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수행기초[초보수행반] 법문

12. 마음 하나만 지켜라. (20090728)

담마마-마까 2019. 11. 22. 07:42

https://youtu.be/UgvUioSJwvM

 

 * 마음 하나만 지켜라. (20090728)

 

Dunniggahassa lahuno yatthakāmanipātino

둔닉가핫사 라후노- 얏타까-마니빠-띠노-

cittassa damatho sādhu cittaṁ dantaṁ sukhāvahaṁ.

찟땃사 다마토- 사-두 찟땅 단땅 수카-와항

 

이 게송은 굉장히 유명한 게송입니다.

아마 스님들에게 게송을 다섯 개를 꼽아라 할 것 같으면 그중에 하나가 이 게송일 겁니다. 한번 누가 읽어볼래요? 한글로만 읽어봐요. 그럼 됐어요?

 

[ 마음은 다스리기 어려웁나니 항상 좋아하는 곳에 쉽게 머문다.

마음을 잘 조화하는 것은 훌륭하나니 다스려진 마음은 행복을 가져온다. ]

 

마음에 대한 수행법을 가르친 게송입니다.

아마 앞으로 게송은 두세 개 더 나가겠지만, 아마 한 3회 정도 마음에 대한 관찰법에 대한 것들을 여러분들에게 설명해주기 위해서 이 게송을 인용을 했습니다.

 

부처님 당시 때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는 '마띠까 마따'라고 하는 분에 얽힌 이야깁니다. 스님들이 수행하는 모습을 보고 "이것은 출가자만 할 수 있는 겁니까?" "아닙니다. 재가자나 출가자나 아무나 다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럼 저에게도 수행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해가지고, 그때 가르쳐준 수행법이 뭐냐면 몸의 서른두 가지 것에 대해서 관찰하는 수행법이었습니다. 어쨌든 그것으로 인해서 아나함까지 이르게 됩니다. 마지막 완전하게 깨달음을 이루는 아라한 바로 밑의 경지까지 마띠까 마따가 이르게 된 겁니다. 그러고 나서 마띠까 마따만 깨달음에 이른 게 아니고, 마띠까 마따가 공양을 올리던 스님들도 깨달음에 이르게 합니다.

 

그것이 뭐냐면 수행의 과위를 이루는데 필요한 부분이라는 게 있습니다.

먼저 개개인의 자질이 되는가 안 되는가? 하는 것을 숙고를 해야 되고, 그다음에 해야 되는 게 수행하는 장소가 적당한가?, 그다음에 수행하는 도반들이 적당한가?, 그다음에 네 번째가 음식물이 적당한가? 하는 것을 살펴서 스님들에게 그에 맞는 음식물을 공양올림으로 해서 그 스님들 전체가 깨달음에 이르게 합니다. 그런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조건들 네 가지도 나중에 후대에 정립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그다음에 또 이 게송에서 중요한 부분이 뭐냐면 지금부터 설명 할려고 하는 부분입니다.

앞에는, 마띠까 마따가 깨달음에 이르렀던 것은 몸의 서른두 가지 부분에 대한 수행법을 가지고 했습니다. '부정관'이죠! 그다음에 한 게 뭐냐면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조건들 네 가지가 있고, 이건 여러분들이 반드시 알아두어야 될 부분입니다. 언젠가는 그 두 가지 부분도 여러분들에게 설명을 할 겁니다.

지금은, 마지막 세 번째 중요한 게 뭐냐면 그렇게 스님들이 깨달음에 이르고 아라한이 되고 나서 부처님한테 와서 마띠까 마따에 대한 칭찬을 많이 합니다.

 

그 소리를 듣고 있던 한 스님이 '아! 내가 저기 가서 수행을 하면 수행이 잘되겠다. 그리고 수행은 둘째치고라도 일단 탁발해서 공양을 해결하는데 어려움은 없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 거기 갈려고 그럽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거기 가라고 해가지고 갑니다. 가면서 이 스님이 생각하기를 '그 수행처가 더러울 수가 있는데 내가 가기 전에 마띠까 마따가 그 수행처를 깨끗하게 청소를 좀 해줬으면 좋겠다' 하는 그런 마음을 냅니다. 그런데 수행처에 가보니까 깨끗하게 치워져 있거든. 그래서 먼길을 왔으니까 마음속에서 목이 마른데 뭐 좀 시원하게 요즘말로 주스 같은 거 마실 것이 있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좀 있으니까 누구 한 사람이 주스를 가지고 온다고. 그래서 마셨어. 그걸 마시고 나니까 또 단 것이 먹고 싶어지거든. 요즘 말로 '쵸코렛 같은 거 그런 것을 좀 먹었으면 좋겠다' 하고 있는데, 누가 쵸코렛을 또 가지고 오는 거라.

 

그래서 생각에 여기는 마따까 마따라는 분이 어떤 분인지 한번 보고 싶은 거라. 그래서 '마띠까 마따가 여기 수행처에 한번 와봤으면' 하는 그런 마음을 냅니다. 또 올 때는 공양시간이 다됐으니까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 왔으면 좋겠다'하는 그런 마음을 냅니다. 아니나 다를까 탁 가지고 오거든. 이 스님이 깜짝 놀래는 거라. 그래서 마띠까 마따님께 물어봅니다.

“혹시 마띠까 마따님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재주가 있습니까?”

뭐라고 대답했을 거 같애요?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을 거 같애요? 그렇게 대답을 안 했어요. 그 질문에 대해서 피해갑니다. “다른 스님들도 남의 마음을 읽는 스님들이 많지 않습니까?” 하고 얘기합니다. 스님은 여러분들 마음을 읽는 재주가 있을 거 같애요, 없을 거 같애요? 그거는 모르겠어요?

그런데 다른 스님들도 그런 읽는 재주가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얘기를 하고 그다음에는 그래도 또 물어보거든. 다른 스님들 예를 들을 필요는 없고 마띠까 마따가 그것을 읽느냐 못 읽느냐 하고 직접적으로 물어봅니다. 그러니까 마띠까 마따가 “그런 마음을 읽는 재주가 없어도 전후사정을 살펴봐가지고 그렇게 우연찮게 맞아떨어지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나니까 이 스님이 더 겁이 나는 거라, 이 스님이.

 

왜 겁이 나겠습니까? 여러분들 마음이 항상 좋은 마음만 가지고 있습니까? 나쁜 마음도 가지고 있다는 거라. 그럼 내가 나쁜 마을을 품고 있으면 어떻게 돼요? 마띠까 마따가 알 거 아니냐는 거라. 내 모든 일거수일투족 마음에서 일어나는 걸 다 알고 있다고 할 거 같으면 여러분들 거기 살 수 있겠어요? 도저히 겁이 나서 못사는 거라. 그래서 밥만 챙겨먹고 부처님한테 왔어요.

부처님이 너 수행하러 가가지고 왜 왔느냐는 거라. 그래서 못 있겠다 싶어서 왔다고 대답합니다. 부처님이 뭐라고 합니다. “네가 수행하고 깨달음을 이루게 될 곳은 그곳이다. 그곳을 놔두고 네가 무슨 깨달음을 이룰 거라고 하느냐. 다시 거기 가라.” “부처님 저는 못갑니다.” 저는 출가는 했지만 아직 범부중생이기 때문에 내가 나쁜 마음을 품고 있으면 마띠까 마따가 그걸 알아차리면 내가 어떻게 거기 있겠느냐는 거라. 내 목을 꽉 죄어오는 거하고 마찬가진데.

 

그때 부처님이 이른 말이 뭐냐면 이 게송입니다.

[ 마음은 다스리기 어려웁나니 항상 좋아하는 곳에 쉽게 머문다.

마음을 잘 조화하는 것은 훌륭하나니 다스려진 마음은 행복을 가져온다. ] 하는 얘기를 하면서 너는 다른 거 아무것도 할 필요 없다. 그냥 경행하면서 왼발 오른발 하고 그거 알아차릴 필요도 없고, 앉아서 수행하면서 배가 불러오고 꺼질 때 일어남 사라짐 그거 할 필요도 없다. “너는 오로지 너의 마음 하나만 지키도록 해라.” 하는 거라. 딱 그거 하나만 하라는 거라. 너 마음 하나만 지키도록 하라. 그러면 절대 마띠까 마따가 못 알아차린다.

쉽게 이해가 안 되죠? 마음 하나를 어떻게 지킬지.

 

마음이라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용어입니다. 어려운 겁니다. 그런데 사람이 부처님이 말한 진리의 길을 따라갈려고 할 것 같으면 반드시 이해해야 되는 것이 뭐냐 하면 마음입니다. 마음에 대해서 이해하지 않고 부처님이 제시한 진리의 길을 따라간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 마음을 알고 있습니까? 철학적으로 아니면 관념적으로 이 마음이 무엇인가 하고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가지고 결론이 나느냐는 거라.

 

예를 들어봅시다. 여러분 손 한번 요렇게 앞으로 내놔 봐요. 쫙 펴가지고.

여러분들 원하는 만큼 한번 올렸다가 내려놓기를 한번 해보십시오. 천천히 그걸 알아차리면서 천천히 올려놓고 내려놓고 한번 해보십시요.

손을 들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들고 싶다는 의도가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손이 들려집니다. 그 의도가 하나 있다고 치자.

그다음 이 손을 어느 정도의 속도로 올릴 것이냐, 빨리 올릴 건지 아니면 천천히 올릴 건지, 그것도 누가 결정합니까? 마음이 결정하는 겁니다.

그러면 또 이 손을 어디까지 올릴 것이냐, 요만큼 올릴 건지 아니면 요-만큼 올릴 건지, 그 결정을 하는 것도 누가 합니까? 마음이 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손이 이렇게 올라가는 걸 갖다가 인식하는 건 누가 합니까? 마음이 판단해서 인식하는 겁니다. 그것도 마음이 하는 겁니다.

손은 올라가지만 이 모든 과정은 누가 합니까? 마음이 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예를 들어서 잠자고 있는 사람 손을 내가 들어준다고 해봅시다.

누가 손을 들어주는 겁니까? (대답) 그렇죠. 잠자고 있는 사람이 자기가 손을 들어올리는 건 아니죠? 그 손이라고 하는 물체는 분명히 들렸지만은, 움직였지만 그 사람의 마음은, 의식은 일을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럼 그 사람은 이 손이 들린 걸 압니까, 모릅니까? 모르죠! 잠자고 있으니까.

 

마음이 수반되지 않는 물질, 물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기능에 지나지 않습니다. 팔이면 팔, 다리면 다리. 그래서 마음이 없는 사람은, 특히 죽은 사람, 아니면 완전하게 삼매에 들어가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다리를 탁 잘라내도 모릅니다. 그렇죠? 그런데 우리는 마음이 있으니까 팔을 들어올릴 때 팔을 인식을 합니다. 얼마만큼 들어올리는지, 어떤 강도로 빠르기로 했는지, 이걸 내가 들어올려지는 걸 알고 내려놓는 걸 아는 것 이런 인식하고 판단하는 기능들도 합니다.

분명하게 마음과 물질이라고 하는 것들은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인제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것, 물질과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구분이 된다는 것은 알겠죠!

 

그런데 실제적으로는 마음은 여러 가지를 했습니다.

팔을 하나 들어올리기 위해서 의도도 있었고, 그걸 요만큼 들어올리겠다 결정도 해야 되고, 어느 정도 빠르기로 해야 되는 것도 있고, 그걸 또 판단하고 인식을 하는 것도 여러 가지 기능들을 했는데, 팔은 뭐했어요? 그냥 들어올려졌다 놓아졌습니다.

팔이라고 하는 물질이 일이 많겠습니까, 마음이 하는 일이 많겠습니까? 마음이 훨씬 많겠죠! 마음이 그 정도로 하는 일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어떤 일들을 합니까? 이 몸을 가지고 있으니까?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또 맛보고 접촉하고 생각하고 이런 것들이죠. 그리고 즐겁고 슬프고 화내고 질투하고 후회하고 또 사랑하는 그런 감정들, 느낌들 이런 것들을 우리는 뭐라고 그럽니까? '살아있다.' '살아있는 증거'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누가 하는 겁니까? 마음의 기능이 하는 겁니다.

마음이 없으면 보지도 못하고 살아가지도 못하고, 맛볼 수도 없는 것들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마음의 기능입니다. 이와 같이 몸은 단순하지만 마음은 굉장히 복잡하고 여러 가지 기능들을 담당을 해서 훨씬 몸보다도 마음이 큽니다.

그런데 마음은 여러분들에게 숨어가지고 몰래 팔을 들어올리라 이렇게 하진 않죠? 마음이 시켜가지고 당당하게 팔을 들어올리라 하고, 어느 정도로 들어올리라. 그리고 어느 정도 올라갔는지 인식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마음의 기능은 숨어있는 기능은 없습니다. 당당하게 표면적으로 드러나서 활동하고 있는 거라.

 

단지 내가 그걸 인식을 못 할 거 같으면 어떻게 돼요? 그 마음이 다른 데서 숨어가지고 시키는 것처럼 무의식 속에 감춰진 것들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알고 보면 마음이 다 드러나가지고 다 그렇게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실체가 있어가지고 거기에 누가 비밀스럽게 시키는 것도 아니고, 또 드러나지 않고 비밀스럽게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없습니다.

마음은 항상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조건이 맞아떨어지면 일어나게끔 돼있고, 또 그것은 표면 아래에 숨어있는 것이 아니고 밖으로 드러나서 일을 하게끔 돼있는 게 마음의 원래의 기능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마음이라고 한다' 하는 것을 먼저 먼저 해야 됩니다.

 

그래서 모든 것들을 인식한다고 하는 활동 그 자체는 마음이라는 것을 먼저 이해를 하도록 그렇게 하십시오.

그래서 일상적인 책상이라고 하는 것들 그 물체하고, 나라고 하는 생명체, 생명체라고 하는 것들을 구별하는 활동, 이런 것들도 모든 것들이 마음이라고 판단들을 해야 됩니다. 마음이 있어야만이 그런 생명체의 역할을 하는 것이지 마음이 없으면 그건 그냥 하나의 물체에 지나지 않습니다. 책상에 마음이 있다고는 누구도 이야기 안 하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라는 것은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고, 조건 따라 일어나는 것이고, 그것이 숨어있는 것도 아니고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통상적으로 마음을 갖다가 영혼이라든지 아니면 변하지 않는 진아(眞我)라든지, 아니면 절대불변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라든지, 안 그러면 여래심(如來心)이라든지 이렇게 명칭을 붙이는 건 그건 합당하겠느냐는 거라. 그건 아니라는 거라.

쉽게 말하면 그런 것들은 물질이 소멸되어도 그것 자체는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고, 영혼이라는 것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거고, 여래심-여래의 마음이라는 것도 항상 상주한다고 하는 것이고, 유일신이라는 것도 세상이 다 망해도 신은 항상 존재하고 모든 것을 다 관장한다는 거고,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는다는 거라.

 

그런데 여러분들 마음은 절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은 아니죠? 내가 요만큼 들어올렸을 때 마음하고 이만큼 들어올렸을 때 마음하고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리고 그것은 드러나진 것이지 비밀스럽게 하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이 마음을 찾을려고 '이 마음이 뭣고' 하는 것, 이 마음을 그런데다가 대비시켜가지고 되겠느냐는 거라. 그거는 아니라는 거라. 브라흐만이라고 하는 것을 뭐 내 마음을 찾으면 브라흐만을 찾는다, 이런 것도 성립이 될 수가 없는 거고. 절대 유일신도 내 마음을 갖다가 진아를 찾으면 그런 신의 경지에 도달한다, 이런 것들도 사실 안 맞게 된다는 거라.

 

그런 개념하고 마음하고를 자꾸 똑같이 동일하게 놓지 말아라는 거라.

동일하게 놓으면 어떻게 되느냐면 자꾸 이상한 쪽으로 관념적으로 빠져버리는 거라. 마음이 뭔가, 또 마음은 내가 살아있을 때는 항상 이 마음이 있는데, 불변하는 이 마음이 뭔가, 자꾸 뭔가 개체가 있는 것으로 몰아나가게 된다는 거라. 그런 것은 마음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하나의 개념일 뿐입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그 영혼을 보지도 못했고 유일신을 보지도 못했고 브라흐만을 보지도 못했습니다. 그걸 갖다가 내 마음하고 변하지 않는 마음하고 동일시 놓는 것도 개념일 뿐입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이라는 생각을 먼저 자꾸 해야 됩니다. 그걸 인식을 못할 거 같으면 우리는 자꾸 동일한 선상에 놓아집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은 마음은 자꾸 변해가는 겁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도 여기에서 물이 떨어졌습니다. 물이 적게 떨어질 때는 한방울씩 '똑 똑 똑' 이렇게 떨어지니까 떨어지는 걸 알아. 그런데 물이 많이 떨어질 땐 어떻게 돼요? 그냥 '주르륵' 떨어져 버립니다. 그러니까 이걸 그냥 물줄기라고 하지 물방울의 연속이라고는 보질 않습니다.

실제적으로 보면 어떻게 됩니까? 물방울들의 연속일 뿐입니다. 지속적으로 물방울들이 연속된 것뿐인 것이지 그것이 구분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정확하게 보고 그리고 그것이 천천히 떨어지면 분명히 연속이라고 할 거 같으면 그게 쭉 연속이 돼야 되는데 연속하다가 툭 끊어지거든. 약해지고. 왜? 사실은 연속하고 항상 그것이 변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게 그렇게 물방울이 툭 끊어지기도 하고 그렇게 된다는 거라.

 

이 소리를 한번 들어보십시오. (종소리 때~~~앵) 소리 들립니까? 어떻게 들립니까? 앞에 소리하고 뒤에 소리하고 구분을 할 수가 있습니까? 알아차리지 않으면 그냥 이거는 종소리 '때~~앵~~' 하는 소리로 밖에 안 들립니다.

다시 한 번 정확하게 듣도록 해보십시오. (종소리 때~~~앵) 구분이 됩니까? 한음, 한음의 반복일 뿐입니다. 그게 모여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때~앵~~'하는 소리로 들리는 것뿐인 것이지 그것이 반복되지 않으면 '때~앵' 소리가 안 들립니다. '땡'하다가 탁 그쳐버리게 됩니다.

한음, 한음 분명하게 다른 음들이 연속하는 것뿐입니다. 영화의 스크린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걸 그냥 흐름으로써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는 것뿐인 것이지 사실은 각각은 다 다르게 돼있다는 거라.

그 기능은 누가 하느냐는 거라. 마음이 하는 거라. 그러니까 마음이 상주해서 불변해 있다는 것은 성립이 안 되게끔 되는 거라. 상주해서 불변할 것 같으면 고정된 것들만 보게끔 되지 변하는 것들, 연속하는 것들은 볼 수가 없습니다. 마음은.

 

쉽게 예를 들면 내가 화가 나있다, 그러면 그 화가 나있는 그 마음을 볼 거 같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화도 불변하게 쭉 연결돼있는 것은 아니죠? 그럼 그걸 관찰하는 마음도 고정불변하는 건 아니죠? 명확하게 화가 일어나있는 마음을 관찰할 것 같으면 화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을 분명하게 압니다. 그럼 나에게 영향을 미치겠어요, 안 미치겠어요? 아니면 영향을 덜 미치겠어요, 아니면 전에 같이 똑같이 영향을 받겠어요? 다르겠죠! 그걸 분명하게 인식할 거 같으면 고정불변 하는 게 아니니까 관찰하는 마음이 똑같이 고정불변 하는 게 아니니까 전에 보다 조금은 덜 미치게끔 된다는 거라. 그래서 화가 일어나는 것도 화가 줄어들게 되고, 그리고 화를 갖다가 중단하게끔 되는 거라.

 

아까도 얘기했지만 마음이 하는 일이 뭐라고 그랬어요? 화가 일어나고, 질투하고, 생각하고, 보고, 냄새 맡고, 맛보고, 하는 모든 것들을 다 마음이 하는 것들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몸을 아는 것보다 마음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는 훨씬 이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모르면 화가 일어나도 콘트롤이 안 되는 거라. 욕심이 일어나도 콘트롤이 안 되는 거고. 그래서 필요한 게 뭡니까? 여러분들에게 그걸 알도록 위빳사나 수행을 하라 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모든 현상들, 인식하는 모든 현상들을 갖다가 내가 그것을 확인함으로 인해서 그 현상들의 소용돌이에 빨려들어가지 않게끔 만드는 것이 일차적으로 여러분들이 마음에 대해서 관찰해야 되는 이유입니다.

화가 일어날 때 그걸 인식하지 못하면 알아차리지 못하면, 화의 소용돌이에 빨려들어가 버립니다. 그래서 화가 계속 증폭돼버립니다. 또 다른 것으로 발전이 돼버리고. 화뿐만이 아니라 보는 것도 마찬가지라. 보면 잘생겼으면 '아! 잘생겼네'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더 가까이 가서 쓰다듬으려고 그러고, 더 가까이 가서 포옹하려고 하고, 자꾸 넘어가지게 되는 거라.

그런데 위빳사나 수행은 보면 본다고 알아차리고, 화가 일어나면 화가 일어나는 걸 알아차리기 때문에 적어도 그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가지는 않는다는 거라.

 

보통 사람들의 인격이 형성되는 것들은 이런 과정을 거쳐서 인격이 형성이 됩니다. 내가 얼마만큼 많이 보고 듣고 느끼고 이런 것에 따라서 인격이 형성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인격이 형성되고 아는 것들이 많다고 하더라도, 어쩌면 열다섯 살짜리보다도 더 화를 참지 못하고, 열다섯 살짜리보다도 욕심을 더 많이 부릴 수도 있습니다. 부처님은 그런 걸 인격이라고는 얘기 안합니다.

인격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얼마만큼 잘 다스리느냐를 가지고 ', 참 저 사람은 잘 산다. 못 산다' 하고 얘기를 하게끔 됩니다.

 

그런데 실제로 수행을 해보면 참 잘 안됩니다.

앉아서 수행해서 망상이 일어나면 망상이 일어났다는 그것을 마음으로 알아차리려고 하는데 아! 이거는 알아차림을 하면 더 망상이 일어나. 다리가 아픈데 다리가 아픈 걸 관찰하면 더 다리가 아파져. 이거 안 할려고 수행을 하는데, 망상 안 피우고 고통받지 않고, 이런 거 할려고 수행하는데 수행하면 할수록 더 그게 드러나네. 우찌 해야 돼? 이를 우찌 하면 돼?

 

그런데 차이가 분명하게 있습니다.

알아차리지 못하고 망상을 피울 때는 그 망상을 피우는 줄을 모릅니다. 또 망상을 피우더라도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상태에서는 크게 번져나갑니다. 그런데 알아차릴 때는 어떻게 합니까? 망상이 일어났다는 거를 일단은 안다는 거라. 그 망상이 또 연속된다고 하더라도. 앞에 거하고 달라요, 같아요? 분명하게 다릅니다. 인식하는 과정도 다르고 그것이 나아가는 방향도 분명하게 다릅니다.

그러면 앉아서 수행하고 있는데 망상이 일어났다, 아니면 통증이 일어났다, '수행하나 안 하나 똑같네' 하는 말은 성립이 안 됩니다. 그래도 수행을 하니까 그 정도라도 알아차리는 거라. 그렇지 못할 거 같으면 망상의 소용돌이에 그냥 휘말려 들어가 버리는 거라.

 

적어도 내가 망상피우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어떻게 해요? 일어나버리고 다른 걸 해버립니다. 그래도 적어도 퐁당 빠지지는 않는다는 거라. 망상이 괴롭혀도. 고통스럽게 되어도 마찬가지라는 거라. 고통스럽게 된 걸 가지고 이차적으로 제삼자에게는 적어도 피해를 입히지는 않는다는 거라. 도저히 못 참겠으면 다리라도 펴는데, 그리해도 어쨌든 내가 알아차림은 가지고 있었다는 거라. 완전하게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뿐인 것이지. 그런데 그전에는 고통스러울 때는 남에게 짜증부리게 되고 그냥 바로 다리를 펴는 거라. 분명하게 달라집니다.

 

수행을 하므로 인해서 그런 것들이 퇴보하는 것이 아니고 전진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적어도 마음의 인식과정에 대해서 알고 있고, 그 속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수행해서 처음에 얼마만큼 큰 이익이 있어요? 아! 내가 아프면 아프다는 걸 알면 그 인식과정을 이해하고 있다는 거라. 그리고 그 속도도 전에 아플 때는, 알아차리지 못할 때는 바로 그냥 반응이 나타나는데 인제는 반응이 느리다는 거라. 참을 때까지 참고 그 속도를 늦출 수도 있고 하게 돼있다는 거라.

 

왜 이렇게 되느냐? 그걸 알아차리는 마음은 절대 여러분 뜻대로 안 됩니다.

여러분 뜻대로 될 거 같으면 그 마음을 어렵다고 얘기 안 하겠지. 옛날부터 마음을 찾으려고 그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나 노력은 안 했겠지. 세상에 몸 찾으려고 하는 사람은 없어도 마음 찾으려고 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았다고. 왜 그랬겠어요? 내 마음대로 안 되기 때문에! 마음이라는 건 지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질 않습니다. 그걸 먼저 받아들이라는 거라. 그리하더라도 적어도 내가 알아차림 하면서 속도는 늦추고, 또 '아! 이게 마음의 현상이구나' 하는 것들은 이해는 하고 있다는 거라.

 

이걸 부처님이 얘기하면서 '마음은 파악하기 어렵다. 원래 마음은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다.' 마음은 빠르다는 거라. 신속하게 퍼뜩퍼뜩 달아나. 그리고 마음은 가볍기 때문에 지가 가고 싶은데로 달아나. 달아나는 거라. 그래서 이런 마음을 만약에 네가 제어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느냐. 그렇게 제어했을 거 같으면 당연히 나에게 행복을 가져오는 거라.

 

그런 마음을 알아차리는 방법입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려고 할 때 부처님도 "네 마음 하나만 알아차려라"고 그랬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릴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다른 건 다 무시해 버립니다.!

일어난 대상, 만약에 호흡을 하고 있다. '일어남' '사라짐' 하는 호흡이라는 대상, 일어난 느낌, 아픈 느낌, 이런 대상 이거 다 무시하라는 거라. 이거 알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을 알아차릴 때는 마음만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럴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마음이 대상으로 가면 안 됩니다!

대상이 어떤 겁니까? 앉아있을 때는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합니다. 이걸 대상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여기에 가면 안 되는 거라. 앉아있으니까 다리가 아프다, 다리가 아픈데 이 느낌을 관찰한다, 이 대상으로 가지 말아라는 거라. 눈을 통해서 밖의 대상이 보인다. 마음이 거기 대상으로 가지 말아라는 거라.

 

그럼 어디로 가야 되겠어요?

내가 볼 때 마음이 뭘 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려라!

내가 호흡이 불러오고 꺼지고 할 때 마음이 뭘 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려라는 거라. 다리가 아픈 게 있다. 다리가 아플 때 내 마음이 뭘 하고 있느냐는 거라. 짜증을 내고 있는지 아니면 그걸 몰아낼려고 하고 있는지, 그 마음만 관찰해야지 이 아픈 느낌이나 호흡이나 밖에 있는 대상으로 마음이 가지 말아라는 거라.

마음은 항상 대상으로 가지 말고 내 마음으로 와야 됩니다.

뭔 말인지 이해하겠습니까? 조금 어렵죠? 마음에 대해 관찰하는 것이 다른 것보다는 좀 어려울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다른 거 다 놔두십시오. 무시하십시오.

마음에 대해서 관찰할 때는 오로지 마음에서 일어나는 반응,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 그것만 관찰하려고 해야 된다 하고 마음을 먹으십시오.

더 선하게, 굳이 이걸 알려고 하지 말고, 또 굳이 그걸 갖다가 내가 용을 써가면서 알려고도 하지 말고, 그리고 그 대상에서 일어나는 반응들 이런 것들도 알려고 하지 마십시오.

대상을 보면 일어나는 반응이 있습니다. 이 호흡도 이 호흡을 알아차리면 거기서 일어나는 반응이 있습니다.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압니다. 이걸 알려고 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거 하지 말고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건 냅두라는 거라. 내가 보면 대상이 보입니다. 그런데 그 대상을 볼려고 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건 냅두고, 그건 보이든 안 보이든 냅두고, 그럴 때 내 마음이 뭘 하고 있는가를 관찰하라는 거라. 내 마음이!

 

대상 자체에 고정시키지 말아라는 겁니다. 예를 들면 다리에 통증이 있습니다. 통증이 있으면 통상적으로 우리는 그걸 '통증' '통증' '통증' 하면서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대상에 고정시키지 말아라는 거라. 통증이 있을 때 마음이 알 거 아닙니까? 그 통증이 있다는 걸 마음이 압니다. 마음이 아는 대로, 그 마음에서 일어나는 반응, 통증이 있으면 마음에서 반응이 일어납니다. 뭔가가 반응이 있습니다. 그 반응만 알아차리라는 거라. '통증' '통증' 하면서 대상에다 고정하지 말고!

'통증에 따라서 일어나는 마음의 반응', 그걸 '아는 마음'이라고 그럽니다.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기만 하라는 거라.

통증이 있을 때 마음에서 반응이 일어나고, '띠띠'하기도 할 거고, 아니면 '쎄'하기도 할 거고, 뭔가가 있을 거란 말이라.

그 반응만 그냥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라는 거라.

그럴려면 대상에 반응하지도 말아야 되고, 대상에 고정되어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 마음에 대해서 관찰할 때는 지나치게 그 대상을 알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마음을 내가 몰랐다 해가지고 그걸 '아! 이거 아니다' 해가지고 통제할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그걸 또 나름대로 조절할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그것에 마음이 일어나게끔 할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마음이 긴장해서도 안 됩니다. 있

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만 관찰하도록 해야 됩니다.

 

통상적으로 여러분들이 이 수행을 언제 하기가 쉬우냐 하면 편안한 상태 편안한 상태에서, 그냥 쉽게, 아주 쉽게 그냥 지금 뭔가를 보고 있다. 그때 볼 때 일어나는 마음이 어떤 마음이 일어났을까? 내가 '예쁘다'고 했나? 아니면 저걸 보고 있음으로 해서 내 마음에서 '기쁜' 것들이 있나, 그런 반응만 그냥 살며시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모든 것들을 이렇게 알아차릴려고 해야 만이 마음에 대해서 관찰하게끔 됩니다. 그래야 그 대상에 빨려들어가지도 않고, 그 대상에 대해서 다른 마음을 일으키지도 않게 됩니다. 그리해야 만이 내가 나쁜 마음이 일어나더라도 나쁜 마음을 슬며시 보고 있기 때문에 나쁜 마음이 지속이 안 된다는 겁니다.

 

마띠까 마따가 아니라 부처님이 보더라도 내 마음을 절대 잡을 수가 없다는 거라. 부처님이 이 방법을 가르칩니다.

"네 마음 하나만 알아차려라. 다른 거는 다 몰라도 된다."

아직은 좀 이해하기가 힘들 겁니다. 이해하기가 힘드는데 앞으로 마음에 대한 관찰을 지속적으로 몇 회 해나갈 겁니다. 하다 보면 '아! 조금은 이해하겠다'하는 그런 마음이 들 겁니다. 어쨌든 이 게송 자체를 잘 마음속에 넣어 놔야 됩니다.

 

마음은 파악하기 어려운 겁니다. 마음은 굉장히 빠르게 움직입니다. 마음은 지 스스로, 내가 원하는 게 아니고 지 스스로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돌아다니게 된다는 거라. 그것이 마음이라는 거라. 그 마음을 제어하는 것은 참 좋은 일이라는 거라. 참으로 해야 될 일을 하는 겁니다. 그렇게 제어되면 당연히 나에게 행복을 가져옵니다.

그런 마음을 알아차리는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