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른 사유의 실천 (20090721)
적어도 공부하는 사람들 하고 또 수행 실천하는 사람들은 좀 다르겠죠? 그러겠죠? 그럴 거라고 보고 프린트물을 내주는 겁니다.
저번 시간에는 이 몸에 대한 것들, 절대 깨끗한 것이 아니다, 부정한 것이다 하는 것들을 자꾸 알아차리라 하는 얘기를 했고. 또 감각기관에 대한 것 눈·귀·코 라고 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들 그런 것들이 외부로 향해버릴 것 같으면 악마가 나를 탁 잡아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절대 외부로 향하도록 하지 말아라. 내 몸에서 일어나는 감각기관에 마음을 집중해서 그것을 알아차려나가도록 하라. 그래서 마음이 밖으로 향하는 걸 안으로 돌려라. 그리고 그 감각기관을 알아차릴 때는 감각기관으로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가 없다. 들으면서 보면서 이렇게 할 수가 없으니까 볼 때는 보기만 하고 들을 때는 듣기만 하고 이렇게 하라 하는 얘기를 했고.
또 먹는 음식에 대한 것도 얘기를 했죠! 어떻게 하라고 했어요? 양껏 먹으라고 그랬죠? 그러지는 않았어요? 음식이라는 것은 몸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 그래서 수행하는 사람은 수행하기 위한 도구, 또 사회생활 하는 사람들은 사회생활을 하기 위한 필요한 조건들만 갖추도록 해야 되지 그 먹는 걸 맛있고 맛없고 하는 탐착심을 버려버려라. 그래서 먹을 때는 단지 먹는 것만 알아차리도록 하라. 젓가락질하면 젓가락질 한다고 알아차리고, 음식이 입에 들어오면 입에 들어와서 씹는다고 알아차리고, 이렇게 모든 것들을 알아차리도록 하라.
그것이 저번 주에 한 내용들입니다. 실제 여러분들 그리하고 있죠? 밥 먹을 때 그렇게 알아차리고 있고, 스님 소리 들을 때도 감각기관의 귀를 통해 들어오는 파장을 알아차림 할려고 하지 스님한테 쏠리진 않죠? 그리고 여러분들 몸도 절대 내 것, 나의 것, 이것이 깨끗한 것이라는 생각을 일으키지는 않죠? 그렇게 믿고 합니다 이!
오늘 내용 한번 봅시다.
오늘 내용은 「진리」라고 하는 부분을 얘기하는 겁니다.
'낑 꾸살라 가웨시(kim kusala gavesi)' 그렇게 얘기합니다.
꾸살라를 갖다가 '담마(dhamma)'로 바꿔도 되고,
'낑 삿담마 가웨시(kim saddhamma gavesi)' 그렇게 해도 됩니다.
(수행자 질문)
그 프린트물 내용은 맞는데 빨리어를 거기다 안 써놨으니까 여러분들이 모르지. 그냥 그대로 들으십시오. 오늘 준 프린트물 얘기하는 겁니다.
제목 자체가 바른 사유에 대한 겁니다. 어떤 것이 바른 사유인가, 바른 사유를 실천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부분에 대한 얘기입니다. 여러분들도 인제 그런 일들을 많이 했으니까 이해하기는 좀 수월할 겁니다.
진실을 찾아내는 방법은 어떻게 찾아내야 되겠어요? 응? 어떤 것이 진실이라?
만약에 예를 들어봅시다. 누가 한 사람이 죽었다. ㅇㅇ에 맞아가지고 죽었든 어쨌든 죽었다, 그러면 언론들은 ㅇㅇ에 맞아 죽은 것이 아니고 지가 실족사해가지고 죽었다 그렇게 얘기할 거고, 또 다른 데서는 다르게 얘기합니다.
그리하는데 이 죽은 것이 어떻게 죽었는가 하는 진실을 찾아내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누가 본 사람이 있으면 정확하지. 누가 그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보고 그 사람이 말을 하는 것이 타당하게 논리적인 게 형성이 되면 그것을 보통 진실이라고 단정을 합니다. 그래서 어떤 방식으로 해가 이 사람이 죽은 걸 내가 봤다. 물론 그걸 또 부정하는 사람도 있겠지. 있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해서 진실을 판명을 합니다.
쉽게 말하면 진실을 찾아내는 방법은 실제적으로 그 죽는 것들을 봤을 때 진실을 찾아내는 겁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내가 봤을 때가 해당이 됩니다. 그걸 다른 사람이 봤을 때는 그것도 한 다리를 건너기 때문에 완전하다고는 얘기를 못하게 됩니다. 그리하든 어쨌든 실제적으로 내가 그것을 보고 체험하고 알았을 때 그것만이 진실이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것들입니다.
과연 이게 일상적인 수행 같은데도 해당이 되는가? 하는 것이 지금 이 게송입니다.
부처님과 동시대에 살았던 종교지도자 중에 '산자야'라고 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아주 유명한 종교지도자였습니다. 불교를 제외한 큰 신흥종교 집단이 여섯 개로 대부분 분류를 합니다. 그중에서 가장 컸던 종교집단 중에 하나로 보여집니다. 물론 세월이 지나면서 자이나교나 이런 데에 추월당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굉장히 큰 집단이었고, 논쟁이 붙었을 때 산자야를 이길 자가 아무도 없었어요.
예를 들어봅시다. 누군가가 와서 부처님에게 물어봅니다. “죽고 나서의 다음 세상이 존재합니까, 아닙니까? 하고 물어봤다. 그럼 어떤 스승은 '존재한다'고도 얘기할 거고, 어떤 사람은 '거 다 필요 없는 거다 죽고 나면 끝이다.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얘기하기도 할 거고, 또 어떤 사람들은 '아니다. 신이란 게 있어가지고 죽고 나서 그 사람 데려갔다.' 그렇게도 얘기할 거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얘기를 할 겁니다. 안 그러면 '그 사람이 그냥 신이 돼가지고 다음 세상으로 갔다.' 이렇게 얘기하기도 하고, 각각의 견해에 따라 이렇게 파벌이 나눠져있습니다.
이 산자야는 어떤 파벌이냐 하면 '불가지론' 옛날 서양의 그리스에 그런 '불가지론' 이란 사상이 있었습니다. 딱 부러지게 '이것이다' 하고 얘기하지 않는 겁니다. 그게 유럽 서양 철학에서 발전된 게 뭡니까? '궤변론자'들이죠. 우리가 봤을 때는 궤변론자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는 거지.
이 산자야가 그런 거지. 허무주의자였거든. 그러니까 누가 “죽고 나서 다음 세상이 있습니까?” 물어보면 스승이 뭐라고 대답하느냐면 “내가 죽고 나서 다음 세상이 있다고 얘기를 할 수가 없고, 있다고도 말을 못하고, 없다고도 말을 못하고, 그다음 세상이 또 다른 별도의 것이 있다고도 얘기를 못하고” 이런 식으로 긍정도 아니고 부정도 아니고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왜 이런 논리들을 폈느냐 하면 실제 우리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하는 감각기관을 통해서 아는 것들은 실제로 보여지는 거기 때문에 부정을 못합니다. 누가 죽었다. 내가 그걸 직접 봤다 본 사람이 있을 거 같으면 반론을 제기하지를 못하는 거라. 그런데 본 사람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하느냐? 각각의 반론들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이 산자야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내가 직접 보고 듣고 냄새 맡고 하는 이런 것들은 뭔가를 분명하게 얘기해 줄 수 있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들, "신이 있는가 없는가? 누가 신을 본 사람이 있어? 최초에 이 우주가 어떻게 시작됐는가? 누가 태초에 가본 사람이 있어? 죽고 나서 다음 세상이 있습니까? 죽고 나서 돌아와 본 사람 있어? 그걸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하는 거라.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그게 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없다고도 하고 이렇게 얘기하는데 내가 보기에 그거 아니다는 거라. 있다고도 얘기 못하는 거고 없다고도 말 못하는 거고 그걸 딱 부러지게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라는 거라. 이런 주의였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종교가 하고 붙어도 산자야가 질 수가 없는 거라. 그게 문제가 뭐냐하면 일견에는 보면 굉장히 겸손한 것처럼 보입니다. '내가 뭐 잘났다고 그걸 내 주장을 내세우고 그것만이 진실이다 하고 얘기를 할 것이냐' 이렇게 보여지는 거라!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모여듭니다. 대표적인 게 여러분들도 알고 있는 사리불과 목련존자도 그 산자야의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산자야 밑에 모였지만은 실제적인 이익이 없는 거라. 예를 들어서 '사후 죽고 나서 다음 세상이 있다' 하고 가르치는 스승 같은 경우에는 다음 세상이 있으니까 내가 조심하기라도 하는데, 내가 더 열심히 살게 되고 또 바른 것들을 할려고 하고, 어쨌든 이런 이익이 있고. '다음 세상이 없다' 그럴 거 같으면 다음 세상이 없으니까 내가 지금 뭐 어떻게 살겠다 하는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이런 이익들도 있고 그렇단 말이라. 그런데 이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이러니까 거기 모여 있는 사람들은 실제적으론 이익이 없는 거라. 그래서 끝없이 사유하고 끝없이 추리하고 하는 거라.
여러분들도 그걸 해봤을 거라. 사람을 갖다가 '뭔가 저 놈이 도둑질을 한 것 같은데' 하고 의심을 할 경우에, 실제로 내가 그걸 안 봤는데도 어쨌든 저 놈이 들어오고 나서 이 방에 있는 뭐가 없어졌으니까 저 놈을 의심하거든요. 끊임없이 의심을 하며 추리를 합니다. 그거 얼마나 피곤한 일입니까? 굉장히 피곤하거든. 그게 밝혀지기 전까지는 실제적인 이익도 없으면서, 이거는 밝혀질 수 있는 부분이 아니거든. 단지 다른 종교지도자들은 그거를 단정해가지고 얘길 하는 것뿐이라. 그러면 이 산자야 밑에 있는 사람들은 추리는 굉장히 발달해가지고 어디에도 논쟁에서 지지는 않는데 굉장히 피곤한 거라. 이익도 없이. 그러니까 모든 것은 생각으로 모든 것들을 만들어나가는 형태들을 띱니다.
그런데 이걸 다른 종교지도자들은 이걸 부수어야 되겠다 하고 생각을 합니다. 산자야가 하고 있는 것은 '불확정성'이거든. '어떤 것도 확정지을 수 없다'하는 그런 논리를 펴고 있거든. 그 세력에 맞서기 위해서 두 개의 집단이 등장을 합니다. 그게 뭐냐면 지금 현재의 자이나교, 자이나교가 등장을 하고, 그다음에 불교가 등장을 합니다.
자이나교는 이 불확정성이란 논리를 어떻게 반박을 해가지고 자기들 나름대로의 체계를 세우느냐면 '가정법'을 씁니다. 불확정성이라고 하더라도 가정을 하면 '만약에 신이 있다고 가정을 하고 하면 요렇게 요렇게 될 것이다.' 가정법을 쓰는 거라. 그러니까 이 논리에 맞설 수가 있는 거라. 아무리 불확정성이라고 하더라도 가정을 하는 데는 대책이 없는 거라.
부처님이 봤을 때는 그것도 뭔가 좀 안 맞거든. 가정을 한다는 것이. 신이 있다고 가정을 하면, 사후세계가 있다고 가정을 하면, 태초에 시작하는 것이 뭔가 있다고 가정을 하면, 이렇게 전개를 하는 것은 뭔가가 진리에는 맞지 않는다는 거라. 왜? 진리라고 하는 것은 가정해가지고 될 것은 아니라는 거라. '이 사람이 죽은 걸 누군가 본 사람이 있다고 가정을 하고 단정을 내린다.' 이게 맞겠느냐는 거라. 그 가정법은 그러면 틀릴 수도 있는 부분은 아니냐는 거라. 부처님이 봤을 때는 그거는 또 아니라는 거라.
종교라고 하는 것은 가정으로 주장을 해야 될 것이 아니고, 그리고 주의 주장이라고 하는 것은 결정적이어야 된다는 거라. 변하지 않는 것이어야 만이 그것을 진실하다고 얘기하는 것이지 여기선 통용 되는데 저기선 통용이 안 된다고 할 거 같으면 그것은 아니라는 거라. 틀렸다는 거라. 부처님이 보기에는 그렇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내세운 논리가 뭐냐면 '불확정성이라고 하는 것 이것 자체도 하나의 논리지 않느냐' 모든 논리를 부정하고 회의론적으로 봤는데 그렇게 하는 그것도 하나의 논리고 하나의 주의주장이라는 거라. 부처님이 봤을 때는.
여러분들도 그런 얘기를 알겁니다. '예외 없는 법칙이 없다.' 이게 논리적으로 맞는 얘기 같습니까? 예외 없는 법칙이 없다고 할 거 같으면 어떤 예외가 있다는 얘기거든. 그럼 예외가 있으면 그 법칙은 성립이 안 돼야 되는 거라. 부처님 보기엔 그렇다는 거라. 법칙은 항상 동일해야 되는데 예외가 있을 거 같으면 그걸 어떻게 법칙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냐는 거라. 그래서 이거는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고 하는 그 말 자체가 이미 말의 장난이지 그것은 진실한 것들이 아니다 하는 거라.
부처님이 내세운 거는 바로 그런 거라. 이 산자야의 논리는 바로 그와 마찬가지다. 그리고 진리라고 하는 것은 확정적인 것이지 정부합이 같이 된다고 할 거 같으면 그게 진리겠느냐는 거라.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고 황희 정승같이 니도 맞고 니도 맞다, 이런 진리는 없다는 거라. 부처님이 봤을 때는. 진리라는 것은 그런 것은 아니다는 거라. 그렇게 부처님이 이 논리를 타파해 나갑니다. 실제적으로 그게 맞는 얘깁니다.
어쨌든 그런데 이 산자야 밑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모여 있었는데 사리불과 목련존자도 거기서 배웠겠죠. 그래서 이런 논리주장을 다 배웠습니다. 이건 어느 정도 배우고 나면 더 이상 배울 게 없습니다. 그런데 사리불과 목련존자가 거기서 안주를 하고 있을 거 같으면 관계가 없는데 안주를 못하거든. 이건 도저히 아니다. 내가 산자야 밑에서 공부를 했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깨달음에 이른 것도 아니고 내가 욕심이 줄어든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이익이 없다는 거라. 그래서 이건 아니다 떨치고 일어나버리는 거라.
일어나서 둘이서 헤어져가지고 각자 그런 길을 찾으면 알려주기로 하고 가다가, 사리불 존자가 만난 분이 앗사지 존자입니다. 스님들이 탁발을 해가지고 공양을 하거든. 앗사지 존자가 바리때에 탁발을 한 걸 음식을 받아가지고 걸어가는 모습이 너무나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거라. 자기 스승 산자야 하고 비교가 안 되는 거라.
그래서 이 앗사지 존자한테 가서 물어봅니다.
“당신은 어떤 진리를 따라갑니까? 당신의 스승은 누구십니까?”
앗사지 존자가 얘기를 안 합니다. “난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래도 한마디만 가르쳐주십시오.”
뭐라고 얘기했을 거 같습니까?
너 같으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워서 알았다. 그리고 깨달음을 이루었다. 그럴 것 같으면 뭐라고 한마디 얘기할 것 같노? (수행자 대답)
"어떤 일이 일어나는 데는 반드시 원인이 있습니다. 내 스승 부처님은 그렇게 그 원인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 때는 반드시 뭔가 원인이 있어서 일어나는 것이지 지 혼자서 일어나는 법은 없다는 거라. 그 한마디를 딱 가르쳐줍니다.
그때 사리불 존자가 '아! 이거구나. 이것이 진리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거기에서 눈을 탁 뜹니다. 반드시 어떤 원인이 있어가지고 뭔가가 일어난다는 거라. 원인 없이 일어나는 것은 없다는 거라. 원인이 있어서 일어난다는 거라. 내가 말을 하는 것도 말하고자 하는 의도라는 원인이 있어가지고 말을 하게끔 되고, 내가 걸어갈 때도 걸어가려는 마음이 있어야 걸어가게 되는 것이지 걸어갈려는 마음이 없는데 걸어가지지는 않는다는 거라. 반드시 일어날 때는 뭔가가 있어서 일어난다는 거라. 저 사람이 죽었을 때는 누군가가 죽인 원인이 있어가지고 죽음을 당한거지 그냥 지 혼자서 가만히 죽는 법이 없다는 거라. 아무 원인이 없이 그냥 턱 죽을 수는 없지 않느냐는 거라.
“한마디 더 해주십시오.”
그 얘길 듣고 나서는 아! 이게 진짜 같거든. 그래서 “한마디만 더 해주십시오.”
"그 원인이 소멸해버리면 깨달음입니다."
원인이 소멸해버리면 깨달음입니다.
내가 그 원인을 갖다가 저 죽은 사람이 뭐 때문에 죽었는지 확인해가지고 알 거 같으면 그걸 안다는 거라. 내가 그 원인을 분명하게 봤다, 체험했다는 거라. 체험해버리고 나면 그건 변경할 수 없다는 거라. 틀림없이 저 사람은 이렇게 이 원인으로 인해서 죽었다는 거라. 변경할 수 없는 것, 깨달음.
"원인이 소멸해버리면 그것을 열반이라고 우리 부처님은 가르칩니다."
사리불 존자가 첫 번째 게송을 듣고는 수다원에 이르는데, 이 두 번째 게송을 듣고는 그 이상으로 올라가지를 못했어.
그래서 '아! 이거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왜 못 올라갔겠습니까? 뭔가 원인이 있어야만이 뭔가가 일어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추론을 해가지고 내가 알겠는데, 그 원인이 소멸한 거는 내가 직접 확인하고 내가 체험한 게 아니면 모르는 거라. 그 사람이 죽었다, 죽은 것은 어떤 원인으로 인해서 그렇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 원인이 뭔가 하고 아는 것은 내가 직접 봐야 만이 그 원인을 아는 것이지 안 보고 그 원인을 추론할 수는 없는 거거든.
그래서 수다원 이상은 자기가 스스로 수행해서 체험하지 않으면 올라가지 못하는 거라. 그러니까 아무리 열반에 대해서, 원인이 소멸하는 것들에 대해서 얘길 하더라도 자기가 수행을 안 한거니까 그 이상 못 올라가는 거라. 그러니까 '아! 이건 아니다.' 사리불은 굉장히 뛰어난 분이기 때문에 '내가 그분 밑에 가서 직접 수행해야 되겠다.' 해가지고 찾으러 갑니다.
그런데 그 기쁜 소식을 혼자 알 수 있습니까? 친구 목련존자에게 얘기를 해가지고 목련존자도 같이 갑니다. 목련존자에게도 그 얘기를 하니까 목련존자도 금방 수다원이 됐거든.
두 사람이 가만히 보니까 아! 이 좋은 법을 갖다가 우리 스승 산자야 한테도 얘기해서 산자야도 부처님한테 데려가야 되겠다 해서 산자야한테 가서 얘기를 합니다. 안 간대, 산자야는. 산자야가 부처님 보다도 훨씬 나이가 많거든요.
“내가 거기 왜 가냐? 젊은 스님한테. 너희들이나 갈라면 가라.”
“아닙니다. 스승님! 이렇게 뛰어난 자, 붓다가 이 세상에 출현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 붓다라는 용어를 들은 것만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거기에 귀의하고 법을 따릅니다. 스승님도 예외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갑시다.” 그런데도 안 간다는 거라. 그러면서 그럽니다.
“이 세상에 현명한 사람이 많냐, 어리석은 사람이 많냐?”
어떤 사람이 많을 거 같애? 어리석은 사람이 많을 거 같지? 너도 좀 어리석지? 가끔씩 어리석은 행동들을 하긴 할 거라. 사실 어리석은 자가 많은 거라. 현명한 사람보다.
“니 말이 그게 진짜라고 할 것 같으면 현명한 사람들은 부처님한테 갈 것이고, 어리석은 사람은 나를 따라올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어리석은 사람들 데리고 놀란다.”
그러니까 이 두 제자가 자기를 따랐던 500명에게 물어봅니다.
“이런 부처님이 계신데 이렇게 설하신다. "원인에 의해서 모든 것이 일어나고 원인이 사라지면 깨달음에 이른다" 하고 법을 설하고 있다. 갈래? 말래?” 산자야 말이 맞아. 반은 따라가고 반은 남아. 그 반은 따라갑니다. 250명이.
그런데 산자야가 가만히 보니까 화가 치미는 거라. 500명이 있던 사람이 반이 딱 없어져버리면 굉장히 썰렁합니다. 아! 이거 내가 쌔가 빠지게 가르쳤는데 저리 싹 빠지고 나가니까 분하고 원통한 거라. 피를 토하게 됩니다. 그 위대한 스승이. 경전에 피를 토해가 죽었다고 그렇게 나와 있는데, 죽은 사람을 나도 확인을 안 해봐서 모르겠는데 어쨌든 굉장히 심한 좌절감에 빠지고 그로 인해서 산자야 교단이 거의 쇠퇴해서 없어지다시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될까? 산자야 교단이 왜 그렇게 됐을까? 산자야는 실제로 체험해 보는 건 아니었죠! 논리적인 개념만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의 견해만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얘기도 못하는 거고, 이렇게 해가지고 모든 것들을 피해가기는 피해갔을지 몰라도 그것이 이익이 된 것은 아니라는 거라.
여러분들도 가끔씩 그런 것들이 있을 겁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견해를 가지고 있죠. '이것은 이런 것이다. 저것은 저런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사람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단 말입니다. 그럼 이게 충돌을 합니다. 견해만 가지고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싸우면 진짜 치열하게 싸웁니다. 거기에 어떤 수행자가 왔다. 그럴 거 같으면 그 모습을 보고 '참 쓸데없는 짓 하고 있다'고 그럽니다.
얼마 전에도 철스님의 돈오돈수 돈오점수 해가지고 한참 싸웠습니다. 그때 어느 스님 한 분이 나와가지고 “당신들은 참선이라도 해본 사람들이냐? 참선해본 사람이 여기서 이렇게 싸우고 있느냐” 하고 물어봅니다. 수행도 안 해본 사람들이 그것이 돈오돈수다 돈오점수다, 쉽게 말하면 깨달음은 점진적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아니면 단박에 이뤄지는 것이다. 이걸 가지고 싸우고 있는 거라. 그러니까 수행하는 사람이 봤을 때는 한심한 거지. 견해라는 거는 그런 겁니다.
생각이라고 하는 것, 견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자기가 봤을 때는 올바른 게 있고 올바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또 자기가 납득이 가는 게 있고 납득이 가지 않는 게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견해나 생각은 이렇게 네 가지로 나눠집니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도 자기하고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는 얘기를 못하는 거죠. 같은 견해일 거 같으면 똑같이 납득이 가야 되고, 똑같이 올바르면 올바른 것이 돼야 되는데 그렇지 않다는 거라. 어떤 견해든지 간에 항상 이 네 가지를 가지고 있게끔 된다는 거라. 논리적인 게. 그게 생각이나 견해가 가진 단점이라.
부처님은 그걸 분명하게 아시는 거라. 그래서 견해라고 하는 것은 내세울만한 것이 아니다. 차라리 그런 견해를 확립할 시간이면 가서 수행해라. 하나라도 더 네가 몸으로 그게 맞는지 안 맞는지 실천하라는 거라. 그게 오히려 훨씬 이익이라는 거라.
마찬가지로 사리불과 목련존자가 앗사지가 하는 얘기를 듣고 탁 수다원에 이르렀지만 그 이상 가지 못한 것은, 그건 또 나름대로의 견해이고 생각이라는 거라. 그러니까 그 이상 나아가지를 못하는 거라. 그래가지고 끊임없이 노력을 합니다.
목련존자 같은 경우는 '혼침'에 대해서 부처님이 얘기하는 것을 듣고 깨달음에 이르게 되고, 사리불 존자는 그 뒤 보름 지나고 나서 허무주의적인 견해 '아! 참 허무하다. 죽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하는 허무주의의 견해에 대한 얘기를 듣다가 탁 깨침을 이루게 됩니다. 어쨌든 끊임없이 그것을 수행한 결과로써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는 거죠.
부처님이 말한 가르침이라는 것은 견해를 확립하는 것도 물론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뭡니까? 실천하는 것! 몸소 내가 행하는 것들. 진리는 사실인 것이지 견해는 아니다! 그래서 어떤 견해를 확립하는 것들을 장려하지 않고 어떻게 실천하는가 하는 것을 장려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진리라고 하는 것은 조금 전에 뭐라 그랬어요? 사실이라는 거라.
변경될 수 없는 거라는 거라. 누구에게든지 그거는 똑같아야 되는 것이지 나에게만 통용되는 것은 그건 진리라고 볼 수 없는 거라. 그걸 진리라고 한다는 거라.
그럼 견해를 가지고 있는 다른 사람들은 그 진리를 맞다, 어떤 사람들은 틀렸다 하고 얘기한다는 거라. 그렇지 않다는 거라. 진리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거라. 거짓은 거짓인 것이고, 참은 참인 것이지 참이 거짓이 될 수는 없다는 거라. 또 거짓이 참이 될 수는 없는 거라.. 만약에 그렇게 될 거라고 한다면 그거는 그 진리를 모르는 사람이 하는 얘기라는 거라.
그게 지금 여러분들 프린트물에 적어놓은 게송 부분입니다.
왜 거짓을 참인 것으로 알게 되고 참인 걸 거짓으로 알게 되느냐?
이렇게 생각을 한번 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수행하기 위해서 출가를 했다. 그러면 선원에서만 열심히 수행을 합니다. 선원에 있으면 수행하기 위해서 모든 게 다 갖춰져 있습니다. 밥 때 되면 밥 주지, 누가 나에게 시비 거는 사람도 없지,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시키는 것도 없지, 그러니까 뭐 정신적으로 혼란할 이유도 없고 오로지 내가 수행만 하면 됩니다. 그러다 보면 어떤 신비한 능력도 가지게 될 거고 설혹 신비한 능력을 가지지 못하면 또 어때? 전혀 화도 일어나지 않고 욕심도 일어나지 않고 이렇게 돼버려. 그럼 자기가 착각을 하게 돼. ‘어! 내가 깨달은 거 아닌가?’
부처님 당시 때도 그런 스님들이 있었어요. 그 사실을 부처님이 아신 거라. 저놈들이 깨닫지도 못했으면서 지가 깨달았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거라. 그 스님들이 부처님 뵈러 온다고 하니까 부처님이 아난다에게 시켜가지고 저 스님들을 내한테 바로 오게 하지 말고 저쪽 공동묘지를 거쳐가지고 거기서 하루나 경행을 하다가 나한테 오라고 해라. 그렇게 시킨 거라.
밤이 되니까 어떻게 돼요? 공동묘지가 굉장히 으스스하고 무서워지는 거라. 그러니까 거기 있지 못하고 빨리 지나쳐가지고 부처님한테 옵니다. 부처님이 되게 혼을 냅니다. 너희들은 깨달았다고 하던 놈들인데 무서움이 왜 일어나느냐? 그리고 인제 막 죽은 사람에게 더러운 생각이 왜 일어나느냐, 거기에 대해서 욕정이 왜 일어나느냐? 왜 아닌 걸 긴 거라고 자꾸 착각을 하느냐는 거라.
어느 뛰어난 스님 한 분이 “이것만이 진리에 대한 길이다” 하고 탁 얘기를 한다. 우루루 사람들이 몰려가겠지. 그런데 그렇게 몰려가는 것은 좋아.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이 그걸 실천해가지고 자기도 그것이 진리다 하고 탁 확립이 돼야 되는데 확립이 안 됐을 경우는 어떻게 하느냐는 거라. 그럼 또 이 스님이 “이게 또 진리다”하고 얘기할 거 같으면 여기 있던 사람들이 또 우루루 이리 몰려올 것이 아니냐는 거라. “안 되겠다. 내가 저번에 얘기했던 건 틀린 것이다”' 진리라는 것은 이렇게 변경될 수가 없는 부분이라는 거라.
여러분들이 어떨 때 마음이 동해가지고 “아! 기도하는 것이 최고다. 그거하면 어쨌든 소원성취 되고 이리한다.” 해서 기도하다가, 또 어떤 스님이 “에이! 기도하지 말고 참선해. 참선이 최고야, 그게 수승한 거야” 그러면 또 참선한다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에이! 이거 틀렸어” 하고 참선하다가 또 “주력이 최고야” 하면 뭐 또 주력을 하고. 이렇게 바뀌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거라.
어떠한 자극에도 동요됨이 없이 마음의 상태가 한결같아야 만이 그런 자를 '수행자'라고 얘기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는 자'라고 얘기를 한다. 그거는 견해로써 확립할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거라. 오로지 내가 지금 몸으로 체험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인해서 가능한 거라.
어떤 실천들이 있겠어요? 거기에 적어놨습니다. 부록 부분에 나와 있죠!
'삼마 상깝빠(sammā saṅkappa, 正思惟)'라고 돼있고 '밋차 상깝빠(micchā saṅkappa)'라고 하는 부분입니다.
탐·진·치. 탐심을, 욕망을 여의는 것, 벗어나는 것들에 대한 사유.
화냄, 성냄이라고 하는 분노를 벗어나는 여의는 것에 대한 사유.
그리고 남을 괴롭히지 않을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사유하는 것.
이런 것들이 바른 사유라 하는 거라. 생각을 하더라도 이렇게 돼야 되는 것이지 내가 남을 해꼬지 할려고 하고 욕심을 더 일으키게 하고 또 화를 더 내게 하는 그런 생각은 바른 생각이 아니라는 거라. 또 바른 사유가 될 수도 없고, 그것은 진리에 다가가지 못하는 것이라 하는 그런 겁니다.
그러면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들은 어떤 것일까?
사유, 생각하는 것들을 실행할 때의 포인트가 있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생각하고 나면 어떻게 됩니까? 말을 하든지 행동을 하든지 하게 됩니다. 그리고 생각하는 것도 있고 그래서 몸으로 짓는 것, 입으로 짓는 것, 마음으로 짓는 것, 이 세 가지가 통상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고, 그것이 또 업을 짓는 것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어쨌든 기준점을 뭐로 잡느냐 하면은 도움이 되는가?
내가 이걸 하므로 인해서, 이렇게 생각하므로 인해서, 이렇게 말하므로 인해서, 이렇게 행위하므로 인해서 나에게 도움이 되는가? 또 내가 행복해 지는가?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바르게 살아가지는가? 만약에 다음 세상이 있다고 할 거 같으면 내가 그 좋은 세상에 살게 될 것인가?
이런 것이 기준점이 됩니다. 쉽게 얘기하면,
나에게 이익이 있느냐? 이런 생각을 하므로 인해서, 이런 말을 하고 이런 행동을 하므로 인해서 나에게 이익이 있는가?
두 번째 다른 사람에게도 이익이 있는가? 다른 사람도 행복하게 하고, 다른 사람도 이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게끔 하는가?
마지막 세 번째는 나와 다른 사람이 같이 이익이 되는가?
만약에 불이 났다고 해보자. 저기에 불이 났어. 어떻게 해야 돼?
바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면 불을 끄는 거라. 불을 끄는 것은 뭡니까? 나와 남에게 이익이 있도록 하는 겁니다. 그건 세 번째에 해당이 되는 겁니다. 불을 끄다 보니까 안에 사람이 있어. 그럼 그 사람을 구출해가지고 나오는 거라. 그건 다른 사람에게 이익이 있는 거라. 그런데 구출해 나오는데 내가 몸을 다쳐버렸어. 그럼 어떻게 돼요? 나에게는 이익이 없는 거죠? 그러면 그렇게 해선 안 되겠지. 만약에 들어가서 구출을 하는데 내가 죽을 상황이다 할 것 같으면 구출하러 들어가면 안 돼. 나에게는 이익이 없기 때문에. 나에게도 이익이 있어야 한다고 분명히 얘기했거든.
바른 사유, 바른말, 바른 행동이라고 하는 것은 나에게도 이익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익이 있고,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도 같이 이익이 있어야 되는데 나에게 이익이 없으면 어떻게 돼요? 그러면 그건 하면 안 되는 거라! 이해하겠습니까? 만약에 그렇게 했는데 내가 다치지도 않고 물론 안 다치게끔 보호장비들을 잘 갖추고 물을 뒤집어쓰든지 아니면 두꺼운 옷을 입든지 해가지고 내가 다치지 않게끔 해가지고 그 사람을 구출하고 불을 껐다 할 거 같으면 공히 다 세 가지에 해당이 되겠지.
실천이 수반되지 않는 사유, 철학, 고찰 이런 것들은 부처님이 보기에는 그건 이론일 뿐이라는 거라. 전혀 이익이 없다는 거라.
실제적으로 내가 실천이 되는 것, 나에게도 이익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익이 있고, 나와 남에게 같이 이익이 있는 것들이 돼야 만이 그것이 바른 것이다.
여러분들 같은 경우에는 지금 수행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것들이 돼야 되겠습니까? 어떤 것이 여러분들에게도 이익이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익이 있고, 또 나와 남에게 같이 이익이 있는 것들이겠어요? 좋은 행위겠지.
계율을 지키는 것, 좋은 행위야 아니야?
쉽게 예를 들어보자. 먹고 싶은 생선이 있는데 펄쩍펄쩍 뛰는 살아있는 것, 그거 탁 잡아가지고 내가 먹는 게 바람직한 거야, 아니면 그거 안 먹는 게 바람직한 거야?
아까 실천적인 측면에서 나에게는 이익이 있을지 몰라. 그런데 그 물고기에는 이익이 있어, 없어? 없지. 그럼 그거 해야 돼, 말아야 돼? 그렇게는 먹지 말아야 되겠지? 앞으로 그렇게 먹지마 이. 그건 바른 것이 아니다는 거라. 부처님이 봤을 때.
내가 남에게 거짓말 해가지고, 엄마한테 거짓말 해가지고 “엄마 나 이번에 돈이 오십만원 필요한데 좀 줘” 나한테는 이익이 있는데 엄마한테는 어떻게 돼? 엄마한테는 그게 바른 거라고 할 거 같으면 준 것에 대해서 손해나는 것은 아니야. 그데 니가 그 돈을 줬는데 니가 얘기한 걸 하는 게 아니고 저 술 먹는데 써버렸다. 그랬으면 엄마 입장에서는 손해난 거야. 그럼 그거 해야 돼, 말아야 돼? 하지마 이.
이렇게 바른 행위는 어떻게 해야 된다고? 나쁜 행위는 하지 말아야 돼는 거라. 즉각적으로 하지 말아야 돼. 느그 엄마에게 “엄마 사랑해요” 할 거 같으면 어떻게 돼? 니도 마음이 푸근하고 엄마도 “아이고 내 새끼” 하면서 해주겠지. 엄마도 마음이 푸근해져가지고 이익이 있는 거라. 그럼 그건 어떻게 해야 돼? 즉각적으로 해야 되는 거라.
좋은 행위는 즉각적으로 실천하는 거고, 나쁜 행위는 즉각적으로 그만 두어야 되는 거라. 그게 부처님이 말하는 첫 번째 방법이라.
그다음 두 번째는 뭐겠어요? 어떤 것이 이익이 있는 것들이겠어요?
수행하는 것! 수행할 동안에는 어떻게 돼? 잡다한 욕심도 안 부리고, 화도 안 일으키고, 남을 크게 해칠려는 생각도 없고 오로지 대상에 대해서 알아차림만 쭉 해나간다는 말이라. 그러면 그건 좋은 행위야, 나쁜 행위야?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 즉각적으로 해야 되는 거라. 항상 어떤 행위를 하든지, 말을 하든지, 행동을 하든지, 생각을 하든지 그것을 알아차리도록 하라는 거라. 그것은 좋은 결과를 낳고 좋은 행위이고 이익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럼 그건 즉각적으로 하라는 거라.
수행 안 하면 어떻게 돼? 욕망에 찌들고, 화도 일으키고, 그리고 해치고자 하는 마음들도 일으키게 되고, 그런 것들은 하지마라야 되는 거라. 그러니까 알아차림 없이 살아갈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라. 이런 것들을 정립을 자꾸 해나가야 된다는 거라.
그걸 정립을 못하면 어떻게 된다고? 산자야 같이 돼버리는 거라. 견해만 가지고 있어서는, 자기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왜 피를 토하고 죽어. 왜 그렇게 되는 거라? 실천되지 않는 것은 이렇게 이익이 없는 것들입니다. 알겠습니까?
여러분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계·정·혜를 확립을 자꾸 해야 됩니다. 지켜야 될 것들은 지키고, 또 수행해야 될 것은 반드시 수행하고, 그리고 바르게 내가 어리석지 않게끔 살아가는 것들 이런 것들을 자꾸 확립을 해나가야 됩니다.
그게 부처님이 얘기한 진실, 진리를 찾는 방법이라는 얘깁니다. 진실되게 살아가는 방법. 남하고 견해가지고 싸움박질 해가지고는 그것가지고는 절대 이런 바른 길을 걸어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게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알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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