. 그런 흐름을 끊어버린다는 겁니다.
두 번째가 위찌낏짜(vicikicchā 疑) 상요자나(saṃyojanā 족쇄). 의심하는 것.
부처님, 담마, 그리고 상가, 업, 업의 법칙, 결과라고 하는 것, 이런 것들에 대해서 의심을 절대 하지 않는다.
세 번째 계금취(sīlabbataparāmāsa 戒禁取) 삿된 것들을 믿고 따르지는 않는다 하는 거라.
부처님 당시 때는 참 그런 게 많았다고 그럽니다. 집게다리라고 그러죠? 한 발로 요렇게 서가지고 있는 것, 지금도 인도에 가면 많이 하죠. 합장하고 이렇게 막 고행하면 깨달음에 이른다, 아니면 갠지즈 강물에 목욕하면 업이 소멸된다.
여러분들도 그런 경우 있잖아요. 어느 기도를 열심히 하면 업장이 소멸된다. 소원이 성취된다. 뭐 어찌한다. 그게 바로 계금취입니다. 그렇게 될 수 없는 건데 그렇게 된다고 믿는다는 거라. 우리 스님이 얘기했으니까, 아니면 틀린 경전, 부처님이 얘기했던 경전이 아니라 어느 경전에 있으니까 하면서 그걸 받아들여서 그걸 따르는 것들, 이런 것들을 적어도 가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내가 확인해서 그 길이 삼법인과 사성제의 진리에 배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그 길을 따르는 것들이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안 된다는 거라.
그다음에 네 번째는 질투하는 것, 남이 행복한 거 좋아하지도 않고, 남이 좋은 거 갖고 있는 거 질투하고 이런 것들, 그런 질투하는 마음들이 없습니다.
그다음에 다섯 번째가 인색한 것, 남에게 베푸는 마음들을 가지지 않는 것, 이런 것들이 버려집니다.
적어도 이 다섯 가지 정도가 갖춰져야 만이 수다원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리해야 만이 그런 자는 다시는 나쁜 곳으로 떨어지지도 않고 이미 도의 흐름에 든 자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깨달음에 이른다 하는 겁니다.
이 '언젠가는' 이란 것은 경전에 일곱 번 이내라고 돼있습니다. 그게 일곱 번까지 갈지 아니면 한 번 만에 될지 아니면 두 번 만에 될지는 누구도 모릅니다. 아니면 그냥 이생에서 끝나게 될지는 누구도 모른다는 거라. 어쨌든 일곱 번 안에, 일곱 번 죽고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하기 전에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릅니다. 그런 자들을 갖다가 '수다원, 도의 흐름에 든 자'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그런 자들은 자기 스스로 압니다. '아! 내가 다시는 의심을 가지지 않고 있구나.' 그리고 내가 따르는 것들에 대해서 설혹 가끔씩 실수를 한다 하더라도 다시는 저지르지 않게끔 다시 또 돌아온다는 거라. 돌아와서 바르게 정립을 하게 되고. 그래서 인색한 부분도 없고 남을 질투하는 그런 것들도 없어져버리고, 그러면서 내 스스로 '아! 내가 인제 수다원이구나' 하는 걸 스스로 압니다. 스스로 확인을 할 수가 있다는 거라. 물론 그걸 스님들 간에는 확인하는 방법들이 있습니다. 있는데 그런 방법들이 일반 뿌툿자나와 수다원하고의 차이입니다.
여러분들도 인제 아직은 뿌툿자나입니다.
그런데 일반인들이 목표로 삼는 게 뭡니까? 아라한입니다!
아라한에 이르기 위해서 첫째 관문이 뭡니까? 수다원입니다!
그럼 적어도 여러분들은 목표는 크게 잡아서 아라한를 잡고 가야 하지만 지금 따라가야 할 것은 뭡니까? 수다원입니다! 수다원이 하는 것들을 따라가야 돼! 적어도 이 다섯 가지 아니면, 아니면 여섯 가지들을 자꾸 따를려고 해야 됩니다. 알겠습니까?
수행할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수행할 때 아! 내가 몸과 마음에 대한 관계를 분명히 알아서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들을 자꾸 가지지 않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그럴려면 수행할 때 어떻게 해야 돼요? 어떻게 해야 돼? 수행할 때?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한다.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모양을 붙잡고 있으면 됩니까? 안 되죠! 왜? 물질과 비물질이라고 하는 것, 몸과 마음에 대해서 관계를 분명하게 이해를 해서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을려고 할 거 같으면 이런 모양들이나 아니면 '나'라고 하는 형태들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에 누구든지 집착하게 돼 있다는 거라. 탁 눈에 요 사람이 보인다. '아! 예쁘다'하는 마음이 들면 어떻게 돼? 집착하게끔 된다는 거라. 그래서 그런 것들은 자꾸 버릴려고 해야 되기 때문에 모양이나 형태들을 자꾸 붙잡을려고 하면 안 되는 거라. 수행에서!
수행의 기본 조건이 모양이나 형태를 버려버리고 실재하는 것을 보라.
실재하는 것은 뭐? 몸의 현상, 마음의 현상! 그것들을 보라는 거라.
실재하는 몸의 현상이나 마음의 현상은 어떤 겁니까?
여러분들에게 어떻게 다가와지는 거라? 느낌으로 다가와 지는 거라.
그래서 수행에서는 느낌을 자꾸 보라는 거라. 느낌을!
이해하겠습니까?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해나가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 > 수행기초[초보수행반] 법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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