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수행기초[초보수행반] 법문

9. 왓사(안거)_법(Dhamma)을 들을 때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20090712)

담마마-마까 2019. 11. 17. 23:12

https://youtu.be/VUbKM9ezMxg 

 

* 왓사(vassa, 안거)_(Dhamma)을 들을 때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20090712)

 

'왓사(vassa)'라고 하면 여러분들이 이해를 잘 못할 경우가 있을 겁니다.

한국에는 '안거'라고 해서 여름에 하는 하안거, 또 겨울에 하는 동안거가 있습니다. 그거는 알고 있죠? 그거는 대부분 스님들만 하는 것으로 돼 있죠? 요 근래에는 일반인들도 하안거나 동안거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끔씩 그런 경우가 있어요.

 

원래의 안거에는 승속의 구분은 없습니다. 그런데 여름 하안거를 하고 겨울에는 동안거를 하더라도 일 년에 두 번 하게 되면 나이는 두 살 먹어야 되는데 두 살 먹지는 않죠? 한 번만 먹죠! 그래서 여름 하안거만 횟수에 들어가고 겨울 동안거는 횟수에 넣지를 않습니다, 한국에서는. 그래서 일 년에 안거가 끝나고 나면 한 살 먹습니다. 여러분들은 생일이 지나고 나면 한 살이 많아지죠.

그거와 마찬가지로 '왓사-안거'라고 하는 것은 불교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이 유래가 부처님 당시 때부터 있던, 지금 치러졌던 왓사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인도나 동남아시아에서는 여름, 겨울이라는 개념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거는 있어요. 외국인들이 인도나 동남아시아 쪽에 가면 항상 덥습니다. 거기서는 세 계절을 어떻게 나누냐면 비 오는 '우기' 그다음에 여름철에는 '여름' 그다음에 봄가을이라는 '건기' 이렇게 세 계절로 나눕니다. 그런데 처음에 추운 지방 하고 더운 지방을 경험했던 사람이 그 지역에 가면 그 구분을 잘 못합니다. 항상 덥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뭐라고 하느냐면 건기 때는 '더운 날' 그다음에 우기 때는 '조금 더 더운 날' 그다음에 여름에는 '죽도록 더운 날'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렇게 항상 덥게 느껴지는데 그래도 인도나 동남아시아에 보면 이 건기, 그 사람들은 건기라고 하는데 우리가 봤을 때는 추위에 해당이 되는 거죠! 그래서 그 건기 때는 추위 때문에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해가 안 가거든요. 이해가 안 가죠? 여러분들도. 영하로 내려가지도 않고 겨우 해봐야 십몇도, 그 정도 떨어지는 것뿐인데 그것가지고 죽을 이유가 뭐 있겠느냐 그러는데 사실은 그렇게 됩니다.

인간 몸이 2도 3도 이상 온도 차이가 일어나면 생명을 잃을 수 있다고 의학계에서는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들 열날 때 어떻게 합니까? 몇도까지 올라가요? 한 40도까지 올라가죠. 36.5도에서 40도면 겨우 3.5도 차이입니다. 그럼 체온도 마찬가집니다. 3.5도가 떨어지면 죽을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어쨌든 그런데 거기서는 '우기철' 하고 '건기철' 하고 '여름철' 이렇게 나눕니다.

 

부처님 시대에도 우기철이 있었습니다. 우기철은 어떻게 됩니까? 비가 많이 오는 때죠! 비가 많이 오면 풀들이나 곡식들이 자라는 때입니다. 건기 때나 여름 때는 곡식들이 잘 자라지를 못합니다. 풀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동물들이 가장 좋아하는 때도 비가 오는 이 우기철이죠. 그래서 스님들이나 아니면 일반인들이 이 우기철에 막 다니면 어떻게 되겠어요? 자라나는 풀들도 밟을 수 있고, 여러 가지 동물들에게 내가 해침을 당할 수도 있고, 그런 여러 가지 위험들도 있고, 또 물이 범람하게 되면 자칫 잘못하면 물에 휩쓸려 가기도 하고 이렇게 됩니다. 그래서 불교를 비롯한 다른 종교들도 이 우기철에는 한곳에 머물도록 그렇게 했습니다. 그게 유래가 돼가지고 '왓사'라고 '안거, 우안거'라고 우기철에 하는 안거가 생겨나게 된 거죠.

 

예를 들어서 왓사 때 뭘 하느냐 하면, 다른 종교를 한번 봅시다.

'라마단'이라고 알죠? 이슬람 라마단은 며칠간 합니까? 30일간 하죠. 그리고 카톨릭 같은 경우에는 뭐가 있습니까? '사순절'이라고 있죠! 40일간 하죠. 그때는 사순절이나 라마단 때는 대부분 어떻게 합니까? 잘은 몰라도 어쨌든 금욕적인 생활들을 하죠! 뭔가 음식물도 잘 안 먹고, 해가 뜨고나면 음식을 안 먹든지 간에 뭘 어쨌든지 간에 음식도 잘 안 먹고, 일상생활도 좀 조심하고, 그러면서 나머지 시간들은 평상시와 다르게 자기 신들에게 믿음을 바치고 그런 신앙생활을 좀 많이 하고 하는 그런 생활들을 합니다.

 

꼭 마찬가지로 불교의 왓사 때가 그런 때입니다. 그런데 불교의 왓사는 좀 길죠? 90일이니까 세 달! 다른 종교하고는 좀 다릅니다. 어쨌든 90일 동안에는 내가 조금 더 몸가짐을 조심하게 되고, 되도록이면 부처님이 말한 여덟 가지 계율도 지켜나가고, 또 부처님이 설한 법을 조금 더 이해하려고 노력을 하고, 그러다 보니까 더 절에 가서 법문 듣는 횟수라든지 경전을 보는 횟수가 더 많아지고, 또 다른 때보다도 수행하는 시간들을 조금 더 많이 가지게 되고, 그렇게 됩니다.

물론 요즘에는 우기철이라고 해서 못 다닐 곳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왓사가 가진 의미까지 변질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왓사라고 할 거 같으면 항상 이 세 달 동안에는 내가 꼭 부처님 말씀을 조금 더 듣고, 조금 더 수행실천해가지고, '담마'라고 하는 데에다 한 걸음 더 나아가겠다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라 하는 그런 뜻입니다.

 

부처님이 처음 법을 설한 날을 기념해가지고 이 왓사가 실행이 됐습니다.

그걸 아살라하 달의 보름날에 실행됐다고 그럽니다. 그걸 보통 우리는 '초전법륜경이라 해서 처음 법을 설한 날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여러분들도 지금 스님의 법문을 들을 때 어떻게 법문을 듣고 있습니까? 듣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부처님도 똑같은 법을 설했지만은 '우빠까'라고 하는 분은 부처님의 그 법을 듣기는 했어도 이해를 못했고 그걸 실천하려는 마음을 일으키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다섯 명의 수행자는 그 부처님의 진리를 듣고 이해를 하게 되고, 또 일정한 과위에 이르르게 됐습니다.

 

왜 그런 차이가 날까?

결제를 시작하는 날을 보통 불교에서는 '담마의 날이다'하고 얘기합니다.

불교에서는 3대 행사가 있습니다. 붓다의 날, 담마의 날, 상가의 날.

붓다의 날은 부처님 태어나고 열반하고 성도한 날 깨달음을 이룬 날 이렇게 세 날을 기념하는 날이고, 담마의 날은 처음 법을 설한 날을 기념한 거고, 상가의 날은 많은 대중들 1250명의 대중들이 모여서 상가가 완전히 갖추어져서 많은 곳에 법을 설할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된 날이라고 해서 상가의 날이라고 그렇게 합니다. 어쨌든 붓다, 담마, 상가의 날인데 오늘 같은 날은 담마의 날에 해당이 된단 말입니다.

 

그 담마(Dhamma) 법이라고 하는 것을 어떤 사람은 그걸 이해를 못하게 되고, 어떤 사람은 이해를 하게 되고, 왜 그렇게 될까?

법을 듣는데도 무슨 방법이 있는가 하는 거라. 가끔 여러분들 그러죠. 스님 법문 인터넷에 올려놓으면 들을 때마다 조금 다르게 들리거든. 처음 들을 땐 언제 저런 얘기를 했지? 그다음에 또 들어보면 어, 또 모르는 얘기가 또 들리거든. 거 왜 그렇겠어요? 들을 때마다 마음이 다르기 때문에 그러겠죠.

 

그럼 담마(Dhamma)를 들을 때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들어야 할까?

그걸 불교에서는 항아리에 비유를 합니다. 항아리를 엎어놔 놓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 속으로는 구슬을 아무리 넣으려 해도 넣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항아리가 밑이 안정돼 있지 않고 비스듬하게 돼있는 항아리는 구슬은 넣을 수는 있어도 구슬이 어느 정도 넣으면 무게 때문에 항아리가 기울어져 버리죠. 그럼 안에 있는 것이 홀라당 밖으로 나와 버립니다. 그런데 안정 돼있는 항아리는 구슬을 담아도 완전히 담길 때까지 그 항아리는 무너지지 않는다는 거라. 법을 듣는 조건들을 보통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가끔씩 여러분들도 그럴 겁니다. 법을 들을 때 스님 한번 봤다가, 또 생각도 좀 했다가, 아니면 다른 데로 눈을 돌렸다가, 또 어떨 때는 손을 꼼지락 꼼지락 장난도 했다가 이렇게 법을 들으면 어떻게 돼요? 못 듣습니다, 법은. 스님의 소리를 못 듣는다는 거라. 다른 주위의 것을 신경을 쓰고 마음이 산란하게 돼 있을 때는 그 법을 들을 수가 없다 하는 얘기라. 그런 걸 갖다가 부처님은 뭐라고 비유를 했느냐면 '엎어진 항아리와 같다'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안 들리는거라.

 

그러니까 오늘은 안 들렸는데 인터넷에 올려놨을 때는 어, 들리거든. 그때는 왜 그랬겠어요? 지금 마음은 아니고 그래도 그때는 또 조금 열린 마음으로 듣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그 소리가 또 들리는 거라. 그렇다고 해가지고 또 완전히 들리는 것도 아니라. 그건 두 번째에 해당이 되는 겁니다. 법을 듣기는 듣는데 법을 들을 때는 그냥 듣기만 해야 되는데 보기도 하거든, 스님을.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이중으로 하는 거라. 그러니까 어떻게 되겠어요? 잡생각은 안 하고 그냥 듣기는 듣더라도 완전하게 듣지는 못하는 거라. 들을 때는 듣기만 해야 되는데 보고 듣고 하는 것을 자꾸 번갈아가면서 한다는 거라. 그래서 '비스듬하게 경사진 항아리와 같다'고 합니다.

 

여러분들 여름에 치마입고 다니면서, 치마에 구슬을 이렇게 담았다가 일어나면서 그 치맛자락을 탁 놔버리면 어떻게 돼요? 구슬들이 또르륵 떨어져 버리는 거라. 담았기는 담았는데 그걸 꼭 움켜쥐지는 못한다는 거라.

그래서 법을 들을 때는 동남아시아인들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가장 편한 자세로 앉습니다. 그러고 나서 딱 눈감아 버립니다. 눈 감아 버리고 생각조차도 하지 않고 냄새 맡으려고도 하지 않고 오로지 듣는 귀, 귀만 딱 열어놔 놓고 법문을 듣는다는 거라. 그러니까 시작 부분이나 중간 부분이나 끝부분을 완전하게 들을 수가 있게 되는 거라.

 

여러분들은 초보수행자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걸 다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눈을 감고 법문 들으라 하면 두려운 마음이 생기기도 하고, 이 잘생기지도 않은 스님 얼굴 안 보면 법문을 또 안 듣는 거 같기도 하고 이럴 겁니다. 뭐 어쩔 수 없는 거라. 그리하면 법문은 반드시 흘려 듣게 돼있습니다. 그것을 분명하게 인식들을 하라는 거라.

법문을 그렇게 흘려듣더라도 나중에 병에 걸렸을 때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좋은 약을 구할 수는 있습니다. 즉각적으로 낳게 하지는 못해도 아! 그때 어떤 말을 했지 하고 떠오를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은 이미 병이 번지고 났으니까 한참 동안 고생은 하겠죠. 그래서 되도록이면 법을 들을 때는 듣기만 하도록 해야 됩니다. 생각도 하지 말고, 보지도 말고, 다른 어떤 것도 할려고 하지 말고 들을려고만 해야 됩니다. 그래야 마음이 분산되지를 않습니다.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몰입하지 않으면 시간이 조금 지나면 바로 잊어버립니다. 그렇게 훈련된 마음들은 단기기억은 굉장히 잘합니다. 그런데 딱 10초가 지나고 나면 그거를 딱 잊어버려요. 뭐 누가 숫자판 같은 거를 보여줘 가지고 이 숫자를 한번 외워봐라 할 거 같으면 그 단기적으로는 아주 뛰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나서 그걸 다시 기억해보라 하면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그렇게 보여주는 글자판 중에 외우는 숫자는 적을지 몰라도 그거를 뒤에 오래도록 시간이 흘러도 그 글자를 그대로 기억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왜 그런가 하면 집중하는 힘과 알아차리는 힘과 거기에 대한 알맞은 노력이 같이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그것을 분명하게 인식한다는 거라. 그런 것들을 '잘 훈련된 마음을 가진 자'라고 얘기를 합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여러분들에게 그 모든 것을 다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그리하더라도 법을 듣는 방법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여러분들이 인식을 하도록 해야 됩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아무리 얘기했다 해가지고 모든 제자들이 깨달음에 이르렀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는 거라. 어떤 사람은 이르르고 어떤 사람은 이르지를 못했다는 거라.

그 시발점이 뭐냐 하면 '아리야 사와까(ariyasāvaka)' 바르게 듣느냐 안 듣느냐!

다섯 명의 수행자에게 똑같이 법을 설했는데도 꼰단냐가 처음 깨달음을 이루고, 나머지는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왜? 꼰단냐는 바르게 들었기 때문에! 듣는데만 집중을 하고, 듣는데만 마음을 기울이고, 듣는데만 알아차리게 되고, 이런 과정들이 있었기 때문에 성인의 첫째 과위에 빨리 다른 사람들보다 도달할 수가 있게 되는 겁니다.

 

경전에는 뭐라고 돼있느냐면 '법을 들을 때는 사슴과 같이 하라''듣는 것을 알아차릴 때는 양털을 깎는 사람과 같이 하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사슴이 도망을 칠 때는 아무리 사자나 사나운 짐승들이 공격을 해오더라도 사슴이 도망치는 것은 일정한 패턴을 가지게 돼있습니다. 소리가 들리는 반대쪽으로 반드시 나아갑니다. 물론 전력을 다해서 도망을 치더라도 사나운 맹수에게 잡아먹히기도 합니다. 그렇더라도 사슴이 도망을 칠 때는 그렇게 전심전력을 다해서 도망을 친다는 거라.

법을 들을 때는 그와 같이, 사자가 쫓아온다는 두려움, 사자가 내 코앞에 왔다는 생각들, 또 거기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 이것들을 전부 무시해버리고 오로지 나는 소리가 나지 않는 곳으로 달아난다는 그 일념으로 달아난다는 거라. 그래야 만이 그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거라. 사자라는 동물은 한 10초 정도 전심전력으로 뛰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전심전력으로 뛸 수가 없습니다. 만약 사슴이 10초 이상을 전심전력으로 뛰게 되면 사자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생로병사의 고뇌로부터 벗어날려면 항상 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됩니다. 하나만 열어놔 놓고 그거만 알아차리면서 나아가야만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게끔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담마를 들을 때는 부처님은 '사슴과 같이 하라. 일체 잡념들이나 정신적인 것들, 육체적인 것들로부터 오는 괴로움 그런 것들에 지배당하지 않도록 해라. 들을 때는 듣는 것만 하라'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담마를 수행의 대상으로 하라'하고 얘기합니다.

수행의 대상으로 할 경우에는 '양털 깎는 사람과 같이 하라' 양도 움직이고, 양털 깎는 기계도 움직이고, 그리고 나는 또 손도 바삐 움직여야 됩니다. 자칫 잘못하면 양이 베이게 되고, 털도 예쁘게 안 깍이게 되고, 바른 노력과, 바른 집중과, 바른 알아차림이 없으면 양털을 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깍을 수가 없습니다.

담마를 들을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소리를 듣는 귀와, 귀라고 하는 곳에서 들리는 소리의 파장, 그리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 이 세 가지만 있도록 해야지 나머지는 있도록 하면 안 된다는 거라.

그래서 '법을 들을 때는 양털 깍는 사람과 같이 하라'하는 게 그와 같은 겁니다. 소리는 파장을 통해서 내 귀에 들립니다. 내 마음은 이 귀에 머물고 있어야 되는 것이고, 이 귀를 통해서 들리는 파장, 이것을 수행대상으로 해서 마음으로 알아차리는 것, 이 세 가지만 자꾸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것이 바른 담마를 듣는 방법입니다.

 

오늘은 여러분들이 왓사, 결제를 하는 날입니다.

결제를 하는 날이기 때문에 적어도 앞으로 법을 들을 때 어떻게 들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정도는 이해를 해야 되지 않을까 해서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수행에 대한 것들을 조금 더 자세하게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